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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23 00:53
루스터행맨 루행
로판 세계관 + 근대 유럽풍 루행 보고 싶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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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맨의 겨울은 유난히도 길었다.
행맨은 태어나면서부터 저주를 받고 태어났다. 아니면 저주로서 태어났다고 함이 맞을까.
세러신 가문의 사제는 제이크의 탄생예언으로 그가 가문의 대를 끊을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그러니 어찌 제이크에게 봄이 오겠는가.
제이크는 외지에서 온 보모에게 쭉 맡겨져 길러졌고, 가문 내에서의 입지 역시 매우 미약한 편이었다. 세러신 교 사제의 예언은, 적어도 세러신의 영지 내에서 강력한 힘을 발휘했다. 그의 가문이 후원하고, 그리고 가문의 영지에서 굳게 믿어지던 세러신 교의 모든 교인들은 그를 배척했다. 설사 그것이 제이크의 부모님일지라도. 그의 어머니는 저주의 주인공을 낳았다며 스스로를 경멸했고, 그의 아버지는 제이크를 저주의 도구로써 온전히 그를 몰아내는 데에만 여력을 쏟았다. 하루는 폭력으로, 또 하루는 경멸로, 다른 하루는 무시로 그의 아버지는 제이크를 몰아내고자 했다.
외지에서 왔던 그의 보모가 세러신 교의 교인이 되는 바람에 새로운 보모가 그를 찾아오기 전까지,
제이크의 겨울은 너무나 길게 느껴졌다.
-
제이크의 봄을 다시 되찾아 준 건 새로온 남자 보모였다. 그는 제이크의 일관된 냉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에게 온정을 베풀었다. 저기 멀리, 수도에서 공부하고자 했지만 입시에 실패했다는 젊은 남자는 아직 어리고 여린 아이에게 먼저 손을 내밀어주었다.
"제이크 님, 오늘은 밥이 따뜻하네요. 한 숟갈이라도 드셔보세요ㅡ, 네?"
"...."
"제이크 님, 날씨가 좋은데 우리 피크닉이나 가볼까요? 뒷마당에 예쁜 꽃이 폈더라구요."
"...."
"제이크 님, 안녕히 주무시고 악몽을 꾸시거든 절 불러주세요, 아시겠죠?"
"...."
하루, 이틀... 한달이 넘도록 변하지 않는 태도에 제이크의 냉대는 허들이 조금 내려가, 이제는 고개짓으로 간단히 소통하는 정도까지는 이르게 되었다. 보모는 기뻐하며 제이크의 이름을 닳도록 불러댔다. 어느 순간, 제이크는 깨달았다. 이 사람이 불러주는 이름만이 자신의 유일한 이름이었다는 것을.
저주의 아이,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새끼, '그 놈'...
그를 이르는 많고 많은 말중에 그 보모만이 그를 이름으로 불러주고 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야 알아차린 것이다.
-
새로운 보모가 붙은 지 꼬박 6개월만에, 제이크는 그에게 처음으로 질문했다.
".....저기...."
"허억.... 지금 저 부르신 거예요?"
퍽 즐거워하던 보모는 자세를 낮추고 제이크와 눈을 맞추었다.
"어떤 일 때문에 부르셨나요?"
"......이름......"
"이름? 아! 제 이름이 궁금하셨군요!"
고개를 꾸닥거린 제이크가 보모를 바라보았다. 보모는 기쁘다는 듯,
"제 이름은 브래들리 브래드쇼랍니다. 브래들리, 라고 불러주시면 돼요!"
".....브래들리....."
"네, 제이크 님"
제이크는 눈을 맞춰오는 그에게 말없이 손을 내밀고 그의 큰 손을 꼬옥 잡았다.
"....잘 부타케...."
아직은 조금 짧은 혀로 그는 첫 인사를 건넸다. 그가 브래들리와 만난 지 장장 6개월 7일만의 성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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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래들리가 처음 세러신 가문에 들어왔을 때 처음 든 의문은, 어떻게 저렇게 작은 아이에게 그런 핍박과 경멸을 하는지. 였다. 가문의 종교라는 풍습은 대가문만이 남아있을 뿐, 이제는 대부분의 영지에서 거의 사라진 풍습이었다. 마찬가지로 '브래드쇼' 가문의 차남으로 자랐지만, 가문의 종교는 역사서에서나 봤던 브래들리는 첫 대면 이후 큰 낙담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가 모시게 된 제이크 세러신은 아직 어리고 여렸지만 그를 둘러싼 악의는 너무 짙었기 때문이다. 제이크는 아무 말도, 아무 표정도 짓지 않은 채 그저 그 공간에 존재하기만 하였다. 아직 아이에 불과한데, 어째서. 브래들리는 전대 보모가 정리해놓은 자료를 훑어보다 그만 말을 잃었다. 외지에서 왔다가 세러신 교에 물들었다던 전 보모는 제이크의 신뢰를 철저히 무너뜨렸고, 제이크는 무너져 내렸다.
"앞 길이 막막...하구나"
브래들리가 이때까지 돌봐온 아이와는 차원이 달랐다. 말썽피우는 귀족 아이는 많이 봤어도, 이런... 일을 겪는 아이는 없을 테니까. 가문으로부터 철저히 배제된 제이크는 볕이 잘 들지 않는 지하실 같은 방에, 차가운 밥, 단벌신사로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몸 구석구석에 남은 폭력의 흔적까지, 브래들리는 성인된 도리로서 할 수 있는 일부터 시작했다.
늘 볕이 안 드는 차가운 방에는 커튼을 싹 걷어 햇빛이 들게 하고, 차가운 밥을 주는 식당에 항의해 따뜻한 밥으로 바꿔오곤 했다. 물론 제이크는 대부분 밥보다는 멀건 수프나 한 그릇 먹을 뿐이었지만. 보모가 자리를 비울 때마다 행해지는 폭력의 상처는 제때 치료하고, 이미 늦은 상처에도 연고를 발라 새 살을 돋게 했다. 새로운 옷도 많이 사고 싶었지만, 제이크 앞에 배당된 돈은 한 푼도 없어 브래들리의 월급에서 조금씩 돈을 모아 옷도 한 두벌 더 마련할 수 있었다.
