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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23 14:24
오하라의 고고학자들이 전설의 황금 섬을 찾았다. 그런데 섬의 황금을 전부 오하라에 숨겨두고 그들끼리만 부귀영화를 누린다더라. 이렇듯 암암리에 퍼진 불안의 싹은 파국을 예고했음이라. 애당초 누가 이 소문을 퍼트리고 불씨를 당겼는지는 중요치 않았다. 해적들은 물론 사람들 대부분이 이 소문을 믿어버렸다는 거다. 그도 그럴 게 당시만 해도 오하라의 고고학자들은 마리조아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고 있었다. 그들이야 심해에 파묻힌 유물을 발굴하고 포네그리프의 고대 문자를 원없이 해독할 수 있다는 게 기뻤겠지만 좋은 옷에 화려한 배, 마리조아에서 공양하듯 보내오던 재화는 어느새 헛소문을 진짜로 만들었다. 그렇게 수년에 걸쳐 불손한 분위기가 역병처럼 바다를 점령했고 라프텔 바다 밑을 탐사하는데 깊이 관여한 고고학자들이 하나둘 사라지기 시작한 것에는 그들의 사리사욕이 포함됐으리라. 때문에 단 하루만에 오하라가 폐허로 변한 그날, 그곳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니코 로빈은 오랫동안 외톨이로 살아왔다.

‘저 니코 로빈이라는 아이가 오하라의 유일한 생존자라고요? 츠루 중장님.’
‘그래, 벨메일. 사우로 중장이 폐허 속에서 찾아낸 아이다. 오하라 섬의 고고학자들이 숨겨둔 덕에 저 아이만 살았다더군. 아마 그들도 필사적이었겠지. …왜 섬 하나가 다 망가지도록 해군이 몰랐는지 원.’
‘그 주변 해군 지부도 전부 동시에 습격받았다면서요? 그래서 본부가 알아차리는 게 늦었다던데. 아닌가요?’
‘나는 그게 석연치 않단다.’
‘중장님은 워낙 예리한 분이니까요.’

벨메일의 이전 상관은 곧 있어 대참모직에 오를만큼 노련하고 머리가 비상한 인물이었다. 때문에 그는 츠루의 발언을 긍정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둘 사이로 로빈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두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이곳은 온통 귤나무뿐인 낙후된 섬마을이었고 츠루 중장은 낡은 주택 테라스에서 제 이전 부관과 차를 마시는 중이었다. 맞은편의 벨메일은 양옆을 반삭으로 밀고 나머지는 하나로 길게 묶은 바이킹 헤어가 인상적인 여성이었다. 그는 장교 시절, 츠루 밑에서 많은 전투를 치뤘는데 특유의 시원시원한 성격은 군생활의 종지부를 찍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전장터에서 부모를 잃고 울고 있던 여자아이 둘을 발견하고는 이 아이들의 부모가 돼주겠다며 고향으로 돌아갔으니 말이다. 군인으로서 창창했던 미래를 두고 나오는데도 그는 오히려 홀가분한 얼굴이었더랬다. 그러다 츠루는 거진 십년만에 벨메일의 연락을 받고 오게 된 거였다. 고작 열살에 해도를 그리고 바다 날씨를 정확히 예측하는 자신의 둘째 아이를 당신이 맡아주셨으면 한다는 연락을.




BBB 즉, 혈액뇌장벽이라고 하는 것은 뇌를 감싸는 특수한 보호막이다. 매우 높은 선택적 투과성으로 뇌를 포함한 중추신경계의 조절 기능을 혈액 내 잠재적인 위험물로부터 보호하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보면 이것은 뇌에 직접적인 약물 기전을 가로막는 최대 장벽이지만 제르마의 과학력은 이것을 뛰어넘었다. 제르마의 각성제가 즉각적인 유효성을 보이는 게 그 결과였다.

