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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1 18:37
특수 설계된 독방 수감소는 세 구역으로 나뉘어 있었다. 감옥이라고 했을 때 일반적으로 떠올리는 생활 구역, 그러니까, 헐크도 부술 수 없는 강화 유리로 된 큐브 안에 마련된 생활 공간이 있었다. 사각 지대 없는 CCTV가 여럿 감시하고 있는 하에, 침대 하나, 식사나 신문을 읽는 등의 활동을 할 수 있는 작은 책상과 의자 하나, 그리고 얼굴이나 손을 씻고 용변을 해결할 수 있는 수도 시설이 있는 모퉁이 공간이 있는 게 다였다. 공간 내의 모든 물건들에는 날카로운 모서리가 없었고, 럼로우가 혈청으로 강화된 슈퍼 솔져의 힘을 이용해 집어 던질 수 없도록, 혹은 상대방의 신체를 어딘가에 끼워넣어 위해를 가할 수 없도록 신경써서 디자인되어 있었다.
생활 구역 외에는 의료 구역과, 접견 구역이 있었다. 두 공간 모두 럼로우가 무기로 쓸 수 있을만한 물건의 반입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는 애로사항이 있는 공간들이었기 때문에 거꾸로 럼로우의 신체를 구속하는 것에 집중해 설계된 구역들이었다. 럼로우는 수감소에 도착하자마자 손의 총상 때문에 의료 구역에 제일 먼저 보내졌고, 자신의 손을 치료하는 의료진들 중 절반은 낯이 익은 얼굴들이라는 걸 금방 눈치챘다. 쉴드에서 자주 보았던 의료진들이었으니까. 모르긴 몰라도 나머지 절반도 쉴드와 관련이 있는 이들이겠거니 싶었다. 그들이 자신에게 주입해주고 있는 앰플도 별다른 설명은 듣지 못했지만, 라벨지가 너무나 익숙해서 희석 혈청이라는 걸 알아보지 못할 수가 없었다. 신경이 손상된건지 아니면 의료진이 진통제 종류나 양을 관대하게 준 건진 모르겠지만 어쨌든 봉합치료가 이뤄지는 걸 별다른 통증 없이 멍하니 내려다보고 있자니 아파트에서는 출혈 때문에 잘 몰랐었는데 생각보다 총상이 깊다는 게 보였다. 어쩌면 희석 혈청 치료에도 손가락 움직임에 문제가 남을지도 모르겠다는 감상에 곧바로 꼬리를 무는 생각이 '오른손 엄지와 검지라 앞으로 먹고 살기 힘들겠는 걸'인 것에 럼로우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이제는 사형이나 종신형 판결을 받고 죽을 일만 남았는데, 그런 쓸데 없는 걱정이 제일 먼저 드는 제 꼴이 우스웠다. 하지만 남들이야 이런 속 사정을 당연히 모르니 이 와중에 웃는 게 이상해 보였을 것이고, 특히 바로 옆에서 거즈로 피를 닦아내며 수술을 보조하고 있던 간호사가 곁눈질로 자신을 흘끗 경계하며 쳐다보는 게 느껴져 럼로우는 웃음기를 거두고 시선을 돌렸다. 애꿎은 의료진을 이 이상 불편하게 할 생각은 없었다.
식사는 당연히 평범한 식단이 배정되었다. 다만 그에게는 플라스틱은 커녕 나무 식기류 조차도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언제나 샌드위치나 부리또 같은 메뉴, 혹은 종이 스푼으로 대충 떠먹을 수 있는 수프나 라자냐, 파스타 같은 메뉴만이 주어졌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간에 럼로우는 먹을 수 없었다. 아주 뜨거운 물이나 차가운 얼음 물도 당연히 없었다. 그가 얻을 수 있는 가장 차가운 물은 세면대의 수도에서 나오는 물 뿐이었다. 그마저도 아마 지금 계절이 9월 말이라 쌀쌀해지고 있어서인 것 같았다. 애초에 수도꼭지에 온도 설정 자체가 없었으니까. 아침 식사에 나오는 주스를 작게 몇 모금 겨우 넘기고, 설탕 패킷을 챙겨뒀다가 세면대의 차가운 물에 약간 개어 점심이나 저녁 시간에 몇 모금 더 넘기는 게 그가 먹을 수 있는 것의 전부였다. CCTV가 자신을 전부 지켜보고 있는 데, 쉴드가, 퓨리가 전부 지켜보고 있는데 뭘 억지로 먹는 시도를 했다가 토하는 걸 보이고 싶지 않았다. 사방이 유리인데다가 사각지대는 전혀 없으니까 더더욱 그랬다. 하지만 허기가 느껴지지 않는 건 아니어서 때때로 밤에 소등이 된 뒤 멍하니 침대에 앉아 반대편 유리에 비친 자신의 형상(일 거라고 생각되는 어떤 형체)를 보면서 잭이 타주던 뜨거운 차나, 윈터가 늦은 밤에 종종 만들곤 하던 코코아의 향을 떠올렸다. 둘 다 사실상 설탕물에 더 가까웠고 식도가 타들어갈듯이 따뜻했고, 그리고... 그것들은 단순히 허기를 달래는 것 이상으로 그를 채워주는 어떤 역할을 했었다. 그의 삶에서 가끔씩 주어졌던 좋은 것들이, 즐거운 감정들이 물질로 형상화된다면 아마 머그잔에 담겨있던 그 따뜻한 액체들이 가장 가까운 형태였을 것이다. 금세 식어버리는 아주 짧은 찰나의 따스함이지만 그 한 순간만큼이라도 간절하고 녹아내릴 듯이 좋았다는 점이.
CCTV는 소등 후에도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잘 지켜볼 수 있도록 적외선 기능이 탑재되어 있을 테니 볼썽사납게 우는 꼴 같은 걸 보일 생각은 없었다. 럼로우는 억지로 잭과 윈터 생각을 머릿속에서 밀어내고 천천히 숨을 내쉬며 침대에 누웠다. 사실 침대라고 하기엔 조금 애매했지만, 어쨌든 이제 이게 그의 침대였다. 윈터는 별 말 없었겠지만 잭은 속으로 질색했을 것 같은 침대라는 생각에 웃음이 조금 나오다가도, 어느새 또 그들을 다시 생각했다는 것에 입가가 굳어졌다. 딱딱한 침대에 누워 깜깜한 천장을 올려다보면서 럼로우는 왼쪽 어깨와 등을 아프게 긁는 감각에 무던해지려고 눈을 천천히 깜빡였다. 이제 이게 그의 침대였다. 아마 재판이 끝나고 사형이든 뭐든 집행 받기 전까지도 그럴 것이다. 물론 일반 감옥이었더라도 대단히 좋은 침대는 아니었을게 당연하지만... 어쨌든 그걸 감안해도 이 침대는 안락함과는 거리가 매우 멀었고, 그건 아마 자신이 혈청으로 강화된 신체를 가졌다는 점이 어떤 거대한 위협으로 인지되었기 때문일 거였다. 자신은 그냥 평범한 군인 정도의 키일 뿐 잭처럼 특별히 큰 키도 아닌데도 이 침대는 다소 비좁고 짧아서 모로 누워야 하는 길이와 폭이었고, 재질 또한 철제 프레임에 (바닥에 용접되어야 하니까), 매트리스는 골판지로 되어있는데 그것도 프레임 위에 얹어져 있다기보다는 액자에 끼워진 듯한 구조였다. 그가 그걸 집어 던지기라도 할까봐 걱정한 것 같았다. 대체 이케아의 얄팍한 솜 매트리스 같은 걸 지급받으면 그걸로 무슨 위협적인 행동을 할 수 있을거라고 생각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럼로우에게는 나름 두터운 매트레스 커버로 감싸진 이 딱딱한 골판지 매트리스가 전부였고, 그게 거친 죄수복으로 감싸인 화상 흉터를 긁어대는 감각이 따가웠다.
