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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15 1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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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이더헤드 ㅅㅍ 주의












4.


[토미, 나 애 아빠한테 말했어.]

톰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메시지를 확인하고 소스라치게 놀랐어.
테러 조직이 그가 근무 중인 기지를 함락시키겠다고 경고한 뒤로 며칠간 정말 바빴지. 그러나 그래 봤자 일주일 안쪽인데 제이크에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톰은 모닝 루틴을 착착 밟는 그답지 않게 안절부절못하며 침실을 두세 번 휘돌다가 결정을 내렸어. 제이크는 출근길에 비스트로에서 아침거리를 사는 손님들에게 모닝 커피와 베이커리를 건네는 일을 중요하게 여겨 집을 빨리 나가. 그렇지만 지금은 매우 이른 시간이니까 아직 집에 있을 테지. 

입고 있던 티셔츠와 스웨트 팬츠 위에 바로 후디만 걸치고 집을 휙 나가려다, 문득 아직 곤히 자고 있을 아이 둘만 두고 집을 비우려니까 망설여져서 멈칫했어. 어제저녁부터 피터를 맡아 준 참이거든.
그러나 치안이 좋은 동네고 바로 옆집인걸. 상황을 살핀 톰은 바로 집을 나가서 옆집 문을 열고 들어갔어.

"제이키!"

한 번에 답이 돌아오지 않자 불안함이 가중됐지. 톰은 집안 구석구석을 살펴도 제이크가 없어서, 한숨을 내쉬고는 집으로 돌아왔어.

"토미, 아침부터 어딜 다녀왔어?"

그런데 그렇게 찾던 사람이 제집 주방에 있더라.
톰은 우는 듯 웃는 듯 얼굴을 찌푸리다가 결국 다행이라는 듯이 허, 하고 웃어 보여.

"걱정했잖아! 왜 너희 집에 없고 여기 있는 거야."

그런데 말을 하면서도 알 것 같지. 보호할 아이를 가진 부모의 종특이라고 해야 하나. 아이 얼굴을 꼭 봐야 할 것 같은 때가 있거든.

"우리 집 갔다 왔구나? 미안, 간밤에 피터만 보고 나가려 했는데 잠들어 버렸네."

제집인 양 제이크가 냉장고에서 주스를 꺼내 마시고 있지만 톰은 신경도 쓰지 않았어. 이미 내 것이 쟤 것이고 쟤 것은 내 것인 사이니까.

"문자는 무슨 말이야."

아일랜드 테이블의 스톨에 앉은 톰이 말해. 제이크는 잠시 침묵 속에서 그에게 허브티를 끓여 내밀었어. 톰은 카페인을 조절하는 중이라 커피를 근무 중에만 마셨거든.

"말 그대로지 뭐... 애 아빠를 만났는데, 피터도 들켜 버려서."
"자세히 말해 봐. 들켜서 추궁이라도 당한 거야?"

저를 향한 걱정이 가득한 그 얼굴에는 도저히 어물쩍 넘어갈 수가 없지. 톰은 제이크보다 겨우 두어 살 더 많았지만, 이럴 때는 꼭 극성맞은 어미새 같았어. 장남이라 타고난 보호 성향이 발휘되나 싶을 만큼.

사정을 말하자 톰이 기묘한 표정을 지었어. 제이크는 루스터와 있었던 일을 말한 적이 없었거든. 처음에는 지난 일을 상기하는 것만으로도 지긋지긋해서였고, 피터가 태어나고 톰과 앤드류와 함께하면서부터는 매일이 활기차서 굳이 떠올릴 일이 없어서였지.

제이크는 톰의 얼굴에 떠오른 게 묵직하게 꾹 눌러 쉽사리 드러나지 않는 분노라는 걸 알아채. 그 분노는 저를 향한 게 아니야. 그게 너무 찡해서 말이 튀어나왔지. 형아야, 사랑해. 

저를 안아 오는 제이크를 마주 꽉 껴안은 채, 톰은 제이크의 상처들을 진작 들추지 않았던 자신을 책해. 진작 물어볼 수도 있었는데. 그럼 제이크는 숨기지 않고 이야기해 줬을 텐데. 그렇게 강인한 제이크가, 유도리 있고 수완이 좋은 남자가, 며칠 만에야 만난 아군의 품에서는 저도 모르게 손을 가볍게 떨었어.

아이들을 깨워야 하는 시각을 알리는 알람이 울릴 때까지 톰은 제이크를 꼭 안아 주었어. 제가 그의 안전지대라는 걸 온몸으로 알려 주듯이.
제이크는 늘 제 뒤를 지켜 주었지. 이번에는 제가 그를 지켜 줄 차례야.



*


  
톰의 결심이 무색하게 며칠간은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어. 브래드쇼 대령과 그의 부대원들은 버지니아 주로 돌아갔고, 기지의 안전을 협박했던 테러 조직 섬멸이 끝아 업무도 정상 치로 돌아왔으니.

앤드류를 출산한 이후 톰은 현장 업무보다 사무 업무를 더 많이 맡고 있어. 간혹 훈련 교관이 되거나 특이 임무를 맡을 때도 있지만 많지 않아. 혹자는 파일럿 경력이며 공훈들이 아깝다고 그 자신보다 더 아쉬워했지만, 아이와 많은 시간을 함께하길 바라 내린 결정들을 후회하지 않았어. 내가 번 돈으로 가정을 건사하고 아이 몫의 학자금 따위를 마련해 가는 시간이 만족스러웠거든.
행정일에도 장점이 없지는 않아. 기지 내에 새로운 사건이 벌어질 걸 가장 처음 알게 되니까. 브래들리 브래드쇼의 일도 마찬가지였어.