“그래도 아직 마리모 넌 괜찮아. 내가 방금 너한테 놓은 건 일차 주사로 대략 한 시간밖에 유효하지 않으니까 후유증도 그만큼 적을 거야. 문제는 지금 네가 손에 쥔 케이스에 남은 이차 주사인데 그건 일차 주사의 약효가 떨어지기 전에만 놓으면 돼. 그럼 제르마 병사들 기준으로 약 열두시간 동안은 최상의 상태가 유지된대.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인공적으로 배양된 제르마 병사들 기준이야. 놈들은 가장 최적의 상태로 설계돼 생산된 전투원이나 같아. 그러니 인간인 넌 놈들과 똑같다고 볼 수 없지.”
“난 너희 병사놈들보다 우수하니까?”
“그럴리가 있냐? 썪을 마리모!! 너 지금 꼴이 어떤지 알기는 해? 시체가 걸어다니는 것 같다, 자식아!”
“흠… 근데 이건 주사기 모양이 다르네?”
“일차는 혈관용이고 그건 피하지방에 놓는 거니까.”
“그래서 어디에 놓는 건데?”
“배나 허벅지 같은데 찔러넣으면! 야이ㅡ! 앗 뜨……!!!”

타인을 연민하고 동정할 줄 안다는 이유로 실패작이라며 친부에게 버림받았던 아이는 변한 게 없었다. 조로 역시 마음 여린 녀석임을 한눈에 알아봤으니 위험한 약물을 제 몸에 주입한 일에 죄책감을 느낀다는 것 또한 눈치챘다. 때문에 그는 침대 앞에서 복면을 끌어내리고 담배를 피워물던 녀석이 구구절절 늘어놓는 말을 귓등으로 넘겼다. 대신 필요한 정보를 듣자마자 볼펜처럼 생긴 이차 주사를 꺼내 허벅지에 찔러넣었다. 조로가 주사기 끝에 달린 누름대를 엄지로 누르니 숨겨져 있던 바늘이 튀어나와 천과 피부를 뚫었다. 바늘의 따끔함과 함께 약물이 주입되는지 그 주변이 뜨겁게 타는 감각이 느껴졌다. 이때 상디는 조로의 돌발 행동에 놀라 절로 난 큰소리를 틀어막다 담뱃불에 손이 데이는 등 난리도 아니었다. 그래도 불 붙은 담배를 허공에서 잡아내는 동안 끝내 무음으로 소란을 완수한 건 칭찬해줄 만 했다. 자기 식구 외에는 아무도 믿지 않는 젊은 왕은 숙소에 시종 하나 들지 못하게 했다지만 현재 건물 밖은 보초를 서는 해군이 빼곡했기 때문이다. 이는 도피와 크로커다일 두 사람이 숙소를 비운 동안의 조치였다.

“야이 미친 마리모 자식아! 무식하게 그걸 지금 찔러넣으면 어쩌자고……!”
“한 시간으로는 택도 없어. 오늘밤 안에 루피를 구하고 탈출시킨다, 요리사.”
“너 뭐 믿고 이러냐? 어? 따로 계획이라도 있어?!”
“탈출 계획이라면 나미가 세워뒀겠지. 나는 단지 일정을 오늘로 앞당기자는 것뿐이고 너는 내 의견을 저쪽에 전달하면 돼. 쉽지?”

침대에 걸터앉은 조로가 허벅지에서 뽑은 주사기를 뒤로 던지며 거만하게 말했다. 그런 놈을 아연실색해서 쳐다보던 상디가 이내 양손으로 머리를 싸매고 쪼그려앉았다.

“으아아아. 너 이자식! 너란 놈은 진짜! 이대로 푹 삭아서 곰팡이나 피어라, 썩을 마리모!”

상디는 사내자식이 저를 전보벌레 대용으로 써먹는 것도 용납되지 않지만 그럼에도 저 말대로 할 거라는 것에 분노했다. 동시에 조로의 반응은 위험한 약물을 주입한 일을 전혀 개의치 않음을 뜻하기도 했다.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음을 이해한다는 것 역시도. 하니 끝에 어떤 일이 번어져도 네가 죄책감 느낄 필요는 없다는 면죄부를 준 셈이다. 짧은 순간 뜻을 간파한 상디는 때문에 작게 소리치며 감정을 삭혔다. 루피를 구하고 탈출시키려면 하룻밤은 더없이 빠듯한 시간이었다.




