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 https://hygall.com/606448027




스치는 것을 조용히 바라보았어.
새파란 하늘이 타오르는 금빛에 잘게 먹혀 붉게 물들었지. 달리던 버스가 들썩이자 손잡이의 그림자가 짙은 빛을 띄우며 함께 흔들렸어. 학교도 운전 기사를 통하여 등하교를 하는 닉에겐 퍽 생경한 광경이었어. 마치 꼭 미지의 수단으로 미지의 세계로 달려가는 것만 같았지. 그런 낯선 환경이 무섭지 않다면 거짓말일 테지만, 그래도 닉은 용기를 내기로 마음 먹었어. 오늘이 아니면 정말로 기회가 없을 것 같았거든. 닉은 주머니에서 꺼낸 메모를 다시 하염없이 만지작거렸어. 


닉의 상상 속 형은 아직도 자라지 않은 어린 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었어.
당연했어. 집에 남아 있는 형의 흔적이라곤 어린 애 물건들 뿐이었으니까. 작은 신발, 가방, 크레파스로 서투르게 그렸던 그림들…. 닉은 그런 형의 흔적을 볼때면 노을이 지는 방에서 그림을 그리는 작은 뒷모습을 상상하곤 했어. 알 수 없는 감정이 닉의 목구멍을 간질였어. 많은 것들이 스쳤지. 내색은 않더라도 이따금씩 그늘진 눈빛을 하던 부모님, 주인이 없이 여전히 남아 있는 물건들. 가족들을 그린 그림과 돌아오지 않는 형…. 닉이 이해할 수 없는 것들.


달리던 버스가 멈춰섰어.
잠시 넋을 놓고 있던 닉은 뒤늦게 정류장 이름을 확인하곤 서둘러 버스에서 내렸어. 하마터면 더욱 낯선 곳으로 갈 뻔했어. 잠시 숨을 고르던 닉은 그제야 주변 풍경을 보았어. 온 세상이 타오르는 금빛에 물든 가운데, 작고 소박한 동네가 닉을 반겼어. 가게에는 저마다 불빛이 반짝였고, 불이 꺼져 있던 가로등도 조금씩 깜박이더니 불이 들어왔지. 예쁜 동네라는 감상도 잠시, 닉은 요란한 핸드폰 소리에 서둘러 액정을 확인했어. 집사였어. 닉은 잠시 망설이다 그대로 전화를 받지 않고 통화를 거절했어. 그리곤 메모를 잘 갈무리해서 주머니에 넣어두고, 모자를 푹 눌러썼지.


거리의 풍경은 평온했어. 사람들은 웃으며 평범한 일상을 보내고, 아이들은 집으로 돌아가는 모양인지 떠들면서 길 위를 뛰어갔어. 닉은 도넛 가게를 수소문하며 걷다 문득 어느 한 놀이터를 마주했지. 그곳에는 낡은 그네가 있었어. 아이들이 많이 탔는지 쇠줄에는 표면이 벗겨지고 닳은 흔적이 있을 정도야. 닉은 줄을 매만지다 그네에 걸터 앉았어. 끼익, 그네가 소리를 내며 흔들렸어. 


도넛 가게는 생각보다 더 유명했던 모양이야.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도넛 가게에 대해 물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거든.이 길로 쭉 걸어가다보면 보이는, 적갈색 지붕에 아기자기한 간판이 달려 있는 가게. 도넛이 아주 맛있어서 외지에서 찾아오는 사람들이 있을 지경이라지. 물론 휴업도 아니었고… 그 도넛은 실제로도 무척 맛있었어. 닉은 헛웃음을 흘렸어. 사실은 도넛 가게가 가까워질 수록 긴장되어 견딜 수 없었지. 차라리 도넛이 맛있어서 찾아오는 손님이었다면 이렇게 긴장할 일도 없었을 텐데.



닉은 형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해. 
형이 있을 때 닉은 아직 걸음마도 못 뗀 아기였어. 당연히 기억할 수는 없지. 닉이 찾지 않으면 남일 뿐인 사이일 테고, 무엇보다 형은 이제 닉을 잊어버렸을 지도 몰라. 닉의 회색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았어. 그리고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지. 

