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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10 21:16
<검은 사슴>




길에서 우는 사람은 오히려 주변 사람들에게 곁을 주지 않는 성품일 것이라는 추측을 해본 일도 있었다. 얼마나 평소에 눈물을 보이는 것을 꺼려했으면, 억지로 막아 두었던 둑이 터지듯 익명의 무수한 사람들 속에서 울음을 터뜨릴 것인가.




"하지만, 다른 곳에 가도 결국 마찬가지겠죠.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딘가에서는 교전이 벌어지고 있고, 누군가 살해되고, 굶고 병들어 죽어가고 어린 여자애들이 몸을 팔고 있겠죠. 힘을 가진 큰 것들이 힘없는 작은 것들을 먹고 마시는 동안⋯ 그런 것들은 결코 변하지 않겠죠. 오히려 점점 심해지겠죠.

내가 너무 예민한가요? 선배도 그렇게 생각해요? 내가 너무 피곤하게 생각하고 있나요? 내면이 텅 비어서 밖으로만 뛰쳐 나가려고 하는 사람 같아요? 바깥에서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고 믿는 어리석은 철부지 같아요? 솔직하게 말해봐요."




명윤은 죽음을 넘어서는 사랑이라는 따위의 말을 믿지 않았다. 단지 멀리 있다는 이유만으로, 상대의 고통이나 병이나 죽음을 알아낼 수 있는 힘조차 잃어버리고 말만큼 무력한 것이 사랑이었다. 지금 의선이 어디에 있으며 어떤 상태인지 그가 전혀 알 수 없으며 아무런 육체적 통증도 전해지지 않듯이.












<채식주의자>
- 3편의 연작소설집




그 저녁, 영혜의 말대로 그들이 영영 집을 떠났다면 모든 것은 달라졌을까. 그날의 가족모임에서, 아버지가 영혜의 뺨을 치기 전에 그녀가 더 세게 팔을 붙잡았다면 모든 것은 달라졌을까.

영혜가 처음 제부를 인사시키러 데려왔을 때, 어쩐지 인상이 차가워보여 마음에 들지 않았었다. 육감대로 그 결혼을 그녀가 만류했다면 모든 것은 달라졌을까.

그렇게 그녀는 영혜의 운명에 작용했을 변수들을 불러내는 일에 골몰할 때가 있었다. 동생의 삶에 놓인 바둑돌들을 하나하나 되짚어 헤아리는 일은 부질없었을뿐더러 가능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생각을 멈출 수는 없었다.

만일 그녀와 그가 결혼하지 않았다면. 마침내 거기에 생각이 이를 때, 그녀의 머리는 둔중히 마비되곤 했다.










<희랍어시간>
- 언어와 사랑에 관함




이십 년 가까운 시간이 흘러갔지만, 그 순간의 어떤 것도 내 기억 속에선 흐려지지 않았습니다. 그 순간뿐 아니라, 당신과의 가장 끔찍했던 순간들까지 낱낱이 살아 꿈틀거립니다. 나의 자책, 나의 후회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은 당신의 얼굴입니다. 눈물에 온통 젖어 번들거렸던 그 얼굴. 내 얼굴을 후려친, 수년간 억센 나무를 다뤄 사내보다 단단했던 주먹. 나를 용서하겠습니까. 용서할 수 없다면, 내가 용서를 구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 주겠습니까.




"그 시절이 지나가기 전에 너를, 단 한 번이라도 으스러지게 마주 껴안았어야 했는데. 그것이 결코 나를 해치지 않았을 텐데. 나는 끝내 무너지지도, 죽지도 않았을 텐데."




화해할 수 없었다. 화해할 수 없는 것들이 모든 곳에 있었다.




"암기한 대로 소리내어 읽을 때 공포를 느껴요. 태연하게 내 혀와 이와 목구멍으로 발음된 모든 음운들에 공포를 느껴요. 내 목소리가 퍼져 나가는 공간의 침묵에 공포를 느껴요. 한번 퍼져나가고 나면 돌이킬 수 없는 단어들, 나보다 많은 걸 알고 있는 단어들에 공포를 느껴요."






당신은 아마 짐작하지 못했을 테지만, 이따금 나는 당신과 긴 대화를 나누는 상상을 했는데. 내가 말을 건네면 당신이 귀 기울여 듣고, 당신이 말을 건네면 내가 귀 기울여 듣는 상상을 했는데. 텅 빈 강의실에서 희랍어 수업의 시작을 기다리며 함께 있을 때, 그렇게 실제로 당신과 대화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는데.