어차피 럼로우로서는 이 시설의 안락함에 대해서는 뭐라 얘기할 의향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자신이 그럴 수 있는 입장이 아닌 것도 잘 알았다. 다만 잠들기 쉽지 않은 것도 사실이었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얇은 모포를 끌어안아 이마에 댄 채 그게 잭의 손이라고 스스로를 속여서 잠에 들 수 있기를 바랐다. 제 등 뒤의 텅 빈 이질감을 어떻게든 윈터의 존재감으로 스스로를 속여서 잠에 들 수 있기를 바랐다. 하지만 대부분의 날들은 소등이 된 뒤에도 한참동안 제 심장소리와 숨소리만이 울릴 뿐 적막한 이 생활 구역에 가만히 누워 있을 뿐, 잠들 수 없었다. 그럴 때면 어서 빨리 재판이 진행되어서 형 집행을 받고 모든 게 끝나 편안해지고 싶다는 생각 뿐이었다.
아침 시간에는 늘 신문을 읽었다. 왼쪽 눈 때문에 신문의 작은 활자체를 읽는 건 이제 쉽지 않을 뿐더러 오래 읽으려 눈을 찌푸리고 있으면 머리가 아파오는 일이었지만 럼로우는 그에게 주어지는 매일 매일의 신문 서너종류(늘 일정치는 않았다)를 늘 구석구석 꼼꼼히 전부 읽었다. 간수들은 그가 자신의 재판에 관심이 있는 줄로만 알았지만 전혀 아니었다. 쉴드에 대한 여론이 아주 우호적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나, 쉴드를 공격해오던 공화당과 우파에 대한 여론이 갑자기 나빠진 것 등에 대해서 럼로우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자신의 재판이 공개 재판이 될 것이고, 실시간 생중계 될 것이라는 1면의 헤드라인도 어차피 다 예상하던 사실이니 놀랄 일도 아니었다. 배심원 선발에 대해서 공화당과 민주당측 인사들(정치인들 외에도)이 피터지게 싸우고 있는 것도 관심 없었다. 이런 여론전은 이미 쉴드가 구상해둔 것들이었으니까. 그가 신문을 그토록 낱알 훑듯이 보고 있는 건 혹시나 그 어딘가에 혹여라도 아이에 대한 언급이 있는지, 혹시라도 잭이나 윈터에 대한 언급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퓨리가 그가 지켜야 할 몫의 거래를 다 하고 있는지 확인할 길은 이제 이것 뿐이었으니까. 럼로우는 신문의 모든 면들과 기사들을, 심지어 이 재판과 관련 없는 모든 작은 칼럼들까지도 확인하면서 페이지수와 광고들도 꼼꼼히 확인했다. 퓨리라면 자신을 속이기 위해 가짜 신문을 찍어낼 수도 있을 위인이니까. 거래에 따르면 잭과 윈터는 지금 임무지에 있느라 이 재판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어야 했다. 이런 재판이 벌어지고 있는 줄 전혀 몰라야 했다. 하지만 만에 하나 퓨리가 그걸 해내지 못했다면 그 둘은 어떻게든 재판을 막기 위해 무슨 일이든 할 것이다. 물론 그게 신문에 티가 날 정도가 되려면 일이 틀어지고 나서도 시일이 꽤 흐른 뒤가 되어야 할 테지만, 어쨌든 럼로우로서는 확인할 길은 이것 뿐이었다.
다행히도 체포된 지 일주일이 되도록 그런 조짐은 없었다. 그 후 며칠이 지나 배심원들이 소환되고, 주요 참고인 법정 증언이 시작되어도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럼로우에게는 온갖 대형과 중형 로펌들에서 변호인이 되겠다는 제안들이 들어왔지만 럼로우는 그들을 모두 무시했다. 다들 이 희대의 사건을 뒤집는 변호사가 되어 이름을 날리고 막대한 수익료를 얻어보겠다는 심산인 것 같았다. 대체 다들 어디에서 자신이 그런 수익료를 낼 수 있는 자산이 있다고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생각한다는 점에서 이미 하이드라 수뇌부라고 확신하는건가? 아니면 대충 회고록이나 그런걸로 떼돈을 벌 거라고 보는건가? 혹은 슈퍼 솔져 DNA라도 갖다 팔 거라고 보나? 어쨌든 럼로우는 쉴드와 사전에 협의한대로 그들을 모두 무시했고, 쉴드는 예정대로 그걸 갖고 황색언론에서 '아무도 변호를 맡으려 하지 않아 국선 변호사를 배정 받았다'는 여론전을 펼쳤다. 물론 황색언론에서 나온 말이므로 특별히 정정보도가 나오진 않았지만 SNS에서는 충분히 이야기가 퍼졌다. 참고인 법정 증언이 시작되며, 생중계가 진행되고 충격적인 얘기들만 자극적으로 편집되어 숏폼을 중심으로 퍼져나가는 동안 자연스럽게 중대형 로펌에서 럼로우에게 변호인 제안을 넣었던 사실들은 다들 없었던 일마냥 흔적도 없이 조용히 지워졌다. 아직 참고인 법정 증언 단계, 그러니까 이제 재판의 초입 단계일 뿐인데도 뉴스에서는 연일 이런 하이드라 수뇌부를 증거와 함께 잡아내려고 오랜 기간 첩보 활동을 벌이며 고생해오던 쉴드를 막무가내로 무능하다는 프레임을 씌워 몰아붙이던 공화당이 코너로 몰리고 있었다. 슈퍼 솔져니 외계인이니 기존과는 전혀 다른 위협들이 난무하는 요즘 시대의 전쟁 범죄나 테러에 대응하는 조직인 쉴드가 기능하는 방식과 템포를 공화당이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평가가 쏟아지고 있었다. 전반적 분위기와 여론이 너무나 치우쳐 있다보니 이러한 뉴스와 SNS 여론에 배심원단이 고스란히 노출되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도 지적하지 않았다. 이 또한 럼로우와 쉴드가 설계한 대로였다.
