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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07 12:08


실제로도 그런 삶을 살아오던 유안이 사랑에 눈이 멀어서 조금씩 무너지는 게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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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팅까지는 시간이 많이 남았던 탓에 유안은 허니 비와 꽤 많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그래서 둘은 서로에 대해 꽤 많은 걸 알게 됐다.

 

일단 허니 비는 외국인이었다. 그녀의 까만 눈과 머리카락을 본 유안은 직감적으로 그녀의 문자 메시지가 왜 그렇게나 정중했는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는 아직 자기가 영국에 건너온 지 몇 년 되지 않았다며, 서투른 회화를 미리 사과했다. 유안은 손까지 내저으면서 문제 될 거 없다고 대답하기는 했지만 어떻게 영어가 서투른 사람이 이런 직업을 가질 수 있었는지 내심 궁금해하기는 했다. 그러니까, 무슨 언어적으로 혹은 문화적으로 우월한… 그런 걸 따지는 게 아니라, 어쨌든 문화 컨텐츠 사업에서 일을 하는 사람이 언어의 장벽을 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이에 대해서 질문을 하자니 어떻게 말을 만들어도 조금 무례해보일 것 같아서 유안은 그냥 작품에 관한 레퍼런스로 화제를 옮겨버렸다.

 

그리고 허니 비는, 회화가 서투르다 한들 유안이 일부러 그녀를 배려해서 화제를 바꿨다는 걸 알아차릴 정도의 눈치는 있는 사람이었다. 모국에서부터 좁디 좁은 연극판에서 구르며 생존해온 그녀에게 있어 유안의 조심스러운 말투와 상냥한 눈빛은 다정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투명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이번 작품의 남자주인공 배역을 맡은 배우에게 예상보다 좀 더 일찍 친근감을 형성했다. 사실 그녀는 그가 링크 중에 하나가 만료되었다며 답장을 보냈을 때부터 그를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기도 했고. 그녀에게 꼼꼼하시네요, 라거나 대단하네요 하고 듣기 좋은 말을 해주는 사람은 많았어도 실질적인 피드백을 해준 사람은 그가 처음이었으니까.

 

 

“그런데 왜 하필 오네긴이에요?”

 

“네?”

 

“다른 작품들의 각본도 받아갔다고 들었어요. 이야기로만 따지면 더 재미있게 느껴지는 작품도 있었을 거 같은데, 왜 우리걸 하겠다고 했는지 궁금했어요.”

 

“음…”

 

 

유안은 어색하게 웃으며 자기 턱을 매만졌다. 허니는 대답에 뜸을 들이는 그를 보며 혹시 TV 스타는 사석에서의 질문에도 쉽게 대답을 하면 안 되는 에이전시의 조항이 있는 건지, 아니면 그가 당장이라도 퍼블리시스트를 불러제끼기라도 할까 싶어 조금 긴장된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유안은 정말로 그 질문에 대해 성심껏 답변을 하기 위해 대답을 고르고 있었던 건지 순순히 입을 열었다. 그녀를 배려하듯 아까보다 조금 더 느릿한 말투는 덤이었다.

 

 

“무대 위에서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지 궁금했어요. 한 명의 인간이 얼마나 변할 수 있는지, 사랑이라는 감정이 어떻게 바뀌어갈 수 있는지. 오네긴은 어찌 보면 평범한 귀족이잖아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그런 이미지요. 감정이 없는 건 아니지만 겉으로 드러내는 건 야만적인 거라고 생각하고, 사랑이라는 감정이 지나치게 낭만화 되어있다고 믿는 오만한 남자.”

 

 

그는 그렇게 말하며 작게 웃었다. 오네긴의 캐릭터는 연출가에 따라 오만과 편견의 다아시같기도 했고, 보통 2막이라 불리우는 후반부에서는 폭풍의 언덕의 히스클리프를 연상시키는 부분도 있었다. 어쨌든 캐릭터의 큰 맥락은 ‘변화’인지라 초반부에는 한껏 오만하고 권태로운 것이 특징이었다. 본의 아니게 시골에 처박히게 되어 에너지를 어디에 발산해야할지 모르고 설치는, 서투르고 위험한 사람.

 

 

“그런 사람이 뒤늦게 자기가 등한시했던 사랑에 잠식되다니, 그야말로 낭만적인 비극이다 싶었죠. 그는 기회를 되찾으려 노력하지만 끝내 좌절하잖아요. 타티아나의 거절이 아니라, 그녀가 슬퍼하는 모습에서 자기가 과거에 무엇을 놓쳤는지 여실히 깨닫고 마니까요. 그 모습을 연기해보고 싶었어요. 물론 이 작품의 주인공은 타티아나니까 너무 유난스러워선 안 되겠죠. 그것도 마음에 들고요.”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않고 싶다는 말이에요?”