그 사이 제이크의 변화가 시작되었다. 제가 하는 일이라고는 먼저 말을 건네는 것뿐인데도, 어디서 마음을 바꾼 건지 아무런 표정도 없던 아이가 조금씩 표현을 시작했다. 시작은 고개의 끄덕임부터. 좋다, 싫다를 표현하는 대로 들어줬더니 조금 더 표현이 다양해졌다. 고개를 끄덕이면 좋다, 고개를 저으면 싫다. 아플 때는 미간을 찌푸리고, 무서울 때는 한발짝 내딛어 자신의 뒤로 숨는 것으로.
정말 좋을 때는 작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고, 정말 싫을 때면 울상이 된 채로 고개를 저었다. 제이크의 표현은 다양해졌고 끝내 말을 시작했다.
처음 제이크가 한 말은 질문이었다. 나의 이름이 무엇이냐고, 이름을 답해주자 잘 부탁한다며 어설픈 인사를 건네왔다. 그의 인사가 어설펐던 이유는 그가 누군가와 대화하는 게 오랜만이기 때문이리라.
브래들리는 그의 어색한 인사를 받아주고, 살포시 잡힌 손을 끌어 제이크를 품에 안았다. 눈이 동그래진 제이크는 따뜻한 품에 갈등하다,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
제이크는 브래들리의 보호 하에 무럭무럭 자라났다. 그에게 폭력은 일상이 되었지만, 브래들리의 보호 또한 일상이 되었다. 브래들리는 제이크와 바쁘게 나다녔다. 하루는 산으로, 하루는 정원으로, 또 하루는 몰래 바다를 보러. 제이크가 점점 시야에서 보이지 않자 폭력 또한 많이 줄었다. 제이크는 딱 이대로만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모두에게 잊혀지고, 브래들리와 함께 살고 싶다고.
제이크가 좀 더 자라 중학교 갈 나이가 되자, 브래들리는 아무래도 안되겠다며 세러신의 가주를 찾아가고 싶다고 했다. 제이크는, 울면서 그를 말렸다. 학교 따위 가고 싶지 않다고, 브래들리만 있으면 된다고. 브래들리는 난감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제이크 님, 제가 할 수 있는 부분이 있고 없는 부분이 있습니다. 초등까지의 교육은 어찌저찌 기본적인 부분을 제가 교육했으나... 학교에서 배울 수 있는 내용은 학교에만 있는 법입니다. 중학교에서 제이크 님은 무한하게 성장할 거예요."
"하...하지만, 끅,.. 브래..들리..흡, 끅... 나 버리고...가지마....."
"버리는 게 아니라는 걸 아시잖아요, 우리 도련님이 왜 이럴까, 응?"
"싫어어... 가지마..... 으으응, 가주님... 되게 무서워,..."
"알죠, 아는데... 우리 도련님 중학교는 보내야 하잖아요."
"....그럼... 1년만 더.... 있다가, 응...? 나 아직 모르는 거... 엄청... 많으니까, 브래들리가 알려줘..."
"제이크님,.... 미룬다고 달라지는 건 없어요."
"....그치만...."
제이크의 눈에 방울방울 눈물이 달리자 마음이 약해진 브래들리가 제이크를 끌어안았다.
그럼 딱 1년만 있다가, 1년만입니다.
하지만 제이크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생각 외로 제이크를 아니꼬워하는 장로들과 그들과 결탁한 사제들이 입을 모아 제이크를 멀리 보내버려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브래들리는 격렬하게 제이크를 보호했다. 가주회의에 초대된 브래들리는 그들의 주장에 새로운 의견을 냈다.
"제가 브래드쇼 영지에 제이크를 데려가는 건 어떻습니까?"
"무슨..."
"세러신 교에서 그렇게 싫어하는 저주의 아이, 제가 데리고 멀리 꺼지겠다는 뜻입니다."
"그건 안됩니다. 저주의 아이는 세러신 영지에서 처형되어야만...."
"....저주의 아이가 아니고 제이크입니다. 어떻게 처형할 것이며, 이렇게까지 질질 끄는 이유가 뭐죠?"
"저주의 아이가.... 스스로가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아야 그 처형이 의미가 있지 않겠습니까?"
"하!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아이가 그렇게까지 미우시면 진작에 버리셨어야죠. 종교의 제물로 삼을 게 아니라."
"제물이라뇨! 말 조심하십시오, 이건 엄연히 세러신 교의 예언입니다!!"
"....하, 그래요. 그 예언의 아이. 제가 데리고 가겠습니다. 그렇게 불길하고 께름칙하다면 아예 다른 영지로 보내는 것도 그렇게 나쁜 선택은 아닐텐데요?"
브래들리의 말에 가주회의에 참석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입을 닫았다. 브래들리는 이들에게 월급을 받았다는 사실이 새삼 부끄러워졌다.
"됐습니다. 결정되면 부르시지요."
자리를 박차고 나간 브래들리는 서둘러 제이크 방에 들러 짐을 꾸렸다.
"...어디가요...?"
"제이크, 여기서 소중하고 꼭 필요한 거 여기에 넣어. 오늘 밤에 떠나야겠어."
"......응?"
"제이크, 잘 들어. 나 오늘 사표쓰고 여길 떠날거야."
"....뭐라고....?"
"그리고 너도 같이 떠날거야. 너 여기 더 있다간 그냥 죽겠어."
이렇게 어린 아이를,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세러신 가문에 들어온 이래로 내내 그를 괴롭혔던 질문에는 명쾌한 답이 있었다.