만일 내일 있을 재판소장 임명식 및 피로연이 제때 진행된다면 크로커다일은 숙소에 남기로 했다. 조로의 보호 및 감시를 위해서였다. 군의관이 처치를 하는 동안 깃털 코트에 감싸인 채 팔 하나만 내놓은 조로는 도피의 품에 안겨 있었다. 군의관이 들어오기 전 침대 위에서 도피에게 두 손이 머리 위로 붙들린 채 강제로 수면제를 먹기도 했고. 하지만 희미하게 의식은 남아 있어서 그는 도피와 크로커다일이 에둘러 나누던 대화를 들었다. 때문에 그는 루피를 구하려면 오늘밖에 시간이 없음을 직감했다.

‘너 어차피 폐하 협박이 아니어도 나미한테 내 얘기 못했을 거잖아. 안 그래?’
‘…난 절대 여자는 안 울려.’

한창 쪼그려앉아 제 머리를 쥐어뜯고 있던 상디의 말에 조로는 그럴 줄 알았다는 양 씩 웃었다. 그래서 상디는 더 울적해졌다. 조로는 현재 한쪽 눈도 잃고 온몸이 울긋불긋한 멍자국에 목에는 크로커다일의 갈고리로 인해 졸린 흔적까지 있었다. 그리고 상디는 츠루 부대에 속한 나미,로빈, 우솝이 알라바스타의 십년 내란에서 조로와 인연을 맺은 것을 알았다. 약 이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루피 형제를 포함해 이들이 많은 추억을 쌓았다는 것도. 물론 발라티에에서 추억담을 들을 때의 상디는 조로를 계속 루피의 미녀 검사 애인으로 오해했다는 점이 있었지만. 어쨌든 이 모두를 알고 있는 이상 상디는 조로의 지금 모습을 나미나 로빈에게 알릴 수 없음이다. 그들이 얼마나 충격받을지를 알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송장이나 다름없는 녀석을 보노라면 상디는 목끝까지 숨이 막혀오는 기분이었다.

‘야, 마리모. 너 그냥 루피 찾으면 같이 도망가라. …나 끝까지 모른 척할 테니까.’
‘싫다. 난 로우한테 반드시 돌아간다고 했어. 날 믿어준만큼 배신하는 짓은 안 해.’

녀석이 우는 걸 보고 싶지 않아. 조로는 가장 진심에 가까운 말을 마음에 다지듯 삼켰다. 한치 망설임도 없던 대답에 상디는 아수라 백작이라도 된 양 정확히 두 개로 상반된 감정을 느꼈다. 마리모가 드레스로자에 간들 지금 꼴을 보면 제 명대로 살기나 할까 싶은 마음 반, 그렇다고 정말 루피와 달아나면 알라바스타나 비비는 무사할까라는 마음 반이었던 탓이다. 때문에 조로의 대답은 비비를 향한 걱정을 덜을지나 그 자신의 희생은 필연적이다. 만일 이 사실을 비비가 안다면 슬퍼하리라는 것 또한 알았던 상디는 지금에 와서 조로의 결정이 옳았음을 인정했다. 조로가 깨어난 뒤 발 빠르게 움직인 그는 현재 빈스모크 숙소에서의 저녁식사 자리에 있었다. 욘디의 데이트 요청을 크로커다일이 가문 대 가문으로 끌어들였을 때 도피가 상디를 걸고넘어진 건 당연했다. 지난날 꽃밭 사건으로 인해 상디가 제르마의 숨겨진 셋째 왕자라는 건 돈키호테 패밀리에게 들통난 상태였으니. 하지만 그런 자리에 또 다른 이들을 끌어들일 줄은 상디도 생각지 못한 일이다.

“세상에! 나미, 로빈?! 너희…?!”
“어머나! 비비 공주님께서 한낱 레이주님 애인들 이름까지 다 기억해주시다니 다정하셔라! 그치, 로빈?”
“그러게. 황송합니다, 비비 공주님.”
“어어… 아니, 난… 두 사람이야말로 전에 워낙 친절히 대해줘서 잊을 수가 없었어요! 이렇게 다시 보니 기쁠 수밖에요! 괜찮다면 두 사람 다 저를 그냥 비비라고 불러줬으면 해요!”
“비비…….”

