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hygall.com/606755362
view 1029
2024.10.02 03:18
다ㅈㅇ
“진짜야?”
멤버들이 두사람의 열애 사실의 진위 여부를 묻는 내내 버키는 입을 꾹 다문 채 말이없었다. 다수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절대 대답할 마음 없으니 썩 꺼지라는 눈빛이 지독해 보일 지경이었다. 방금 전 막 회의실에 당도한 토니는 뒷걸음질을 치다 클린트와 눈이 딱 마주쳤다. 그는 날고기를 발견한 하이에나 처럼 토니에게 달려들었다. 친구 하이에나들은 덤이었다. 토니는 끌려가듯 자리에 앉았다.
“토니, 당신이 말해봐. 진짜야? 둘이 사귀어?”
나타샤가 그랬다면 내가 눈치를 못챘을리 없다는 어투로 물었다. 멀리 앉아있는 버키를 건너 보았다. 그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허공만 노려보고있었다. 곤란해 보이는 사람은 이 사건의 진실을 정확하게 알고있는 샘 뿐이었다. 클린트가 토니의 어깨를 붙잡고 답 없는 그를 흔들어댔다.
“말 좀 해봐! 둘이 진짜 그렇고 그런 사이라고?”
“대답하지마. 그냥 무시해.”
겨우 열린 버키의 입에선 냉담한 대답이 돌아왔다. 그는 그렇게 말하더니 테이블에 올려진 차키를 집어들고 회의실 밖으로 걸어나갔다. 토니는 당황했다. 버키는 일을 이지경으로 만들어 놓고 혼자 째려하고 있었다. 저를 하이나에들에게 재물로 바쳐 놓고. 허둥지둥거리며 그를 따라나섰다.
“진짠가봐.”
뒤통수에서 클린트가 중얼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버키는 어찌나 걸음이 빠른지 그를 따라잡으려면 토니는 뛰어야했다. 토니는 그를 향해 내달렸다. 버키는 토니가 저를 따라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한번을 돌아보지 않았다.
“반즈!”
숨을 몰아쉬며 버키의 소매를 붙들었다. 버키가 토니를 내려 보았다.
“왜.”
왜라니. 대답하지 말라 해놓고 혼자 도망가면 그만이냐는 말이 목구멍 끝까지 치밀었지만 참아냈다. 회의가 시작하기도 전이었다. 두사람이나 빠진 걸 알면 스티브는 참지 않을 것이다. 돌아오지 않는 두사람을 두고 멤버들은 이런저런 상상에 살을 붙일 것이다. 더이상은 토니도 피곤했다. 상황을 이렇게 만든 건 토니가 아니었다. 이렇게까지 해달라고 한적도, 바란 적도 없었다.
“어디가는데.”
“집.”
버키는 단순 명료하게 대답했다. 그의 대답에서 얻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슨 감정인지, 어떤 기분인지.
“회의 시작도 안했어.”
“알아. 그래서.”
그의 얼굴에 귀찮음이 스쳤다. 의문이 들었다. 이렇게 피해버릴 정도로 이상황이 탐탁치 않다면 왜 그렇게 대담한 짓을 벌였단 말인가. 짜증이 올라오려는 것을 애써 밀어냈다. 어찌됐든 버키 덕에 팬티 사건은 종식됐다. 토니는 팬티 도둑에서 그 윈터 솔져의 남자 친구가 되었다. 선택해야 한다면 팬티도둑 보다는 윈터 솔져의 남자친구쪽이 나았다. 그게 회사의 안정을 유지하는데 더 나으니까.
“지금 가면. 내일은 아무도 안물어 볼 것 같아?”
버키는 답이 없었다. 고집스레 다물린 그의 입이 답답하게 느껴졌다.
“반즈, 이제부터가 시작이야.”
그말을 끝으로 혼자서 회의실로 돌아왔다. 또다시 질문세례가 시작됐다. 언제부터? 어떻게? 아니, 대체 왜? 멤버들이 묻고싶은게 많은거야 당연했다. 궁금하겠지. 어떻게 부모죽인 인간과 사귈 수 있는지. 천륜을 어기면서까지 그를 택한 이유가 무엇인지. 답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구질구질하게 사정을 설명하고 싶지도 않았다. 스티브가 들어왔다. 그는 회의실을 한번 둘러보더니 빈자리에서 시선을 멈췄다.
“아프데.”
묻기도 전에 먼저 선수를 쳤다. 스티브는 별 말 없이 회의를 시작했다.
토니는 커튼 사이로 창밖을 내려다 보았다. 기자들이 집 앞에 진을 치고 있었다. 토니는 집 앞에 서있는 기자들의 수를 헤아렸다. 수가 너무 적었다. 나머지가 어디있을지는 뻔했다. 토니는 어제 계산을 마쳤다. 이 장단에 조금 어울려주다 삼개월 뒤쯤 결별 기사를 터트리면 될 것 같았다.
토니는 샘에게 전화를 걸어 버키의 집 주소를 알아냈다. 샘은 할말이 많은 것 같았지만 결국 괜찮냐는 물음만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아직까지는 괜찮았다. 앞으로는 모르겠지만.
거울 앞으로 가 조금 길어진 머리를 쓸어 넘겼다. 협탁 위에 놓아둔 차키를 주머니에 쑤셔넣고 현관으로 가 숨을 들이마셨다. 문을 열었다. 기자들의 시선이 일제히 토니를 향했다. 카메라 셔터음과 함께 눈을 찌르는 듯한 섬광이 토니를 덮쳤다. 토니는 아무렇지 않은 척 그들 사이를 지나쳤다. 기자들이 자석에 이끌리는 것처럼 토니에게 따라 붙었다. 주차장까지 따라온 기자들은 차에 올라타는 토니에게 카메라를 들이밀며 멤버들과 같은 질문을 던졌다. 왜 하필 그였는지. 토니는 대답하지 않았다. 토니가 시동을 걸고 액셀을 밟자 차에 치일 뻔한 기자들이 욕설을 뱉으며 비켜 섰다. 그대로 거칠게 핸들을 틀어 진입로를 빠져 나왔다. 익숙한 일들이었다. 너무나 익숙해서 어제도 이런 일이 있었던 것만 같았다.
샘이 알려준 주소지로 가자 예상대로 그의 집 앞에 기자들이 포진하고 있었다. 차를 세우고 기자들을 향해 걸어갔다. 또 다시 들려오는 셔터음, 번쩍이는 플래시 불빛. 토니는 마치 매일 드나드는 집에 온 것처럼 태연하게 행동했다. 연속되는 셔터음을 무시하며 계단을 올랐다. 그대로 엘리베이터를 향해 직진했다. 기자들을 등지고 엘리베이터에 오르자 몸에 힘이 쭉 빠져나갔다. 손도 축축했다. 땀이 베어 있는 손바닥을 바지에 문질렀다.
문을 두드리고 초인종을 눌렀다. 복도는 고요했다. 토니는 망설이다 다시 한번 초인종을 누르고 나즈막히 중얼댔다. 나야, 토니스타크. 곧 문이 열렸다. 버키가 문가에 서서 갑자기 나타난 토니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는 피곤에 절은 얼굴이었다. 토니는 그를 지나쳐 멋대로 집안으로 발을 디뎠다.
“들어오라고 안했는데.”
토니는 그의 말을 가볍게 무시하고는 창가로 향했다. 기자들은 저들끼리 쑥덕대고 있었다. 아마 두사람이 집에서 나올 때까지 버틸 모양새였다.
“누가 알려줬어?”
“뭘.”
버키가 소파 등받이에 머리를 기댄 채 삐딱한 시선으로 토니를 보았다.
“집 주소. 누가 알려줬냐고.”
그는 조금도 놀라거나 당황한 것 같지 않았다. 평소와 같이 높낮이 없는 목소리였다.
“비밀보장은 해줘야지.”
버키의 입꼬리 한쪽이 올라갔다. 가라앉은 눈 때문에 비웃는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샘아니면 스티브겠지.”
”친구 두명이라고 자랑하는거야?“
“친구 많은가봐?”
