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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23 2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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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알못ㅈㅇ



겨우 잠들긴 했지만 긴 휴식은 가지지 못했다. 반복되는 악몽에 눈을 떴다. 눈 주변이 불편해서 차가운 물로 얼굴을 씻어냈다. 물을 잔뜩 끼얹고 고개를 들어보니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이 엉망이다. 그늘이 진 눈에는 생기라는 것이 모두 빠져 마치 죽은 생선 같았다. 퉁퉁 부어 잘 떠지지 않는 눈에서 이물감이 느껴진다. 손가락으로 가볍게 눈두덩이를 눌러 비볐다. 매버릭은 옷장을 뒤져 적당히 단정한 옷을 찾았다. 옷을 갈아입고서 침실을 바라보았다. 제 자리를 비워두고 베개 대신 팔을 내밀어 준 채 옆으로 누워 잠든 모습이 안타까웠다. 그렇다고 거기에 다시 누울 생각은 들지 않았다. 침대에 곤히 잠든 아이스에게 들키지 않게 발소리를 죽여가며 방을 나왔다. 밖으로 나오니 복도 중간에 켜진 스탠드만 외롭게 빛을 내고 있었다. 방 안에 시계를 두고 와서 정확한 시간을 알 수 없었다. 복도 저 끝에 정사각형으로 난 창문이 어스 푸르게 빛나고 있었다. 이성이 남은 동안 고민을 했으나 시간이 어떻든 상관없단 생각을 했다. 지금을 해결해야 한다. 매버릭은 계단을 내려와 1층 로비에서 전화기를 들었다. 수없이 전화해서 이젠 메모지를 들지 않아도 되는 번호를 천천히 돌렸다. 다이얼이 제 자리를 향해 돌아가면서 태엽 소리가 나는 것이 조심스러웠다. 이 자리에 아이스가 있는 것도 아닌데 이 소리에 깨서 뒤에서 지켜보고 있을 것 같았다. 서둘러 전화를 걸고 수화기를 두 손으로 꼭 잡았다. 마치 기도하듯이 두 손으로 공손하게 잡고 눈을 질끈 감았다.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듣고 터져 나오는 울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저쪽에서도 당황한 듯 매버릭의 이름을 불러왔다.

“피터? 피터??”

“저……. 제발 저 좀 구해주세요.”

 

 

-

 

아이스는 무심코 옆을 더듬었다. 매버릭은 근무지 무단이탈을 했다. 아침에 옆자리가 빈 침대에서 홀로 깨어났을 때 이미 짐작한 바였다. 소집 명령이 떨어지면 30분 이내로 자대에 복귀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주어지는 관사와 사택이다. RIO를 잃은 안타까운 파일럿에서 순식간에 탈영병이 된 것이다. 그가 문제를 해결하기 보다 외면하고 회피하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 왜 그날 방문을 지키고 있지 않았는지 그를 껴안고 잠이 들었는지, 왜 한마디라도 더 해주지 않았는지……. 그날의 자신을 믿을 수가 없었다. 아이스는 뻔뻔스럽게 조교와 간부에게 매버릭이 통증을 호소해서 병가를 신청했다고 거짓말을 했다. 금방 들킬 것을 알면서도 숨겨주고 싶었다. 대신 병가 신청서를 써서 내고 나니 점심때가 되어있었다. 아이스는 식욕이 없었다. 식당을 뒤로하고 매버릭의 방으로 돌아와서 엉망이 된 옷장을 차근차근 정리했다. 열려있는 서랍은 긴팔과 두꺼운 옷들이 들어있었다. 겨울옷으로 보이는 것을 꺼낸 흔적이 보였다. 그리고 곱게 개켜진 스웨터를 보고 단 번에 알아차렸다. 제가 몰래 쇼핑백에 넣어둔 니트였다. 뭐가 그렇게 아까워서 입어보지 않았는지 가격표도 그대로 달려있었다. 늘어나거나 줄어든 흔적도 없는데 포근한 향기가 났다. 꽤 섬세하게 관리한 티가 났다. 아이스는 서랍장을 모두 열어봤다. 훈련소는 더워서 아예 입지도 못할 털옷들이 잘 놓여있었다. 모두 어머니가 골라준 옷 들이었다. 별장으로 휴가 갈 때마다 입었던 옷들을 아직도 가지고 다니는 모습에 목이 잠겼다. 매버릭은 겁이 많은 쥐 같았다. 사고가 나면 쥐구멍에 숨어서 나오지 않는다. 그의 속마음도 그랬다. 절대 속마음을 먼저 터놓는 법이 없었다. 어딘가 그늘이 있고 숨기는 것이 많고 문제가 생기면 그 문제에서 멀어져 눈을 감고 있었다. 네가 초콜릿을 욕심내던 밤에는 그 쥐구멍에 들어갈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너무 좁아서 다른 사람은 들어갈 수가 없는 모양이지. 언제쯤이면 그의 마음을 모두 알 수 있을까. 닿지 못한 감정들이 넘쳐흘렀다. 애달픈 이 마음을 어디 토할 곳이 없어 매버릭 대신 그의 옷을 들고서 조용히 숨죽여 눈물을 흘렸다.

