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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06 14:27
소설체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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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넌 그런 취급 당하는 게 지겹지 않아?

 

 

벽에 주먹 모양으로 자국이 남았다. 뒤늦게 팔을 타고 통증이 찌르르 올라왔다. D-16은 철로 이루어진 벽을 꿰뚫어버릴 것처럼 노려보았다. 부질없는 행동이라는 것을 아는데도 도저히 멈출 수가 없었다.

 

역겨운 자식.

 

지상의 광부용 휴식소로 돌아온 다음에도 증오심은 가라앉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모멸감이 묻은 기억은 잊어버리려 하면 할수록 뇌리에 더욱 지독하고 질기게 달라붙는 것 같았다. 침묵이 찾아들고 내면을 돌아볼 공백이 생기면 기억 저장 장치는 기다렸다는 듯이 낮의 장면을 재생했다. 무의식적인 복기요, 닳아버린 심지를 다시 타들어 가게 하는 불길이었다.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뺨으로 내질러진 주먹. 코그 없는 병신이라 운운하는 비아냥거림. 무릎을 꿇도록 명령하는 강압. 공포와 연민으로 물든 동료들의 눈빛과 상반되는 관리자들의 무심한 눈초리. 

 

권력자들이 눈요기로 삼기에 충분할 한 편의 희극이었다. 대피 절차가 마무리되고 그들 모두가 뒷수습을 하러 광산으로 돌아왔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났던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고철덩이처럼 짓밟힌 동료가 광부용 치료소로 보내진 것을 제외하면 모든 것이 평상시와 다름없었다. 감독관이 무자비한 폭력을 자행한 것은 동료의 몸과 코그 없는 봇들의 기억 저장 장치를 제외하고는 남김없이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 모든 것이, 평소와 진절머리 날 정도로 똑같았다.

 

D-16은 차갑게 식은 벽에 이마를 맞대고 눈을 감았다. 그렇게 해야만 몸 내부에서 타들어 가고 있는 회로들을 식힐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놈을 죽여버리고 싶다. 사지를 잡아 찢어버리고 싶어.

 

돌연 찾아든 상념에 D-16은 얼어붙었다. 충격적이게도, 그것은 발아하면 할수록 더욱 매력적으로 무르익는 상상이었다. D-16은 그 자신의 생각에 거부감과 매혹을 동시에 느끼면서 서서히 상념 속으로 빠져들었다. 감독관의 바이저를 깨부수고 그 파편을 옵틱에 쑤셔 박는 상상. 폭력을 연상하는 것이 너무나 쉬워서 이어지는 내용을 억지로 자아낼 필요도 없었다. 시각을 빼앗은 다음에는 주먹으로 안면을 후려쳐 브레인 모듈의 연산 작업을 둔하게 만들 것이다. 저항을 불가능하게 만든 다음 기탄없이 온몸의 이음매를 작살내는 것이다.

 

가슴의 외장갑을 뜯어내, 놈의 가슴에서 코그를 뽑아내리라. 보란 듯이 병신 소리를 내뱉은 놈의 입술에 코그를 내리쳐 짓뭉개버리는 것이 좋겠다. 어깨에서 팔을 뽑고 발목을 부숴 기지도 걷지도 못하게 만들어버릴 테다. 그 과정에서 놈이 죽어서는 안 된다. 빠른 죽음은 너무나 자비로운 최후다. 자비를 구걸하며 애걸하고 울부짖다가 절망에 파묻혀 숨이 끊어지는 것이 놈에게 적합한 최후이리라. 그렇게 만들어버리고 말겠다. 그럴 수 있는 힘이 있었더라면. 그런 힘이 주어져 있었더라면. 그 누구도 아닌 자신에게―

 

"디." 

 

D-16은 노성을 내지르며 어깨에 얹힌 손을 뿌리쳤다. 그는 사납게 호흡을 토해내며 가까스로 눈앞의 인물을 분간했다. 오라이온. 오라이온이었다. 그의 친구 오라이온 팩스였다. 그가 뿌리쳐진 손을 그대로 향한 채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팩스."

