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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07 21:50
https://hygall.com/602674105 <옆집 음악소리 정도는 그냥 참자
https://hygall.com/607019419 <이런 엿같은 일이 생기니까
그 날은 결국 어땠냐면. 정말 엿같은 밤이었음. 그 주 주말까지도.
침대에 눕긴 했는데 한참을 잠이 안 오는 거야. 옆집남자가 사람 기분을 난장판을 만들어두고 본인은 홀가분하게 몸만 나갔는데 잠이 오겠음?
안 그래도 잠 못 드는 밤이면 별 생각을 다 하게 되잖아. 그 날도 누워서 이리 뒤척, 저리 뒤척. 몸 한 번 움직일 때마다 엿같은 생각들이 떠오르는 거임.
그래서 옆집남자는 대체 뭐하는 인간인데? 그런 인간한테 정상적인 대화를 기대한 내가 멍청이지. 그보다 그 시간에 전화 한 통 받고 달려 나갈 정도면 보통 사이 아닌 여자가 있는 거 아닌가? 왜 남의 집에 밀고 들어와서 수작질이야. 혹시 어디 기둥서방이었던 건 아닌가? 말하는 거 듣다 보니까 그렇다고 해도 안 놀라울 것 같던데. 그래서 주인님이 부르자마자 달려나갔나? 여자랑 있던 거 들킬까 봐 쪼르륵 옷 가져가는 것도 잊고? 얼떨결에 옆집남자랑 더한 짓이라도 했으면 어쩔 뻔 했어.
아니지. 내가 이런 추측은 왜 하고 이런 가정은 왜 하고 있는데? 겨우 말 몇 마디 나눠본 옆집사람이 뭐라고.
진짜 생각하기 싫은데 한 번 생각하기 시작하니까 멈출 수가 없었음. 일부러 생각하는 게 아니라 자꾸 이것저것 떠오르는데 어캄.
그렇게 한참 뒤척이면서 심지어 옆집에서 무슨 소리라도 나지는 않는지 중간중간 귀까지 기울여봄. 적어도 내가 잠들기 전까지는 현관문 소리도 안 나더라. 만약 옆집남자가 집에 들어갔으면 새벽이라 조용해서 들렸을 텐데.
그래서 결국 열쇠 잃어버렸다는 이야기는 진짜라는 거야, 거짓말이라는 거야?
내가 받은 열쇠로 그 집 문을 열어볼 수도 없고. 그래도 되긴 하지만 왠지 이상하잖아. 자존심 상하잖아! 내가 왜 그런 짓까지 하는데? 뭐가 그렇게 신경쓰여서!
그런 생각들만 계속 반복하다가 간신히 잠들긴 했음.
그나마 자고 일어나니까 기분은 좀 낫더라. 어떻게 돌아온 주말인데 잠깐 있었던 엿같은 해프닝 때문에 휴일을 다 날릴 수는 없잖아.
그래서 그냥 다 잊어버리고, 신경 끄기로 했음. 집에는 어떻게든 들어갔겠지. 문을 뜯었든 열쇠를 찾았든, 애초에 거짓말이었든. 본인 집인데 알아서 들어갔겠지. 신경 끄는 게 꽤 큰 효과가 있었음.
몇 시간 정도는.
이게 한 번 꼬이면 진짜 온갖 이상한 방법으로 사람 신경을 긁을 수도 있는 거더라.
이번엔 옆집남자가 직접 날 신경쓰이게 만든 건 아님. 따지자면 옆집남자한테 그럴 의도가 있었던 것도 아니지. 어떻게 보면 내가 스스로 자초한 일일 수도 있음.
잘 자고 일어나서 머리 비울 겸 밀린 청소랑 빨래부터 했거든. 어차피 작은 집이라 청소도 얼마 안 걸림. 그래도 어떤 남자 흔적도 기억 안 나도록 깨끗하게 청소하고 나니까 뿌듯했음.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면서 정리 다 하고 쓰레기를 버리러 나갔거든. 근데 바로 옆집을 아예 안 보고 돌아다니기는 어렵잖아.
내 집에서 나갈 때든 들어갈 때든 그 집 주민도 아니고 그 집 문이랑 어떻게 안 마주칠 수가 있겠어.
게다가 딱히 그 집 문이랑 마주쳐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했을 리가 없잖아.
그렇게 얼떨결에 그 집 문을 봐버렸고, 그 집 문고리에 아직 옆집남자 겉옷이 걸려있는 걸 봐버린 거지. 내가 걸어뒀던 거 말이야.
집에 돌아왔으면 갖고 들어갔을 옷이 아직 문에 걸려 있었다고. 그 말은..
밤새 옆집남자가 집에 들어갔든 말든 나랑 무슨 상관임? 내가 신경 쓸 일도 아니고 내 신경에 거슬릴 일도 아니지.
쓰레기 버리고 돌아와서도 한동안 신경이 곤두서기는 했지만 뭐. 그것도 잊기로 했음. 일단 식사부터 하려니까.. 이런 빌어먹을 스콘.
하지만 스콘은 죄가 없잖아?
충동적으로 버릴까 했다가 그만두기로 했음. 스콘은 여전히 맛있었음. 잼이랑 크림도.
그 뒤에도 그럭저럭 시간을 알차게 잘 보냈어. 나도 모르게 옆집에서 무슨 소리가 나지는 않는지 몇 번 귀를 기울이긴 했지만. 그 정도는 내 주말에 지장이 가는 것도 아니잖아.
오랜만에 책도 좀 읽고, 친구랑 통화도 하고, 약속도 잡고, 또.. 원래 주말은 항상 쏜살같이 지나갔는데. 왜 유난히 시간이 느리게 가는 것처럼 느껴졌는지는 모르겠음.
주말이 느리게 가면 어때. 오히려 이득 아님?
그 날도 잠을 설치긴 했지만 전 날보다는 일찍 잠들었음. 그리고 다음 날은 전 날 친구랑 통화하면서 잡은 점심 약속을 나갔는데 말이야.
아직도 겉옷이 옆집 문 앞에 있더라. 바람에 날리기라도 했는지 문고리에 걸려있지도 않고 바닥에 떨어져 있었음.
옆집남자가 이틀째 본인 집에는 들어가지도 않았다는 걸 강제로 알아야 했다는 거지.
“···”
얼른 나가려다 그 겉옷 보고 도로 문고리에 걸어둘까 아주 잠깐 고민했음. 옷을 챙겨주고 싶어서가 아니라, 이대로면 옆집남자가 집에 돌아왔을 때 내가 본인 옷을 일부러 바닥에 버려뒀다고 생각할 것 아님?
난 분명히 문고리에 잘 걸어뒀다고. 바닥에 떨어질 때까지 집에 안 들어간 본인 잘못이지.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걸 또 신경 쓰는 것도 이상한 것 같은 거야. 그렇게 신경 끄겠다고 다짐했으면서 내가 옷을 바닥에 던졌다고 생각하든, 불태웠다고 생각하든 무슨 상관이란 말임?
까짓 내가 던졌다고 생각하면 뭐. 그러든가.
결국 그냥 바닥에 떨어진 옷 그대로 버려두고 외출했음.
그렇게 나가서 저녁때 좀 지나서 집에 돌아왔거든. 그 때는 겉옷이 없어졌더라.
옆집남자 덩치만큼 커다란 그 옷이 설마 바람에 날려가다 못해 사라지기까지 했을 리는 없을 거고. 귀가한 본인이 갖고 들어간 거겠지? 열쇠는 찾았나, 아니면...
아니야. 그만. 그만 생각하기로 했잖아.
혹여나 옆집남자가 집에서 튀어나오기라도 할까 봐 얼른 문 열고 집으로 들어갔음.
일부러 귀 기울인 게 아니라 그냥 집이 조용하니까 들어본 건데, 옆집에서는 아무 소리도 안 넘어오더라. 평소에도 음악을 크게 틀거나 현관 문을 세게 닫는 것처럼 큰 소리라도 나지 않으면 특별히 옆집이라고 알 만한 소리가 들리지는 않았음.
그래서 그냥 평소처럼 씻고, 옷 갈아 입고.. 평소처럼 지냈어. 평소처럼.
절대 무슨 소리만 나는 것 같으면 옆 집에서 나는 건지 확인하려고 귀 기울이다 못해 벽에 귀까지 대보고 그러지는 않았어. 응.
...해봤는데 잘 모르겠더라. 집에 있는 것 같긴 하던데.
하여튼 이제 진짜 신경 꺼야지. 그냥 부딪히는 일이 없기를 바라는 게 아니라 혹시 건물에 누가 먼저 들어가지는 않는지 잘 확인하고, 내 집 근처에 누가 먼저 서있는 건 아닌지 확인하는 습관부터 들여야지.
