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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22 01:16
페리한테 도망친 바비가 버논집으로 숨어드는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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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투로 이야기 하기엔 너무 가벼운 어조였다. 바비는 들고있던 옷과 버논을 천천히 번갈아 보았다. 이런 상황에서 쓸데없는 질문을 곧바로 던질 정도로 눈치가 없는 건 아니었다. 누군가가 이 세상을 떠나고 없다는 사실을 이해하기 전에, 다른 쪽으로 재빠르게 머리가 돌아갔다.

뭐야, 그럼 나 죽은 사람 신분증으로 저번에 병원엘 다녀온거야? 이 집을 떠나있던가 잠깐 자리를 비웠다던가 둘 중 하나인 줄로만 알았던 버드 크레인의 정체가 망자였다니. 옷이며 신분증까지 가지고 있는 걸 보니 딱 봐도 보통사이가 아닌데 그걸 또 왜 저렇게 아무것도 아닌것처럼 뱉는건지. 자세한 맥락을 모르는 게 당연한 일인데도, 바비는 분위기파악을 못한 사람이 된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 이거 다 입어도 되는거 맞아?"

"왜, 죽은 사람 옷이라서 갑자기 별로야?"

"사람을 뭘로 보고, ... 그... 내가 함부로 입어도 되는건지 해서."

"안 받겠다 그러면 그냥 태워버릴 생각이었어."



나름대로 조심스럽게 물어본건데 집주인은 너무도 태연했다. 바비는 고민을 이쯤에서 끝내기로 한다. 다른 사람의 속사정을 깊게 알게되는 건 역시 적성에 잘 안 맞는 분야다.




바비는 물리적으로 혼자가 되는 걸 무척이나 싫어했지만 그게 누군가가 가까이 붙는 걸 허락한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그는 처음 보는 사람이 말을 거는 것 조차도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렇게 혼자 남겨지는 걸 경계하면서.

마름모로 빚어진 사람같았으나 그게 꼭 단점이 되리라는 법은 없었는지, 버논은 그게 바비의 미운 점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런 부분들이 바비라는 인물의 온도를 높여준다고 생각했다.



바비는 속으로 할까말까를 족히 이백 번은 고민한 질문을 버논에게 던졌다. 저기, 그 신분증 말인데. 그거 어떻게 병원에서 받아준거야? 어렵게 건넨 질문 치고는 빠르게 답이 돌아왔다. 아직 사망처리가 안 돼서, 신분증 자체는 살아있을걸. 바비는 괜히 물어봤다 싶은 얼굴을 하고 이유도 묻지 못했다. 알면 알수록 가관이었다. 왜? 그는 모든 것을 덜어내고 한 글자로 묻는다. 왜? 죽은 건 맞는데, 신고할 보호자가 없었어. 역시 사람에 대해 깊게 아는 건 득이 될 수가 없다. 바비는 말을 아낄걸, 하고 작게 속으로 후회한다. 이런 것까지 알게 되면, 한 번 누군가의 깊은 곳을 들여다보기 시작하면 멈출 수 없는 게 일반적이었다.


그는 침묵에 제 삶을 내어 준 적이 별로 없다. 이토록 조용한 곳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허공만 바라보면서 하릴없는 생각을 해도 나무라는 이가 하나도 없다는 건 낯선 일이었다. 비생산적이고 비효율적인 일을 원없이 저질러도, 저를 비난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다. 바비는 자신의 통제가 먹혀들지 않는 새로운 환경에 놓여있다는 사실에서 스트레스를 받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엄청난 해방감을 느꼈다. 항상 여러가지 소음에 뒤덮여 살았던 과거와는 완전히 달랐다.


하지만 지금 맞닥뜨린 건 완전히 예상할 수 없는 류의 상황이다.


-


한쪽 벽에 걸린 여러 개의 총자루가 장식품이 아니었다는 걸 바비는 그제서야 깨달았다. 엽총과 소총을 한 자루씩 챙기더니 두꺼운 외투를 입는 모습을 보고 바비가 물었다. 어디 가? 자세히 주변을 살펴보니 평소에는 뒷편 차고에 주차되어 있던 트럭이 오늘은 앞마당까지 들어와 있었다. 버논은 바비 쪽으로 한 번 고개를 돌리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바비는 재차 물었다. 어디 가??