그가 돌아가고 나서 삼 일쯤 지나서 협조 요청이 하나 왔는데, 임무 중 총상을 입은 대령이 요양차 그 지역에서 장기간 무급 휴가를 보낼 예정이니 참고해 달라는 내용이었지. 일시적으로 신병을 인도받게 될 거라고.
부상 뒤에 복귀를 원하는 군인들이 회복과 재활을 고향에서 하거나 전문의를 쫓아 일시적으로 지역을 옮기는 건 흔한 일이었어. 브래드쇼 대령처럼 아무 연고지도 아닌 이 지역으로 오는 일은 흔하지 않지만.

톰은 화면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어. 호불호를 뚜렷이 드러내는 일이 없을 만큼 점잖은 톰이 화난 기색이라 주변 사람들이 무슨 일이냐고 속닥거려. 원래 순한 사람들이 화나면 진짜 무서운 법이니까. 
그러다 오피스의 전화기가 울리고, 전화를 받은 사람이 외쳤어.

"허드너 소령님, 대령님이 뵙자고 하십니다!"

톰이 공문을 화면 위에 올려 둔 채 바로 오피스를 나가자, 남은 사람들이 이야기를 주고받았어.

-무슨 일이래 대체?
-아, 설마 그거에 투입되신 건가.
-그게 뭔데.
-여기서 동쪽 해안을 쭉 타고 들어가면 나오는 섬 있잖아, 어떤 돈 많고 할 짓 없는 놈이 지하 방공호를 엄청 크게 지어 놨다고 이야기했던 데. 거기서 불법 임상 실험이 있었던 거 기억 안 나?

그 예상대로였지.
2년 전쯤 한 제약 그룹이 과한 인체 실험을 한 것이 내부자의 신고로 발각된 적이 있어. 증거가 명약관화해서 해안 경찰이 해당 제약 그룹의 사유지에 쳐들어갔다고 하지. 그런데 문제는 이 부적절한 실험이 메사추세츠 주를 비롯한 몇몇 주의 승인과 거래 아래 이뤄졌다는 점이었음. 제약그룹은 감옥의 죄수들 중 지원자를 뽑았는데 그건 교도소들이 위치한 해당 주 정부가 승인하지 않으면 벌어질 수 없는 일이었거든.
이 사건에 휘말린 주는 무려 네 개나 되어서 백악관마저 주목하는 일이 되었지. 지금 그 화이트하우스를 차지하고 있는 건 보수 정권인데 공교롭게도 실험군 중에는 사회 취약층이 대부분이었어. 이런 일은 취재로 이어지면 인권의 사각 지대로 보도가 나서 대대적인 공격거리가 될 테니까. 

게다가 그 실험실은 마침 해군의 관리하에 있는 해안에 위치해 군까지 연관되었다는 오해를 받기에 딱이었어. 아마 실제로도 어떤 장성이 뒷돈을 처먹었으니 이처럼 언론과 간섭을 피할 수 있는 곳에서 실험을 했던 거겠지.
그래서 백악관은 해안 경찰이며 근처 지역의 해군 기지에게 두 집단이 협력해 되도록 잡음 없이 없었던 일로 만들라는 명령을 내렸어. 그동안 DC에서는 정권에 친화적인 상원의원들이며 검사들이 달려 들어 이 일을 순식간에 처리하고 묻어 버릴 작정으로.

실제로 각 기관의 노력들이 잘 맞물려 '없었던 일'에 가까워지긴 했어. 그 감옥이자 실험실인 곳에서 나온 실험체들을 제외한다면 사건은 모두의 기억에서 잊히는 듯했지.

그게 '제프 슈만'이라는 남자가 등장한 배경이야. 기지의 책임자인 대령이 톰에게 지시한 것은, 이 사태의 주요 증인인 제프가 언론에 노출되지 않도록 감시하라는 거였어. 표면적으로는 피해자가 실험되었던 약물의 영향에서 벗어나 사회 복귀를 하는 일을 돕는다는 게 명분이었지만.

이미 사태가 일어난 때로부터 2년 이상 지난 뒤였고, 제프에게는 딱히 새로운 보호자가 필요하지 않은 시점이었어. 약물의 영향도 사라졌다고 하지. 그래서 톰은 이제 와서야 제게 이 남자가 맡겨진 게 좀 황당하다고 느꼈어. 
다만 기지에 몇 없는 지휘관으로서 해군의 실책에 관해 책임을 질 필요가 있고, 톰은 의무를 저버리는 사람이 아니었거든. 그래서 가타부타 불평을 붙이는 일 없이 상관에게 반듯이 인사하고 제프라는 남자를 만나러 갔지.

톰은 기지의 식당으로, 그가 있다는 곳으로 가. 사회 복귀를 위한 재활 훈련 같은 느낌으로 기지 내 식당 일을 시켰는데 그게 적성에 맞았던지 계속 일하다 보조 매니저로 승진했다 하더라고.
 
식사 시간이 지난 식당은 고요했어. 사람도 없고. 누가 틀어놓았는지 모를 올드 재즈만이 느릿느릿 실내를 채워 나갔지.

후... 문득 톰은 오늘 하루가 제법 피곤하다는 생각으로 숨을 내쉬어. 아침에 제이크를 찾느라 왔다 갔다 했고, 제 실책도 알았지. 브래드쇼 대령의 일시적 발령을 알고 마음이 불편해진 와중에 전혀 생각지 못했던 뜻밖의 일까지 떠맡게 되다니.

