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5969327
view 388
2024.09.25 04:59
4. 예언
다음 날 가게 문을 여는 도중, 어쩐지 계속해서 허전한 느낌이 들었다.
어제 하루가 너무도 다이나믹하게 흘러간 탓도 있었지만, 이건 단지 어제의 일 때문만은 아니었다.
원래라면, 이쯤에서 익숙한 소리와 함께 그가 모습을 드러냈어야 했다.
나는 문 밖을 이리저리 살폈다.
이상하게도 오늘은 그 노숙인 아저씨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평소엔 하루 걸러 한 번씩 나타나곤 했는데, 이렇게 오래 보이지 않는 건 처음이었다.
“안 보이니까, 괜히 걱정되네…”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가게 안으로 돌아가려는 찰나, 저 멀리 골목에서 익숙한 그림자가 보였다.
토미였다.
그는 골목 뒤에 숨어서 이쪽을 주의 깊게 살피고 있었다.
“쟤는 또 저기서 뭐 하고 있는 거야... 야, 토미!”
내가 그의 이름을 부르자, 토미는 어깨를 움찔하며 나를 쳐다보았다.
“거기서 뭐 하는 거야?”
내가 손을 흔들며 묻자, 토미는 주머니에 손을 푹 찔러 넣고는 빠른 걸음으로 내게 다가왔다.
가게로 들어온 토미가 후드를 벗으며 물었다.
“그 아저씨, 오늘도 왔다 갔어?”
“나도 그 아저씨 생각하고 있었는데, 아니, 요 며칠 안 보이더라.”
내 말에 토미는 다행이라는 듯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대로 쭉 안 보였으면 좋겠다.”
“그 아저씨가 그렇게 이상한 사람은 아니야.”
“너야 그렇게 생각하겠지. 난 볼 때마다 소름이 쫙 돋는다고.”
나는 그런 그를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바라봤다.
“나는 네가 골목 뒤에서 가게를 염탐한 게 더 소름 돋아.”
“그러게, 왜 사람을 아침부터 부르고 그래? 뭐가 그렇게 급한데?”
“며칠 전부터 말했잖아. 오늘 서점 가서 주문한 책을 받아와야 한다고.”
“아니, 내 말은... 서점은 오후에 가도 되잖아.”
토미는 카운터 쪽으로 의자를 끌어와 앉으며 투덜거렸다.
반면 나는 카운터 뒤로 돌아가 주문서를 장부에 옮겨 적기 시작했다.
카운터 위로 토미가 턱을 괸 채 나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난 네가 오후에나 와 달라고 할 줄 알았지.”
“그러려고 했는데, 오전에는 로키랑 돌아다니면서 주변 구경을 좀 시켜주고 싶어서.”
“누구?”
토미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나는 눈만 살짝 올려 그를 바라보았다.
“어제 그 사람?”
토미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 나는 손에 들고 있던 장부를 탁 내려놓으며 물었다.
“왜 그래?”
“허니.”
그가 진지하게 말했다.
“남자로서 충고 하나 해줄까?”
“하지 마.”
나는 고개를 저으며 그의 말을 막으려 했다.
“일단 들어봐.”
하지만 토미는 내 말을 무시하고 이어갔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남자는 건드리지 않는 게 좋아.”
“무슨 소리야.”
“어제 그 사람 표정 봤잖아. 아내분이 언제 돌아가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직 못 잊은 얼굴이었어.”
토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그런 남자에게 빠지면 너만 다쳐.”
“누가 좋아한대?”
내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대꾸했지만, 토미는 아랑곳하지 않고 내게 되물었다.
“그럼 안 좋아한다고?”
“그래, 안 좋아해.”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냥 마음이 안 좋을 뿐이야. 너도 들었잖아, 죽은 아내가 나랑 얼굴도, 이름도 같다고. 그 얘길 들으니 마음이 안 좋아져서, 나는 그냥 그 사람이 여기 머무는 동안 친절하게 대해주고 싶은 것 뿐이야.”
토미는 아무 말없이 그저 턱을 괴고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참, 넌 거짓말도 못 해.”
“누가 거짓말을 했다는 거야?”
나는 속이 끓어오르는 듯 말했다.
그 순간, 윗층에서 문이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철제 계단을 천천히 밟아 내려오는 누군가의 기척이 느껴졌다.
그가 모습을 드러내자, 토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우리 앞에 선 로키가 말했다.
“대화 중에 실례지만…”
그는 손에 찻잔을 들고 있었다. 아침에 내가 만들어 준 꽃잎 차의 흔적이었다.
나는 카운터 뒤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 빈 찻잔은 그냥 주방 카운터에 두면 돼요.”
로키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토미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안녕, 토미.”
그의 인사에 토미는 여전히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어색하게 손을 들어 올렸다.
“아… 안녕하세요, 로키.”
로키는 그를 잠시 의아한 듯 바라보더니, 곧 말없이 사라졌다.
토미는 그가 사라지자마자 나를 향해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나는 그런 그를 타이르듯 손가락을 입에 갖다 대며 그의 잔소리를 막아냈다.
한편, 로키는 주방으로 가서 찻잔을 조심스럽게 카운터 위에 내려놓았다.
밖에서는 토미와 허니가 실랑이를 벌이는 듯한 소리가 들렸지만, 그의 귀에는 그저 먼 속삭임처럼 희미할 뿐이었다.
로키는 그저 조용히 가게 안을 둘러보았다.
보이지 않는 빛이 사방을 감싸며 살아있는 모든 것에 생명을 불어넣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문가로 다가가 카운터 뒤에 서 있는 허니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몸에서 퍼져나온 은은한 빛이 가게 안을 물들고 있었고, 그 빛을 향해 가게 안의 모든 꽃들이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마치 그녀가 그들의 태양이라도 되는 듯이.
로키는 그 찬란한 장면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어느 날 저녁 무렵, 요툰헤임 성의 정원에는 두 사람이 서 있었다.
그들은 서로 칼을 겨누고 있었는데, 키가 작은 한 사람은 발리 왕자였고, 다른 한 사람은 요툰헤임의 총사령관이자 왕자들의 대부인 북쪽의 스림이었다.
스림은 왕자에게 칼을 겨눈 채 여유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긴장하십시오, 저하. 다음 공격은 쉽게 막을 수 없을 겁니다.”
스림의 경고에, 긴장한 발리가 칼자루를 더욱 단단히 쥐며 고개를 끄덕였다.
“말씀드렸듯이, 칼을 겨누면서도 동시에 적의 움직임을 절대로 놓쳐서는 안 됩니다.”