토니의 선제 공격에 버키가 맞받아쳤다.
”두명보단 많아. 로디도 있고... 해피도...“
“그게 친구야? 주종관계지.”
먼저 비아냥 댔으나 승자는 버키였다. 자신과 로디, 해피는 주종관계가 아님을. 굉장히 친밀하고 깊은 관계라는 것을 어필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병신같이 보일 것 같았다. 토니가 입을 다물자 버키가 코웃음을 쳤다. 이번에는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100살 넘은 할아버지보다 친구가 없으면 어떡하냐 스타크.“
테이블에 놓인 물병으로 버키의 머리통을 후려치는 상상을 했다. 스티브는 버키가 좋은 사람이라고 했다. 착하고 다정하고 진정으로 따듯한 인간이라고 했다. 토니는 스티브에게 크게 실망했다.
”그래, 나 친구 없어. 주변에 있는 사람이라고는 이해관계로 얽힌 인간들이 끝이야. 이제 됐어? 만족해?”
“잘 아니 다행이네.”
가까이 마주한 버키는 싸가지가 없었다. 재수도 없었다. 물병이 아닌 더 험악하고 강력한 물건을 찾기 위해 주변을 둘러보았다. 보이는 거라고는 조악한 테이블과 티브이, 벽 한구석에 세워진 뜯겨나간 창문이 전부였다. 토니의 시선이 뜯겨나간 창문에 붙들렸다. 창은 그자리에 오래 있었는지 먼지가 쌓여 있었다.
겨울이었다. 칼바람이 창을 통해 쉴 새 없이 불어닥치는 계절. 모두가 외투를 여미고 종종 걸음으로 걸어다니는 계절. 제 아무리 혈청 맞은 윈터 솔져라해도 추위를 아예 피할 수는 없었다.
“언제부터 저기 있었어?”
토니가 창을 가리켰다. 버키의 시선이 거실 한구석에 놓여있는 창으로 향했다.
“글쎄... 모르겠네.”
“안추워?”
토니의 물음에 버키는 어깨를 으쓱이고 말았다. 춥다는 것인지 아니란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의 반응에 괜한 오기가 일었다. 떨어져 나간 창을 집어들고 창틀에 끼워 맞추었다. 창은 한번에 들어가지 않았다. 구부정하게 등을 굽힌채 창을 들고 끙끙대고 있자 버키가 다가와 창프레임을 손으로 꾹 눌렀다. 창은 창틀 안으로 쑥 들어가며 제자리를 찾았다.
“많기도 하다.”
버키가 창밖을 내다보며 혼잣말처럼 중얼댔다.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했잖아.”
“하나만 묻자. 그냥 억울해서 그런거야...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거야.”
“뭐가?”
“해명하라고 난리를 쳤잖아.”
토니가 눈을 껌벅였다. 예상 못한 질문이었다.
“나랑 계약한 회사들... 내 직원들 전부 나만 믿고 있는데 어떻게 나몰라라 하겠어. 그 사람들은 계약 한건에 사활을 걸어. 그걸로 흥할 수도, 완전히 망할 수도 있으니까. 내 이미지만 믿고 계약해준 사람들인데 그걸 내 손으로 무너뜨릴 수는 없잖아.”
버키가 고개를 돌렸다. 시선이 맞물렸다. 생각을 읽을 수 없는 푸른 눈동자에 토니의 인영이 비쳤다.
“반즈, 딱 3개월만 애인 행세 좀 해줘. 3개월 뒤에는 깔끔하게 정리해 줄게.”
버키의 시선이 다시 창밖을 향했다. 그는 한참을 말이 없더니 느리게 입을 뗐다.
“그래.”
버키는 꽤나 성실하게 토니의 지령을 이행했다. 아니, 그 이상을 보여주었다. 그는 아침마다 토니를 데리러 왔고, 일이 끝나면 그를 집에 데려다주었다. 양심이 찔린 토니가 제가 데려다 주겠다고 하자, 그는 필요없다며 꽤나 단호하게 답했다. 며칠간은 평온했다. 일이 바빠서 얼굴 마주칠 때라고는 출근 할 때와 집에 돌아갈 때 뿐이었고, 그마저도 토니는 매번 차안에서 잠들어 있었다. 타, 다왔어, 내려. 이정도가 두사람이 나누는 대화의 전부였다.
도심의 도로는 꽉 막혀있었다. 뒷차가 클래슨을 울렸다. 버키가 액셀을 밟았으나 나아가는 속도는 미미했다. 토니는 시간을 체크하다 힐긋대며 버키의 눈치 보기를 반복했다. 이와중에도 졸음이 쏟아졌다. 졸지 않으려 노력했다. 버키의 미세하게 굳어있는 얼굴이 신경쓰였다. 신호가 빨간불로 바뀌었는데도 차는 걸어가는 것보다 느리게 전진했다.
“안되겠다.”
버키는 그렇게 말하며 차사이가 벌어진 틈을 타 차선을 변경했다. 그는 끊임없이 차선을 바꾸더니 샛길로 뱡향을 틀었다. 눈 앞에 가로수가 쭉 이어진 흙길이 펼쳐졌다. 토니는 불안한 눈으로 전방을 주시했다. 이러다 약속 시간을 지킬 수 없을 것 같았다.
두사람은 아동병원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주마다 봉사를 나가기로 했는데 크리스마스가 일주일 남은 시점에 산타가 필요하다는 요청을 받았다. 처음부터 버키를 끼워넣을 생각은 아니었다. 병원측에서 루돌프가 필요하다고 했다. 연말이라 봉사자의 인원도 현저히 부족해서 곤란을 겪고있다는 애달픈 사정도 덧붙였다. 전화를 받으며 옆에 앉은 버키를 돌아보았다. 통화내용이 들렸는지 버키가 고개를 저었지만 토니는 할 사람이 있다고 답해 버리고 말았다.
차는 계속해서 샛길을 달렸다. 같은 풍경이 이어졌다. 토니는 결국 졸음을 참지 못하고 병든 닭 마냥 꾸벅꾸벅 졸았다. 졸다가 눈을 뜨니 버키의 자켓이 몸 위에 덮혀져 있었다. 버키가 눈을 뜬 토니를 곁눈질했다. 몸을 일으키려하자 버키가 손을 들어 토니의 이마를 눌렀다.
“스타크, 단명하고 싶은 거 아니면 그냥 자.”
요즘 무리를 하긴 했다. 회사에서 종일 일을 하고 집에 돌아가서도 카페인을 들이부으며 다시 일을 했다. 그 와중에 행사도 참여하고 강연도 뛰었다. 혹사시킨 몸이 계속해서 적신호을 보내왔지만 무시했다. 그러니 수면부족 상태가 되는건 당연한 결과였다. 다시 눈을 감았다. 미안해. 입밖으로 내뱉었는지 생각으로 그쳤는지 인지하지도 못한 채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스타크, 다왔어.”
토니는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물 속에 있다 건져진 사람처럼 몸을 떨며 잠에서 깨어났다. 버키가 차를 세우며 주차권을 주머니에 우겨 넣었다. 토니는 멍한 정신으로 어두워진 사방을 둘러보았다. 약속보다 한시간은 늦었으나 별 도리가 없었다. 뒷자석에 놓아둔 산타 옷과 루돌프 옷을 챙겼다. 시간도 없어 차에서 내려 화장실로 직행했다.
화장실로 들어와 급하게 산타 옷을 꿰어 입고 모자를 눌러썼다. 칸 밖으로 나가자 벌레씹은 얼굴로 서있는 버키가 보였다. 그는 상의와 하의가 우주복처럼 이어진 루돌프 옷을 입고 있었다. 아랫 입술을 깨물며 웃음을 참았다. 그는 한숨을 한번 내쉬더니 지퍼를 올려 달라며 뒤를 돌았다. 결국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화장실에 토니의 웃음소리가 커다랗게 울렸다. 거울 속으로 어설픈 산타와 루돌프의 모습이 비치고있었다.
