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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애들 좀 만나러가면 안될까?”
수화기 건너 아무런 답장도 없었다. 휴의 심장만 귀에 쿵쿵 울렸다. 한참 후, 상대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갑자기 왜?”
전처의 목소리에는 미묘한 경계심이 담겨 있었다. 그가 갈때까지 갔다고 느끼는걸까.
“안부를 전해듣는것도 이제는 좀.. 부족한 것 같아.”
이미 애들도 있으니 그와 엮일대로 엮였지만 휴가 불편하기만 했다. 주기적으로 돈을 보내주는게 고마웠지만 일정 액수만 애들을 위해서만 썼다. 더 이상 돈에 손을 대는건 왠지 꺼림칙했다.
“애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직접 보고 싶어. 그게 다야.”
그는 늘 갑작스럽고 이해하기 어려운 부탁을 해왔다. 하지만 이번에 그의 목소리에는 간절함이 서려 있었다. 꽃집을 하면서 그는 꾸준히 연락을 해왔었다. 그는 정말 이번에야말로 바뀐걸까.
“쉽지는 않을것같은게.. 애들도 갑자기 만나면 당황할거야.”
그는 이미 애들에게 이방인이다. 전처는 휴의 과거에게서 위험한 영향을 받을까 두려워 떠난지 오래였고, 아이들의 기억력이 휴를 얼마나 담고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알아. 일단 짧게, 인사만 하고.. 그 뒤로도 내가 노력할게.”
휴는 자신의 말이 설득력이 있기를 바라며 조심스레 이어나갔다. 오랫동안 기다려온 진정한 변화의 기회가 간절했다.
라이언과의 관계에는 명확한 유통기한이 있다. 라이언에게 안겼을때는 아무생각도 들지 않는 무아지경에 빠졌지만, 자고 일어났을때의 자괴감과 수치심은 오래 견디기 힘들었다. 비참하게 이혼한 애아빠가 젊은 남자랑 뒹구는 꼴은 정신건강에 좋지 않았다.
라이언의 온기는 일시적인 휴에게 진통제를 놔줬지만, 근본적인 문제 해결에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 역시 그는 쾌락에만 중점을 둔 가벼운 만남은 유지하는걸 어려워했다.
“널 만나는게 애들한테 좋을까? 시간이 많이 지났어, 너도 잘 알겠지만.”
“너무 오래됐잖아.. 그저 얼굴이라도 보고 싶어서.”
가족들을 만나는건 그에게도 어려운 일었다. 자기 잘못으로 파탄난 가정을 마주하는 일이었고, 아빠의 부재를 책임져야했다.
시간이 너무 많이 흘렀다. 그가 가진걸 전부 쏟아붓지 않는다면 이제 남이 되어도 이상하지 않을 관계에 미련이 넘쳐흘렀다.
“한 번만 기회를 줘. 더 귀찮게 굴지 않을게.”
전처가 거절한다면 그걸로 끝이다. 휴가 기도하듯이 눈을 감았다.
그 순간, 전처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알겠어. 하지만 조건이 있어.”
“무슨 조건이든 상관없어. 뭐든..”
“애들이 너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겠어. 그러니까, 짧게. 그리고 아이들이 원하면.. 그때 상의해보자.”
휴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에게는 그 희망만으로도 충분했다.
“2주 정도 뒤에 와.”
“고마워. 정말로.. 고마워. 내가 잘할테니까..”
“더는 실망시키면 안 돼.”
그녀의 마지막 말은 단호했지만, 휴는 그 안에 담긴 조심스러운 기대를 느낄 수 있었다. 이제는 그가 그 기대에 부응할 차례였다.
꿈처럼 행복했던 과거가 손가락에 닿을 정도로 가까워졌다.
“작업을 좀 미리 받아뒀어요.”
“그래?”
휴의 유독 기분이 좋아보였다. 무언가 다른 행복에 웃는 그를 보자 라이언 역시 웃음이 스며나왔다.
“일 잘하네. 장하다.”
“다 당신한테 배웠는데요, 뭘.”
휴의 칭찬에 라이언은 올라가는 입꼬리를 숨기지 못했다.
“은행 작업 끝나고 2주 뒤 정도, 그쯤 작업할거예요.”