음식이 세팅되는 동안 나란히 앉은 나미는 비비의 말에 감동한 얼굴을 숨기지 못했다. 직사각형의 길다란 식탁 양끝 상석에는 레이주와 도피가 자리했고 로빈과 나미는 레이주의 양옆에 위치했다. 레이주 일행이 한명 더 많은 탓에 나미가 비비와 나란히 앉게 됐고 말이다. 이중 상디는 도피의 좌측에 앉은 욘디의 옆자리였다. 욘디는 크로커다일과 마주보는 자리를 선점한 거였다.
식사가 시작되기 앞서 정장으로 환복한 상디가 나타난 타이밍은 다른 두 사람과 비슷했다. 먼저 나간 도피와 크로커다일이 늦은 데는 이유가 있었으니 각기 초대 손님이 있었던 것. 물론 이는 사전에 통보됐는지 테이블에 놓인 자리 수는 딱 맞았다. 그렇게 해서 크로커다일이 데려온 건 알라바스타의 비비 공주였다. 그녀는 약 한 시간 전에 운행을 마친 열차로 도착했다고. 동맹 관계니만큼 비비가 이번 행사에 참여하는 건 당연하건만 이를 간과했던 건 상디도 아차 싶었다. 너무 루피 일에만 몰두한 탓이리라. 때문에 나미의 눈치코치로 이유도 모른 채 입을 맞추는 비비를 보면서 상디는 마음이 한층 더 무거워졌다. 그의 바람은 온세상의 레이디들이 행복한 거였지만 필연적으로 따르는 희생은 씁쓸할 따름이었다. 설령 그게 본인이 원한 일일지라도 말이다.




‘이건 전보벌레. 그리고 이건 발신기. 외웠냐, 마리모? 이건 전보벌레, 이건 발신기.’
‘알았다고 뱅글 눈썹! 한번만 해도 알아들어!’
‘됐고 잘 봐라. 이 단추처럼 생긴 건 발신기, 등껍질을 뒤집어쓴 손바닥만 한 연체동물은 전보벌레. 무생물과 생물의 차이다.’

꽃밭에서 조로의 길치력을 몸소 체험한 상디는 항의에도 아랑곳 않았다. 젊은 왕이 콕 집어 저녁식사 자리에 오라고 했으니 상디는 빠질 수도 없었다. 이런 이유로 부득이하게 마리모 혼자 루피에게 데려다줄 안내인을 찾아야 했으니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자꾸 예상과 다르게 바뀌는 계획도 신경쓰였고. 상디의 오늘 계획은 저녁 식사 동안 조로가 루피의 위치를 파악하는 것까지였다. 이차 주사는 만약을 위한 대비책이었고. 세상 이치가 다 그렇듯 계획대로 흘러가는 일이 있겠냐마는. 그런고로 이쯤에서의 상디는 다 내려놓고 아이의 단도리를 잡듯 설명에 열중했다.

‘발신기는 루피 만나면 근처 어디든 안 보이게 붙여놔. 너는 전보벌레 잃어버리지 말고 꼭 품에 챙겨서 다녀라. 알았냐, 마리모? 발신기는 루피 있는 곳에. 전보벌레는 항상 품안에. 내가 방금 뭐랬지?’
‘발신기는 루피 있는 곳에. 전보벌레는 품안에. 됐냐?’
‘오, 좋아 마리모. 너도 최소한의 뇌는 있구나.’
‘이자식이 진짜…….’