“적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데요?”
발리가 순간 긴장을 풀며 스림에게 물었다.
스림은 친절한 목소리로 그 물음에 답했다.
“간단합니다. 적의 발에서 눈을 떼지 마세요.”
“네? 하지만 아까는 칼끝에서 눈을 떼지 말라고 하셨잖아요! ...으악!”
순식간에 스림의 검이 발리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왕자는 비명을 질렀지만, 순간적으로 정신을 차린 왕자는 재빨리 검을 들어 거인의 공격을 막아냈다.
발리는 자신을 향해 웃고 있는 스림의 얼굴을 바라보며 우는 소리로 말했다.
“갑자기 공격하는 게 어딨어요!”
“제가 경고하지 않았습니까. 적의 발에서 눈을 떼지 마시라고요.”
“하지만 아까는…”
“적의 공격과 움직임을 한 번에 보셔야만 합니다.”
스림은 단호하게 말했다.
“뭐, 저하께는 아직 어렵겠지만요.”
그러면서 그는 칼집에 검을 꽂으며 뒤로 물러섰다.
거인은 여유롭게 미소를 지으며 입고 있던 보호 장비를 벗어 제자리에 올려두기 시작했다.
발리는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괜한 오기가 생긴 왕자는 쓰고 있던 투구를 고쳐 쓰고는 대부에게 달려가 말했다.
“내일 한 번 더 해요!”
“무엇을 말입니까.”
스림이 마시던 물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발리는 답답하다는 얼굴로 소리쳤다.
“대련이요! 오늘 밤새도록 연습할게요! 공격이랑 움직임, 둘 다 보는 연습이요!”
투지에 불타오르는 왕자의 두 눈을 보며 스림은 잠시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예상과 다르게 거인은 단호히 고개를 내저었다.
“내일은 안 될 것 같습니다.”
“왜요?”
발리가 크게 실망하며 물었다.
왕자는 쓰고 있던 투구까지 벗어 던지고는 대부에게 애처로운 눈빛을 보냈다.
“저하께서 아무리 그러셔도 내일은 안 됩니다. 저는 내일 아스가르드에서 열리는 회담에 전하를 모시고 가야하니까요.”
“아….”
스림의 말에, 발리의 머릿 속에 잊고 있던 한 가지가 떠올랐다.
내일은 로키가 아스가르드에 방문하기 위해 며칠간 성을 떠나는 날이었다. 그래서 오늘은 가족 모두가 모여 저녁 식사를 하기로 어머니와 약속한 날이기도 했다.
“잊고 있었어요. 어쩐지 다들 무언가 분주한 것 같더라니.”
“저하의 검술 수업도 끝났으니, 저도 이제부터 분주할 예정입니다.”
스림이 숨을 크게 들이쉬고는 말했다.
“이번 아스가르드에서 열리는 검술 경연에서 시범을 보이기로 해서 말입니다.”
“검술 경연이요?”
왕자가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스림은 그렇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새로운 정예부대를 뽑기 위한 경연이 열린다고 합니다.”
“정예부대라면… 여성들로만 이루어진 폐하의 직속 군대 말인가요? 아스가르드의 발키리 전사들?”
“잘 알고 계시네요. 다른 과목도 무예만큼이나 열심히 공부하신다면 왕비님께서 기뻐하실 겁니다.”
스림이 장난스럽게 말했다.
하지만 정작 발리는 대부의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오로지 왕자의 머릿속은 책에서 본 발키리 전사들의 모습으로 가득 차 있었다.
목욕을 마치고 나오니, 어느새 태양은 서쪽 끝으로 지고 있었다.
발리는 편안한 실내복을 입고 복도를 가로질러 만찬장을 향해 걸음을 서둘렀다. 도착하니 나르피가 홀로 앉아 식탁 위에 차려진 음식을 둘러보고 있었다.
둘째 왕자는 형을 보자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어머니랑 아버지는?”
“아직 안 오셨어.”
발리의 물음에, 나르피가 천진난만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더니 곧 옆에 있는 잔을 들어, 그 안에 있는 붉은 빛 도는 물을 한 모금 삼켰다.
발리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동생을 바라보며 그의 곁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발리가 물었다.
“이건 약이야?”
“응. 어머니께서 불꽃 열매를 달여주셨어.”
나르피가 소매로 입 주변을 닦으며 대답했다.
금고에서 일어난 사건 이후, 나르피는 겨울 상자로 인해 입었던 부상을 회복하기 위하여 계속해서 약을 마시고 있었다.
왕자는 제 형에게 잔을 건네 보였다.
“형도 마셔볼래?”
“아니야, 괜찮아.”
발리는 다정하게 고개를 저었다.
어느덧 시종들이 마지막 요리를 내려놓으며 왕자들 앞에 예의를 표했다.
발리는 손을 닦으며 만찬장 입구를 흘긋 바라보았지만, 여전히 허니와 로키의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왕자는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지금껏 어머니와 아버지가 가족 식사에 빠지거나 늦은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슬슬 부모님이 걱정되기 시작한 발리는 고개를 돌려 나르피를 바라보았다.
자신과는 다르게, 천진난만한 둘째 왕자는 가장 좋아하는 디저트를 바라보며 사랑에 빠진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 때 였다.
“늦어서 미안하구나, 애들아.”
서둘러 만찬장으로 들어온 내가 왕자들에게 사과하며 말했다.
“약은 마셨니, 나르피?”
내 물음에, 왕자는 말없이 빈 황금잔을 들어 보였다.
나는 칭찬의 의미로 아이의 뺨에 짧게 입을 맞추었다.
곧 이어 로키가 나타났다.
로키는 왕자들에게 미소를 한번 지어주고는 마찬가지로 맞은 편에 앉은 내게도 같은 미소를 지어주었다.
하지만 그 미소에는 평소와 조금 다른 점이 있었다. 그 순간 나를 향한 로키의 모든 표정과 행동이 유난하리만큼 굉장히 형식적으로 느껴졌다.
아무래도 여기 오기 전에 나눈 대화 때문에 그의 기분이 많이 상한 모양이다.
하지만 왕자들 앞에서까지 저렇게 굴다니.
유치하게 구는 로키를 향해 한 소리를 날리려고 하던 찰나, 발리가 불쑥 끼어들며 물었다.
“내일이 아스가르드에서 회담이 열리는 날이었죠? 언제쯤 출발하세요, 아버지?”
아들의 물음에, 로키는 식사하던 것을 멈추고는 나를 흘긋 바라봤다.
나는 그의 시선을 억지로 피하며, 나르피가 좀 더 식탁에 가까이 앉을 수 있게 도와주었다.