병원에서 미리 마련해둔 선물 꾸러미를 들고 병실 문을 열었다. 아이들이 탄생을 내뱉으며 토니와 버키에게로 몰려들었다. 아이들은 저들끼리 캐롤을 부르며 신나했다. 들어온지 5분도 지나지 않았는데 기가 빨렸다. 토니는 간이 의자에 걸터 앉아 아이들의 질문 폭격을 받아냈다. 주된 질문은 썰매는 어디있냐는 거였다. 12번째 같은 질문을 받았을 때 토니는 하마터면 주차장에 세워뒀다고 답할뻔했다.
아이들은 토니의 가짜 수염을 잡아당기고 모자를 벗기려 들었다. 토니만 수모를 겪는 것은 아니었다. 곱슬머리의 여자아이가 버키의 다리에 매달렸다. 버키가 무시한 채 앞으로 걸어가자 아이는 뭐가 그리 좋은지 꺄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버키의 얼굴은 아침 보다 나이들어 보였다.
간호사가 소란스런 아이들에게 산타 할아버지에게 편지를 쓸 시간이라며 다정하게 이야기했다. 아이들이 크레파스를 든 채 신난 악마처럼 뛰어다녔다. 토니가 간호사라는 직업에 존경을 느끼고 있을 때 악마하나가 토니에게 다가왔다. 토니가 겁에 질린 표정으로 악마를 보았다.
"산타할아버지 궁금한게 있어요."
"뭔데?"
"진짜 루돌프는 어디있어요?"
토니가 턱짓으로 아이들 틈에 앉아있는 버키를 가리켰다.
"거짓말인거 알아요."
"불행하게도 진짜야."
"사람이잖아요."
"아니야, 저기 뿔도 있잖아."
아이의 코끝이 빨개지기 시작했다.
"아니 그러니까 잠깐 사람으로..."
불안을 감지한 토니가 뒤늦은 수습을 하기 위해 입을 열었으나 아이가 한발 빨랐다. 곧 울음소리가 병실을 가득 채웠다. 토니는 절망했다.
"루돌프는 어디있어!"
"울지마, 악마야. 부탁이야."
토니가 아이의 등을 성의 없이 토닥였다. 아이는 더 크게 울 뿐이었다. 진땀을 빼고 있는 토니에게 버키가 다가왔다. 버키가 아이를 안아 들었다.
"울지마. 루돌프 왔잖아."
버키가 다정한 손길로 아이의 뺨을 쓸었다.
"사람이잖아요!"
"너희랑 있을 때는 사람으로 변신해야 해. 그게 산타 마을 규칙이거든."
"진짜?"
"그래, 진짜."
아이의 맑은 눈이 반짝이더니 금세 울음을 멈추고 신이나서 버키의 목에 매달린채 종알종알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버키는 금세 인기스타가 되었다. 아이들은 버키에게로 몰려가 산타마을에 대해 질문했다. 그는 능숙하게 산타마을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그걸 보고있는 토니 마저 산타마을이 실존할지도 모른다는 착각에 빠지게 할 정도였다.
루돌프의 인기로 외톨이가 된 산타의 앞으로 한 아이가 스케치북을 들고 왔다. 아이는 토니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아이가 크레파스를 쥔 작은 손으로 열심히 무언가를 그려 나가기 시직했다. 가만히 아이의 그림을 보던 토니는 아이의 그림이 다른 아이들과는 다른다는 것을 느꼈다.
"뭘 그리는 거야?"
"착한 일을 하고있는 저요."
아이가 무심히 대답했다.
"그걸 왜 그리는건데?"
"뭘 가지고 싶다고 요구하는 것 보다 이게 더 잘 먹힐 것 같아서요."
아이는 말투부터 다른 아이들과는 달랐다. 토니는 턱을 괸채 아이의 그림을 감상했다.
"뭐가 가지고 싶은데?"
"아저씨 산타 할아버지 아닌 거 알아요."
말문이 막힌 토니가 아이의 동그란 머리통을 내려다 보았다.
"아저씨 토니 스타크 잖아요."
토니는 몸에 소름이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어떻게..."
"눈만 봐도 알아요. 우리 아빠가 아저씨 광팬이었거든요."
"아버지가 훌륭하신 분이시구나."
"아뇨, 엄마랑 저 버리고 떠나버렸어요."
토니는 잠시 말을 잃었다.
"...그래서 선물은 뭐가 가지고 싶길래 그렇게 간절한거야?"
"엄마가 행복해지는거요."
토니와 아이의 눈이 마주쳤다. 토니는 헤아릴 수 없이 깊은 아이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엄마가 행복하지 않아보여?"
"일단 저때문에 돈이 엄청 많이 사라졌고, 또 아빠가 떠나 버렸고. 엄마는 하루종일 돈 벌고 제 간호만 해야돼요 그리고 매일 울어요."
아이가 손가락을 접어가며 설명했다.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얼굴이었다.
"아마 엄마가 불행한 건 저 때문일거에요."
"너희 엄마 생각은 다를걸."
아이는 대답이 없었다. 토니는 완성되어가는 그림을 보며 눈을 질끈 감았다.
"이름이 뭐니?"
"데이지요."
일순간 병실 안의 공기가 지나치게 무겁게 느껴졌다. 목이 조여드는 것 같았다. 토니는 화장실을 핑계삼아 병실을 도망치듯 나왔다. 병실 문을 닫자 발치에 모자에 달려있던 흰색 방울이 떨어졌다. 아이들이 하도 잡아당겨서 결국은 운명을 다한 모양이었다. 토니는 흰색 방울을 주머니에 넣으며 복도 벽에 기대어 앉았다. 주머니 속 방울을 만지작대며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복도에 발소리가 울렸다. 발소리는 토니의 앞에서 멈췄다. 고개를 들자 정장을 빼입은 금발의 남자가 토니의 눈에 들어왔다.
“토니?”
"마이클."
토니가 한 쪽 귀에 걸어 두었던 인조 털을 벗었다.
"영국에 있다고 들었는데."
"들어온지 좀 됐어. 잘지냈지?"
사실 토니는 그가 영국에서 돌아왔다는 것을 알고있었다. 대단한 집 자제이시니 듣고싶지 않아도 주변에서 그의 소식을 전해주었다.
"나야 늘 뭐 똑같지."
"영국에 있어도 네 이야기는 항상 들리더라."
토니는 대답하지 않았다. 한번도 이런식으로 다시 만나리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모자에 짓눌린 땀에 젖은 앞머리가 부끄럽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오늘은 산타할아버지로 왔나보네."
"넌 여기 무슨일이야?"
"나도 산타 흉내내려고 왔어. 후원하는 애들이 여기 있거든."
"그래, 그럼 얼른 애들한테 가봐."
등을 떠밀듯 재빠르게 말을 뱉어낸 토니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피하고 싶었다. 20대에, 아무것도 모르는 천치같던 그시절에 만났던 옛연인. 한번도 다시 조우하고싶다 생각한 적 없었다. 그는 토니에게 한마디 말도 없이 영국으로 떠나버렸으니까. 토니는 버려졌다고, 제가 못나 버려진 거라고 스스로를 탓했다. 그게 아니라면 그가 한마디 말도 없이 떠날 사람이 아니라고 굳게 믿었다. 그시절 토니에게 마이클은 그런 존재였다.
“토니...”
돌아가려는 토니의 걸음을 마이클이 붙들었다. 어렵게 고개를 돌렸다.
“나 이혼했어.”
토니의 눈동자가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결혼했다는 건 알고있었다. 돌아왔다기에 아내와 함께 온 줄 알았다. 그가 지금 제게 왜 저런 말을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대답을 고르려는데 병실문이 열렸다. 쏟아지듯 버키가 튀어나왔다.
“스타크, 안들어오고...!”
버키가 말을 멈췄다. 그는 둘사이의 심상치 않은 기류를 한번에 읽어낸 것 같았다. 복도에 침묵이 감돌았다. 이혼했어. 그래서 뭐. 라고 받아쳐야 했나. 판단이 서질 않았다. 마이클은 토니에게 그저 지난 기억일 뿐이었다. 미화시키고 싶은 추억 딱 그정도였다.
“아, 친구를 우연히 만나서. 인사해. 그....”