 

“비슷한 거 같아요. 물론 최선을 다해야겠지만, 저는 이번이 첫 연극인 만큼 뭐랄까… 배우는 입장이라고 생각을 해서요. 이런 말은 조금 위험한가요? 아무래도 극을 이끌어가는 주연이 너무 방어적인 태도를 보이는 게 조금.”

 

“아뇨. 괜찮아요. 어떤 생각을 하고 계시는지 솔직하게 말씀해주시는 게 좋아요. 역할의 비중이 나누어져 있다는 걸 이해하고 있는 것도 좋고요. 사실 직업적인 특성상 자신이 어떤 배역이든 주목을 받고 싶어하는 분들이 많잖아요.”

 

 

허니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의 성실한 긴 대답에 보답하고자 조금 길게 이야기를 하려니 자꾸만 단어를 고치고, 어설픈 문법을 사용하기는 했지만 서로가 말하고자 하는 뜻을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어쨌든 비슷한 업계에서 일하는 사람이다보니 공유하는 정서가 있는 덕분인지.

 

허니의 마지막 말에 유안은 동의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고, 두 사람은 잠시 자연스러운 침묵의 시간을 가졌다. 그동안 그는 맞은편에 앉은 여자를 잠시 관찰할 수 있었다. 허니 비. 그녀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 표정의 변화가 조금 적은 편이다. 개인적인 성격인지 문화적인 특성인지는 몰라도 그 차분한 태도는 상투적인 예의처럼 들릴 수 있는 말도 진심 어린 말로 느껴지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솔직하게 말하는 게 좋다는 그녀의 말에 유안은 놀랍게도 정말 마음이 편해졌다. 첫 연극이니 만큼 일단 배우러 왔다는 말을 하면서도 순간적으로 ‘내가 왜 그렇게까지 솔직하게 말했지?’라고 자책하던 그의 내면의 목소리를 멈추게 해주었다. 그러면서도 덧붙여진 말은 유난스러운 배우들이라면 지긋지긋하게 겪어봤다는 것처럼 퍽 시니컬한 말투라서 우스웠다. 그녀가 하는 꼴이 우습다는 게 아니라— 세상 차분한 얼굴로 다정하다가도 냉정한, 종 잡을 수 없는 대화를 하는 게 재미있다는 뜻이었다. 그 은연에 깔린 태도가 직장 동료를 상대로 제 할 일을 하는 건조함이라서, 유안은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는 게 꽤 편안하다고 느꼈다.

 

그들은 다른 동료들이 하나 둘씩 속속들이 회의실에 도착하기 전까지 오네긴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더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대부분 유안이 가지고 온 패드로 여타 다른 매체에서 제작된 오네긴의 컨텐츠를 보다가 인상깊었던 장면을 보여주거나, 의견을 묻고 싶었던 부분에 대하여 허니에게 말을 거는 방식이었다. 그녀는 귀찮은 기색도 없이 그가 말을 걸어올 때면 챙겨온 서류를 보느라 숙였던 고개를 반짝 들고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이따금 대답을 하다가 단어가 생각이 안 나거나 정확한 표현을 떠올리지 못하겠는지 휴대폰을 들어 타자를 두드렸고, 조금 더 정제된 대답을 돌려주고는 했다. 그걸 몇 번 반복하고 나니 유안은 그녀가 생각나는 대로 말을 했을 때보다 한 번 걸러낸 말을 전할 때에 훨씬 더 냉정하고 첨예한 표현을 사용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모국어가 아닌 언어에는 학습된 특유의 친절함과 정중함이 배어있는 법이었다. 유안은 문득 그녀가 제 나라의 말로 이야기할 때는 어떤 표정과 목소리를 사용하는지 궁금해졌지만, 다른 동료들이 도착하여 인사를 하게 되는 바람에 끝내 그녀에게 그걸 물을 수는 없었다. 아니. 만약 누군가가 오지 않았더라도 어쩐지 그런 부탁을 하지는 못했을 거 같다고. 그는 속으로만 조용히 생각을 정정했다.

 


 

-


 

 

첫 미팅은 길지 않았다. 대부분이 처음 만나는 얼굴인 만큼 통성명을 하는 자리에 가까웠다.

