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증 그딴거 모름 개연성 개나줌 ㅈㅇ
"안녕하세요. 댄. 오늘도 남은 시간 좋은 하루 보내세요."
"네. 찰리도요."
그러니까 항상 같은 시간, 같은 멘트로 인사를 해오는 찰리에게 늘 목례로 답하다가 답변을 한 건 순전히 변덕이었어. 찰리 또한 오늘 역시 목례를 기대했던 건지 웃으면서 내리려다가 못 들을 것을 들은 사람처럼 멈춰섰지.
"네?!"
".....찰리도 좋은 하루 보내시라고요."
마치 키우던 강아지가 말하는 걸 본 사람마냥 턱을 벌리고 저를 쳐다보는 찰리에게 댄은 눈짓으로 내릴 층이라는 걸 알렸어. 그러나 찰리는 꿈쩍도 하지 않았어.
"저 내려가는데. 문 닫혀요?"
"대...댄?!"
"네."
"내 이름을 알아요?!"
결국 엘리베이터는 시간이 다 되어 문이 닫혔어. 그대로 1층을 향해 강하하기 시작했지. 댄은 왜 저러나 싶어서 눈을 깜박거리다가 손으로 저한테도 걸려있는 사원증을 톡톡 두드렸어.
"......적혀있는데."
그제야 찰리가 바보같은 얼굴로 아, 하는 소리와 함께 제 사원증을 들어올렸지. 얼떨떨한 얼굴로 사원증을 가만히 바라보는 찰리 뒤로 1층에 도달했음을 알리는 소리가 들렸어. 문이 열리자 댄은 내리실거냐고 물었어. 사무실로 돌아가는 듯 보이던 찰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같이 내렸지. 맨날 제가 대꾸하지 않아도 인사를 해오길래 굉장히 쾌활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아까부터 어딘지 넋이 나간 느낌이었어. 그래서 댄은 평소에 하지 않는 오지랖을 한 번 더 부렸지. 어차피 제 인생에 뭐가 더 새로울 게 남았겠냐는 마음도 있었어.
왜냐면-,
"바쁘세요?"
"네?"
".....안 바쁘시면 저녁이나 같이 할까요?"
댄은 오늘 막 시한부 선고를 받은 참이었거든.
*
너무 갑자기 던진 말에 당연히 거절을 예상했는데 의외로 찰리는 흔쾌히 수락했어. 그래서 둘은 회사 근처 다이닝펍에 와 있었어. 시끌벅적한 분위기 속에 죽은듯이 조용한 두 사람은 꽤나 이질적이었지. 서버가 가져다 준 버거 세트 하나와 시저 샐러드만이 덩그라니 둘 사이에 놓여있었어.
"드세요."
"네. 댄도요."
"...건강하게 드시네요."
"네? 아, 이거...습관 같은 거예요."
"음...좋은 습관이네요."
댄은 감히 오늘을 자신의 사회성이 최대치로 발휘 된 날이라 말할 수 있었어. 그리고 사실 후회도 가득했지.
내가 왜 이 사람이랑 밥을 먹자고 제안했을까?
이래서 사람들이 안하던 짓을 하면 죽을 때가 된 거라고 하는 건가?
찰리는 왜 흔쾌히 따라왔지?
사람들은 이럴 때 무슨 대화를 하는 걸까?
.....내가 미쳤지.
그런 댄의 고민의 꼬리를 끊은 건 찰리였어.
"왜 저랑 밥 먹자고 했어요. 댄?"
"...제가 묻고 싶은 말인데."
"네? 아, 저 너무 되묻는 걸 많이 하죠? 하, 그게 믿기지가 않아서."
믿기지가 않는다는 말에 댄은 버거를 입에 잔뜩 물다말고 눈을 크게 떴어. 찰리는 그런 댄의 반응에 뭔가를 말하려다가 망설이듯 입을 다물었지. 조금 기다려도 찰리가 말할 것 같지 않자 댄은 한숨을 폭 내쉬고 자신이 먼저 입을 열었어.
"그냥요. 안해보던 걸 좀 해보고 싶었거든요."
"...왜인지 물어봐도 돼요?"
"음...."
"말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요."
"뭐, 그것도 그렇고...맨날 아는 척 해주는 찰리한테 고맙기도 했고요. 회사 그만 둘거라서."
