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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4 0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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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수사는 물살을 탔다. 피해자 형과 누나들의 적극적인 협조 덕분에 당시의 일당들도 모두 체포할 수 있었다고. 너무 오래 전 사건이라 공소시효가 지나지 않았을까 걱정했었으나 당시 피해자의 절대 다수가 미성년자였고 납치, 감금, 폭행, 불법매매를 겪은 데다 성폭행을 겪은 피해자도 많아서 지나치게 중범죄였다. 또한 보스를 비롯한 대부분이 체포를 피하기 위해서 외국에서 꽤 오래 머물렀기 때문에 공소시효는 차고도 넘친다고. 

그동안 형들은 결국 아버지를 회사에서 퇴출시켰고 노부가 아버지를 살해할까 두려웠는지 어머니, 간병인, 경호원과 함께 작은 섬에 있는 별장으로 보내버렸다. 제대로 된 비서 하나 딸려보내지 않았고 기껏 같이 가는 간병인과 경호원들은 사실상 감시를 겸하는 사람들이란 걸 알게 된 영감이 격분하긴 했지만 노부가 직접 이 세상 떠나게 해 드리고 쥐도새도 모르게 조용히 처리하는 편이 좋겠느냐고 '상냥하고 정중하게' 묻자 어머니는 기겁해 아버지를 끌고 섬으로 떠났다. 

어차피 언젠가 아버지와의 관계가 파국으로 끝날 거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건 태어난 날부터 정해진 일이었다. 태어나자마자 자식을 죽이려고 목을 사정없이 조르는 애비, 그리고 그 애비의 손이 거의 끊어지기 직전까지 물어뜯은 아들. 화해의 가능성이 있을 리가? 그래도 그렇게 관계를 사실상 완전히 파탄내고 나니 찝찝하긴 했었다.

그러니까 케이가. 

"내가 오늘 큰맘먹고 저녁 크게 산다. 먹고 싶은 거 아무거나 다 골라."

라고 하기 전까진 찝찝했었단 애기다. 그 말을 들으니까 갑자기 찝찝함이 날아가 버리더라고. 사실 영감과 깊은 정이 있는 사이도 아니고.

딱히 뭘 크게 얻어먹고 싶었던 건 아니지만. 케이가 밥을 종종 사긴 해도 짠돌이라 '먹고 싶은 거 다 골라!'라는 말을 듣는 일은 거의 없기 때문에 신나서 진짜냐고 묻자 케이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노부가 선택한 식당은 남미요리 전문점이었다. 케이가 언젠가 저기 맛있을 것 같다고 해서 갔었는데 정말 맛있게 먹고 나온 곳이었다. 그날 감으로 맛있을 것 같아서 찍어본 곳인데 먹어보니 진짜 맛있다고 신나하던 케이의 모습도 떠오르고, 정말로 상당히 괜찮았던 요리의 맛도 생각나서 다시 가 보자고 했다. 저렴한 편은 아니지만 또 한끼 식사에 못 쓸 정도는 아니라서 함께 이국적이고 맛있는 저녁을 먹고 나오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케이는 우리집 영감 만나서 헛소리 들은 날 기분전환 어떻게 했어요?"
"너한테 비싼 밥 뜯어먹었지. 비싼 칵테일도 뜯어먹고."
"역시... 네?"

케이는 장난꾸러기처럼 키득키득 웃었다. 

"진짜예요?"
"어. 진짜. 엄청 비싼 스테이크 먹고 싶다고 한 적 있었잖아."
"아... 아? 아!"

1년쯤 전에 케이가 갑자기 엄청 비싸고 살살 녹는 스테이크를 먹고 싶다고 한 적이 있었다. 이런 사람이 아닌데 웬일이지 싶었지만 그냥 데이트하는 기분으로 맛있게 먹고 기꺼이 밥값을 냈다. 그 후엔 근처의 고급호텔의 바에 갔다가 객실까지 올라갔던 날이었다. 물론 그땐 케이가 여전히 외박도 안 되고 집에 사람을 들일 수도 없다고 하던 때라 객실에서 하룻밤 묵진 못하고 새벽에 다시 나와야 했지만.