 

작연출을 맡은 연출가가 먼저 일어나서 인사를 했고, 그 다음이 제작을 돕는 프로듀서나 그 옆에 앉아있는 드라마터그의 순서라고 생각했으나 연출가는 타티아나의 배우에게 차례를 넘겼다. 베스라는 애칭을 가진 그 여배우는 유안보다 다섯살이 많았고, 그가 그토록 다니고 싶어했던 왕실 아카데미 출신의 엘리트였다. 웨스트엔드에서 사랑받는 배우답게 갑자기 주목을 받게 되어도 당황하는 기색 없이 여전히 우아하고 여유로워 보였다. 이 공연을 제 인생작으로 만들어 보이겠다는 너스레가 섞인 그녀의 인사에 사람들이 웃으며 박수를 쳤다.


그런 멋진 사람 다음에 인사를 한다는 건 정말이지 고역인 일이었다. 유안 또한 수많은 사람들과 카메라 앞에 서는 사람이다보니 대놓고 긴장한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모두의 시선이 자신에게 쏠리는 것은 언제나 적응하기 힘든 감각이었다. 흥미와 호기심, 그리고 이유 모를 옅은 적대감. 대중들에게 인기를 끌었던 작품 속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유안의 모습에 어떤 사람들은 그의 입이 열리기도 전부터 작게 웃음을 흘리기도 했다.

 

 

“여기 계신 모든 분들과 이렇게 만나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유안 미첼입니다.”

 

 

머릿속으로 준비했던 말을 천천히 내뱉으면서 어디를 봐야할지 몰라 방황하던 그의 시선은 맞은편에 앉아있는 허니의 까만눈동자에 정착했다. 고작 몇 십분 더 이야기를 나눈 것이 꽤나 큰 친밀감을 형성하기라도 한 건지, 아니면 그녀가 가진 특유의 고요한 표정 덕분인지는 몰라도 그는 한층 긴장이 가시는 걸 느끼고 무난히 인사를 마칠 수 있었다.

 

앞서 인사를 했던 여배우만큼이나 큰 박수를 받고서야 유안은 완전히 안심했고, 그제야 조금 더 편안하게 주변인들을 둘러볼 여유가 생겼다. 오네긴과 타티아나와 함께 극을 이끌어갈 주연인 렌스키와 올가 역을 맡은 배우들의 인사가 이어졌고, 그 다음에 비로소 제작진들의 차례가 돌아왔다.

 

 

“이번 공연의 드라마 터그를 맡은 허니 비입니다. 미리 연락드렸던 것처럼 이 작품을 어떻게 만들어가고 싶은지, 모두의 목표를 작은 하나의 점으로 모으는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누구든지, 언제든지 작품에 관한 논의를 하고 싶으시다면 제게 말해주세요. 최대한 ‘내가 만든 공연’이라는 생각이 들도록 돕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모두의 소개가 거의 끝나갈 때쯤에야 허니의 차례가 돌아왔다. 누군가가 그녀를 무시해서라기 보다는 테이블이 크게 한 바퀴를 돌듯이 인사를 한 탓이었다. 그녀는 조금 쭈뼛대면서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미리 준비해온 듯한 말을 빠르게 내뱉었다. 그 모습이 누가 봐도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내향형 인간이라 몇 사람이 웃음을 터뜨렸다. 유안도 그 중 한 명이었다. 검은 머리카락 사이로 삐죽 솟은 귀가 한껏 붉어져있는 모습이 공감되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해서 웃음이 나오고 말았다.

 

그 미소가 살짝 굳은 건 그녀의 옆자리에 앉은 연출가가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을 때였다.

 

 

“그럼 인사도 했겠다 오늘은 가볍게 각색 포인트만 함께 짚어보고 술이라도 한 잔 하러 갈까요?”

 

 

그 뒤로 바로 연출가의 말이 이어질 만큼 그건 찰나에 이루어진 짧고도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머리를 쓰다듬은 사람도, 그 손길을 받는 사람도 어색함을 느끼지 않는 것 같았다. 유안은 슬쩍 시선을 돌려 주변을 살펴 보았지만 그 누구도 그들의 그러한 행동에 의문을 품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보다는 당장 이어지는 연출가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기에 그 또한 다시 앞에 놓인 문서로 눈을 돌려야 했다.

 

…친하면 그럴 수도 있지. 결국 몇 초만에 생각이 또 그쪽으로 튀고 말았다. 연출가와 그녀가 얼마나 알고 지낸 사이인지는 모르겠지만, 외국인인 그녀를 드라마 터그로 삼을 정도라면 초면은 아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친구 사이라면, 그래. 막역하게 어깨를 끌어안거나 포옹을 하는 경우도 있으니까. 두 사람 사이에 저가 모르는 친분이 있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유안은 정말, 정말로 제 쓸데없는 관심을 끄려고 노력했다.










유첼너붕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