회사를 그만둔다는 말에 찰리는 포크로 양상추를 마구 찔러 입에 쑤셔 넣던 걸 멈추고 표정이 바뀌었어. 댄은 처음 대화하는 사이에 퇴사한다고 말하는 게 좀 예의가 아닌가 싶어서 뒷목을 긁적였지. 졸지에 둘이서 하는 송별회라도 된 것 같은 느낌에 댄은 애꿎은 버거만 잘게 잘랐어.
그 대화 이후로 또 다시 침묵이 길게 흘렀지.
댄이 또 한 번 둘만 밥 먹는 건 정말 잘못된 선택이었다는 걸 곱씹고 있는데, 찰리가 억울한 얼굴로 대뜸 말했어.
"왜 그만두는데요?"
"예?"
"왜 그만두냐고요. 댄 누구보다 회사 사랑하잖아요. 뭐, 최근에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다고 들었지만."
"......."
"그런 사람이 들러 붙었는데도 무시하고 일할 정도로 회사에 열중하는 사람이었잖아요. 댄."
"......"
"맨날 회사도 제일 늦게까지 남아있고. 능력도 좋은데!! 왜요?!"
댄은 찰리가 와다다 내뱉는 말에 제 일거수일투족이 이렇게까지 회사에 소문이 많이 났던가 하는 고민을 했어. 사업팀이랑 개발팀이랑은 한 다리 건너서 소통을 하는 편이라 직접적으로 마주할 일도 없고, 층도 달랐거든. 굉장히 조용히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눈에 띄는 타입이었나? 내가? 하며 댄이 스스로의 회사생활을 되돌아 봤지. 찰리는 그런 댄의 얼굴을 보고 제가 실수했다는 걸 알았는지 와악 하며 짧은 비명을 내지르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어.
무슨 일인가 싶어 찰리의 얼굴을 살피는 댄이었어. 그러다 가려진 얼굴 뒤로 빨갛게 달아오른 귀가 보였지.
"...찰리?"
"하...저 너무 스토커 같죠? 안 그러려고 했는데, 티 안 내려고 했는데!"
이게 다 무슨 소린가 싶어서 댄은 큰 눈만 껌벅이다가 안경을 밀어 올렸어. 그리고 그와 동시에 찰리의 앓는 소리와 함께 조용히 새어나온 고백이 있었지.
"....저 사실 댄 좋아해요."
"...뭐라고요?"
벼락을 맞아도 이보단 덜 놀랄 것 같은 댄의 얼굴에 찰리가 애원조로 말했어.
"미안해요. 너무 갑작스럽죠. 아, 아니지. 남자가 고백하는건 처, 처음이죠? 당황스럽겠다. 그래도 제발, 제발 제 얘기 한 번만 들어주세요."
너무 갑작스러워서 몸이 굳는다는 게 이런건가 싶었어. 다음 동작을 하는 법을 잊어버린 로보트처럼 입만 벌리고 멍하게 생각을 정리한 댄이었지. 그에 비해 찰리는 초조하게 한껏 몸을 뒤틀고 있었어. 일시정지 버튼이라도 누른 것처럼 굳어버린 둘의 뒤로 펍에서는 비지스의 Stayin' Alive가 크게 울려퍼지고 있었어.
Ah, ha, ha, ha, stayin' alive, stayin' alive
Ah, ha, ha, ha, stayin' alive
그렇지. 아무래도. 아직 살아있지. 진짜 살아있네. 아직은.
댄은 제가 오늘 들은 시한부 선고와 달리, 이 상황 자체가 너무나도 생생하게 자신이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준다는 생각이 들었어.
참 아이러니하지.
희한하게 찰리의 말을 듣고 나니 많은 생각이 교차되던 머릿 속이 차차 정리되는 것 같았어.
".......찰리."
"네!"
"나 좋아해줘서 고마워요."
"...무슨 의미예요?"
"진짜 고마워서요."
"그럼 저 받아주시는 거예요?"
"네? 아뇨. 그건..."
고마움을 정리하려던 것이 너무 멀리 튀어버려서 놀란 댄이 고개를 내저었어. 찰리는 금세 시무룩해졌지. 귀라도 있었다면 축 처진 게 보일 정도였어.