그럴 수 없게 만들면 되지.
그날 밤, 가주회의는 밤이 새도록 끝나지 않았고 그 틈을 타 제이크와 브래들리가 빠져나왔다. 제이크는 가슴 끝까지 차오르는 해방감에 비명이 나오려던 걸 겨우 막았다. 브래들리는 제이크를 업고 영지의 경계로 향했다. 정문으로 나가기에는 부담이 있으니,후문으로 몰래 나갈 계획이었다. 경비병의 교대 시간에 맞게 세러신의 영지를 빠져나온 브래들리는 최선을 다해 걸었다. 등 뒤에서 잠든 제이크가 마치 한 생명의 삶을 스스로가 살린 것만 같아서. 브래들리는 오래 걸어 다리가 욱씬거렸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걸었다.
방향은 북쪽, 자신의 영지가 있는 곳으로. 소박하지만 웃음이 많은 곳, 조금은 황량하지만 대가문의 간섭이 없고 어린아이를 늘 환영하는 따뜻한 곳. 그곳이라면 제이크도 삶을 기꺼이 이어나갈 터였다. 어슴푸레 해가 밝아오자, 잠에서 깬 제이크가 그에게 물었다.
"우리는 어디로 가는거야....?"
"브래드쇼의 영지로 갈거야."
"...거긴 어떤 곳이야...?"
"음, 조금 춥지만... 투박하고 정이 넘치는 곳이야. 무엇보다 북쪽은 아이가 늘 적어서, 너라면 언제든지 환영할 거야."
"....나 무겁지...? 나 걸을 수 있어, 내가 걸을게!"
"아니,괜찮..."
"내려줘, 브래들리. 나 걸을 수 있다니까?"
제이크의 성화에 브래들리는 업고 있던 제이크를 내려 손을 맞잡아주었다. 따뜻한 온기에 괜시리 기분이 좋아진 제이크가 방방 뛰며 먼저 앞으로 튀어나갔다.
"제이크, 잠ㄲ....엌...."
"브래들리!!!"
어느새 따라온 추격대의 손에는 총이 들려있었다. 브래들리는 다리에 총상을 입고 그대로 고꾸라졌다.
"안돼, 브래들리.... 흐윽..... 피...피나...."
"제이크, 도망가.... 어서!"
"못... 가. 안...갈거야, 제이크가 다쳤는데 어떻게 가...."
"가! 너 저기 계속있다가는..."
".....브래들리는... 아무 죄가 없잖아... 그냥, 날 살리고 싶었던 건데...."
"....너도 죄는 없어, 제이크"
"......널 살려달라고 할거야. 내가 할 수 있는 걸 할거야."
그게 브래들리가 나한테 알려준거잖아,
브래들리는 멀어지는 의식 속 제이크의 목소리를 들은 듯했다. 눈을 떠보니 마차였다. 다리는 엉성하게 붕대에 감겨있고, 행선지를 모른 채 나아가는 마차에 창문을 열고 마부에게 다급하게 질문했다.
"이 마차 행선지가 어디인가?"
"북쪽, 브래드쇼 영지로 가는 길이오."
".....자네, 혹시 내가 쓰러지고 난 뒤에 어떻게 되었는지 그 인과를 아는가?"
".....저주의 아이가 스스로 손을 들고 추격대에게 붙들렸고, 나아가 말하길 자신이 밖으로 탈출하고 싶어하자 들어줬다며 그쪽을 치료하라고 하더이다. 그쪽은 저주의 아이를 도운 벌로 엉성한 치료와 함께 세러신 영지에서 추방되었소."
"......하아, 자네도 세러신 교의 교인인가?"
".....북쪽까지 먼 길이니 눈을 더 붙이시게."
".....자네도 진정 그 어린 아이가 저주의 아이라고 생각하고?"
"가끔 신의 말씀은 아리송할 때가 많지. 나는 그 아이가 저주의 아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네만,.. 세러신 교에 이미 암암리에 퍼져있는 인식을 바꾸기란 어려울 것이야."
".....답변 고맙네."
탁, 도로 닫힌 창문에 마부가 쓸쓸하게 혼잣말했다.
"신이 머물렀던 순간을 잊지 못하던 사람이 불러온 비극이려나, 아니면 새로운 시작이려나."
브래들리는 쌀쌀한 바람에 눈을 떴다. 마차도, 마부도 감쪽같이 사라지고 눈앞에는 덩그러니 브래드쇼 영지의 대문만이 보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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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크는 영지로 송환되어, 4년 간의 구금과 체벌을 벌로 받았다. 그 벌을 받아 버티면서도 아른아른 브래들리를 생각했다. 보고싶다고, 언젠가는 보겠다고.
브래들리는 추방되어 다시는 세러신 영지에 올 수 없게 되었다. 그러니 내가 보러가야지, 내가 보고싶었다고 해야지.
4년의 구금이 끝나고 제이크는 죽은 듯이 살았다. 겉으로만 보기에는 그랬다. 제이크의 처형일이 드디어 잡혔고, 제이크는 삼엄한 감시 속에서 매일같이 탈출을 꿈꾸었다. 돈을 모으고 다른 사람들의 소문을 모으고, 감시가 잠깐 허술해지는 틈을 타 탈출의 기회를 노렸다. 그러나 아직 어린 제이크에게 탈출은 여전히 버겁기만 했다. 지지부진한 탈출시도 끝에 마침내 제이크의 처형 날이 밝아왔다.
어쩌지, 브래들리. 나 너무 무서워.
제이크는 오직 브래들리 앞에서만 흘렸던 눈물이 새어나오는 것을 느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세러신 교인들 앞에서는 안 울고 싶었는데. 하얗게 밝아오는 태양에 제이크는 비죽비죽 흘러나오는 눈물을 애써 닦아내었다. 아니, 그 잠깐 행복했으니까 됐어.
