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인 보호 프로그램 때문에 애런 하치너가 아니라 토마스 깁슨으로 살던 하치가 새로운 사랑에 빠지는 거 보고싶다
내가 다시 여기로 돌아오게 될 줄이야. 허니는 선배드에 길게 누운 채 애꿎은 하늘만 노려봤음. 허니의 처량맞은 처지와는 달리 애너하임의 날씨는 여전히 끝내주게 좋았음.
애너하임은 오렌지 카운티 중심부에 있는 동네였음. 인터넷에 검색해보면 무려 캘리포니아 최고의 관광도시라는 휘황찬란한 타이틀이 붙어 있었지만 현지 사람들에게는 글쎄… 관광객들한테야 일주일을 머물러도 모자랄 곳이었다만, 그 말인 즉 24/7 시끄럽다는 뜻 아니겠음. 과장이 심하다고? 이 동네에는 무려 디즈니랜드 파크랑 넛츠베리 팜이 붙어있었음… 암만 관광수익으로 먹고사는 동네라지만 교통체증을 못 견디거나 도시 소음을 하루 이상 들으면 미쳐버리는 사람은 절대 살 수 없는 동네라는 건 분명했음.
그래서 허니는 여느 또래들이 그러하듯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애너하임을 떠나는 걸 목표로 삼았음. 정말로 소음이나 도로 정체를 못 견뎌서는 아니었고, 멍 때리고 있으면 자연스럽게 놀이동산에서 티켓 끊어주는 일이나 하게 될 거라고 생각했거든… 물론 그 일은 누군가에게 꼭 필요한 일이지만, 10대가 좀 그렇잖음. 허니는 그때까지만 해도 자기가 좀 더 대단한 일을 하는 무언가가 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음…ㅎ
아무튼, 나름대로 절박했던 덕에 실제로 허니는 고향에서 도망치는데 성공하기도 했음. 인근 대학교에 합격하자마자 그걸 빌미로 여름이 채 지나기도 전에 본가를 나갔으니까.
허니는 아직도 그 날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음. 햇빛에 뜨끈하게 달궈진 차 안의 공기며, 땀이 살짝 배어난 손바닥으로 어루만졌던 픽업트럭 핸들의 촉감, 활짝 열어둔 창문으로 쉴 새 없이 들이치던 미지근한 바람같은 것들을. 허니는 그 모든 것들을 둘러맨 채 고향을 떠났었음. 결코 이곳을 그리워할 일은 없을 거라고 확신하면서.
하지만 사람 일이라는 게 어떻게 다 바라는 대로만 되나. 인생은 결코 예상할 수 없는 법이었음. 더 넓은 세상에서 나만의 삶을 꾸리겠다고 호언장담한 게 무색하게 허니는 고향으로 돌아오고 말았음. 8년 전과는 달리 어떤 열정도 없이 낡고 지친 채로,
“아… 배고프다.”
…배에 든 것도 없이.
무기력하게 배를 긁으며 중얼거려봤자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음. 당연함. 허니네 아빠는 아침 일찍 30년째 운영 중이신 카센터로 출근하셨고, 엄마도 그와 비슷한 시간에 십자수 동호회 모임에 참석해야한다며 나가셨음. 허니는 십자수는 이용당한 것뿐이고 실제로는 동네 아줌마들의 친목 모임에 불과한 거 아니냐고 괜히 어깃장을 놓았지만… 변하지 않는 사실은 어머니가 딸내미보다 훨씬 사교적이고 활동적인 사람이라는 점이었음.
배고프면 뭐라도 시켜먹어. 하면서 현관 장식장 위에 20달러 지폐 하나를 두고 간 어머니의 배려 아닌 배려는 해가 중천에 뜨고서야 일어난 딸을 더욱 허무하고 비굴하게 만들었음. 아니, 내가 아무리 엉망진창으로 살았어도 그 정도 돈도 없겠냐고… 투덜거리는 입과 달리 손은 얌전히 그 돈을 챙겼지만 (그야 허니는 땅 파봤자 돈 한 푼 안 나온다는 걸 아는 어른이니까) 허니는 쪼끔 자존심이 상하고 말았음.