하... 한숨을 뱉어 낸 톰은 셔츠 단추를 위에서부터 두 개쯤 풀고 의자를 빼서 앉았어. 제프든 아니든 정보를 구할 사람이야 기다리면 올 테고 오늘은 어차피 사무실에 돌아간다고 해서 일이 눈에 들어오지 않을 것 같아서.



삼사십 분쯤 뒤, 냉장실 안쪽에서 식재료 재고를 살피던 제프는 홀에 나오고서야 톰의 존재를 알아차렸어. 테이블 위에 올린 팔. 두 손으로 얼굴의 하관을 괸 채 눈을 지그시 감은 남자의 얼굴 위로 오후의 햇살이 사선으로 내리쬐.

"지금은 브레이크 타임인데."

제프는 말을 하면서도 굳이 남자를 깨우고 싶지는 않다고 생각해. 아주 단정한 차림새지만 어딘지 피곤해 보였거든.
그런데 남자가 눈꺼풀을 올려서 녹안이 드러나자 깨우길 잘했나 싶지.

"당신 되게 아름답네요."

성향대로 직구로 날아간 말에 톰이 무슨 말이지 싶은 얼굴로 주변을 살피다가 제게 한 말이라는 걸 인지하고 당황한 기색을 내보였어.

"흠흠, 당신이... 제프인가요?"

톰은 이미 상대를 알아보고도 제가 가져온 파일을 뒤적여. 이미 사회에 섞인 것으로 보이지만 동시에 제가 감시해야 하는 상대와 거리감을 어떻게 둬야 할지 몰랐거든.
그 파일첩의 존재 때문에 톰이 온 이유를 알게 된 제프는 그 맞은편의 의자에 앉아 그를 바라봤어. 군복 위 명찰에 쓰인 이름은 톰... 톰이구나.

"맞아요. 새로운 감시관이 온다고 하더니."

감시관이라니. 그런 말이 아니라 '생활보조요원'인데. 그 생각을 알아챈 듯 제프가 피식 웃엇어 

"표정을 숨기는 일이 익숙하지 않은가 봐요."
"아니 이건 자고 일어나서."
"감시관 맞죠 뭐. 하지만 당신과 함께하는 건 그렇게 싫지 않을 것 같아요, 톰."
"왜요?"
"나와 잘 어울리는 bad guy로 보이니까?"

오, 닥쳐요. 험한 말을 쓸 때조차 어조가 단정한 남자. 제프가 보기에 톰 허드너는 온유한 분위기가 감도는 사람이었어. 그 '감옥'을 나온 지 2년째지. 그간 착실히 살아온 것을 보상하는 양 느슨해진 감시를 알리는 듯한 인선이지 않나.

제프의 미소에 톰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그를 따라 입꼬리를 올리고 말아. 속으로는 좀 곤란하다는 생각을 했지. 
자신의 처지를 객관화할 줄 알고 사람을 들었나 놨다 하는 여유도 있지. 영리하고 똑똑하며 그걸 매력적인 겉포장지로 감싸 매력으로 어필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점이 경계심을 일으켰어. 보호라는 이름의 감시를 위해 파고들 틈이 없어 보였지.

일상을 착실하게 살 뿐인 톰은 이렇게 통통 튀는 인사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잘 몰라. 그러니 살아온 경험이 만들어 낸 현명함으로 응수하는 수밖에.













5.


평소 사람을 쉽게 재단하지 않는 톰이지만 일을 하다 보면 빠른 판단이 필요할 때도 있지. 톰은 '제프 슈만'이 다루기 쉬운 타입은 아니라고 생각해. 차라리 형질 차별주의자나 거만한 마초였으면 외려 권위로 찍어눌러 버렸을 텐데, 제프는 그런 사람이 아닌 것 같았어. 사람들과 어울리는 일을 어려워하는 아웃사이더 역시 아니지만, 본인이 인정하지 않는 권위 따위는 물어뜯어 버릴 것 같은 날 선 면이 느껴졌지.

톰은 때로 자신이 온실 속 화초처럼 살아왔지 않나 하고 생각했는데, 유복한 집안의 장남으로 자랐고 일찌감치 군인이 되기로 마음먹은 뒤 꽤 안정적인 군 생활을 해 왔기 때문이었어. 수많은 경쟁자들을 이기고 파일럿이 되었고, 출산을 한 뒤에도 알파가 다수인 군 지휘부에서 버티고 있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었는데도, 본인이 무난히 살아왔다고 생각하는 점이 남들이 보기에 정말이지 겸손했지. 물론 그 자신도 그 외의 면에서 고난이 없었던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아무튼 톰이 생각하기에 본인이 단순한 사람이니까 제프를 가늠하는 게 쉽지 않았어. 만약 두 사람이 이런 관계로 만나지 않았다면 톰은 저보다 어린 제프를 좀 안쓰럽게 바라봤을지도 몰라. 그가 겪은 일을 아니까.
하지만 제프의 말이 맞아, 그들은 결국 감시자와 피감시자의 관계지.
서로가 살아온 궤적이 참 다르니 제프가 평소에 뭘 하는지, 언론에 접촉하는지 아닌지 알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가까워질 수 있을까? 그게 톰이 걱정한 바였는데, 이 고민은 뜻밖의 지점에서 해결되었지.

"톰! 와 줘서 정말 고마워요. 아이가 도통 분유를 먹지 않아서 큰일이에요."

안도의 기색이 완연한 제프가 집 문을 열어 줬어. 애애앵---! 아이 우는 소리가 그 뒤로 쩌렁쩌렁 따라 붙었음.