제이크의 처형날은 제이크의 생일이었다. 마침내 성인이 되는 날, 그들은 제이크를 죽이기로 한 것이다. 제이크는 쇠사슬에 묶여 중앙에 마련된 처형대로 향했다. 자꾸만 느려지는 발걸음에 뒤에서는 매서운 채찍이 그를 재촉했다. 처형대에 선 제이크에게 처형인이 물었다. 텅빈 눈으로 고개를 든 제이크가 대중을 둘러보다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입가에 손가락을 세웠지만, 제이크의 눈에 생기가 돌기 시작한 것은 눈치채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느냐!"
".....나는, 저주의 아이가 아니다."
작게 속삭이며 말하자 처형인이 미간을 찌푸렸다. 아직도 정신을 못차렸군.
그러나 제이크와 눈이 마주친 그는 환하게 웃었다. 바로 그거라는 듯.
"아직도 그런 허튼 소리를 하는 것이냐!!"
"난!! 단 한번도 사람을 해치거나 돈을 탐해본 적이 없다!"
웅성거리는 소리는 커져가고, 그에 따라 제이크의 목소리 역시 조금씩 커졌다.
"어릴때부터!! 저택에 갇혀 맞기만 했을 뿐!!!! 내 손으로 이루어낸 건 아무것도 없다!!"
제이크의 시선은 내내 그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나 잘했지, 이렇게 하라는 거 맞지? 칭찬을 갈구하는 눈빛을 눈치챈 그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힘을 얻은 제이크는 마지막으로 한 마디를 외쳤다.
"그래, 죽여라!!! 그러나 저주의 아이도 아닌 나를 죽여봤자 달라지는 것은 없을 것이다!!!"
제이크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환호성과 함께 군대가 들이닥쳤다. 브래드쇼 군대였다. 허둥지둥하는 처형인의 목 뒤를 툭 친 브래들리는 처형인이 들고 있던 열쇠를 들고 제이크를 풀어주었다.
"잘했다, 제이크."
"흐읍....흑....으어엉...."
제이크는 아무말도 하지 못한 채 무너져내려 눈물을 흘렸다. 아수라장 속에 우는 제이크를 안아든 브래들리가 처형대를 내려왔다.
"잡아들인 모두를 구금하도록."
"예!!"
-
훌쩍훌쩍, 아직도 그치지 않은 제이크를 다정히 달랜 브래들리는 제이크의 모습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꾀죄죄하긴 했어도 완연한 성인의 모습을 갖춘 제이크는 아름다웠다. 그는 잘 자라준 제이크에게 고마움과, 늦게 왔다는 미안함에 제이크를 다시금 끌어안았다.
"미안해, 너무 늦었지."
"....왔으니까 됐어."
"...응, 왔어."
"....어떻게 된거야, 저 군대는 뭐고."
"아, 넌 잘 몰랐겠지만... 브래드쇼 가문은 변경백이자 개국공신으로서, 높진 않아도 명예는 좀 있는 편이거든. 우리 가문은 성인이 되면 다른 가문의 사용인이 되어 중앙 정치를 탐색하고 오는 편이야. 때로는 스승으로, 때로는 보모로, 아예 시종으로 갈 때도 있고."
"....응...."
"브래드쇼 가문이 변경백에 머무르는 대신 받은 권리가 몇 개 있어. 널 구하는 데 쓰고 싶어서 내가 가주가 됐고."
"....어?"
"5년이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제이크. 세러신 교의 이름 하에 하도 해먹은 게 많아서 정리가 너무 어려웠어. 꼬리 잡기도 힘들었고. 그래서 처형날, 경비가 느슨해지고 사람들은 방심하기 쉬운 날을 골라 급습하게 된거야."
제이크는 너무 많은 정보가 들어와 정신이 어지러웠다. 이게 다 무슨 얘기인지.....
"제이크, 나와 함께 가자. 모두가 널 환영해줄거야."
"...너는.... 내가 가면 좋겠어?"
"....꼭 왔으면 좋겠는데."
씨익 웃는 브래들리의 모습이 어쩐지 잘생겨보여서 제이크는 다시 고개를 푹 숙인채 고개를 꾸닥거렸다. 그 모습을 본 브래들리는 제이크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이제 너의 앞에는 좋은 일만 펼쳐지길.
-
이렇게 세러신 가문은 몰락하고, 세러신 교는 각종혐의를 받아 처벌되었다. 브래드쇼 영지로 향한 제이크는 큰 사랑을 받으며 못다한 중등과정을 공부했고, 눈코뜰새 없이 바쁜 브래들리의 곁을 지켰다. 유능한 비서 5명보다 나은 제이크의 역할에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붙어있게 되었다. 12살의 나이차이가 있었지만 그렇게 큰 장애물이 되지는 못했다. 먼저 마음을 자각한 쪽은 브래들리였다. 30대가 10대를 짝사랑한다는 사실이 조금 부끄러워지긴 했지만, 19살도 성인이니 괜찮지 않나...하는 양심없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이미 사랑하고 있던 쪽은 제이크였다. 제이크의 온 세상은 브래들리여서, 브래들리를 새삼스럽게 사랑한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사귀자는 브래들리의 말에 가족이 되고 싶다고 답한 것 역시 제이크였다.
제이크는 종종 꿈을 꾼다. 긴 겨울을 지나는 꿈. 그리고 그 끝에 브래들리가 봄꽃을 들고 서있는 꿈. 그 꿈에서 빠져나오면, 걱정스러운 눈을 한 브래들리가 같은 침대를 누워 그를 도닥이곤 했다.
더할나위 없는, 제이크의 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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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만날 때 제이크 7살, 브래들리 19살
쫓겨날 때 제이크 15살, 브래들리 27살
다시 만날 때 제이크 19살, 브래들리 31살
자신을 보호해준 보모 루스터를 잊지 못하는 행맨이 결국 행복해지는 거 보고싶다.
