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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28 22:12
2017년 10월 16일 월요일

30여분 간 주어진 휴정 시간 동안 럼로우는 여느 때처럼 별도의 구금실에 돌아가 있었다. 표면상으로는 그가 혈청으로 개조된 슈퍼솔져이기 때문에 위험성을 고려해 특수처리된 구금실에 여섯 명의 보안 요원에 의해 감금해두는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하루에 여덟 시간 씩 이어지는 재판을 버틸 체력도 몸 상태도 되지 않아 휴식을 취하고 의료 처치를 받는 공간에 불과했다. 그나마 수요일에는 결론이 날테니 다행이었다. 럼로우는 좁다란 방 안에 마련된 간이 베드 위에 앉아 의료진이 평소 보다도 더 강도 높은 형질 안정제를 투여하는 동안 한쪽 벽에 기대 눈을 감고 있었다. 차갑게 냉장 보관되고 있던 앰플 용액이 오른쪽 팔목의 혈관을 타고 들어가는 저릿한 감각에 팔 전체가 아려왔지만 이미 아까부터 폐부가 뜯겨져나가는 듯이 숨이 차오르고 있었어서 통증에 절여진 감각이 또 다시 흔들리는 것일 뿐, 새로이 신음이 흘러나오거나 하지는 않았다. 십 초. 이십 초. 하지만 일 분이 흐르고 이 분이 흘러도, 호흡이 안정되는 일은 없었다. 휴정 선언이 늦어서 투여가 너무 늦었거나, 아니면 이제는 이 정도 농도의 형질 안정제로는 안 되는 것이거나, 혹은 벌써 몸이 이 종류의 형질 안정제에 적응해버렸거나. 시간이 흐를수록 이제는 숨을 쉬는 것이 눈에 띄게 어려워지기 시작했고, 20여분 뒤에는 다시 법정에 럼로우를 내보내야 하는 의료진으로서는 그의 목에 기관 절개 같은 것을 할 수는 없으므로 곤란한 시선들이 오고갔다. 조금 더 소량 단위의 몇 번의 형질 안정제 투여가 더 있었지만 효과는 없었고, 이제는 생리적인 눈물이 흐르는 눈을 깜빡이며 숨이 쉬어지지 않는 목을 컥컥대는 럼로우를 두고 그들은 선택을 내려야 했다.

현장 책임자인 애벗은 아무리 슈퍼솔져인 럼로우라 해도 고작 20여분 만에 말끔하게 아물 수는 없는 기관 절개를 하기 전에 우선 기도삽관을 해보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이미 호흡 불능 상태에 빠져서 인지 뭔지는 몰라도 입 안에 튜브를 삽입하는 것에 럼로우의 협조를 얻을 수가 없었다. 분명 상황을 모르는 게 아닐텐데 거의 패닉에 가까운 거부 반응이 있어서 어쩔 수 없이 (이런 의료적인 상황에 대해 목격자가 또 생겨선 안 되지만) 구금실 바깥에 있던 보안 요원 여섯 명 중 두 명을 불러다가 도움을 요청했다. 남자 알파 요원 두 명이 럼로우를 거의 온 몸으로 누르고 나머지 두 명의 간호사가 그의 머리를 잡아 입을 벌린 뒤에야, 그리고 그가 호흡 곤란으로 반쯤 기절한 뒤에야 그에게 삽관 튜브를 제대로 넣을 수 있었다. 이미 의식을 잃어 축 늘어진 사람을 옆으로 눕혀 기도를 확보한 뒤 호흡과 맥박만 다시 잡고 다른 형질 안정제와 더 강도 높은 혈청 회복제, 거기에 진통제까지 투여했다. 오후의 재판은 2-3시간이면 되니까. 그 후에 독방 수감소로 돌아가서는 구토와 두통에 시달리다가 시체처럼 쓰러지게 될 테고 화요일에는 더 나쁜 상태가 되겠지만, 그건 화요일의 문제이고 당장 쉴드로부터 받은 지시는 오늘 재판에서 그가 멀쩡히 살아있는 것이니까. 만신창이가 됐어도 혈청으로 강화된 몸은 강화된 몸인지 시간이 조금 지나자 럼로우는 손가락을 조금 움찔하더니 천천히 눈을 떴다. 목 안에 기관 튜브의 이물감에 헛구역질을 하는 환자들은 자주 봤지만 그의 반응은 유독 심해서 빠르게 제거해줬지만 그 후에도 위액을 약간 토해냈고, 몸을 약간 떨며 크리스티나가 내밀어준 물잔도 거의 입술만 적시는 정도일 뿐, 입 안에 뭔가를 넣기를 싫어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물에 적신 타올은 순순히 받아들어 얼굴과 손을 닦았다.

