HB지구-152243
승리를 확정 지을 공이 날아오던 순간이 아니라 그를 겹겹이 둘러싼 팀원들 너머로 관람석에서 뛰어오는 로버트를 발견한 지금이, 제이크에겐 오늘 경기의 하이라이트였다. 팀원들이 알았다면 야유했겠지만 뭐 어떠랴. 그들을 뿌리치고 나가면서 이미 받은 원성인데. 팀원들의 벽을 헤치고 나오자, 로버트가 바로 코 앞에 다다랐다. 자칫하면 충돌사고가 날 뻔한 것을 로버트를 훌쩍 안아 들고 한 바퀴 돌아 모면했다. 로버트가 놀란 듯 짧은 비명을 지르며 목을 감싸안았다. 제이크가 얼떨결에 로버트에게 고백하고 어색한 일주일을 보낸 뒤 맞는 극적인 재회였다. 어찌나, 짜릿한지. 마지막 점수를 냈을 때의 기분도 지금에 비할 바가 못 되었다. 회전을 멈추자 상기된 로버트의 얼굴이 그를 내려다보았다. 동그란 머리가 해를 가려준 덕에 눈을 찌푸리지 않아도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었다. 이채가 어린 그 파란 눈. 그 눈을, 제이크는 남은 평생 잊지 못했다. 잠깐의 눈 맞춤 뒤 깜짝선물처럼 다가온 입술과, 뺨에 닿은 동그란 코끝까지도.
서툰 입술은 얼어버린 듯 꾸욱 맞붙어 움직이질 않았다. 제이크는 무작정 입술만 들이대고 본 소꿉친구가 자신이 이끌어주길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알았다. 제이크에게도 이 순간이 첫 뽀뽀(혹은 키스?)인 것을 모르니까. 제이크는 로버트가 자신이 능숙하다고 생각하길 바라는 동시에, 너만을 위해 소중히 간직해온 입술이란 걸 알아줬으면 하는 유치한 갈등에 휩싸였다. 갈등은 심장 박동이 세차게 한 번 울릴 동안 스쳐 지나갔다. 제이크의 본능은 언제나 머리보다 빨랐다. 미처 결론을 내리기도 전에 제이크의 입술이 로버트의 매끄럽고 작은 아랫입술을 촉, 물었다 떨어졌다. 틈이 많이 벌어지지 않은 새에 메아리처럼 로버트의 입술이 제이크의 아랫입술을 물었다 멀어졌다. 실수로 이까지 써버린 것 같았지만 그것마저 귀여웠다. 제이크가 웃음을 참는 걸 알았는지 로버트가 이씨, 이제 내려줘! 귀에 불평했다. 그제야 아직 로버트를 들고 있단 걸 깨달은 제이크가 땅에 내려주자, 그동안 있는지도 몰랐던 소음이 밀려들었다. 팀원들이 내지르는 이상한 소리에 도망이라도 갈까 로버트의 팔을 꼭 붙잡은 제이크가 벌게진 귀에 입술을 디밀었다.
"그래서?" 바로 귓가를 간지럽게 타고 넘어가는 제이크의 목소리에 로버트가 어깨를 움츠렸다.
"뭐가 그래서야..."
"이 아기 같은 뽀뽀는 무슨 뜻인데?"
"또 놀리지 또!" 로버트가 분해서 발을 쿵 구르는 게 잡고 있는 팔을 타고 느껴졌다. 정말 애도 아니고. 올라가는 입꼬리를 주체하지 못한 제이크가 다시 물었다.
"이제부터 네가 내 거라는 뜻 맞아?"
"내가 무슨 물건도 아니고..." 궁시렁궁시렁 웅얼거리는 목소리가 왜 이렇게 듣기 좋은지. 로버트를 덥석 끌어안은 제이크가 굴하지 않고 물었다.
"맞아, 아니야?"
"아, 맞아. 맞으니까 놔줘. 숨 막혀!"
로버트는 말과는 다르게 제이크의 등에 슬금슬금 팔을 감았다. 제이크의 귀에 십여 년 간의 짝사랑에 마침표가 찍히는 소리가 팡파르처럼 울렸다.
"내 밥. 내 로버트."
제이크가 다시 한번 로버트를 번쩍 안아 한 바퀴 돌았다. 이번엔 예상한 듯, 키득거리는 웃음이 제이크를 두근거리는 심장을 가득 채웠다.
HB지구-21658
'넌 제이크를 위해 태어난 거야.'
그게 무슨 의미인지조차 모를 때부터 듣던 말이었다. 형은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이 얘길 들었다고 했다. 그게 좀 분했다.
'그게 무슨 뜻인지 몰랐어도 널 지키려면 건강해져야겠다고 생각했거든.'
형이 어릴 때 매우 아팠다는 건 알지만 나로선 상상이 잘 안됐다. 내 기억 속 형은 항상 지나치리만큼 씩씩하고 건강했으니까. 형은 언제나 그게 내 덕분이라고 했다. 그 말을 들으면 순식간에 행복해졌다.
'너 왜 형이랑 뽀뽀해?'