뭔가 복잡한 감상이 들었는데 일단 아이가 먼저다 싶어 얼른 들어가. 눈치껏 화장실에 들러 손을 깨끗이 씻고 울음소리를 쫓아 부엌으로 가 보니 아주 난장판이야. 분유만 해도 회사별로 다여섯 가지쯤은 되는 것 같고 분유 섞는 기계는 젖병이 없는데도 윙윙 돌아가질 않나, 아이의 주의를 돌리려 했는지 장난감까지 여기저기에 널려 있어.

톰은 헛웃음을 흘리고는 일단 젖병부터 집어 들었어. 온도는 적절하고 손바닥에 약간 흘려 먹어 보니 분유의 농도도 적당하지. 왜 분유를 거부하는 걸까? 아이를 안은 채 둥개둥개하느라 여력이 없는 제프를 보자니, 자세의 문제인가 싶기도 하고.

"이리 줘 봐요."

이 집은 어찌 된 일인지 정말이지 휑함. 소파도 TV도 없고 부엌에도 아이를 위한 도구들과 식탁, 의자뿐.
톰은 되는 대로 식탁 의자에 앉아 아이를 받아 들어. 아이를 두 팔로 앉은 채 무릎에 체중을 얹어서 안정적인 자세를 만들어 냈지. 양팔을 살짝 흔들어 주자 새로운 사람의 등장에 경계하는 듯했던 아이의 표정이 조금씩 흐려져. 손을 뻗어 톰을 만지려 하자, 톰은 그 손바닥을 살짝 간질여 주고는 아까 맛본 젖병을 얼른 들어서 그 손에 건넸어.
아이도 배가 고팠나 봐. 호기심이 앞전일 만도 한데 일단 분유를 꼴깍꼴깍 먹더라.

"휴, 캐시..."
 
그 옆에 선 제프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어. 처음에는 빈틈이 없어 보였는데 지금 보니 초보 부모가 따로없어서 톰은 제프에게 안 보이는 각도에서 씩 웃어 보여. 아이의 땡그란 눈이 그 웃음을 훑었어.

"이 녀석, 오만 걸 줘도 안 먹더니 결국 원래 먹던 걸 먹네."

제프를 따라 톰도 식탁에 있는 각종 분유들을 바라봤어.

"뭐가 이렇게 많아요?"
"하도 안 먹으니 별수 있나. 브랜드를 바꾸면 되나 싶어 이것저것 사 봤죠."
"저걸 다 어떻게 하려고?"

제프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 나라도 먹을까 봐요.

"제 아들도 분유를 어지간히 안 먹어서 걱정이었는데. 그나마 모유는 좀 먹었어요."
"아니 그건 좀..."

단순히 아이 엄마로부터 모유를 받아 시도하는 방법도 있다고 하려고 했던 건데, 제프가 단호한 기색으로 부인했어.

톰은 거리를 좁히려고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아는 척하지 않았어. 제프는 실험실에서 만나 같이 살았던 여자친구와 헤어져 이 집으로 이사 온 상황이거든. 그녀는 과실치사로 아이를 잃은 적이 있어서 헤어질 때 양육권을 갖지 못했어. 그래도 아기가 있으니 사이가 나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이별이 안 좋았던 모양이야.

"아이 엄마와는 헤어져서요. 전에 봤던 그 파일에 적혀 있지 않았어요?"

그런데 다 안다는 듯이 여상히 물어보는 것에는 좀 겸연쩍을 수밖에 없어. 저번에도 느꼈지만, 어째 대화가 저와 잘 맞지 않는 사람이야. 그래도 톰은 "제프가 직접 이야기를 해 주는 것과는 다르니까요", 하고 답했어. 그러자 뜻밖에 제프가 이런 말을 하더라.

"좋네요, 그런 아날로그 감성. 인간적이고."

...대화가 잘 맞지 않는 건지 괜찮은 건지 좀 헷갈리지.

그새 아이가 분유를 다 먹고 관성적으로 꼭지를 빨아들이고 있어서 톰은 아이의 등을 좀 더 위로 올리고 등을 쓰다듬어 줬어. 꺽 하고 귀여운 트름이 나오고, 배가 찬 터라 슬슬 눈이 감기기 시작하지. 이맘때 아이는 꼭 새끼동물 같아서 사실 먹고 자는 게 일이니까.
톰은 아이를 좌우로 흔들어 얼래며 낮은 허밍으로 달랬어. 앤드류와 피터를 키울 때도 꼭 이렇게 했지. 그 덕에 앤디가 음악에 관심을 가지는 거 아닐까 싶어 뿌듯한 요즘이야.

잠시간의 평화를 맛보듯 가만히 있던 제프가 잠들려는 아이를 깨울까 싶어 속삭이더라. 따라와요.

정말 아무것도 없이 휑한 집인데 아이 방만큼은 벽지도 귀엽고 아기 침대며 놀이 공간을 나눠 놓은 플라스틱 펜스, 서랍이며 각종 장난감들, 책, 담요, 쿠션, 인형 같은 것들로 꽉 차 있어. 이 방만큼은 어떻게 정리를 해 놓은 듯했지.
톰은 아이를 침대에 내려놓고 이불을 덮어 주었어. 새근새근 잠드는 모양새가 사랑스러워서 앤디가 생각났지. 앤디는 저만할 때 아주 까탈스럽고 힘들게 하는 아이였어. 그래도 잠든 모습은 어찌나 사랑스럽던지 이대로 스무 시간 정도 푹 자 주면 좋을 것 같다는 이루어질 리 없는 바람을 담아 키스를 하곤 했지.
 
제프 역시 마찬가지였던 모양이야. 침대 펜스 위로 몸을 기울여서 아이의 이마에 입을 맞추더라. 어쩐지 동질감이 들어서 전보다 그가 불편하지 않을 것 같아.