하지만 고개를 들어보면 당신은 절반, 아니 삼분의 이쯤, 아니, 그보다 더 부서져버린 사람처럼, 무엇인가로부터 가까스로 살아남은 벙어리 사물처럼, 무슨 잔해처럼 거기 있었는데. 그런 당신이 무서워지기도 했는데. 그 무서움을 이기고 당신에게 다가가 가까운 의자에 걸터앉았을 때, 당신도 문득 몸을 일으켜 꼭 그만큼 다가와 앉을 것 같기도 했는데.

그렇게 무서운 당신의 침묵이 생각나는 밤이 있었는데. 빛이 가득 고여 일렁이는 것 같았던 R의 것과는 전혀 다른 침묵. 얼음 밑에서 두드리다 굳어버린 손 같은 침묵. 피투성이 몸 위로 쌓인 눈더미 같은 침묵. 어느 순간 그게 진짜 죽음으로 변해버릴까봐 두려웠는데. 정말 딱딱해져버릴까봐, 정말 싸늘해져버릴까봐 불안했는데.










<노랑무늬영원>
- 단편집




"난 정말 모르겠어, 사람들이 어떻게 통념 속에서만 살아갈 수 있는지, 그런 삶을 어떻게 견딜 수 있는지."

"그렇게 생각하니, 하지만 그럴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지 않을까, 통념 뒤에 숨을 수 있어서."




그러지 마, 라고 그때 말했어야 했다. 그러지 마. 우리 잘못이 있다면 처음부터 결함투성이로 태어난 것뿐인걸.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게 설계된 것뿐인걸. 존재하지 않는 괴물 같은 죄 위로 얇은 천을 씌워놓고, 목숨처럼 껴안고 살아가지 마. 잠 못 이루지 마. 악몽을 꾸지 마. 누구의 비난도 믿지 마.




만나고 싶다고 나는 생각한다. 지금의 그가 아니라, 그때의 그를. 아니, 실은 그때의 나를. 그 여자를. 고집 세고, 무엇에도 물들지 않은, 그래서 성숙하지 않은 그 여자를. 그러다가, 뜻밖에도 불에 덴 듯 깨닫는다. 그때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은 자신을. 그, 아무것도 모르던 때로 돌아갈 수는 없는 거라고 생각하는 자신을.




그때 안다. 만일 내가 이 세상에서 사랑을 가진 인간으로서 다시 살아나가야 한다면, 내 안의 죽은 부분을 되살려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 부분은 영원히 죽었으므로. 그것을 송두리째 새로 태어나게 해야 하는 것이다. 처음부터 다시 배워야 하는 것이다.









<바람이 분다, 가라>




한번도 고백한 적 없지만, 이십여 년 동안 가까이 있었지만, 인주와 함께 있는 것은 언제나 특별한 경험이었다.




"닥쳐. 도취하지 마. 앞지르지 마. 그녀들은 당신이 원한 것만큼 약하지 않았어."








<소년이 온다>
- 5.18




그렇다면 우리에게 남는 질문은 이것이다. 인간은 무엇인가. 인간이 무엇이지 않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나중에 알았습니다. 그날 군인들이 지급받은 탄환이 모두 팔십만발이었다는 것을. 그때 그 도시의 인구가 사십만이었습니다. 그 도시의 모든 사람들의 몸에 두발씩 죽음을 박아넣을 수 있는 탄환이 지급되었던 겁니다. 문제가 생기면 그렇게 하라는 명령이 있었을 거라고 나는 믿고 있습니다. 학생 대표의 말대로 우리가 총기를 도청 로비에 쌓아놓고 깨끗이 철수했다면, 그들은 시민들에게 총구를 겨눴을지도 모릅니다. 그 새벽 캄캄한 도청 계단을 따라 글자 그대로 콸콸 소리를 내며 흐르던 피가 떠오를 때마다 생각합니다.




대통령이 돌연히 죽은 시월 당신은 자문했다. 이제 폭력의 정점이 사라졌으니, 더이상 그들은 옷을 벗어들고 울부짖는 여공들을 끌고 가지 못하는가? 넘어진 여자애의 배를 밟아 창자를 터뜨리지 못하는가? 박 대통령의 신임을 받았다는 젊은 소장이 장갑차를 이끌고 서울에 입성하는 것을, 곧이어 중앙정보부장을 겸직하는 것을 당신은 신문을 통해 지켜보았다. 조용히 소름이 끼쳤다. 무서운 일이 생길 것 같아.