그야, 형이랑 뽀뽀하면 기분이 좋으니까. 그냥 가볍게 쪽, 입 맞춰주는 것도 좋고 가끔 내가 끈질기게 조르면 형의 두꺼운 혀가 내 입술을 열고 들어와 정신을 쏙 빼놓는 것도 좋았다. 배 아래쪽이 찌릿찌릿해서 괜히 형한테 나 이상해지는 거 아니냐고 투정 부리면 귀엽다고 뽀뽀를 더 해줬다. 형은 저런 말을 들으면 그냥 우리가 너무 사이좋아서 그렇다고 하랬다. 무슨 일부러 거짓말이라도 하는 것처럼. 근데 사실이니까 아주 당당히 말하고 다녔다.
'어디 가서 망신스러운 소리 듣게 하지 말거라.'
형에게 말하는 것치곤 꽤 차가운 목소리였다. 방 문이 열리는 걸 알아채자마자 형이 나를 등 뒤에 숨겨서 표정까진 못 봤지만. 나는 옷을 다 입고 있고 형 옷은 내가 벗겨버렸는데, 내가 앞에 있는 게 맞지 않나? 하지만 형이 하는 대로 놔뒀다. 다시 문이 닫히자 형은 나를 돌아보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난 다시 형을 끌어당겼다.
'너한테 빼앗을 게 어디 있어? 주기만 해도 모자른데.'
감동적인 말이었지만 내 안 끝까지 들어와서 저런 말을 속삭이니 기분이 야릇했다. 형이 준 걸로 배가 꽉 찬 느낌. 다들 내 심장이 형의 몸에서 뛰는 것만 생각했지 내 몸 안에 형의 세포가 돌아다닐 줄은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어쩐지 승리감이 들어 소리 내 웃으니까 형도 나를 따라 웃었다.
'난 형을 위해 태어난 거야.'
선수는 뺏겼지만 드디어 내 입으로 이 말을 형에게 전하니 가슴이 벅찼다. 형은 말없이 날 한참 들여다보더니 '맞아, 나의 밥. 나의 로버트.' 하고 눈물에 키스해 주었다. 이제서야 형도 나도, 그 말의 의미를 완전히 알게 된 걸 느낄 수 있었다. 나의 밥, 나의 로버트. 이보다 더 듣기 좋은 말이 있을까? 만족스러운 한숨을 내쉬며 형의 품에 누웠다. 귓가에 울리는 심장도,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손가락도 계속 말하고 있었다. 나의 밥, 나의 로버트.
HB지구-91157
"아저씨!"
아침 조깅 후 샤워를 마치고 내려오던 제이크는 난데없이 들려온 목소리에 깜짝 놀랐다. 상의를 꿰어 입으려던 걸 관두고 서둘러 아래층을 내려다보자, 밥이 아일랜드 식탁에 기대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럴 리 없지만 게슴츠레한 아이의 눈이 그의 벗은 몸을 훑는 듯해 제이크는 허겁지겁 옷을 입었다. 다시 밥을 내다보자 언제 그랬냐는 듯 순진한 눈망울만이 깜빡였다. 그럼 그렇지. 우리 애기가 그럴 리가.
"삼촌이라고 좀 불러주라."
"가족도 아니면서 뭔 삼촌."
기특하게도 프로틴 쉐이크를 만들어 둔 밥이 잔과 함께 입술을 댓 발 내밀었다. 땡큐. 제이크가 쉐이크를 받아 들고 밥의 오리 입술을 꼬집었다. 우응읍! 항의하는 소리가 났다. 진짜 가족은 아니라도 너희 부모님이랑 내가 친구로 지낸 세월이 얼만데. 제이크는 서운해지려다 밥이 질풍노도의 깜찍한 청소년임을 상기하며 나잇값 못하는 자신을 달랬다.
"넌 주말인데 어디 놀러 안 나가?"
"여기 놀러 왔잖아요."
제이크의 손을 뿌리치고 테이블 위에 가볍게 올라앉은 밥이 다리를 달랑거렸다. 안 그래도 짧은 반바지가 위로 올라가며 희고 통통한 허벅지를 훤히 내보였다. 떼잉, 요즘 꼬맹이들은 조심성이 없어. 무척 잔소리하고 싶었으나 아저씨 소리를 듣는 마당에 보수꼰대 소리까지 들을까 봐 제이크는 말을 삼켰다.
"생각해 봤는데요."
프로틴쉐이크를 꿀떡꿀떡 들이키자, 바닐라 맛이 미뢰를 부드럽게 자극했다. 요즘은 프로틴도 참 맛있게 잘 나온단 말이야.
"저도 곧 성인이 되고 하니까... 생일 선물로 저를 아저씨한테 줄게요."
컥. 쉐이크가 기도로 대차게 넘어가는 바람에 제이크는 주체할 수 없이 콜록거렸다. 괜찮아요? 밥이 한달음에 달려와 등을 두드... 더듬는 건가?
"너 뭐... 뭐라고?" 제이크가 간신히 몸을 추스르고 혼미한 정신으로 되물었다.
"저를 아저씨한테 주겠다고요."
이건 무슨 궤변이람. 네 생일인데 내가 널 왜 받니...
"내가 뭐 잘못했어? 왜 날 감옥에 보내려고 하는 건데?"
"감옥이 아니라 천국에 보내려고 하는 건데요? 나같이 어리고 귀여운 애랑 뽀뽀도 하고 연애도 하면 얼마나 좋겠어요?"