"혼자 있을 수 있지?"

"아니, 혼자 못 있어."


쏜살같이 돌아온 대답에 버논은 뭐라 말을 더 하려다 말고 차분하게 물었다.


"오래 안 걸려, 두 시간 정도,"

"두 시간? 두 시간동안 혼자 있으라고?"

"애도 아니고 왜 그래?"

"그 새끼들이 다시 찾아오면 어떡하게? 나 끌려가면 니가 책임질거야?"


글쎄, 딱히 바비가 여기서 잘못되더라도 그게 제 탓이 되는 건 아니었다. 한껏 올라간 바비의 눈썹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는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이 땅에 돌아다녀야 할 구석이 얼마나 많은데, 보안관들이 이곳에 다시 찾아올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내년 여름 쯤이 되어야 아마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소파에 기대고있던 몸을 일으켜 버논을 따라 바비가 옷을 찾아입었다. 나도 같이 갈래. 대책없이 따라오겠다는 말을 꺼내는 바비를 버논은 가만히 쳐다만 보았다. 바비는 있는 힘껏 머리를 굴린 끝에, 버논이 사냥을 나가는 거라고 예상을 내렸다. 짐칸이 전부 비워진 트럭 하며 챙기는 준비물들을 보아하니 그러했다. 이런 곳에 사는 사람이라면 크게 짐작하기 어려운 것도 아니었다. 따라간다고 해서 크게 문제될 건 없을 것 같았다. 뭔가를 나서서 해야 한다면 그건 제 몫이라기 보다는 집주인의 몫일테니까.


약 40분을 달려 도착한 곳은 사람이 지나다니는 길도 없을 것 같은 설산 한복판이었다. 이래서 사람들이 국립공원같은 델 가나? 하는 생각을 하며 바비는 버논을 따라 차에서 내렸다. 발을 딛자마자 쌓인 눈 속으로 발이 푹푹 빠졌다. 바비에게 버논이 낮게 일렀다.


"옆에 붙어있어."


탄환을 두 개씩 채워넣은 버논이 간단한 장비들만 챙겨 더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깊은 눈을 다리로 잘도 헤쳐나가는 뒤를 따라 걷던 바비는, 버논이 지나가 길이 난 자리로만 발을 딛었다.


차로도 엄청난 거리를 달려왔는데 걷는 것도 한참이었다. 괜히 온다고 했나? 아니, 그 집에 혼자 있었으면 불안해서 아마 미쳐버렸을지도 몰랐다. 같은 생각을 반복하며 땅만 보고 걷던 바비는 가다말고 우뚝 멈춰선 버논의 등에 제대로 얼굴을 부딪혔다. 지금 뭐하, 볼멘소리가 터져 나오려는 바비의 입을 손으로 막은 버논이 조용히 하라는 듯 쉬- 하는 소리를 냈다. 그의 눈길이 향하는 가장 반대편 쪽에, 길을 잃은 듯 갈팡질팡 하는 어린 무스가 보였다. 동물원에 가본 게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 바비로서는 신기한 광경이었다.


뭐 해, 안 쏴? 턱짓으로 저논의 어깨에 걸린 총을 가리키며 바비가 물었다. 새끼는 안 쏴. 그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며 다른 어깨에 총을 바꾸어 맸다. 그게 뭐야, 새끼라고 안쏘면 뭐 어미라고 또 안 쏠 거야? 여기서 답을 해 줬다간 아마 다른 방식으로 반박하게 될 바비를 알고있어 버논은 부러 입을 닫았다. 언제 끝나냐고 타박이라도 할 것 같았는데, 주위에 처음 보는 게 많아 그런지 바비는 혼자서도 이것저것 들여다보며 군소리없이 잘 따라왔다.


기름칠을 하는 걸 잊고 왔더니 어딘가 부품이 빡빡해져 걸린 모양이었다. 몇 번 당겼다 놓는 것으로 끝나지 않을 것 같아 버논은 한 쪽 무릎을 지면에 대어 앉고는 가져온 가방을 어래에 대고 장비를 해체하기 시작했다. 중간 확인을 하듯 돌아다본 곳에는, 나뭇가지에 맺힌 눈 결정을 들여다보는 중인 바비가 있었다.