인사를 하려고 했어. 나는 닉이고 형 동생이라고, 기억하냐고, 보고 싶었다고. 그리고 물어보려고 했지. 왜 우리 가족을 떠났고 돌아오지 않느냐고. 그렇지만 동네가 너무 평온해서일까. 막상 이곳에 오고 나니 그래선 안될 것 같단 생각이 들었어. 아무리 이해 안되고 궁금한 일이 있다 한들, 누군가의 삶에 풍파를 일으키는 그런 짓을 하고 싶진 않단 생각 말야. 닉은 마음을 가다듬었어. 그저 멀리서 어떤 사람인지만 보고 가자. 형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으면 어때. 집사는 형이 아빠를 많이 닮았다 했어. 아빠를 닮았으니 못 알아볼 일은 없을 거야. 닉은 자리에서 일어섰어. 



귀여운 간판이 달린 도넛 가게는 생각보다 더 가까운 곳에 있었어. 길을 따라 걷다보니 가게의 옆모습이 보였고 가게에서 조금 떨어진 뒷편에는 마당과 차고가 있는 집이 보였지. 닉의 걸음이 멈추었어. 저기가, 형이 있는 그 집이야. 닉이 용기를 내어 걸음을 옮기려던 그때였지. 문득 도넛가게 앞으로 차 한 대가 섰어. 닉의 마음이 일순 덜컥 내려앉았어. 닉은 저도 모르게 공터 옆 수풀로 몸을 숨겼어. 탁, 차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지. 


토미!


누군가 그 이름을 불렀지. 흔한 이름이지만, 형은 아빠와 이름이 같아. 이 사실을 떠올린 닉은 재빠르게 수인화를 했어. 어린 서벌로 변한 닉은 수풀 사이로 빼꼼 고개를 내밀어 바깥을 보았어. 도넛 가게의 종이 딸랑 소리를 내었어. 가게에 들어가는 하얀 바지 자락이 보였고, 웃음 소리가 들렸어. 그 뒤를 따라 파란 셔츠와 갈색 바지를 입은 사람이 따라 들어가려 했지. 인상이 무척 좋은 사람이야. 그는 걸음을 내딛다 문득 닉이 있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어. 선글라스를 쓰고 있어 잘 모르겠지만, 이쪽을 본 것도 같지. 닉은 놀라 서둘러 수풀 사이로 몸을 감추었어. 


수인화를 하면 이게 단점이야. 어린 서벌이어서 그런지 경계심도 배로 올라가거든. 청력이 예민하게 곤두선 상태로 귀를 기울이니 그 사람이 걸음을 돌려 이곳으로 오는 것이 느껴졌어. 닉은 지레 겁을 먹고 얼른 수풀 사이로 달아나버렸어. 무심코 가는 방향이 도넛 가게 뒤에 있는 그 집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말이야. 





배리에게서 늘 달콤한 향기가 난다면, 크리스에게서는 언제나 밀가루와 버터, 기름 냄새가 나. 톰이 아주 좋아하는 냄새야. 배리와 차 안에서 한바탕 웃고 떠들며 왔던 톰은 곧이어 오랜만에 만나는 아버지를 힘을 주어 꼭 끌어 안았어. 크리스가 저도 모르게 앓는 소리를 냈지. 이 녀석이 해사에 가더니 키도 몸집도 전보다 크고 두툼해져서 온 모양이야. 숨 막혀, 이 녀석아. 그렇게 말하면서도 크리스의 입가엔 미소가 떠나질 않았어. 그 눈빛은 배리가 톰을 만났을 때 눈빛과 똑같아. 반가움에 젖어 반짝반짝 빛났지.


보고 싶었어요. 
내가 아니라 피트가 보고 싶었겠지.