제이크가 얼이 빠져 밥을 바라보았다. 순진하다고 생각했던 애기의 눈망울에 뻔뻔함이 감돌았다. 요게 토끼인 줄 알았더니 완전... 완전...! 제이크는 밥의 얼굴을 요모조모 뜯어보았지만 토끼 말고는 별다른 비유가 떠오르지 않았다. 시선을 받자 밥이 부끄러운 것처럼 웃으며 눈을 깜빡거렸다. 완전 뻔뻔한 토끼였어!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제이크가 잔을 내려두고 마른세수를 했다. 어디서 누가 연애하는 거 보고 부럽기라도 하나본데, 상대를 골라도 한참 잘못 골랐다.
"애기야, 아저씨 할 일 있으니까 이제 밖에 나가 놀아. 가서 네 친구들이랑 놀아."
"뭐야? 고백받고 쫓아내는 거예요? 저 친구도 없는데?"
허, 참나. 이런 게 고백? 그리고 학교 등하교 시켜주면서 내가 본 게 있는데. 제이크가 붙잡아 내보내려 어깨를 감싸자 밥이 팔에 온 무게를 실으며 버텼다. 차마 힘을 다 써서 내쫓지는 못할 거란 걸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반 뼘쯤 아래 있는 밥이 눈썹을 팔 자로 늘어트렸다. 앗, 안돼!
"아저씨... 나 싫어해요? 막 미워요?"
"그런 게 아니잖아."
제이크가 괴로워 끙 소리를 내며 대답했다. 제이크 자신도 이런 시기를 겪었으니 대충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지는 알았다. 한창 연애에 관심이 많을 나이고, 그래, 또래보단 어른이 멋져 보였을 수도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은 제이크 세러신이 아니던가? 서른 중반을 넘은 지금도 완벽한 얼굴과 몸매를 유지하는. 아, 죄 많은 남자가 아닐 수 없었다. 제이크가 속으로 고뇌(?)하는 동안 밥이 그의 허리를 답싹 껴안았다.
"그럼 좋아해요?"
"그래, 그래. 내가 직접 비행기 태우며 키웠는데 아들이나 다름없지."
밥이 얼굴을 꼬깃꼬깃 찌푸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제이크는 애를 달랑 들어 올려 대문 앞으로 날랐다. 이판사판이다. 밥이 버둥거렸지만 걱정될 정도로 가볍기만 했다. 아무래도 집에 맛있는 걸 더 보내야겠는데? 얘는 애를 어떻게 키우는 거야?
문을 열고 애를 밖에 내려놓자 어떻게든 다시 몸을 들이밀려는 밥과 막으려는 제이크의 사투가 벌어졌다. 당연히 밥이 상대될 리 없었지만.
"아저씨 이러다 후회해요!"
가까스로 문을 닫고 잠그자 그 너머로 밥이 소리쳤다. 그래그래. 퍽이나 후회하겠다. 제이크가 문에 기대어 한숨 쉬었다.
제이크는 물론 그날 일을 후회하지 않았다. 하지만 제이크는 몰랐다. 그날부터 집념의 밥이 쉬지 않고 몇 개월간 그를 괴롭힐 줄은. 결국 밥에게 항복해 새파랗게 어린애랑 '연애놀음'을 할 줄은. 밥의 집(정확히는 친구의 집)에 들렀다가 그 애의 방에 끌려갈 줄은. 옷 속으로 들어온 손이 복근을 더듬거리는 걸 그냥 놔둘 줄은. 그 애의 간절한 눈빛에 애들이나 하는 쪽쪽거리는 뽀뽀를 할 줄은. 그러다 친구한테 들킬 줄은. 살면서 들었던 욕을 다 합친 것보다 그날 먹은 욕이 더 많을 줄은. 급기야 멱살을 잡히려는데 밥이 그 사이를 가로막을 줄은. '그냥 욕만 해! 완벽한 껍데기에는 흠집 내지 마!'라는 소리를 들을 줄은.
... 그 밖에도 아직 제이크가 모르는 게 많았다. 그리고 모르는 게 나았다.
HB지구-11154
밥이 소개받은 집에 처음 도착하고 그 으리으리한 외관에 한 번, 들어가서 광활함에 또 한 번 경악했던 것도 벌써 6개월이 지난 일이었다. 이젠 그 집에서 일하는 분들의 가족 안부까지 물을 정도가 되었다. 그동안 제이크의 성적은? 글쎄, 안 오른 건 아니지만 밥이 받는 금액에 비하면 초라할 정도였다. 밥은 점점 초조해졌다. 이러다가 쫓겨나는 거 아니야?
솔직히 말하자면, 제이크를 소개해 준 집의 과외를 하는 것만으로도 생활은 꽤 많이 나아졌다. 제이크의 과외를 관둬도 일상에 지장은 없을 거란 얘기다. 하지만... 제이크의 집은 36점에서 50점으로 성적이 오른 것만으로도 경사가 났던 브렛의 집과는 확연히 달랐다. 어느 날 갑자기 성적이 뚝 떨어졌다는 제이크는 집안에서 꽤 많은 압박을 받고 있었다. 옆에서 제이크가 받는 부담감을 함께 느꼈던 밥으로선 이제 돈이 아니라 제이크 그 자체가 걱정거리가 되어버렸다.
"제이크, 솔직히 말해봐. 너 내가 가르쳐주는 거 다 이해하잖아. 근데 왜 성적은 계속 제자리걸음이야?"