그가 시야에서 사라졌다는 걸 깨달은 건 그로부터 먼 시점이 아니었다. 최근에 이런 적이 없었는데. 한 곳에 지나치게 너무 많은 신경을 쏟았다. 주변을 크게 둘러봐도 눈과 나무 뿐이었고 거짓말처럼 아무 기척이 없었다. 버논은 멋대로 시야에서 사라져버린 바비보다도, 미처 그에게 제대로 시선을 두지 못한 제 자신을 먼저 책망한다. 얌전하게 말 잘 듣는 타입이 아니라는 건 이미 알고있어서였다. 그는 발자국이 가장 길게 이어져있는 흔적을 따랐다. 누구 하나 죽어나가도 모를 것 같은 깊은 산 속이지만, 그 주인공이 바비가 되는 걸 원하지는 않았다. 버논의 걸음이 빨라졌다. 예상보다 너무 오래 체류했다. 슬슬 해가 아래로 떨어지고 있었다.


제대로 길을 잃은 바비는 어느 곳으로 눈을 향해도 다 똑같은 나무만 보인다는 사실에 조금 넋을 잃은 상태였다. 잘못 들어왔다는 걸 아는 순간부터 그냥 그자리에 있었어야 했다는 후회도 조금 들었다. 그럼 어떻게 해서든 집주인이 저를 찾으러 올 수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한 편으로는, 설산 한복판을 헤매는 저를 굳이 그가 힘 써가며 찾으러 올 이유는 또 무엇인가 싶어져 마음이 심란해졌다. 그 사람에게는 차라리 다행일지도 모르지. 별 도움 안되는 군식구가 알아서 사라져 준 걸 테니까. 후회와 체념이 왔다갔다 하는 사이, 그렇게 마주친 게 전혀 예상하지 못한 그 풍경이었다.


들리는 소리라곤 눈 밟는 소리, 벅차오르는 제 숨소리가 전부였던 그 자리에, 날것의 날카로운 소리가 덧입혀졌다. 바비가 마주한 것은 쓰러진 새끼사슴 사냥에 성공한 산짐승의 호박색 눈이었다. 주변에 깔린 눈이 피로 물든 자리에서, 입가가 붉어진채로 뜨거운 숨을 내뱉던 겨울늑대는 바비의 존재를 알아차리자마자 더 크게 숨소리를 냈다. 고작스무 걸음 정도 떨어진 거리였다. 바비는 본능적인 위협을 감지하고 저도 모르게 짐승의 눈을 피해버린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이미 이빨에 목이 물어뜯겨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제 모습이 재생되고 있었다.

'옆에 붙어있어.'

난 정말 구제불능인가봐. 고작 1시간 전 쯤 버논이 제게 했던 말을 이제서야 다시 떠올리다니, 정말 여기서 잘못되어도 할 말이 없었다. 짐승은 고개를 빳빳히 들고 자세를 바로 하더니, 이제는 걸음을 앞으로 내딛고 있었다. 뒷걸음질을 시도하던 바비는 눈에 파묻혀있던 나무뿌리에 발이 걸려 넘어지고 만다.

이같은 공포감을 딱 3달 전에 느꼈었다. 입발린 말로라도 잘못했다는 말이 나오질 않아 거친 손길을 그대로 견뎌냈어야 했던게 마치 오랜 과거의 일 같아 잊고있던 모양이었다. 이렇게, 얼마든지, 다시 그런 상황으로 돌아올 수 있었는데. 꼭 사람에게만 상처받으리라는 법은 없는건데.


느리게 다가오던 늑대의 발걸음이 뚝 멎은 것은 한순간이었다. 바비는 더 이상 제게 위협적으로 굴지않는 짐승을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뒤에서 제 쪽으로 불쑥 다가오는 인기척에 놀라 옆에 있던 나무기둥 쪽으로 몸을 웅크렸다. 늑대는 또다른 누군가의 형상을 마주하자마자 태세를 바꾸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눈을 질끈 감았다 뜨니 늑대는 이미 뒤를 보이며 멀어지고 있었고, 옆으로는 버논이 다가와 있었다.


"혼자 여기서 뭐해."

넋을 놓은 듯한 얼굴이 살짝 희게 질려 있었다. 바비는 방금 전까지 늑대가 물어뜯고 있던 짐승의 사체를 바라보고 있었다. 말을 걸어도 바비는 답이 없었다. 아무래도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버논은 일반 사람들에게 이런 광경이 트라우마가 될 수도 있다는 걸 모르지 않았다.