그때 협박을 받았는데 협박 받았다는 말도 못하고 속상한 마음에 비싸고 맛있는 걸 잔뜩 얻어먹고 기분 풀겠다고 '고급스테이크!' 외친 케이가 짠하면서도 너무 귀엽고. 노부가 기분이 복잡해 보이니 자기가 그때 비싼 밥을 맛있게 얻어먹고 기분이 풀렸던 걸 떠올리며 노부에게 비싼 밥을 사주겠다고 나선 것도 사랑스러웠다. 

"오늘도 호텔에 가 볼까요?"

그래서 케이의 귓가에 그렇게 속삭이자, 케이는 잠깐 고민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도전해 보자."

그때까지만 해도 케이가 말하는 '도전'이 뭔지 몰랐다. 그 도전이 뭔지 알게 된 건 오랜만에 호텔에서 함께 밤을 보내서 더 흥분한 두 사람이 몇 시간 후에야 욕조에 들어갔을 때였다. 서로 몸을 섞은 지도 벌써 몇 년째인데 낯선 향이 풍기고 낯선 탄력감을 주는 침대 때문에 왠지 색다른 기분이라 둘 다 한참이나 서로에게 매달려 있긴 했었다. 덕분에 몇 시간 후에야 침대에서 휘청휘청 내려오는 두 사람의 몸은 평소보다 더 얼룩덜룩했다. 케이도 많이 깨물고 정신없이 노부의 등을 긁어놓고 노부의 팔과 다리, 허리에 진한 멍을 남겼지만 노부가 물고 빨고 씹어댄 케이의 몸은 더 엉망이라. 노부는 케이를 안고 욕조에 들어가 열심히 케이의 어깨 위로 물을 끼얹어주고 있었다. 그때 케이는 호텔의 욕조 근처에 어메니티로 놓인 입욕제들을 찬찬히 확인해 보더니 유자와 장미, 라벤더를 들고 노부에게 보여줬다. 

"뭐 풀까?"
"입욕제 쓰려고요?"
"응. 난 장미도 좋은데 잘 때 장미향 때문에 너무 야한 기분 들까 봐 좀 그렇네. 안 그래도 호텔에서 자는 거라 좀 야한 기분인데. 약간 그렇지? 역시 유자나 라벤더인가."

케이가 외박을 하지 못하는 건 잘 때 갑자기 아깽이로 변해 버리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어릴 때의 트라우마 때문에 주위의 안전이 완벽하게 확인되지 못하면 불안해서 잠들 수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자다가 순찰을 하는 것도 그래서고. 물론 고급 호텔이니 안전하긴 하겠지만 그래도 낯선 곳에서 잠을 청해 보겠다는 말이 놀라워서.

"우리 오늘 호텔에서 자요?"

라고 물었더니 케이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 싫어?"
"아뇨, 좋아요."

상처를 딛고 한 걸음씩 나아가려고 하는 케이가 멋있고, 그 한걸음 한걸음을 노부와 함께 해 주는 것도 고맙고 기뻤다. 그날 밤 케이는 어느새 아깽이가 된 채로 노부의 품에서 깨어났고 덩달아 노부도 깨어난 건 예상대로였다. 예상대로 집이 아닌 곳에서 자도 아깽이로 깨어나자 케이는 조금 실망했지만 노부가 늑대로 변한 뒤 등에 태워주자 금세 기운을 되찾았다. 그날 밤에 케이는 늑대가 된 노부의 등에 올라타서 호텔 방 안 곳곳을 살펴보고 호텔 창가에서 노부의 등에 올라탄 채로 반짝이는 도시의 야경을 내려다보며 기분을 내기도 했다. 그리고 난 뒤 케이는 노부가 커피잔에 따라준 찬물을 마신 뒤 다시 잠들었다. 다시 잠이 든 케이의 표정은 편안했다. 나쁘지 않은 밤이었다. 

사실 케이와 함께한 시간이 7년이 아니라 7개월이었던 것처럼, 아니 7주, 7일... 여전히 케이에 대한 마음은 사그러들 줄을 모르고 점점 더 좋아진 데다, 케이가 드디어 마음을 완전히 허락했기 때문에 노부는 당장 프로포즈를 하고 싶었지만 참고 있었다. 재판이 아직 완전히 끝나지 않아서 그때 함께 탈출했던 이들도 최근에 여러 번 만나고 있었고 재판이나 그때의 그 사건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케이의 마음이 복잡해지는 것도 보여서 시간을 좀 더 두고 기다려줘야 하지 않을까 해서.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노부가 형들에게 불려가서 조금 늦게 퇴근하자 노부가 미리 부탁한 대로 같이 저녁을 먹으려고 노부의 집에 와서 기다리고 있던 케이는 열심히 노트북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뭐 봐요?... 부동산?"