오늘 수업 끝나고 이야기 좀 하자는 제이크 어머니의 말에 마음이 급해졌다. 밥은 언제나 갖고 있던 의혹(?)을 직설적으로 제이크에게 물었다. 의혹을 안 가질 수가 없었다. 설명해 줄 때 책보다 얼굴을 더 자주 쳐다보는 제이크는 문제 풀이를 시키면 약 오르게도 열에 일곱 번은 제대로 풀어내곤 했던 것이다. 나머지 세 번은 뭐랄까... 모두가 틀리게 푸는 방법으로 풀어서 오히려 일부러 틀리는 것 같달까.
"제자리걸음 아닌데. 그동안 꽤 오르지 않았어요?" 제이크가 지구가 둥글다는 것도 모르냐는 것 같은 표정으로 물었다. 밥이 순간 어금니를 악물었다. 얜 이상하게 맞는 말을 기분 나쁘게 한단 말이야.
"더 오를 수 있, 아니 나는 너 학교에서 1등도 할 수 있으면서 안 한다고 생각해."
"제가 왜요?"
제이크는 진심으로 궁금한 목소리였다. 사실... 그랬다. 따지고 보면 제이크에겐 그럴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로버트는 더 이해가 안 갔다. 급기야는 가설도 세워봤는데 그나마 가장 그럴듯한 건 '철부지 도련님의 부모님에 대한 반항'이었다. 금방 폐기했지만. 제이크는 싸가지가 좀 없고 말을 막 해서 그렇지 철부지 도련님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이미지를 써먹는 것 같달까. 게다가 해사를 목표로 하다고 말할 때의 제이크는 답지 않게 진지했다. 제이크가 말한 계획대로라면 곧 부모님의 간섭 없이 살 수 있게 되는데 고작 반항 좀 하겠다고 성적을 망치는 게 말이 안 됐다. 밥은 결국 대답하지 못하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왜 한숨을 쉬고 그러실까."
"답답해서 그러지."
"제 성적이 안 오르는 이유, 알려줄까요?"
턱을 괴고 연습장에 의미 없는 낙서를 하던 밥의 연필을 제이크의 볼펜이 툭 쳤다. 밥이 고개를 번쩍 들었더니 눈이 마주치기가 무섭게 제이크가 한쪽 입꼬리만 올려 싱글댔다. 어휴 얄미워! 저 호선을 그린 이목구비가 잘생기지 않았다면 아마 더 화났으리라. 제이크는 훗날 저 얼굴 덕을 톡톡히 볼 게 분명했다.
"뭔데." 밥은 짐짓 흥분하지 않은 척 물었다.
"실은 의욕이 잘 안 나서 그래요."
"의욕? 으요옥? 너한테는 목표가 있는데 의욕이 왜 안 나?"
밥은 순간적으로 목소리를 높였다가 누가 밖에서 수업은 안 하고 노닥거린다고 생각할까 봐 급히 목소리를 죽였다. 비밀 얘기라도 하는 것처럼 몸을 쭉 빼 책상 너머 제이크에게 다가갔더니, 제이크도 덩달아 얼굴을 가까이했다. 온기가 느껴질 정도라 부담스러웠지만 지금 뒤로 물러서면 분위기가 어색해질까 봐 밥은 꿀렁꿀렁 움직이는 제이크의 울대나 쳐다봤다.
"해사 가겠다는 건 너무 어릴 때 정한 거라... 뭐랄까, 관성 같은 거지 아직까지 저한테 공부할 열정을 주진 않아요."
제이크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밥은 목소리가 닿은 뺨이 간질거려서 깔짝대며 긁었다. 제이크의 말은 이해가 가면서도 납득이 잘 되지 않아 알쏭달쏭했다. 하지만 어차피 남의 속을 백 퍼센트 이해하기란 어려운 법이니까.
"그럼... 어떻게 하면 좋을 것 같아?"
왠지 자연스럽게 숨쉬기가 어려워진 밥이 최대한 자연스럽게 몸을 뒤로 물리고 물었다. 그걸 듣고 제이크가 얼마나 환하게 웃던지, 밥은 순간 몸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그냥 웃는 (잘생긴)얼굴일 뿐인데 왜 그랬는지 모르지만.
"이건 어때요, 전체에서 1등 하면 선생님이 내 소원 들어주기."
"뭐? 내가?" 생각지도 못한 얘기에 밥은 화들짝 놀랐다. 내가 너보다 가진 게 없는데? 밥의 그 생각이 너무 노골적으로 드러났는지 제이크가 헛웃음을 쳤다.
"돈 드는 거 아니에요."
"누가 그렇대?" 민망해진 밥이 애먼 손가락 거스름을 만지작거리며 시선을 피했다. 나름 선생인데 돈 때문에 학생 앞에서 작아지는 기분이란. 밥이 씁쓸함을 삼키는 동안 제이크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서랍을 뒤적거렸다. 쟤가 뭘 하나 멀뚱멀뚱 쳐다보던 밥은 다시 돌아온 제이크가 별안간 제 손을 가져가더니 손톱깎이로 거스러미를 정리해 주는 것도 쳐다만 보았다. 멀뚱멀뚱.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인식 한 건 다부진 손가락 끝이 깔끔히 정리된 곳을 훑고 나서였다. 목부터 시뻘게진 밥은 황급히 잡혀있던 손을 빼냈다.