크리스는 간지러운 말에 영 면역이 없었어. 공연히 머쓱해 툭 던진 말에 회색 눈동자 위로 장난기가 감돌았지. 피트도 보고 싶었지만, 아빠도 너무 보고 싶었는데요? 그렇게 말하면서 또 숨막히게 끌어안으니 크리스가 결국 항복 선언을 했어. 기실 사자 수인이 이 정도에 숨이 막힐 일은 없었지만, 자식 앞에서는 늘 약해져야 하는 것이 아버지의 덕목이지. 크리스는 톰의 어깨를 두드리며 물었어.


그래, 밥은 잘 먹고 다니냐?
보다시피 잘 먹었어요. 아빠 솜씨 만큼은 아니었지만.
해사 가서 훈련하랬더니 능구렁이 되는 법만 배우고 왔냐? 아무튼 잘 됐다. 쉬는 동안 잘 먹고 가라. 
네. 아, 아빠. 피트는요? 제가 오는 거 아직 모르죠?
아… 그게 내가 말했어. 
말했어요?
응. 펜팔 친구인지 뭔지랑 만난다더니 영 기분이 안 좋아보여서 기분 풀어 주려고 말했지. 그런데 제 방에 콕 박혀서 이사를 가야 하네 말아야 하네….
네?
아무튼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은데 말을 하질 않아. 


톰의 표정에서 웃음기가 사라졌어. 그 눈빛도 일순 무겁게 가라앉았지. 어릴 때에도 피트라면 껌벅 죽더니 해사에 있느라 떨어져 지내는 동안에도 그 성미는 어딜 가지 않은 모양이야. 크리스는 정신이 들게 해줄 요량으로 톰의 등을 손바닥으로 짝 쳤어. 톰이 놀라 돌아보자 크리스가 담담하게 말했지.


뭘 여기서 걱정하고 있어. 들어가 봐. 널 봐야 기분이 풀릴 걸.
아, 네!


톰이 고개를 끄덕이곤 곧장 가게 뒷문을 통해 집으로 향했어. 그 즈음에 다시 딸랑, 하고 종이 울렸지. 들어온 사람이야 뻔했어. 크리스의 인생 마지막 사랑이었어. 돼쥐, 왜 빨리 안 들어오고! 크리스는 공연히 보고 싶었던 말을 돌려 던졌어. 하지만 정작 그 인생 마지막 사랑의 표정이 영 떨떠름하지. 배리? 크리스가 장난 섞인 별명 대신 이름으로 부르니 그제야 배리가 입을 열었어.


자기야. 이 근처에 혹시 톰이랑 같은 서벌 수인이 산다는 얘기 들어봤어?
아니? 최근 이사온 집도 없잖아. 
그런데 내가 방금 서벌을 본 것 같아.
뭐?


그냥 말뿐이라면 잘못 봤겠지, 하고 끝냈을 일이야. 하지만 말을 끝낸 배리가 보여준 것이 아직 어린 소년의 옷과 모자인 걸 알았을 때 크리스의 표정이 바뀌었어. 




톰을 만나면 무슨 이야기부터 해야 할까. 
피트는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마시면서 머릿속을 정돈했지. 사실 정리를 하고 말고 할 것도 없었어. 닉을 만난 건 정말 갑작스러운 일이었고, 톰이 오늘 온다는 건 더더욱 갑작스러운 이야기였지. 갑작스러운 일이 연타로 찾아오니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고, 크리스 아빠에게 이사를 가자느니 어쩌느니 하는 헛소리까지 했지만! 따지고 보면 그렇잖아? 닉이 설마 여기까지 찾아올 리는 없었어. 그도 그럴 게 그 애는 제 형의 얼굴도 기억하지 못할 테니까. 그러니 닉이 사실 할 말이 있다고 한 것도 굳이 톰에 관한 게 아닐 수도 있었지. 그 집안에서 톰에게 무신경했던 걸 생각하면, 그 애가 형의 존재 같은 걸 알리도 없었고….


오버하지 말자, 피트 미첼. 이건 그냥 끔찍한 우연 같은 거야.

피트는 마음의 정리를 하고 냉장고 문을 닫았어. 그래, 그 뿐이라고. 
그때 다시 한 번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어. 등 뒤에서였지. 피트는 고개를 돌리다 말고 두 눈을 깜박였어.


