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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09 2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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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디를 챙겨 먹이고 집을 나선 길. 톰와 아이의 목적지는 마당을 맞댄 뒷집, 앵거 씨네였어.
그런데 앵거 씨네 집에 들어가자마자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지.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반기는 게 고양이 미니뿐이어야 했는데, 다른 사람이 더 있었거든.

"톰, 어서 와요."

그것도 전혀 예상하지 않았던 남자.

"제프? 여기엔 왜...?"

빙긋 웃은 제프가 화제를 바로 돌렸어.

"앤드류, 잘 잤니?"

쑥쓰럼이 있는 앤디는 무의식중에 톰을 살짝 봤다가 제프를 향해 안녕하세요... 하고 답했어. 앤디와는 비스트로에서 간혹 마주친 것을 제외하면 그다지 교류가 없었던 제프지만, 아이를 어려워하는 성격은 아니라서 앤디를 쑥 들어 올렸음. 그가 등을 돌려 앵거 씨의 응접실로 가는 동안 앤디는 내려 달라는 말도 못 하고 어쩔 줄 몰라 했어. 당황한 건지 부끄러운 건지 분간할 수 없었지. 그래도 안정감 있는 자세를 쫓아 점차 제프를 끌어안는 앤디처럼, 톰 역시 어쩔 수 없이 그 뒤를 쫓아 이동했지.

응접실에는 간만에 상태가 좀 좋아 보이는 앵거 씨가 있었어. 앤디는 앵거 씨 옆에서 미니의 환대를 받았어. 손에 고양이 털이 스치자 아이의 뺨이 발그레해졌지.

"이렇게 앉아 계셔도 괜찮은 거예요?"
"콜록콜록, 이 정도야 뭘. 오늘은 해가 좋아서 괜찮아."

톰의 질문에 앵거 씨는 폐가 좋지 않아 콜록이면서도 대답했어. 그보다 오늘 좀 늦게 일어났구먼? 앵거 씨의 물음에 톰은 이게 무슨 말인가 하고 생각해. 오늘 언제쯤 잔디를 깎으러 들르겠다고 말한 적이 없는데 마치 방문을 알고 계셨던 것처럼 이야기하시니.
그때 제프가 눈치 빠르게 끼어들었어. 

"맞아요, 오늘 좀 늦었군요? 아침밥 먹고 만나기로 했는데."

이게 무슨 말인가 싶어 톰이 제프를 바라보자 제프가 한쪽 눈을 윙크하더라. 톰은 기가 차서 허, 하고 웃음을 흘렸어. 노인은 그 광경을 바라보다가 미간을 찌푸려.

"약속한 게 아니었던 겐가?"
"하하... 꼭 그렇지는 않지만요. 톰이 이웃을 돕는다는데 참여해야죠."

제프의 능글맞은 답변에 이 날 선 검처럼 예리한 노인이 정곡을 찔렀어.

"톰한테 들이대고 있나 본데, 이 늙은이한테 잘해 준다 그래서 뭐 떨어지는 건 없을걸세."

그러자 톰의 얼굴에 쓴 미소가 얹혔어.

"그렇디 않다는 거 아시잖아요, 아저씨. 저와 제이크한테는..."
"어허, 곧 죽을 사람한테 의미 부여하지 말게."
"그런 말 하지 마세요."

톰은 앵거 씨의 말을 멈추려고 옆에 앉아 그의 손을 잡았어. 살이 내린 손은 뼈만 남아 앙상했어. 재작년만 해도 너무도 강건했던 사람인데 이제는 자리에서 일어나는 일도 쉽지 않고.
어제 제프가 한 말이 맞아. 이 노인은 그와 제이크에게는 아버지였어. 일상을 들여다봐 주고 끌어 주었던 사람.

톰은 어쩐지 눈물이 솟아서 그 손을 만지막대며 고개를 숙여. 이만큼 노쇠한 분한테 이제 아프지 마시라는 말이나 쾌차하실 거라는 말은 할 수 없어서.