다만 그들이 예측하지 못한 건 럼로우의 몸이 얼마나 빨리 망가질 것인가와 그에게 배정된 국선 변호사가 얼마나 성실한 사람일 것인가였다. 지금까지는 이틀에 한번 정도씩 희석 혈청 앰플과 형질 안정제를 번갈아 투여하면 되었지만 그것도 결국 윈터가 곁에 있었을 때의 얘기였는지, 체포되고 열흘 쯤 지났을 무렵 결국 폐 부전이 일어났다. 그 정도 사태를 예견했던 건 아니었기도 했고, 늘 감시인력이 CCTV를 모니터링하고 있었기 때문에 생활 구역에는 럼로우가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벨 같은 게 없었는데, 때마침 오전 시간이라 CCTV를 모니터링하던 인력들은 참고인 법정 증언 생중계를 보고 있어서 럼로우가 쓰러진 걸 발견하는 데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사건 후 생활 구역에 비상벨을 설치해줬지만 문제는 럼로우에게 배정된 국선 변호사가 성실한 사람이라는 점이었다. 그는 겉보기에는 유약한 베타 남성같았지만 예정된 스케쥴대로 자기 피고인을 만나러 왔다가 이틀에 걸쳐 일어나있던 일련의 사건에 대해 알게되고 나서는 럼로우에 대해 건강상의 이유로 수감 장소 변경 및 재판 연기를 청구하려 했다. 럼로우는 '위험을 무릅쓰고' 접견 구역이 아닌 의료 구역에서 구속도 제대로 되지 않은 자신을 코앞에 두고 그 방안들에 대해 말하는 변호사를 빤히 바라보며 어쩌다가 이런 멀쩡하고 성실한 사람이 자신에게 배정된 것일까 하고 멍하니 생각했다. 그런 운 좋은 일이 어쩌다가 자신에게 일어났을까. 아니, 아니지. 받아들일 수 없을 때니까 이런 운 좋은 일이 일어났겠지.
변호사의 설명이 끝나자 럼로우는 일부러 한 박자 쉬었다가 다시금 그의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변호사의 표정에서 그가 불편해하는 기색이 이미 엿보였다. 그를 이런식으로 불편하게 하는 건 결코 기분 좋지 않았지만... 하지만 필요한 일이었다.
"무어 씨."
"네."
럼로우는 자신이 다음에 해야 할 말이 어떤 것인지 잘 알았다. 하고 싶지 않았지만... 잘 알았고, 솔직히 자신이 그런 일을 잘 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남들은 잭을 두고 싸이코패쓰라는 말을 곧잘했지만, 직업이 직업인데다 연차가 있는 만큼 고문에 있어서는 자신도 그 못지 않게 남을 괴롭히는데에는 일가견이 있었다. 이제는 얼굴의 절반이 화상으로 뒤덮였으니 섬뜩하게 보이는 건 더더욱 쉬운 일이었다. 럼로우는 일부러 고개를 살짝 앞으로 기울였다. 위의 조명을 받아 화상으로 일그러진 살갗의 굴곡이 더 잘 그늘져보이도록. 그러곤 좀더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이런 말을 건네야 한다는 게 정말 싫었다.
"둘째가 이제 유치원에 가죠?"
변호사의 표정이 그대로 굳었다. 그는 자신에게 가족은 커녕 사생활 얘기는 단 한번도 한 적이 없으니까. 그가 자신의 국선 변호사로 지정된 바로 그날 오후에 쉴드가 그의 프로필 파일을 접견 구역에서 한 번 보여줬었고, 럼로우는 그 내용을 낱낱이 기억하고 있었다. 럼로우는 변호사의 굳은 표정이 당혹감에서 공포감, 분노, 그리고 다시금 두려움으로 빠르게 물들듯 전환되는 걸 가만히 지켜보다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자신이 쥐고 흔들어야 하는 타인의 약점이 하고 많은 것들 중에 상대방의 자녀라는 게 럼로우의 속이 뒤집어질 듯이 아프게 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역할이 어떤 것인지 잘 알았고, 그걸 거스를 정도로, 그러니까 어린 아이를 약점 잡는 짓을 못할 만큼의 인간은 또 못 되었다.
"피차 귀찮은 일은 만들지 맙시다. 무슨 뜻인지 알죠?"
변호사는 충격에 멍한 듯이 잠시 가만히 앉아 있더니 황급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가방을 빠르게 챙겨 떠났다. 마치 조금이라도 더 머물렀다간 럼로우가 자신을 공격하기라도 할까봐 두려워하는 사람처럼. 이틀 뒤에 럼로우는 자신의 국선 변호사가 변경되었다는 통보를 받았다. 새로 배정된 여성 베타 변호사는 미리 언질을 받은 건지 뭔지는 몰라도 쓸데없는 정의감은 없었고, 럼로우는 그게 편하다고 생각했다.
체포된 지 3주차 부터는 럼로우도 법정에 소환되기 시작했고, 덕분에 드디어 의료진이 강도 높은 혈청 앰플과 형질 안정제, 그리고 진통제를 제공해주기 시작해서 컨디션은 한층 나아졌고 통증은 훨씬 가벼워졌다. 럼로우는 법정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피고인석에 가만히 앉아 재판에 별 관심없어 보이는 표정으로 조용히 있거나, 혹은 때때로 심문대에 올라 검사측의 심문을 받기도 하고, 그에 따른 변호사의 반대신문을 받기도 했다. 어느 쪽이든 간에 럼로우는 예정된 대로 일관되게 차분하고 약간 관심 없는 듯이 지루해보이는 것도 같은 태도로 모든 혐의를 인정했다. 다만 상황을 고려한 감형 및 건강 상태를 감안한 치료 감호를 요청할 뿐이었다. 예상대로 그의 이런 침착한 태도는 배심원단으로부터 격분과 의구심, 냉소적인 태도를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앰플의 강도를 높였음에도 불구하고 4일차에 다시 폐부전이 발생했고, 불규칙한 심박 기기음 사이로 간간이 들리는 의료진의 대화 속에서 럼로우는 자신이 두어번 심정지 상태가 왔었다는 걸 깨달았다. 다음날에도 법정 출석이 예정되어 있었으므로 새벽 내내 의료진이 붙어서 여러 수치들을 모니터링하고 있는데, 7시 무렵에 잔뜩 긴장한 얼굴의 어린 베타 여성이 의료 구역으로 들어왔다. 출입 뱃지를 하고 있는 걸 보면 인가 받은 사람인게 분명했지만 누가 봐도 의료인은 또 아니었다. 세 명의 간호사와 럼로우가 문가를 돌아보자 검정색 기내용 캐리어를 끌고 있는 새로운 인물이 멋쩍게 웃으며 방안으로 한 걸음 더 들어섰다.
"안녕하세요. 로쉘 바넘입니다. 현장 책임자 애벗씨에게 안내장 전해드리면 된다고 들었는데요..."
간호사들 중 가장 연차가 높은 갈색머리 알파 여성이 앞으로 나서자 로쉘이 종이 파일을 하나 내밀었다. 애벗은 잠시 그 파일을 받아들어 훑어보더니 약간 어이 없다는 듯이 작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메이크업 담당자래."
그러고는 로쉘에게 할 일을 하라는 듯이 다른 간호사들과 함께 한쪽 구석으로 물러나 있었다. 럼로우는 지금 제 모습이 어지간히 엉망이겠거니 싶어 잠자코 있었다. 아직까지는 아니었지만, 무어 변호사와 같은 소리를 하는 사람이나, 혹은 동정론 얘기를 하는 사람이 등장하는 건 어쩌면 시간 문제일 지 몰랐다. 그래서는 안 되니까. 그러니까 쉴드에서 메이크업 담당자를 보냈을 것이다. 자신이 다른건 몰라도 어쨌든 당장 오늘내일 죽을지도 모르는 상태의 사람이라는 건 법정에서 들켜선 안 되니까. 그래서 코에 산소줄을 끼고 팔에 IV줄을 달고, 몸에는 심박수를 체크하기 위한 센서를 부착한 채 침대에 비스듬히 기대 누워 로쉘이 제 침대 옆 테이블에 메이크업 도구들을 가지런히 셋팅하는 걸 얌전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일반적인 손님이 아니었으므로 당연히 거울이 셋팅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로쉘이 내려놓은 파우더 파운데이션 중에는 거울이 달려있는 것들이 몇 가지 있었고, 럼로우는 그 모서리에 일부 비친 자신을 볼 수 있었다. 생활 구역의 세면 시설에는 거울이 따로 있지 않았기 때문에 거진 3주 만에 자신의 모습을 보는 셈이었다. 화상으로 외모가 흉해진 것이나, 수감된 뒤로 체중이 더 줄어든 점 등을 감안해도 쉴드가 메이크업 담당자를 보낸 게 놀랍지 않은 모습이었다. 럼로우는 로쉘이 차곡차곡 꺼내드는 제품들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어떤 지시를 받았습니까?"