로판 세계관 + 근대 유럽풍 루행 보고 싶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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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맨의 겨울은 유난히도 길었다.
행맨은 태어나면서부터 저주를 받고 태어났다. 아니면 저주로서 태어났다고 함이 맞을까.
세러신 가문의 사제는 제이크의 탄생예언으로 그가 가문의 대를 끊을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그러니 어찌 제이크에게 봄이 오겠는가.
제이크는 외지에서 온 보모에게 쭉 맡겨져 길러졌고, 가문 내에서의 입지 역시 매우 미약한 편이었다. 세러신 교 사제의 예언은, 적어도 세러신의 영지 내에서 강력한 힘을 발휘했다. 그의 가문이 후원하고, 그리고 가문의 영지에서 굳게 믿어지던 세러신 교의 모든 교인들은 그를 배척했다. 설사 그것이 제이크의 부모님일지라도. 그의 어머니는 저주의 주인공을 낳았다며 스스로를 경멸했고, 그의 아버지는 제이크를 저주의 도구로써 온전히 그를 몰아내는 데에만 여력을 쏟았다. 하루는 폭력으로, 또 하루는 경멸로, 다른 하루는 무시로 그의 아버지는 제이크를 몰아내고자 했다.
외지에서 왔던 그의 보모가 세러신 교의 교인이 되는 바람에 새로운 보모가 그를 찾아오기 전까지,
제이크의 겨울은 너무나 길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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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크의 봄을 다시 되찾아 준 건 새로온 남자 보모였다. 그는 제이크의 일관된 냉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에게 온정을 베풀었다. 저기 멀리, 수도에서 공부하고자 했지만 입시에 실패했다는 젊은 남자는 아직 어리고 여린 아이에게 먼저 손을 내밀어주었다.
"제이크 님, 오늘은 밥이 따뜻하네요. 한 숟갈이라도 드셔보세요ㅡ, 네?"
"...."
"제이크 님, 날씨가 좋은데 우리 피크닉이나 가볼까요? 뒷마당에 예쁜 꽃이 폈더라구요."
"...."
"제이크 님, 안녕히 주무시고 악몽을 꾸시거든 절 불러주세요, 아시겠죠?"
"...."
하루, 이틀... 한달이 넘도록 변하지 않는 태도에 제이크의 냉대는 허들이 조금 내려가, 이제는 고개짓으로 간단히 소통하는 정도까지는 이르게 되었다. 보모는 기뻐하며 제이크의 이름을 닳도록 불러댔다. 어느 순간, 제이크는 깨달았다. 이 사람이 불러주는 이름만이 자신의 유일한 이름이었다는 것을.
저주의 아이,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새끼, '그 놈'...
그를 이르는 많고 많은 말중에 그 보모만이 그를 이름으로 불러주고 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야 알아차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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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보모가 붙은 지 꼬박 6개월만에, 제이크는 그에게 처음으로 질문했다.
".....저기...."
"허억.... 지금 저 부르신 거예요?"
퍽 즐거워하던 보모는 자세를 낮추고 제이크와 눈을 맞추었다.
"어떤 일 때문에 부르셨나요?"
"......이름......"
"이름? 아! 제 이름이 궁금하셨군요!"
고개를 꾸닥거린 제이크가 보모를 바라보았다. 보모는 기쁘다는 듯,
"제 이름은 브래들리 브래드쇼랍니다. 브래들리, 라고 불러주시면 돼요!"
".....브래들리....."
"네, 제이크 님"
제이크는 눈을 맞춰오는 그에게 말없이 손을 내밀고 그의 큰 손을 꼬옥 잡았다.
"....잘 부타케...."
아직은 조금 짧은 혀로 그는 첫 인사를 건넸다. 그가 브래들리와 만난 지 장장 6개월 7일만의 성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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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래들리가 처음 세러신 가문에 들어왔을 때 처음 든 의문은, 어떻게 저렇게 작은 아이에게 그런 핍박과 경멸을 하는지. 였다. 가문의 종교라는 풍습은 대가문만이 남아있을 뿐, 이제는 대부분의 영지에서 거의 사라진 풍습이었다. 마찬가지로 '브래드쇼' 가문의 차남으로 자랐지만, 가문의 종교는 역사서에서나 봤던 브래들리는 첫 대면 이후 큰 낙담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가 모시게 된 제이크 세러신은 아직 어리고 여렸지만 그를 둘러싼 악의는 너무 짙었기 때문이다. 제이크는 아무 말도, 아무 표정도 짓지 않은 채 그저 그 공간에 존재하기만 하였다. 아직 아이에 불과한데, 어째서. 브래들리는 전대 보모가 정리해놓은 자료를 훑어보다 그만 말을 잃었다. 외지에서 왔다가 세러신 교에 물들었다던 전 보모는 제이크의 신뢰를 철저히 무너뜨렸고, 제이크는 무너져 내렸다.
"앞 길이 막막...하구나"
브래들리가 이때까지 돌봐온 아이와는 차원이 달랐다. 말썽피우는 귀족 아이는 많이 봤어도, 이런... 일을 겪는 아이는 없을 테니까. 가문으로부터 철저히 배제된 제이크는 볕이 잘 들지 않는 지하실 같은 방에, 차가운 밥, 단벌신사로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몸 구석구석에 남은 폭력의 흔적까지, 브래들리는 성인된 도리로서 할 수 있는 일부터 시작했다.
늘 볕이 안 드는 차가운 방에는 커튼을 싹 걷어 햇빛이 들게 하고, 차가운 밥을 주는 식당에 항의해 따뜻한 밥으로 바꿔오곤 했다. 물론 제이크는 대부분 밥보다는 멀건 수프나 한 그릇 먹을 뿐이었지만. 보모가 자리를 비울 때마다 행해지는 폭력의 상처는 제때 치료하고, 이미 늦은 상처에도 연고를 발라 새 살을 돋게 했다. 새로운 옷도 많이 사고 싶었지만, 제이크 앞에 배당된 돈은 한 푼도 없어 브래들리의 월급에서 조금씩 돈을 모아 옷도 한 두벌 더 마련할 수 있었다.