 

-

 

현관은 매버릭이 느끼기에도 비좁았다. 박스가 벽 한쪽을 잔뜩 쌓여있었다. 박스 밖에도 종이를 엮어둔 서류가 산더미처럼 있었다. 현관만큼 비좁은 복도를 지나가자 내부는 넓었다. 통창으로 된 한쪽 벽면에는 멋들어진 야경이 펼쳐져 있었다.

“사무실에서 잘 때가 많아서 집을 잘 정리하지 못하네……. 많이 더럽지? 소파에 앉아있어. 커피로 줄까?”

“괜찮아요. 선생님.”

“피터, 얼굴이 하얗게 질렸어. 핫초코라도 마셔.”

우유니, 초콜릿이니 왜 이렇게 다들 뭐라도 먹이고 싶어 하는지 걔가 생각나서 피식 웃었다. 이미 컵을 두 잔 꺼낸 것을 보니 거절할 수 있는 타이밍은 지나버린 것 같았다. 서쪽과 달리 밤이 되자 쌀쌀했다. 두 손에 들고 오는 머그컵 위로 하얀 구름이 모락모락 올라왔다. 매버릭은 제 컵을 받아들었다. 손바닥에서 번지는 온기가 기분이 좋아 마시지 않고 그대로 들고 있었다.

“이러고 있으니 크리스마스 같네.”

“매년 크리스마스면 호텔을 예약하고 찾아오셨죠. 13살 이후로 저한테는 산타가 안 올 줄 알았어요.”

“착한 아이에게는 반드시 산타가 찾아간단다.”

“그때는 더 이상 아이도 아니었고 착할 이유도 없었으니까요.”

“피터……. 듀크가 들으면 슬퍼할 거야.”

선생님은 아버지의 친구라고 했다. 후원자가 따로 있는 척했으나 아버지와 그 학교를 같이 졸업한 친구들이라 한다. 기숙학교가 그렇게 많은데 왜 그곳으로 골랐냐 묻는다면 그들에게는 그곳이 정말 좋은 곳이어서 그랬겠지. 그들은 몰랐을 것이다. 고자질할 부모가 있는 학생과 없는 학생의 취급이 얼마나 다른지. 거기까지 원망할 생각은 없었다. 너무 뒤늦게 알기도 했고. 졸업 전에 알았다면 그 원망과 분노를 어떻게 해결해야할지 몰랐겠을 거다.

“정말로 제대할 거니?”

“네. 더는 자신이 없어요. 미사일 버튼도 못 누르는 파일럿은 비행대에 필요없어요.”

“조금 더 생각해보자.”

“아뇨, 됐어요. 저는 지는 건 죽는 거보다 싫어요. 비행은 더 이상 제가 제일 잘하는 게 아니예요.”

매버릭은 그의 말을 잘랐다. 미련이 남기면 후회만 더 커진다. 알고 있는 감각이라 지금 선택을 밀고 가기로 했다. 미련은 구스가 모두 가지고 가줄 거야. 미지근해진 핫초코를 입에 댔다. 달콤함 안에서 쌉싸름한 맛이 혓바닥을 파고들었다. 단맛은 허구였던 것처럼 사라지고 쓴맛만 남아 저도 모르게 혀를 찼다.

 

-

 