아무래도 의식해서 피해야겠어.
저절로 자연스럽게 신경 끌 수 있게 되겠지 했더니 예상 못한 일로 부딪히고, 기분 더러울 일만 생겼잖아.
이번엔 내가 아무 것도 안 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대놓고 신경 써서 피해 다니기로 했음.
그리고 그 시도는 꽤 성공적이었음.
어차피 마주칠 일이 없었던 걸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우연히 마주치는 일은 없었어.
집에 들어갈 때 엘리베이터 앞에 누가 있는 것 같으면 애초에 들어가지도 않았고, 내가 탈 때는 누가 뒤늦게 타는 일 없게 얼른 닫아버렸거든.
집에서 나가기 전에는 혹시 옆집에서 같이 나가지는 않는지 우선 귀 기울여서 확인하고, 조용할 때만 나갔음.
어차피 당분간 해 지고 뭐 어디 들르지 말라는 말 같은 것도 들었겠다, 편의점도 한 번 안 들렀음. 가끔 역 앞 베이커리는 들렀지만.
그 외에는 걸을 땐 최대한 빠른 걸음으로 움직이고, 주말에만 지하철 타고 식료품점이나 갔다 옴.
그렇게 한 2-3주 정도 지났나.
아마.. 슬슬 방심했던 것 같음.
물론 내가 방심하지 않는다고 해서 피할 수 있는 건 아니었지만 말이야.
기어코 옆집남자를 또 마주친 건, 황당하게도 역 앞이었음. 평소처럼 지하철 타고 내렸으니까.
시간은 약간 늦은 편이었음. 그 날은 퇴근 한 다음 아예 회사 근처에서 저녁 식사까지 하고 왔거든. 밖은 완전히 어두워져 있었지.
얼른 집에 가려고 급하게 걸어가는데 역 바로 근처에서 누가 나랑 비슷하게 걷는 것 같은 거야. 퇴근 시간 때가 지나서 하필 나 혼자만 역에서 내렸는데.
심지어 비슷한 상황을 이미 겪어봤잖음? 도망을 치든 뛰어가든 경찰을 부르든 차라리 누가 따라오는 건 확실한지 확인부터 하자, 생각했음.
그래서 잔뜩 긴장한 상태로 바로 멈추고 슬그머니 몸 돌렸는데.. 어둠 속에 조그만 불꽃이 일었어. 불꽃이 인 자리에는 붉은 점이 찍혔고.
바로 이어서 연기가 퍼졌겠지?
어둠 속에도 거대하고 익숙한 실루엣이며 담배 냄새에 순간 안도했음. 아니나 다를까 내가 보고 있으니까 내 쪽으로 걸어 나와서 얼굴도 금방 보이더라.
“뭐야, 깜짝 놀랐ㅈ-“
그 얼굴 보고 너무 안도한 나머지 하마터면 깜짝 놀랐잖아요. 왜 어둠 속에 서있어요? 하고 말도 걸 뻔 했음.
말했잖아. 슬슬 방심하고 있었다고. 내가 왜 주변을 살피고 건물을 살피면서 출퇴근하는지 잠깐 잊었던 거지.
정말 잠깐이었음. 이번엔 취한 것도 아니고 금방 제정신으로 돌아왔어.
말을 다 마치기 전에 멈췄거든.
이미 눈은 마주쳐버려서 바로 시선을 피하지는 못 했지만.
“···”
당황한 나머지 정적 속에 잠깐 서있기까지 했지만. 어쨌든 말은 안 걸었어.
어색하게 시선을 둘 곳을 잃어서 흔들렸고, 티나게 몸을 돌리긴 했지만. 그래도 이번엔 결심했던 대로 했어.
심지어 왜 역 근처에 서있었는지, 왜 날 따라 걸었는지 물어보지도 않았잖아.
물어보지도, 책망하지도, 돌아보지도 않고 다시 집 쪽으로 걸었어. 고개 돌릴 때 옆집남자 시선이 따라온 건 알았는데 알 게 뭐임.
어차피 그 쪽도 나한테 말을 건 것도 아닌데 뭐. 오히려 그 쪽이야말로 나랑 아는 척 할 생각도 없었는데 내가 놀란 나머지 말을 걸어버린 걸지도 모름.
동선이야 같은 건물 사는데 어쩌다 겹칠 수도 있지.
옆집남자가 왜 거기 있었는지는 몰라도 건물까지 걸어가는 길은 하나니까 당연히 계속 같이 걸어야겠지.
근데 옆집남자가 걷는 속도면 벌써 날 앞지르고도 남았어야 하거든. 왜 신경쓰이게 내 앞에서 걷는 것도 아니고 심지어 뒤에서 걸어오는 거임?
날 벌써 앞지르다 못해 벌써 집에 도착했다고 해도 안 이상할텐데.
내가 빨리 걸어서 앞지르기가 애매한가? 싶어서 속도도 늦춰봄. 지나서 가라고 길도 비켜줬어.
그래도 옆집남자는 계속 내 뒤에 오는 거야. 심지어 내가 걸음을 멈추면 멈추기까지 함. 이건 누가 봐도.. 어쩌다 동선이 겹친 게 아닌 것 같지..?
또 누구랑 술잔이라도 바뀌었냐고 묻고 싶은 걸 꾹 참고 걸었음. 차라리 빨리 걸어가는 게 나을 것 같아서.
그건 그거고. 이러다 집 앞에 도착해서는? 설마 또 같은 짓을 하지는 않겠지만 또 남의 집에 억지로 들어오기라도 하면?
옆집남자가 내 걸음을 따라오는 이상 내가 옆집남자보다 집에 빨리 들어가거나 늦게 들어갈 수는 없는 거잖아.
그래서 그냥 빨리 걷다가, 예전에.. 어떤 변태한테 도망칠 때 그랬던 것처럼 방향을 틀었음.
쭉 걸어가면 집이지만, 꺾으면 편의점. 길은 늘 똑같지.
그럼 옆집남자는 그냥 지나갈 줄 알았어. 그런 척이라도 하든가. 설마 따라오지는 않겠지. 생각했거든.
“어디 가.“
근데 방향 바꾸자마자 바로 그러더라.
무시하고 그냥 걸어갔는데 내 뒤로 따라 걸어오기까지 함. 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데?
따라오는 거 알면서도 계속 걸어가니까 편의점 있는 상가 건물들 보이기 시작함. 편의점은 갈 일도 없는데. 게다가 들어가면 또 따라 들어올 거 아님?
결국 어떻게 해야할지 결정 못하고 편의점도 지나쳐버림. 그러고 보니까 이 쪽 상가 건물들 지나면 저 쪽에는 뭐가 있는지 잘 모르는데. 걷다 보면 무슨 방법이라도 생기겠지. 옆집남자가 날 밤새 따라다닐 것도 아니고, 언젠가는 그냥 가지 않을까?
라고 생각하는 게 당연한 거 아니냐?
“어디 가는데.”
설마 옆집남자가 굳이 날 앞지르고 가로막기까지 할 줄은 몰랐음.
처음엔 당황해서 그냥 피해가려고 했는데 바로 몸 움직여서 막더라. 코 앞에 문짝만한 벽이 생겼다고 생각해 봐. 심지어 그 벽이 내 걸음을 따라 움직임. 어케 피함.
할 수 없이 고개 드니까 담배 문 얼굴이랑 마주침. 이제 진짜 안 부딪혀도 될 줄 알았는데...
“비켜요.”
“어디 가.”
“상관 없잖아요.“
“당분간 해 지면 집에 바로 가라고 했잖아.“
“그러니까.. 상관 없잖아요.“
”지금 동네 분위기 안 좋아. 밤에는 무슨 일 생길지 모르고.”
이번엔 술냄새가 안 나는 걸 보면 취한 것도 아닌 것 같은데. 왜 자꾸 안 하던 짓을 하는 거지.
아직 상가 다 벗어난 게 아니라서 주변은 꽤 밝았음. 몇 걸음만 돌아가면 편의점이고. 앞에 벽이 서있어서 그 뒤는 안 보였지만, 어디든 지금 이 자리에 서있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은데 말이지.
이젠 무서워서가 아니라 그냥 눈 마주치는 것도 불편해서 고개도 약간 숙였는데, 남자는 나 보고 있는 거 알겠더라.
사실은 이런 실랑이를 할 게 아니라 나한테 대체 왜 이러는지 물어보고 싶었음. 무슨 생각인지 몰라도 이제 그만 하고 다른 장난감 찾으라고 하고 싶었어.