방안에 있는 모두가 흠칫 놀라는 게 느껴졌다. CCTV가 지켜보고 있고, 보안 요원들이 바로 구역 바깥에 서 있지만, 이 방안에는 평범한 베타 여성 넷 뿐이고 자신은 특별히 구속되지 않은 상태이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다들 지난 3주간 자신이 얼마나 흉악한 전쟁 범죄와 테러, 국가반역죄를 저지른 하이드라 수뇌부인지에 대한 공개 재판과 여론을 지켜봐오지 않았나. 당연한 반응이었다. 럼로우는 이미 침대에 어느 정도 기대있는 채였지만, 일부러 더 천천히 등을 기대 누우면서 어깨에 힘을 더 풀어내렸다. 사실 그런 자세는 등의 화상 흉터가 배겨서 아팠지만, 그가 할 수 있는 한 가장 덜 위협적으로 보일 수 있는 형태라는 게 중요했다.
"...안 아파보이게 하라고..."
로쉘은 망설이다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답했다. 대답하면서도 자신이 럼로우에게 이러한 사실을 발설해도 되는지 확신은 없었고, 다만 그가 두려워서 최소한의 대답을 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럼로우는 이제 겨우 스물을 조금 넘겼을 정도로 밖에는 보이지 않는 어린 여자애에게 NDA를 서명하게 하고 이 방에 집어넣었을 쉴드에 조금 화가 났다. 업무 계약을 하기 전에 자신이 이 '흉악범'을 상대하게 될 거란 걸 알고 계약하긴 했을까? 태도로 봐선 영 아닌 것 같았다. 아마 위약금 같은 게 겁나서 못한다는 말도 못 했겠지. 쉴드는 일부러 그걸 노리고 이런 어린 아이를 골랐을 것이다. 럼로우로서는 사실 어린 아이를 타이르는 건 해 본 적도 없고 적성에 맞는 일도 아니었지만... 어쨌든 로쉘을 더 겁에 질리게 하고 싶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할 지 알 수도 없을 뿐더러 자신이 한다고 해봤자... ...그러니 그냥 최대한 간결하게 의사를 전달하는 게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래요... 하지만 어차피 분장으로 가릴 수 있는 정도는 아닌 것 같으니까, 차라리 이렇게 합시다. 더 안 좋아 보이게 하세요. 눈 아래쪽만 약간만요. 그리고 그 하얀 손수건 빌려줄 수 있어요?"
로쉘은 상당히 당황한 것 같았다. 쉴드의 지시와 상반되는 제안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 판단이 서지 않는 것 같았다. 도움을 요청하듯 간호사들 쪽을 돌아보았지만 그들은 그저 어꺠를 으쓱하며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쉴드 담당자에게 전화를 해볼 수도 없었다. 그런 통신기기는 전부 보안 검색대에서 제출했으니까. 출입 할때 경비와 절차가 그렇게 삼엄한테 잠깐 통화하겠다고 나갔다 올게요 하기엔 이미 시간이 벌써... 로쉘이 곤란한 표정으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건, 그러니까 그녀를 가장 당혹스럽게 하는 건 이 '흉악한 범죄자'가 자신을 조심스럽게 대하면서 다정한 목소리로 침착하게 말을 걸어준다는 점이었다.
"만일 문제가 생기면... 쉴드가 문제 삼으면 내가 시켰다고 하면 됩니다. 강제했다고 하면 돼요. 사실이잖아요. 여기 CCTV도 있고 증인들도 있잖아요. 괜찮아요. 당신은 문제 없어요."
이 흉악범은 이상했다. 아니면, 보통 범죄자들은 이런 식으로 피해자를 다정하게 유인해서 범죄를 저지르는 걸까? 로쉘은 혼란스러운채로 럼로우의 요청대로 그의 눈가, 특히 눈 아래부분에만 일부러 푸른색과 붉은 색의 섀도우로 창백한 낯빛을 더 짙게 연출했고, 흰색 손수건을 그에게 내어주었다. 그는 산소호흡기의 도움을 받아 호흡할 적마다 실제로 고통스러워보였고, 가까이에서 보니 화상 흉터 부위의 살갗이 군데군데 하얗게 보이는 건 제대로 된 수분크림 같은 걸 바르고 있지 않은 건지 살갗이 여기저기 일어나 있어서였다. 그것 역시 빨갛게 일어나 있어서 아파보였다. 어쨌든 여러모로... 여러모로 로쉘 자신이 미디어에서 보던 인물과는 앞뒤가 맞지 않아 너무나 이상한 경험이었고, 그녀는 자신이 NDA를 작성했기 때문에 이것에 대해 아예 아무에게도 발설치 않고 그냥 잊어버릴 수 있는 게 차라리 잘 된 일인가 싶을 정도로 너무나 모순덩어리 같은 경험이었다고 생각했다.
그날 럼로우는 일부러 피고인석에 앉아있는 동안 내내 아픈 척 이마를 괴고 있다가 증인들의 증언 내용이 전혀 슬픈 내용이 아닌데도 일부러 눈물을 내비치며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는 모습을 보였다. 우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몸이 아픈 것만 해도 우는 건 쉬웠고, 잭이나 윈터, 아이의 안전에 대한 불안감, 혹은 이 재판의 어느 순간에든 피어스의 사진이나 영상이 튀어나올 수 있다는 두려움을 조금만 풀어내려도 눈물이 흐르는 건 쉬운 일이었다. 차라리 그걸 잠그는 게 어렵다면 어려운 일이었다.
럼로우는 다음날 아침 신문에서, 뉴욕 타임즈를 비롯한 네 종류의 신문 모두에서 어제 자신의 법정 생중계 장면들 중 눈물을 흘리기 전, 후의 모습과 하얀 손수건의 전, 후 모습을 캡쳐한 여러 컷의 사진들을 세세하게 분석한 기사들이 잔뜩 실린 것을 보았다. 일부러 아파보여서 동정 여론을 사기 위해 메이크업을 한 것이라며, 대체 이 삼엄한 경비를 받는 죄수에게 누가 메이크업 용품을 공급한 것이고 지급을 허락한 것이냐며 갑론을박을 벌이고 있는 기사들이 한가득이었다. 그 비난의 화살표는 언론사의 논조마다 달랐지만, 어찌되었든간에 그 누구도, 그 어떤 기사도 그의 건강 상태를 염려하고 있지 않다는 게 중요했다. 그런 동정론에 대한 기미조차 그 어디에도 없었으니 목적은 완벽하게 달성한 셈이었다. 럼로우는 아까부터 가슴께를 간질거리듯이 흘러나오는 잔기침에 인공 알파향 스프레이를 하도 뿌려서 축축할 정도인 손수건을 코에 대고 숨을 천천히 들이쉬며 눈을 감았다. 이대로면 사형 판결은 문제 없을 것이다. 자신은 어떻게든 재판이 끝날 때까지 살아만 있으면 되었다.