휴는 갑자기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서있었다. 가족들과 약속한 날이다. 몇 달을 매달려 얻어낸 기회를 날리기는 싫었다.
“왜 그래요?”
“그때 내가 시간이 안될것같아.”
“왜요, 꽃집에 급한 일이 있어요? 결혼식 출장이라도 잡혔나봐요?”
라이언은 웃으며 말을 던졌지만 경직된 웃음이 같이 섞여나왔다. 그는 휴의 대답을 원하지 않았다.
“아냐, 그냥..”
라이언은 동업자를 잃기 싫은지 휴의 일정에 변수가 생기면 예민해졌다. 쑥쓰러워하며 휴가 턱을 긁었다.
“애들 좀 보러 가려고.”
라이언에게는 이미 못볼꼴까지 다 보여줘버렸으니, 한심한 자기 모습이 차츰 좋아질거라는걸 어느정도 자랑해보이고 싶었다.
손에 쥔 도면을 정리하던 라이언의 손이 잠시 멈췄다. 그가 눈을 치켜뜨고 휴를 바라봤다.
“전처가 싫어하지 않아요?”
“기회를 주겠대. 앞으로 내가 더 잘해야지.”
“아, 정말 잘 되어가나보네요..”
잘됐네, 잘됐어.. 라이언이 혼자 낮은 목소리로 되뇌었다.
“미안한데, 다른 사람 구해. 너 정도면 같이 작업하고 싶어할 사람들 많을거아냐. 유능하던데.”
“다른 사람? 당신만한 사람은 없는데..”
“나도 돌아가야지..”
혼잣말인듯 휴가 무심코 중얼거렸다. 작업 일정에 빈자리가 생겼으니 자신을 대신할 일손을 찾아야 할거다.
“너 이제 잘하잖아. 사람 찾는것 정도는 잘 해결할거라 믿어, 이렇게 성장했는걸.”
라이언의 이마가 꿈틀거렸다. 라이언은 무슨 말을 하려다 입을 마저 다물었다. 그는 터져나오려는 무언가를 힘겹게 삼켜내고 싱긋 웃었다.
“알았어요. 아쉽지만 제가 알아서 하죠.”
은행 작업은 휴가 딱 질색하는 강도 작업이었다.
그는 무장강도 작업의 혼란스러운 분위기를 싫어했다. 사람들이 겁에 질려하는 모습을 보면 어떤 멍청이들은 자기가 뭐라도 된줄알고 도가 지나친 폭력을 쓰기도 했다.
그 꼴이 보기가 싫어 그는 현장에서 힘을 쓰며 뛰어도 손색없을 몸을 가졌어도 굳이 기술직을 자처했다. 뒷전에 앉아있어도 뭐라할 라이언이 아니었지만 최대한 적은 인원수로 작업하기에는 일손이 부족했다.
지금껏 여러 작업을 같이 하다 2주 뒤에 빠진다하니 실망했겠지. 떠나기 전까지 휴는 라이언이 하라는대로 다 해주고 싶었다.
강도 작업이니 라이언이 동업자 몇명을 더 부르기로 했다. 막대한 현금을 다루고 겁을 줄 아는 동업자, 전부 다 휴가 은퇴하고 나서 일을 시작한 사람들이었다. 일 한번 하고 두번 다시 보지 않을 사람들이었다.
“당부할게 있는데, 돈다발은 가급적 담지마. 다발 안에 추적 장치가 있을수도 있고..”
“알겠어, 영감. 잔소리는 그쯤해.”
낯선 동업자가 휴의 설명을 끊자 그는 한숨을 쉬었다. 점점 더 커져가는 작업의 규모에 살짝 불안하기도 했다. 새파랗게 어린 동업자가 버릇이 없어서 그런지, 감이 좋지 않았다.
은행 앞에 차 한대와 오토바이 한대를 두고 라이언의 통솔하에 사람들이 모였다. 모자를 푹 눌러쓰고 선글라스를 낀 라이언은 까딱 인사를 하고 얼굴에 두건을 둘렀다.
“90초 이내에 끝냅시다.”
동업자들이 은행에 들어가고 곧이어 불협화음이 흘러나왔다. 총성이 울리고 비명이 울려펴지자 휴가 괴로운듯 인상을 썼다. 이렇게 해서라도 가족들 되찾으면 의미가 있을까, 의문이 들기도 했다.