조로는 이렇게 수모 아닌 수모를 받고서야 풀려날 수 있었다. 숙소를 몰래 빠져나오기는 수월했는데 상디가 전엔 몰랐던 슈트 기능을 보여준다고 하면서였다. 그는 망토로 감싸면 저 아닌 다른 사람도 감쪽같이 투명화시킬 수 있다며 자랑했다. 그러려면 자신을 안든 업든 해야지 않겠냐는 조로의 말에는 꽤 큰 충격을 받은 모양이지만 어쨌든 덕분에 수월히 빠져나왔다. 직후 조로는 당연하게도 혼자 순찰 중인 해군 병사를 기절시킨 뒤 옷과 신발 검을 챙겨 거리로 나왔다. 밤 시간대지만 에니에스 로비는 별칭에 걸맞게 대낮처럼 환했다. 그렇게 조로가 카쿠를 어떻게 찾나 고민하며 거리를 헤맬 때였다. 자기 구역을 벗어난 병사 여럿이 한쪽에 모여 웅성대는 소리가 들렸다.

“그 얘기 들었어? 오늘 차량기지에서 열차 점검 중에 사람 팔이 발견됏다며? 누에고치마냥 실에 돌돌 말려 있었다는데 짐칸 천장에 얼마나 오래 붙어 있었는지 팔이 아주 새까맣게 썩어 문드러졌다는구만.”
“사람이 아니고 마물인가 뭔가 하는 신종 괴수 팔, 인마! 그놈 특징 중 하나가 검은 피부라더라. 그것도 불에 새까맣게 탄 것 같은 색이래. 열차 점검 중에 그걸 발견한 놈이 내 친군데 그녀석 의무실로 실려갔대서 보고 왔거든. 이것 참 뭐라고 해야 할지…….”

무슨 꼴을 봤는지 초주검이 된 친구는 제대하고 고향으로 돌아갈 거라고 했다. 상부에서 발설 금지 명령이 내려졌는지 더 말하지 않았지만 친구의 퍼렇게 질린 낯빛을 떠올린 병사 역시 회의감이 들기는 마찬가지다. 상부에서 입단속을 시키는만큼 병사들 사이에 억측이 난무하는 것도 당연했고. 실로 조로가 거리를 헤메는 동안에도 거리에는 동요의 분위기가 넘실거렸다.

“그래서 친구한테 더 들은 얘기는 없어? 팔은 왜 거기 붙어있던 거래?”
“이건 그냥 내 추측인데…….”

다른 병사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묻자 친구를 보고 왔다던 남자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흰색 바탕의 정면에는 MARIN이란 파란색 글자가 박힌 캡모자를 쓰고 있던 남자는 매부리코가 특징적이었다. 조로는 똑같은 해군모를 깊게 눌러쓴 채 무리 뒤로 슬쩍 끼어들었다.

“어쩌면 신종 괴수가 먹이저장을 해둔 걸지도 몰라. 열차를 통해서 이 섬에 정체 모를 놈이 하나 섞여든 거지.”

매부리코가 제법 음산하게 내리깐 목소리로 말하자 집중해서 듣던 병사들은 야유했다. 상관에게 들키지 않으려는 소리는 작았지만 한껏 고무된 분위기가 식은 건 당연했다. 이야기의 중심에 있던 매부리코는 손을 내저으며 한층 다급한 소리를 냈다.

“헛소리가 아니라니까? 생각해봐들! 십여년 전 라프텔에서 벌어진 최후의 전투 이래 거기서 쏟아져나오는 괴수의 수는 줄었지만 대신 더 희한한 놈들이 출몰했던 것 말이야! 태풍을 몰고 다닌다는 므리칵만 해도 그 전투 이후에 나타난 놈이잖아! 마의 지대 역시 그 전투가 원인이라는 소문이 있고 또 절지류 형태의 괴수라거나 거미처럼 먹이저장을 하는 놈들처럼 이미 실제하는 건 어떻게 설명할 건데? 무엇보다 최후의 전투 이후에 사법의 탑에서 임무를 나가는 횟수가 잦은 건 기정사실이라고! 안 그래?”
“듣고 보니 그런 것도 같고…….”