럼로우텀 스팁럼로우 버키럼로우 롤린스럼로우
+9월 23일이 체포일이고, 75편은 그로부터 약 3주 간의 일임
생활 구역 외에는 의료 구역과, 접견 구역이 있었다. 두 공간 모두 럼로우가 무기로 쓸 수 있을만한 물건의 반입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는 애로사항이 있는 공간들이었기 때문에 거꾸로 럼로우의 신체를 구속하는 것에 집중해 설계된 구역들이었다. 럼로우는 수감소에 도착하자마자 손의 총상 때문에 의료 구역에 제일 먼저 보내졌고, 자신의 손을 치료하는 의료진들 중 절반은 낯이 익은 얼굴들이라는 걸 금방 눈치챘다. 쉴드에서 자주 보았던 의료진들이었으니까. 모르긴 몰라도 나머지 절반도 쉴드와 관련이 있는 이들이겠거니 싶었다. 그들이 자신에게 주입해주고 있는 앰플도 별다른 설명은 듣지 못했지만, 라벨지가 너무나 익숙해서 희석 혈청이라는 걸 알아보지 못할 수가 없었다. 신경이 손상된건지 아니면 의료진이 진통제 종류나 양을 관대하게 준 건진 모르겠지만 어쨌든 봉합치료가 이뤄지는 걸 별다른 통증 없이 멍하니 내려다보고 있자니 아파트에서는 출혈 때문에 잘 몰랐었는데 생각보다 총상이 깊다는 게 보였다. 어쩌면 희석 혈청 치료에도 손가락 움직임에 문제가 남을지도 모르겠다는 감상에 곧바로 꼬리를 무는 생각이 '오른손 엄지와 검지라 앞으로 먹고 살기 힘들겠는 걸'인 것에 럼로우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이제는 사형이나 종신형 판결을 받고 죽을 일만 남았는데, 그런 쓸데 없는 걱정이 제일 먼저 드는 제 꼴이 우스웠다. 하지만 남들이야 이런 속 사정을 당연히 모르니 이 와중에 웃는 게 이상해 보였을 것이고, 특히 바로 옆에서 거즈로 피를 닦아내며 수술을 보조하고 있던 간호사가 곁눈질로 자신을 흘끗 경계하며 쳐다보는 게 느껴져 럼로우는 웃음기를 거두고 시선을 돌렸다. 애꿎은 의료진을 이 이상 불편하게 할 생각은 없었다.
식사는 당연히 평범한 식단이 배정되었다. 다만 그에게는 플라스틱은 커녕 나무 식기류 조차도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언제나 샌드위치나 부리또 같은 메뉴, 혹은 종이 스푼으로 대충 떠먹을 수 있는 수프나 라자냐, 파스타 같은 메뉴만이 주어졌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간에 럼로우는 먹을 수 없었다. 아주 뜨거운 물이나 차가운 얼음 물도 당연히 없었다. 그가 얻을 수 있는 가장 차가운 물은 세면대의 수도에서 나오는 물 뿐이었다. 그마저도 아마 지금 계절이 9월 말이라 쌀쌀해지고 있어서인 것 같았다. 애초에 수도꼭지에 온도 설정 자체가 없었으니까. 아침 식사에 나오는 주스를 작게 몇 모금 겨우 넘기고, 설탕 패킷을 챙겨뒀다가 세면대의 차가운 물에 약간 개어 점심이나 저녁 시간에 몇 모금 더 넘기는 게 그가 먹을 수 있는 것의 전부였다. CCTV가 자신을 전부 지켜보고 있는 데, 쉴드가, 퓨리가 전부 지켜보고 있는데 뭘 억지로 먹는 시도를 했다가 토하는 걸 보이고 싶지 않았다. 사방이 유리인데다가 사각지대는 전혀 없으니까 더더욱 그랬다. 하지만 허기가 느껴지지 않는 건 아니어서 때때로 밤에 소등이 된 뒤 멍하니 침대에 앉아 반대편 유리에 비친 자신의 형상(일 거라고 생각되는 어떤 형체)를 보면서 잭이 타주던 뜨거운 차나, 윈터가 늦은 밤에 종종 만들곤 하던 코코아의 향을 떠올렸다. 둘 다 사실상 설탕물에 더 가까웠고 식도가 타들어갈듯이 따뜻했고, 그리고... 그것들은 단순히 허기를 달래는 것 이상으로 그를 채워주는 어떤 역할을 했었다. 그의 삶에서 가끔씩 주어졌던 좋은 것들이, 즐거운 감정들이 물질로 형상화된다면 아마 머그잔에 담겨있던 그 따뜻한 액체들이 가장 가까운 형태였을 것이다. 금세 식어버리는 아주 짧은 찰나의 따스함이지만 그 한 순간만큼이라도 간절하고 녹아내릴 듯이 좋았다는 점이.
CCTV는 소등 후에도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잘 지켜볼 수 있도록 적외선 기능이 탑재되어 있을 테니 볼썽사납게 우는 꼴 같은 걸 보일 생각은 없었다. 럼로우는 억지로 잭과 윈터 생각을 머릿속에서 밀어내고 천천히 숨을 내쉬며 침대에 누웠다. 사실 침대라고 하기엔 조금 애매했지만, 어쨌든 이제 이게 그의 침대였다. 윈터는 별 말 없었겠지만 잭은 속으로 질색했을 것 같은 침대라는 생각에 웃음이 조금 나오다가도, 어느새 또 그들을 다시 생각했다는 것에 입가가 굳어졌다. 딱딱한 침대에 누워 깜깜한 천장을 올려다보면서 럼로우는 왼쪽 어깨와 등을 아프게 긁는 감각에 무던해지려고 눈을 천천히 깜빡였다. 이제 이게 그의 침대였다. 아마 재판이 끝나고 사형이든 뭐든 집행 받기 전까지도 그럴 것이다. 물론 일반 감옥이었더라도 대단히 좋은 침대는 아니었을게 당연하지만... 어쨌든 그걸 감안해도 이 침대는 안락함과는 거리가 매우 멀었고, 그건 아마 자신이 혈청으로 강화된 신체를 가졌다는 점이 어떤 거대한 위협으로 인지되었기 때문일 거였다. 자신은 그냥 평범한 군인 정도의 키일 뿐 잭처럼 특별히 큰 키도 아닌데도 이 침대는 다소 비좁고 짧아서 모로 누워야 하는 길이와 폭이었고, 재질 또한 철제 프레임에 (바닥에 용접되어야 하니까), 매트리스는 골판지로 되어있는데 그것도 프레임 위에 얹어져 있다기보다는 액자에 끼워진 듯한 구조였다. 그가 그걸 집어 던지기라도 할까봐 걱정한 것 같았다. 대체 이케아의 얄팍한 솜 매트리스 같은 걸 지급받으면 그걸로 무슨 위협적인 행동을 할 수 있을거라고 생각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럼로우에게는 나름 두터운 매트레스 커버로 감싸진 이 딱딱한 골판지 매트리스가 전부였고, 그게 거친 죄수복으로 감싸인 화상 흉터를 긁어대는 감각이 따가웠다.