토미?


석양의 역광으로 톰의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아. 그렇지만 피트는 알 수 있었지. 당연한 걸! 피트는 제 아기 고양이라면 그가 달나라에 있어도 알아볼 수 있었어. 피트가 부름에도 톰은 잠깐 말이 없었어. 무슨 생각을 하고 온 건지, 꽤 복잡한 심경이 어려 있던 눈빛이 피트를 본 순간 잠깐 멍한 빛을 띠었다 곧 사르륵 녹았지. 톰이 한 걸음 걸어 들어왔어. 역광의 그림자가 흘러내리며 비로소 얼굴이 보였어. 톰은 장난스럽게 손을 흔들었지.


안녕? 피트.


녹색 눈동자가 그 웃음을 낯선 빛으로 바라보았어. 너무 오랜만에 봐서 생경하기 때문이 아니야. 그저 새삼스러운 사실이 언뜻 머릿속에 떠올랐거든. 톰이 새삼 어른이라는 그런 사실 말야. 키와 몸집이 모두 커졌고, 얼굴도 영락없는 어른이야. 목소리도 달랐지. 하지만, 그 웃음은 여전해서 심장이 시끄럽게 뛰었지,  피트, 톰이 힘을 주어 다시 그를 부르던 그때에 피트는 저도 모르게 뛰어가 톰의 품에 안겼지.


보고 싶었어.


웅얼거리는 소리에 톰은 그제야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돌릴 수 있었어.


가게와 집까지 거리는 아주 짧은 편이야. 그 짧은 거리를 걸으면서, 톰은 피트의 펜팔 친구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어. 그 펜팔 친구라는 놈과 무슨 일이 있길래 기분이 안 좋은 건지, 설마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진 건지, 만일 구스의 헛소리처럼 피트가 그 펜팔 친구라는 녀석과 사귀기라도 하면 어떻게 해야 좋을지… 거기까지 생각이 치닫던 때에 톰은 문득 제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졌지.


피트가 힘들어 해. 가서 이야기를 듣고 위로해줘야 할 일이야.  그 외에 달리 뭐가 중요하겠어? 


그런 생각을 안고 들어왔는데, 오랜만에 본 피트가 창가를 타고 들어오는 노을녘 빛을 맞으며 서 있는 모습이 너무 예뻤어. 저도 모르게 아무런 생각도 들지 못할 만큼 말야. 보고 싶었어, 그 한 마디엔 톰의 머릿속이 깨끗하게 날아갔지. 그저 벅차게 가슴이 뛰었어. 피트가 달려와 품에 안기는 이 순간마저 꿈인 것처럼 말야. 톰은 웃으면서 피트와 두 눈을 마주했어.


잘 지냈어?
응. 난 잘 지냈지. 넌 이틀 뒤에 온다더니.
…짠, 서프라이즈?
서프라이즈는 무슨, 크리스 아빠가 다 말해줬어!
응, 아빠한테 얘기 다 들었어. 네가 기분이 아주 안 좋아서 말을 했다고.
….
피트. 무슨 일인지 내게 말해줄 수 있어?


아, 이건 생각지도 못했는데. 그냥 크리스에게 가서 적당히 얼버무리고 톰을 맞이하려고 했거든. 그런데 막상 톰을 보니 뭘 어떻게 적당히 얼버무려야 할 지 도통 감이 잡히질 않았어. 어떡하지, 사실 네 동생을 만났어? 이렇게 말해? 하지만 어떻게….

그때였어. 
문득 피트의 녹색 눈동자에 창가 너머 풀섶이 비쳤어. 정확히는, 그 풀섶에서 하얀 점이 박힌 얼룩무늬 귀끝이 쫑긋거리는 게 보였지. 피트가 잘 아는 모양의 귀야. 하지만 이 집안에서 그런 모양의 귀를 가진 사람은 피트의 눈앞에 서 있고, 진심으로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피트를 바라보고 있지. 


설마.
피트의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어.




#아이스매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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