 

"깜짝이야.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그렇게 놀라?" 오라이온의 얼굴에는 놀라움과 염려의 기색이 뚜렷했다. 그는 벽에 남은 주먹질의 흔적을 가리키며 농담하듯 덧붙였다. "저거 네가 만든 거야? 멋지네."

 

"……."

 

"안 보여서 한참 찾으러 다녔어. 아마 숙소에 있던 녀석들 중 절반은 네 이름을 들어야 했을걸. 나중에 가서는 콘적스도 그렇게 안 찾겠다고 다들 한 소리 하더라."

 

D-16은 대답을 건네는 대신 벽에 등을 기대고 주저앉았다. 과열된 회로가 식자 현실의 감각이 서늘한 공기를 타고 스며들고 있었다. 밤의 냄새, 도로를 가로지르는 트랜스포머들의 소음, 서로의 부품이 부드럽게 웅웅거리는 소리. 그는 양 무릎에 손목을 걸친 채로 하늘을 우러러보았다. 오라이온이 의문이 짙어진 눈으로 그를 따라 앉는 것이 보였다.

 

"좋아…, 친구. 진짜로 걱정되기 시작했거든. 어디 아픈 건 아니지? 뭐가 문제야?"

 

D-16은 바람 빠지듯 숨을 내뱉었다. 그에게 무슨 말을 해줘야 할까? 낮의 감독관 놈을 작살내는 상상을 하고 있었노라고? 놈을 죽이는 것만으로는 성이 차지 않아서, 잔인하게 고문한 다음 살려달라는 비명을 듣고 나서야 스파크를 짓밟는 광경을 떠올렸노라고? 거기서 죄책감도 거북함도 아닌 순수한 희열을 맛보았다고?

 

그는 오라이온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오라이온의 푸른 옵틱은 달빛을 받아 더욱 무구한 색채로 번뜩이고 있었다. 친우의 머릿속에 도사리고 있는 광기 어린 폭력의 의식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는 듯이. D-16은 한쪽 무릎을 가까이 끌어당겨 주먹으로 헤드 기어를 괴었다.

 

"그럼 방금 전까진 가짜로 걱정했다는 소리가 되겠는데."

 

그렇게 답할 뿐이었다. 오라이온이 안도했다는 듯이 씩 웃는 것이 보였다. 분위기를 농담으로 이어가는 연장선이자, 상대방을 전적으로 신뢰하기에 완성되는 미소였다. D-16은 맞대응하듯 설핏 웃었다. 저 대책 없는 미소를 보다 보면 분노의 상승선이 제풀에 지쳐 꺾이고 만다. 그건 부정적으로 치달아가는 감정을 환기시키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방법이었다.

 

"섭섭하네. 사이버트론을 통틀어 누구보다 너를 진심으로 걱정하는 메크가 나인데, 그걸 네가 의심해버리면 서운하잖아."

 

"그러셔. 미처 몰랐던 사실이네." D-16은 과장되게 옵틱을 굴리며 덧붙였다. "어디 보자, 나를 그렇게까지 진심으로 걱정하시는 메크가 지난번엔 어디로 데리고 가주셨더라. 제트팩 보관소에서 여분을 훔쳐낼 동안 망을 봐달라고 했지, 아마? 복도에 감독관이 셋이나 돌아다니고 있는 곳이었는데 말이야?"

 

"네 도움이 없었더라면 그만큼 빼돌리진 못했을 거야. 그때 네가 펼친 임기응변은 정말 대단했지."

 

"칭찬해 달라는 소리가 아니었거든?" D-16이 짜증스럽게 말했다. 그날 그는 오라이온이 숨은 장소를 더듬어보려는 감독관의 주의를 끌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한 연기를 펼쳐야 했다. '아이아콘 5000 대회에서 보고 팬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만나 뵌 것도 운명인데 싸인 한 장 해주시렵니까?' 이름도 모르는 감독관들이 열정적으로 자기 자랑을 떠들어대며 그의 어깨 장갑에 서명을 남기는 동안 오라이온은 간신히 창밖으로 제트팩이 담긴 수납함과 자신의 몸을 던져넣어 자리를 빠져나갈 수 있었다. 그는 숙소에 돌아오자마자 가장 먼저 팔 전체를 도배한 싸인을 박박 닦아 지워내야 했다.