어차피 럼로우로서는 이 시설의 안락함에 대해서는 뭐라 얘기할 의향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자신이 그럴 수 있는 입장이 아닌 것도 잘 알았다. 다만 잠들기 쉽지 않은 것도 사실이었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얇은 모포를 끌어안아 이마에 댄 채 그게 잭의 손이라고 스스로를 속여서 잠에 들 수 있기를 바랐다. 제 등 뒤의 텅 빈 이질감을 어떻게든 윈터의 존재감으로 스스로를 속여서 잠에 들 수 있기를 바랐다. 하지만 대부분의 날들은 소등이 된 뒤에도 한참동안 제 심장소리와 숨소리만이 울릴 뿐 적막한 이 생활 구역에 가만히 누워 있을 뿐, 잠들 수 없었다. 그럴 때면 어서 빨리 재판이 진행되어서 형 집행을 받고 모든 게 끝나 편안해지고 싶다는 생각 뿐이었다.
아침 시간에는 늘 신문을 읽었다. 왼쪽 눈 때문에 신문의 작은 활자체를 읽는 건 이제 쉽지 않을 뿐더러 오래 읽으려 눈을 찌푸리고 있으면 머리가 아파오는 일이었지만 럼로우는 그에게 주어지는 매일 매일의 신문 서너종류(늘 일정치는 않았다)를 늘 구석구석 꼼꼼히 전부 읽었다. 간수들은 그가 자신의 재판에 관심이 있는 줄로만 알았지만 전혀 아니었다. 쉴드에 대한 여론이 아주 우호적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나, 쉴드를 공격해오던 공화당과 우파에 대한 여론이 갑자기 나빠진 것 등에 대해서 럼로우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자신의 재판이 공개 재판이 될 것이고, 실시간 생중계 될 것이라는 1면의 헤드라인도 어차피 다 예상하던 사실이니 놀랄 일도 아니었다. 배심원 선발에 대해서 공화당과 민주당측 인사들(정치인들 외에도)이 피터지게 싸우고 있는 것도 관심 없었다. 이런 여론전은 이미 쉴드가 구상해둔 것들이었으니까. 그가 신문을 그토록 낱알 훑듯이 보고 있는 건 혹시나 그 어딘가에 혹여라도 아이에 대한 언급이 있는지, 혹시라도 잭이나 윈터에 대한 언급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퓨리가 그가 지켜야 할 몫의 거래를 다 하고 있는지 확인할 길은 이제 이것 뿐이었으니까. 럼로우는 신문의 모든 면들과 기사들을, 심지어 이 재판과 관련 없는 모든 작은 칼럼들까지도 확인하면서 페이지수와 광고들도 꼼꼼히 확인했다. 퓨리라면 자신을 속이기 위해 가짜 신문을 찍어낼 수도 있을 위인이니까. 거래에 따르면 잭과 윈터는 지금 임무지에 있느라 이 재판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어야 했다. 이런 재판이 벌어지고 있는 줄 전혀 몰라야 했다. 하지만 만에 하나 퓨리가 그걸 해내지 못했다면 그 둘은 어떻게든 재판을 막기 위해 무슨 일이든 할 것이다. 물론 그게 신문에 티가 날 정도가 되려면 일이 틀어지고 나서도 시일이 꽤 흐른 뒤가 되어야 할 테지만, 어쨌든 럼로우로서는 확인할 길은 이것 뿐이었다.
다행히도 체포된 지 일주일이 되도록 그런 조짐은 없었다. 그 후 며칠이 지나 배심원들이 소환되고, 주요 참고인 법정 증언이 시작되어도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럼로우에게는 온갖 대형과 중형 로펌들에서 변호인이 되겠다는 제안들이 들어왔지만 럼로우는 그들을 모두 무시했다. 다들 이 희대의 사건을 뒤집는 변호사가 되어 이름을 날리고 막대한 수익료를 얻어보겠다는 심산인 것 같았다. 대체 다들 어디에서 자신이 그런 수익료를 낼 수 있는 자산이 있다고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생각한다는 점에서 이미 하이드라 수뇌부라고 확신하는건가? 아니면 대충 회고록이나 그런걸로 떼돈을 벌 거라고 보는건가? 혹은 슈퍼 솔져 DNA라도 갖다 팔 거라고 보나? 어쨌든 럼로우는 쉴드와 사전에 협의한대로 그들을 모두 무시했고, 쉴드는 예정대로 그걸 갖고 황색언론에서 '아무도 변호를 맡으려 하지 않아 국선 변호사를 배정 받았다'는 여론전을 펼쳤다. 물론 황색언론에서 나온 말이므로 특별히 정정보도가 나오진 않았지만 SNS에서는 충분히 이야기가 퍼졌다. 참고인 법정 증언이 시작되며, 생중계가 진행되고 충격적인 얘기들만 자극적으로 편집되어 숏폼을 중심으로 퍼져나가는 동안 자연스럽게 중대형 로펌에서 럼로우에게 변호인 제안을 넣었던 사실들은 다들 없었던 일마냥 흔적도 없이 조용히 지워졌다. 아직 참고인 법정 증언 단계, 그러니까 이제 재판의 초입 단계일 뿐인데도 뉴스에서는 연일 이런 하이드라 수뇌부를 증거와 함께 잡아내려고 오랜 기간 첩보 활동을 벌이며 고생해오던 쉴드를 막무가내로 무능하다는 프레임을 씌워 몰아붙이던 공화당이 코너로 몰리고 있었다. 슈퍼 솔져니 외계인이니 기존과는 전혀 다른 위협들이 난무하는 요즘 시대의 전쟁 범죄나 테러에 대응하는 조직인 쉴드가 기능하는 방식과 템포를 공화당이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평가가 쏟아지고 있었다. 전반적 분위기와 여론이 너무나 치우쳐 있다보니 이러한 뉴스와 SNS 여론에 배심원단이 고스란히 노출되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도 지적하지 않았다. 이 또한 럼로우와 쉴드가 설계한 대로였다.
다만 그들이 예측하지 못한 건 럼로우의 몸이 얼마나 빨리 망가질 것인가와 그에게 배정된 국선 변호사가 얼마나 성실한 사람일 것인가였다. 지금까지는 이틀에 한번 정도씩 희석 혈청 앰플과 형질 안정제를 번갈아 투여하면 되었지만 그것도 결국 윈터가 곁에 있었을 때의 얘기였는지, 체포되고 열흘 쯤 지났을 무렵 결국 폐 부전이 일어났다. 그 정도 사태를 예견했던 건 아니었기도 했고, 늘 감시인력이 CCTV를 모니터링하고 있었기 때문에 생활 구역에는 럼로우가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벨 같은 게 없었는데, 때마침 오전 시간이라 CCTV를 모니터링하던 인력들은 참고인 법정 증언 생중계를 보고 있어서 럼로우가 쓰러진 걸 발견하는 데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사건 후 생활 구역에 비상벨을 설치해줬지만 문제는 럼로우에게 배정된 국선 변호사가 성실한 사람이라는 점이었다. 그는 겉보기에는 유약한 베타 남성같았지만 예정된 스케쥴대로 자기 피고인을 만나러 왔다가 이틀에 걸쳐 일어나있던 일련의 사건에 대해 알게되고 나서는 럼로우에 대해 건강상의 이유로 수감 장소 변경 및 재판 연기를 청구하려 했다. 럼로우는 '위험을 무릅쓰고' 접견 구역이 아닌 의료 구역에서 구속도 제대로 되지 않은 자신을 코앞에 두고 그 방안들에 대해 말하는 변호사를 빤히 바라보며 어쩌다가 이런 멀쩡하고 성실한 사람이 자신에게 배정된 것일까 하고 멍하니 생각했다. 그런 운 좋은 일이 어쩌다가 자신에게 일어났을까. 아니, 아니지. 받아들일 수 없을 때니까 이런 운 좋은 일이 일어났겠지.
