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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06 05:39





그 일은 한쪽 눈을 잃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일어났다. 하여 이따금 뇌까지 쑤셔대는 두통이 찾아올 때면, 주인 잃은 눈두덩이가 심술을 부리는 거라고 마냥 생각했다. 저 역시 한쪽 세상을 바라보는 게 익숙하지 않았으니, 몸도 적응하는 것이라고. 밤낮으로 괴롭히던 두통이 잦아들 때쯤, 열감에 익어버릴 것만 같은 통증이 쇄골 밑으로 찾아와 한동안 떠나지 않았다. 


어린 아에몬드는 별일이 아니라며 다른 이를 안심시켰다. 훈련하다 벌레에 쏘인 거 같다. 적당하게 둘러대고 아무렇지 않은 척 굴었어도, 옷가지에 쓸려 아릴 때마다 남은 한쪽 눈이 찌푸려지는 걸 가릴 순 없다. 근 한 달을 가까이 괴롭히던 고통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남은 건- 네임이었다. 서책에서나 보았던 그 네임.


[... Strong]


익숙하다 못해 머릿속에 박혀 버린 그 성이 아니었다면 조금이나마 네임을 반겼을까. 누군가가, 나를 맹목적으로 사랑해줄 이가 어딘가에 있다는 사실에 기뻐했을까. 하지만 뇌 속 깊이 틀어박힌 성에 순간 구역질이 올라왔다. Strong. 비웃기라도 한 듯 깔끔한 서체로 새겨진 글자에 앞에 쓰인 이름이 무언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단검을 든 건 충동적인 행동이었다. 그리진 손이 약하게 떨렸다. 마음먹은 건 금방이었지만 시행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지금 없애버리지 않으면 평생 그를 따라 다니며 오명으로 남을 이름이었다. 횃불에 단검을 달궜다. 가장자리부터 발갛게 달아오른 검날을 쇄골에 가져다 대자, 살이 타는 냄새와 함께 찢어지는 고통이 뒤따랐다. 


아에몬드는 그렇게 네임이 발현되자마자 불로 지져버렸다.


고된 훈련으로 크고 작은 상처가 온몸에 남겨진 터라, 그을린 그 자국을 신경 쓰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엉겨 붙어 흉이진 자국이 한 번씩 욱신거리며 자기주장을 했지만, 새겨질 때 비하면 아주 미비한 정도라, 아에몬드는 서서히 네임의 존재를 잊어갔다.



-



아에몬드가 실로 오랜만에 네임에 대해 떠올린 건, 오전에 있었던 접견 때문이었다. 혼기가 차자 혼담을 넣는 곳이 많아졌다. 어차피 할 정략혼이라면 실속을 챙기는 게 맞겠지. 언제 전쟁이 발발하여도 놀랍지 않은 시기였다. 이런 특수한 상황을 따지다 보니, 후보지가 추려지긴 했으나 이렇다 할 결론은 내리지 못한 터였다. 



‘제 딸에게 왕자님의 네임이 있사옵니다.’



실로 멍청한 말이 아닌가. 제게 새겨져 있던 네임처럼, 스트롱 가문의 누군가가 이리 지껄였다면 아주 조금은 혹했을지도 모르겠다. 아에몬드가 아는 한 스트롱 가문에서 태어난 자식이나 사생아 중에 여자는 없었다. 스트롱가 누구보다 가까이 있기에, 놓친 정보가 있을 리 없다고 아에몬드는 자신할 수 있었다. 술술 꿰어내는 거짓말을 듣는 일은 꽤 흥미로웠으나 거기까지였다. 세 치의 혀를 뽑아버렸어야 하는 건데. 아쉬움에 살짝 입가가 쓰렸다.



“국화차에요.”



아직 머리가 어지러우세요?
걱정스러운 목소리에 아에몬드는 고개를 돌렸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잔을 내려놓은 이는 멀뚱멀뚱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항시 받던 적대감이나 두려움이 없는 평온한 얼굴이었다. 옅게 미소를 지은 아에몬드는 자세를 고쳐 앉아 찻잔을 들었다. 입안에 은은하게 따뜻함이 감돌자 욱신거리던 미간이 조금씩 풀어진다.



“또 혼담을 거절하셨다고 들었어요.”

“어머니가 다녀갔나?”

“아니요? 왕비님께서 절 찾으실 리 없잖아요?”



화들짝 놀라 손사레 치며 말하는 이의 얼굴은 누가 봐도 거짓말을 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투명한 반응에 아에몬드의 미간이 살짝 올라갔다. 평소와 달리 부드럽게 말이다. 저도 들리는 귀가 있다고요. 주절주절하는 목소리는 레드 킵에서 가장 가식 없는 것이리라. 아에몬드는 확신할 수 있었다.


아에몬드는 열심히 왕비를 항변하는 이를 내려보았다. 얼굴이 시뻘게진 채, 어색하게 나도는 손을 감추지 못한 모습이 분주하다. 은은하게 올라간 입꼬리가 찻잔에 가려진다. 아마도 왕비는, 레드 킵의 사람들은 그녀가 아에몬드에게 조금은 특별한 존재라는 걸 눈치챈 모양이다. 단순히 목숨을 구해준 은인이 아닌, 그 이상이 있다는 걸. 그러니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왕비가 쪼르르 그녀에게 찾아와 부탁 아닌 부탁을 하는 거겠지. 아에몬드는 짐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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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니…”

“제가 무슨 말을 하든 안 믿으실 거죠?”