그 사이 제이크의 변화가 시작되었다. 제가 하는 일이라고는 먼저 말을 건네는 것뿐인데도, 어디서 마음을 바꾼 건지 아무런 표정도 없던 아이가 조금씩 표현을 시작했다. 시작은 고개의 끄덕임부터. 좋다, 싫다를 표현하는 대로 들어줬더니 조금 더 표현이 다양해졌다. 고개를 끄덕이면 좋다, 고개를 저으면 싫다. 아플 때는 미간을 찌푸리고, 무서울 때는 한발짝 내딛어 자신의 뒤로 숨는 것으로.
정말 좋을 때는 작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고, 정말 싫을 때면 울상이 된 채로 고개를 저었다. 제이크의 표현은 다양해졌고 끝내 말을 시작했다.
처음 제이크가 한 말은 질문이었다. 나의 이름이 무엇이냐고, 이름을 답해주자 잘 부탁한다며 어설픈 인사를 건네왔다. 그의 인사가 어설펐던 이유는 그가 누군가와 대화하는 게 오랜만이기 때문이리라.
브래들리는 그의 어색한 인사를 받아주고, 살포시 잡힌 손을 끌어 제이크를 품에 안았다. 눈이 동그래진 제이크는 따뜻한 품에 갈등하다,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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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크는 브래들리의 보호 하에 무럭무럭 자라났다. 그에게 폭력은 일상이 되었지만, 브래들리의 보호 또한 일상이 되었다. 브래들리는 제이크와 바쁘게 나다녔다. 하루는 산으로, 하루는 정원으로, 또 하루는 몰래 바다를 보러. 제이크가 점점 시야에서 보이지 않자 폭력 또한 많이 줄었다. 제이크는 딱 이대로만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모두에게 잊혀지고, 브래들리와 함께 살고 싶다고.
제이크가 좀 더 자라 중학교 갈 나이가 되자, 브래들리는 아무래도 안되겠다며 세러신의 가주를 찾아가고 싶다고 했다. 제이크는, 울면서 그를 말렸다. 학교 따위 가고 싶지 않다고, 브래들리만 있으면 된다고. 브래들리는 난감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제이크 님, 제가 할 수 있는 부분이 있고 없는 부분이 있습니다. 초등까지의 교육은 어찌저찌 기본적인 부분을 제가 교육했으나... 학교에서 배울 수 있는 내용은 학교에만 있는 법입니다. 중학교에서 제이크 님은 무한하게 성장할 거예요."
"하...하지만, 끅,.. 브래..들리..흡, 끅... 나 버리고...가지마....."
"버리는 게 아니라는 걸 아시잖아요, 우리 도련님이 왜 이럴까, 응?"
"싫어어... 가지마..... 으으응, 가주님... 되게 무서워,..."
"알죠, 아는데... 우리 도련님 중학교는 보내야 하잖아요."
"....그럼... 1년만 더.... 있다가, 응...? 나 아직 모르는 거... 엄청... 많으니까, 브래들리가 알려줘..."
"제이크님,.... 미룬다고 달라지는 건 없어요."
"....그치만...."
제이크의 눈에 방울방울 눈물이 달리자 마음이 약해진 브래들리가 제이크를 끌어안았다.
그럼 딱 1년만 있다가, 1년만입니다.
하지만 제이크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생각 외로 제이크를 아니꼬워하는 장로들과 그들과 결탁한 사제들이 입을 모아 제이크를 멀리 보내버려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브래들리는 격렬하게 제이크를 보호했다. 가주회의에 초대된 브래들리는 그들의 주장에 새로운 의견을 냈다.
"제가 브래드쇼 영지에 제이크를 데려가는 건 어떻습니까?"
"무슨..."
"세러신 교에서 그렇게 싫어하는 저주의 아이, 제가 데리고 멀리 꺼지겠다는 뜻입니다."
"그건 안됩니다. 저주의 아이는 세러신 영지에서 처형되어야만...."
"....저주의 아이가 아니고 제이크입니다. 어떻게 처형할 것이며, 이렇게까지 질질 끄는 이유가 뭐죠?"
"저주의 아이가.... 스스로가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아야 그 처형이 의미가 있지 않겠습니까?"
"하!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아이가 그렇게까지 미우시면 진작에 버리셨어야죠. 종교의 제물로 삼을 게 아니라."
"제물이라뇨! 말 조심하십시오, 이건 엄연히 세러신 교의 예언입니다!!"
"....하, 그래요. 그 예언의 아이. 제가 데리고 가겠습니다. 그렇게 불길하고 께름칙하다면 아예 다른 영지로 보내는 것도 그렇게 나쁜 선택은 아닐텐데요?"
브래들리의 말에 가주회의에 참석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입을 닫았다. 브래들리는 이들에게 월급을 받았다는 사실이 새삼 부끄러워졌다.
"됐습니다. 결정되면 부르시지요."
자리를 박차고 나간 브래들리는 서둘러 제이크 방에 들러 짐을 꾸렸다.
"...어디가요...?"
"제이크, 여기서 소중하고 꼭 필요한 거 여기에 넣어. 오늘 밤에 떠나야겠어."
"......응?"
"제이크, 잘 들어. 나 오늘 사표쓰고 여길 떠날거야."
"....뭐라고....?"
"그리고 너도 같이 떠날거야. 너 여기 더 있다간 그냥 죽겠어."
이렇게 어린 아이를,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세러신 가문에 들어온 이래로 내내 그를 괴롭혔던 질문에는 명쾌한 답이 있었다.