“그러니까... 밤에 나한테 무슨 일이 생기든 말든. 그 쪽이랑 상관 없잖아요.“
보여도 마찬가지지만 안 보이니까 무슨 생각을 하는지 더 모르겠는데 대답도 안 함. 언제는 꼬박 대답 했나. 이제는 별로 답답하게 느껴지지도 않아서 그냥 서있어봄.
언젠가 비키겠지. 밤새 여기 서있지는 않을 거 아니야.
“...집에 가.“
그러더니 한참 만에 그러더라. 담배도 내내 손에만 들고 있으면서, 피울 것도 아니면서 왜 끄지도 않는 거임? 나만 괴롭게.
”정말 궁금해서 그러는데 진짜로 무슨 상관이에요?“
결국 고개 드는 게 낫겠더라고. 담배 연기를 피해야 해서든, 읽히지도 않는 얼굴이라도 보고 대답을 들어야 할 것 같아서든.
”안 따라갈 테니까 먼저 가.“
”나야말로 안 따라갈 테니까 먼저 가요.“
”내가 싫은 거지, 이럴 필요는 없잖아.”
싫은 건 어떻게 알았지. 하여간 약아 빠진 데다 눈치도 빠르다니까.
“그쪽이야말로 이럴 필요 없잖아요. 그냥 가요. 내 집은 내가 알아서 들어갈 테니까.“
“동네에 위험한 놈들이 몇 들어와 있어.“
“이번엔 도와달라고 안 할 테니까 가요.“
”진짜 신경쓰이게 말하네.“
도와달라고 하지 말라는 것도, 신경 끄라던 것도 다 본인이 한 말 아님? 왜 이러는지 이해가 안 가는 건 난데 왜 본인이 한숨을 쉬냐고.
“뭐가 신경쓰여서 그래요. 나한테 무슨 일 있으면 본인한테 피해 가는 거라도, 아. 죽기라도 하면 건물 집 값은 떨어지겠네.“
”그럴 가치가 있어?“
”그 건물 집 값이야 이미 바닥이긴 하지만..“
”나한테 화내는 데에 목숨을 걸 가치가 있냐고.“
“...”
“내 가치가 그렇게 큰 것 같지는 않은데.”
“... ....내가 언제 어디로 갈지는 내가 결정해요.”
이쯤 되면 나도 내가 왜 이렇게까지 고집을 부리는지 모르겠음. 옆집남자 말이 틀린 건 아니잖아.
옆집남자한테 신뢰를 잃은 건 둘째 치고, 바로 집에 가지 않고 고집을 부리고 있는 이유가 옆집남자 때문이라는 건 사실이란 말이지.
왠지 옆집남자가 하는 말을 곧이 곧대로 들어주고 싶지가 않아서. 그깟 이유 때문에 위험을 감수하는 거잖아. 왜?
라고 생각했지만 몸을 돌리지는 않았음. 그냥 눈 앞에 있는 벽 피해서 가던 길 감.
상가 너머에 뭐가 있는지도 모르는데 그냥 걷기 시작했음. 그래봤자 한 동네 아님? 걷다보면 뭐라도 있겠지. 이 쪽으로 간다고 해서 집을 못 가게 되는 것도 아니고.
가보다가 분위기 이상하면 바로 집으로 가지 뭐.
하면서 걷기 시작했는데, 옆집남자가 또 따라오더라. 역시나 날 앞서지도 않고 약간 뒤에서 천천히 걸어옴.
그럴 필요는 없잖아. 내가 물어야 할 말 아님?
아직 돌아갈 마음도 안 들고 그냥 걷기만 했는데 상가 사라지니까 다시 조용하고 어둡더라. 오늘 날이 흐려서 그런지 그렇게 많던 별도 얼마 없었음.
오히려 옆집남자가 뒤에 따라오지 않았으면 무서워서 진작 돌아갔을텐데.
뒤에 자꾸 따라오니까 오히려 계속 걸어도 될 것 같잖아.
평소 내가 동네에서 다니던 길이나 공간은 한정적이라, 이 길을 지나면 뭐가 있는지도 궁금하고.
걷다 보니까 점차 탐험이나 산책하는 기분이 됐던 것 같음.
어느 정도까지는 그랬음. 근데 어느 지점쯤부터 드문드문 사람들이 보이는 거임?
별로.. 멀쩡해 보이지는 않았음. 희미하지만 술 냄새도 같이 나던 거 보면 술에 취한 사람들 같았음.
걸어갈수록 신기하게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더라고?
그 때쯤부터 두리번거리면서 걷는데 골목길도 많아지고, 골목 사이에도 사람들이 있었음. 남자나 여자나 혹은 서너 명이 들러붙어서 키들거리기도 하고, 힐끔거리기도 함.
슬슬 건물도 다시 나오고, 건물 외벽이나 담장에 기댄 사람들이 담배를 피우기도 했음.
가끔은 비틀거리면서 걸어가다가 날 힐끔거리는 사람들도 있었음.
사실 그 때부터 개쫄았음. 그냥 아까 옆집남자가 막았을 때 돌아갈 걸, 아니 그 때라도 돌아가고 싶었는데 그 때는 오히려 돌아가는 게 무서워짐.
조명 보니까 조금 더 가면 또 상가가 있는 것 같은데, 지금은 돌아가는 것보다 차라리 상가 쪽으로 가는 게 나을 것 같았음.
...거기서 어느 쪽으로 가야 내가 사는 건물이 나오는지도 물어보고 말이야.
그동안 최대한 취한 사람들 이목 안 끌려고 조심스럽게 걸었는데, 그 거리에서 제일 눈이 풀린 아저씨랑 정면으로 마주침.
괜히 긴장하고 경계해서 눈도 못 피했음. 결국 그 아저씨가 완전히 지나갈 때까지 덩달아 힐끔대다가 그냥 지나가는 거 확인하고 나서야 앞으로 고개 돌렸거든.
“어디까지 가게.”
“갑, 자기 튀어나오지 좀 마요..!”
고개 돌리자마자 옆집남자가 바로 옆에 서있어서 비명 지를뻔 함.
심장 벌렁거려서 가슴팍 부여잡고 있었는데 옆집남자가 남의 심장마비같은 걸 신경 써줄 리는 없겠지.
“여기부터는 다 싸구려 펍이야.”
남자 뒤로 힐끔 넘어다 보니까 상가들이 꽤 가까워져 있더라고. 어쩐지 편의점 있던 상가처럼 밝지는 않고 조명이 어둑한 게, 진짜 술집이 모여있는 상가였나봄?
그래서 취한 사람들도 많은 거고.
그나저나 한적한 동네라고 생각했더니 인간들이 다 여기 모였나. 내가 다니던 역 근처 길보다 이 쪽에 사람이 훨씬 많더라.
옆집남자는 내가 계속 고집으로 걸어갈 거라고 생각했나 봐. 호기심으로 두리번거리고 상가 쪽 살펴보니까 아예 손을 붙잡더라고.
반사적으로 내려다 보니까, 손에 붕대가 감겨 있더라.
방금 전까지 아무 생각 없었는데, 그 붕대 보니까 또 왠-지 불쾌해지는 거임.
그러고 보니까 오늘 입고 있는 겉옷도 우리집에 놓고 갔던 그 옷이네?
살짝 손 잡아 빼고 걸음 옮겨 가니까 다시 붙잡음.
“술 마시게?”
“신경 꺼요.”
“금주한다며.“
”그쪽이야말로 집에 안 가요?“
”안 쪽까지 갈 거야?”
“진짜 집에 안 가요?”
사실 술까지 마실 생각은 없었음. 여러 의미로 그럴 생각은 없었어. 그냥.. 아무 펍이나 들어가 보기만 할 셈이었음.
들어가서 길만 물어보고 나오려고 했지.
여기까지 고집부리고 와서 옆집남자한테 길을 물어볼 수는 없잖아.
코웃음 한 번 치고 기꺼이 안내해줄 것 같지만. 그 코웃음 치는 얼굴이 보기 싫었다고.
손에 감긴 붕대도 꼴보기 싫고, 입고 있는 겉옷도 꼴보기 싫었어.
“집에 가자.”
“이것부터 놓고 말해요.”
왜 여기까지 와서 옆집남자랑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지 가장 이해가 안 되는 사람은 나였을 거임.
그런데도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어. 나는 그렇다 치고 옆집남자는 대체 왜 이러는데? 손이라도 놓으라니까 놓지도 않음.
내내 피우면서 왔는지 다른 손에 들고 있던 담배만 한 번 피우더니 바닥에 버리더라. 발로 밟아 끄는 것까지 얼떨결에 보고 있는데 손이 당겨지는 거임?
”...?“
”갈 거면 따라 와.“
”...어?”
어쩌다 이렇게 됐지.
진짜 어쩌다 이런 일이 됐지?