"톰, 입만 둥둥 살아 있는 알파는 만나는 게 아니야."

앵거 씨의 입에서 툭 튀어나온 당부에 결국 우는 듯 웃음을 흘리고 말았지만.

몸은 건강하지 못해도 마음이 건강한 사람은 그렇게 자상하지. 슬픔을 걷어 내려고 농담을 던지는 앵거 씨와 톰은 왜 저렇게 닮았을까. 제프는 문득 그런 생각을 해 봐. 피가 이어져 있다고 해서 그것만 가족인 게 아니라고.

"아, 너무하시네. 전 입도 살아 있고 신체도 건강한 알파랍니다. 톰이 오기 전에 먼지투성이인 차고를 뒤져 잔디깎이를 꺼내 놓은 게 누구인데요."

사실 제프는 톰이 앵거 씨와 시간을 나눌 수 있게 그 대신 잔디를 깎고 마당 일을 돌보려고 왔는데, 막상 앵거 씨네에 들어와 보니 생각보다 할 일이 있어 보였어.
주중에 와서 서너 시간 정도 있다 가는 케어센터의 직원은 앵거 씨가 몸을 움직이는 걸 도우며 건강 상태를 점검하는 데 집중하는 편이야. 그래서 집안을 청소하고 세탁과 설거지를 하거나 식재료를 사 두는 등의 자잘한 일을 전부 하지는 않았어. 다행히 노인이 깔끔한 성향이었기 때문에 집 안이 너저분하지는 않았지만 본래 집안일이라는 것이 잠깐만 하지 않아도 금방 티가 나는 법이었지. 며칠 전에 제이크가 왔을 때 설거지를 해 놓고 그 김에 주방은 깨끗이 청소해 놓았지만, 서재며 응접실 같은 데에 늘어진 책들과 봉투, 서류 따위를 정리하고 청소도 꼼꼼히 하는 게 좋을 듯했어. 가능하다면 세탁도 해 놓고.

앤디가 앵거 씨 옆에 앉아서 요즘 뭘 배우는지, 어떤 TV 프로그램을 재밌게 봤는지 같은 소소한 일들을 늘어놓는 동안 제프는 바깥에서, 톰은 집 안에서 바쁘게 움직였어. 평소 케어센터의 직원과 제이크가 들여다본 덕택에 세네 시간 움직이자 집 안은 금새 말끔해졌지. 간만에 묵은 때와 먼지를 벗겨 낸 공기가 청량해진 것만 같았음.

서재에서는 앵거 씨가 좋아하는 시나트라의 재즈가 흐르고, 응접실에는 앤디에게 책을 읽어 주는 앵거 씨가 있고, 창 밖으로는 지나치게 웃자란 덩굴을 제거하고 빗물받이의 낙엽을 치우느라 지붕 위로 올라간 제프가 보였지. 갓 빨래가 끝난 담요와 이불 따위를 끌어안고 지하실에서 올라온 톰은 갑자기 이 광경이 비현실적인 것처럼 느껴졌어. 제프 때문인지, 아니면 여유로운 일요일 오후이기 때문인지. 

마당에 걸어 놓은 빨랫줄 위로 시트를 널고 제프를 바라봐. 톰의 이동을 신경 쓰던 제프는 그를 보고 입꼬리를 올려 미소 지었어. 눈높이 위로 시야를 덮은 시트에 제프가 가려졌는데, 다시 그쪽을 봤을 때 제프는 이미 고개를 돌린 뒤였지. 지붕 위에서의 일이 얼추 끝났는지 차고 안쪽을 훑는 그의 뒷모습을, 톰은 물끄러미 바라보다 집 안으로 들어갔어.
제프는 왜 메시지에 답하지 않았느냐고 묻지 않았고, 톰도 제프더러 여기 왜 왔느냐고 질문하지 않았지. 고민들이 차고 엉켜서 회피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어.