그럴 수 없게 만들면 되지.
그날 밤, 가주회의는 밤이 새도록 끝나지 않았고 그 틈을 타 제이크와 브래들리가 빠져나왔다. 제이크는 가슴 끝까지 차오르는 해방감에 비명이 나오려던 걸 겨우 막았다. 브래들리는 제이크를 업고 영지의 경계로 향했다. 정문으로 나가기에는 부담이 있으니,후문으로 몰래 나갈 계획이었다. 경비병의 교대 시간에 맞게 세러신의 영지를 빠져나온 브래들리는 최선을 다해 걸었다. 등 뒤에서 잠든 제이크가 마치 한 생명의 삶을 스스로가 살린 것만 같아서. 브래들리는 오래 걸어 다리가 욱씬거렸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걸었다.
방향은 북쪽, 자신의 영지가 있는 곳으로. 소박하지만 웃음이 많은 곳, 조금은 황량하지만 대가문의 간섭이 없고 어린아이를 늘 환영하는 따뜻한 곳. 그곳이라면 제이크도 삶을 기꺼이 이어나갈 터였다. 어슴푸레 해가 밝아오자, 잠에서 깬 제이크가 그에게 물었다.
"우리는 어디로 가는거야....?"
"브래드쇼의 영지로 갈거야."
"...거긴 어떤 곳이야...?"
"음, 조금 춥지만... 투박하고 정이 넘치는 곳이야. 무엇보다 북쪽은 아이가 늘 적어서, 너라면 언제든지 환영할 거야."
"....나 무겁지...? 나 걸을 수 있어, 내가 걸을게!"
"아니,괜찮..."
"내려줘, 브래들리. 나 걸을 수 있다니까?"
제이크의 성화에 브래들리는 업고 있던 제이크를 내려 손을 맞잡아주었다. 따뜻한 온기에 괜시리 기분이 좋아진 제이크가 방방 뛰며 먼저 앞으로 튀어나갔다.
"제이크, 잠ㄲ....엌...."
"브래들리!!!"
어느새 따라온 추격대의 손에는 총이 들려있었다. 브래들리는 다리에 총상을 입고 그대로 고꾸라졌다.
"안돼, 브래들리.... 흐윽..... 피...피나...."
"제이크, 도망가.... 어서!"
"못... 가. 안...갈거야, 제이크가 다쳤는데 어떻게 가...."
"가! 너 저기 계속있다가는..."
".....브래들리는... 아무 죄가 없잖아... 그냥, 날 살리고 싶었던 건데...."
"....너도 죄는 없어, 제이크"
"......널 살려달라고 할거야. 내가 할 수 있는 걸 할거야."
그게 브래들리가 나한테 알려준거잖아,
브래들리는 멀어지는 의식 속 제이크의 목소리를 들은 듯했다. 눈을 떠보니 마차였다. 다리는 엉성하게 붕대에 감겨있고, 행선지를 모른 채 나아가는 마차에 창문을 열고 마부에게 다급하게 질문했다.
"이 마차 행선지가 어디인가?"
"북쪽, 브래드쇼 영지로 가는 길이오."
".....자네, 혹시 내가 쓰러지고 난 뒤에 어떻게 되었는지 그 인과를 아는가?"
".....저주의 아이가 스스로 손을 들고 추격대에게 붙들렸고, 나아가 말하길 자신이 밖으로 탈출하고 싶어하자 들어줬다며 그쪽을 치료하라고 하더이다. 그쪽은 저주의 아이를 도운 벌로 엉성한 치료와 함께 세러신 영지에서 추방되었소."
"......하아, 자네도 세러신 교의 교인인가?"
".....북쪽까지 먼 길이니 눈을 더 붙이시게."
".....자네도 진정 그 어린 아이가 저주의 아이라고 생각하고?"
"가끔 신의 말씀은 아리송할 때가 많지. 나는 그 아이가 저주의 아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네만,.. 세러신 교에 이미 암암리에 퍼져있는 인식을 바꾸기란 어려울 것이야."
".....답변 고맙네."
탁, 도로 닫힌 창문에 마부가 쓸쓸하게 혼잣말했다.
"신이 머물렀던 순간을 잊지 못하던 사람이 불러온 비극이려나, 아니면 새로운 시작이려나."
브래들리는 쌀쌀한 바람에 눈을 떴다. 마차도, 마부도 감쪽같이 사라지고 눈앞에는 덩그러니 브래드쇼 영지의 대문만이 보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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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크는 영지로 송환되어, 4년 간의 구금과 체벌을 벌로 받았다. 그 벌을 받아 버티면서도 아른아른 브래들리를 생각했다. 보고싶다고, 언젠가는 보겠다고.
브래들리는 추방되어 다시는 세러신 영지에 올 수 없게 되었다. 그러니 내가 보러가야지, 내가 보고싶었다고 해야지.
4년의 구금이 끝나고 제이크는 죽은 듯이 살았다. 겉으로만 보기에는 그랬다. 제이크의 처형일이 드디어 잡혔고, 제이크는 삼엄한 감시 속에서 매일같이 탈출을 꿈꾸었다. 돈을 모으고 다른 사람들의 소문을 모으고, 감시가 잠깐 허술해지는 틈을 타 탈출의 기회를 노렸다. 그러나 아직 어린 제이크에게 탈출은 여전히 버겁기만 했다. 지지부진한 탈출시도 끝에 마침내 제이크의 처형 날이 밝아왔다.
어쩌지, 브래들리. 나 너무 무서워.
제이크는 오직 브래들리 앞에서만 흘렸던 눈물이 새어나오는 것을 느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세러신 교인들 앞에서는 안 울고 싶었는데. 하얗게 밝아오는 태양에 제이크는 비죽비죽 흘러나오는 눈물을 애써 닦아내었다. 아니, 그 잠깐 행복했으니까 됐어.