참 이상한 사람이다, 라는게 애벗의 감상이었다. 로쉘에게도 그랬고, 자신을 비롯한 의료진들에게도 그렇고. 친절한 사람이었다. 특히 로쉘에게 한 걸 보면 다정하기까지 한 사람이었다. 저번에 크리스티나에게 듣기로는, (그러니까, 크리스티나는 원래도 쉴드에서 일하던 사람이라 꽤 오랫동안 럼로우를 봐왔다고 했다) 언제나 저런 사람이었다고 했다. 특히나 하급자들에게 친절했다고. 항상. 10년을 넘게 그런 연기를 할 필요가 있었을까? 연기였대도 그 정도면 적어도 그 사람의 사회적 인격이라고는 인정해줘도 되지 않을까? 어쨌든... 하이드라의 수뇌부이자 히틀러 이후로 최악의 전쟁범죄자인 브록 럼로우가 사실은 이렇게 친절한 사람이라고? 물론 히틀러도 동물 애호가였다고는 하지만... ...가까이에서 보면 느껴지는 거라는 게 있었다. 그러니까, 이건 정치인들이 이미지 메이킹용으로 하는 게 아니란 느낌이었다. 이렇게 하면 내가 좋은 사람으로 보이겠지 해서 하는 그런 행동이 아니라, 이 사람에게는 이게 상식이기 때문에 이러는 거라는 게 느껴졌다. 물에 적신 타올을 받아들 때, 숨이 넘어가는 마당이니 일일이 '고마워요'라고까진 하지 않지만, 눈을 마주치고 고개를 작게 끄덕인다든가 하는 것 말이다. 혹은 로쉘에게 어떤 지시를 받았냐고 물어보던 때에 최대한 그 불쌍한 어린 여자애가 덜 겁 먹게 해주려고 하던 태도라든가. 거기에다가 쉴드가 자신에게 했던 지시를 합쳐서 생각해보면... 진실은 다른 곳에 있다는 결론이 내려지지만, 내야 할 집세가 있고, 꾸려야 할 생계가 있는 애벗으로서는 그런 정의로운 생각은 그저 머릿 속에서나 할 뿐이었다. 럼로우의 바이탈과 호르몬 수치를 마지막으로 체크하고, 시간을 확인한 뒤 그녀는 구금실 안에 들어와있던 두 명의 보안 요원에게 얘기했다.

"안정 됐어요. 이제 가도 됩니다. 3분 늦었네요."






럼로우는 재판장으로 다시 향하는 내내 왼쪽에 서 있는 보안 요원의 시선이 느껴졌다. 원래 구금실에는 보안 요원들이 들어올 일이 없었어야 했지만... 기관 절개 같은 걸 달고 재판장으로 돌아갈 수는 없으니, 당연히 튜브를 삽입하도록 협조했어야 했는데, 하지만 입 안에 기관 튜브를 넣는 게 자꾸만 다른 기억이 나는 걸 막을 수가 없었고, 간호사들로서는 보안 요원들의 도움이 필요했을 것이다. 구금실에 들어왔던 두 명 중 한 명은 그래도 나이도 있고 연차도 있어서 별의 별 일들을 다 봐왔거나, 혹은 무관심해지는 법을 배웠겠지만 자신을 계속해서 힐끔거리는 어린 (스물 몇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요원은 호기심을 이기기 어려웠을 것이다. 쉴드에 얘기를 해둬야 하겠지 싶었다. 안타깝지만 쉴드는 협박을 통해 그가 조용해지도록 할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가 조용히하기만 한다면 협박은 그냥 말만으로 끝나니까, 제발 어디에서 오늘 일을 떠들거나 하지 말아야 할텐데. 왼손에 결혼반지가 있는 것을 보면 아마 본딩 오메가도 있는가본데 럼로우는 부디 그가 가볍게 입을 놀리지 않기를 바랐다.