 

"요는 말이야, 네가 아니었다면 실패했을 작전이었다는 거야." 오라이온이 양손으로 D-16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만큼 널 신뢰하고 있으니까 그랬던 거지. 그리고 팔에 받은 싸인 너랑 제법 잘 어울렸어."

 

"더 지껄여 봐, 팩스. 내가 실수인 척 널 걷어차기 전까지."

 

"칭찬으로 한 말이었는데." 오라이온은 D-16의 눈빛을 보고 빠르게 정정했다. "알겠어. 그 싸인들 완전히 거지 같더라. 애초에 가져온 패드가 없다고 남의 팔뚝에 싸인을 휘갈기는 건 어느 머리에서 나온 발상이야? 완전히 막돼먹은 놈들이었다니까."

 

"최악 중의 최악이었지."

 

그들은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D-16은 음성 장치를 진동시키며 벽에 머리를 기댔다. 오라이온과 함께 벌인 기행들은 늘 노발대발하는 기억으로 시작해서 종래에는 즐거운 추억으로 남곤 했다. 어떻게 매번 그럴 수가 있는지 신기할 노릇이었다. 어쩌면 오라이온에게는 까딱 잘못해서 대참사로 번질 수 있었던 사건들을 한때의 유쾌한 일화로 탈바꿈시키는 재능이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오라이온은 자리를 옮겨 D-16의 곁에 나란히 앉았다. 대화 중에 무엇을 깨달았건, 그는 고맙게도 더 이상 D-16이 홀로 고민하던 내용을 캐묻지 않는 배려를 선보였다. D-16은 친구의 얼굴을 가리는 제 팔을 바닥으로 내렸다. 어차피 아무리 캐물어봤자 그 이야기만큼은 고백하지 않으리라 마음먹은 참이었다. 이 녀석에게는 더욱이.

 

"그래서, 모처럼의 비번에 뭐하고 놀았던 거야?" 자신은 최악의 하루를 보냈으니 적어도 이 녀석은 즐겁게 보냈으면 했다. 그런 마음으로 물은 것이었다.

 

"별거 안 했어. 낮까지 늘어져라 재충전하고. 알씨랑 슬롯머신으로 게임하고. 아이언하이드가 걷어찬 샌드백에 얼결에 얻어맞고. 사이드스와이프랑 하이그레이드도 한잔하고."

 

그 정도면 괜찮은 휴일이었네. 그렇게 대답하려던 D-16은 문득 생각을 멈췄다. "뭔 소리야? 사이드스와이프는 오늘 내내 나랑 같이 일했는데. 오후 작업 중에 어깨 이음매가 헐거워져서 치료소로 향하느라 열차에 타지 않는 것까지 봤거든. 언제 하이그레이드를 마셨다는 거야?"

 

"아." 오라이온이 짧은 침묵 끝에 말을 이었다. "몰랐어? 우리 동료 중에는 사이드스와이프라는 이름이 두 명이나 있어. 동명이인이라니 신기할 노릇이지."

 

D-16은 갑작스럽게 두통이 엄습하는 것을 느꼈다. 이런 때만큼은 기어이 잘 작동하는 직감이 원망스러울 따름이었다. 이제는 물어보기에도 겁이 날 지경이다. 그는 두 손으로 얼굴을 문질러 내린 다음 결코 뱉고 싶지 않았던 한 문장을 내뱉었다. 

 

"너 오늘 뭐 했어."

 

오라이온을 돌아보자 그는 D-16이 아닌 다른 곳을 바라보며 딴청을 피우는 중이었다. 어색한 정적이 길어지자 그는 마침내 졌다는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그 자식, 오늘 쉰다더니. 완전 당했군."