제이크의 처형날은 제이크의 생일이었다. 마침내 성인이 되는 날, 그들은 제이크를 죽이기로 한 것이다. 제이크는 쇠사슬에 묶여 중앙에 마련된 처형대로 향했다. 자꾸만 느려지는 발걸음에 뒤에서는 매서운 채찍이 그를 재촉했다. 처형대에 선 제이크에게 처형인이 물었다. 텅빈 눈으로 고개를 든 제이크가 대중을 둘러보다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입가에 손가락을 세웠지만, 제이크의 눈에 생기가 돌기 시작한 것은 눈치채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느냐!"
".....나는, 저주의 아이가 아니다."
작게 속삭이며 말하자 처형인이 미간을 찌푸렸다. 아직도 정신을 못차렸군.
그러나 제이크와 눈이 마주친 그는 환하게 웃었다. 바로 그거라는 듯.
"아직도 그런 허튼 소리를 하는 것이냐!!"
"난!! 단 한번도 사람을 해치거나 돈을 탐해본 적이 없다!"
웅성거리는 소리는 커져가고, 그에 따라 제이크의 목소리 역시 조금씩 커졌다.
"어릴때부터!! 저택에 갇혀 맞기만 했을 뿐!!!! 내 손으로 이루어낸 건 아무것도 없다!!"
제이크의 시선은 내내 그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나 잘했지, 이렇게 하라는 거 맞지? 칭찬을 갈구하는 눈빛을 눈치챈 그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힘을 얻은 제이크는 마지막으로 한 마디를 외쳤다.
"그래, 죽여라!!! 그러나 저주의 아이도 아닌 나를 죽여봤자 달라지는 것은 없을 것이다!!!"
제이크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환호성과 함께 군대가 들이닥쳤다. 브래드쇼 군대였다. 허둥지둥하는 처형인의 목 뒤를 툭 친 브래들리는 처형인이 들고 있던 열쇠를 들고 제이크를 풀어주었다.
"잘했다, 제이크."
"흐읍....흑....으어엉...."
제이크는 아무말도 하지 못한 채 무너져내려 눈물을 흘렸다. 아수라장 속에 우는 제이크를 안아든 브래들리가 처형대를 내려왔다.
"잡아들인 모두를 구금하도록."
"예!!"
-
훌쩍훌쩍, 아직도 그치지 않은 제이크를 다정히 달랜 브래들리는 제이크의 모습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꾀죄죄하긴 했어도 완연한 성인의 모습을 갖춘 제이크는 아름다웠다. 그는 잘 자라준 제이크에게 고마움과, 늦게 왔다는 미안함에 제이크를 다시금 끌어안았다.
"미안해, 너무 늦었지."
"....왔으니까 됐어."
"...응, 왔어."
"....어떻게 된거야, 저 군대는 뭐고."
"아, 넌 잘 몰랐겠지만... 브래드쇼 가문은 변경백이자 개국공신으로서, 높진 않아도 명예는 좀 있는 편이거든. 우리 가문은 성인이 되면 다른 가문의 사용인이 되어 중앙 정치를 탐색하고 오는 편이야. 때로는 스승으로, 때로는 보모로, 아예 시종으로 갈 때도 있고."
"....응...."
"브래드쇼 가문이 변경백에 머무르는 대신 받은 권리가 몇 개 있어. 널 구하는 데 쓰고 싶어서 내가 가주가 됐고."
"....어?"
"5년이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제이크. 세러신 교의 이름 하에 하도 해먹은 게 많아서 정리가 너무 어려웠어. 꼬리 잡기도 힘들었고. 그래서 처형날, 경비가 느슨해지고 사람들은 방심하기 쉬운 날을 골라 급습하게 된거야."
제이크는 너무 많은 정보가 들어와 정신이 어지러웠다. 이게 다 무슨 얘기인지.....
"제이크, 나와 함께 가자. 모두가 널 환영해줄거야."
"...너는.... 내가 가면 좋겠어?"
"....꼭 왔으면 좋겠는데."
씨익 웃는 브래들리의 모습이 어쩐지 잘생겨보여서 제이크는 다시 고개를 푹 숙인채 고개를 꾸닥거렸다. 그 모습을 본 브래들리는 제이크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이제 너의 앞에는 좋은 일만 펼쳐지길.
-
이렇게 세러신 가문은 몰락하고, 세러신 교는 각종혐의를 받아 처벌되었다. 브래드쇼 영지로 향한 제이크는 큰 사랑을 받으며 못다한 중등과정을 공부했고, 눈코뜰새 없이 바쁜 브래들리의 곁을 지켰다. 유능한 비서 5명보다 나은 제이크의 역할에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붙어있게 되었다. 12살의 나이차이가 있었지만 그렇게 큰 장애물이 되지는 못했다. 먼저 마음을 자각한 쪽은 브래들리였다. 30대가 10대를 짝사랑한다는 사실이 조금 부끄러워지긴 했지만, 19살도 성인이니 괜찮지 않나...하는 양심없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이미 사랑하고 있던 쪽은 제이크였다. 제이크의 온 세상은 브래들리여서, 브래들리를 새삼스럽게 사랑한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사귀자는 브래들리의 말에 가족이 되고 싶다고 답한 것 역시 제이크였다.
제이크는 종종 꿈을 꾼다. 긴 겨울을 지나는 꿈. 그리고 그 끝에 브래들리가 봄꽃을 들고 서있는 꿈. 그 꿈에서 빠져나오면, 걱정스러운 눈을 한 브래들리가 같은 침대를 누워 그를 도닥이곤 했다.
더할나위 없는, 제이크의 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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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만날 때 제이크 7살, 브래들리 19살
쫓겨날 때 제이크 15살, 브래들리 27살
다시 만날 때 제이크 19살, 브래들리 31살
자신을 보호해준 보모 루스터를 잊지 못하는 행맨이 결국 행복해지는 거 보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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