"원하면 소원이 뭔지도 미리 알려드릴게요."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제이크가 말했다. 밥이 어버버하는 동안 제이크는 다시 서랍에 손톱깎이를 가져다 두었다. 마치 일부러 당황스러움을 갈무리할 시간을 주는 것 같이.
어쩌면 괜히 오버했는지도 몰랐다. 거스러미 정리해 주는 게 뭐라고. 이렇게 가슴이 쿵덕쿵덕 뛸 일은 아니었다. 생각해 보면 브렛한테는 고백 연습을 위한 대역도 해준 적이 있었다.
"뭔데... 소원이?" 아무 일도 아니다. 아무 일도 아니다. 밥은 그렇게 주문을 걸며 태연한 척 말을 건넸다. 책상 아래에서는 깔끔해진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면서.
"과외. 저하고만 해요. 아아, 말 끊지 말고. 당연히 보수는 오를 거예요. 1등하면 당연한 거지. 선생님 무시하는 건 아니지만 브렛 걔 백날 가르쳐봤자 거기서 더 안 올라요. 그러니까 차라리 저한테만 집중해요. 제가 다른 과목도 더 하자고 엄마한테 말할게요. 그럼 지금보다 오히려 더 많이 받을 수 있어요. 돈 얘기 한다고 기분 나빠하지 말고요. 그런 건 곧 중요하지 않게 될 거니까. 진짜 중요한 건, 저한테 선생님이 필요하다는 거죠. 오롯이 저만을 위한 관심도요. 그리고 뭐 전체 1등이 쉬워요? 그냥 의욕 좀 생기라고 적선해 주는 셈 쳐요. 되면 좋고 안되면 아쉬울 뿐이잖아요?"
제이크는 이 모든 말을 너무도 빠르고 분명한 발음으로 쏟아냈다. 몇 번이나 끼어들려고 했던 밥은 번번이 제이크의 손짓에 막혔다가 결국 그 기세에 '돈 얘기에 기분 나쁠 타이밍'마저 놓쳐버렸다. 제이크의 말이 끝났을 땐 제자의 의욕 고취를 위한 작은 약속을 거절할 명분이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게다가 저 기대로 가득한 (잘생긴)얼굴이란.
"그래서 대답은요?"
"그, 그러지 뭐."
밥은 얼떨결에 대답했다.
훗날 밥은 이날을 '호랑이굴에 유인당한 날'이라고 평가했다. 이날 이후 호랑이에 대해 지나치게 많은 걸 알게 된 밥이지만 호랑이가 간직한 비밀 중에는 밥이 평생 모르고 산 것들도 있었다. 이를테면 제이크의 성적이 뚝 떨어진 것이 브렛이 자기 과외 선생님과 찍은 사진을 보여준 직후였다거나, 정치인인 제이크의 부모님은 연기의 달인이란 것이나, 그냥 밥과 먼저 과외를 했다는 사실만으로 브렛이 짜증 나서 루크에게 고백하는 걸 훼방 놨다거나 하는 것들이었다. 알아도 상관없겠지만 모르고 있는 지금도 밥은 행복했다.
HB지구-22314
몸 섞는 것보다 그 후에 씻겨주는 걸 좋아하면서 오늘따라 더 누워있겠다길래 이상하다 싶긴 했다. 오래 혼자 두기 싫어 간단히 샤워를 마치고 돌아왔더니 밥이 처량맞은 표정으로 이불 덮은 무릎에 턱을 괴고 있었다. 우리 베이비가 왜 이러실까. 젖은 수건을 협탁에 대충 두고 침대에 올라 허리를 당겼더니 냉큼 허벅지 위로 끌려오는 게 퍽 깜찍했다.
"무슨 일인지 슬슬 털어놓지 그래, 응?"
옷 입혀준다는 것도 싫다더니 아직 맨몸이었다. 방이 따뜻해도 혹시나 추울까 손으로 등을 슥슥 데우며 구슬려도 품에만 더 파고들 뿐 대답이 없었다.
"남편이 괴롭히기라도 해?"
이것 봐라? 손끝으로 밥의 몸이 굳는 게 느껴지자 피가 차게 식는 기분이었다. 가정에도, 밥에게도 관심이 없는 작자라 가만히 두고 본 게 잘못이었나. 두 손으로 밥의 얼굴을 붙잡았더니 눈을 피하고 입꼬리가 한껏 쳐진 게 꼭 울음을 터트리기 직전이었다.
"뭐야? 진짜 괴롭혀? 몸은 깨끗했는데. 그 인간이 뭐라고 했어."
"그게 아니라!"
어디서 맞고 다닐 밥이 아니지만 혹시 몰랐다. 작은 멍이라도 놓쳤나 싶어 이불을 젖혀 이리저리 몸을 뒤적여보지만 내가 남긴 거 말고는 흠 하나 없었다. 두피까지 살피려 들자 버팅기던 밥이 그제야 답답하다는 듯 말문을 텄다. 그게 아니면? 남편 말고 또 고민할 만한 게 있는지 빠르게 되새겨보았으나 딱히 걸리는 게 없었다. 부모님도 안녕하시고, 부대에도 별일 없고. 그럼...
"너 말이야!"
"나?"