"역시 제가 남자라서 안 되겠죠? 댄은 게이도 아니고...너무 갑작스럽기도 했고...그리고-"
"찰리."
"...네."
"그런 이유 아니에요."
댄은 거절의 이유를 확실히하고자 생각의 구렁텅이에 빠지려는 찰리를 급하게 제동했어. 그러면 무슨 이유로 자길 거절하냐는 얼굴로 입술을 댓발 내민 찰리였지. 오늘 막 대화를 시작하고, 갑자기 고백을 받고 이것도 이미 말도 안 되는 전개였는데, 찰리에게 자신의 상황을 말하는 게 맞나 싶어 댄은 입술을 깨물었어.
"...역시 맞죠? 미안해요."
그러나 찰리가 또 다시 땅굴을 파고 들어가려고 하는 게 보이자 댄은 눈을 딱 감고 사실대로 털어놨어. 어차피 무슨 변명을 해도 깔끔하지 않을 것 같았거든.
"저 시한부래요. 3개월 남았다고 했어요. 그래서 안 돼요. 찰리 받아줄 수 없어요."
"...뭐라고요?"
"미안해요. 해피엔딩이 아니라서."
*
시한부 고백으로 엉망이 된 저녁식사 자리 이후, 댄은 찰리를 보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어. 그런다고 해도 이해할 수 있었지.
누가 시한부 인생을 가진 사람과의 인연을 계속해서 지속하고 싶겠어. 원래 잘 알던 사이도 아니고.
"...진짜 특이한 사람이네."
[댄. 답장 좀 해줘요.]
그러나 찰리는 보편적인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았어.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굳은 것처럼 말 한마디 없더니 이틀 후, 어떻게 알았는지 번호를 알아내 문자 세례를 보내오기 시작했거든.
댄은 답장 하나 보내지 않았는데 끈질기기는 나일론에 버금가는 끈질김이었어.
무슨 병이냐. 왜 시한부인 거냐. 얼마나 나쁜 거냐. 그러면 지금 엄청나게 아픈 거냐. 다른 병원은 가봤냐. 약은 먹은 거냐. 치료 방법은 정말 없는 거냐. 병이 어떻게 진행 되는 거냐....등등
댄이 의사에게 물은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물어보는 찰리여서 문자가 도착하는 족족 읽기만하고 답장은 하지 않은 채였어.
사실 못했다는 게 맞았지. 심란했거든. 자신에게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도 그랬고, 그를 알고도 계속해서 날 것으로 부딪혀오는 찰리의 감정도 그랬어.
만약 진작 찰리의 인사를 받아줬다면 어땠을까? 아니면 회사에서 마지막 날도 찰리의 인사를 받아주지 않았더라면?
뭐가 더 나은 선택이었을지 알 수 없었어. 깊게 알고지낸 건 아니었지만 찰리가 좋은 사람이라는 걸 알기엔 충분했거든. 댄은 어차피 사라질 마당에 좋은 사람에게 이런 경험을 심어주고 떠나가야 한다는 게 마음에 걸렸지. 그래도 얼마 남지 않은 생, 잘 마무리하고 싶었는데 말이야.
찰리는 그런 댄에게 나타난 변수 같은 거였어. 것도 아주 큰. 백업 플랜도 없는 그런 변수였지.
"......하, 모르겠다."
핸드폰과 씨름하듯 노려보던 댄은 걱정되니까 . 하나만이라도 찍어서 답장 해달라는 마지막 문자를 보고서야 화면을 두드리기 시작했어.
[뇌종양. 이미 전이 시작. 예후 좋지 않음. 두통 때문에 병원갔다가 발견. 길어야 3~5개월.]
빠르게 쳐내려간 메시지가 파란 풍선을 쏘아올리며 화면 가득 찼어. 찰리가 바로 읽고 있는지 그 바로 맞은 편에 회색 말풍선에 ...표시가 떠있었지. 댄은 눈싸움이라도 하듯 그걸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어. 그리고 한참이 지나도록 ...표시가 사라지지 않자 참았던 숨을 터트리듯 내뱉었지.
"하아아....."
익숙한 두통이 또 한번 머리를 울리기 시작했어.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에 병원 좀 가볼 걸. 그냥 편두통인줄 알았지 누가 머릿 속에서 그런게 자라나고 있을 줄 알았겠냐고.