변호사의 설명이 끝나자 럼로우는 일부러 한 박자 쉬었다가 다시금 그의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변호사의 표정에서 그가 불편해하는 기색이 이미 엿보였다. 그를 이런식으로 불편하게 하는 건 결코 기분 좋지 않았지만... 하지만 필요한 일이었다.
"무어 씨."
"네."
럼로우는 자신이 다음에 해야 할 말이 어떤 것인지 잘 알았다. 하고 싶지 않았지만... 잘 알았고, 솔직히 자신이 그런 일을 잘 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남들은 잭을 두고 싸이코패쓰라는 말을 곧잘했지만, 직업이 직업인데다 연차가 있는 만큼 고문에 있어서는 자신도 그 못지 않게 남을 괴롭히는데에는 일가견이 있었다. 이제는 얼굴의 절반이 화상으로 뒤덮였으니 섬뜩하게 보이는 건 더더욱 쉬운 일이었다. 럼로우는 일부러 고개를 살짝 앞으로 기울였다. 위의 조명을 받아 화상으로 일그러진 살갗의 굴곡이 더 잘 그늘져보이도록. 그러곤 좀더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이런 말을 건네야 한다는 게 정말 싫었다.
"둘째가 이제 유치원에 가죠?"
변호사의 표정이 그대로 굳었다. 그는 자신에게 가족은 커녕 사생활 얘기는 단 한번도 한 적이 없으니까. 그가 자신의 국선 변호사로 지정된 바로 그날 오후에 쉴드가 그의 프로필 파일을 접견 구역에서 한 번 보여줬었고, 럼로우는 그 내용을 낱낱이 기억하고 있었다. 럼로우는 변호사의 굳은 표정이 당혹감에서 공포감, 분노, 그리고 다시금 두려움으로 빠르게 물들듯 전환되는 걸 가만히 지켜보다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자신이 쥐고 흔들어야 하는 타인의 약점이 하고 많은 것들 중에 상대방의 자녀라는 게 럼로우의 속이 뒤집어질 듯이 아프게 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역할이 어떤 것인지 잘 알았고, 그걸 거스를 정도로, 그러니까 어린 아이를 약점 잡는 짓을 못할 만큼의 인간은 또 못 되었다.
"피차 귀찮은 일은 만들지 맙시다. 무슨 뜻인지 알죠?"
변호사는 충격에 멍한 듯이 잠시 가만히 앉아 있더니 황급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가방을 빠르게 챙겨 떠났다. 마치 조금이라도 더 머물렀다간 럼로우가 자신을 공격하기라도 할까봐 두려워하는 사람처럼. 이틀 뒤에 럼로우는 자신의 국선 변호사가 변경되었다는 통보를 받았다. 새로 배정된 여성 베타 변호사는 미리 언질을 받은 건지 뭔지는 몰라도 쓸데없는 정의감은 없었고, 럼로우는 그게 편하다고 생각했다.
체포된 지 3주차 부터는 럼로우도 법정에 소환되기 시작했고, 덕분에 드디어 의료진이 강도 높은 혈청 앰플과 형질 안정제, 그리고 진통제를 제공해주기 시작해서 컨디션은 한층 나아졌고 통증은 훨씬 가벼워졌다. 럼로우는 법정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피고인석에 가만히 앉아 재판에 별 관심없어 보이는 표정으로 조용히 있거나, 혹은 때때로 심문대에 올라 검사측의 심문을 받기도 하고, 그에 따른 변호사의 반대신문을 받기도 했다. 어느 쪽이든 간에 럼로우는 예정된 대로 일관되게 차분하고 약간 관심 없는 듯이 지루해보이는 것도 같은 태도로 모든 혐의를 인정했다. 다만 상황을 고려한 감형 및 건강 상태를 감안한 치료 감호를 요청할 뿐이었다. 예상대로 그의 이런 침착한 태도는 배심원단으로부터 격분과 의구심, 냉소적인 태도를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앰플의 강도를 높였음에도 불구하고 4일차에 다시 폐부전이 발생했고, 불규칙한 심박 기기음 사이로 간간이 들리는 의료진의 대화 속에서 럼로우는 자신이 두어번 심정지 상태가 왔었다는 걸 깨달았다. 다음날에도 법정 출석이 예정되어 있었으므로 새벽 내내 의료진이 붙어서 여러 수치들을 모니터링하고 있는데, 7시 무렵에 잔뜩 긴장한 얼굴의 어린 베타 여성이 의료 구역으로 들어왔다. 출입 뱃지를 하고 있는 걸 보면 인가 받은 사람인게 분명했지만 누가 봐도 의료인은 또 아니었다. 세 명의 간호사와 럼로우가 문가를 돌아보자 검정색 기내용 캐리어를 끌고 있는 새로운 인물이 멋쩍게 웃으며 방안으로 한 걸음 더 들어섰다.
"안녕하세요. 로쉘 바넘입니다. 현장 책임자 애벗씨에게 안내장 전해드리면 된다고 들었는데요..."
간호사들 중 가장 연차가 높은 갈색머리 알파 여성이 앞으로 나서자 로쉘이 종이 파일을 하나 내밀었다. 애벗은 잠시 그 파일을 받아들어 훑어보더니 약간 어이 없다는 듯이 작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메이크업 담당자래."
그러고는 로쉘에게 할 일을 하라는 듯이 다른 간호사들과 함께 한쪽 구석으로 물러나 있었다. 럼로우는 지금 제 모습이 어지간히 엉망이겠거니 싶어 잠자코 있었다. 아직까지는 아니었지만, 무어 변호사와 같은 소리를 하는 사람이나, 혹은 동정론 얘기를 하는 사람이 등장하는 건 어쩌면 시간 문제일 지 몰랐다. 그래서는 안 되니까. 그러니까 쉴드에서 메이크업 담당자를 보냈을 것이다. 자신이 다른건 몰라도 어쨌든 당장 오늘내일 죽을지도 모르는 상태의 사람이라는 건 법정에서 들켜선 안 되니까. 그래서 코에 산소줄을 끼고 팔에 IV줄을 달고, 몸에는 심박수를 체크하기 위한 센서를 부착한 채 침대에 비스듬히 기대 누워 로쉘이 제 침대 옆 테이블에 메이크업 도구들을 가지런히 셋팅하는 걸 얌전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일반적인 손님이 아니었으므로 당연히 거울이 셋팅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로쉘이 내려놓은 파우더 파운데이션 중에는 거울이 달려있는 것들이 몇 가지 있었고, 럼로우는 그 모서리에 일부 비친 자신을 볼 수 있었다. 생활 구역의 세면 시설에는 거울이 따로 있지 않았기 때문에 거진 3주 만에 자신의 모습을 보는 셈이었다. 화상으로 외모가 흉해진 것이나, 수감된 뒤로 체중이 더 줄어든 점 등을 감안해도 쉴드가 메이크업 담당자를 보낸 게 놀랍지 않은 모습이었다. 럼로우는 로쉘이 차곡차곡 꺼내드는 제품들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어떤 지시를 받았습니까?"