로키가 대답했다.
“회담은 가지 않을 거다.”
뜻밖의 대답에 발리가 눈을 깜빡였다. 하지만 놀란 건 발리 뿐만이 아니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로키를 바라보며 소리쳤다.
“로키!”
로키가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봤다.
그는 유치하다 못해 그 특유의 고고한 자세로 또 한 번 내게 형식적인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나는 그런 그를 보며 이를 꽉 깨물었다.
“아버지는 내일 아침 동트기 전에 떠나실 거다. 그러니 너희 둘도 아침 일찍 일어나서 아버지를 배웅해드리렴.”
“네….”
두 왕자가 눈치를 살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로키가 완강하게 손을 저으며 말했다.
“그럴 필요 없다. 아스가르드엔 가지 않을 거니까.”
“전하….”
이번엔 내가 그에게 형식적인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 이야기는… 다 마무리된 것 아닙니까. 굳이 왕자들 앞에서…”
“내가 안 가는 것으로 마무리되었지. 그런데 왕비께서 ‘굳이 왕자들 앞에서’ 이런 식으로 나오시니 내 마음이 굉장히 혼란스럽소.”
그 순간 나는 들고 있던 식기를 꽉 움켜쥐었다. 나의 분노에 대지가 살짝 흔들렸다.
잔뜩 겁을 먹은 발리와 나르피는 서둘러 자신의 접시가 떨어지지 않게 꽉 붙들었다.
“두 분… 무슨 일 있으세요?”
눈치를 살피던 발리가 조심스레 물었다. 나르피 또한 살벌한 분위기에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싸우신 거예요?”
왕자들의 기죽은 목소리에 나는 아차 하며 손에 쥐고 있던 물건을 조용히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옆에 앉은 나르피를 달래며 말했다.
“울지 마렴, 나르피. 그런 거 아니야.”
나는 동시에 로키를 바라봤다.
왕자들에게는 한없이 약한 로키이기에, 울먹거리는 어린 아들을 보면서 그의 마음도 편하지는 않을 것이다.
“싸운 게 아니다.”
예상대로 로키가 다정하게 말했다.
“네 어머니와 나는 서로 의견이 달라서 대립하는 것뿐이야.”
“그게 싸운 거잖아요.”
발리의 말에, 잠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서쪽 숲에 사는 다람쥐가 해준 말인데요.”
먼저 침묵을 깬 건 나르피였다.
갑작스런 왕자의 목소리에 우리 모두가 나르피를 바라봤다.
“다람쥐들은 보통 사이가 좋지만, 겨울이 되기 전에는 최대한 많은 도토리를 모아야하기 때문에 가끔 도토리 때문에 싸우는 일도 있대요.”
그 말을 하는 나르피의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어머니 아버지도 도토리 때문에 싸우신 거에요?”
진지하게 이야기를 들어주던 우리는, 왕자의 말이 끝나자마자 그만 모두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불쌍한 나르피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우리를 빤히 쳐다봤다.
“세상에 그런 바보 같은 말이 어딨어, 나르피?”
먼저 웃음을 그친 발리가 장난스럽게 동생을 나무라며 말했다.
그러자 나르피가 울먹이며 나를 바라봤다.
“네 형 말이 맞아, 나르피. 그건 다람쥐들 이야기지, 나와 네 아버지는 도토리 때문에 싸우지 않아.”
“하지만…”
“내가 네 어머니께 먼저 사과할테니, 그만 눈물을 그치렴.”
로키가 나르피를 바라보며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
아버지까지 그렇게 말하니, 나르피는 안심하며 눈물 자국을 닦아냈다.
아들의 순수함과 로키의 마지막 말에 조금 마음이 풀린 나는 다시금 로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로키, 평소라면 네 의견을 따르겠지만 이번 회담은 중요한 거잖아. 천둥의 신께서 아스가르드 군주의 자격으로 처음 열리는 회담이니만큼 아스가르드의 왕자이자, 동맹국의 군주인 네가 반드시 참석해야 하니까.”
“당신만큼이나 나 역시 그 자리가 얼마나 중요한 자리인지는 알고 있어.”
로키가 말했다.
“그저 당신에게 내려진 예언을 무시하고 참석할 만큼 중요하지 않을 뿐이야.”
“예언이요? 어머니께 무슨 예언이 내려졌는데요?”
발리가 대화에 끼어들며 물었다.
나는 별거 아니라는 듯 가볍게 대답했다.
“운명을 관장하는 마녀들인 노른이, 만월이 뜨는 밤 대지의 여신인 내게 큰 위험이 닥칠 거라 예언했다는구나.”
“어… 그럼 정말 조심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고맙다, 발리.”
로키가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아들을 칭찬했다.
내가 그런 그를 향해 타박하며 말했다.
“도대체 우리가 언제부터 마녀들의 말을 신뢰했다고? 세상의 혼란을 위해선 얼마든지 거짓으로 예언을 내리는 족속들이라고, 로키, 네가 말했었잖아. 이번 예언도 거짓일 확률이 커.”
“거짓이었다면 애초에 당신에게 말해주지도 않았을 거야. 애석하게도 그들의 말 속에 거짓은 없었어. 그러니 조심해야지.”
“네 말이 다 맞다 쳐도, 조심은 내가 하면 되는데, 왜 네가 나서 가지고 조심을 하냐 이 말이지.”
내 말에, 로키가 표정을 찡그렸다.
“왕자들 앞에서 서슴없이 상처를 주는군.”
“더 상처 주기 싫으니까 이 대화는 그만 마무리 짓자.”
나는 유난스럽게 식기를 다시 집어 들었다.
하지만 내 소망과는 다르게, 뜻밖의 인물이 다시 그 주제를 식탁 위로 꺼내었다.
“아버지는 그냥 어머니가 걱정돼서 그러신 거에요.”
“고맙다, 나르피.”
로키가 이번엔 둘째 아들을 칭찬했다.
나는 한숨을 쉬며 또 다시 식기를 조용히 내려놓았다.
“나도 안다, 나르피. 하지만 나는 네 아버지가 나 때문에 왕의 본분을 다하지 못 하는 게 안타까워서 그런 거야.”
“그럼 두 분이 같이 다녀오시면 되잖아요. 그러면 아버지께서 어머니도 지켜주시고 회담도 참석하실 수 있으니까요.”
“그럼 너희는 누가 지켜주고?”
내가 웃으며 반문하자, 나르피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형이랑 저는 충분히 강한걸요. 누군가 돌봐주지 않아도 괜찮아요.”