 

"그야 그 녀석은 오늘 아침에 블루스트릭과 작업일을 교대했으니 말이지!" D-16은 주먹으로 오라이온의 어깨를 후려치며 외쳤다. "대체 뭔 짓을 저질렀길래 나한테 거짓말까지 할 정도야? 젠장, 알아보기도 무섭다! 사고 쳐놓고 시치미 떼기의 귀재 오라이온 팩스 님께서 오늘은 대체 언제 어디서, 무슨 대형 참사를 저질러 놓고 돌아오셨을까!"

 

뜻밖에도 오라이온은 찡그린 얼굴로 맞은 부위를 쓸어내리기만 할 뿐이었다. D-16으로서는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한편으로는 적잖은 충격이기도 했다. 어떻게 그가 자신에게까지 함구하는 비밀이 있단 말인가? 이 배신자. 그동안 어떤 어처구니없는 헛소리를 지껄여도 나는 청각 장치를 열고 전부 들어주었는데. 방금 전에 말한 대로 그가 그렇게나 자신을 신뢰하고 있다면 오늘 뭘 했는지 따위를 털어놓지 못할 이유가 어디에 있느냔 말이다. D-16은 저 역시 감춰놓은 비밀이 있다는 사실을 새까맣게 잊어버리고 묵묵부답인 친구를 향한 원망을 증폭시켰다. 다음 순간 어떤 깨달음 하나가 벼락처럼 그의 머리를 관통하고 지나갔다.

 

"였구나." 그는 입을 떡하니 벌리고 덧붙였다. "그 폭발. 경고음…. 전부 네 짓이었어."

 

오라이온은 대답 대신 배기 장치의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래서 말하지 않으려고 한 건데."

 

"대체 어떻게? 아니, 애초에. 언제부터 광산에 있었던 거야?"

 

"문레이서의 부상이 덜 회복되었다고 해서 대타를 해주었거든." 오라이온은 멋쩍은 듯이 뒤통수를 쓸어내렸다. "그런데 갱에서 나오자마자 먼 곳에서 네가 무릎을 꿇는 게 보였고… 네 앞의 감독관을 보니 상황을 대충 알겠더라고. 그래서, 뭐, 그랬던 거지."

 

"폭발은?"

 

"갱내에 남아있는 생명 신호를 확인한 다음 화약이 담긴 수레를 통째로 밀어 넣었어. 큰 소리가 나야 모두 주의를 돌릴 것 같아서."

 

"…고작 수레 하나가 연쇄 폭발을 일으켰다고?"

 

"여기서 엄청난 우연이 발생한 거지." 오라이온이 당당하게 손가락을 치켜들었다. "누가 에너존 광맥이 드러난 틈을 덜 닫고 나와버린 거야. 화약 수레가 부딪치자마자…" 그의 양손이 폭발 장면을 묘사하듯이 움직였다. 뻥! "방출된 충격파 맞고 반대편 벽까지 날아가서 처박혔다니까. 다들 다른 데 정신이 팔려있느라 내가 날아가는 걸 못 봐서 다행이었지."

 

"하지만 그건 네가 아니었는데." 연쇄 폭발이다! 구역이 무너지고 있어! 탈출해야 해! "당장 탈출하라고 외치던 목소리 말이야. 설마 그것도…"

 

"충격 때문에 음성 장치가 잠시 맛이 가 있었거든. 결과적으로는 목소리를 변조한 게 되었으니 전화위복이 된 셈 아니겠어?"

 

"미친 자식." 

 

D-16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 폭발 때문에 갱 하나가 완전히 날아갔어. 지진 때문에 정말로 온 광산이 무너져버렸으면? 네가 책임지고 보상할 거야?"

 

"안 그랬으니 다행이지."

 

오라이온은 담백한 말로 그 모든 걱정을 일축시켰다. 너무나 쉽게 나오는 대답에 말문이 턱 막힐 지경이었다. D-16은 괴상한 신음을 내지르며 이마를 싸맸다. 어쩌면 저 녀석의 얼굴을 다시 보는 것이 유치장 너머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프라이머스께서 도우셔서 망정이지. 정말로 일이 잘못되었으면 문자 그대로 대형 참사가 날 뻔했다. 강등당하는 것은 걱정 축에도 못 낄 일이었다.

