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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06 23:52


매브아이스 맵아 매버릭아이스맨
seraph - 치천사, 스랍 






매버릭이, 그러니까 피트 미첼이 그 날개를 본 건 우습게도 두 사람이 이미 볼 거 못 볼 거 가리지 않고 서로를 낱낱히 알게 됐을 때쯤이다. 아니, 어쩌면 그건 매버릭만의 생각이었을 수도 있지. 어느 정도의 배신감을 느끼긴 했다. 왜 나한테 말하지 않았어? 왜 나한테 숨긴거야? 나 말고 또 누가 알아? 네 등에는 분명 그런 상처가 없었는데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그리고, 왜 너는 거기에 있는거야? 따위의 구질구질한 생각이 온통 머리를 채우긴 했다. 하지만 그게 제 앞에서 당황한 아이스를 향해 전부 표출되진 않았다. 사실은, 그 감정보다 불안함이 더 컸으니. 

그래서 매버릭은 아주 잠깐의 침묵을 지켰다. 어떤 말을 해야할까, 아이스에게 가장 먼저 어떤 말을 뱉어야 할까 고민하느라. 무슨 말을 해야 내가 느끼는 감정을 너한테 전부 전달하지 않고 넘어갈 수 있지? 그 잠깐의 사이에 아이스의 등을 꽤뚫고 치솟은 날개 끄트머리에 약간 뭍은 피가 바닥에 떨어졌다. 날개가 새까만 탓에 날개에 뭍은 피는 잘 보이지 않았지만, 어쨌거나 거기에 있다는 사실은 꼭 잊지 않도록 깨우치는 것 처럼 바닥으로 흐른 피는 선명하다. 그 광경에 매버릭의 머릿속에서 모든 생각들을 제치고 가장 중요한 한 마디가 튀어나왔다. 

"그거 아파?"

"…아니."

"깃털 색이… 머리색을 따라가진 않는구나."

"뭐?"

"금빛 날개면, 눈부셔서 안 되려나."

매버릭의 실없는 말 덕분에 아이스는 그제서야 굳은 얼굴을 조금 풀었다. 마치 큰일이라도 들킨 듯한 긴장한 얼굴은 이내 매버릭이 아는 조금은 다정하고, 동시에 약간의 장난기가 서린 익숙한 표정으로 변한다. 그제서야 매버릭은, 아주 약간의 제 감정을 풀었다.

"악마 날개야?"

"아마… 나도 정확힌 몰라. 부모님도 아는게 없으시고."

"위쪽으로 악마 혼혈이 없대?"

"아마 있긴 하겠지만, 정확히 어머니나 아버지 쪽 어디인지는… 몰라. 최소한 두 분 다 각자 알고 계시는 선대에는 없었어."

매버릭은 그 말을 들으면서 욕실에서 색이 짙고 부드러운 수건을 가져왔다. 아이스의 마른 등을 뚫고 올라온 날개는 꼭 거기에 원래 늘 있었던 것 같은 틈 사이로 빠져나와 그 애처로운 위용을 뽐냈고, 덕분에 살갗이 벌어지며 날개죽지에 피가 흘렀다. 아프지 않다는 말이 무색하게 매버릭이 찢어진 살갖을 살짝 누르는데도 아이스는 미간을 찌푸렸다. 안 아프다며. 매버릭이 조금 퉁명스럽게 얘기하면,

"아프진 않아. 근데 좀 느낌이… 이상해서."

누가 만진 건 처음이라. 아이스가 찌뿌등한 몸을 조금씩 움직이며 말했다. 

"언제 처음 알아챘는데?"

"열 두살 때. 기억나기로는 열감기를 앓다가 방에서 언뜻 잠들었던가, 기절했던가 했던 것 같은데, 눈을 떠 보니 내가 저택 정원에 서 있더라. 그것도 새벽 두 시였나."

"부모님도 그때 아신거야?"

"그랬지."