“안녕하세요. 제임스 반즈 입니다.”
“마이클 스콧이에요. 반갑습니다.”
토니는 또다시 도망치고싶은 기분에 휩싸였다. 전남친과 가짜남친이 복도에 서서 어색하게 인사중이었다. 기왕 마주칠거라면 죽도록 행복한 모습이나 보여주면 좋으련만, 가짜남친이라니 괜히 제꼴이 초라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토니, 연락해도 되지?”
“어... 그럼.”
“그래, 토니. 우리 자주 보자.”
인간이 뻔뻔해진건지 원래 저런 인간이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토니는 올라오는 어지럼증에 저도 모르게 옆에 서있는 버키의 팔을 붙들었다.
“친구라...”
버키가 멀어지는 마이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중얼댔다. 그는 이 상황만 보고도 먼 과거까지 꿰뚫어 본 것 같았다.
“아무말도 하지마.”
버키가 어깨를 으쓱이더니 토니를 병실로 밀어 넣었다. 토니는 급하게 다시 수염을 걸치고 모자를 푹 내렸다. 이제 아이들을 한명씩 무릎에 앉혀 놓은 채 선물을 나누어 주면 이 지겨운 산타 놀음도 끝이었다.
병원을 나오자 온 몸에 힘이 쭉 빠지는 것 같았다. 아이들 때문인지 마이클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힘없이 걷고있는데 버키가 토니의 팔을 붙잡았다. 왜. 퉁명스레 내뱉자 버키가 비장한 얼굴로 속삭였다.
“뒤에.”
슬쩍 보니 파라라치 하나가 두사람을 쫓고있었다. 이 늦은시간에 대단들도 하지. 무시할까 하다가 생각을 고쳐먹었다. 토니가 버키를 향해 눈짓을 했다. 버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충 아무대나 만지라는 뜻이었는데 전혀 못알아 먹는 눈치였다.
“내 엉덩이 만져.”
조용히 속삭이자 버키의 얼굴이 서서히 경악으로 물들어갔다.
“뭘 만져?”
“뭘 그렇게 놀라? 내가 당신꺼 만진데? 양심적으로 내꺼 만지라고 했잖아.”
“넌 그게 양심적이냐?”
버키가 짜증스레 받아쳤다. 순식간에 열이 올랐다. 아니, 내가 사귄다고 했나 지가 그랬으면서 백살 먹은 노인네 주제에 순결이라도 잃는 것처럼 구는 버키가 고깝게 느껴졌다. 토니가 손바닥을 쫙 펼치며 허공에 손을 흔들었다.
“그럼, 내가 만져? 그게 낫겠냐고.”
“아, 됐다. 당신이랑 무슨 말을해.”
버키가 지친 낯으로 토니의 왼쪽 엉덩이에 손을 올렸다. 오물이라도 만지는 듯한 손짓이었다. 그사이 파파라치는 두사람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토니는 이를 악물었다. 누가 연인의 엉덩이를 똥씹은 표정으로 만진단 말인가. 만진다는 말도 우스웠다. 버키는 토니의 엉덩이에 그냥 손바닥만 대고 있었다.
“제대로 해. 당신이 내뱉은 말에 책임을 지란 말이야.”
이를 악문 채 복화술로 속삭였다. 버키의 눈이 가늘어졌다.
“진짜 제대로 해?”
“어. 제대로 해.”
“후회 안하지.”
뭘 후회해. 뱉기도 전에 버키가 오기 섞인 눈알로 토니에게 한걸음 다가왔다. 둘사이의 거리가 지나치게 가까워졌다. 불길한 기분. 버키가 양손을 들어올렸다. 토니의 뺨이 버키의 양손에 가둬졌다. 뒤이어 이마에 따뜻한 입술의 감촉이 닿았다 떨어져 나갔다.
“악!”
토니는 머리통에 총이라도 맞은 것처럼 비명을 지르며 제 이마를 감싸쥐었다. 그 모습을 보며 버키는 좋아라 깔깔 웃어댔다. 버키를 쏘아보았다. 파파라치만 없었어도 당장에 쏴 죽였을 것이다. 토니는 배까지 부여잡고 웃어대는 버키를 등진 채 차로 돌진했다. 두고 가자. 저새끼를 이 컴컴한 어둠속에 버려두고 전속력으로 달리자. 그렇게 생각했것만 차에 다 다르니 제게 차키가 없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버키는 멀리서 차키를 흔들며 느긋하게 걸어오고 있었다.
“제대로 하라며. 그래서 했잖아.”
빈정거림을 받으며 차에 올라탔다. 미친놈. 잘못걸려도 한참 잘못걸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엉덩이 만지랬지 언제...”
뒷말은 꺼내기도 싫어서 삼켜버렸다. 있는대로 인상을 쓰고 고개를 돌린 채 창밖만 내다 보았다. 버키는 그런 토니를 힐끔 쳐다보더니 기가막히다는듯 웃었다.
“스타크, 엉덩이 만지는게 더 이상해. 알아? 엉덩이가 훨씬 더러워 보인다고.”
버키가 항변했다. 그는 억울할지 몰라도 토니의 생각은 달랐다. 엉덩이 만지는 정도야 친구끼리도 할 수 있는 저급한 장난에 불과했지만 이 늦은 밤에 이마에 남기는 키스는 너무 로맨틱해 보이는 행위였다. 아무리 연인인 척 쇼를 하고 있다지만 그런 행위를 버키와 하고싶지도 않았고, 심지어 그걸 전세계에 기사 사진으로 박제 시키고 싶지도 않았다. 잠깐의 연극을 위해 저 밑에 억눌러 놓았으나 버키는 여전히 토니에게 부모를 죽인 원수와 같았다. 버키가 제 부모를 살해하는 영상을 목격한 뒤로, 버키와 제대로 된 대화도 교류도 하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버키에 대해 아는게 아무것도 없었다. 문득 궁금증이 일었다. 그는 왜 제게 득 될 거 하나 없는 이 연극에 자진해서 참여했는지, 왜 이 상황을 그저 묵묵히 받아들이고 있는지.
“왜... 나랑 사귄다고 했어? 그렇게까지 할 필요 없었잖아.”
얼굴까지 드러내면서 그럴 이유가 그에겐 전혀 없었다. 서로를 투명인간 취급하고 있었고, 그게 당연했고, 그래서 토니는 은연 중에 그가 자신을 싫어한다고 생각했다.
“미안해서.”
버키는 한참만에 대답했다. 뭐가 미안해서. 그렇게 묻고싶었으나 들려올 다음말이 두려워 입을 열지 못했다. 도로는 이제 뻥 뚫려있었다. 버키의 차가 도로를 매끄럽게 질주했다. 배고프다. 토니는 괜히 딴소리를 했다. 실제로도 배가 고팠다. 저녁도 먹지 못한 채 일하다 말고 뛰쳐나와 병원으로 향했으니 당연했다.
“뭐 먹고싶은데.”
버키는 새벽이 코 앞까지 도래해 있는 이 시점에 랍스터라고 말하면 바다로 가 가재라도 잡아다 줄 것 처럼 물었다. 이미 사위는 짙은 어둠으로 물들어있었다. 야간에도 운영하는 주유소를 빼고는 문을 연 곳도 없었다.
“랍스터.”
웃으라고 꺼낸 말에 버키는 심란한 표정으로 밖을 한번 보더니 진지하게 한손으로 랍스터 집을 검색했다. 너무 진지해 보여 말리지도 못했다. 웹페이지에 근처 식당 이름이 주르륵 떴다. 하나같이 뻘건 글씨로 영업종료를 알리고 있었다. 버키는 난감하다는 듯 창을 끄더니 꼭 랍스터여야만 하냐고 물었다. 깊게 묻어두었던 불안감이 불쑥 튀어나왔다. 항상 두려웠다. 그가 좋은 사람일까봐. 스티브가 입이 마르고 닳도록 칭찬했던 그가, 스티브의 말보다도 더 괜찮은 사람일까봐. 진실이 뭐든 외면하고 싶었다. 차마 부모를 배신 할 수는 없기에.