아기방을 나왔는데 아까와 똑같이 딱히 손님을 맞을 만한 공간이 아님. 톰은 조금 머뭇거리다가 선 채로 제프에게 수유 팁을 알려 줘. 수유 의자를 하나 들이거나 소파를 사라는 충고와 함께.
아이가 10~12개월 정도 되었으니 벌써 무게가 9~11킬로그램 즈음은 될 거야. 들어 보니 꽤 묵직하더라고. 그런 아이를 서서 안은 채 다른 팔로 수유까지 하려 하다니 힘이 좋구나 싶긴 한데, 아이한테는 공포이자 불안일 수 있거든.

그 뒤로는 그의 집을 나가려 하는데, 제프가 잡았어.

"차 한잔하고 가요. 고마워서 뭐라도 해 주고 싶은데 있는 게 티백밖에 없네요."

계속 볼 사이인데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식탁 의자에 앉아 기다리는데, 생활 소음이 없다는 건 꽤 적막한 일이야. 이 집에는 개도, TV 소리도 없고, 하다 못해 블루투스 스피커라든가 라디오도 없지. 이렇게까지 텅 빈 거실은 판매를 위한 모델하우스에서도 본 적이 없어.

정적을 메꿀 말이 있다면야 요즘 어떻게 지내냐는 안부를 빙자한 추궁일 텐데, 그 의무를 다하고 싶지도 않은 날임. 이 집을 보자니 연인과 헤어진 충격이 큰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고, 아이를 혼자 케어하느라 기진맥진인 모양인가 보다 싶어서. 이미 열심히 사는 사람을 괴롭히고 싶지 않은 거지. 그 사람이 이미 저를 감시자로 인지하고 있으니까.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아까 이 집에 들어올 때 느꼈던 복잡한 감상이 다시 들더라. 문득 톰은 정적을 깨고 싶은 마음 반, 고민을 끌고 싶지 않은 마음 반으로 입을 열었어.

"미스터 슈만, 왜 날 골랐어요? 내가 오메가라서?"

제프 슈만을 만난 점을 보고하면서 상사한테 들은 게 있는데, 제프에게 기지 내 지휘관들의 파일을 넘기면서 이 중 담당자를 고르라고 했대. 그중 고른 게 톰 허드너인 거고. 그 이야기를 들으니까 제프를 색안경을 끼고 보게 되는 거야.

가까스로 티백을 찾은 뒤 전기 포트에 물을 넣던 제프가 고개를 돌려 톰을 돌아봤어. 음... 그가 말끝을 흐리자 실망감이 더 커져. 알파란 족속이 다 그렇지, 오메가라 해도 남성이고 군인인데도 유순하고 만만할 것 같았던 모양이지?

"그거보다는 어린아이를 키우는 게 당신뿐이어서요. 어차피 자주 봐야 하는 사이니 육아 팁이라도 얻을 수 있을까 하고."

덧붙인 말에 톰이 생각해 보니, 그렇기는 하더라. 다른 지휘관들은 더 나이가 지긋해서 아이들이 대개 청소년들이거나 이미 대학을 다니거든. 앤디만 해도 벌써 9살인걸.
어쩌면 형질의 인식에 갇힌 게 제프가 아니라 자기였을지도 모르지.

"미스터 슈만이라니..."

전기 포트가 내는 삐이이 소리가 아스란히 들렸어. 멋쩍은 듯 뒷목을 문지른 제프가 말을 이어.

"내가 무슨 60대예요? 제프라고 불러요, 톰."

그러는 자기는 이미 제멋대로 이름을 부르고 있으면서 말이야. 톰이 여서일곱 살 정도는 많은데도.
톰은 예의 있는 사람이니까 말이지, 같은 팀 동료로 만나는 게 아니고서야 상대의 허락이 있기 전에 이름을 부르지 않아. 그렇지만 제가 허락하기도 전에 이름을 불러젖히는 남자를 어떻게 할 수 없고, 사실 새 친구를 사귀는 듯한 느낌이 나쁘지 않아서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빙그레 웃고 말았어. 오랜만이지, 새로운 사람을 알아 가는 것.
티백을 담은 뜨거운 머그컵 두 개를 가져온 제프가 하나를 톰 앞에 내려놓았어.

"그런데 솔직하자면, 이제는 이유가 그것뿐은 아니에요."

그럼 다른 이유는 뭔데? 그 의문을 감추지 않은 얼굴에 대고 제프가 모르냐는 듯이 말했지.

"톰이 너무 아름다운 사람이라서. 사람이면 흑심이 이는 게 당연하지 않겠어요?"
"......제가 좀 그렇죠."

마치 자기 자신을 알라는 듯한 장난기가 가득 담긴 말이었는데도 톰은 가까스로 대꾸를 꺼냈어. 이건 제이크의 화법이지. 유머 감각이 뛰어난 편이 아닌 톰은 종종 제이크의 반응을 빌려 분위기를 띄우곤 하거든.

"알아서 다행이네요."

보통 이렇게 제이크처럼 적당한 농담조로 스스로를 띄우면 다들 파하하 웃음을 터트리고 상황이 정리되는데, 제프는 그저 제법이라는 듯이 씩 웃었어. 플러팅으로 느껴지지는 않았지만 그가 한 말이 진심이라는 걸 알 수 있었지. 그 순간 그가 제법 잘생겼고, 어쩐지 눈을 떼기 어렵다는 걸 알아.

그런데 톰은 이런 종류의 기류가 형성되려는 게 불편했어. 전남편이 거지 같은 놈이라 다시는 누굴 만나지 않겠다고 결심했거든. 세상에 절대적이고 영원한 게 없다면 적어도 앤디가 다 커서 제 품을 떠날 때까지만이라도.