결국, 포기한 듯 묻는다. 왕비님이 신신당부하셨는데. 작게 웅얼거리는 목소리에 아에몬드는 한 톨도 남기지 않고 싹 비운 찻잔을 내려놓았다. 국화차 덕분일까. 머리가 한결 가볍다.


쭈뼛쭈뼛 눈치를 살피던 허니가 물었다.



“오늘 혼담이 오간 분께 네임이 있다고 들었어요.”

“허황한 말이지.”

“네임을 믿지 않으세요?”



순진무구하게 묻는 말이 살짝 떨리듯 들리는 건 아에몬드의 착각일까. 짙은 갈색 눈동자를 응시한 그는 짧게 숨을 뱉었다. 갑자기 이루 정의할 수 없는 말들이 귓가를 괴롭힌다. 운명이잖아요. 덧붙인 말은 둥둥 구름 위를 떠다니는 것만 같다. 운명. 서책에서나 보던 고고한 말이 떠오르자, 쇄골 아래가 다시 쓰라린 것만 같다.


망할지도 모르는, 아니 분명 망할 운명을 타고난 이름은 덮어진 지 오래다.


“믿지 않아.”




-




허니가 자란 숲으로 돌아온 건 삼 개월 만이었다. 오두막으로 가는 길의 풀이 제법 자라 드레스 자락을 간지럽힌다. 다만 무성히 자란 풀과 대비되게, 오두막으로 들어가는 길목 앞은 불시착한 바가르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우연을 가장한 용의 낙하, 그리고 쓰러져있던 아에몬드. 멍하니 그를 바라보던 허니. 
파노라마처럼 스쳐 가는 장면에 그녀는 꼴깍 마른침을 삼켰다. 오두막에 가까워질수록 쿵쾅거리는 심장이 진정되지 않는다. 떨리는 손으로 문고리를 잡고 돌리자 끼이익- 쇠 긁히는 소리와 함께 어둠이 허니를 맞이한다.



“늦었네.”



오래 기다렸어, 허니.
심연을 감도는 목소리에 허니는 두 눈을 느리게 감았다가 떴다. 새까만 어둠이 물들어있던 오두막에 서서히 횃불이 하나 둘 켜진다. 불을 옮겨 담는 이를 불안한 눈동자가 부지런히 쫓았다. 오두막 어디에도 검은 인영 외 다른 이는 없었다. 허니가 그토록 바라고 염원하던 이가.



“엄마는…….”

“어머니는 드래곤스톤에서 평온히 지내고 계셔.”

“내 어머니는 그분이 아니야.”

“하늘이 두 쪽 나지 않는 이상, 우리 어머니가 같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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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이.
마치 뱀처럼 스쳐 지나가는 목소리가 귓가를 어지럽힌다. 파르르 떨리는 몸이 쓰러지지 않게 지탱해주는 손이 우악스럽다. 양어깨를 아프게 옥죄는 이를 쳐다본 허니는 얼마 가지 않아 두 눈을 감아버렸다. 짙은 갈색 눈동자는 낯설지 않은 것이었다.


영원할 줄 알았던 평화가 깨진 건 다 눈앞에 있는 자캐리스, 이 남자 때문이었다. 허니는 감은 눈을 뜨고 싶지 않았다. 


자캐리스는 제게 쌍둥이 누이가 있다는 말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사산한 아이를 품에 안아 보지도 못하고 태워버렸다는 이야기 말이다. 그는 이따금 누이에 대해 생각했다. 라에니라가 가여워하고 그리워하는 데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소리 한 번 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누이에 대해 일종의 연민을 느꼈다. 허니를 만나기 전까지는, 분명 그랬다.



“일은 어떻게 되고 있어?”



목까지 꼭 잠겨있던 단추를 풀며 자캐리스가 물었다. 반항할 새도 없이 가슴골까지 풀어헤친 그는 쇄골 아래 새겨진 이름을 지분거렸다. 하렌홀이 불탔을 때, 유품 사이에서 발견한 일기장은 가히 충격적인 내용으로 가득 찼다. 왕실은 물론이고 저잣거리에 공공연하게 떠돌던 소문이 사실이라는 것에 구역질이 치밀었지만, 그는 금세 정통성을 되찾을 방도를 모색했다.



“계획은 실패할 거야.”



한 자 한 자 끊어 가며 허니가 말했다. 아무렇지 않게 보이고 싶어 힘을 주며 말했지만, 실상은 떨리다 못해 폭풍에 떠내려가듯 마음이 요동친다. 그럴 리 없어. 자캐리스의 목소리가 부드럽게 오두막에 울렸다. 일렁거리는 횃불 아래로 얼굴이 다가와 그늘을 만든다. 너부렁이는 목소리가 귓가에 속삭인다.



“이 네임 덕분에, 우리는 반드시 승리할 거야.”



네임을 사람을 미치게 하거든.
과연 네임이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건 상대에 한해서일까. 허니는 반문하고 싶었다. 승리자의 미소를 짓고 있는 이의 눈동자는 이미 형형하게 빛을 내고 있다. 작게 숨을 내뱉은 허니는 그대로 눈을 감았다.


여전히 자캐리스가 지분거리는 손가락 아래에는, 그를 만나기 전 읽을 수조차 없던 네임이, 발리리아어로 새겨져 있었다.


[Aemond Targaryen]








아에몬드너붕붕 / 자캐리스너붕붕
[Code: e4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