계속해서 기다려도 여전히 ...표시만을 띄우고 있는 화면에 댄은 포기한듯 화면을 꺼버렸어. 그리고 식탁 위에 놓여져 있던 진통제를 집어 삼켰지.
'....저 사실 댄 좋아해요.'
그 얼굴이 왜 이렇게 자꾸 떠오르는지 모르겠다는 생각도 함께 집어 삼켰어.
*
포기한줄만 알았던 찰리는 댄이 답장한지 일주일이 지나서야 또 다시 메시지를 보내오기 시작했어. 이번엔 물음표 가득한 질문들이 아니라 주로 정보를 모은 것과 다름 없었지. 뇌종양의 단계. 전이 양상. 치료 방법. 환우 모임 리스트. 유명한 병원. 뇌종양 분야 권위자. 치료 예후. 기적적으로 전이형 뇌종양을 앓다가 선고받은 것보다 훨씬 더 오래 산 환자의 기사 등등. 이걸 모으느라 일주일 동안 아무 말이 없었던 건가 싶을 정도의 자료였어.
댄은 혼란스러움에 어쩔 줄 몰라했지. 제가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말했는데도 이렇게까지 부딪혀오는 게 이해가 가지 않았거든.
어차피 끝이 정해진 이야기였고, 그 끝은 신파가 확실했으니까. 게다가 찰리가 댄을 안 건 얼마 안 되었잖아. 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건지 알 수 없었어.
결국 댄은 어쩔 수 없이 찰리에게 전화를 걸었어.
Rrrrrrr-
-댄?
"찰리."
-내가 보낸 거 봤어요?
"...봤어요. 그거 때문에 전화한거예요."
-다행이다. 코넬대 병원이 미국에서 제일 잘 나가는 뇌종양 센터 중 하나래요. 아는 사람 통해서 예약 잡으면 바로 치료 가능하다는데, 물론 댄이 부담스러워할까봐 잡진 않았어요. 그냥, 그냥 물어보기만 한 건데-
"찰리."
-......
"나 치료 받을 생각 없어요. 전화한 건, 이제 연락 그만하라고 하려고 한거예요."
-......
"정말 미안해요. 하지만, 확실하게 말해야할 것 같아서요."
-......
"찰리. 그때도 말했죠. 고맙다고. 그러니까 이제 저는 그만 잊고, 찰리는 남은 삶 더 잘 살아요."
댄이 말을 끝마칠 때까지 찰리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어. 혹시 끊어진 건가 화면을 확인했지만 여전히 숫자가 넘어가는 게 전화가 이어지고 있음을 말해줬지.
"...여보세요? 찰리. 듣고 있어요?"
-...듣고 있어요.
".......그럼 끊을게요."
-댄은 몰라요.
"......"
-난 댄 이렇게 못 놔요. 밥 챙겨 먹어요. 이따 또 문자할게요.
끝까지 댄의 말을 듣지 않겠다는 찰리의 의사표명에 한마디 더 얹으려했지만 전화는 이미 끊긴지 오래였어. 댄은 정말 어떻게 해야할 지 감이 잡히지 않아서 손으로 얼굴을 감싸 마른 세수를 했어. 역시 그 엘리베이터에서 인사에 답하지 말했어야 했나봐. 먹먹한 마음에 눈이 촉촉해지는 느낌이 들었어.
"...뭘 모른다는 거야. 찰리 영. 미련하게 나 같은 건 왜 좋아해서."
아무도 없는 집 안에 댄의 혼잣말만이 오롯이 남았어.
*
그렇게 몇 번이고 찰리와의 실랑이를 계속하다가 지친 댄은 결국 설득하기를 포기했어. 전략을 바꿔서 무시하기를 택했지. 번호를 차단하고 핸드폰에서도 찰리와의 메시지 내역을 전부 지웠어. 어느 순간부터는 차단당한 걸 눈치챘는지 회사 번호와 모르는 번호로 오는 전화가 왔어. 댄은 어차피 제게 올 연락이 없었기 때문에 당연히 그 마저도 무시했지. 가족이라도 있었으면 모를까. 몇 해 전 제 손으로 추모공원에 모신 어머니말고 댄에게 딱히 가족이랄 게 없었거든. 평소엔 전혀 신경쓰이지 않았는데 이제야 연락 올 사람 하나도 없다는 게 씁쓸해졌어. 죽는다는 건 생각보다 되게 외로운 일 같았어. 찰리만 없었다면 너무 고요하게 죽음을 받아들이고 있었을 거란 생각이 들었지.