두고 보자. 내일부터는 내가 진짜 일찍 일어나가지고 집 청소도 다 하고 어? 차 끌고 장도 봐가지고 집에서 밥 해먹는다. 저녁은… 엄마 밥이 더 맛있는데 저녁까지 내가 할 필요는 없지… 암튼. 허니가 그렇게 다짐하며 일단 오늘만큼은 꽁돈도 생겼겠다 맛있는 거나 먹자 하는 생각에 배달 어플을 켰을 때였음.
“아빠, 진짜 괜찮다니까요.”
“잭. 들어가있어.”
“아빠아-“
멀지 않은 곳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음. 거리나 방향으로 보아하니 옆집인 거 같은데. 반사적으로 손가락을 잠시 멈춘 허니는 이웃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음. 나이차가 많이 나는 목소리의 조합을 미루어볼 필요도 없이, 또랑또랑하게 발음한 ‘아빠’라는 단어에서 두 사람의 관계를 짐작할 수 있었음.
아하. 아무래도 허니가 돌아온 지 얼마 안 됐을 때 엄마가 지나가듯이 말한 ‘얼마 전 이사온 이웃’이 저들인 거 같았음. 허니는 낡고 지쳤을 뿐 무례한 어른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웃에게 인사를 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음. 최소한의 체면을 위해 세수는 했다한들 몰골이… 암만 봐도 멀쩡히 사회활동을 하는 사람처럼은 보이지 않는지라… 정말 딱 인사만 하고 집안으로 들어가서 느긋하게 점심식사 메뉴를 고민할 예정이었음. 그런데.
미친 뭐임? 기대도 안 했던 상황에서 지나치게 잘생긴 남자를 목격한 허니의 뇌가 일순 멈췄다가, 미친듯이 빠르게 돌기 시작했음. 갑자기 평생 지긋지긋했던 동네가 디즈니랜드 파크만큼 재미있게 (허니는 과연 이게 좋은 비유일지 잠시 고민했음) 느껴졌음. 이야 미남의 존재감이란 실로 대단한 거구나. 허니는 수치를 모르고 자꾸 올라가려는 광대를 필사적으로 억누르며 옆집 마당에 서있는 부자를 향해 다가갔음.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남자는 갑자기 나타나 인사를 건네는 존재에 눈썹을 찌푸렸다가, 곧 허니가 옆집 뒷마당에서 지나치게 편해 보이는 복장으로 걸어나왔다는 걸 알아차리고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인사를 받아주었음. 캬. 인성도 좋아. 지나치게 관대해진 허니가 더더욱 무해함을 어필하는 미소를 지으며 자기소개를 했음.
“허니 비라고 해요. 이 집 딸.”
“허니 비?”
“잭. 제대로 인사드려야지.”
“안녕, 잭. 네가 놀라는 것도 이해해. 나는 네가 평생 볼 꿀벌 중에 제일 커다란 꿀벌일 걸?”
자고로 애들은 분위기만 좋으면 별 것도 아닌 농담에도 웃어주는 법임. 잭도 그랬음. 별 유난도 없는 너스레를 듣고도 귀엽게 웃어주었고, 금세 낯선 사람에 대한 경계심을 풀었음.
그렇다면 잘생긴 애 아빠는?
“…토마스 깁슨입니다. 반가워요, 미스 비.”