옆집남자가 그 말만 하고 앞서 걷기 시작해서 얼떨결에 따라감. 내 손을 잡고 걸어가는데 어쩔 수 없잖아.
사실 따라갔다기보다는 반쯤 끌려가긴 했음. 옆집남자는 약간 빠른 걸음으로 걸은 것 같은데 난 정신없이 따라잡아야 했거든.
지나가던 사람들이 힐끔대는 것 같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 눈에도 끌려가는 것처럼 보였나?
아무튼 눈 깜짝할 새에 상가 안 쪽으로 들어가게 됐음. 어두워서 뭐..인지 모르겠는데 하여튼 뭘 파는 가게들이랑, 펍을 몇 개 지나쳐서 안 쪽으로 들어가게 됨.
옆집남자 따라서 빠른 걸음으로 꽤 걸은 것 같은데 끝이 안 보이더라. 이 동네에 이렇게 큰 상가가 있었나?
그러다 옆집남자가 갑자기 어느 펍 앞에서 멈춰섰음. 나도 두리번 거리던 거 멈추고 올려다 보니까 희미하게 간판이 보이더라.
밖에서 봐도 분명 펍 같기는 한데... 이름이 특이했음. 처음에는 내가 잘못 읽었나 했다니까?
무슨 펍 이름이 베이커리야?
멍하니 간판 읽다 보니까 어느새 가게 안 쪽으로 들어서고 있었음. 어둡긴 했는데 밖에서 생각했던 것보다는 깔끔하고 별로 시끄럽지도 않았음.
어두워서 제대로 보지는 못 했지만 테이블도 반 이상은 손님들이 차있었던 것 같음.
그 안에서도 옆집남자가 손 붙잡고 본인 걸음으로 걸어가서 또 끌려감.
정신 차리니까 가게 제일 안 쪽 구석, 바 제일 끝 자리에 앉혀짐. 옆집남자는 내 바로 옆 자리에 앉음.
그럼 내 눈에 보이는 게 뭐가 있을까? 없지. 내 옆에 벽이 생겼잖아.
가게 안은 커녕 다른 테이블도 안 보임. 그들도 내가 안 보이겠지. 내 앞에 벽이 하나 있으니까.
“어서오세...옹?”
나도 가게 구경 좀 하게 한 자리만 비켜주면 안 되냐고 하려던 참이었는데, 왠지 익숙하고도 낯선 인사가 들려옴.
똑같지는 않지만 전에 편의점 점원도 이런 식으로 인사하지 않았나?
이 동네는 인사를 다 이런 식으로 함?
옆집남자한테 말하려던 것도 잊고 바로 황당하게 고개 돌렸는데, 바텐더가 인사만 익숙한 게 아니라 얼굴도 익숙함.
“어? 역 앞 빵집 사장님..?”
“단골 손님!”
“사장님 낮에는 빵집 하시고 저녁 때는 펍까지 하시는 거예요? 아 그래서 펍 이름이..!“
사람 마음이 참 신기하더라. 방금 전까지는 묘하게 불쾌하고 거슬리고 불안하고 긴장하기까지 했는데. 아는 얼굴 보니까 갑자기 금방 안심 되고 반갑더라고.
빵집 사장ㄴ, 아니 펍 사장님도 같이 반가워 해주셨음.
그러고 보니까 전에 옆집남자가 사장님이랑 아는 사이라고 했었지. 사장님 이름이.. 카를로스랬고? 일부러 아는 사람 있는 곳으로 데려온 건가.
근데 사장님은 나랑 한참 인사 하시자마자 약간 떨떠름한 얼굴이 됐음. 정확히는 옆집남자 쪽으로 고개 돌릴 때.
“그나저나 술도 못 하시는 분이 여긴 왜...“
”뭐야. 그 때 술 못 마신다던 거 거짓말 아니었어요?“
”주문 안 해? 난 얼음물.“
“얼음물 주문할 거면서 왜 여기까ㅈ, 아니 근데 왜 두 분이?“
”아. 주문.. 주문부터 해야 하는 거죠? 뭐 마시지.“
옆집남자가 하도 태연해서 나도 급하게 정신 차리고 뭐 주문할지 생각하고 있었는데, 사장님 표정이 왠지 이상함.
혼자 눈썹을 구겼다가 폈다가, 미심쩍은 듯 눈이 가늘어졌다가 동그래졌다가. 나랑 옆집남자랑 번갈아 보더니 옆집남자 쪽으로 고개 돌려서 눈 커다랗게 뜨더니 대뜸 그러는 거임?
“연애 하십니까!?“
”아니에요!!!“
아니 이게 이러다 온 동네에 소문이, 아니. 그보다 옆집남자는 그.. 누구 있는 거 아닌가? 한밤중에 여자 전화 받고 나가서 며칠이나 안 들어올 정도면 보통 사이는 아닐 거 아님.
카를로스 사장님이랑 옆집남자랑 꽤 잘 아는 사이같은데. 서로 연애 사정까지는 모르나?
“어쩐지 요즘 영 딴 생각이 많아 보이신다- 했더니.”
어쩐지 요즘 영 딴 생각이 많아 보였다고? 그럼 더더욱 여자가 있는 게 맞긴 했나봄. 아니 뭐 딱히 나랑은 상관 없는 일이지만.
그보다 내가 볼 땐 맨날 별 생각 없어 보이던데. 그 쪽이랑 뭐가 잘 안 되나? 그러니까 밤에 뛰쳐나가고..
혹시 그 때 술 마셨던 것도 잔이 바뀐 게 아니라 그래서 홧김에 마셨던 거 아니야?
”..그거 저 아니에요.“
”예?“
”본인이 해명 좀 해요. 여자친구 있지 않아요?“
”예??“
뭐야. 사장님은 옆집남자 연애사정은 잘 모르는 게 맞나봄? 아예 옆집남자 보고 직접 해명하라니까 사장님이 더 놀라서 옆집남자 쳐다봄.
이 사람들 뭐야? 친한 거야, 안 친한 거야.
나도 사장님도 혼란에 빠져있는데 옆집남자만 태연하게 얼음물 마심. 뭐임. 얼음물은 언제 나온 거임. 사장님은 계속 우리랑 있었는데, 다른 직원이 힐끔 쳐다보고 가는 거 보니까 그새 가져다 줬나 봐.
”나 없을 땐 여기까지 혼자 오지 마.“
근데 옆집남자 혼자 답이 왜 저래? 사장님 말에도, 내 말에도 답이 안 되잖아.
사장님도 황당한지 옆집남자 쳐다보다가, 다시 나 쳐다봄. 잠깐, 뭐야. 왜 저를 그런 눈으로 보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단골손님이 그 여자친구..?“
”아니라니까요!? 아니 왜 해명을 안 해요. 자꾸 오해만 쌓이게.“
”뭐 주문 한다며. 안 마실 거면 집에 가고.“
“집..? 두 분 동거라도 하시는...?”
“아니에요. 그게 아니라, 옆집 살아요. 같은 건물에 바로 옆집.”
간신히 해명했는데 사장님 안색이 또 왜 저러냐. 조명이 흐려서 질려 보이는 건가? 아닌데. 분명히 표정이 이상한 것 같은데.
“단골손님이 그 건물.. 그러니까 ㅂ,“
”카를로스.“
”예?“
”나랑 상관없는 사람이야. 앞으로도.”
사장님 표정이 왜 저렇게 이상한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내 표정도 그닥 좋지 않을 거라는 건 알겠음.
왜냐면 지금 내 기분이 이상하게 불쾌하거든.
해명 해달래서 해명까지 했는데 뭐가 문제냐고? 아무 문제 없지. 뭐가 문제겠어. 아아무 문제 없는 거지. 전혀. 조금도. 손톱 만큼도.
“...아직 주문 받는 거죠?”
“아, 예. 그럼요. 뭐 드릴까요? 칵테일 종류도 어지간한 건 다 해드려요.”
“우선.. 보드카 스트레이트 한 잔 주세요.“
“예?”
그래. 저 코웃음 치는 소리, 비뚤게 웃는 입꼬리. 저 얼굴이 너무 거슬려서 이상하게...
“그만 마셔.”
“위스키 한 잔만 더.“
”취했어.“
”안 취했어.“
”오늘은 나랑 같이 잘까?“
”아니? 오늘은 진짜 안 취했어. 집에 들어오라고 해도 안 들어가. 알겠어?“
”진짜?“
”웃지 마. 아무리 잘생겼어도 안 넘어갈 거야. 왜냐면. 안 취했으니까.“
......이상하게 자꾸 내 나사가 풀려버린단 말이지.