“그래, 너희는 충분히 강하지. 하지만…”
“그럼 다 같이 가는 건 어때요?”
그 순간 발리가 불쑥 끼어들며 물었다.
모두의 시선이 첫째 왕자에게로 쏠렸다.
내가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뭐?”
“왜, 그렇잖아요? 아버지께선 어머니가 걱정되고, 어머니는 우리가 걱정되시는 거라면, 다 같이 아스가르드로 가는 것도 좋은 방법 아닐까요?”
“저는 좋아요!”
나르피까지 발리의 말에 합세하며 말했다.
“예전에 숙부께서 보내주신 갑옷을 입고 아스가르드에 가면 분명 좋아하실 거에요.”
“하지만…”
“게다가 이번에 아스가르드에서 정예부대를 선발하는 경연이 열린다고 들었는데, 직접 꼭 참관하고 싶어요! 발키리 군대를 직접 눈으로 보는 건 흔한 기회가 아니잖아요, 어머니!”
발리가 상기된 얼굴로 신이 나서 말했다.
나는 난감한 얼굴로 왕자들을 바라봤다. 이례적으로 요툰헤임의 모든 왕족이 동시에 자리를 비운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어머니… 제발요.”
나르피가 내 손을 잡고 흔들며 울먹거렸다.
내가 난처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글쎄, 아버지께 한번 여쭤…”
“제발요, 아버지!”
내 말과 동시에, 왕자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로키에게로 달려가 소리쳤다.
말없이 이 상황을 지켜보던 로키는 갑작스러운 왕자들의 행동에, 놀란 얼굴로 아들들을 바라봤다.
발리는 로키의 오른손을 부여잡고, 그보다 키가 훨씬 작은 나르피는 아버지의 무릎을 잡고 크게 흔들며 우는 소리를 냈다.
“저희도 아스가르드에 가고 싶어요! 제발 허락해 주세요!”
로키는 어쩔 수가 없었다. 발리의 말 중에 반박할 수 있는 구석이 단 한 곳도 없었으니까.
가족 모두가 아스가르드에 간다면 발리의 말대로, 회담도 참석하고 게다가 내가 안전한지 계속 지켜보는 것 또한 가능했기 때문이다.
발리의 명석한 두뇌에 내심 감동한 듯이 보이는 로키가 허락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자, 발리와 나르피는 만세를 부르며 진심으로 기뻐했다.
왕자들은 식탁 주변을 뛰어다니며 자신들의 기쁨을 계속해서 표출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내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로키를 바라봤다.
마찬가지로 왕자들을 바라보던 로키 또한,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저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그 날 밤, 왕자들은 아스가르드에 가져갈 짐을 한가득 싼 뒤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나르피의 머리 맡에는 천둥으로 만든 갑옷이 곱게 개어져 있었고, 발리의 머리 맡에는 발키리 전사들이 그려진 책의 페이지가 활짝 펼쳐져 있었다.
나는 잠든 왕자들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어느새 높게 떠오른 달이 환하게 빛을 내뿜으며 북쪽 땅을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나는 그 빛을 따라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만월에 가까운 달이 밤하늘을 가득 매우고 있었다.
우레와 같은 소리와 함께 아스가르드의 바이프로스트가 빛을 내뿜었다.
세계와 세계를 연결하는 무지개인 바이프로스트를 지키는 아스가르드의 헤임달 앞에, 곧 우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서 오십시오, 전하.”
헤임달은 우리에게 예의를 표하는 동시에, 그 시선을 왕자들에게 돌리며 말했다.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두 눈과 마주치자, 나르피는 약간 겁을 먹은 듯, 내 손을 꽉 붙잡았다.
“오시는 걸 보고 있었습니다.”
“어련하시겠어.”
로키가 말했다.
그 말에 이어, 나 역시 헤임달에게 반가운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에요, 헤임달. 언제나 수고가 많아요.”
그리고 그 순간, 아스가르드의 군주인 토르가 우리 앞에 나타났다. 그는 천둥 같은 함성을 지르며 우리를 향해 달려왔다.
“이게 누구인가!”
“숙부님!”
그를 발견한 발리와 나르피가 두 팔을 하늘 높이 흔들었다.
두 왕자는 곧 토르의 두꺼운 팔을 각각 하나씩 붙잡고 공중에 매달렸다.
토르가 유쾌하게 말했다.
“세상에, 날이 갈수록 무거워지는구나.”
천둥의 신은 곧 왕자들을 바닥에 부드럽게 내려놓고는, 일일이 그들과 눈을 마주치며 자상한 미소를 지었다.
“어디 보자, 여신과 같은 눈동자를 지닌 너는 발리가 분명한데, 눈빛을 보아하니 어느새 전사가 다 되었고….”
토르는 발리의 어깨를 자랑스럽게 두드렸다.
“그리고 이쪽은… 세상에, 작은 천둥의 신이군.”
숙부의 말에, 나르피는 앞니를 드러내며 배시시 웃어보였다.
요툰헤임의 둘째 왕자는 은빛 날개가 그려진 투구와 빨간 망토를 입고 있었는데, 이것은 천둥의 신이 지난 날 나르피의 생일 선물로 보내준 천둥으로 만든 갑옷이었다.
폐하께선 뿌듯한 목소리로 우리를 향해 말했다.
“꼭 내 어린 시절을 보는 것 같소.”
“내 아들이야.”
그러자 로키가 언짢은 얼굴로 끼어들었다.
로키의 말에, 토르가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오해하지 말 거라. 그냥 칭찬한 거다.”
“형을 닮았다는 말이 어떻게 칭찬이야?”
“왜 그래, 로키. 왕자들에겐 더 없이 명예로운 칭찬인데. 감사합니다, 폐하.”
나는 고개를 숙이며 토르에게 예의를 표했다.
“역시 나와 말이 통하는 건 여신뿐이군.”
토르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대가 요툰헤임의 왕비라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오.”
“그 오랜 세월이 지나도 두 사람 궁합은 여전하네.”
로키가 툴툴대며 말했다.
토르는 그런 로키를 놀리며 말했다.
“그 오랜 세월이 지나도 네 질투심은 여전하구나, 로키. 여신께서는 지칠 만도 할 텐데, 대단하오.”
“전하의 이런 표현 방식이 하루 이틀도 아닌걸요. 익숙해졌습니다, 폐하.”
내 말에, 로키가 슬쩍 내 어깨를 감싸며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말했다.
“오해하지 마. 칭찬한 거 아니니까.”
그러자 천둥의 신이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보아하니 그대들의 금슬도 여전하군. 곧 요툰헤임에 어여쁜 공주가 탄생했다는 소식이 들려올 수도 있겠어.”