.
“진짜야?”
멤버들이 두사람의 열애 사실의 진위 여부를 묻는 내내 버키는 입을 꾹 다문 채 말이없었다. 다수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절대 대답할 마음 없으니 썩 꺼지라는 눈빛이 지독해 보일 지경이었다. 방금 전 막 회의실에 당도한 토니는 뒷걸음질을 치다 클린트와 눈이 딱 마주쳤다. 그는 날고기를 발견한 하이에나 처럼 토니에게 달려들었다. 친구 하이에나들은 덤이었다. 토니는 끌려가듯 자리에 앉았다.
“토니, 당신이 말해봐. 진짜야? 둘이 사귀어?”
나타샤가 그랬다면 내가 눈치를 못챘을리 없다는 어투로 물었다. 멀리 앉아있는 버키를 건너 보았다. 그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허공만 노려보고있었다. 곤란해 보이는 사람은 이 사건의 진실을 정확하게 알고있는 샘 뿐이었다. 클린트가 토니의 어깨를 붙잡고 답 없는 그를 흔들어댔다.
“말 좀 해봐! 둘이 진짜 그렇고 그런 사이라고?”
“대답하지마. 그냥 무시해.”
겨우 열린 버키의 입에선 냉담한 대답이 돌아왔다. 그는 그렇게 말하더니 테이블에 올려진 차키를 집어들고 회의실 밖으로 걸어나갔다. 토니는 당황했다. 버키는 일을 이지경으로 만들어 놓고 혼자 째려하고 있었다. 저를 하이나에들에게 재물로 바쳐 놓고. 허둥지둥거리며 그를 따라나섰다.
“진짠가봐.”
뒤통수에서 클린트가 중얼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버키는 어찌나 걸음이 빠른지 그를 따라잡으려면 토니는 뛰어야했다. 토니는 그를 향해 내달렸다. 버키는 토니가 저를 따라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한번을 돌아보지 않았다.
“반즈!”
숨을 몰아쉬며 버키의 소매를 붙들었다. 버키가 토니를 내려 보았다.
“왜.”
왜라니. 대답하지 말라 해놓고 혼자 도망가면 그만이냐는 말이 목구멍 끝까지 치밀었지만 참아냈다. 회의가 시작하기도 전이었다. 두사람이나 빠진 걸 알면 스티브는 참지 않을 것이다. 돌아오지 않는 두사람을 두고 멤버들은 이런저런 상상에 살을 붙일 것이다. 더이상은 토니도 피곤했다. 상황을 이렇게 만든 건 토니가 아니었다. 이렇게까지 해달라고 한적도, 바란 적도 없었다.
“어디가는데.”
“집.”
버키는 단순 명료하게 대답했다. 그의 대답에서 얻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슨 감정인지, 어떤 기분인지.
“회의 시작도 안했어.”
“알아. 그래서.”
그의 얼굴에 귀찮음이 스쳤다. 의문이 들었다. 이렇게 피해버릴 정도로 이상황이 탐탁치 않다면 왜 그렇게 대담한 짓을 벌였단 말인가. 짜증이 올라오려는 것을 애써 밀어냈다. 어찌됐든 버키 덕에 팬티 사건은 종식됐다. 토니는 팬티 도둑에서 그 윈터 솔져의 남자 친구가 되었다. 선택해야 한다면 팬티도둑 보다는 윈터 솔져의 남자친구쪽이 나았다. 그게 회사의 안정을 유지하는데 더 나으니까.
“지금 가면. 내일은 아무도 안물어 볼 것 같아?”
버키는 답이 없었다. 고집스레 다물린 그의 입이 답답하게 느껴졌다.
“반즈, 이제부터가 시작이야.”
그말을 끝으로 혼자서 회의실로 돌아왔다. 또다시 질문세례가 시작됐다. 언제부터? 어떻게? 아니, 대체 왜? 멤버들이 묻고싶은게 많은거야 당연했다. 궁금하겠지. 어떻게 부모죽인 인간과 사귈 수 있는지. 천륜을 어기면서까지 그를 택한 이유가 무엇인지. 답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구질구질하게 사정을 설명하고 싶지도 않았다. 스티브가 들어왔다. 그는 회의실을 한번 둘러보더니 빈자리에서 시선을 멈췄다.
“아프데.”
묻기도 전에 먼저 선수를 쳤다. 스티브는 별 말 없이 회의를 시작했다.
토니는 커튼 사이로 창밖을 내려다 보았다. 기자들이 집 앞에 진을 치고 있었다. 토니는 집 앞에 서있는 기자들의 수를 헤아렸다. 수가 너무 적었다. 나머지가 어디있을지는 뻔했다. 토니는 어제 계산을 마쳤다. 이 장단에 조금 어울려주다 삼개월 뒤쯤 결별 기사를 터트리면 될 것 같았다.
토니는 샘에게 전화를 걸어 버키의 집 주소를 알아냈다. 샘은 할말이 많은 것 같았지만 결국 괜찮냐는 물음만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아직까지는 괜찮았다. 앞으로는 모르겠지만.
거울 앞으로 가 조금 길어진 머리를 쓸어 넘겼다. 협탁 위에 놓아둔 차키를 주머니에 쑤셔넣고 현관으로 가 숨을 들이마셨다. 문을 열었다. 기자들의 시선이 일제히 토니를 향했다. 카메라 셔터음과 함께 눈을 찌르는 듯한 섬광이 토니를 덮쳤다. 토니는 아무렇지 않은 척 그들 사이를 지나쳤다. 기자들이 자석에 이끌리는 것처럼 토니에게 따라 붙었다. 주차장까지 따라온 기자들은 차에 올라타는 토니에게 카메라를 들이밀며 멤버들과 같은 질문을 던졌다. 왜 하필 그였는지. 토니는 대답하지 않았다. 토니가 시동을 걸고 액셀을 밟자 차에 치일 뻔한 기자들이 욕설을 뱉으며 비켜 섰다. 그대로 거칠게 핸들을 틀어 진입로를 빠져 나왔다. 익숙한 일들이었다. 너무나 익숙해서 어제도 이런 일이 있었던 것만 같았다.
샘이 알려준 주소지로 가자 예상대로 그의 집 앞에 기자들이 포진하고 있었다. 차를 세우고 기자들을 향해 걸어갔다. 또 다시 들려오는 셔터음, 번쩍이는 플래시 불빛. 토니는 마치 매일 드나드는 집에 온 것처럼 태연하게 행동했다. 연속되는 셔터음을 무시하며 계단을 올랐다. 그대로 엘리베이터를 향해 직진했다. 기자들을 등지고 엘리베이터에 오르자 몸에 힘이 쭉 빠져나갔다. 손도 축축했다. 땀이 베어 있는 손바닥을 바지에 문질렀다.
문을 두드리고 초인종을 눌렀다. 복도는 고요했다. 토니는 망설이다 다시 한번 초인종을 누르고 나즈막히 중얼댔다. 나야, 토니스타크. 곧 문이 열렸다. 버키가 문가에 서서 갑자기 나타난 토니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는 피곤에 절은 얼굴이었다. 토니는 그를 지나쳐 멋대로 집안으로 발을 디뎠다.
“들어오라고 안했는데.”
토니는 그의 말을 가볍게 무시하고는 창가로 향했다. 기자들은 저들끼리 쑥덕대고 있었다. 아마 두사람이 집에서 나올 때까지 버틸 모양새였다.
“누가 알려줬어?”
“뭘.”
버키가 소파 등받이에 머리를 기댄 채 삐딱한 시선으로 토니를 보았다.
“집 주소. 누가 알려줬냐고.”
그는 조금도 놀라거나 당황한 것 같지 않았다. 평소와 같이 높낮이 없는 목소리였다.
“비밀보장은 해줘야지.”
버키의 입꼬리 한쪽이 올라갔다. 가라앉은 눈 때문에 비웃는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샘아니면 스티브겠지.”
”친구 두명이라고 자랑하는거야?“
“친구 많은가봐?”
토니의 선제 공격에 버키가 맞받아쳤다.