내가 문제였나. 이젠 똑바로 바라보다 못해 거의 째려보고 있는(귀엽다) 밥을 보며 뭘 잘못했던가 곰곰이 생각해 봤지만 역시 걸리는 게 없었다. 어쩐다. 오랜만에 말을 꺼내지도, 그렇다고 입을 딱 닫지도 못한 채 망설임이 길어졌다.
"왜... 너 왜, 이혼하라고 안 해?"
아하.
당황이 환희로 바뀌는 순간을 숨기려고 입술을 안으로 말아 넣었다. 부디 곤란한 얼굴로 보이길 바라면서.
"그거야... 그건 네 결정이지 내가 하라 말라 할 건 아니잖아."
"그래도. 그래도 네가 날 정말 조... 사랑하면, 말해볼 수 있는 거 아니야? 이렇게 만나는 게 네 성에 차기나 해?"
애 키우는 보람이 바로 이런 건가. 당당히 내가 자길 사랑하노라 말하는 밥을 보니 벅차기까지 했다. 그동안 세뇌하다시피 사랑하다고 속삭인 게 영 허사는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이혼 얘기를 이렇게 빨리 꺼낼 줄은 예상 못 했는데. 밥 성격에 남편에 애인까지 두는 게 무리긴 했겠지만, 집안끼리의 문제이다 보니 쉽게 결정하지 못할 거라 여겼다. 게다가 밥이 그토록 가볍다고, 믿기 어렵다고 생각하던 남자가 저울의 반대편에 있다면 더더욱. 어쩌면 밥을 어리게만 봤는지도 몰랐다.
"난 네가 나한테 이혼해달라고, 그 한마디 해주길 계속..."
"이리 와."
아니, 정정. 밥은 아직 어리고 여린 게 맞았다. 목이 메는 듯 숨을 들이켜는 밥을 품 깊숙이 끌어안았다. 길게 뻗은 목에 자잘히 키스하며 미안해, 되뇌자 밥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혼자 얼마나 생각이 많았는지 여실히 느껴졌다. 이런 관계가 성에 안 찰지라도 감수할 수 있는 나와 사랑 없는 결혼이어도 외도는 감당할 수 없는 밥은 본질적으로 다른 사람이었다. 조바심을 느끼지 않은 건 그 덕분이다. 밥은 언젠가 선택한다. 그것이 내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불안은 없었다.
"네가 준비될 때까지 기다리려고 했어. 몇 개월이든, 몇 년이든."
"성격도 급하면서 왜 이럴 때만 기다려." 밥이 가슴을 손가락으로 꾹꾹 찌르며 불퉁하게 말했다.
그야 물론, 너 스스로 나에게 오는 것의 기쁨은 그 모든 걸 가치 있게 하기 때문이지. 바로 지금처럼.
"로버트, 베이비."
"왜." 대답은 하면서도 얼굴에 '너 미워' 쓰여 있는 게 영락없이 애였다. 이런 베이비를 남의 손에 더 맡겨두는 것도 할 짓이 못 됐다.
"이혼 해줄래? 이혼하고 온전히 나에게로 와."
이혼 요구로 사랑 고백을 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이 색다름도 나쁘지 않았다. 사실 그 사람 변호사한테 서류 보내기만 하면 돼. 귓가에 속삭이는 밥의 밀어는 감미롭기까지 했다. 갑자기 치밀어오르는 소유욕을 참기 어려웠다. 참을 이유도 없지만. 급히 밥의 입술을 찾아 키스하며 몸을 밀어 눕혔다. 늘씬한 다리가 벌어지고, 딱 맞는 퍼즐인 듯 몸이 맞춰졌다.
밥의 이혼은 이례적으로 빠르게 처리 될 것이다. 나만의 밥이 되는 그 날이 참을 수 없이 기대됐다.
HB지구-15151
밥은 눈을 슬며시 떴다. 아직 가물가물한 시야지만 행맨이 분명히 보였다. 휴. 한시름 놓은 밥이 손가락으로 아직 잠들어있는 행맨의 볼을 꾹꾹 찔렀다. 행맨보다 먼저 일어나는 건 흔치 않아 평소라면 조금 더 구경했겠지만 행맨은 벌을 좀 받아야 할 필요가 있었다.
"음."
"일어나, 이 욕심쟁이야."
행맨이 부스스 눈을 뜨고는 밥을 한참 바라만 보았다. 밥은 행맨이 누굴 바라보고 있을지 궁금했다.
"베이비?"
"행맨."
혹시나 해 일부러 장난을 쳤더니 행맨이 벌떡 일어나 앉았다. 웬일로 옷도 위아래로 다 챙겨입은 채였다. 그래도 양심은 있네.
"아직, 아직 안 돌아갔어?"
흠. 반응을 보니 밥의 예상대로였다. 밥이 어딘지 모를 곳에 가 있을 동안 다른 밥이 행맨과 지낸 것 같았다.
"어디로 돌아가? 나 가버려...?"
"아니... 그게 아니라... 이러면 안 되는데..."
심란한 듯 손바닥으로 얼굴을 벅벅 문지르는 행맨이 안쓰러워 보이는 건 아무래도 콩깍지가 심하게 씐 게 맞았다. 어쩌다 이런 화상을. 밥은 한숨을 내쉬고 절규하는 행맨의 팔을 붙잡아 내렸다.