“형이 정 원한다면… 노력은 해볼게.”
로키가 애써 내 시선을 무시하며 제 형에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아무튼, 로키, 네가 도착했으니 바로 연회장으로 가서 회담을 시작하면 될 것 같구나.”
“다른 신들은?”
로키가 물었다.
“모두 동이 트자마자 이 곳에 도착했다.”
“저희가 너무 늦었나 보네요.”
내 말에, 천둥의 신이 자상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들이 지나치게 일찍 온 거요. 그나저나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그대도 모든 대지를 관장하는 여신이자 요툰헤임의 왕비이니 회담에 함께 해주면 고맙겠소.”
“영광입니다, 폐하.”
내가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 순간, 여태까지 어른들의 대화를 지켜보며 서 있던 두 왕자가 오랜 침묵 끝에 입을 열며 말했다.
“어머니와 아버지께서 회담에 참석하시는 동안, 저희는 잠시 숲에 다녀와도 돼요?”
내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숲? 너희들끼리?”
나는 곧바로 고개를 내저었다.
“너무 위험해서 안 돼. 회담이 끝날 때까지 왕궁 안에서 머무르렴.”
“지루하단 말이에요.”
발리가 우는 목소리로 말했다. 왕자의 표정은 꼭 정치학 수업을 들을 때와 비슷해 보였다.
형이 그러니, 동생인 나르피까지 내 팔을 붙잡으며 투정을 부렸다.
“어머니, 할아버지의 숲에 다녀오게 해주세요.”
“안 돼.”
그러자 두 왕자의 시선이 이번엔 로키에게로 향했다.
“아버지….”
왕자들은 로키의 팔을 흔들며 우는 소리로 말했다.
“허락해 주세요, 네?”
나는 속으로 깊은 한숨을 쉬었다.
로키는 왕자들이 원하는 것을 웬만해선 거절하는 법이 없었다.
오늘 이렇게 아스가르드에 온 가족이 온 것도, 어찌보면 로키가 왕자들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 해서 생긴 일이니까.
하지만 그의 대답은 예상과 전혀 달랐다.
“네 어머니가 이미 안 된다고 하지 않았니. 네 어머니의 뜻이 곧 내 뜻이기도 하다. 그러니 왕궁 안에서 얌전히 기다려라.”
나는 놀란 눈으로 로키를 바라봤다.
그의 단호한 표정에 발리와 나르피가 잔뜩 실망한 얼굴로 고개를 떨구었다.
천둥의 신은 시무룩해진 왕자들에게 저녁에 열릴 연회에 대해 이야기하며 그들의 사기를 북돋으려 애썼다.
하지만 왕궁 입구에 들어설 때까지도 왕자들의 어깨는 실망으로 축 늘어져 있었다.
“폐하의 숲이라면 내 고향이기도 하니, 나중에 같이 가자꾸나.”
나는 회담장으로 들어서기 전, 발리와 나르피를 바라보며 다정하게 말했다.
왕자들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입술을 쭉 내밀었다.
나는 사랑이 가득 담긴 눈빛으로 일일이 그들의 뺨에 입을 맞추고는 로키와 함께 회담장으로 들어갔다.
반면 로키는 별말 없이 왕자들에게 작별의 의미로 손을 살짝 흔들 뿐이었다.
“아버지라면 분명 된다고 하실 줄 알았는데….”
멀어지는 부모님을 보며, 발리가 괜히 투덜거렸다. 그의 곁에 있던 나르피 역시 아쉬움으로 볼을 부풀렸다.
“서쪽 다람쥐들에게 아스가르드의 도토리를 가져다주겠다고 약속했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약속하지 말 걸 그랬어, 형.”
“어쩔 수 없지. 정원에 가서 숨바꼭질이나 하자. …어라?”
그 순간,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발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르피가 궁금한 얼굴로 물었다.
“왜 그래, 형?”
“이게 뭐지…?”
발리는 주머니에 넣었던 손을 꺼내어 그 안을 확인했다. 손바닥 위에는 작은 쪽지가 들어 있었다.
발리는 조심스레 그 쪽지를 펼쳐 보았다. 그의 눈에 곧 익숙한 글씨체가 보였다.
‘조심히 다녀오렴. 네 어머니에겐 비밀이다.’
아버지의 메시지에, 발리의 얼굴이 곧 환해졌다.
“그게 뭔데?”
나르피가 까치발을 들며 발리의 팔을 잡아당겼다.
발리는 그런 동생을 바라보며 씨익 미소를 지었다.
어느새 요툰헤임의 두 왕자는 오딘의 숲 사이 사이를 누비고 있었다.
“형! 저기 완전 커다란 도토리나무가 있어! 얼른!”
발끝까지 신난 나르피가 형의 손을 끌며 말했다.
“천천히 좀 가, 나르피!”
발리는 애써 동생을 진정시키며 함께 걸음을 재촉했다.
두 왕자는 커다란 도토리나무 앞에 서서 그 꼭대기를 올려다보았다. 그 크기가 어찌나 높던지 발리는 목 뒤로 통증이 느껴질 정도였다.
“저기, 도토리가 보여!”
나르피가 자신의 키에 다섯 배정도 되는 곳을 가리키며 발리에게 말했다.
발리는 동생의 손끝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그 곳엔 나르피의 말대로 도토리 여러 송이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확실히 요툰헤임의 도토리와는 생김새가 다르네.”
발리가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도 맛은 똑같겠지? …어, 나르피… 지금 뭐 하는 거야?”
동생을 보던 발리가 당황하며 물었다.
나르피는 어깨까지 소매를 걷어 올리고 준비 운동을 하고 있었다. 쭉 기지개를 피던 둘째 왕자는 형의 물음에 아무렇지 않게 답했다.
“도토리를 따려고.”
“뭐? 저기를 올라가겠다는 거야?”
발리가 경악하며 소리쳤다.
첫째 왕자는 서둘러 동생의 소매를 강제로 내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안 돼! 그러다 발을 헛디뎌서 떨어지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하지만 다람쥐들에게 약속했는걸. 할아버지의 숲에서 도토리를 따다 주겠다고 말이야.”
나르피가 순수한 얼굴로 말했다.
“자고로 훌륭한 왕자라면 백성들과의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하잖아. 형도 그렇게 생각하지?”
“하지만…”
난처해진 발리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물론 발리 역시 나르피의 말이 맞다고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위험을 무릅쓰고 그가 저 높은 곳에 가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발리는 자신의 소매를 어깨까지 걷어 올렸다.