”두명보단 많아. 로디도 있고... 해피도...“
“그게 친구야? 주종관계지.”
먼저 비아냥 댔으나 승자는 버키였다. 자신과 로디, 해피는 주종관계가 아님을. 굉장히 친밀하고 깊은 관계라는 것을 어필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병신같이 보일 것 같았다. 토니가 입을 다물자 버키가 코웃음을 쳤다. 이번에는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100살 넘은 할아버지보다 친구가 없으면 어떡하냐 스타크.“
테이블에 놓인 물병으로 버키의 머리통을 후려치는 상상을 했다. 스티브는 버키가 좋은 사람이라고 했다. 착하고 다정하고 진정으로 따듯한 인간이라고 했다. 토니는 스티브에게 크게 실망했다.
”그래, 나 친구 없어. 주변에 있는 사람이라고는 이해관계로 얽힌 인간들이 끝이야. 이제 됐어? 만족해?”
“잘 아니 다행이네.”
가까이 마주한 버키는 싸가지가 없었다. 재수도 없었다. 물병이 아닌 더 험악하고 강력한 물건을 찾기 위해 주변을 둘러보았다. 보이는 거라고는 조악한 테이블과 티브이, 벽 한구석에 세워진 뜯겨나간 창문이 전부였다. 토니의 시선이 뜯겨나간 창문에 붙들렸다. 창은 그자리에 오래 있었는지 먼지가 쌓여 있었다.
겨울이었다. 칼바람이 창을 통해 쉴 새 없이 불어닥치는 계절. 모두가 외투를 여미고 종종 걸음으로 걸어다니는 계절. 제 아무리 혈청 맞은 윈터 솔져라해도 추위를 아예 피할 수는 없었다.
“언제부터 저기 있었어?”
토니가 창을 가리켰다. 버키의 시선이 거실 한구석에 놓여있는 창으로 향했다.
“글쎄... 모르겠네.”
“안추워?”
토니의 물음에 버키는 어깨를 으쓱이고 말았다. 춥다는 것인지 아니란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의 반응에 괜한 오기가 일었다. 떨어져 나간 창을 집어들고 창틀에 끼워 맞추었다. 창은 한번에 들어가지 않았다. 구부정하게 등을 굽힌채 창을 들고 끙끙대고 있자 버키가 다가와 창프레임을 손으로 꾹 눌렀다. 창은 창틀 안으로 쑥 들어가며 제자리를 찾았다.
“많기도 하다.”
버키가 창밖을 내다보며 혼잣말처럼 중얼댔다.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했잖아.”
“하나만 묻자. 그냥 억울해서 그런거야...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거야.”
“뭐가?”
“해명하라고 난리를 쳤잖아.”
토니가 눈을 껌벅였다. 예상 못한 질문이었다.
“나랑 계약한 회사들... 내 직원들 전부 나만 믿고 있는데 어떻게 나몰라라 하겠어. 그 사람들은 계약 한건에 사활을 걸어. 그걸로 흥할 수도, 완전히 망할 수도 있으니까. 내 이미지만 믿고 계약해준 사람들인데 그걸 내 손으로 무너뜨릴 수는 없잖아.”
버키가 고개를 돌렸다. 시선이 맞물렸다. 생각을 읽을 수 없는 푸른 눈동자에 토니의 인영이 비쳤다.
“반즈, 딱 3개월만 애인 행세 좀 해줘. 3개월 뒤에는 깔끔하게 정리해 줄게.”
버키의 시선이 다시 창밖을 향했다. 그는 한참을 말이 없더니 느리게 입을 뗐다.
“그래.”
버키는 꽤나 성실하게 토니의 지령을 이행했다. 아니, 그 이상을 보여주었다. 그는 아침마다 토니를 데리러 왔고, 일이 끝나면 그를 집에 데려다주었다. 양심이 찔린 토니가 제가 데려다 주겠다고 하자, 그는 필요없다며 꽤나 단호하게 답했다. 며칠간은 평온했다. 일이 바빠서 얼굴 마주칠 때라고는 출근 할 때와 집에 돌아갈 때 뿐이었고, 그마저도 토니는 매번 차안에서 잠들어 있었다. 타, 다왔어, 내려. 이정도가 두사람이 나누는 대화의 전부였다.
도심의 도로는 꽉 막혀있었다. 뒷차가 클래슨을 울렸다. 버키가 액셀을 밟았으나 나아가는 속도는 미미했다. 토니는 시간을 체크하다 힐긋대며 버키의 눈치 보기를 반복했다. 이와중에도 졸음이 쏟아졌다. 졸지 않으려 노력했다. 버키의 미세하게 굳어있는 얼굴이 신경쓰였다. 신호가 빨간불로 바뀌었는데도 차는 걸어가는 것보다 느리게 전진했다.
“안되겠다.”
버키는 그렇게 말하며 차사이가 벌어진 틈을 타 차선을 변경했다. 그는 끊임없이 차선을 바꾸더니 샛길로 뱡향을 틀었다. 눈 앞에 가로수가 쭉 이어진 흙길이 펼쳐졌다. 토니는 불안한 눈으로 전방을 주시했다. 이러다 약속 시간을 지킬 수 없을 것 같았다.
두사람은 아동병원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주마다 봉사를 나가기로 했는데 크리스마스가 일주일 남은 시점에 산타가 필요하다는 요청을 받았다. 처음부터 버키를 끼워넣을 생각은 아니었다. 병원측에서 루돌프가 필요하다고 했다. 연말이라 봉사자의 인원도 현저히 부족해서 곤란을 겪고있다는 애달픈 사정도 덧붙였다. 전화를 받으며 옆에 앉은 버키를 돌아보았다. 통화내용이 들렸는지 버키가 고개를 저었지만 토니는 할 사람이 있다고 답해 버리고 말았다.
차는 계속해서 샛길을 달렸다. 같은 풍경이 이어졌다. 토니는 결국 졸음을 참지 못하고 병든 닭 마냥 꾸벅꾸벅 졸았다. 졸다가 눈을 뜨니 버키의 자켓이 몸 위에 덮혀져 있었다. 버키가 눈을 뜬 토니를 곁눈질했다. 몸을 일으키려하자 버키가 손을 들어 토니의 이마를 눌렀다.
“스타크, 단명하고 싶은 거 아니면 그냥 자.”
요즘 무리를 하긴 했다. 회사에서 종일 일을 하고 집에 돌아가서도 카페인을 들이부으며 다시 일을 했다. 그 와중에 행사도 참여하고 강연도 뛰었다. 혹사시킨 몸이 계속해서 적신호을 보내왔지만 무시했다. 그러니 수면부족 상태가 되는건 당연한 결과였다. 다시 눈을 감았다. 미안해. 입밖으로 내뱉었는지 생각으로 그쳤는지 인지하지도 못한 채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스타크, 다왔어.”
토니는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물 속에 있다 건져진 사람처럼 몸을 떨며 잠에서 깨어났다. 버키가 차를 세우며 주차권을 주머니에 우겨 넣었다. 토니는 멍한 정신으로 어두워진 사방을 둘러보았다. 약속보다 한시간은 늦었으나 별 도리가 없었다. 뒷자석에 놓아둔 산타 옷과 루돌프 옷을 챙겼다. 시간도 없어 차에서 내려 화장실로 직행했다.
화장실로 들어와 급하게 산타 옷을 꿰어 입고 모자를 눌러썼다. 칸 밖으로 나가자 벌레씹은 얼굴로 서있는 버키가 보였다. 그는 상의와 하의가 우주복처럼 이어진 루돌프 옷을 입고 있었다. 아랫 입술을 깨물며 웃음을 참았다. 그는 한숨을 한번 내쉬더니 지퍼를 올려 달라며 뒤를 돌았다. 결국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화장실에 토니의 웃음소리가 커다랗게 울렸다. 거울 속으로 어설픈 산타와 루돌프의 모습이 비치고있었다.