🙋♂️맥카이너붕붕🔩
https://hygall.com/607919967 <옆집남자 여자친구 여부는 나랑 상관없는 일이어야 했는데 말이지...
https://hygall.com/607019419 <이런 엿같은 일이 생기니까
그 날은 결국 어땠냐면. 정말 엿같은 밤이었음. 그 주 주말까지도.
침대에 눕긴 했는데 한참을 잠이 안 오는 거야. 옆집남자가 사람 기분을 난장판을 만들어두고 본인은 홀가분하게 몸만 나갔는데 잠이 오겠음?
안 그래도 잠 못 드는 밤이면 별 생각을 다 하게 되잖아. 그 날도 누워서 이리 뒤척, 저리 뒤척. 몸 한 번 움직일 때마다 엿같은 생각들이 떠오르는 거임.
그래서 옆집남자는 대체 뭐하는 인간인데? 그런 인간한테 정상적인 대화를 기대한 내가 멍청이지. 그보다 그 시간에 전화 한 통 받고 달려 나갈 정도면 보통 사이 아닌 여자가 있는 거 아닌가? 왜 남의 집에 밀고 들어와서 수작질이야. 혹시 어디 기둥서방이었던 건 아닌가? 말하는 거 듣다 보니까 그렇다고 해도 안 놀라울 것 같던데. 그래서 주인님이 부르자마자 달려나갔나? 여자랑 있던 거 들킬까 봐 쪼르륵 옷 가져가는 것도 잊고? 얼떨결에 옆집남자랑 더한 짓이라도 했으면 어쩔 뻔 했어.
아니지. 내가 이런 추측은 왜 하고 이런 가정은 왜 하고 있는데? 겨우 말 몇 마디 나눠본 옆집사람이 뭐라고.
진짜 생각하기 싫은데 한 번 생각하기 시작하니까 멈출 수가 없었음. 일부러 생각하는 게 아니라 자꾸 이것저것 떠오르는데 어캄.
그렇게 한참 뒤척이면서 심지어 옆집에서 무슨 소리라도 나지는 않는지 중간중간 귀까지 기울여봄. 적어도 내가 잠들기 전까지는 현관문 소리도 안 나더라. 만약 옆집남자가 집에 들어갔으면 새벽이라 조용해서 들렸을 텐데.
그래서 결국 열쇠 잃어버렸다는 이야기는 진짜라는 거야, 거짓말이라는 거야?
내가 받은 열쇠로 그 집 문을 열어볼 수도 없고. 그래도 되긴 하지만 왠지 이상하잖아. 자존심 상하잖아! 내가 왜 그런 짓까지 하는데? 뭐가 그렇게 신경쓰여서!
그런 생각들만 계속 반복하다가 간신히 잠들긴 했음.
그나마 자고 일어나니까 기분은 좀 낫더라. 어떻게 돌아온 주말인데 잠깐 있었던 엿같은 해프닝 때문에 휴일을 다 날릴 수는 없잖아.
그래서 그냥 다 잊어버리고, 신경 끄기로 했음. 집에는 어떻게든 들어갔겠지. 문을 뜯었든 열쇠를 찾았든, 애초에 거짓말이었든. 본인 집인데 알아서 들어갔겠지. 신경 끄는 게 꽤 큰 효과가 있었음.
몇 시간 정도는.
이게 한 번 꼬이면 진짜 온갖 이상한 방법으로 사람 신경을 긁을 수도 있는 거더라.
이번엔 옆집남자가 직접 날 신경쓰이게 만든 건 아님. 따지자면 옆집남자한테 그럴 의도가 있었던 것도 아니지. 어떻게 보면 내가 스스로 자초한 일일 수도 있음.
잘 자고 일어나서 머리 비울 겸 밀린 청소랑 빨래부터 했거든. 어차피 작은 집이라 청소도 얼마 안 걸림. 그래도 어떤 남자 흔적도 기억 안 나도록 깨끗하게 청소하고 나니까 뿌듯했음.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면서 정리 다 하고 쓰레기를 버리러 나갔거든. 근데 바로 옆집을 아예 안 보고 돌아다니기는 어렵잖아.
내 집에서 나갈 때든 들어갈 때든 그 집 주민도 아니고 그 집 문이랑 어떻게 안 마주칠 수가 있겠어.
게다가 딱히 그 집 문이랑 마주쳐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했을 리가 없잖아.
그렇게 얼떨결에 그 집 문을 봐버렸고, 그 집 문고리에 아직 옆집남자 겉옷이 걸려있는 걸 봐버린 거지. 내가 걸어뒀던 거 말이야.
집에 돌아왔으면 갖고 들어갔을 옷이 아직 문에 걸려 있었다고. 그 말은..
밤새 옆집남자가 집에 들어갔든 말든 나랑 무슨 상관임? 내가 신경 쓸 일도 아니고 내 신경에 거슬릴 일도 아니지.
쓰레기 버리고 돌아와서도 한동안 신경이 곤두서기는 했지만 뭐. 그것도 잊기로 했음. 일단 식사부터 하려니까.. 이런 빌어먹을 스콘.
하지만 스콘은 죄가 없잖아?
충동적으로 버릴까 했다가 그만두기로 했음. 스콘은 여전히 맛있었음. 잼이랑 크림도.
그 뒤에도 그럭저럭 시간을 알차게 잘 보냈어. 나도 모르게 옆집에서 무슨 소리가 나지는 않는지 몇 번 귀를 기울이긴 했지만. 그 정도는 내 주말에 지장이 가는 것도 아니잖아.
오랜만에 책도 좀 읽고, 친구랑 통화도 하고, 약속도 잡고, 또.. 원래 주말은 항상 쏜살같이 지나갔는데. 왜 유난히 시간이 느리게 가는 것처럼 느껴졌는지는 모르겠음.
주말이 느리게 가면 어때. 오히려 이득 아님?
그 날도 잠을 설치긴 했지만 전 날보다는 일찍 잠들었음. 그리고 다음 날은 전 날 친구랑 통화하면서 잡은 점심 약속을 나갔는데 말이야.
아직도 겉옷이 옆집 문 앞에 있더라. 바람에 날리기라도 했는지 문고리에 걸려있지도 않고 바닥에 떨어져 있었음.
옆집남자가 이틀째 본인 집에는 들어가지도 않았다는 걸 강제로 알아야 했다는 거지.
“···”
얼른 나가려다 그 겉옷 보고 도로 문고리에 걸어둘까 아주 잠깐 고민했음. 옷을 챙겨주고 싶어서가 아니라, 이대로면 옆집남자가 집에 돌아왔을 때 내가 본인 옷을 일부러 바닥에 버려뒀다고 생각할 것 아님?
난 분명히 문고리에 잘 걸어뒀다고. 바닥에 떨어질 때까지 집에 안 들어간 본인 잘못이지.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걸 또 신경 쓰는 것도 이상한 것 같은 거야. 그렇게 신경 끄겠다고 다짐했으면서 내가 옷을 바닥에 던졌다고 생각하든, 불태웠다고 생각하든 무슨 상관이란 말임?
까짓 내가 던졌다고 생각하면 뭐. 그러든가.
결국 그냥 바닥에 떨어진 옷 그대로 버려두고 외출했음.
그렇게 나가서 저녁때 좀 지나서 집에 돌아왔거든. 그 때는 겉옷이 없어졌더라.
옆집남자 덩치만큼 커다란 그 옷이 설마 바람에 날려가다 못해 사라지기까지 했을 리는 없을 거고. 귀가한 본인이 갖고 들어간 거겠지? 열쇠는 찾았나, 아니면...
아니야. 그만. 그만 생각하기로 했잖아.
혹여나 옆집남자가 집에서 튀어나오기라도 할까 봐 얼른 문 열고 집으로 들어갔음.
일부러 귀 기울인 게 아니라 그냥 집이 조용하니까 들어본 건데, 옆집에서는 아무 소리도 안 넘어오더라. 평소에도 음악을 크게 틀거나 현관 문을 세게 닫는 것처럼 큰 소리라도 나지 않으면 특별히 옆집이라고 알 만한 소리가 들리지는 않았음.
그래서 그냥 평소처럼 씻고, 옷 갈아 입고.. 평소처럼 지냈어. 평소처럼.
절대 무슨 소리만 나는 것 같으면 옆 집에서 나는 건지 확인하려고 귀 기울이다 못해 벽에 귀까지 대보고 그러지는 않았어. 응.
...해봤는데 잘 모르겠더라. 집에 있는 것 같긴 하던데.
하여튼 이제 진짜 신경 꺼야지. 그냥 부딪히는 일이 없기를 바라는 게 아니라 혹시 건물에 누가 먼저 들어가지는 않는지 잘 확인하고, 내 집 근처에 누가 먼저 서있는 건 아닌지 확인하는 습관부터 들여야지.