“내가 따다 줄게! 그러니까 넌 여기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
잠시 후, 왕자는 도토리나무 가지에 손을 뻗어 단숨에 그 위로 올라갔다.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발리는 땅과 멀어져갔다.
중간쯤 올라왔을 때, 발밑에서 나르피가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발리가 아래를 내려다보자, 평소보다 더 작게 보이는 동생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발리도 손을 흔들며 그 인사에 화답했다.
그렇게 다시 가지를 붙잡고 조금 더 올라가자, 발리는 목표로 삼았던 도토리들을 마주할 수 있었다.
“어디 보자.”
발리는 도토리들을 요리조리 돌려가며 가장 예뻐 보이는 것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신중히 고른 끝에, 이내 주머니가 도토리로 가득해졌다.
“이제 내려갈게!”
발리는 보이지 않는 동생을 향해 나뭇잎 틈으로 소리쳤다.
하지만 나무에서 내려오는 것은 올라가는 것보다 시간이 더 오래 걸렸다.
곧 땀으로 범벅된 발리가 마지막 가지에서 손을 놓고 지상으로 뛰어내렸다.
“나르피?”
하지만 왕자의 눈에는 나무 아래에서 얌전히 자신을 기다려야 할 동생이 보이지 않았다.
발리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나르피! 어딨어?”
그는 불안한 목소리로 주변을 둘러봤다.
하지만 나르피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발리는 조금 더 우거진 숲으로 나르피를 찾아 나섰다. 깊은 곳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나무들은 점점 커졌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울창한 잎들로 인하여 햇빛도 보이지 않기 시작했다.
하지만 발리는 이 모든 것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오로지 왕자의 머릿속에는 동생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다행히 나르피는 바로 그 우거진 숲 속에 있었다.
“내가 도울 게 있을까?”
둘째 왕자는 무릎을 꿇고 앉아 누군가와 대화를 하고 있었다.
“나르피!”
동생을 발견한 발리가 그의 이름을 부르며 달려왔다.
왕자는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동생에게 소리쳤다.
“왜 멋대로 사라진 거야?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미안해, 형. 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어. 어서 와서 이것 좀 봐.”
나르피는 발리에게 손짓을 하며 무언가를 가리켰다.
발리는 천천히 동생에게 다가갔다.
“저게 뭐야?”
발리가 끔찍한 목소리로 물었다.
나르피의 맞은 편에는 새까만 짐승이 웅크리고 누워있었다.
그것의 피부와 털은 볼품없이 뒤엉켜 있었고, 두 눈은 꼭 피를 흘리는 것처럼 새빨갛게 보였다.
그 짐승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발리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당장 이리 와, 나르피.”
발리는 재빨리 동생의 손을 낚아채어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리고 잔뜩 경계하는 목소리로 그 짐승에게 말했다.
“네 놈의 정체는 무엇이냐?”
그러자 그 짐승이 새빨간 두 눈을 굴려 발리를 바라봤다. 그것이 입을 벌리자 끈적한 액체가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발리는 좀 더 위엄있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나는 요툰헤임의 고귀한 왕자, 발리다. 위대한 군주인 내 아버지의 이름을 빌려 다시 한번 네게 묻겠다. 네 놈의 정체는 무엇이냐?”
그 순간, 짐승이 입꼬리를 뒤로 쭉 찢으며 소름 돋는 미소를 지었다.
그것은 바닥에 이마를 내려치며 왕자에게 예의를 표했다.
“저하께서 이 미천한 생명의 이름을 물으시니 대답해드림이 마땅하오나… 애석하게도 소인에게는 이름이 없습니다. 몹쓸 이유로 소인은 본연의 이름을 잃어버리고 말았지요. 부디 용서하시길 바랍니다.”
“이름이 잃어버리다니 그게 말이 돼?”
발리가 얼굴을 찌푸리자, 그 짐승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소인에게는 말이 되지요.”
“그렇다면 이름은 됐어. 내가 궁금한 건 왜 내 동생과 함께 있었냐는 거다. 네 놈이 순진한 내 동생을 꼬드겨 이런 어두운 곳까지 데려온 것이라면 왕자를 납치한 이유로 난 네게 죄를 물을 수도 있어.”
왕자의 말에, 짐승은 웃음을 터뜨렸다.
“납치라뇨, 저하. 정녕 고귀한 저하의 눈에는 제 발에 묶인 이 사슬이 보이지 않으시는 겁니까?”
그러더니 짐승은 힘겹게 제 앞 발을 들어올렸다. 그러자 쇠가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그의 네 발을 감싸고 있는 사슬이 모습을 드러냈다.
보이지 않는 그 족쇄로 인해 짐승의 발목은 곧 절단될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고, 그 이유로 인해 그 짐승은 그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가 없는 신세였다.
짐승은 억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소인은 그저 도움을 청했을 뿐입니다.”
“저자의 말이 맞아, 형.”
나르피가 발리에게 말했다.
“형이 도토리를 따려고 올라간 후 좀 있다가, 숲 속에서 슬피 우는 울음소리가 들리길래 내 스스로 이 자를 찾아 온 거야.”
“정말로 사려 깊고 친절한 분이십니다.”
짐승이 나르피를 향해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전했다.
하지만 발리는 여전히 의심이 가득한 눈으로 그것을 바라봤다.
왕자가 족쇄를 가리키며 물었다.
“네 놈 발에 묶여있는 것은 뭐지?”
“이것이야말로 소인이 슬피 우는 까닭이죠. 제게 자유가 없다는 증거입니다.”
짐승이 울음소리를 내며 말했다.
“저는 저하께서 태어나시기 훨씬 전부터 이런 고통을 받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족쇄는 아스가르드의 것이야.”
발리가 날카롭게 말했다.
“네 놈이 무슨 잘못을 저질러 신들께서 벌을 내리신 거겠지.”
왕자는 짐승에게 비난을 내뱉었다. 하지만 발리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짐승의 새빨간 두 눈에서 굵은 눈물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발리와 나르피가 당황하며 한 발자국 물러났다.
하염없이 울던 짐승은 하늘 위로 긴 울음소리를 내뱉었다.
“소인은 그저 이 세상에서 자유와 기쁨을 누리며 살았을 뿐입니다. 그런 제게 잘못이 있다면 오직 에시르 신들보다 훨씬 이전부터 이 곳에 살았다는 것뿐이겠지요.”
“에시르 신들보다? 그 말은… 아스가르드가 창조되기 이전부터 이곳에 살았다는 말이니?”