바비의 눈가가 붉어진다. 눈가가 반짝이는 걸 보니 곧 울음이라도 터질 것 같은 모양새라 버논의 마음이 다급해졌다. 누군가의 눈물을 보는 건 익숙하지 않은 일이다.


"..뭐하다가 이제 와?"

다시 정신을 차리자마자 바비는 버논의 탓을 하듯 뾰족하게 입을 열었다.

"얼마나 무서웠는데, ...얼마나,"


우욱, 우웩. 말을 하다말고 그는 옆으로 고개를 돌려 구역질을 해댔다. 입맛이 없다며 아침에 주스 한 잔만 먹었으니 나오는 건 없었다. 나무기둥을 짚고 숨을 고르는 바비를 조심스레 일으켜, 버논이 서둘러 산을 내려간다. 시간을 더 지체했다간, 이제 정말 해가 저물어 발이 묶일수도 있었다.



더운 물을 머리위로 맞으며 버논은 한참동안 머릿속에 교차하는 음성을 번갈아 떠올린다.

'얼마나 무서웠는데.'
'무서워, 무서워요...'
'얼마나 무서웠는데.'
'무서워, 무서워요...'


정신을 갉아먹는 경험은 한 번으로 족했다. 가까운 시일 내에 기차표든 비행기표든 끊어서 다른 곳으로 거처를 옮길 수 있도록 해주면, 저 외지인과 원만하게 떨어질 수 있을 것 같았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알래스카는 더욱 넓고 광활한 곳이니, 여기가 아니더라도 숨어들 곳은 충분할 것이다. 샤워를 마친 버논은 대충 머리를 말리고 옷을 입으며 침실로 향했다.


한쪽 끄트머리에 먼저 자리를 잡고 누워있던 바비는 고요해 보였다. 취침시간을 편하게 보내는 편이 아닌 버논은 거실의 소파나 차고에서 밤을 보내는 게 보통이었다. 그래서 제 침실을 바비에게 진적에 내어준 상태였다. 산에서 벌어졌던 일에 평정을 되찾기가 힘들었던건지 바비는 하루만 옆에 있어달라고 부탁을 해왔다. 천천히 몸이 오르내리는 걸 보아하니 이미 잠에 들었겠다는 생각에 버논이 조용히 침대에 몸을 뉘었다.

미등까지 전부 소등하고나니 방 안에 남는 빛이라곤 없었다. 그 어둠을 비집고, 바비의 목소리가 불쑥 나타난다. 자고있던 게 아닌 모양이었다.

"어떻게 찾은거야?"

"..."

"...아니, 거기 다 똑같이 생겨서. 난 어디가 어딘지 모르겠던데."

"페로몬으로 찾았어."


정말이었다. 감정적으로 동요가 심한 순간에 저도모르게 향이 풀리곤 하니까. 바비를 찾을 수 있었던 것도, 공포에 질린 그가 정처없이 향을 풀어제꼈기 때문이었다. 잠들기 직전에 할 법한 생각은 아니지만, 의외로 바비에게서는 부드러운 바닐라 향이 풍겼다. 그의 페로몬 향이 이럴 것이다 저럴 것이다 하는 생각은 해본 적 없지만, 아무튼 예상을 빗나가긴 했다.


바비는 버논 쪽으로 몸을 돌린다. 페로몬으로 찾았다고? 하얀 눈과 붉은 핏물이 범벅으로 섞인 풍경을 다시 생각하면서, 동시에 바비는 거짓말처럼 제 앞에 성큼 나타나 준 버논의 모습을 떠올린다. 정자세로 누워 천장만 보고있던 버논이 바비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 어둠에 눈이 익숙해지고, 둘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힌다. 조금 무심한듯한 얼굴의 윤곽을 눈짓으로 한 번 읽어낸 후, 벌어져있던 거리를 좁히며 바비가 그에게로 가까이 몸을 움직였다.


한 손으로 버논의 머리를 제 쪽으로 당긴 바비가 조용히 입을 맞춘다. 말캉한 입술과 함께 까슬한 수염이 입가에 닿았다. 낮을거라고 생각했던 버논의 체온은 따뜻했다. 머릿속을 끝없이 채우던 겁(怯)은 삽시간에 소멸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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