“.. 강도 사건 발생, 메인 스트리트 은행. 용의자 다수, 무장 가능성 있음. 지원 요청합니다. 오버.”
“보고 받았습니다. 메인 스트리트 은행 강도 발생. 즉시 지원팀 출동합니다. 오버.”
90초가 시작되었다.
휴에게 경찰 무전을 도청하는건 일도 아니었다. 무전은 경찰들의 동선을 일러줬다. 그는 귀안에 연결된 장치로 무전을 들으며 상황을 살폈다.
40초가 지나자 은행 안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동업자가 은행 경비원의 손을 꺾으며 더 강하게 압박하려하자 휴가 이를 갈며 으르렁댔다.
“그쯤해, 지나치잖아.”
불길한 예감대로 새로운 동업자들은 허세를 부리며 난리를 피우는걸 좋아했고 생각보다 시간이 지체되기 시작했다.
“.. 고속도로 순찰팀 지원 요청 완료. 고속도로 북쪽 진입로 차단 완료. 오버.”
돈을 가방 여럿에 쓸어담는데 30초.
“가야돼,”
도로가 막혔다. 사이렌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당장!”
10초를 남기고 휴가 고함을 질렀다.
동업자들이 차로 뛰어가려 하자 휴가 막아섰다.
“차로는 안돼. 통제 끝났어.”
“제가 시선을 끌게요.”
라이언이 오토바이에 시동을 킨 뒤 묵직한 돈가방을 휴에게 건넸다. 휴의 눈빛이 흔들렸다.
“가요, 괜찮을거니까.”
거짓말이었다. 휴는 라이언의 거짓말을 알고도 넘어가줬다.
“몸 조심해.”
라이언이 일부러 시끄럽게 엔진을 굴렸다. 멀리 보이는 경찰차들 사이로 오토바이가 지나가자 대열이 흩어졌다.
가방 안에는 돈다발 뭉치가 섞여있었다. 휴는 한숨을 쉰 뒤 급히 가방을 잠궜다. 동업자들과 흩어져서 달리기 시작했다.
“도보 추격 중. 용의자 12번가 서쪽 방향으로 이동. 오버.”
“확인했습니다. 추적팀 추가 지원 보냅니다. 오버.”
“용의자 12번가에서 체포. 오버.”
젠장, 한명이 잡혀버렸다. 라이언일까? 오토바이를 탄 사람이 잡혔다기엔 짧은 거리다. 뒤에서 들려오는 사이렌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인근 지원팀에 통보 완료. 계속 추격 바랍니다. 오버.”
휴는 달리며 계속 무전을 확인했다. 이쯤되면 페이스 조절이 중요했다. 잡힌게 다른 사람이라면 한번만 같이 일하는 동업자라 정보를 많이 알리가 없다.
괜찮다. 폐가 터질듯한 고통에 목이 타올랐지만 뛰는걸 멈출 수 없었다.
그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골목을 돌았다. 발 밑에서 아스팔트가 신발 밑창을 긁어내는 소리가 울렸다.
“용의자가 도보로 도주 중입니다. 10번가 골목으로 진입. 용의자는 남성, 약 190cm, 흑발, 색소팩 소지. 오버.”
나인가? 동업자들이 다 비슷한 인상착의라 헷갈렸다. 색소팩? 휴는 다급하게 달리며 10번가 골목을 지나 9번가로 진입했다. 땀이 눈으로 흘러들어가 시야가 흐려졌지만, 그는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퍽 하고 염료가 터졌다. 살짝 열린 가방 속, 돈다발 사이에 끼워져 있던 색소팩이 터지며 휴를 덮쳤다.
“젠장..!”
일정 거리를 지나오면 염료가 터지는 추적 장치다. 염료에 최루 성분이 들어있는지 눈이 따끔거리고 숨이 막히기 시작했다. 붉은 연기가 그를 지옥에 떨어뜨리기라도 하는듯 휴를 집어삼켰다. 그는 비틀거리면서도 몸을 움직이려 했지만 다리에 힘이 빠지면서 그대로 곤두박질쳤다.
곧이어 눈 앞에 총구가 들어왔다. 시야가 흐려졌다.
“본부, 용의자 3명 체포 완료. 현장 상황 종료. 오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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