나르피가 놀라며 묻자, 짐승은 슬픈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르피가 당황하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역사책에는 네 이야기가 없었는데…”
“소인의 존재가 위대한 신들의 이야기에 기록되기엔 너무나 하찮고 끔찍하기 때문이겠지요. 저를 이 어둡고 우거진 곳에 가두어둔 이유처럼 말입니다.”
“말도 안 돼.”
발리가 나지막이 탄식하며 얼굴을 찌푸렸다.
“대체 누가 그런 짓을 했단 말이야?”
“아홉 세계에서 가장 위대했던, 신들의 왕, 오딘입니다.”
짐승의 대답에, 발리와 나르피는 경악하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나르피는 손을 덜덜 떨며 발리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형, 정말 할아버지께서 그런 끔찍한 일을 하셨을까?”
“모르겠어, 나르피. 하지만… 만약 저 짐승의 말이 사실이라면… 우리에게도 조금의 책임이 있어. 우리는 요툰헤임의 왕자이자 동시에 아스가르드의 왕손이니까.”
발리는 굳게 다짐한 얼굴로 다시 짐승에게 고개를 돌렸다.
왕자는 조심스레 무릎을 꿇고 앉아 그것과 눈을 마주쳤다.
“네가 에시르 신들보다 더 이전부터 존재해왔단 이유만으로, 그 누구도 네 자유를 억압할 순 없어. 그게 아무리 위대한 신들의 왕이라도 말이야.”
발리는 두 손으로 짐승에게 달린 족쇄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그것을 있는 힘껏 세게 비틀었다.
그러자 엄청난 섬광이 일며 족쇄는 두 개로 끊어져 바닥으로 떨어졌다.
발리와 나르피는 짐승이 제 다리로 일어설 수 있게 도와주었다. 짐승은 비틀거리더니 이내 곧 네 다리로 온전히 땅을 디디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것은 깊게 고개를 숙이며 왕자들을 향해 절을 하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저하. 오늘이 소인에게 있어 가장 기쁜 날입니다. 세상이 종말을 맞이하더라도 저하의 친절을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괜찮아. 할아버지께선 멀리 떠나셨으니 이제는 걱정말고, 이 세상에서 자유롭게 살기를 바랄게.”
발리가 환한 목소리로 말했다.
“대지와 생명의 주인이신 우리 어머니께서도 너의 행복을 바라실 거야.”
“오, 저하의 어머니시라면…”
그것이 입술을 핥으며 관심을 보였다.
“요툰헤임의 왕비이자, 대지 위에 모든 생명을 지키는 위대한 여신이지. 아, 맞다. 우리 어머니는 이 숲에서 태어나셨어.”
발리가 말했다.
“어머니는 한 때 너도밤나무의 정령이셨거든.”
“이런.”
짐승이 입꼬리를 귀밑까지 찢어 올리며 혀를 내밀었다.
그것이 웃으며 말했다.
“정령의 몸으로 여신의 자리에 오르다니 저하의 말씀대로 정말 위대한 분이시군요.”
발리와 나르피가 뿌듯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다.
짐승은 그런 왕자들을 바라보며 천천히 말을 덧붙였다.
“그 정도의 분이라면 분명 죽음까지 다스릴 수 있겠지요?”
“뭐?”
발리가 짐승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것은 꼭 토끼가 제 앞에 있는 것 마냥, 눈을 번뜩이고 있었다.
“아, 저하의 표정을 보아하니, 아닌가보군요. 저는 그 분께서 미천한 정령의 신분으로 생명을 지키는 여신의 자리에 오르셨다길래, 당연히 죽음까지 다스리실 수 있을 거라 기대했습니다.”
발리와 나르피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짐승을 바라보았다.
"아쉽군요."
"뭐가 아쉬워?"
발리와 나르피가 짐승을 향해 동시에 물었다.
그러자 그것은 송곳니 사이로 혀를 내밀며 대답했다.
"그 분께서 죽음을 다스리실 수만 있다면 그 분의 시대가 영원할 것이 자명하기에, 저하의 은혜를 입은 자로써 아쉬워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어머니의 시대가 영원하다고?"
나르피가 눈을 깜빡였다.
"네, 또한 그 분의 시대 뿐만 아니라 여신의 부군이신 저하의 아버님의 시대 또한 함께 영원할 것입니다."
"잠깐, 그러니까 네 말은... 죽음을 다스리는 힘만 있다면 어머니와 아버지가 다스리는 요툰헤임이 영원하는 뜻이야?"
발리의 물음에, 짐승은 고개를 끄덕였다.
"한 시대는 계절과 같습니다. 봄날의 태양처럼 떠오른 시대는 꼭 여름날의 햇살처럼 영원할 것 같지만, 가을날의 바람 앞에 그 색을 잃고, 겨울날의 마른 가지처럼 쉽게 부서지지요. 이해가 되지 않으신다면, 저하의 조부이신 오딘을 떠올리시면 됩니다. 그 분께서도 살아 생전에는 아홉 왕국을 제 발 아래 두실만큼 강하셨지만, 죽음 앞에선 그저 한 줌의 흙으로 변해버리셨죠."
"나는 아직 무슨 말인 지 잘 모르겠어..."
나르피가 손가락을 깨물며 말했다.
"아, 소인의 무례를 용서하시지요. 저하를 위해서 좀 더 쉽게 설명해드리겠습니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위대하신 요툰헤임의 왕과 왕비 또한 때가 되면 죽음 앞에 무릎을 꿇고 저하의 곁을 영원히 떠나실 겁니다. 언젠가는 죽어버린다는 뜻이죠."
짐승의 표현은 굉장히 무례하고 직설적이었다.
하지만 허니와 로키가 언젠가 죽게 될 것이라는 말에, 왕자들은 짐승의 그런 태도를 이상하게 느낄 겨를이 없었다.
물론, 죽음은 당연한 것이나, 아직 나이 어린 왕자들이 받아들이기엔 너무 어려웠다.
오죽하면 나르피는 너무 놀란 나머지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발리 역시 눈물이 나오려 했지만, 꿋꿋이 참으며 말없이 동생을 꼭 안아주었다.
하지만 짐승은 왕자의 눈물 따윈 관심 없다는 듯 발목에 난 상처를 핥으며 입맛을 다셨다.
“소인의 말이 두 저하의 기분을 상하게 한 것 같아 마음이 불편합니다. 제게는 만물의 이치를 바꿀 힘이 없지만, 저하께 은혜를 갚는 의미로 제가 알고 있는 것을 알려드릴까 합니다."
"네가 뭘 알고 있는데?"
발리가 묻자, 짐승이 곧 스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죽음을 다스릴 힘을 얻는 방법 말입니다.”