물 한 잔 마시려고 부엌으로 가는 길, 앵거 씨를 마주쳤어. 앤디에게 핫 초콜릿을 내주려고 손수 보행기를 끌고 나온 참이시라고. 톰은 앵거 씨를 의자에 앉히고 그 옆에서 우유를 끓여.
요즘 해군 기지 상황은 어떻다든지, 제이크가 공부하는 일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같은 이야기들이 나오는데, 앵거 씨가 문득 이런 말을 해 왔어.

"톰, 마음이 가는 대로 해도 돼."
"...저도 제 마음이 뭔지 모르겠는걸요."
"정말 마음이 없다면 고민은 왜 했겠어? 실패해 봤자 죽기야 하겠나, 그냥 좀 아프고 마는 거지."

톰은 푸흐, 한숨 쉬고 웃었어.

"제프 이야기 하시는 거 맞죠?"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지."
"네?"
"도망치면서 살면 안 돼."

알 듯 모를 듯 알쏭달쏭한 말이었지. 다만 노인의 눈은 다른 지점을 볼 법도 한 거니까.

"...자요, 아저씨 것 하나, 앤디 것 하나."

보행기 위에 올린 핫 초콜릿 두 잔. 앵거 씨는 고맙다는 말 뒤에 한마디를 덧붙였어.

"아직 제대로 된 놈인지 아닌지 몰라도 저만큼 일했으면 음료수 한 잔은 받을 만하지. 날 대신해서 아이스티 한 잔만 가져다주겠나?"

앵거 씨의 차고에는 운신이 어려워 내놓지 못한 큰 쓰레기들이 제법 많았어. 그때쯤 제프는 쓰레기들을 크기별로 분류하고 미화원들이 수거해 갈 수 있게 길 앞으로 나르는 중이었지. 그러다 얼음을 동동 띄운 음료를 든 톰의 등장에 그쪽을 바라봤어.

대화를 할 만한 타이밍인데 톰은 여전히 말이 없어. 제프는 뭐라 말을 붙일까 하다가 그의 답변을 듣는 게 무서워져서 말없이 음료만 들이켰지. 어제도 오늘도 톰에게 감정을 쏘아붙였다고 느끼면 어떡하나.
아니나 다를까, 이내 톰이 다소 딱딱한 어투로 말했지.

"제프, 여기 왜 왔어요?"

앵거 씨의 말이 다 이해되는 건 아니지만 하나는 분명해. 도망치면 안 되는 때가 있거든.

"이유가 있어야 해요?"
"...이렇게까지 할 필요 없었잖아요."

시선을 마주하지 않고 아래로 내리는 톰. 제프는 조바심이 난 나머지 그의 팔을 잡아 저를 보게 했어.

"톰 당신이 여기 있을 거니까. 그래서 왔어요. 그것만으로는 안 되는 거예요?"

톰은 뭐라 할 말을 잃고 제프를 멍하니 바라봤어. 제프가 그러고 싶었다면 안 될 이유는 없지. 하지만, 하지만 그러면 안 되는 거 아닌가?

"토마스 허드너. 난 계속 진심이었는데 당신은 믿어 주지 않네요. 어떻게 해야 날 믿어 주겠어요?"

제프의 입에서 투정과 비슷한 말이 흘러나갔어. 좋아하는 사람의 마음이 준비가 될 때까지 기다리는 일은 인내를 요했지만 그게 싫지 않았어. 하지만 불안은 어쩔 수 없나 봐. 이미 제가 물을 엎질러 버렸는데, 만약 톰이 닦아 줄 생각조차 없다면.
톰은 당황한 기색으로 고개를 저었어.

"내가 왜 안 믿는다고... 난 제프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요."
"그럼 내가 당신의 남자친구가 되고 싶어 하는 건 왜 믿지 않아요?"