케이가 화면에 띄워놓은 건 이 도시의 부동산 시세 변화였다. 가격에 큰 변화는 없어도 전체적으로 오르고 있다는 것 정도는 노부도 알고 있었다. 노부도 일단 고급맨션을 자가로 가지고 있는 입장이었으니까. 케이도 그렇고. 그래서 이미 둘 다 집이 한 채씩 있는데 더 사려는 건가 했는데. 

"내가 사는 집을 팔고 너네 집에 들어오는 게 나을까 네가 사는 집을 팔고 내집에 합치하는 게 나을까. 아니면 둘다 팔고 새 집을 마련하는 게 나을까 생각 중이었어. 새 집을 살 거면 돈 때문에 둘 중에 하나는 팔아야 될 텐데 어느 쪽이 더 잘 오를지 모르겠네. 새 집을 안 살 거면 굳이 안 팔아도 되긴 한데 집을 안 팔고... 근데 우리 둘 다 집이 위치가 괜찮잖아. 회사로 이동도 편하고. 아니면 우리 둘 중 하나의 집으로 합치더라도 다른 집은 안 팔고 월세를 주는 경우도 괜찮을까? 어때?"

그건 지금 모르겠고...

빨리 프로포즈를 해야 한다는 건 알겠어요!





케이가 그 정도로 진지하게 두 사람의 미래를 본격적으로 고민하고 있다는 걸 모르고 시간이 더 필요할 거라 생각했던 노부는 발등이 불이 떨어져서 급하게 프로포즈를 준비했다. 물론 급하게 준비했다고 해도 허투루 하지는 않았지만. 

노부는 요리를 잘 못했기 때문에 레스토랑을 빌려 프로포즈를 할까도 했었지만 프로포즈 내용 중에는 수인에 대한 이야기도 넣을 예정이라 역시 집에서 하기로 했다. 여러 모로 남이 들어 좋을 건 없으니까. 그때 떠오른 게 2번이었다. 아마미야의 회사는 큰 호텔 체인도 가지고 있는데, 그 중 한 호텔의 레스토랑에서는 특별한 단골들을 위해서 레스토랑에 직접 가서 먹는 것과 똑같은 맛을 즐길 수 있도록 요리해서 미리 부탁한 장소로 온도와 식감이 완벽하게 보존된 요리를 전달해 주는 서비스가 있다고 했었다. 그걸 떠올린 노부가 아마미야에게 그 서비스를 부탁하자 아마미야는 길길이 날뛰었다. 언제나 냉정하고 쿨한 척하고 있지만 성격이 불 같은 녀석이라 아마미야는 네가 나보다 먼저 결혼하는 꼴을 내가 봐 줄 것 같냐고 난리를 피웠다. 하지만 2번이 말만 그렇게 했을 뿐 진심으로 유치한 고집을 부릴 녀석은 아니라 바로 다음 날 레스토랑 쉐프에게 메뉴와 알러지 등 주문의 디테일을 확인하는 전화는 걸려오더라.





두근거리며 프로포즈를 하던 밤. 노부는 은은한 촛불을 켜고 케이가 좋아하는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정말 그 호텔 레스토랑에 직접 가서 먹는 것처럼 따뜻하고 촉촉한 스테이크와 여러 요리를 함께 즐긴 뒤에 똑같은 반지가 두 개 담긴 케이스를 내밀었다. 

"케이가 한밤의 순찰을 할 때든 한낮의 산책을 할 때든 케이의 옆에 함께하고 싶어요. 케이가 지금과 같은 모습이든 아니면 용맹하고 귀여운 고양이든 항상 케이의 모든 걸 사랑해요."

들뜨고 조금 멍해서 헛소리도 조금 섞인 것 같기는 했다.

"앞으로 우리 늘 함께하며 맛있는 것도 같이 먹고 아름다운 것도 같이 봐요. 낮잠도 같이 자고, 한여름엔 피서도 함께 가요. 한겨울엔 따뜻한 곳에서 함께 체온을 나눠요. 우다다도 같이 해요."

정말 우다다는 왜 나왔는지 모르겠다. 케이가 어느 날 신나서 거실에서 우다다 달려가는 걸 보고 너무 귀여웠던 게 머리에 콱 박혔는지. 