방안에 있는 모두가 흠칫 놀라는 게 느껴졌다. CCTV가 지켜보고 있고, 보안 요원들이 바로 구역 바깥에 서 있지만, 이 방안에는 평범한 베타 여성 넷 뿐이고 자신은 특별히 구속되지 않은 상태이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다들 지난 3주간 자신이 얼마나 흉악한 전쟁 범죄와 테러, 국가반역죄를 저지른 하이드라 수뇌부인지에 대한 공개 재판과 여론을 지켜봐오지 않았나. 당연한 반응이었다. 럼로우는 이미 침대에 어느 정도 기대있는 채였지만, 일부러 더 천천히 등을 기대 누우면서 어깨에 힘을 더 풀어내렸다. 사실 그런 자세는 등의 화상 흉터가 배겨서 아팠지만, 그가 할 수 있는 한 가장 덜 위협적으로 보일 수 있는 형태라는 게 중요했다.
"...안 아파보이게 하라고..."
로쉘은 망설이다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답했다. 대답하면서도 자신이 럼로우에게 이러한 사실을 발설해도 되는지 확신은 없었고, 다만 그가 두려워서 최소한의 대답을 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럼로우는 이제 겨우 스물을 조금 넘겼을 정도로 밖에는 보이지 않는 어린 여자애에게 NDA를 서명하게 하고 이 방에 집어넣었을 쉴드에 조금 화가 났다. 업무 계약을 하기 전에 자신이 이 '흉악범'을 상대하게 될 거란 걸 알고 계약하긴 했을까? 태도로 봐선 영 아닌 것 같았다. 아마 위약금 같은 게 겁나서 못한다는 말도 못 했겠지. 쉴드는 일부러 그걸 노리고 이런 어린 아이를 골랐을 것이다. 럼로우로서는 사실 어린 아이를 타이르는 건 해 본 적도 없고 적성에 맞는 일도 아니었지만... 어쨌든 로쉘을 더 겁에 질리게 하고 싶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할 지 알 수도 없을 뿐더러 자신이 한다고 해봤자... ...그러니 그냥 최대한 간결하게 의사를 전달하는 게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래요... 하지만 어차피 분장으로 가릴 수 있는 정도는 아닌 것 같으니까, 차라리 이렇게 합시다. 더 안 좋아 보이게 하세요. 눈 아래쪽만 약간만요. 그리고 그 하얀 손수건 빌려줄 수 있어요?"
로쉘은 상당히 당황한 것 같았다. 쉴드의 지시와 상반되는 제안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 판단이 서지 않는 것 같았다. 도움을 요청하듯 간호사들 쪽을 돌아보았지만 그들은 그저 어꺠를 으쓱하며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쉴드 담당자에게 전화를 해볼 수도 없었다. 그런 통신기기는 전부 보안 검색대에서 제출했으니까. 출입 할때 경비와 절차가 그렇게 삼엄한테 잠깐 통화하겠다고 나갔다 올게요 하기엔 이미 시간이 벌써... 로쉘이 곤란한 표정으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건, 그러니까 그녀를 가장 당혹스럽게 하는 건 이 '흉악한 범죄자'가 자신을 조심스럽게 대하면서 다정한 목소리로 침착하게 말을 걸어준다는 점이었다.
"만일 문제가 생기면... 쉴드가 문제 삼으면 내가 시켰다고 하면 됩니다. 강제했다고 하면 돼요. 사실이잖아요. 여기 CCTV도 있고 증인들도 있잖아요. 괜찮아요. 당신은 문제 없어요."
이 흉악범은 이상했다. 아니면, 보통 범죄자들은 이런 식으로 피해자를 다정하게 유인해서 범죄를 저지르는 걸까? 로쉘은 혼란스러운채로 럼로우의 요청대로 그의 눈가, 특히 눈 아래부분에만 일부러 푸른색과 붉은 색의 섀도우로 창백한 낯빛을 더 짙게 연출했고, 흰색 손수건을 그에게 내어주었다. 그는 산소호흡기의 도움을 받아 호흡할 적마다 실제로 고통스러워보였고, 가까이에서 보니 화상 흉터 부위의 살갗이 군데군데 하얗게 보이는 건 제대로 된 수분크림 같은 걸 바르고 있지 않은 건지 살갗이 여기저기 일어나 있어서였다. 그것 역시 빨갛게 일어나 있어서 아파보였다. 어쨌든 여러모로... 여러모로 로쉘 자신이 미디어에서 보던 인물과는 앞뒤가 맞지 않아 너무나 이상한 경험이었고, 그녀는 자신이 NDA를 작성했기 때문에 이것에 대해 아예 아무에게도 발설치 않고 그냥 잊어버릴 수 있는 게 차라리 잘 된 일인가 싶을 정도로 너무나 모순덩어리 같은 경험이었다고 생각했다.
그날 럼로우는 일부러 피고인석에 앉아있는 동안 내내 아픈 척 이마를 괴고 있다가 증인들의 증언 내용이 전혀 슬픈 내용이 아닌데도 일부러 눈물을 내비치며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는 모습을 보였다. 우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몸이 아픈 것만 해도 우는 건 쉬웠고, 잭이나 윈터, 아이의 안전에 대한 불안감, 혹은 이 재판의 어느 순간에든 피어스의 사진이나 영상이 튀어나올 수 있다는 두려움을 조금만 풀어내려도 눈물이 흐르는 건 쉬운 일이었다. 차라리 그걸 잠그는 게 어렵다면 어려운 일이었다.
럼로우는 다음날 아침 신문에서, 뉴욕 타임즈를 비롯한 네 종류의 신문 모두에서 어제 자신의 법정 생중계 장면들 중 눈물을 흘리기 전, 후의 모습과 하얀 손수건의 전, 후 모습을 캡쳐한 여러 컷의 사진들을 세세하게 분석한 기사들이 잔뜩 실린 것을 보았다. 일부러 아파보여서 동정 여론을 사기 위해 메이크업을 한 것이라며, 대체 이 삼엄한 경비를 받는 죄수에게 누가 메이크업 용품을 공급한 것이고 지급을 허락한 것이냐며 갑론을박을 벌이고 있는 기사들이 한가득이었다. 그 비난의 화살표는 언론사의 논조마다 달랐지만, 어찌되었든간에 그 누구도, 그 어떤 기사도 그의 건강 상태를 염려하고 있지 않다는 게 중요했다. 그런 동정론에 대한 기미조차 그 어디에도 없었으니 목적은 완벽하게 달성한 셈이었다. 럼로우는 아까부터 가슴께를 간질거리듯이 흘러나오는 잔기침에 인공 알파향 스프레이를 하도 뿌려서 축축할 정도인 손수건을 코에 대고 숨을 천천히 들이쉬며 눈을 감았다. 이대로면 사형 판결은 문제 없을 것이다. 자신은 어떻게든 재판이 끝날 때까지 살아만 있으면 되었다.
럼로우텀 스팁럼로우 버키럼로우 롤린스럼로우
+9월 23일이 체포일이고, 75편은 그로부터 약 3주 간의 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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