아까의 작은 들뜸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제 불편함이 드러날까 싶어 머그컵을 슥 들어 올려 한 입 마셨는데, 이럴 수가. 차가 너무나 뜨거워서 온전히 마시지도 못하는 데다 컵도 절절 끓는 냄비 느낌이라 반사적으로 놓쳐 버렸어.
아-! 뜨거운 찻물이 배며 허벅지 따위를 덮치자 고통에 신음이 절로 나왔음. 제프가 순식간에 맞은편으로 와서는 톰을 의자째로 뒤로 밀어 추가 피해가 없게 했어. 엉망이 된 테이블이며 바닥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았지.

바로 톰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그의 상의를 들어 올리고 바지를 내리려는 행동에 톰이 놀라 "뭐, 뭐하는 거..." 하고 말을 흐렸어. "있어 봐요, 혹시 화상이라도 입었을까 봐 그래요" 라는 말을 들었지만, 알파가 제 옷을 벗기는 게 너무 낯설어서 바짝 긴장하고 말았지.

발갛게 부어 오르는 살갗에 제프는 자신을 책망해. "정말 미안해요, 한층 식히고 줬어야 하는 건데." 살갗에 손이 닿을 때마다 톰은 접촉마저 아픈 듯 움찔거렸어. 그런데 눈을 올리니 밝은 녹안이 고통보다도 당황을 담은 것처럼 저를 바라보고 있는 거야.

불현듯 알아차린 게 있는데, 눈앞의 오메가는 그저 브리프 한 장만 입은 채이며 상체의 셔츠는 온통 젖어 곡선을 그대로 드러냈고, 그렇게 만든 건 자기였지. 게다가 마치 범하듯이 여기저기를 만져 대는 꼴이란. 이런 순간에도 하체하학적인 것이 남자이고 알파라서, 눈앞의 존재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게 저를 어떻게 만드는지 자각하자 바듯하게 서 버린 제삼의 다리하며.

최대한 자연스럽게 손을 떼고 그의 눈에서 거리를 벌려. 다리 사이를 톰이 보지 않았기를 바랄 뿐이야. 하지만 톰은 거길 멍하니 보다가, 곧 아주 침착하게 말했어.

"...미안한데 좀 씻어야겠어요. 갈아입을 옷을 좀 빌려줄 수 있나요?"

대답을 듣지 않고 욕실로 향하는 톰의 몸에서 제프는 눈을 뗄 수가 없었어. 온몸의 선과 허벅지의 양감이 마치 손에 남은 듯해서.

큰일 났다, 제프 슈만.
너 어쩔래. 감시관한테 반할 작정이야?

제프는 찻물이며 컵 따위를 치우려 몸을 돌리며 아래를 가라앉히려 애 썼어.














6.


톰이 제프를 만나고 브래드쇼 대령의 임시 전출을 알게 된 뒤 처음으로 찾아온 월요일, 뭐가 그렇게 급한지 실제로 그가 전출 신고를 하러 왔어. 서류를 내러 온 상급자를 거절할 수 없으니 톰은 무감한 표정으로 그에게 경례했지만, 내심 속이 들끓었지. 당신이 무슨 염치로 이제 와 제이크와 피터에게 다가가려 하나.

행맨... 제이크의 형님이십니까? 브래드쇼 대령의 입에서 튀어나온 의아한 질문. 톰이 제이크와 정말 닮았다는 걸 알고 좀 놀란 눈치였어. 톰이 가타부타 대답하지 않고 그저 미간을 찌푸리자, 평소에는 인격자인 상사의 무시에 주변 사람들이 외려 좀 동요해.

톰은 악수를 위해 마주 잡은 손에 상대가 충분히 아플 만큼 힘을 준 뒤 놨어. 루스터는 그제야 허드너 소령의 적의를 알아채고 말을 삼켜. 감히 소령이 대령에게 보일 태도는 아니지만, 제이크의 사람이 저한테 보일 태도로는 충분한 걸 알았지.

행정관을 나가며 루스터는 허드너 소령과 제이크가 제 전출 소식에 관해 말했을지, 제이크가 제 전출 소식에 어떻게 반응했을지 생각해. 전화로 이 소식을 알렸을 때 제이크는 별달리 감정을 보이지 않았지만 그의 가족이 드러낸 적의를 보자면, 제이크와 피터에게 다가가는 일이 쉽지는 않겠다고 느껴.

버지니아의 본대로 돌아갔던 지난 며칠간 루스터는 연락을 그치지 않았어. 문자에는 답을 주지 않으니까 대신 전화를 여러 번 걸었지. 제이크는 마지못해 세네 번에 한 번 정도는 받아 줬어. 그의 일상에 받아 주지는 않았지만.

-숨소리가 거친데 무슨 일 있었어?
-아... 별거 아냐.
-정말 괜찮아?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고?
-그럴 리가. 오후에는 아직 더워서 그런 거지.


이렇듯 선을 긋는 대화였으나 그래도 완전히 밀어낸 건 아니었지. 내가 가도 되겠냐는 말에는, 그래 피터가 있으니까, 하고.

-피터가 아니야, 네 옆에 있고 싶어서 가는 거야.
-그럴 리가.


아무렇지 않게 번복되었던 답을 떠올린 루스터의 눈이 침잠해. 지난 며칠 내내 생각했듯 피터의 존재가 위안이 되었어. 내가 네 옆에 돌아가기 위한 동아줄. 하지만 정말 그것뿐일까? 네 마음에 정말 내 자리는 없을까? 아예 정말로, 단 한 구석도?