열변을 토하는 매부리코에 주변 병사들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전부 익히 아는 사실들로 채워진 말은 설득력이 다분했다. 사법의 탑은 CP 9의 본부로 암약첩보기관이란 이름에 걸맞게 그 일원은 전부 배일에 쌓여 있었다. 하지만 최후의 전투 이후로 라프텔 너머에서는 괴수의 수가 줄어든 대신 대형종 또는 초대형종이 주로 출몰하고 있었다. 이로 인해 전투 병기로 특화 훈련된 CP 9의 임무가 잦아진 건 사실이다. 물론 일개 병사들은 사법의 탑을 거점으로 삼은 사이퍼 폴 뒤에 어떤 숫자가 붙는지 알지 못했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오가는 CP 9의 분위기에 압도됨은 당연했다. 때로 귀환한 그들을 보노라면 피칠갑이 돼있다든가 남은 병사들이 거대한 것의 사체가 들었음이 분명한 짐을 옮겨야 한다든다 하는 일이 분분했던 것도 맞았고. 매부리코는 이런 정황들에 비추어 근거 없는 가설을 세운 거였지만 그럴싸한 건 사실이었다.

‘오… 저 말이 진짜라면 나도 한번 보고 싶은데?’

매부리코의 말이 진실이라는 가정하에 괴수들의 성역이라 불리는 삼대 섬 중 하나를 침입한 놈이라면 매우 강할 것이다. 귀족 반정 때 로우가 빼돌린 마물 팔을 도피가 가져왔다는 걸 몰랐던 조로는 어느새 매부리코의 얘기에 말려들었다. 루피를 구하고 약발이 떨어지기 전에 이곳에 숨어든 괴수와 붙어보고 싶다고 말이다. 조로가 타오른 승부욕에 몸이 근질거리는 걸 느낄 때였다.

“우와악!”
“어이구야!”

귀신처럼 등을 덮치는 산들바람에 조로가 두 손에 검집과 손잡이를 잡고 가로 들었다. 조로가 검집에서 반쯤 꺼낸 검을 이마까지 들어올리니 검날은 상대의 턱밑에 닿았다. 일이 벌어진 뒤에야 눈치챈 병사들이 요란스레 총칼을 빼들고 둘러쌀 때 소란의 중심에 선 네모 각진 긴 코의 남자는 태연히 손을 들어 분위기를 진정시켰다.

“어, 어, 언제 여기에…….”
“내가 너무 기척 없이 다가와서 놀란 모양이구먼.”
“저, 저 해병은 누구…….”
“아아, 이자는 신경쓸 것 없어. 내가 찾던 병사니까. 그래도 다들 얘기는 그쯤하고 본분은 확실히 해줬으면 하는데. 안 그런가?”
“예, 옛! 시정하겠습니다!”

매부리코가 대표로 큰소리와 함께 거수경례를 붙이니 다른 병사들도 무기를 내려놓고 동참했다. 귀가 따가워지는 소리에 한 눈을 찌푸린 조로가 검을 거뒀다. 목까지 지퍼를 잠근 저지 위로 정장 재킷을 걸친 카쿠는 머리에 눌러쓴 캠모자까지 온통 검은색이었다. 그래서 더 위압적으로 느껴지던 녀석에 병사들은 잔뜩 얼어 있었다. 카쿠는 그런 이들을 무시한 채 조로의 손목을 낚아채듯 잡아 자리를 벗어났다. 건물이 즐비한 골목을 돌고 돌아 한참을 움직이고서야 멈춘 카쿠는 그제야 잡은 손을 풀고 해군 병사 차림의 조로를 훑듯이 봤다. 몇달새 모습이 많이 변한 이를 보면서 그 역시 할 말을 잃기는 마찬가지였다. 덕분에 여태 별생각 없던 조로도 자신의 모습이 그렇게 이상한가 되짚게 됐다.

“그동안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아무 일도 없었어. 기분 나쁘니까 그만 쳐다보지?”
“그렇게 말해도 누가 믿겠나?”
“너야말로 날 어떻게 찾은 건데? 내가 여기 온 것도 몰랐잖아.”

말 그대로였다. 도피가 조로를 꽁꽁 싸매고 데려온 이유가 이것이었으니. 도피의 눈에 조로는 천둥벌거숭이 같은 놈인지라 보이는 곳에 두고 감시해야 마음이 놓이지 싶었다. 그래서 무리해가며 데려온 거였다. 비록 조로의 믿을만 한 정보원의 정체는 몰랐지만 접선한다면 온천 섬 또는 사법 섬일 게 분명하다는 것도 예상했고. 하지만 이런 도피의 행동방식을 파악한 이가 있었음이다.