가만히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던 댄은 제가 죽기 전에 정리해야 할 것들이 무엇이 있나 현실적인 고민으로 옮겨갔어.
미리 정리해야 할 렌트와 처리해야 할 비용들. 숨만 쉬어도 돈이 나가는 느낌이었는데 막상 정리하려고 하다보니 숨을 안 쉬게 되면 그것대로 돈이 나간다는 생각에 불공평하다는 생각도 들었어.
"...진짜 끝까지 돈이구나. 흠."
이럴려고 그렇게 열심히 돈을 벌었던 건가 싶은 마음에 어딘가 허무하기도 했지. 아이고 덧 없다 인생 덧없어 를 몇 번쯤 외치고 났을까. 다시 덮쳐오는 두통에 눈을 가만히 감고 있던 댄이었어. 그리고 그런 댄을 건져올린 건 문을 부술 듯이 두드리는 이름 모를 무뢰배였지.
쾅쾅쾅쾅.
아무래도 살인적인 렌트비를 자랑하는 뉴욕에서 이 정도 가격에 좋은 플랫을 얻기란 쉽지 않아서 댄의 플랫도 소음에 아주 취약했어. 미친듯이 두드리는 소리에 옆집이 놀랐는지 욕설을 뱉으며 뭐하는 새끼냐는 말이 들려왔지. 댄은 남은 기간 동안 플랫에서 쫓겨날 생각은 없었기 때문에 빠르게 현관으로 향했어. 그리고 신경질적으로 누구세요를 내뱉으며 문을 열었지. 물론 문장이 채 끝나기 전에 문 앞에 선 얼굴을 보고 놀라 입을 다물었지만 말이야.
".....찰리?"
이름을 불린 당사자는 평소와 다르게 온화한 표정은 어디가고 숨소리마저 거친 상태였어. 그리고는 멀쩡한 댄의 얼굴을 보자마자 화를 삭힌 목소리로 물었지.
"...들어가도 돼요?"
안 된다고 하려 했지만 표정이 너무 폭발 직전의 그것이라 댄은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어. 찰리는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빠르게 안으로 들어섰어.
"뭐라도 마실래요?"
"...전화 왜 안 받아요."
"네?"
"전화 왜 안 받냐고요!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기나 해요?! 사람 미치는 꼴 보려고 그래요?! 환자가 전화를 안 받으면 얼마나 나쁜 생각이 많이 드는 줄 아냐고요!!"
갑자기 울분을 토하듯 소리치는 찰리에 댄은 냉장고로 가려던 발걸음을 멈췄어. 그리고 돌아본 찰리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오르고 눈물로 가득했지. 왜 소리를 지르고 그러냐고 따지려던 말은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어. 그냥 우는 게 아니라 걱정과 서러움, 고통이 온통 뒤섞여서 터져나오는 것만 같았거든. 댄은 덩달아 울음이 터질 것만 같았어.
왜 이 사람은 나한테 저런 얼굴을 하는 걸까.
나조차도 와닿지 않고 슬프지 않은 내 죽음을, 당신은 어째서 이렇게나 슬퍼하고, 애달퍼하고 고통스러워하는 걸까.
내가 뭐라고.
당신에게 나는 대체 뭐길래.
"...찰리. 나한테 왜 그러는 거예요. 대체."
"내가 그랬잖아요. 댄은 모른다고."
"제발 그냥 잊어요. 우리 안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이러는 거 의미 없어요."
"...그걸 왜 댄이 정해요?"
"찰리...말했잖아요. 나는 내버려두고 잊고 살아요."
"그러니까 그걸 왜 댄이 정하냐고요! 댄이 알기나 해요? 내가 얼마나 오래 좋아했는지, 얼마나 좋아하는지!!!"
"......"
".....모르잖아요. 댄. 정말 하나도 모르잖아요......내가 그동안 어떤 마음이었는데....."