기억해달라고 윤은 말했다. 직면하고 증언해달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삼십 센티 나무 자가 자궁 끝까지 수십 번 후벼들어왔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소총 개머리판이 자궁 입구를 찢고 짓이겼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하혈이 멈추지 않아 쇼크를 일으킨 당신을 그들이 통합병원에 데려가 수혈받게 했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이년 동안 그 하혈이 계속되었다고, 혈전이 나팔관을 막아 영구히 아이를 가질 수 없게 되었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타인과, 특히 남자와 접촉하는 일을 견딜 수 없게 됐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짧은 입맞춤, 뺨을 어루만지는 손길, 여름에 팔과 종아리를 내놓아 누군가의 시선이 머무는 일조차 고통스러웠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몸을 증오하게 되었다고, 모든 따뜻함과 지극한 사랑을 스스로 부숴뜨리며 도망쳤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더 추운 곳, 더 안전한 곳으로. 오직 살아남기 위하여.










<흰>
- 시집 같기도 한 단편 소설집




그러니까 이 모든 것들이 한번 죽었었다. 이 나무들과 새들, 길들, 거리들, 집들과 전차들, 사람들이 모두. 그러므로 이 도시에는 칠십 년 이상 된 것들이 존재하지 않는다. 구시가의 성곽들과 화려한 궁전, 시 외곽에 있는 왕들의 호숫가 여름 별장은 모두 가짜다. 사진과 그림과 지도에 의지해 끈질기게 복원한 새것이다. 간혹 어떤 기둥이나 벽들의 아랫부분이 살아남았을 경우에는, 그 옆과 위로 새 기둥과 새 벽이 연결되어 있다. 오래된 아랫부분과 새것인 윗부분을 분할하는 경계, 파괴를 증언하는 선들이 도드라지게 노출되어 있다.




하얗게 웃는다, 라는 표현은 (아마) 그녀의 모국어에만 있다. 아득하게, 쓸쓸하게, 부서지기 쉬운 깨끗함으로 웃는 얼굴. 또는 그런 웃음. 너는 하얗게 웃었지. 가령 이렇게 쓰면 너는 조용히 견디며 웃으려 애썼던 어떤 사람이다. 그는 하얗게 웃었어. 이렇게 쓰면 (아마) 그는 자신 안의 무엇인가와 결별하려 애쓰는 어떤 사람이다.




그렇다면 이 도시의 혼들은 자신들이 총살된 벽 앞에 이따금 날아들어, 그렇게 소리 없는 움직임으로 파닥이며 거기 머무르곤 할까? 그러나 이 도시의 사람들이 그 벽 앞에 초를 밝히고 꽃을 바치는 것이 넋들을 위한 일만은 아니라는 것을 그녀는 안다. 살육당했던 것은 수치가 아니라고 믿는 것이다. 가능한 한 오래 애도를 연장하려 하는 것이다.​

그녀는 자신이 두고 온 고국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생각했고, 죽은 자들이 온전히 받지 못한 애도에 대해 생각했다. 그 넋들이 이곳에서처럼 거리 한복판에서 기려질 가능성에 대해 생각했고, 자신의 고국이 단 한 번도 그 일을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작별하지 않는다>
- 4.3을 다룸




생명이 얼마나 약한 것인지 그때 실감했다. 저 살과 장기와 뼈와 목숨들이 얼마나 쉽게 부서지고 끊어져버릴 가능성을 품고 있는지. 단 한 번의 선택으로.




이제는 오히려 의아하게 생각한다. 학살과 고문에 대해 쓰기로 마음먹었으면서, 언젠가 고통을 뿌리칠 수 있을 거라고, 모든 흔적들을 손쉽게 여읠 수 있을 거라고, 어떻게 나는 그토록 순진하게 — 뻔뻔스럽게 ㅡ 바라고 있었던 것일까?




"까무러칠 것같이 아팠는데, 정말 차라리 까무러치고 싶었는데, 왜 그때 네 책 생각이 났는지 몰라. 거기 나오는 사람들, 아니, 그때 그곳에 실제로 있었던 사람들 말이야. 아니, 그곳뿐만 아니라 그 비슷한 일이 일어났던 모든 곳에 있었던 사람들 말이야. 총에 맞고, 몽둥이에 맞고, 칼에 베여 죽은 사람들 말이야, 얼마나 아팠을까? 손가락 두 개가 잘린 게 이만큼 아픈데. 그렇게 죽은 사람들 말이야, 목숨이 끊어질 정도로 몸 어딘가가 뚫리고 잘려나간 사람들 말이야."




무엇을 생각하면 견딜 수 있나. 가슴에 활활 일어나는 불이 없다면. 기어이 돌아가 껴안을 네가 없다면.











한강 작품들 다 너무 좋음 꼭 읽어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