“로우 왕자한테 네가 이쪽으로 가고 있으니 찾아달라는 연락을 받았구먼. 네가 움직이기 어려울 거라는 말도 들었고.”

로우라는 말에 조로의 머리가 들린다. 카쿠는 로우와 키가 비슷해서 조로는 고개를 위로 들어야만 얼굴이 보였다. 그 덕에 목을 가로지르는 멍자국이 선명히 드러나니 카쿠의 시선이 쏠렸다. 그는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펼치며 말했다.

“안 그래도 오늘 빈스모크쪽에서 저녁식사 초대를 받았다는 얘길 듣고 숙소를 찾았더니 방이 비어있더군. 그래서 자넬 찾는다고…….”
“로우는 잘 있지? 네가 듣기에 멀쩡해보였어?”
“글쎄. 나도 이틀 전에 받은 연락이라. …뭐, 좀 많이 괴로워보이기는 했지. 발정기라 그렇다는 말은 들었구먼.”
“많이 괴로워했어?”
“용케 제정신은 유지하더군.”

형질인자간의 상호작용, 특히 발정기 중의 상관관계라면 카쿠도 대강은 알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조로가 로우를 두고 여기 왔다는 건 많은 생각이 들게 했으나 카쿠는 내색하지 않았다. 남의 일에 함부로 왈가왈부하는 성격도 아니거니와 조로의 모습을 보자면 그를 탓하고픈 마음도 사라졌다. 대신 조로의 목을 가로지르는 멍을 가리려 손수건을 둘러매준 그는 불과 몇달 전만 해도 멀쩡했던 이의 모습을 떠올렸다. 목 뒤로 손수건의 매듭을 지은 뒤 한발 물러난 카쿠는 기억 속 모습과 많이 달라진 조로를 보면서 매우 난처한 상황에 처했다. 그의 원 계획은 루피가 있는 감옥이 표시된 지도를 조로에게 넘기는 것까지였다. CP 9의 일원으로서의 책임과 더이상 동료를 위험에 빠트리는 짓은 할 수 없었으므로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여기까지였다. 한데 조로의 달라진 모습을 보자니 루피에게 한번 목숨 빚을 진 사람으로서 갈등하게 되는 것이다. 아직 조로가 멀쩡했던 지난 만남에 녀석을 데리고 나왔다면 괜찮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고. 이는 지금 조로의 모습을 본 뒤 루피가 어떤 감정을 느낄지 염려하는 마음이었다. 그는 아쿠아라구나가 몰아치던 워터세븐에서 밤새 등을 맞대고 싸운 동료 아니었던가. 섬에 몰아닥친 폭풍우 속에서 갈레라 컴퍼니를 집어삼키려던 지하 세력과 하늘을 뒤덮은 마물 무리까지. 지상에 강림한 지옥이나 다름없던 그 밤을 카쿠는 루치와 루피, 두 사람과 함께 헤쳐나왔다. 그리고 드디어 해가 비쳐들던 고요한 아침에 오롯이 서있던 세 사람은 만신창이가 된 각자의 몰골을 보며 웃지 않았나. 몸은 당장 까무라쳐도 이상하지 않을만큼 엉망이었지만 카쿠는 물론 루치 역시 태어나 그렇게 속이 후련하게 웃어본 적이 처음이었다. 또한 이것이 밀짚모자를 쓴 녀석 덕분에 벌어진 조화라는 걸 카쿠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여태 녀석이 보여준 사진을 기억하지 않았나.

‘내 색시야. 예쁘지?’

조로가 있는 쪽 테두리만 유난히 닳고닳은 사진을 꺼내든 루피의 얼굴에는 그리운 미소가 가득했다. 그리고 현재, 감긴 왼쪽 눈을 세로로 가로지르는 흉터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카쿠는 주머니 속의 지도를 있는 힘껏 움켜쥐었다.









한조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