아무래도 의식해서 피해야겠어.
저절로 자연스럽게 신경 끌 수 있게 되겠지 했더니 예상 못한 일로 부딪히고, 기분 더러울 일만 생겼잖아.
이번엔 내가 아무 것도 안 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대놓고 신경 써서 피해 다니기로 했음.
그리고 그 시도는 꽤 성공적이었음.
어차피 마주칠 일이 없었던 걸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우연히 마주치는 일은 없었어.
집에 들어갈 때 엘리베이터 앞에 누가 있는 것 같으면 애초에 들어가지도 않았고, 내가 탈 때는 누가 뒤늦게 타는 일 없게 얼른 닫아버렸거든.
집에서 나가기 전에는 혹시 옆집에서 같이 나가지는 않는지 우선 귀 기울여서 확인하고, 조용할 때만 나갔음.
어차피 당분간 해 지고 뭐 어디 들르지 말라는 말 같은 것도 들었겠다, 편의점도 한 번 안 들렀음. 가끔 역 앞 베이커리는 들렀지만.
그 외에는 걸을 땐 최대한 빠른 걸음으로 움직이고, 주말에만 지하철 타고 식료품점이나 갔다 옴.
그렇게 한 2-3주 정도 지났나.
아마.. 슬슬 방심했던 것 같음.
물론 내가 방심하지 않는다고 해서 피할 수 있는 건 아니었지만 말이야.
기어코 옆집남자를 또 마주친 건, 황당하게도 역 앞이었음. 평소처럼 지하철 타고 내렸으니까.
시간은 약간 늦은 편이었음. 그 날은 퇴근 한 다음 아예 회사 근처에서 저녁 식사까지 하고 왔거든. 밖은 완전히 어두워져 있었지.
얼른 집에 가려고 급하게 걸어가는데 역 바로 근처에서 누가 나랑 비슷하게 걷는 것 같은 거야. 퇴근 시간 때가 지나서 하필 나 혼자만 역에서 내렸는데.
심지어 비슷한 상황을 이미 겪어봤잖음? 도망을 치든 뛰어가든 경찰을 부르든 차라리 누가 따라오는 건 확실한지 확인부터 하자, 생각했음.
그래서 잔뜩 긴장한 상태로 바로 멈추고 슬그머니 몸 돌렸는데.. 어둠 속에 조그만 불꽃이 일었어. 불꽃이 인 자리에는 붉은 점이 찍혔고.
바로 이어서 연기가 퍼졌겠지?
어둠 속에도 거대하고 익숙한 실루엣이며 담배 냄새에 순간 안도했음. 아니나 다를까 내가 보고 있으니까 내 쪽으로 걸어 나와서 얼굴도 금방 보이더라.
“뭐야, 깜짝 놀랐ㅈ-“
그 얼굴 보고 너무 안도한 나머지 하마터면 깜짝 놀랐잖아요. 왜 어둠 속에 서있어요? 하고 말도 걸 뻔 했음.
말했잖아. 슬슬 방심하고 있었다고. 내가 왜 주변을 살피고 건물을 살피면서 출퇴근하는지 잠깐 잊었던 거지.
정말 잠깐이었음. 이번엔 취한 것도 아니고 금방 제정신으로 돌아왔어.
말을 다 마치기 전에 멈췄거든.
이미 눈은 마주쳐버려서 바로 시선을 피하지는 못 했지만.
“···”
당황한 나머지 정적 속에 잠깐 서있기까지 했지만. 어쨌든 말은 안 걸었어.
어색하게 시선을 둘 곳을 잃어서 흔들렸고, 티나게 몸을 돌리긴 했지만. 그래도 이번엔 결심했던 대로 했어.
심지어 왜 역 근처에 서있었는지, 왜 날 따라 걸었는지 물어보지도 않았잖아.
물어보지도, 책망하지도, 돌아보지도 않고 다시 집 쪽으로 걸었어. 고개 돌릴 때 옆집남자 시선이 따라온 건 알았는데 알 게 뭐임.
어차피 그 쪽도 나한테 말을 건 것도 아닌데 뭐. 오히려 그 쪽이야말로 나랑 아는 척 할 생각도 없었는데 내가 놀란 나머지 말을 걸어버린 걸지도 모름.
동선이야 같은 건물 사는데 어쩌다 겹칠 수도 있지.
옆집남자가 왜 거기 있었는지는 몰라도 건물까지 걸어가는 길은 하나니까 당연히 계속 같이 걸어야겠지.
근데 옆집남자가 걷는 속도면 벌써 날 앞지르고도 남았어야 하거든. 왜 신경쓰이게 내 앞에서 걷는 것도 아니고 심지어 뒤에서 걸어오는 거임?
날 벌써 앞지르다 못해 벌써 집에 도착했다고 해도 안 이상할텐데.
내가 빨리 걸어서 앞지르기가 애매한가? 싶어서 속도도 늦춰봄. 지나서 가라고 길도 비켜줬어.
그래도 옆집남자는 계속 내 뒤에 오는 거야. 심지어 내가 걸음을 멈추면 멈추기까지 함. 이건 누가 봐도.. 어쩌다 동선이 겹친 게 아닌 것 같지..?
또 누구랑 술잔이라도 바뀌었냐고 묻고 싶은 걸 꾹 참고 걸었음. 차라리 빨리 걸어가는 게 나을 것 같아서.
그건 그거고. 이러다 집 앞에 도착해서는? 설마 또 같은 짓을 하지는 않겠지만 또 남의 집에 억지로 들어오기라도 하면?
옆집남자가 내 걸음을 따라오는 이상 내가 옆집남자보다 집에 빨리 들어가거나 늦게 들어갈 수는 없는 거잖아.
그래서 그냥 빨리 걷다가, 예전에.. 어떤 변태한테 도망칠 때 그랬던 것처럼 방향을 틀었음.
쭉 걸어가면 집이지만, 꺾으면 편의점. 길은 늘 똑같지.
그럼 옆집남자는 그냥 지나갈 줄 알았어. 그런 척이라도 하든가. 설마 따라오지는 않겠지. 생각했거든.
“어디 가.“
근데 방향 바꾸자마자 바로 그러더라.
무시하고 그냥 걸어갔는데 내 뒤로 따라 걸어오기까지 함. 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데?
따라오는 거 알면서도 계속 걸어가니까 편의점 있는 상가 건물들 보이기 시작함. 편의점은 갈 일도 없는데. 게다가 들어가면 또 따라 들어올 거 아님?
결국 어떻게 해야할지 결정 못하고 편의점도 지나쳐버림. 그러고 보니까 이 쪽 상가 건물들 지나면 저 쪽에는 뭐가 있는지 잘 모르는데. 걷다 보면 무슨 방법이라도 생기겠지. 옆집남자가 날 밤새 따라다닐 것도 아니고, 언젠가는 그냥 가지 않을까?
라고 생각하는 게 당연한 거 아니냐?
“어디 가는데.”
설마 옆집남자가 굳이 날 앞지르고 가로막기까지 할 줄은 몰랐음.
처음엔 당황해서 그냥 피해가려고 했는데 바로 몸 움직여서 막더라. 코 앞에 문짝만한 벽이 생겼다고 생각해 봐. 심지어 그 벽이 내 걸음을 따라 움직임. 어케 피함.
할 수 없이 고개 드니까 담배 문 얼굴이랑 마주침. 이제 진짜 안 부딪혀도 될 줄 알았는데...
“비켜요.”
“어디 가.”
“상관 없잖아요.“
“당분간 해 지면 집에 바로 가라고 했잖아.“
“그러니까.. 상관 없잖아요.“
”지금 동네 분위기 안 좋아. 밤에는 무슨 일 생길지 모르고.”
이번엔 술냄새가 안 나는 걸 보면 취한 것도 아닌 것 같은데. 왜 자꾸 안 하던 짓을 하는 거지.
아직 상가 다 벗어난 게 아니라서 주변은 꽤 밝았음. 몇 걸음만 돌아가면 편의점이고. 앞에 벽이 서있어서 그 뒤는 안 보였지만, 어디든 지금 이 자리에 서있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은데 말이지.
이젠 무서워서가 아니라 그냥 눈 마주치는 것도 불편해서 고개도 약간 숙였는데, 남자는 나 보고 있는 거 알겠더라.
사실은 이런 실랑이를 할 게 아니라 나한테 대체 왜 이러는지 물어보고 싶었음. 무슨 생각인지 몰라도 이제 그만 하고 다른 장난감 찾으라고 하고 싶었어.
“그러니까... 밤에 나한테 무슨 일이 생기든 말든. 그 쪽이랑 상관 없잖아요.“
보여도 마찬가지지만 안 보이니까 무슨 생각을 하는지 더 모르겠는데 대답도 안 함. 언제는 꼬박 대답 했나. 이제는 별로 답답하게 느껴지지도 않아서 그냥 서있어봄.