그때까지 눈물이 그런그렁한 채로 듣고 있던 케이가 '우다다도 같이 해요'란 말에 웃음이 터져서 그건 안 될 것 같다고 하는 바람에 분위기가 깨져 버리긴 했지만. 아니 그런 줄 알았지만. 케이는 노부가 케이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자 한참 그렁그렁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노부의 품으로 확 날아왔다. 왜 날아왔냐면 순식간에 아깽이로 변해서 뛰어들었으니까. 

노부가 무사히 아깽이를 품 안에 받아안자 아깽이는 울먹거리며 말했다. 

"네가 수인인 걸 알기 전에는 정말로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했고, 네가 수인이란 걸 안 다음에도 나는 안 될 거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그동안 그렇게 밀어내기만 했는데. 밀려나지 않아줘서, 꿋꿋하게 버텨줘서 고마워. 내가 널 욕심내면 안 된다고 생각했을 때도 네가 마음 쉽게 포기하지 못하게 여지는 주는 게 못된 거란 건 나도 알았어. 하지만 나도 널 잃고 사는 게 너무 싫었어. 그래서 그랬어. 미안해. 고마워. 네가 인내심이 강해서 다행이야."

무슨 소리. 노부는 인내심이 없었다. 어릴 때도 그런 점 때문에 자주 혼났었고. 하지만 이 사람만은 놓칠 수가 없어서 없던 인내심이 생겨났다. 이 사람이 귀여운 고양이 수인이란 걸 몰랐을 때도, 알게 된 이후에도, 정말 이 사람은 놓칠 수가 없어서. 그래서 7년을 버텼다. 

"사랑해요. 우리 이제 언제까지나 함께해요."
"그래 그러자. 나중에 우다다도 같이 하자."

케이... 감동적인 순간에 이러기예요? 모르는 척 넘어가주지...

노부가 심술이 나서 아깽이의 앞발을 잡고 분홍색의 앙증맞은 젤리를 꾹꾹 찌르자 아깽이는 노부의 손가락을 콱 물었지만 금세 미안해졌는지 조그만 혀를 내밀어 깨물었던 자리를 열심히 핥았다. 덕분에 프로포즈의 끝은 조금 우당탕탕이었지만 그래서 더 좋았다. 계속 이렇게 즐겁고 유쾌하고 우당탕탕 재미있게 살 것 같잖아.

​​



다음 날 당당하고 다정하게 함께 출근한 두 사람을 본 동료들은 깜짝 놀랐다. 둘이 사이가 가까운 건 알았지만 이 정도로 친한 건가? 그냥 카풀? 이라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직장 내에서 딱히 친한 사람은 많지 않은데 인기는 많은 스즈키 노부유키가 손가락에 프로포즈링이 분명한 반지를 반짝반짝거리며 그 반지보다 더 반짝거리는 얼굴로 웃었을 때는 한탄이 넘쳐 흘렀다. 그러나 그 한탄이 경악으로 바뀐 것은 누가봐도 스즈키 노부유키의 반지와 완전히 똑같은 반지를 낀 '얼음의 마치다'가 일부러 사람들 사이를 파고들어 앞으로 나서며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을 때였다. 

반지가 똑같아...?
두 사람이 결... 결혼한다고?
두 사람 그동안 사귀는 사이였어?
아니, 둘이 친하긴 했지만... 사귀었다고?
얼음의 마치다가 연애를 할 수는 있는 사람이었어?

두 사람이 그룹 내에서 워낙 유명인들이라 소문은 금세 온 회사 전체로 파다하게 퍼져고 노부는 어딜 가나 사람들의 시선이 노부와 케이의 손가락에 닿는 것을 느꼈지만 아무렇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좋았다. 이제 케이가 회사에서 귀엽고 발랄하게 통통 튀어다니든 참지 못하고 예쁘고 행복하게 웃고 있든 케이가 노부의 것이고, 노부가 케이의 것이란 건 이제 모든 사람이 알게 됐으니까. 

스즈키 노부유키, 마치다 케이타에게 7년째 여전히 대시 중? 
아니, 스즈키 노부유키, 마치다 케이타에게 7년째의 프로포즈 드디어 성공!






읽어준 부케비들 모두 ㅋㅁㅋㅁㅋㅁ 즐거운 연휴 보내라!
#놉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