아니 어떻게… 사람이 잘생기니까 그냥 통성명하면서 살짝 웃을 때도 간지가 났음. 분위기 미남이라는 게 이런 건가? 일단 그냥 미남이라는 건 틀림없는 사실인데… 허니는 드라마나 만화에서 남주를 보고 허파에 바람든 것마냥 한숨을 내쉬던 연출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음. 깁슨씨는 보조개가 깊게 파인 흔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쩐지 웃는 게 어색해 보였는데, 그게 또 무슨 사연있는 사람처럼 보이더란 말이지. (뒷걸음질 치다가 쥐 잡은 격)
자기도 모르게 넋을 빼놓고 그 미모를 감상하고 있던 허니는 문득 그가 오른손에 찬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는 횟수가 굉장히 잦다는 걸 알아차렸음. 그래서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행동이지만… 용기를 내어 그에게 다시 말을 걸었음.
“혹시 급한 일이라도 있으세요?”
“아, 별 거 아닙니다.”
“아빠가일이있어서나가봐야하는데베이비시터가바로못온다고해서이러지도저러지도못하는상황이었어요.”
“…잭.”
“아하…”
애기… 잭은 또래보다 똑똑한 게 틀림없었음. 이 상황을 정확하고 일목요연하게 설명해준 잭 덕분에 허니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고, 벌써부터 제 뜻대로 안 되는 아들이 골 때리면서도 한 편으로는 기특하다는 듯이 내려다보는 깁슨씨에게 좋은 이웃이라는 인상을 줄 수 있을만한 말을 꺼냈음.
“원래 이 동네가 좀 그래요. 도로 상황을 예측할 수가 없죠. 차라리 주말이나 연휴가 붙어있는 기간이면 깔끔하게 포기라도 하지. 이렇게 애매한 평일 오후에는 더더욱—“
“예?”
“아. 아니 그러니까 제 말은… 정 걱정 되시면 베이비시터가 올 때까지 제가 잭이랑 같이 있을까요?”
허니의 제안에 깁슨씨는 오세상에정말감사합니다덕분에…는 개뿔 이제 미소를 지우고 의심스러운 듯한 눈초리를 했음. 그 돌변한 태도에 허니는 쪼끔 억울함을 느꼈지만… 뭐 요새 세상이 워낙이 흉흉해야지. 보호해야할 어린 아이가 있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의심하겠거니 하는 포용적인 태도로 (물론 허니가 이런 관대함을 보이는 데에는 그의 외모 덕이 굉장히 컸지만) 설명을 덧붙였음.
“물론 의심스러워 보일 수도 있는데요… 정 걱정되시면 제 신분증이라도 가져가셔도 되고, 물론 휴대폰 번호도 알려드릴 거고요… 시간마다 잭 사진을 찍어서 보내드릴 수도 있거든요. 아니 이건 오히려 좀 징그러운가?”
실없는 말이 길어지자 깁슨씨가 피식 웃음을 흘렸음. 아 진짜 잘생겼다… 허니가 또 생각을 멈추고 멍하니 시각적인 자극에 충실해진 사이에 그가 말을 꺼냈음.
“그렇게까지는 안 해주셔도 됩니다. 그보다는, 이웃 분의 시간을 이렇게 빼앗는 게 죄송해서요. 걱정해주신 건 감사하지만—“
“저 진짜 괜찮아요. 어차피 일도 쉬는 중이고 그냥 집에 있는 김에 같이 있으면 안심되실 거 같은데.”
“…베이비시터가 언제쯤 올 수 있을지 장담할 수가 없다보니 선뜻 부탁드리기가 어렵네요.”
“그러엄… 어… 실례지만 혹시 현관 쪽에 감시카메라 달려있나요? 베이비시터가 올 때까지 제가 마당에서 잭이랑 놀고 있는 건 어때요?”
“전 좋아요!”
“잭은 좋아하겠지만, 그건 제가 더 죄송할 것 같습니다.”