한편 톰은 브래들리 대령이 아직 목발에 의지해 절뚝이는 걸음새로 행정관을 나가는 걸 창문으로 지켜보면서 눈빛이 냉정해져. 어떻게 해야 저 남자를 제이크에게서 떠나게 할 수 있을까.
톰이 제이크에게 그의 임시 전출을 알렸을 때 제이크는 별말 하지 않았어. 들었어, 전화로 그러더라. 일단 회복 때까지 여기 있겠다고. 영리한 아이잖아, 그에게 피터의 존재를 알릴 때부터 어떤 일들이 기다릴지 다 계산해 봤겠지.
정말 동요하지 않은 건지 아니면 동요를 감추고 있는 건지는 몰라도 브래들리 대령이 오기 전에 확인할 게 있어서 물어봤어.

"다시 잘해 보고 싶은 생각이 있는 건 아니고?"

제이크는 정말 황망한 이야기를 들었다는 듯이 톰을 올려다봤어. 생각조차 해 보지 않았다는 그 반응에 톰은 내심 안도했지. 사람은 잘 변하지 않아. 설령 변한다 그래도 과거는 언제고 의심을 불러 올 거야. 톰이 생각하기에 브래들리 브래드쇼는 제이크에게 너무 모자란 사람, 마음을 줬던 존재조차 아프게 하는 천치였어. 그래서 제이크가 다시 그 구렁텅이를 들여다보지 않길 바라.

하지만 상대는 그게 아닌 게 분명하지. 아까의 악수에서 브래들리 대령은 손에 전혀 힘을 주지 않았어. 톰이 제이크의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도 져 주겠다는 듯이. 그게 톰을 더 아니꼽게 했어.




*




이 마을은 소도시 정도의 규모고 뒷산에는 온천이 나오는 골짜기도 있어서 제법 숙박 시설이 많았어. 대개의 외부인은 오래 머물지 않으니 호텔이나 여관 등을 찾지. 그러나 루스터가 고른 것은 스튜디오 렌탈이었어. 일반적 관통형 총상에 관해 군이 제공하는 유급 휴가 기간은 3개월 정도인데, 그 기간 동안 통째로 있을 생각으로.

20평 남짓의 이 스튜디오를 기준은 단 하나, 제이크의 비스트로 근처일 것.

처음 이틀 정도는 짐을 정돈하고 당장 필요한 가구 따위를 넣고 있다며 전화로 이야기하더니 이제 좀 정리가 되었나 봐. 수요일쯤에는 어김없이 모습을 드러냈어.
아침부터 카운터를 마주한 루스터를 본 제이크의 표정이 미묘해져.

"음, 오늘은 날씨가 좋네."

제이크는 한쪽 벽면을 채운 유리창으로 시선을 보내. 먹구름이 가득하지. 곧 비가 올 것 같은데 무슨. 본전도 못 챙긴 루스터는 어린애처럼 붉고 둥근 광대로 헤헤 웃어.

"주문이나 해라."

라떼에 포 샷, 애플 패스츄리. 픽 웃은 제이크는 바리스타한테 당부를 남기려다 카운터를 아예 바리스타에게 맡기고 등을 돌려 오븐 앞으로 가. 라떼에 투 샷만 넣은 뒤 갓 구워 따근한 애플 패스츄리에는 시나몬 가루와 슈가 파우더를 듬뿍 뿌리고 루스터를 불렀어.

"투 샷만 넣었다. 업무 중도 아닌데 카페인 좀 작작 들이켜."

왜 이런 커피를 먹는지, 그 커피에는 어떤 걸 곁들이는지. 루스터는 제이크가 아직도 제가 좋아하는 방식을 잊지 않았다는 걸 알아차려. 기억하고 있었구나.

바에 그릇과 컵을 놓고 다시 카운터로 가려고 등을 돌린 제이크는 별안간 손등이 덮혀서 다시 뒤돌아. 하고 싶은 말이 많은 것 같은 얼굴이 저를 바라보고 있었지. 뭐라고 말을 붙이면 뭐든 시작되겠지만 우리가 이제 그런 사이는 아닌 것 같아서 그냥 손을 빼냈어. 손님은 아직 많고 옆에서 다른 바리스타가 다른 손님을 부르며 바를 차지했어.
제이크는 다시 카운터로 가서 손님을 맞이해. 아까 잡힌 손이 아직 뜨거운 것 같지만 "오늘 머리스타일 너무 좋은데요?" 아무렇지도 않게 스몰토크가 입을 비져나왔지.

루스터는 비스트로에서 아침을 먹고 나와서 병원으로 향했어. 아직 재활이 시작될 만큼 충분히 아문 시기가 아님. 며칠에 한 번씩 병원에 가서 추가 감염이 없는지 진단받고 드레싱을 다시 하는 정도면 충분했지. 이 기간에는 움직일수록 회복이 더딜 뿐이니까 제이크한테 조금도 도움이 될 수 없어. 그러니 조급해하지 말자고 생각해.

하지만 제이크가 바로 저기에 있는데. 아직 날 기억하고 있는데.

진료를 받은 뒤 병원 정원의 벤치에 앉아 루스터는 비스트로를 바라봤어.






그렇게 한 주, 또다시 월요일. 제이크는 같은 자리에서 루스터를 맞이해.

"흠... 현직 군인다운 관찰력이네."
"네가 없을 때는 굳이 올 이유가 없으니까."