톰이 화끈 달아오른 얼굴을 돌려 보이지 않게 하려 애 썼어. 제프는 본능으로 알았어. 그가 물러설 곳을 두지 않아야 한다는 걸.

"당신한테 키스하고 싶고, 당신 안에 들어가고 싶어 죽을 것 같아요."
"그건..."
"당신은 어때요?"

그를 두려워하는 듯하면서도 반기듯 떨리는 눈동자. 차고의 얼마 없는 빛이 거기 다 모여 있는 것 같은 설레임. 톰의 눈을 보자 제프는 답을 알 것 같았어.

제프의 목이 그의 자리를 찾아 들어가. 수 개월 만에 간신히 맞닿은 입술은 아까 먹은 아이스티 맛이 났어. 그게 우습고 행복해서 흘러나온 웃음 뒤로 그의 혀가 톰의 입술을 열었어.



*



제프가 한참이고 놔주지 않는 통에-그리고 사실 톰도 안도한 데다 창피했던 탓에- 두 사람은 한참 후에야 차고를 다 정리하고 나올 수 있었어. 저녁이라기엔 좀 이른 시각, 그들 말고도 방문자가 있었지. 제이크와 피터가 온 거였어.

"토미, 청소를 너무 잘해 놨네. 집이 반짝반짝해졌어."

잠깐 레스토랑에 들러서 주말 추이를 지켜보고 음식도 가져왔다는 제이크가 현관에서 두 사람을 반겼어. 제프의 손을 잡고 있던 톰은 그걸 놓으려고 했는데, 제프가 손에서 힘을 풀지 않아서 빼내지 못했어. 제이크는 그걸 보더니 말하지 않아도 알겠다는 듯이 픽 웃었지.
톰은 민망했지만 굳이 제프의 의견에 반해 서둘러 손을 빼지는 않았어. 하지만 앤디가 눈치채기 전에는 제프를 살짝 밀어 빼냈지. 

"그렇게 됐어."

그 체념 어린 보고에 제이크는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지만 추궁을 하지는 않았어. 톰한테는 새로운 사람이나 관계가 필요하니까.

네 명의 어른과 어린아이 둘. 총 여섯 명은 대가족이라도 된 것처럼 음식을 늘어놓고 식사를 가졌어. 제이크가 하고 있는 LSAT 준비며 피터와 앤디의 나들이 등 여러 이야기가 그치지 않았지.

누구라고? 브래디? 아이들의 입에서 브래들리 아저씨라거나 루스터 따위의 호칭이 나오는데 앵거 씨는 그 이름이 낯선 것처럼 물었어. 그러자 제이크가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지. 아이스크림 먹을 사람? -저요! 앵거 씨는 아이 아빠가 등장했다는 건 알고 계셨지만 그게 누구인지, 정확히 어떤 상황인지는 모르셨던 모양이지. 제이크가 브래드쇼와 주변인들 사이에 거리를 두고 있는 거야.

톰은 브래드쇼를 받아들이지도 내치지도 못한 제이크를 걱정과 연민이 담긴 시선으로 바라봤어. 이 세상에 제이크 세러신을 저런 눈으로 볼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지만, 톰은 그중 하나였으니까. 

그가 생각한 것처럼, 제이크와 루스터 사이는 그다지 쉽지 않아. 어제도 늦은 시간까지 아이들을 케어하느라 피곤할 테니 자고 가게 한 것뿐이지.
사실 뜻밖의 일이 제이크를 동요하게 하긴 했지만...














#루스터행맨 #제프허드너
이게 뭐라고 어느새 14화임ㅋㅋㅋㅋ 슬금슬금 개미 속도로 가는데 봐조서 코마움.
사실 제프허드너는 마지막까지 오픈 엔딩으로 갈까 했는데 허드너가 고민을 오래 끌며 스스로와 주변을 괴롭히지 않을 타입이라 꽤 빨리 이어진 듯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