깁슨씨는 그 짧은 대화를 하는 중간에도 시계를 세 번이나 쳐다봤음. 무슨 일을 해야하는지는 몰라도 꽤나 중요한 일인 게 분명했음. 그럼 이제 그만 사양하고 좀 가면 좋을 텐데… 그의 몸짓 언어에 덩달아 초조해진 허니가 혀로 마른 입술을 살짝 축이고 그의 눈치를 살폈음. 암만 친절한 이웃을 표방하려고 해도, 이쯤 되면 허니는 할 만큼 했음. 이 이상 말을 해봤자 난감한 상황에 처한 깁슨씨를 도와주려는 게 아니라 잭을 납치하려는 미친여자로 보일 게 분명함. 그러니까 그냥 좀 호의를 받아들이시라고요…
허니의 간절한 마음 속 외침이 들리기라도 했는지, 깁슨씨는 돌연 깊은 한숨을 푹 내쉬더니 고개를 들어 허니를 마주봤음.
“그럼 정말 죄송하지만… 베이비시터가 올 때까지 잭이랑 함께 있어주시겠어요? 일부러 밖에 계실 필요는 없고요. 괜찮으시다면 집안에서 아이랑 있어주세요.”
“문제 없죠. 제 신분증 드릴까요?”
“아뇨, 괜찮습니다. 휴대폰 번호는 알려주시면 감사하고요.”
“옙.”
깁슨씨가 휴대폰을 내밀자 허니는 거기에 제 번호를 찍고, 통화 버튼을 눌렀음. 그러자 머지 않아 허니의 바지주머니에 들어있던 휴대폰이 진동하면서 전화가 왔다는 걸 알렸음. 하하 이렇게 자연스럽게 미남의 번호를 얻었다…는 아니고, 깁슨씨가 생각보다 더 신중한 성격인 거 같아서 허니 나름대로 신임을 얻기 위해서 보여준 액션이었음. 그 의도가 잘 먹혔는지 깁슨씨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고, 다시 희미하게 웃었음.
“정말 감사합니다. 무슨 일이 있으면 언제든 연락 주세요. 그럼 저는…”
늦긴 늦었는지 깁슨씨는 벌써 차 쪽으로 걸어가면서 말을 이어갔음. 허니는 어느새 잭 옆에 자연스럽게 서서 그런 깁슨씨를 배웅하듯 손을 흔들고 있었음. 그러나 그가 막 시동을 걸고 마당을 빠져나가려 할 때, 허니는 그를 한 번 붙잡을 수밖에 없었음.
“저기 혹시…!”
“예.”
“잭이 먹으면 안 되는 음식같은 거 있나요? 제가 아직 밥을 못 먹어서 뭐라도 먹을까 하는데 괜찮으면 잭도…”
“심각한 알러지같은 건 없습니다. 좋아하는 음식은 잭이 잘 말할 수 있을 거예요.”
“아아, 네네… 그럼 다녀오세요!”
“다녀오세요!”
“…잘 부탁드립니다.”
떠나기 전 그의 표정은 썩 밝지 않았지만 (허니는 본인이 누가 봐도 잠옷처럼 보이는 후줄근한 옷을 입지 않았더라면 조금 더 신용을 얻었을 거라고 확신했음) 어쨌든 허니에게 잭을 맡기고 떠났음. 그리고 그가 도로 끝까지 멀어지는 걸 바라보며 잭과 함께 손을 흔들던 허니는…
“잭. 우리 피자 시켜먹을까? 페퍼로니 피자 좋아해?”
어쩐지 애너하임이 이전보다 즐거운 동네가 될 것 같다는 생각에 미소를 지으며 작은 친구의 손을 잡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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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하나 흠 잡을 것 없는 바른생활 사나이인 하치 옆에 헐랭하고 감정적인 허니 비 붙어서 점점 물렁함이 옮아가는 거 보고 싶다…
다시 또 가족을 잃을 순 없어서 새로운 삶을 살기로 선택했지만 숨 쉬듯 생각나는 비에유 가족들을 그리워하던 하치가 허니 덕에 용기를 얻어서 다시 그 친구들을 되찾는 게 보고 싶다…
하치 절대 행복해 ㅠㅠ
하치너붕붕
깁슨너붕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