아이스는 오랜만에 꺼내보는 날개의 뿌리부터 느껴지는 거북함에 이마를 잠깐 찡그렸다. 어쩌면 그건 그 때의 기억이 동시에 떠올라서일지도 모르겠다. 새벽 두 시의 정원. 매버릭에겐 말하지 않았지만, 저택 정원에 서 있었던 건 아니다. 정원과 외부를 가로막은 높은 담벼락 위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자신을 올려다 보는 기겁한 부모님의 표정도. 아이스는 그 표정이 마치 괴물을 보는 표정이었다고 기억한다. 기실, 괴물과 다르지 않지.

안그래도 증오했던 제 자식이 새까만 악마의 날개를 달고 그 높은 담벼락에 앉아 있었으니, 얼마나 끔찍했겠는가.

매버릭은 수건에 찍혀 나오는 아이스의 피가 멎자 조심스럽게 날개 끄트머리부터 족히 2미터는 될 것 같은 날개의 끝을 바라봤다.

"스무 살 때 마지막으로 꺼냈었는데, 그 이후로는 불편하지 않아서 꺼낸 적 없어."

아이스의 말마따나 오랫동안 아이스의 몸 속 어딘가에서 숨겨져 있었을 날개는 어쩐지 악마의 날개 치고도 지나치게 연약해 보였다. 꼭 조금이라도 세게 힘을 주면 가엾이 꺾여버릴 것 같이. 날개를 다 덮은 빽빽한 깃털조차 어쩐지 한없이 약할 것 같다.

"보통은 잊고 살아. 그런데 가끔, 아주 가끔… 꺼내지 않으면 내 속에서 썩어버릴 것 같은 생각이 들 때가 있는데, 그러고 나면 정말로 날개를 꺼내기 전까지 엄청 아프더라고."

오늘처럼. 아이스는 새벽녁에 잠깐 날개를 꺼냈다가 서둘러 돌려놓을 생각이었다. 늘 그래왔던 것처럼, 평생 그랬던 것처럼. 하지만 지나치게 오랜만에 꺼낸 날개는 날개죽지 살을 뚫고 나오는데도 꽤 시간이 걸렸고, 곂치는 고통에 아이스마저 조금 지쳤다. 고통을 참아보고자 잡고있던 탁자 끄트머리에 다시 힘이 들어가는 동시에, 땀이 벤 손 때문에 탁자가 아예 넘어지는 건 예상하지 못했지만. 동시에 7년동안 바깥 공기를 통하지 못했던 앙상한 날개가 치솟았다. 검고 까만 날개. 그 언젠가, 어머니와 아버지가 겁에 질린 눈으로 바라보던.

다행이도, 아이스는 매버릭의 눈에서 같은 감정을 읽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얼마나 안도했던지.

"다시 넣을 수 있어?"

"평소엔… 잘 되는데 말야."

아이스는 살짝 헛웃음과 함께 이마를 찡그렸다. 평소엔- 이라고 해도 몇 년 전에는, 잘만 조절되던 날개가 무슨 일인지 들어가지 않는다. 아마 뜻하지 않게 매버릭에게 갑작스럽게 들키기도 했고, 아니면 너무 오랜만에 나온 탓이기도 할 테지만. 매버릭은 더 이상 피가 묻어나오지 않는 날개를 바라봤다. 악마의 피가 섞인 아이스라니. 세상에서 가장 우스운 농담이다. 

"징그럽지?"

"아니, 어떻게 해야 네 날개까지 씹어먹을 수 있을지 생각하고 있었는데."

"아서라, 매버릭. 저 날개가 네 목을 조르고 말걸. 우리 부모님이 내 날개를 보고 처음 지은 표정을 너도 봤어야 하는데."

"어땠는데?"

"내가 괴물이 된 줄 알았지. 사실, 괴물이기도 했고."

"이렇게 아름다운 괴물이 있다면, 난 진작에 영혼을 팔았을 걸."