언젠가 비키겠지. 밤새 여기 서있지는 않을 거 아니야.
“...집에 가.“
그러더니 한참 만에 그러더라. 담배도 내내 손에만 들고 있으면서, 피울 것도 아니면서 왜 끄지도 않는 거임? 나만 괴롭게.
”정말 궁금해서 그러는데 진짜로 무슨 상관이에요?“
결국 고개 드는 게 낫겠더라고. 담배 연기를 피해야 해서든, 읽히지도 않는 얼굴이라도 보고 대답을 들어야 할 것 같아서든.
”안 따라갈 테니까 먼저 가.“
”나야말로 안 따라갈 테니까 먼저 가요.“
”내가 싫은 거지, 이럴 필요는 없잖아.”
싫은 건 어떻게 알았지. 하여간 약아 빠진 데다 눈치도 빠르다니까.
“그쪽이야말로 이럴 필요 없잖아요. 그냥 가요. 내 집은 내가 알아서 들어갈 테니까.“
“동네에 위험한 놈들이 몇 들어와 있어.“
“이번엔 도와달라고 안 할 테니까 가요.“
”진짜 신경쓰이게 말하네.“
도와달라고 하지 말라는 것도, 신경 끄라던 것도 다 본인이 한 말 아님? 왜 이러는지 이해가 안 가는 건 난데 왜 본인이 한숨을 쉬냐고.
“뭐가 신경쓰여서 그래요. 나한테 무슨 일 있으면 본인한테 피해 가는 거라도, 아. 죽기라도 하면 건물 집 값은 떨어지겠네.“
”그럴 가치가 있어?“
”그 건물 집 값이야 이미 바닥이긴 하지만..“
”나한테 화내는 데에 목숨을 걸 가치가 있냐고.“
“...”
“내 가치가 그렇게 큰 것 같지는 않은데.”
“... ....내가 언제 어디로 갈지는 내가 결정해요.”
이쯤 되면 나도 내가 왜 이렇게까지 고집을 부리는지 모르겠음. 옆집남자 말이 틀린 건 아니잖아.
옆집남자한테 신뢰를 잃은 건 둘째 치고, 바로 집에 가지 않고 고집을 부리고 있는 이유가 옆집남자 때문이라는 건 사실이란 말이지.
왠지 옆집남자가 하는 말을 곧이 곧대로 들어주고 싶지가 않아서. 그깟 이유 때문에 위험을 감수하는 거잖아. 왜?
라고 생각했지만 몸을 돌리지는 않았음. 그냥 눈 앞에 있는 벽 피해서 가던 길 감.
상가 너머에 뭐가 있는지도 모르는데 그냥 걷기 시작했음. 그래봤자 한 동네 아님? 걷다보면 뭐라도 있겠지. 이 쪽으로 간다고 해서 집을 못 가게 되는 것도 아니고.
가보다가 분위기 이상하면 바로 집으로 가지 뭐.
하면서 걷기 시작했는데, 옆집남자가 또 따라오더라. 역시나 날 앞서지도 않고 약간 뒤에서 천천히 걸어옴.
그럴 필요는 없잖아. 내가 물어야 할 말 아님?
아직 돌아갈 마음도 안 들고 그냥 걷기만 했는데 상가 사라지니까 다시 조용하고 어둡더라. 오늘 날이 흐려서 그런지 그렇게 많던 별도 얼마 없었음.
오히려 옆집남자가 뒤에 따라오지 않았으면 무서워서 진작 돌아갔을텐데.
뒤에 자꾸 따라오니까 오히려 계속 걸어도 될 것 같잖아.
평소 내가 동네에서 다니던 길이나 공간은 한정적이라, 이 길을 지나면 뭐가 있는지도 궁금하고.
걷다 보니까 점차 탐험이나 산책하는 기분이 됐던 것 같음.
어느 정도까지는 그랬음. 근데 어느 지점쯤부터 드문드문 사람들이 보이는 거임?
별로.. 멀쩡해 보이지는 않았음. 희미하지만 술 냄새도 같이 나던 거 보면 술에 취한 사람들 같았음.
걸어갈수록 신기하게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더라고?
그 때쯤부터 두리번거리면서 걷는데 골목길도 많아지고, 골목 사이에도 사람들이 있었음. 남자나 여자나 혹은 서너 명이 들러붙어서 키들거리기도 하고, 힐끔거리기도 함.
슬슬 건물도 다시 나오고, 건물 외벽이나 담장에 기댄 사람들이 담배를 피우기도 했음.
가끔은 비틀거리면서 걸어가다가 날 힐끔거리는 사람들도 있었음.
사실 그 때부터 개쫄았음. 그냥 아까 옆집남자가 막았을 때 돌아갈 걸, 아니 그 때라도 돌아가고 싶었는데 그 때는 오히려 돌아가는 게 무서워짐.
조명 보니까 조금 더 가면 또 상가가 있는 것 같은데, 지금은 돌아가는 것보다 차라리 상가 쪽으로 가는 게 나을 것 같았음.
...거기서 어느 쪽으로 가야 내가 사는 건물이 나오는지도 물어보고 말이야.
그동안 최대한 취한 사람들 이목 안 끌려고 조심스럽게 걸었는데, 그 거리에서 제일 눈이 풀린 아저씨랑 정면으로 마주침.
괜히 긴장하고 경계해서 눈도 못 피했음. 결국 그 아저씨가 완전히 지나갈 때까지 덩달아 힐끔대다가 그냥 지나가는 거 확인하고 나서야 앞으로 고개 돌렸거든.
“어디까지 가게.”
“갑, 자기 튀어나오지 좀 마요..!”
고개 돌리자마자 옆집남자가 바로 옆에 서있어서 비명 지를뻔 함.
심장 벌렁거려서 가슴팍 부여잡고 있었는데 옆집남자가 남의 심장마비같은 걸 신경 써줄 리는 없겠지.
“여기부터는 다 싸구려 펍이야.”
남자 뒤로 힐끔 넘어다 보니까 상가들이 꽤 가까워져 있더라고. 어쩐지 편의점 있던 상가처럼 밝지는 않고 조명이 어둑한 게, 진짜 술집이 모여있는 상가였나봄?
그래서 취한 사람들도 많은 거고.
그나저나 한적한 동네라고 생각했더니 인간들이 다 여기 모였나. 내가 다니던 역 근처 길보다 이 쪽에 사람이 훨씬 많더라.
옆집남자는 내가 계속 고집으로 걸어갈 거라고 생각했나 봐. 호기심으로 두리번거리고 상가 쪽 살펴보니까 아예 손을 붙잡더라고.
반사적으로 내려다 보니까, 손에 붕대가 감겨 있더라.
방금 전까지 아무 생각 없었는데, 그 붕대 보니까 또 왠-지 불쾌해지는 거임.
그러고 보니까 오늘 입고 있는 겉옷도 우리집에 놓고 갔던 그 옷이네?
살짝 손 잡아 빼고 걸음 옮겨 가니까 다시 붙잡음.
“술 마시게?”
“신경 꺼요.”
“금주한다며.“
”그쪽이야말로 집에 안 가요?“
”안 쪽까지 갈 거야?”
“진짜 집에 안 가요?”
사실 술까지 마실 생각은 없었음. 여러 의미로 그럴 생각은 없었어. 그냥.. 아무 펍이나 들어가 보기만 할 셈이었음.
들어가서 길만 물어보고 나오려고 했지.
여기까지 고집부리고 와서 옆집남자한테 길을 물어볼 수는 없잖아.
코웃음 한 번 치고 기꺼이 안내해줄 것 같지만. 그 코웃음 치는 얼굴이 보기 싫었다고.
손에 감긴 붕대도 꼴보기 싫고, 입고 있는 겉옷도 꼴보기 싫었어.
“집에 가자.”
“이것부터 놓고 말해요.”
왜 여기까지 와서 옆집남자랑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지 가장 이해가 안 되는 사람은 나였을 거임.
그런데도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어. 나는 그렇다 치고 옆집남자는 대체 왜 이러는데? 손이라도 놓으라니까 놓지도 않음.
내내 피우면서 왔는지 다른 손에 들고 있던 담배만 한 번 피우더니 바닥에 버리더라. 발로 밟아 끄는 것까지 얼떨결에 보고 있는데 손이 당겨지는 거임?
”...?“
”갈 거면 따라 와.“
”...어?”
어쩌다 이렇게 됐지.
진짜 어쩌다 이런 일이 됐지?