 

"걱정 마. 오늘 같이 일한 동료들이랑 말을 맞춰 놔서 알리바이는 완벽하니까. 다들 입 무거운 거 알잖아."

 

"내가 그걸 걱정하고 있는 것 같아? 팩스, 넌 혼자서만 목숨이 열 몇 개는 되냐? 어떻게 그런 식으로 매번 무모하게 행동할 수가 있는 거야." D-16은 고개를 내저으며 한탄했다. "앞으로 너한테서 눈을 떼면 안 되겠다. 오늘 같은 일이 또 일어나면 그 후에는 무슨 사달이 날지 짐작도 안 가."

 

"기대치를 충족하려면 다음번엔 스케일을 더 키워야겠는데?"

 

"입 다물어."

 

그러나 D-16은 이미 웃음을 뱉어내고 있었다. 맞장구를 쳐 주면 안 되는데 반응이랍시고 나오는 게 이 모양이다. 하지만 인정할 건 인정해야 했다. 꽤 감동이었다. 큰 처벌을 받을 것을 감수하고 자신을 위해 행동해 주었다는 말이니까. 그게 갱을 폭발시키는 극단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더라면 고맙다는 말부터 나갔을 법한 일이었다.

 

오라이온은 D-16을 향해 자세를 틀었다. 그는 이따금 들을 수 있는 진중한 어투로 입을 열었다.

 

"디, 오늘 있었던 일 말이야. 부당하게 맞고 있는 동료를 감싸려다가 그렇게 된 거였다면서?" 

 

그는 D-16이 자신을 돌아보자 어깨를 으쓱였다. "다른 녀석들이 알려주더라고. 그건 용감한 일이었어. 누구도 선뜻 앞으로 나서지 못할 때 네가 모두를 대신해서 불의에 맞서 싸워준 거잖아. 솔직히, 친구로서 자랑스럽다."

 

"그래봤자 뭐가 달라졌는데?" D-16은 자조적으로 입술을 비틀어 올렸다. 그가 오늘 저지른 것은 아무 의미도 없는 일이었다. 감독관의 주먹에 나가떨어지고, 모두가 보는 앞에서 놈에게 무릎을 꿇었을 뿐이었다. 눈에 보이는 불의에 맞서 싸운다 한들 무엇이 달라진단 말인가. 사소한 저항 따위는 이 사회의 본질을 바꿀 수 없다. "나중에 그 감독관이 수틀렸다고 다른 녀석을 밟는다 한들 우리가 뭘 할 수 있겠어? 맞서는 건 소용없는 일이야."

 

"뭐가 달라졌느냐니. 네 덕분에 틴코어가 목숨을 건졌는걸." 오라이온은 단언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기이할 정도의 의지가 담겨 있었다. "그리고 다음번엔 내가 네 곁에 있을 텐데, 다를 수밖에 없지. 둘이 함께라면 결과가 변하고도 남을 거라고."

 

"얻어맞는 게 두 명이 될 테니 그나마 덜 맞게 될 거란 소리지?"

 

"적어도 놈에게 무릎을 꿇게 되진 않겠지." D-16이 코웃음을 내뱉자 그가 덧붙였다. "진심으로 하는 소리야, 디. 네가 그럴 필요는 없었어. 그 상황에서 꿇으라고 명령하는 자식이 잘못된 거지."

 

"놈은 그걸 요구할 만한 힘도, 지위도 있었어. 뭘 명령하든 당연한 거야." 말을 뱉으면서 D-16은 기시감에 휩싸였다. 누구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는 것을 들었던가? 아니면 이건 누구에게서도 듣지 못한, 스스로가 만들어낸 말인가?