하하, 힘빠진 웃음소리와 아이스의 안도의 한숨이 짧게 이어졌다. 매버릭은 그 말이 진심이라는 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궁금했지만, 구태여 다시 말하진 않았다. 그러다 아이스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아 끌었다. 아이스가 걸터앉아있던 창가에서 내려오도록. 아이스는 뻐근한 다리를 천천히 내렸다. 매버릭은 아이스가 아예 거실 한 가운데로 발걸음을 옮길 때 까지 그 모습을 지켜봤다. 잡은 손을 놓지 않고. 아이스가 열어두었을 게 분명한 열린 창문에서 차가운 새벽 바람이 불어 들어오고 창문 너머로 거대한 붉은 보름달이 보였다. 

정말로 묻지 못한건, 왜 그 창가에 앉아있었느냐고. 

*

매버릭은 스스로 아이스의 충실한 개로서의 역할을 완벽하게 해내고 있다고 생각했다. 아이스의 목숨을 살려주었던 날은, 동시에 매버릭에 제 목줄 끝을 아이스의 손에 올려두었던 날이기도 하다. 아이스의 청회색 눈동자가 놀라움과 기쁨, 그리고 환희로 가득 차올랐을 때 그 눈동자를 마주했던 매버릭은 이 천사가 제 목숨줄이라는 걸 알아차렸으니까. 아주 불현듯, 순간적으로.

내가 널 살린게 아니라, 네가 죽지 않음으로 날 살린거지.

매버릭은 속절없이 빠졌다. 아니, 어쩌면 그 전부터 빠져들고 있었던 걸지도 모르지만. 이유는 상관없다. 결과는 같으니까. 그래서 매버릭은 얌전히 아이스가 제게 넘치도록 주는 사랑과 애정을 받았다. 그게 아이스를 붙잡아 두는 방법이라는 걸 아니까. 매버릭은 언제나 아이스가 '필요' 했고, 아이스는 매버릭에게 자신이 필요하다는 걸 아는 이상 절대 그 자리를 떠나지 않을테니까. 

떠나지, 않는다고.

매버릭은 아이스의 명령을 충실히 받드는 개로서, 아이스의 요청대로 단 한 번도 아이스의 부모님과 '자진해서' 만난 적 없었다. 하긴, 어차피 그들은 매버릭에게 하등 관계가 없는 인물들이었으니까. 그들이 얼마나 아픈 사연을 가진 부부인지, 제 자식인 아이스에게 얼마나 소홀했는지는 아이스와 함께 생활하는동안 알지 않으려고 해도 알게 될 수 밖에 없었다. 그들이 남겨놓은 결핍의 흔적은 아이스의 내부에 너무 크게 자리했으니까. 그러니 매버릭이 톰 카잔스키 시니어든, 클라우스 슈타우펜베르크든 누구든 좋아할 리가 없다. 시니어가 매버릭을 불러 제 아들과 헤어지라고 엄포를 놓았을 때 매버릭이 무응답으로 일관했던 것도, 클라우스가 매버릭을 매서운 눈으로 바라보며 아이스를 괴롭게 만들지 말라고 화를 내었을 때 비웃음을 숨길 수 없었던 것도 그래서였다. 

그래서, 매버릭이 그 저택에 직접 찾아갔을 때 두 사람이 황급히 매버릭을 들여보낸 게 의외는 아닌 반응이었을거다.

매버릭은 저택의 현관까지 들어가며 어린 아이스가 처음으로 날개를 가지고 올라섰을 담벼락을 쳐다봤다. 그리고 매버릭과 아이스가 함께 사는 삼 층짜리 작은 주택에서 활짝 열려있던 이 층의 창문을. 검은 날개, 붉은 달. 새까만 어둠 속의 앙상하고 가엾은 검은 날개, 그리고 비처럼 붉은 달.