옆집남자가 그 말만 하고 앞서 걷기 시작해서 얼떨결에 따라감. 내 손을 잡고 걸어가는데 어쩔 수 없잖아.
사실 따라갔다기보다는 반쯤 끌려가긴 했음. 옆집남자는 약간 빠른 걸음으로 걸은 것 같은데 난 정신없이 따라잡아야 했거든.
지나가던 사람들이 힐끔대는 것 같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 눈에도 끌려가는 것처럼 보였나?
아무튼 눈 깜짝할 새에 상가 안 쪽으로 들어가게 됐음. 어두워서 뭐..인지 모르겠는데 하여튼 뭘 파는 가게들이랑, 펍을 몇 개 지나쳐서 안 쪽으로 들어가게 됨.
옆집남자 따라서 빠른 걸음으로 꽤 걸은 것 같은데 끝이 안 보이더라. 이 동네에 이렇게 큰 상가가 있었나?
그러다 옆집남자가 갑자기 어느 펍 앞에서 멈춰섰음. 나도 두리번 거리던 거 멈추고 올려다 보니까 희미하게 간판이 보이더라.
밖에서 봐도 분명 펍 같기는 한데... 이름이 특이했음. 처음에는 내가 잘못 읽었나 했다니까?
무슨 펍 이름이 베이커리야?
멍하니 간판 읽다 보니까 어느새 가게 안 쪽으로 들어서고 있었음. 어둡긴 했는데 밖에서 생각했던 것보다는 깔끔하고 별로 시끄럽지도 않았음.
어두워서 제대로 보지는 못 했지만 테이블도 반 이상은 손님들이 차있었던 것 같음.
그 안에서도 옆집남자가 손 붙잡고 본인 걸음으로 걸어가서 또 끌려감.
정신 차리니까 가게 제일 안 쪽 구석, 바 제일 끝 자리에 앉혀짐. 옆집남자는 내 바로 옆 자리에 앉음.
그럼 내 눈에 보이는 게 뭐가 있을까? 없지. 내 옆에 벽이 생겼잖아.
가게 안은 커녕 다른 테이블도 안 보임. 그들도 내가 안 보이겠지. 내 앞에 벽이 하나 있으니까.
“어서오세...옹?”
나도 가게 구경 좀 하게 한 자리만 비켜주면 안 되냐고 하려던 참이었는데, 왠지 익숙하고도 낯선 인사가 들려옴.
똑같지는 않지만 전에 편의점 점원도 이런 식으로 인사하지 않았나?
이 동네는 인사를 다 이런 식으로 함?
옆집남자한테 말하려던 것도 잊고 바로 황당하게 고개 돌렸는데, 바텐더가 인사만 익숙한 게 아니라 얼굴도 익숙함.
“어? 역 앞 빵집 사장님..?”
“단골 손님!”
“사장님 낮에는 빵집 하시고 저녁 때는 펍까지 하시는 거예요? 아 그래서 펍 이름이..!“
사람 마음이 참 신기하더라. 방금 전까지는 묘하게 불쾌하고 거슬리고 불안하고 긴장하기까지 했는데. 아는 얼굴 보니까 갑자기 금방 안심 되고 반갑더라고.
빵집 사장ㄴ, 아니 펍 사장님도 같이 반가워 해주셨음.
그러고 보니까 전에 옆집남자가 사장님이랑 아는 사이라고 했었지. 사장님 이름이.. 카를로스랬고? 일부러 아는 사람 있는 곳으로 데려온 건가.
근데 사장님은 나랑 한참 인사 하시자마자 약간 떨떠름한 얼굴이 됐음. 정확히는 옆집남자 쪽으로 고개 돌릴 때.
“그나저나 술도 못 하시는 분이 여긴 왜...“
”뭐야. 그 때 술 못 마신다던 거 거짓말 아니었어요?“
”주문 안 해? 난 얼음물.“
“얼음물 주문할 거면서 왜 여기까ㅈ, 아니 근데 왜 두 분이?“
”아. 주문.. 주문부터 해야 하는 거죠? 뭐 마시지.“
옆집남자가 하도 태연해서 나도 급하게 정신 차리고 뭐 주문할지 생각하고 있었는데, 사장님 표정이 왠지 이상함.
혼자 눈썹을 구겼다가 폈다가, 미심쩍은 듯 눈이 가늘어졌다가 동그래졌다가. 나랑 옆집남자랑 번갈아 보더니 옆집남자 쪽으로 고개 돌려서 눈 커다랗게 뜨더니 대뜸 그러는 거임?
“연애 하십니까!?“
”아니에요!!!“
아니 이게 이러다 온 동네에 소문이, 아니. 그보다 옆집남자는 그.. 누구 있는 거 아닌가? 한밤중에 여자 전화 받고 나가서 며칠이나 안 들어올 정도면 보통 사이는 아닐 거 아님.
카를로스 사장님이랑 옆집남자랑 꽤 잘 아는 사이같은데. 서로 연애 사정까지는 모르나?
“어쩐지 요즘 영 딴 생각이 많아 보이신다- 했더니.”
어쩐지 요즘 영 딴 생각이 많아 보였다고? 그럼 더더욱 여자가 있는 게 맞긴 했나봄. 아니 뭐 딱히 나랑은 상관 없는 일이지만.
그보다 내가 볼 땐 맨날 별 생각 없어 보이던데. 그 쪽이랑 뭐가 잘 안 되나? 그러니까 밤에 뛰쳐나가고..
혹시 그 때 술 마셨던 것도 잔이 바뀐 게 아니라 그래서 홧김에 마셨던 거 아니야?
”..그거 저 아니에요.“
”예?“
”본인이 해명 좀 해요. 여자친구 있지 않아요?“
”예??“
뭐야. 사장님은 옆집남자 연애사정은 잘 모르는 게 맞나봄? 아예 옆집남자 보고 직접 해명하라니까 사장님이 더 놀라서 옆집남자 쳐다봄.
이 사람들 뭐야? 친한 거야, 안 친한 거야.
나도 사장님도 혼란에 빠져있는데 옆집남자만 태연하게 얼음물 마심. 뭐임. 얼음물은 언제 나온 거임. 사장님은 계속 우리랑 있었는데, 다른 직원이 힐끔 쳐다보고 가는 거 보니까 그새 가져다 줬나 봐.
”나 없을 땐 여기까지 혼자 오지 마.“
근데 옆집남자 혼자 답이 왜 저래? 사장님 말에도, 내 말에도 답이 안 되잖아.
사장님도 황당한지 옆집남자 쳐다보다가, 다시 나 쳐다봄. 잠깐, 뭐야. 왜 저를 그런 눈으로 보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단골손님이 그 여자친구..?“
”아니라니까요!? 아니 왜 해명을 안 해요. 자꾸 오해만 쌓이게.“
”뭐 주문 한다며. 안 마실 거면 집에 가고.“
“집..? 두 분 동거라도 하시는...?”
“아니에요. 그게 아니라, 옆집 살아요. 같은 건물에 바로 옆집.”
간신히 해명했는데 사장님 안색이 또 왜 저러냐. 조명이 흐려서 질려 보이는 건가? 아닌데. 분명히 표정이 이상한 것 같은데.
“단골손님이 그 건물.. 그러니까 ㅂ,“
”카를로스.“
”예?“
”나랑 상관없는 사람이야. 앞으로도.”
사장님 표정이 왜 저렇게 이상한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내 표정도 그닥 좋지 않을 거라는 건 알겠음.
왜냐면 지금 내 기분이 이상하게 불쾌하거든.
해명 해달래서 해명까지 했는데 뭐가 문제냐고? 아무 문제 없지. 뭐가 문제겠어. 아아무 문제 없는 거지. 전혀. 조금도. 손톱 만큼도.
“...아직 주문 받는 거죠?”
“아, 예. 그럼요. 뭐 드릴까요? 칵테일 종류도 어지간한 건 다 해드려요.”
“우선.. 보드카 스트레이트 한 잔 주세요.“
“예?”
그래. 저 코웃음 치는 소리, 비뚤게 웃는 입꼬리. 저 얼굴이 너무 거슬려서 이상하게...
“그만 마셔.”
“위스키 한 잔만 더.“
”취했어.“
”안 취했어.“
”오늘은 나랑 같이 잘까?“
”아니? 오늘은 진짜 안 취했어. 집에 들어오라고 해도 안 들어가. 알겠어?“
”진짜?“
”웃지 마. 아무리 잘생겼어도 안 넘어갈 거야. 왜냐면. 안 취했으니까.“
......이상하게 자꾸 내 나사가 풀려버린단 말이지.
🙋♂️맥카이너붕붕🔩
https://hygall.com/607919967 <옆집남자 여자친구 여부는 나랑 상관없는 일이어야 했는데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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