병원에서 미리 마련해둔 선물 꾸러미를 들고 병실 문을 열었다. 아이들이 탄생을 내뱉으며 토니와 버키에게로 몰려들었다. 아이들은 저들끼리 캐롤을 부르며 신나했다. 들어온지 5분도 지나지 않았는데 기가 빨렸다. 토니는 간이 의자에 걸터 앉아 아이들의 질문 폭격을 받아냈다. 주된 질문은 썰매는 어디있냐는 거였다. 12번째 같은 질문을 받았을 때 토니는 하마터면 주차장에 세워뒀다고 답할뻔했다.
아이들은 토니의 가짜 수염을 잡아당기고 모자를 벗기려 들었다. 토니만 수모를 겪는 것은 아니었다. 곱슬머리의 여자아이가 버키의 다리에 매달렸다. 버키가 무시한 채 앞으로 걸어가자 아이는 뭐가 그리 좋은지 꺄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버키의 얼굴은 아침 보다 나이들어 보였다.
간호사가 소란스런 아이들에게 산타 할아버지에게 편지를 쓸 시간이라며 다정하게 이야기했다. 아이들이 크레파스를 든 채 신난 악마처럼 뛰어다녔다. 토니가 간호사라는 직업에 존경을 느끼고 있을 때 악마하나가 토니에게 다가왔다. 토니가 겁에 질린 표정으로 악마를 보았다.
"산타할아버지 궁금한게 있어요."
"뭔데?"
"진짜 루돌프는 어디있어요?"
토니가 턱짓으로 아이들 틈에 앉아있는 버키를 가리켰다.
"거짓말인거 알아요."
"불행하게도 진짜야."
"사람이잖아요."
"아니야, 저기 뿔도 있잖아."
아이의 코끝이 빨개지기 시작했다.
"아니 그러니까 잠깐 사람으로..."
불안을 감지한 토니가 뒤늦은 수습을 하기 위해 입을 열었으나 아이가 한발 빨랐다. 곧 울음소리가 병실을 가득 채웠다. 토니는 절망했다.
"루돌프는 어디있어!"
"울지마, 악마야. 부탁이야."
토니가 아이의 등을 성의 없이 토닥였다. 아이는 더 크게 울 뿐이었다. 진땀을 빼고 있는 토니에게 버키가 다가왔다. 버키가 아이를 안아 들었다.
"울지마. 루돌프 왔잖아."
버키가 다정한 손길로 아이의 뺨을 쓸었다.
"사람이잖아요!"
"너희랑 있을 때는 사람으로 변신해야 해. 그게 산타 마을 규칙이거든."
"진짜?"
"그래, 진짜."
아이의 맑은 눈이 반짝이더니 금세 울음을 멈추고 신이나서 버키의 목에 매달린채 종알종알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버키는 금세 인기스타가 되었다. 아이들은 버키에게로 몰려가 산타마을에 대해 질문했다. 그는 능숙하게 산타마을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그걸 보고있는 토니 마저 산타마을이 실존할지도 모른다는 착각에 빠지게 할 정도였다.
루돌프의 인기로 외톨이가 된 산타의 앞으로 한 아이가 스케치북을 들고 왔다. 아이는 토니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아이가 크레파스를 쥔 작은 손으로 열심히 무언가를 그려 나가기 시직했다. 가만히 아이의 그림을 보던 토니는 아이의 그림이 다른 아이들과는 다른다는 것을 느꼈다.
"뭘 그리는 거야?"
"착한 일을 하고있는 저요."
아이가 무심히 대답했다.
"그걸 왜 그리는건데?"
"뭘 가지고 싶다고 요구하는 것 보다 이게 더 잘 먹힐 것 같아서요."
아이는 말투부터 다른 아이들과는 달랐다. 토니는 턱을 괸채 아이의 그림을 감상했다.
"뭐가 가지고 싶은데?"
"아저씨 산타 할아버지 아닌 거 알아요."
말문이 막힌 토니가 아이의 동그란 머리통을 내려다 보았다.
"아저씨 토니 스타크 잖아요."
토니는 몸에 소름이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어떻게..."
"눈만 봐도 알아요. 우리 아빠가 아저씨 광팬이었거든요."
"아버지가 훌륭하신 분이시구나."
"아뇨, 엄마랑 저 버리고 떠나버렸어요."
토니는 잠시 말을 잃었다.
"...그래서 선물은 뭐가 가지고 싶길래 그렇게 간절한거야?"
"엄마가 행복해지는거요."
토니와 아이의 눈이 마주쳤다. 토니는 헤아릴 수 없이 깊은 아이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엄마가 행복하지 않아보여?"
"일단 저때문에 돈이 엄청 많이 사라졌고, 또 아빠가 떠나 버렸고. 엄마는 하루종일 돈 벌고 제 간호만 해야돼요 그리고 매일 울어요."
아이가 손가락을 접어가며 설명했다.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얼굴이었다.
"아마 엄마가 불행한 건 저 때문일거에요."
"너희 엄마 생각은 다를걸."
아이는 대답이 없었다. 토니는 완성되어가는 그림을 보며 눈을 질끈 감았다.
"이름이 뭐니?"
"데이지요."
일순간 병실 안의 공기가 지나치게 무겁게 느껴졌다. 목이 조여드는 것 같았다. 토니는 화장실을 핑계삼아 병실을 도망치듯 나왔다. 병실 문을 닫자 발치에 모자에 달려있던 흰색 방울이 떨어졌다. 아이들이 하도 잡아당겨서 결국은 운명을 다한 모양이었다. 토니는 흰색 방울을 주머니에 넣으며 복도 벽에 기대어 앉았다. 주머니 속 방울을 만지작대며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복도에 발소리가 울렸다. 발소리는 토니의 앞에서 멈췄다. 고개를 들자 정장을 빼입은 금발의 남자가 토니의 눈에 들어왔다.
“토니?”
"마이클."
토니가 한 쪽 귀에 걸어 두었던 인조 털을 벗었다.
"영국에 있다고 들었는데."
"들어온지 좀 됐어. 잘지냈지?"
사실 토니는 그가 영국에서 돌아왔다는 것을 알고있었다. 대단한 집 자제이시니 듣고싶지 않아도 주변에서 그의 소식을 전해주었다.
"나야 늘 뭐 똑같지."
"영국에 있어도 네 이야기는 항상 들리더라."
토니는 대답하지 않았다. 한번도 이런식으로 다시 만나리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모자에 짓눌린 땀에 젖은 앞머리가 부끄럽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오늘은 산타할아버지로 왔나보네."
"넌 여기 무슨일이야?"
"나도 산타 흉내내려고 왔어. 후원하는 애들이 여기 있거든."
"그래, 그럼 얼른 애들한테 가봐."
등을 떠밀듯 재빠르게 말을 뱉어낸 토니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피하고 싶었다. 20대에, 아무것도 모르는 천치같던 그시절에 만났던 옛연인. 한번도 다시 조우하고싶다 생각한 적 없었다. 그는 토니에게 한마디 말도 없이 영국으로 떠나버렸으니까. 토니는 버려졌다고, 제가 못나 버려진 거라고 스스로를 탓했다. 그게 아니라면 그가 한마디 말도 없이 떠날 사람이 아니라고 굳게 믿었다. 그시절 토니에게 마이클은 그런 존재였다.
“토니...”
돌아가려는 토니의 걸음을 마이클이 붙들었다. 어렵게 고개를 돌렸다.
“나 이혼했어.”
토니의 눈동자가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결혼했다는 건 알고있었다. 돌아왔다기에 아내와 함께 온 줄 알았다. 그가 지금 제게 왜 저런 말을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대답을 고르려는데 병실문이 열렸다. 쏟아지듯 버키가 튀어나왔다.
“스타크, 안들어오고...!”
버키가 말을 멈췄다. 그는 둘사이의 심상치 않은 기류를 한번에 읽어낸 것 같았다. 복도에 침묵이 감돌았다. 이혼했어. 그래서 뭐. 라고 받아쳐야 했나. 판단이 서질 않았다. 마이클은 토니에게 그저 지난 기억일 뿐이었다. 미화시키고 싶은 추억 딱 그정도였다.
“아, 친구를 우연히 만나서. 인사해. 그....”
“안녕하세요. 제임스 반즈 입니다.”