그 말에, 왕자는 가슴 속 깊은 곳으로부터 알 수 없는 감정이 느껴졌다.
“그 말은 어머니와 아버지께서 영생을 살 수 있다는 말이야?”
“그렇게도 말할 수 있겠지요.”
짐승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곧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더니, 자신의 상처 난 발목을 단숨에 물어뜯었다.
검붉은 피가 하늘 위로 솟구치며 울창하게 우거진 나뭇잎 위로 우수수 떨어졌다.
발리와 나르피는 비명을 지르며 뒤로 넘어졌다.
하지만 짐승은 그저 피가 묻은 나뭇가지를 입으로 꺾어 발리에게 건네었다.
“내일은 만월이 뜨는 밤입니다. 달이 찾아오기 전, 여신의 입술에 이 가지에 묻은 소인의 피를 모두 떨어뜨리십시오, 저하.”
발리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짐승의 입에서 가지를 빼어 들며 물었다.
“하지만 만월이 뜨는 밤은 오늘이야.”
“저의 세계는 이 곳과 시간이 조금 다릅니다.”
짐승이 웃으며 말했다.
“정확히 하루의 반이 더 느리지요. 그러니 반드시 이곳의 시간으로 오늘 밤이어야 합니다.”
그것은 왕자들을 향해 우아하게 절을 하고는, 우거진 곳을 향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럼 소인은 본연의 이름을 되찾았으니, 이만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부디 두 저하께서 만수무강하시길 바랍니다.”
“잠깐만, 기다려! 네 본연의 이름이 뭔데?”
발리가 짐승의 뒷모습을 향해 물었다.
그러자 그것은 고개를 돌려 왕자를 바라봤다.
짐승이 입꼬리를 쭉 찢으며 대답했다.
“...죽음입니다.”
그렇게 그것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 날 밤은, 커다란 보름달이 아스가르드의 대지를 밝히고 있었다.
로키는 오랜만에 자신의 방 안 창가에 걸터앉아 멀리서 은은하게 빛나는 숲을 바라보고 있었다.
만월의 빛이 내려앉은 그의 얼굴에는 어쩐 일인지 근심이 가득해 보였다.
“웬일로 경치를 바라보고 있어?”
내가 그의 곁에 다가가 앉으며 물었다.
“아름다워서.”
로키가 대답했다.
나는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되물었다.
“방금 그거 나한테 한 말이야?”
로키는 나의 장난에 미소로 화답했다.
그는 웃고 있었지만, 여전히 어딘가 불안해 보였다.
“만월이네.”
나는 그의 표정을 살피며 말했다. 하지만 로키는 계속해서 침묵을 지켰다.
나는 그런 로키의 얼굴을 가까이 마주하며 말을 이었다.
“설마… 아직도 그 예언을 신경 쓰고 있는 건 아니지?”
“당신에게 내려진 예언이었어. 신경 쓰는 게 당연하잖아.”
로키가 어두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젠 걱정하지 말라니까. 노른이 예언한 날은 이제 다 저물었고, 난 지금 너랑 함께 있잖아. 무슨 일이 일어나고 싶어도 일어날 수가 없단 말이지.”
내가 그를 안심시키며 말했다.
내 말에, 로키의 얼굴이 순식간에 불만으로 가득 차올랐다.
“당신은 걱정을 안 해서 문제야. 그 정도가 지나쳐.”
“내가 걱정을 안 하긴 뭘 안 해.”
이번엔 내가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항상 발리와 나르피가 안전한지, 우리 영토는 무사한지, 또 네게 무슨 일은 없는지 항상 걱정한다고.”
“내 말은, 당신 스스로에 대한 걱정 말이야.”
“스스로에 대해서 걱정할 게 뭐 있다고.”
“그것 봐.”
로키가 완전히 창가 쪽으로 몸을 돌리며 길게 한숨을 쉬었다.
“당신이 그렇게 둔감하니 내 근심이 떠날 수가 없지. 내가 몇 배로 예민한 건 바로 당신 때문이야.”
그러면서 로키는 턱을 괸 채 입을 꾹 다물었다.
단단히 마음이 상했는지, 아무리 어깨를 찌르고 찔러도 로키는 절대로 옆을 돌아보지 않았다.
나는 그의 옆으로 다가가 바짝 몸을 대며 속삭였다.
“내가 왜 내 문제에 대해서 그렇게 둔한 줄 알아?”
그 말에, 로키가 나를 흘긋 쳐다봤다.
나는 싱긋 미소를 지었다.
“언제나 네가 날 지켜주고 있잖아. 그래서 나는 내 걱정 같은 건 안 해.”
그는 말없이 내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이젠 기분이 좀 풀렸어?”
내가 놀리듯 물었다.
“아니.”
로키가 차갑게 대답했다.
“정말 비싸게 구시네요, 전하.”
“그건 됐고, 발리랑 나르피는?”
로키가 빠르게 화제를 전환하며 물었다.
“막 잠드는 걸 보고 오는 길이였어. 폐하께서 가장 좋은 방을 내어주시겠다 했는데, 애들이 내가 쓰던 방에서 자고 싶다고 해서 그렇게 하라 했지.”
나는 게슴츠레 뜬 눈으로 로키를 바라보았다.
“온종일 둘이서 숲을 돌아다녀서 그런지 금방 잠들더라고.”
“하긴, 그렇겠지. 아니, 방금 뭐라고 했어?”
로키가 놀란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나는 화가 난 목소리로 말했다.
“이런 식으로 나를 따돌리겠다 이거지?”
“따돌리다니, 그런 서운한 말씀을….”
한순간에 태도를 바꾼 로키가 내 뺨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난 그저 왕자들의 기분을 생각해서…”
“나를 나쁜 어머니로 만들 수밖에 없었다, 이거야?”
“음… 오늘따라 밤공기가 참 좋군. 산책하기 딱 좋은 밤이야.”
내 시선을 애써 무시하며 로키는 예의 있게 자신의 한 손을 내게 내밀었다.
나의 용서를 바라며 그는 장난 가득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절대 거부할 수 없었다.
순식간에 기분이 풀린 나는 작게 웃음을 터뜨렸고, 이내 곧 로키의 손을 꼭 붙잡았다. 로키는 내게 입을 맞추며 자신의 사랑을 표현했다.
만월이 떠오른 그 날 밤, 우리는 그 어떤 예언조차 두렵지 않을 만큼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
글 쓰는 것보다 짤 찾는 게 더 힘들다... 담주에 돌아올게! 히들러들 흥해라!
[Code: 18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