 

"다음에 누가 말도 안 되는 소릴 지껄이거든 그 자식의 이를 박살 내버려. 우리의 장점이 그거잖아. 코그가 있는 녀석들보다 작아서 박치기를 먹이면 이가 전부 작살이 나버린다는 거."

 

"꼭 시도해본 적이 있는 것처럼 들린다?"

 

"처음 중심지에 있는 술집에 갔을 때, 난데없이 시비를 걸어오던 놈이 있었거든." 오라이온이 제 이를 두들기듯 가리켜 보였다. "그 자식 앞니가 전부 뭉개진 꼴을 네가 봤어야 하는 건데. 두 눈에서 세척액을 질질 흘리면서 도망치더라니까."

 

"그거 진풍경이었겠는데."

 

"내가 보증하는데, 묵은 체증이 단번에 내려가는 기분이야. 끝내줘."

 

"가끔 보면 네가 왜 유치장이 아니라 여기에 있는지 신기할 때가 있다니까." D-16은 미간을 문지르며 대꾸했다. "노파심에 말하는 거지만, 설마 상관을 대상으로 같은 방법을 쓸 생각은 아니겠지? 네가 그런 짓을 저지르면 난 완전히 못 본 척 할 거야." 그러나 내뱉은 말과는 반대로 오라이온이 그러했듯 열받는 자식의 앞니에 박치기를 먹여주는 상상을 하는 것은, 그 나름대로 유쾌한 지점이 있었다. 현실에서 실행에 옮기기 불가능하다는 이유로 지워버리기에는 퍽 아까운 상상이었다.

 

오라이온처럼 마음 가는 대로 행동할 수 있다면 얼마나 자유롭고 후련할 것인가. 그러나 그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오라이온이기에 가능한 일일 테다. 이런 생각이 들 때면 D-16은 자신이 그의 자유분방한 행동에서 대리만족을 느끼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가 아무리 타박하고 비난할지언정 그의 친구는 규율의 선을 아슬아슬하게 넘나드는 이단아, 세상의 잣대와 평가의 일체를 도외시하는 아웃사이더로 남아있길 바랐다. 그가 그런 존재로 남아있는 것만으로도 자신은 충분할 것 같았다. 세상에 영원한 것이란 없다지만 이런 것쯤은 변함이 없어도 괜찮지 않겠는가.

 

"글쎄, 폭력을 쓸 생각은 없어. 되갚아 줄 수 있는 더 나은 방법이 있는데 고작 박치기로 돌려주는 건 너무 시시한 일이잖아."

 

D-16은 잠깐 멍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는 설마 하는 마음으로 물었다. "되갚아준다니? 누구에게? 너 지금 무슨 소릴 하고 있는 거야?"

 

"당연히 그 감독관 녀석을 말하는 거지. 넌 굴욕당한 걸 갚아주고 싶지 않아?"

 

D-16은 오라이온을 돌아보았다. 그는 어느 사이버트로니안도 상상하지 못할 기발한 작전을 떠올리고 있을 때면 늘 그렇듯이, 맹렬하게 옵틱을 반짝이며 D-16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브레인 모듈에는 진작부터 계획의 뼈대가 단단히 갖춰져 있는 것 같았다. 그가 손가락을 치켜세우며 말했다.

 

"내게 좋은 생각이 있어. 얼마 전에 성능 좋은 페인트 공을 몇 개 구했거든. 오늘 남들 몰래 감독관의 뒤를 밟아서 그놈의 개인실이 어디 있는지도 알아냈고."

 

오라이온은 갑작스럽게 설명을 멈췄다. 마치 D-16의 반응에 따라 뒷이야기를 더 이어갈지, 여기서 멈출지를 가늠하고 있는 것 같았다. D-16은 짧은 고민 끝에 대답했다.

 

"…계속해봐."

 

오라이온이 씩 웃었다. 그 표정은 마치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게 나와야지, 친구.

 

"너도 알다시피 그놈은 자기 몸을 끔찍하게 아끼잖아? 그래서인지 광산 감독관치고는 샤워를 엄청나게 자주 하는 편인 것 같더라고. 특히 출근 직전에는 무조건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몸을 씻는다고 하더라. 그놈이 광산에 나올 때마다 온몸에서 신선한 기름 냄새가 풍기는 게 장난이 아니래."