"장난이야. 나야."
"나? 내 밥 맞아?"
"그래, 네 베이비다."
곧바로 안겨드는 행맨을 누워서 받아낸 밥은 숨이 막혀서 억, 하고 비명을 질렀다. 자기가 무슨 다 커서도 앵기는 대형견인 줄 아나. 그렇게 귀엽지도 않으면서. 하지만 행맨은 놓아줄 생각이 없는지 닿는 곳에 마구잡이로 입을 맞추기에 바빴다. 그러다가 턱 아래서 우뚝 멈춰 섰다. 이리저리 치솟은 머리카락이 밥의 볼을 간질였다.
"미안, 내가 소원을 잘못 빌어서."
"그러니까 내가 평범한 걸로 하라고 했지?"
"근데... 너도 다른 행맨 만났어?"
"만났으면?"
"그 자식이 너 건드렸어?"
정말 웃기지도 않았다. 다른 우주의 행맨까지 '나'라며 동일 선상에 놓을 땐 언제고 이제 와서 질투를 해? 밥이 코웃음을 쳤더니 행맨이 시무룩한 표정을 했다. 그 표정에 약한 걸 알고 부리는 수작이겠지만, 이번엔 안 통했다.
어제 아침 밥이 눈을 떴을 땐 옆자리에 아무도 없었다. 웬일이지, 내가 일찍 일어났나? 시간을 확인하는데 원래 기상 시간보다 3시간은 일렀다. 그걸 인지하자 잠이 확 깨버린 밥은 오뚜기처럼 일어났다가 머리가 빙빙 돌아서 잠시 무릎에 고개를 파묻어야 했다. 그러면서 찬찬히 생각해 보니, 화장실 갔을 수도 있는데 너무 유난 떨었나 싶어 진정하고 침대를 벗어났다. 하지만 그 순간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곳은 행맨의 관사가 아니었다. 밥 자신의 관사였다. 결혼도 안 했는데 부부관사를 신청하긴 좀 뭐해서 조금 더 넓은 행맨의 관사에서 동거하다시피 한 게 벌써 6개월째였다. 자는 동안 행맨이 몰래 옮겨놓은 게 아니라면 여기에서 일어날 리가. 당황한 밥은 서둘러 휴대폰에서 행맨의 연락처를 찾았다. 즐겨찾기에 없는 것도 이상했지만 행맨이 멋대로 저장해놓은 '자기❤️' 대신 '행맨'으로 저장된 걸 보고 손이 떨렸다. 이건 무슨 상황이지? 혼란스러워지자 행맨의 목소리가 더 간절해졌다. 잠시 망설이던 밥은 저장된 행맨의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길고 긴 통화연결음 끝에 들리는 잠에 취한 목소리는... 글쎄, 처음 듣는 목소리였다. 밥은 얼른 통화를 끊었다. 심장이 튀어 나갈 듯 두근거렸다. 눈을 감고 한참 심호흡을 하던 밥은 몸이 좀 잠잠해지고 나서야 손에 든 휴대폰을 다시 밝혔다. 날짜는 원래보다 한참 전이었고, 메세지함엔 행맨의 흔적조차 없었으며, 캘린더엔 업무 일정만이 빼곡 했다. 어느 하나 밥의 기억과 일치하지 않았다.
그 순간 왜인지, '모든 우주의 밥이 내 밥이었으면 좋겠어' 하는 목소리가 밥의 귀를 스쳐 지나갔다. 행맨의 바보 같은 소원. 괜히 그 말이 생각날 리 없었다. 그러자 모든 게 납득이 갔다. 행맨의 바보 같은 소원을 상대해 준 대가로 다른 우주에 떨어져버리다니. 너무 가혹했다.
이 우주의 밥은 행맨(그게 어떤 행맨이든지)의 밥이 아니란 건 재차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아니, 그럼 진짜 둘을 이어주란 소리야?! 황당해진 밥이 베개에 얼굴을 박고 짧게 악을 썼다. 제이크 세러신. 아주 다시 돌아가기만 해봐라.
하지만 밥은 억지로 밥을 행맨과 이어줄 생각은 없었다. 행맨은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것 같았고(왠지 가슴이 쿡 아팠다) 이 밥의 마음은 알지도 못하니까. 하지만 두 사람을 이어주는 게 다시 돌아갈 수 있는 조건이면 어쩌지? 골치 아파진 밥은 소용없는 걸 알면서도 휴대폰을 들어 인터넷 검색창을 눌렀다. '동료에게 고백하는 법', '편지로 고백하면 촌스러운가요', '전화로 고백하기'가 저장된 검색어로 주르륵 나왔다. 저런. 이 밥도 소용없는 걸 알면서 검색했던 모양이었다. 설마? 그러고 보니 갤러리를 안 열어봤는데. 이젠 자신의 휴대폰이 아니란 걸 아니까 조금 죄책감이 들었다. 조심스레 들어간 갤러리에는 딱 한 장의 사진이 있었다. 휴게실에 앉아 있는 행맨의 뒷모습. 아주 살짝 보이는 얼굴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밥은 이마를 짚고 말았다. 하필이면 짝사랑이라니...