이제 모퉁이 하나만 더 돌면 재판장인데, 갑자기 가슴 한 켠이 뜯겨나가는 것 같은 쓰라린 통증과 함께 사방에서 매캐한 탄내가 나며 주변 사람들이 마치 불 붙은 종잇조각들처럼 아주 느리게, 회색 잿가루가 되어 흩날리기 시작했다. 고통은 둘째치고 너무나 비현실적인 광경에 럼로우는 멍하니 서서 천천히 주변을 돌아봤지만 보이는 것은 매한가지였다. 절반 정도가... 아니 어쩌면 그보다도 많은 이들이 불 붙은 나방의 날개처럼 잿가루가 되어 사라져버렸다. 남은 것은 바닥에 흩어진 분처럼 고운 회색 잿가루들과 공중에 남은 매캐한 탄내, 그리고 남은 이들의 당혹스러운 표정들 뿐이었다. 럼로우의 곁에 있던 여섯 명의 보안 요원 중, 남아있는 건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그를 힐끔대던 어린 보안 요원 한 명 뿐이었다. 그 역시 당혹스러워하며 럼로우와, 잿가루가 되어 소멸된 제 동료들을 번갈아 쳐다보다가 복도에 망연히 서 있는 다른 이들, 혹은 잿더미가 된 다른 이들의 흔적들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법원의 복도 안은 전부 그런 식이었다. 다들 서로가 서로를 그렇게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건 아주 잠시일 뿐, 금방 아수라장이 되었다. 본딩 상대가 있었던 오메가들은 럼로우가 느꼈던 통증처럼, 자신의 본딩 알파들이 그렇게 잿가루가 되어 사라지면서 본딩이 강제로 뜯겨나간 충격에 쓰러지거나, 비명을 지르고 있었고 알파들 또한 본딩 해제를 같은 방식으로 느끼지는 않지만 자신들의 본딩 오메가에게 뭔가 중대한 일이 (이를 테면 죽음이) 일어난 것을 모르지는 않기 때문에 당장 휴대폰을 꺼내 연락을 시도하는 알파들이 있었다. 그 외에는 눈 앞에서 소중한 사람이 소멸된 사람들이 절규하거나 횡설수설하고 있었다.

어린 보안 요원 역시 자신의 본딩 오메가에 대해 뭔가가 느껴졌던 것인지 다른 알파들의 모습을 보고는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는 근무 중이기 때문에 휴대폰을 갖고 있지 않았지만, 어떻게든 자신의 본딩 오메가에게 연락하는 게 지금 가장 먼저 하고 싶은 일인 것으로 보였다. 그와 눈이 마주쳤을 때, 럼로우는 공격 의사가 없다는 뜻으로 양 손을 들어보이고 반 걸음 뒤로 물러났다. 럼로우 역시 그가 자신을 그냥 보내주는 걸 원했으니까. 보완 요원은 요원으로서의 의무와, 어차피 자신 혼자서는 럼로우를 구금할 수 없으며 이 아수라장에서는 그를 구금해봤자 재판할 수도 없다는 현실적인 여건, 그리고 자신의 본딩 오메가의 안전을 확인해야 한다는 본능 간에 아주 짧은 갈등 끝에 럼로우를 두고 사라져버렸고, 럼로우는 보안 요원들이 잿더미가 되어 소멸되면서 바닥에 떨어졌던 열쇠로 수갑을 열고, 마찬가지로 바닥에 떨어져 있던 글록 22를 주워 챙긴 뒤, 대기실의 벤치에 누가 벗어두었던 코트를 입어 주홍빛의 죄수복을 감추고 건물 바깥으로 나갔다.