 

오라이온은 어디서 꺼낸 지 모를 페인트 공을 손바닥 위에서 튕겨 보였다. 주먹만 한 크기의 페인트 공은 선명한 마젠타색을 하고 있었다. 감독관의 어두운 외장갑에 묻으면 광산의 마지막 구역에 서 있어도 얼룩이 보일 것이었다. 

 

"그 녀석의 세척실로 들어가서 샤워 장치에 이 공들을 설치하는 거야. 놈이 출근하기 직전에 샤워기를 틀면 기름에 페인트 공들이 녹아서 그대로… 거기서부터는 설명하지 않아도 알겠지?"

 

"흠."

 

D-16은 턱을 짚고 있다가 질문했다. "…허점이 너무 많아. 일단 개인실에 잠입할 때까지 어떻게 안 들킬 건데? 그리고 잠입하는 것까지는 성공했다 치더라도, 샤워 장치에 공을 설치하는 과정에서 놈에게 들키기라도 한다면? 게다가 다시 나올 때는 또 어떻게 할 셈이야?"

 

"바로 거기서 네 도움이 필요한 거지, 디."

 

오라이온은 기다렸다는 듯이 D-16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모두 잠들어있을 새벽에 작전을 개시할 거야. 나한테 지난번에 슬쩍한 썬더글라이드의 ID 카드가 있거든.―잠깐, 그런 표정으로 보지 마. 왜 슬쩍한 건지는 나중에 설명할 테니까. 아무튼―네가 그걸 사용해서 감독관 숙소 건물에 들어간 다음 1층에 있는 비상 대피 장치를 작동시켜줘. 벽에 계속 붙어서 이동하면 사각지대에 걸쳐져서 감시카메라에 잡히지 않을 거야. 내가 해봐서 알아.

 

난데없이 경고음이 울리면 다들 혼비백산에서 바깥으로 뛰쳐나오겠지. 그 틈을 타서 나는 창문을 타고 녀석의 개인실에 들어갈게. 샤워 장치에 설치하는 작업은 30초도 안 걸려서 끝날 테니까 바로 빠져나오면 될 거야."

 

"그런 다음 어떻게 여기로 돌아올 건데?"

 

"건물 뒤편에 폐품 수거함이 있어. 이른 새벽에 쓰레기를 수거해가는 모양이더라고. 코그가 있는 녀석들 용이라 크기가 커서 우리 둘이 들어가도 공간이 남을 거야. 거기에 숨어있다가 주변이 조용해졌을 때 얼른 도망가는 거지. 그쪽은 청소차가 드나드는 도로만 나 있어서 새벽에는 아무도 오가지 않아. 지하 배수로를 따라 여기까지 이동하면 들키지 않을걸."

 

"믿을 수가 없네." D-16이 혀를 내두르며 말했다. "완전히 철두철미하게 시뮬레이션을 돌려놨잖아. 하지만 네 말대로 하는 과정에서 뭐 하나 잘못되어서 일이 꼬이기라도 하면? 현행범으로 잡히면 강등당하는 선에서 안 끝날 거야. 그다음에는 어쩔 셈인데?"

 

​"일이 잘못되었을 때 생각은 안 해봤어."

 

그럼 그렇지. D-16은 예상과 한 치의 오차도 없는 대답에 한숨을 내뱉었다. "하여간에 너란 놈은! 100% 일이 다 완벽하게 흘러갈 거란 확신은 대체 어디서 나오는 거야? 그런 주제에 나보고 그걸 거들어 달라고? 뻔뻔하다는 자각이 있긴 하냐?"

 

"그런 확신은 없어. 하지만 확실한 게 하나 있긴 하지."