원래 우주에서 행맨은 미션이 끝난 뒤 르무어로 돌아가기도 전에 꼬시려 들었기에 밥은 이 상황을 어떻게 타개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나를 좋아하지 않는 행맨은 어떻게 대해야 하는 거지? 미션 때를 떠올려보는 것도 부질없었다. 행맨의 말에 의하면 그는 밥에게 '첫눈에 반했기' 때문에(밥이 곧이곧대로 믿은 건 아니었다). 밥은 행맨의 사진을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일단 아침을 먹기로 했다. 무척 배가 고팠다. 밥은 아무도 없는데 눈치를 보며 초코 시리얼을 집어 들었다. 우유를 붓고 티비를 켜니 밥이 좋아하는 드라마의 놓쳤던 에피소드를 재방영해 주고 있었다. 추임새를 넣어주는 사람이 없어 그런지, 그다지 재미있진 않았다. 세 편을 멍하니 보고 나니까 오후가 되었다. 여전히 어떻게 해야 할지 뾰족한 수는 생각나지 않았다. 막연히 서성거리다 집이 엉망인 게 눈에 들어왔다. 오랜만에 집안일을 하는데 잔소리가 없어서 잘한 건지 영 찜찜했다. 따뜻한 물을 받아 목욕을 해보아도 자꾸만 추운 느낌에 금방 나오고 말았다. 젖은 머리로 영감이라도 얻어볼까 싶어 좋아하는 sf 책을 꺼내 들었는데, 무언가 툭 떨어졌다. 딱 봐도 편지였다. 으아! 차마 읽을 순 없어서 다시 끼워놨다. 그리고 휴대폰을 만지작거린 지 한 시간 째. 밥은 될 대로 되라 싶은 심정으로 메세지 전송 버튼을 눌렀다. 아, 이제 모르겠다! 침대에 대자로 누워 밖을 보니 해가 떨어질락 말락 했다. 얼마 후 예상보다 빠르게 전화가 울렸고, 그걸 받고 나니 피곤이 몰려와 잠들어버렸다. 다시 눈을 떴을 땐 그의 행맨이 얌전히 옆에 누워있었다. 다행히도.
"너 먼저 말해봐. 나 말고 다른 밥 건드렸어?"
"베이비, 어떻게 그런 말을? 막 일어났을 때 너 아닌지 모르고 손바닥에 뽀뽀한 거밖에 없어."
어쭈.
"그래도 잠은 같이 잤다?"
"무슨 일 있을지 모르니까 그랬지. 진짜 잠만 잤어. 아침 이후로는 손끝도 안 닿았어. 맹세."
행맨이 밥의 손을 끌어다 자기 가슴 갈라진 곳 위에 두었다. 누가 맹세를 이런 식으로 하지? 밥은 눈을 굴리면서도 굳이 손을 떼어내진 않았다.
"근데... 내 질문의 대답은?"
"몰라. 키스를 한 것도 같고 엉덩이를 만졌던 것도 같고."
밥의 손을 붙잡고 있던 행맨이 움찔하는 게 느껴졌다. 아무래도 자기 자신에게 질투하는 게 행맨에게 딱 맞는 벌인 듯 했다.
"밥은 짝사랑하고 하고 있는 것 같던데..." 행맨이 다소 자신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귀한 장면이군. 밥은 흡족했다.
"네가 다 네 밥이었으면 좋겠다며. 그 행맨도 '내 밥'을 가져야 하지 않겠어?"
눈썹이 꾸깃꾸깃해진 행맨은 심한 내적 갈등을 겪고 있는 것 같았다. 자기가 말한 소원이니 부정하지도 못하고 괴로울 테지. '행맨'과의 접촉은 간밤의 통화뿐이란 걸 행맨은 알 필요가 없었다. 문득 돌아간 밥이 상황에 잘 대처하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뭐, 어차피 알 방법도 없으니 궁금해 봤자지만. 밥은 그보다 눈앞의 일을 신경 쓰기로 했다. 그래, 내가 빈 소원이니까 불평은 안 할게. 나름 반성하며 잡고 있는 손을 꿈질꿈질 만지는 행맨을. 어쩔 수 없이 마음이 약해졌다. 자꾸 이렇게 봐주면 버릇 안 좋아지는데.
"반성했으면 이제 평범한 선물 좀 말해 봐."
"베이비, 그런 거 안 줘도 되는 거 알잖아. 난 너만 있으면 돼."
저, 저, 눈썹 한껏 늘어트리는 것 좀 봐. 밥이 눈을 가늘게 뜨자 행맨이 크흠, 하고 눈을 순진하게 깜빡거렸다.
"3...2..."
"정 그러면!" 행맨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1?"
"오늘 밤 9시 행맨밥 올나에 같이 가자."
"처음부터 이랬으면 얼마나 좋아."
밥이 웃자 그제야 행맨이 따라 미소 지었다. 슬쩍 팔을 당기는 행맨을 끌어안으며 밥이 속삭였다. 생일 축하해, 나의 제이크.
https://hygall.com/608301006 이 글의 행맨의 소원이 이루어진 결과...
실은 모든 우주의 행맨(=행맨의 입장에서 그냥 '나'라고 해버림)이 '내 밥'을 갖길 바란 이타적이고 이기적인 행맨(?)을 의도 했는데 단어 선택이 분명하지 못했음... 미안합니다ㅠㅠㅋㅋㅋ
오늘 밤 9시
~행맨밥도 참석하는~
💚행맨밥 올나에 오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