바깥은 더욱 난장판이었다. 차량 따위를 운전하다가 소멸된 사람들 때문에 도로는 사고 투성이에 아주 마비 상태였고, 부상자로 넘쳐났다. 교통사고와 충돌 사고수준을 넘어서서 버스가 가게를 덮친 상황도 심심찮게 있었다. 수도관이나 가스관이 폭발한 현장도 꽤 있었지만 도로가 그 상황인데다 길거리에는 본딩 상대를 잃어 쓰러진 오메가들이 블럭마다 넘쳐나서 구급차가 출동할 수도 없어보였다. 출동한대도 이 정도면 호르몬제 약물이 세계적으로 부족하지 않을까 싶을 지경이었다. 눈앞에서 사랑하는 사람들이 소멸되어 절규하는 사람들이 길바닥에 가득했고 특히 자녀를 잃은 사람들의 울음소리가 가장 처절하게 울렸다.

럼로우는 가까운 구석에서 오토바이를 주워 쉴드로 향했다. 일단 쉴드로 가야, 다들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사실 다른 이들은 몰라도 윈터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어렴풋이 이미 알고 있었다. 가슴이 뜯겨나가는 것 같았던 그 통증은 분명 강도는 훨씬 약했지만 제임스에게 목을 졸려 죽을 뻔 했을 때 느꼈던 것과 분명 똑같았다. 본딩이 강제로 해제되었을 때의 감각이었다. 어떻게 가능했는진 모르겠지만 윈터와 아주 미약하게나마 어떤 식으로든 본딩이 되긴 했던게 아닐까. 그래서 그가 곁에 있었을 때 그렇게 안정감을 느낄 수 있었던 게 아니었을까. 그런데 이제 윈터가...

일단 쉴드에 가서 확실히 확인을 해야 했다. 확실한 증거 없이는 윈터가 소멸되었다고 생각할 수 없었다. 그렇게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누가 확실하게 목격한 증거라도 있는 게 아닌 한 그렇게 생각할 수 없었다. 그렇게 믿을 수 없었다. 그럴 리가 없었다. 그럴 수 없었다. 대체 어떤 이유로 누가 소멸되고 누가 소멸되지 않는 것이 결정된 것인지는 몰라도 자신 같은 게 이렇게 살아있는데 윈터가 소멸되었을 수는 없었다. 일단 쉴드에 가서 확실히 확인할 생각이었다. 윈터는 와칸다로 갔었으니까. 그리고 잭도. 그리고 아이도. 아이의 행방은 알 수 없으니까, 조 박사의 행방을 물어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차라리 이들이 갑자기 싹 사라졌다거나 하면, 그런거면 다른 차원이나 다른 평행 우주로 잠시 이동했다거나 하는 희망이라도 품을텐데. 이렇게... 이렇게 불타서 없어지듯이 소멸되다니. 이렇게 본딩이 뜯어지다니. 이건 정말로... 하지만 그들은 괜찮을지도 몰랐다. 절반 넘는 사람들이 이렇게 갑자기 불타 소멸되었지만, 그렇지만 그래도 그 셋은... 그 셋은 괜찮을지도 몰랐다. 쉴드에 가면 세 사람을 확인해볼 수 있을 것이다. 럼로우는 쉴드로 향하는 동안 몇 개의 소규모 폭동을 지나쳤고, 쉴드에 도착해서도 1층 입구에서 폭동 조짐이 있는 것을 보았다. 근처에서 수도관인지 가스관인지 폭발 사고가 있었고, 아마도 그것 때문에 의약품을 노리고 40여명의 인파가 봉쇄된 쉴드 건물에 진입하려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 상태라면 쉴드에 들어가는 것 자체가 난관일 것 같았다. 럼로우는 초조하게 뒷편 광장에 있는 반쯤 깨져있는 대형 스크린에 나타나 있는 시간을 살폈다. 4시 27분. 지금 자신이 이렇게 멀쩡히 서 있을 수 있는 건, 단순히 아드레날린 덕이 아니었다. 오후의 나머지 재판을 위해 의료진이 고농도의 약물을 주입해줬기 때문이었고, 그 유효시간은 해봐야 6시 반 까지라는 걸 럼로우는 잘 알았다. 그러니까 어떻게든 그 전까지 쉴드에 들어가 세 사람의 소식을 알아야 했다. 윈터가 정말로... 그건 아니어야 했다.