 

오라이온은 강조하듯 D-16의 어깨를 가볍게 흔들었다. "디, 아무것도 시도해보지 않고 포기하는 것과 뭐라도 해보고 실패하는 건 분명히 달라. 만약 네 짐작과 반대로 일이 잘 풀려서 성공한다면 우린 녀석에게 완벽히 한 방 먹여주는 게 되는 거야. 상상만으로도 기분 좋지 않아?"

 

"……."

 

"이 페인트 공은 휠잭이 발명한 특제야. 한 번 묻으면 긁어내거나 새로운 도색을 덧입히지 않고는 지울 수 없는 거지. 분명 그 자식, 새 도색을 받기 전까진 창피해서 얼굴도 못 들고 다닐걸."

 

​D-16은 오라이온의 시선으로부터 옵틱을 돌려 바닥을 바라보았다. 어떻게든 그의 올곧은 눈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임시방편이었지만, 오라이온은 결정타를 가하듯이 덧붙였다. 

 

"네가 없으면 이 작전은 성공하지 못할 거야. 나 혼자서는 못해."

 

"아, 진짜 돌아가시겠네."

 

D-16은 머리를 싸매며 신음했다. 그의 설득 방식은 항상 기가 막혔다. 계속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다가 정 안 되겠다는 판단이 설 즈음이면 감정에 호소하는 것이다. 네가 없으면 안 돼. 그건 오라이온이 자신 없이 위험천만한 사건을 벌이다가 시원하게 망해버렸을 때를 가정하게 만드는 마법의 문장이었다. 거기까지 상상이 진행되고 나면 더는 거절할 도리가 없어지는 것이다. 오라이온도 오라이온이었지만, 늘 같은 술수에 넘어가고 마는 자신도 자신이었다. 

"그래, 알겠다고. 그 미친 짓, 나도 참여하겠어." D-16은 졌다는 듯이 두 손을 내리고는 선언했다. "하지만 이건 똑바로 알아 둬. 난 이번 작전이 아주 약간이라도 수틀릴 기미가 보이면 네가 벽에 달라붙어 있든 그놈 개인실에 들어갔든 당장 널 들쳐 메고 배수로로 뛰어들 거야. 알아들었어?"

"그보다 더 든든한 말이 없겠는데, 친구."

오라이온은 주먹을 들어 올렸다. 이제는 어떤 의식과도 같아진, 둘만의 신뢰를 재확인할 때의 몸짓이었다. D-16은 자신의 주먹을 그의 것에 맞부딪쳤다. 그것으로 계약 체결이었다. 이제 그들은 서로가 위험에 빠졌을 때 상대방을 구하기 위해 문자 그대로 온몸을 던져 달려들 것이었다. 오라이온이 말했다.

"한 번 해보자고. 너와 함께라면 틀림없이 성공할 거야."

작전은 성공했다. 솔직히 말해 모든 과정이 너무 수월하게 흘러가서 어이가 없을 정도였다. D-16이 비상 경보음을 울린 다음 건물 뒤편으로 돌아 나오자 오라이온이 곧 접선 장소로 떨어져 내렸고, 그의 표정에는 악동 같은 천진난만함이 가득했다. 성공 여부를 물어볼 필요도 없게 만드는 얼굴이었다.

남은 시간 동안 그들은 짜증과 노성을 내지르는 감독관들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폐품 수거함에 얌전히 숨어있었다. 주변이 잠잠해져 탈출할 틈이 나자 그들은 재빨리 배수구 덮개를 올려 지하 통로로 내려갔다.

광부용 숙소 방향으로 달리는 내내 오라이온은 그들이 함께 들었던 소리를 흉내 내느라 숨까지 헐떡이면서 달렸다. "그 자식 목소리 들었어? '으아아아아아악! 이게 뭐야! 내 도색이이이이이이이이!'" 

 

손을 휘둘러대며 우스꽝스럽게 재현하는 목소리에는 참을 방법이 없었다. 누군가에게 따라잡힐까 봐 입술을 다물고 있던 D-16은 결국 배수 통로가 쩌렁쩌렁하게 울리도록 웃음을 터뜨렸다. 그건 오라이온의 말대로 진정 속이 후련해지는 일이었다.


 

오라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