남서부는 벌써 추위가 몰아쳤다. 선생님이 나갈 때 옷을 빌려주셨지만 그런지 쌀쌀한 바람에 뼛속까지 시렸다. 선생님은 바쁜 분이셔서 그 뒤로 집에 오지 않았다. 저녁때면 전화로 안부를 물어왔다. 식사는 주변을 거닐다 보이는 가게에 들어가서 아무거나 시켜 먹었다. 저녁은 샌드위치를 사서 지하철 공원 앞에서 먹었다. 그런 날의 반복이었다.  통 유리창을 끼운 집이란 냉장고와 다름없었다. 해가 지면 내부에 있는 가구는 물론 공기까지 얼어붙었다. 혼자 있는 집에 난방 기구를 켜놓기가 어려웠다. 선생님이 그런 거 신경 쓰지 말고 내 집처럼 있으라 했지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가 아직까지 자신의 보호자를 자처하고 나서지만 그에게 더 이상 빚을 지고 싶지 않았다. 이불로 꽁꽁 싸매고 있어봤지만 추위는 가실 줄 몰랐다. 하루는 술이라도 마셔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집을 나섰다. 선생님의 사무실 아래에 있는바에서 술을 시키고 멍하니 밖을 바라보기만 했다. 일리노이의 야경은 멋졌다. 빛을 쫓아가는 건 생물의 본능인 걸까 야경에 홀린 듯 창가에 손을 댔다. 따뜻해 보이는 색과 달리 차가워서 기분이 나빴다. 매버릭은 다시 술잔을 기울였다. 한 병을 혼자서 다 비웠더니 숨이 가빴다. 한숨만 자꾸 흘렀다. 술기운이 잔뜩 오르자 걷고 싶어졌다. 추위를 피해 마신 술인데 이제는 또 열이 오르자 차가운 바람을 쐬고 싶어졌다. 매버릭은 주머니에 든 지폐를 적당히 내고 가게를 나왔다. 자꾸만 기울어지는 걸음걸이를 고쳐가며 비틀비틀 거리를 헤매였다. 밤의 거리는 빛으로 가득했지만 적막했다. 매버릭이 낮은 가드레일에 기대어 앉았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그때 무거운 소음을 내며 여객기가 낮게 날아올랐다. 술이 취해서 그런가 가깝게도 보인다. 근처에 공항이 있다는 게 실감이 났다. 소음이 사라지고 나니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왜 이러고 다녀.”

고개를 돌려보니 댄디하게 웃고 있는 사내가 있었다.

“구스…….”

“…….”

“구스, 나 이제 어떡하지?”

“네 주변엔 유령이 너무 많아.”

“많으면 어때. 네가 좀 알려줘……. 난 어떡해야 해.”

“일단, 이리 와.”

두 팔을 벌리는 모습을 보니 진짜 그가 돌아온 것 같았다. 꿈이면 어때. 보고 싶었다며 끌어안는 수밖에.

 

-

 

시끄러운 소리에 눈을 떴다. 머리를 울리는 이 고통은 숙취가 분명했다. 고통에 한몫하고 있는 이 소리를 줄여보고 싶었다. 아무리 찾아도 베개가 잡히질 않았다. 베개로 머리를 덮고 막아보려고 했는데 이상하게 몸이 불편했다. 어딘가 갇힌 거 같기도 하고 안락의자에서 잠든 거 같기도 하고. 정신이 들자 매버릭은 눈을 크게 떴다. 동그란 창문과 칸막이로 가려진 시트가 분명히 여객기 좌석이었기 때문이다. 술을 진창 마신 기억은 있다. 그리고? 그리고 여기까지 연결이 되지 않았다. 뭐야? 피트 미첼, 뭘 한 거야? 그러자 옆 좌석에서 머리 하나가 쑥 올라왔다.

“깼어?”

“아이스! 네가 여기 왜 있어?”

“왜긴, 데리러 왔지.”

“나 지금 이해가 하나도 되지 않는데 좀 길게 설명해줄래.”

“병가도 내일까지고, 곧 출정이야. 복귀해.”

반복되는 명령조에 매버릭은 인상을 구겼다. 그리고 마저 들려오는 목소리에 말문이 막혔다.

“내 윙맨은 너야. 나는, 너 없이 안 돼……. 뒤를 맡길 사람은 너뿐이야. 나만 사지에 몰아넣을 셈이야? 네가 도와줘.”

아무도 찾지 못하도록 꽁꽁 숨으면 너는 꼭 거기까지 찾아오곤 했다. 그때는 정말 왜 그러는지 모르겠더라. 귀찮아하는 게 느껴지지 않는 걸까. 그리곤 사람을 흔들어놓곤 했다. 사람의 온기를 모르면 외로움도 몰랐을 텐데.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친구는 손해 보면서 사귀기도 하는 거라고 했잖아. 아직 우리 친구잖아.”

아직이라는 말이 귀에 가시처럼 걸렸다. 아직이라고 하면 언제 끝나는 걸까. 그 말에 더 이상 반박하지 못했다. 맞아. 우린 아직 친구고, 피터 미첼은 톰 카잔스키에게 받은 것이 많았다. 친구가 도와달라고 하니까, 이번만… 이번만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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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로나 대신 ㅁ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