사각지대의 한켠 구석에서 인파를 살펴보던 럼로우는 그들이 단순히 봉쇄된 건물의 방탄 유리문을 부수려는 부질없는 시도를 하고 있는 게 아니라, 누군가를 붙들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는 붙들려있는 사람의 얼굴을 잘 알았다. 아니, 잘 안다기 보다는, 어쨌든 낯이 익은 사람이었다. 이름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아마 성이 델가도였나 그랬을 것이다. 스타크 밑에서 신약 개발을 하고 있는 팀에 속해있었고, 정확히는 쉴드 소속인지 스타크 인더스트리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마 스타크 인더스트리 소속일 것이다. 하지만 이 인파들에게 어쨌든 쉴드 출입증을 갖고, 하얀 가운을 입고 그 근처를 어슬렁대던 델가도는 쉴드로부터 의약품을 얻어낼 인질이자 협상 수단으로 보였겠지. 하지만 쉴드는... 지금 저 안에 남아있는 사람들은 락 다운을 하는 것 밖에는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인파를 피해 바깥으로 출입할 통로는 얼마든지 있으니까. 설사 내부에 저격 가능한 인원이 남아있대도 이렇게 많은 인파에 둘러싸여 있는 한 평범한 사무용 건물 안에서는 저격도 쉽지 않을 거였다. 럼로우는 곧장 맞은편 건물의 2층으로 향했다. 이런 난장판 속에서는 창문을 깨도 누구 하나 신경 쓰지 않았고, 인파의 주의를 끌게 되지도 않았다. 어차피 멀리 갈 수는 없었다. 아무리 글록 22라지만 정말로 50미터까지 멀어질 수도 없거니와, 스스로의 사격 실력을 더 이상 예전처럼 확신할 수도 없었다. 이제는 감에 의지해야 했으니까. 잭이었더라면 이 정도는 정말로 눈 감고도 자신 있게 저격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에 다시금 속이 베이는 듯이 아려왔다. 잭은 괜찮을까. 곧장 소멸된 사람들에 속하지 않더라도 그 후의 난장판에 휩쓸렸다면... 럼로우는 애써 그런 생각을 머릿속에서 치워버리고는 창틀에 글록을 고정하고 오른손을 방아쇠에 걸었다가 곧 자신에게 그걸 당길 충분한 오른손 손가락 힘이 없다는 걸 깨닫고는 왼손으로 고쳐잡았다. 20년 넘게 오른손으로 잡았었는데. 이질감이 들었지만 그나마 표적이 20여미터 떨어져 있을 뿐이라는 게 위안거리였고, 정밀 사격이 아니라 위협 사격이 전부라는 게 날뛰는 맥박을 겨우 차분하게 했다. 럼로우는 시각이 아닌 감과 청각에 의존해 인파 중 델가도를 위협적으로 붙들고 있는 두 사람으로부터 50cm 쯤 떨어진 곳의 바닥을 겨누고 방아쇠를 당겼다. 다행히 첫 번째에는 그가 의도한 것과 2-3cm 정도 어긋난 곳에 발사되었고, 그 다음부터는 그가 의도한 곳에 발포되었다. 총성과 보도블럭에 총알이 부딪히는 불꽃에 인파는 금방 흩어져 사라졌고 델가도는 발이 그 자리에 못박히기라도 한 듯이 그대로 서 있다가 곧 시선이 총성의 근원지를 찾아 럼로우와 눈이 마주쳤다.

럼로우는 그가 곧장 쉴드 건물 안으로 도망칠거라 생각했지만, 의외로 델가도는 그러지 않았다. 그는 럼로우가 글록을 챙겨 건물에서 나와 쉴드 정문으로 오는 동안에도 그저 인파에게 붙들려 엉망이 되었던 제 옷매무새만 가다듬었을 뿐 거기 그대로 있었다. 그러다가 럼로우와 가까이에서 마주치자 약간 확신이 없는 듯이, 하지만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건넸다.

"...고마워요."