“마이클 스콧이에요. 반갑습니다.”
토니는 또다시 도망치고싶은 기분에 휩싸였다. 전남친과 가짜남친이 복도에 서서 어색하게 인사중이었다. 기왕 마주칠거라면 죽도록 행복한 모습이나 보여주면 좋으련만, 가짜남친이라니 괜히 제꼴이 초라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토니, 연락해도 되지?”
“어... 그럼.”
“그래, 토니. 우리 자주 보자.”
인간이 뻔뻔해진건지 원래 저런 인간이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토니는 올라오는 어지럼증에 저도 모르게 옆에 서있는 버키의 팔을 붙들었다.
“친구라...”
버키가 멀어지는 마이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중얼댔다. 그는 이 상황만 보고도 먼 과거까지 꿰뚫어 본 것 같았다.
“아무말도 하지마.”
버키가 어깨를 으쓱이더니 토니를 병실로 밀어 넣었다. 토니는 급하게 다시 수염을 걸치고 모자를 푹 내렸다. 이제 아이들을 한명씩 무릎에 앉혀 놓은 채 선물을 나누어 주면 이 지겨운 산타 놀음도 끝이었다.
병원을 나오자 온 몸에 힘이 쭉 빠지는 것 같았다. 아이들 때문인지 마이클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힘없이 걷고있는데 버키가 토니의 팔을 붙잡았다. 왜. 퉁명스레 내뱉자 버키가 비장한 얼굴로 속삭였다.
“뒤에.”
슬쩍 보니 파라라치 하나가 두사람을 쫓고있었다. 이 늦은시간에 대단들도 하지. 무시할까 하다가 생각을 고쳐먹었다. 토니가 버키를 향해 눈짓을 했다. 버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충 아무대나 만지라는 뜻이었는데 전혀 못알아 먹는 눈치였다.
“내 엉덩이 만져.”
조용히 속삭이자 버키의 얼굴이 서서히 경악으로 물들어갔다.
“뭘 만져?”
“뭘 그렇게 놀라? 내가 당신꺼 만진데? 양심적으로 내꺼 만지라고 했잖아.”
“넌 그게 양심적이냐?”
버키가 짜증스레 받아쳤다. 순식간에 열이 올랐다. 아니, 내가 사귄다고 했나 지가 그랬으면서 백살 먹은 노인네 주제에 순결이라도 잃는 것처럼 구는 버키가 고깝게 느껴졌다. 토니가 손바닥을 쫙 펼치며 허공에 손을 흔들었다.
“그럼, 내가 만져? 그게 낫겠냐고.”
“아, 됐다. 당신이랑 무슨 말을해.”
버키가 지친 낯으로 토니의 왼쪽 엉덩이에 손을 올렸다. 오물이라도 만지는 듯한 손짓이었다. 그사이 파파라치는 두사람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토니는 이를 악물었다. 누가 연인의 엉덩이를 똥씹은 표정으로 만진단 말인가. 만진다는 말도 우스웠다. 버키는 토니의 엉덩이에 그냥 손바닥만 대고 있었다.
“제대로 해. 당신이 내뱉은 말에 책임을 지란 말이야.”
이를 악문 채 복화술로 속삭였다. 버키의 눈이 가늘어졌다.
“진짜 제대로 해?”
“어. 제대로 해.”
“후회 안하지.”
뭘 후회해. 뱉기도 전에 버키가 오기 섞인 눈알로 토니에게 한걸음 다가왔다. 둘사이의 거리가 지나치게 가까워졌다. 불길한 기분. 버키가 양손을 들어올렸다. 토니의 뺨이 버키의 양손에 가둬졌다. 뒤이어 이마에 따뜻한 입술의 감촉이 닿았다 떨어져 나갔다.
“악!”
토니는 머리통에 총이라도 맞은 것처럼 비명을 지르며 제 이마를 감싸쥐었다. 그 모습을 보며 버키는 좋아라 깔깔 웃어댔다. 버키를 쏘아보았다. 파파라치만 없었어도 당장에 쏴 죽였을 것이다. 토니는 배까지 부여잡고 웃어대는 버키를 등진 채 차로 돌진했다. 두고 가자. 저새끼를 이 컴컴한 어둠속에 버려두고 전속력으로 달리자. 그렇게 생각했것만 차에 다 다르니 제게 차키가 없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버키는 멀리서 차키를 흔들며 느긋하게 걸어오고 있었다.
“제대로 하라며. 그래서 했잖아.”
빈정거림을 받으며 차에 올라탔다. 미친놈. 잘못걸려도 한참 잘못걸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엉덩이 만지랬지 언제...”
뒷말은 꺼내기도 싫어서 삼켜버렸다. 있는대로 인상을 쓰고 고개를 돌린 채 창밖만 내다 보았다. 버키는 그런 토니를 힐끔 쳐다보더니 기가막히다는듯 웃었다.
“스타크, 엉덩이 만지는게 더 이상해. 알아? 엉덩이가 훨씬 더러워 보인다고.”
버키가 항변했다. 그는 억울할지 몰라도 토니의 생각은 달랐다. 엉덩이 만지는 정도야 친구끼리도 할 수 있는 저급한 장난에 불과했지만 이 늦은 밤에 이마에 남기는 키스는 너무 로맨틱해 보이는 행위였다. 아무리 연인인 척 쇼를 하고 있다지만 그런 행위를 버키와 하고싶지도 않았고, 심지어 그걸 전세계에 기사 사진으로 박제 시키고 싶지도 않았다. 잠깐의 연극을 위해 저 밑에 억눌러 놓았으나 버키는 여전히 토니에게 부모를 죽인 원수와 같았다. 버키가 제 부모를 살해하는 영상을 목격한 뒤로, 버키와 제대로 된 대화도 교류도 하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버키에 대해 아는게 아무것도 없었다. 문득 궁금증이 일었다. 그는 왜 제게 득 될 거 하나 없는 이 연극에 자진해서 참여했는지, 왜 이 상황을 그저 묵묵히 받아들이고 있는지.
“왜... 나랑 사귄다고 했어? 그렇게까지 할 필요 없었잖아.”
얼굴까지 드러내면서 그럴 이유가 그에겐 전혀 없었다. 서로를 투명인간 취급하고 있었고, 그게 당연했고, 그래서 토니는 은연 중에 그가 자신을 싫어한다고 생각했다.
“미안해서.”
버키는 한참만에 대답했다. 뭐가 미안해서. 그렇게 묻고싶었으나 들려올 다음말이 두려워 입을 열지 못했다. 도로는 이제 뻥 뚫려있었다. 버키의 차가 도로를 매끄럽게 질주했다. 배고프다. 토니는 괜히 딴소리를 했다. 실제로도 배가 고팠다. 저녁도 먹지 못한 채 일하다 말고 뛰쳐나와 병원으로 향했으니 당연했다.
“뭐 먹고싶은데.”
버키는 새벽이 코 앞까지 도래해 있는 이 시점에 랍스터라고 말하면 바다로 가 가재라도 잡아다 줄 것 처럼 물었다. 이미 사위는 짙은 어둠으로 물들어있었다. 야간에도 운영하는 주유소를 빼고는 문을 연 곳도 없었다.
“랍스터.”
웃으라고 꺼낸 말에 버키는 심란한 표정으로 밖을 한번 보더니 진지하게 한손으로 랍스터 집을 검색했다. 너무 진지해 보여 말리지도 못했다. 웹페이지에 근처 식당 이름이 주르륵 떴다. 하나같이 뻘건 글씨로 영업종료를 알리고 있었다. 버키는 난감하다는 듯 창을 끄더니 꼭 랍스터여야만 하냐고 물었다. 깊게 묻어두었던 불안감이 불쑥 튀어나왔다. 항상 두려웠다. 그가 좋은 사람일까봐. 스티브가 입이 마르고 닳도록 칭찬했던 그가, 스티브의 말보다도 더 괜찮은 사람일까봐. 진실이 뭐든 외면하고 싶었다. 차마 부모를 배신 할 수는 없기에.
.
https://hygall.com/606755362
[Code: 22a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