앞뒤 전부를 말한 게 아닌데도 뭘 말하는지 알아챈 루스터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바로 받아치자, 주변의 다른 바리스타며 손님들이 흥미진진하다는 듯이 그들을 힐끔거렸어. 지난 주 내내 사장님을 노린 이 불굴의 손님은 서서히 유명세를 타고 있었거든.
제이크는 구경거리가 되는 게 탐탁지 않아서 더 말을 섞지 않은 채 카드를 받아 결제했어. 메뉴를 물을 필요도 없지. 늘 그렇듯 뜨거운 라떼에 설탕에 졸인 과일을 넣은 페스츄리를 먹을 테니까.

직원들이 알려 줬는데, 월화수목금 일주일 내내 아침마다 출석 체크하듯 들른 루스터가 주말에는 오지 않았다고 하더라. 제이크가 주말에는 아침 근무를 하지 않는 걸 알아챈 거지.

제이크는 출근길에 비스트로에서 아침거리를 테이크아웃하는 주민들을 위해 아침이면 직접 카운터를 지키고 있어. 그의 비스트로는 지역의 커뮤니티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외부의 관광객도 편히 방문할 만한 쉼터지만, 그래도 장사의 기본은 유동 인구의 구성원을 아는 거라고 생각했거든. 하지만 주말에는 집에서 애들을 감독하며 건강한 음식을 먹게 했지. 주중 아침은 톰이 챙겨 주니까 주말에는 제이크가 하는 거야.

지난 주 제이크는 루스터와 적극적으로 대화를 시도한다거나 하지 않았어. 어차피 루스터가 이 지역에 온 것만으로도 그의 의중이 빤하니까. 아이를 만나고 친해지고 아빠 노릇을 하려 하겠지 싶었거든.

제이크는 그게 싫지 않았어. 아니, 어쩌면 싫어 하지 않으려 하고 있다고 해야 할지.
저 혼자 만든 아이가 아니잖아, 아빠가 있는 게 당연하고 당연히 아빠 노릇을 하고 싶을 수 있지. 피터가 좀 말썽쟁이이긴 해도 아주 귀엽고 기특한걸. 옛 연인을 다시 봐서 복잡한 마음이 들긴 했지만, 사실 누구든 과거에 그토록 마음을 줬던 존재를 만나면 이렇지 않을까?

제이크와 톰은 비슷한 구석이 있었지. 톰의 알파 남편이 저열한 밑바닥을 드러냈을 때 그의 아버지와 동생들은 어지간하면 참고 살라고 이야기했어. 톰은 그때 가족들에게 기대를 버렸다고, 혼자 살 각오를 다졌다고 했지. 제이크는 남들이 다 짐작하듯 혼외자식인데 미혼모가 되기로 결심했을 때 집안의 지원이 거의 끊겼어. 학대받은 적은 없지만 사랑해 준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라 진즉 감정적 교류가 사라져 있었기 때문에 톰만큼 극적인 관계 정리는 없었지만, 아무튼 세상을 홀로 살아온 처지라는 점은 비슷하지.

물론 지금은 소중한 사람이 꽤 늘었어. 하비를 비롯해 긴 세월을 함께하며 볼꼴 못 볼꼴 다 본 친구들, 톰처럼 자길 아끼는 사람들, 특히 피터. 하지만 과거의 어느 지점에서는 오로지 루스터의 존재가 너무 커서 다른 게 가려졌던 때가 있었어. 자신이 후순위인 것도 감안하게 하는 감정놀음 때문에.

피터가 생겼을 때 제이크는 아이를 후순위로 만들 수 없었어. 루스터를 떠났을 때는 그냥 지긋지긋하다고, 지쳤다고 느껴서였지만, 아이를 사랑하는 방법을 알아 가면서 알았지. 자신이 그런 관계도 감수했던 건 자라나는 내내 없는 듯 있는 삶의 형태에 익숙했기 때문이었다는 걸.

피터를 그렇게 키우지 않겠노라는 결단은 서서히 쌓였어. 그러니 루스터를 떠난 것이 옳은 선택이었다는 걸 어떻게 모를 수 있을까. 그만한 과거가, 상처를 통해 저 자신을 알게 했던 사람이 다시 눈앞에서 얼쩡거리니까 마음이 복잡한 게 당연하지 않나.

제이크는 이 술렁거림을 굳이 꽉 누르지는 않았어. 이제는 매사 조직 내의 위계를 살펴야 하는 군에 있는 게 아니고, 사업은 잘 굴러가고, 제가 좀 동요한다고 해서 사는 일이 크게 흔들리지 않을 거니까.
그런데 이렇게 말랑한 상태를 루스터한테 들키는 건 죽기보다 싫은 거야. 경쟁자였던 시절 때문인가, 곧 죽어도 자존심이 허락 안 함. 그래서 더 대화를 시도하지 않았지. 루스터가 피터의 아빠로 있고 싶어 여기까지 왔을 테고, 자꾸 분위기를 풀려는 듯이 끈적한 말을 던지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어쩌면 매일 아침 얼굴을 보이는 건 제가 대화를 잘 받아 주지 않기 때문인지도 모르지. 그건 굳이 새로운 일을 만들고 싶지 않다는 간접적 거절 의사였는데, 저 녀석에 한해서 이런 방법은 이전에도 지금도 먹히지 않았음. 전형적인 루스터 같으니라고.
옅은 찡그림을 얼굴 안쪽으로 숨기며 음식을 바 위에 올리자, 그를 뚫어져라 보고 있던 루스터가 한쪽에 목발을 한 채로도 쏜살같이 다가왔어. 제이크는 그 거동을 바라보며 말했어. 

"너 오늘 병원 가? 시간 좀 되는지 묻는 거야."
"아니. 오늘 진료 없어."

루스터는 당당하게 병원을 쨀 생각을 해. 드레싱 따위 내일 해도 그만이니까.












#루스터행맨 #제프허드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