둘 사이에는 약간의 침묵이 흘렀다. 델가도가 보기에 럼로우가 여기에 왜 왔는지 이유는 몰라도 목적은 확실해보였다. 그는 쉴드 본부에 뭔가 원하는 것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가 원하는 걸 얻기 위해서 사람들에게 폭력이나 강제 같은 걸 쓸 생각이 없는 것도 확실해 보였다. 방금 전의 인파만 하더라도 그는 굳이 바닥에 위협 사격을 하는 방법을 선택했으니까. 아니, 애초에 자신을 외면하고 지나칠 수도 있었던 걸 구해줬으니까. 지금도 일부러 저 정도로 멀찍이 떨어져서, 굳이 자신보다 더 입구에서 먼 위치에서 멈춰서서 있는 것은 위협으로 비춰지지 않으려고일 것이다. 자신은 병원과 연구소에서만 지낸 샌님이지만 평생을 군인과 슈퍼 히어로들을 가까이에서 보며 지내다 보면 그들의 몸짓 언어를 읽는 것쯤은 통달하게 되어 있었다. 미디어에서는 이 사람을 세상에 둘도 없는 악마처럼 그려댔지만, 대학원 졸업 후 10여년 간 쉴드와 스타크 인더스트리를 오고가며 연구직과 병원 실무직을 병행해온 델가도로서는 가까이에서는 아니어도 멀찍이서나마 오랜 기간 럼로우에 대해 보고 들어왔고 그게 그렇게 단순한 사실일 수는 없다고 생각해왔었다. 물론 그걸 공개적으로 입 밖에 낼 수는 없었지만. 쉴드 안에서조차, 그러니까 오랜 시간 럼로우를 알아왔던 사람들 사이에서조차 그건 공개적으로 목소리 낼 수 있는 일이 아니었으니까. 여론이라는 건 무서운 거니까. 이 참에 하이드라 동조자로 싸잡힐 수도 있는 것이었고, 쉴드 반대론자로 낙인 찍힐 수도 있는 거였다. 더군다나 쉴드 내부자면서 그런 눈초리를 받는 건 내부 감사를 받을 수도 있는 일이었고, 그 정도까진 가지 않더라도 인사고과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었다. 어쨌든, 생각만이라도 그는 그게 이상하다고 여겼고, 지금 눈 앞에 있는 브록 럼로우는 그걸 증명하고 있었다.

"필요하신 게 있으면... 안에 들어가시죠. 저희도 경비가 한 명이라도 더 있는 편이 안전하니까요."

"...행방을 알고 싶은 사람들이 있는데요."

행방. 그렇지. 델가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만도 했다. 그는 다시금 아수라장이 된 큰길가 쪽을 돌아다보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출입증을 꺼내 찍고, 봉쇄 코드를 입력했다. 락다운 중이기 때문에 10초만 문이 열린다는 안내 음성과 함께 문이 열렸고, 두 사람은 안으로 들어갔다.






윈터가 와칸다로 갔다는 얘기는 이미 알고 있었던 거였다. 하지만 와칸다로 간 구성원 중 그 누구와도 통신 연결이 되지 않고 있다는 얘기는 상당히 불길하게 들렸다. 설마 그 전원이 소멸되었을리는 없겠지만 (아마도 소멸은 절반 정도가 대상인 것 같았다) 하지만 법원에서 보안 요원 여섯 중에 다섯이 소멸되었던 것을 생각해보면... 물론 그런 가능성은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아직까지는 그저 얼얼한 비현실적인 감각 뿐이었다. 그 어떤 증거도 없으니까. 그냥 아무런 근거 없는 '아닐거야' 하는 현실 부정 같은 감각 뿐이었다. 분명 윈터와의 불완전한 본딩이 뜯겨나가는 감각이 들었으면서도. 그래서 윈터에 대해서는 여전히 아직 아무런 증거가 없으니까 윈터는 살아있다는 식의 근거 없는, 우김에 가까운 생각이 더 우세했다.

잭은 스타크와 함께 우주로 향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정말 황당한 얘기였다고 생각했겠지만, 이제는 외계인이나 우주 같은 소리가 어이 없을 정도로 아무렇지 않았다. 우주로 갔다면, 이 소멸 사건에서는 차라리 안전하지 않았을까? 이건 지구에서만 일어난 일 아닐까? 그런 희망이 들었다. 그러니까... 잭은 괜찮을거라고.