찰리의 말에 댄이 결국 눈물을 떨어트렸어.
"...댄은 내가 3개월 전에 말 걸면서 좋아한 줄 알았죠? 아니에요. 훨씬 더 오래됐어요. 나 입사하고 나서부터니까......"
"......"
"2년 다 되어가나...? 맨날 몰래 지켜보기 바빴다고요. 3개월 전에 댄을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쳐서 인사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준비와 노력이 있었는지 하나도 모르죠? 나 매번 댄 우연히 마주친 것처럼...하려고 회의 중간에 뛰쳐나온 적도 있어요."
정말로 처음 듣는 소리에 댄은 눈물을 매단채로 찰리를 바라봤어.
"그럴 줄 알았어. 하나도 모를 줄 알았어요. 아마 댄네 부서 사람들이 다 알 수도 있어요. 내가 댄 좋아하는 거. 우리 부서엔 다들 아닌척해도 아는 것 같으니까.....나도 감추고 싶었는데 그게 잘 안 되더라고요."
"......."
"하, 내가 그날 댄이 나한테 시한부라고 말한 거 듣고 얼마나 절망적이었는줄 알아요? 이럴 줄 알았으면 기다리지 말고 미리 말해볼걸. 그때 먼저 저녁 먹자고 제안이라도 해볼 걸. 왜 그랬을까. 이런 생각들 때문에 잠도 못 잤다고요."
"......."
"그래도 좋았어요. 댄이 내 이름도 알고 있었고, 날 아예 싫어하는 것 같지도 않았거든요. 그쵸? 내말이 맞죠."
얼굴에 가득한 물기를 소매로 닦아내며 애써 웃은 찰리가 댄에게 물었어. 댄은 아무런 말 없이 찰리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봤지.
"난 상관 없어요. 댄. 당신이 너무 좋거든요."
"찰리."
"그러니까 나한테 제발 한 번만 기회를 줘요."
"....때로는 놓아주는 법을 알아야 해요."
단호한 댄의 음성에 찰리는 고개를 떨어트렸어. 또 다시 차오르는 울음을 참아내려는 건지 몇 번이고 목을 가다듬는 시도가 있었지. 착잡한 건 댄도 마찬가지여서 시선을 옮겼어. 그 사이 간신히 눈물을 틀어막은 찰리의 시선이 삭막하기 그지 없는 댄의 집을 훑었어. 진통제가 든 주황색 통이 잔뜩 놓여있는 테이블, 집을 정리 중인 건지 곳곳에 놓인 박스들. 그리고 흔하게 있는 액자 한 점 없는 모습이었지. 근데 그게 묘하게 너무나도 댄 같아서 되려 어울렸어. 처음 회사를 들어오고 신년회에서 마주쳤던 댄 특유의 건조함, 그 자체를 머금고 있는 것만 같았지. 이 남자는 알기는 알까. 신년회에서 단상에 올라 건조하게 올해의 목표를 읽던 모습에 제가 얼마나 반했었는지. 그 목소리를 녹음하지 못한 것이 아까워 회사 송출용 영상까지 얻어서 돌려봤다는 사실을. 그 이후로 지독한 열병에 걸린 사람처럼 얼마나 짝사랑을 해왔는지를. 가늠하기나 할까.
아마 모를 거였어. 평생 모르겠지. 이 둔한 남자는.
"....해피엔딩이 아니라서 미안하댔죠."
"......"
"내가 당신의 해피엔딩이면 안 되는 거예요?"
".......우리가 해피엔딩이 될 수 있을까요?"
"안 될 건 뭐예요. 당신이 시한부라서?"
대답 대신 댄의 안쓰러운 눈빛이 찰리를 훑고 지났어. 찰리는 그 눈빛을 보며 오히려 빙그레 웃었지. 그리고 댄의 앞에 섰어.
"상관 없어요. 정말로. 그러니까 당신의 남은 시간을 다 내게 줘요. 얼마 남지 않았어도 괜찮아요."
"......."
"그럼 되잖아요. 내가 값지게 쓸게요."
".......찰리."
"난 그걸로 충분해요."
댄은 이번에도 대답이 없었고, 찰리는 그런 댄을 가만히 끌어 안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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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맨밥 파월풀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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