그리고 아이스를 괴물처럼 바라보던 그 겁에 질린 눈동자.

겁에 질린.

"이제 결심이 선 건가?"

먼저 입을 연 건 시니어였다. 그의 옆에는 역시나 클라우스가 굳게 닫은 입과 화가 가득한 표정을 가감없이 내비쳤다. 

"제가 딱 한 번,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해 드릴 수 있는게 있습니다. 당신들의 뜻대로."

"무슨 말을 하고싶은 거지?"

"당신들이 그토록 두려워했지만 미움받을까 하지 못했던 일을 제가 해 주겠다는 말입니다."

"……."

"나는, 그러고도 아이스한테 용서받을 자신이 있거든."

매버릭이 저택 응접실 끝, 시니어와 클라우스 뒤에 자리한 벽난로 위 작은 사진을 바라봤다. 너무 작아 보이지 않는 사진은 분명히 아이스가 해군 사관학교를 입학할 때 형식적으로 찍었을 입학 사진일터다. 아마 톰 카잔스키 시니어가 인맥을 이용해서 구해왔을 게 분명한. 

매버릭이 그 사진에서 시선을 돌렸을 때, 매버릭의 눈동자가 한 층 더 짙어졌다는 걸 아는 눈치챈 사람은 클라우스였다. 그리고 눈동자 색이 점점, 짙은 녹색에서 꼭 빛을 통과하는 녹색의 광물처럼 옅게 빛난다는 것도. 

그 때 매버릭이 탁자에 올려놓은 건 단도라고 보기엔 조금 긴 칼이었다. 칼날 전체가 꼭 눈이 시리도록 빛이 나는 것 같다. 은단도. 클라우스는 고개를 들어 매버릭을 봤다. 저 정도로 강한 신성력을 가진 은단도를 일반 사람이 만질 수 있을리가 없다. 

치천사의 피. 그리고 분명 저 은단도 만큼 눈이 시리도록 흴 것이 분명한 날개.

"제가 아이스의 날개를 잘라 줄 수 있습니다. 사령관님도, 대령님이 가장 두려워 한 그 날개 말입니다. 아이스가…."

"……."

"아이스가 그 날개를 가지고 떠나버려서, 영영 돌아오지 않을까봐 늘 두려워했으니까."

그래서 그렇게 겁에 질린 눈으로 당신의 아들을 바라보았고, 언제나 초조하게 그 주위를 맴돌았겠지. 하지만 어떤 피에서 물려받았는지도 모르는 악마의 날개는 고작 인간의 칼과 도구로 잘라도 다시 자랄거고, 그럼 아이스를- 사실은 처음부터 그토록 소중했던 제 아들을 더 고통스럽게 만들테니. 그러면 부모를 향한 공포감만 커질거고. 그 날개를 영영 잘라내는 방법은 천사의 핏줄만이 만질 수 있는 은단도 뿐인데.

시니어는 눈을 잃게 만들 정도로 반짝이는 칼을 바라봤다. 담장 아래로 당장이라도 뛰어내려 눈앞에서 사라질 것만 같던 어린 아이스가 떠올렸다. 아이를 되찾기엔 너무 늦었지만, 그렇다고 영영 잃을수도 없었던 날들이. 매버릭의 손이 칼의 손잡이 부분을 감쌌다.

"날개를 잘라내면 상처가 클 테니, 처치할 수 있는 장소가 필요합니다. 넓고, 오가는 사람은 두어 명으로 한정되어 있고, 의사 한 명 정도만 주기적으로 드나들 수 있는 곳이."

"-다음 주에,"

아이스에게 전화할테니, 함께 이 곳으로 와. 두 사람의 업무 일정은 내가 처리해 두지. 그 말을 끝으로 매버릭은 칼을 도로 가져온 가방에 넣었다. 클라우스는 매버릭의 번뜩이던 눈동자가 이전처럼, 짙은 녹색으로 돌아온 걸 알아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