아이는... 아이에 대해서는 직접적으로 물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조 박사의 행방을 물었다. 델가도는 그 질문을 매우 이상하게 여겼겠지만, 굳이 티내지는 않았다. 그는 그저 약간 멈칫하더니 '조 박사님이요...'하고는 조직도에서 그녀의 이메일 주소를 확인하더니 알아보더니 그녀의 아웃룩 캘린더를 통해 오늘 오전은 재택근무였고, 오후 3시에서 4시까지는 개인 일정, 오후 4시 반부터 30분 동안 사무실에서 대면 회의 참석이 있다는 걸 확인했다. 그러더니 고개를 잠시 갸웃하고는 그 전 주의 같은 요일에도 오후 3시에서 4시까지는 개인 일정이 있던 것을 확인하고는 '아... 이거 새이디 치료 세선일지도요'라고 중얼거렸다. 럼로우는 누가 제 심장을 움켜쥐고 흔드는 것 같이, 세상이 흔들리는 것 같은 느낌에 눈을 잠시 감았다. 이 모든 일이 일어났을 때 그래도 아이가 조 박사와 함께 있었다면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래도 그녀가 같이 있었다면... 하지만 만일 그녀만 소멸되었거나...

"치료실이 8층이니까..."

델가도가 8층의 여러 CCTV 영상을 찾아 4시쯤으로 시간을 돌리는 동안, 럼로우의 귀에는 제 심장 소리가 쿵쾅대는 소리만이 울렸다. 윈터. 잭. 그리고 아이. 델가도가 아이와 조 박사를 찾은 것은 4시 2분 경, 치료실 안쪽에서 작별인사를 하는 두 사람의 모습이었다. 하얀색 원피스와 파란색 가디건을 입고 머리에는 파란 리본을 하고 있는 아이는 럼로우의 기억 속의, 그러니까, 그가 딱 한 번 보았던 그룹 치료 때의 아이와는 몰라볼 만큼 부쩍 자라 있었다. 단순히 키가 자라고 머리카락이 길어졌을 뿐만 아니라... 아무런 표정도 없이 혼자 멍하니 있던 아이가 이제는 조 박사와 이런저런 상호작용을 하면서 아이다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자신이 망쳐놓았던 삶이 이제 겨우 평범하고 행복한 삶이 되어가고 있는 걸 보자 럼로우는 저도 모르게 붙들고 있던 숨을 내쉬었다. 캡틴의 차에서 엿보았던 아이의 삶을 실제로 보게 될 수 있을 줄 몰랐는데. 다행이었다. 자신이 일부가 아니어서 가능했을 것이고, 캡틴과 조 박사가-

그런 평화로운 생각은 바로 다음 순간 화면 속에 있던 조 박사와 아이가 서서히 잿가루가 되어 사라지면서 멈춰버렸다.

처음에는 치료실 안에 있던 세 명의 의료진 중 한 명이 먼저였다. 그걸 보고 조 박사가 아이를 자신의 뒤로 감추려 했지만 곧 그녀 자신도 잿가루가 되기 시작했고, 그걸 보고 아이를 뒤돌아봤지만, 아이도 이미 반쯤 잿빛이 되어 흩날리고 있었다. 럼로우가 법원에서 목격했던 것처럼, 고작 20여초 만에 세 사람이 잿가루가 되어 바닥에 흩어졌고, 나머지 두 명의 의료진은 충격에 망연히 서 있다가 곧 각자의 소중한 사람들에게 연락하기 위해 방을 벗어났다.









+럼로우는 체포당할 때 오른손에 총 맞았던 거 때문에 오른손으로 방아쇠 당길 수가 없었던 것임.

+다들 봐줘서 너무 고맙다! 원작은 오래전에 끝난걸 같이 봐줘서 계속 쓸 수 있었어. 오타도 많고 설정구멍도 많고 무순 연재도 거의 2년째인데 다들 혐생도 있고 할텐데 연재텀도 들쭉날쭉인거를 이렇게 오랫동안 갤검하면서 읽어준다는게 너무 고마움!


럼로우텀 스팁럼로우 버키럼로우 롤린스럼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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