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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03 22:43
ㄹㄴㅇㅁ ㅈ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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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만 16세가 된 로버트 J. 플로이드에게 예비 면허가 발급되었다. 제이크 F. 세러신이 생각하기에 연방 교통국과 캘리포니아 주 정부는 미국 시민과 거주자에 대한 예비 면허 발급에 좀더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었고 그 대상을 엄격히 제한할 필요가 있었다. 로버트 플로이드는 제이크의 심도 있는 견해로는 면허를 가지기에 너무 작고 연약했다. 제이크는 마음대로 할 수 있다면, 로버트가 엄마로부터 물려 받은 짙은 색의 혼다 어코드 차의 표면을 대형 에어캡으로 둘둘 말아 놓고 싶었다. 제이크는 그 아이디어를 떠올렸을 때에, 그게 기가막힌 것이라고 생각했고 심지어는 로버트의 팔과 다리, 그리고 몸에도 그렇게 하고 싶어졌다. 로버트는 유난히 잘 넘어졌기 때문이다. 학교 도서관 앞 주차장에 차를 대고 로버트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던 제이크는 로버트가 몰고다니는 혼다 어코드 옆에 그보다 안전 등급이 2급정도 떨어지는 자신의 랭글러의 차체에 기대어 서 있었다. 멀리 로버트가 자신의 몸통만한 책가방과 두꺼운 실험물리학 책을 옆구리에 끼고 뒤뚱거리며 다가오는 것을 바라보면서, 제이크는 에어캡으로 둘둘 말아놓은 로버트와, 그게 너무 귀여워 그를 끌어 안아 에어캡을 모조리 터뜨리는 자신을 상상하고 조금 웃었다. 지금도 저렇게 운동화 뒷축을 찌그러뜨릴 기세로 뒤뚱거리면서 걷는데, 에어캡에 싸인 짐은 아마 굴러 다니겠지. 역시 이건 너무 좋은 아이디어인것 같다. 머릿속의 관중들이 환호했다. 제이크 세러신에게 5포인트.
“왜 왔어?”
로버트는 제 혼다를 시동하는 리모트 콘트롤이 엑스칼리버라도 되는 양, 귀가 넓은 강아지 모양의 열쇠고리에 끼워진 그것의 고리에 손가락을 넣어 마치 제임스 본드 처럼 돌리면서 (솔직히, 그건 두바퀴도 돌지않고 바닥에 떨어졌다.) 물었다. 제이크는 로버트의 그 자동차 열쇠고리가 지나치게 귀여워서 도로 운전자에게 방해가 될거라고 생각했고, 그런 ‘정당한’ 이유로 로버트의 예비 면허를 박탈하고 싶었다. 허리를 숙여 바닥에 떨어진 열쇠를 주워든 제이크는 -기회를 놓치지 않는 승부사 제이크 세러신에게 2포인트- 그것을 제 치노팬츠 주머니에 쑤셔 넣은 후에 로버트에게서 가방을 받아들고 도무지 왜 이렇게 무거워야 하는지 영문을 모르겠는 실험 물리학 교재도 받아 들었다. 로버트는 고분고분히 중요하고 무거운 것들을 모두 제이크에게 맡기고, 그러나 제이크의 주머니로 들어간 강아지 열쇠고리만큼은 다시 되돌려 받고 싶어서 손을 뻗었다.
“타.”
제이크는 로버트의 가방을 어깨에 매고, 책을 쥐지 않은 손으로 모른척 그렇게 뻗은 로버트의 손을 깍지 끼워 잡았다.
“나 차 가지고 왔어.”
로버트는 입술을 조금 내밀고, 안경을 낀 눈을 찌푸리고 제이크를 올려다 보았다. 여름 내 키는 제법 커서 이제 로버트는 제이크만큼 크다. 물론 몸무게의 차이는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제이크는 일주일에 한 번씩 로버트의 몸무게를 잰다. 로버트의 강아지 부기의 몸무게도 함께 잰다. 그건 둘의 진중한 의식이 되었고, 이따금씩 좀처럼 늘지 않는 로버트의 몸무게와 근육량에 아쉬움을 숨기지 못하면서 ‘밥’이 고기와 과일 그리고 달걀을 더 먹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제이크를 보며 밥은 쩝쩝소리를 내며 도넛과 밀크쉐이크, 감자칩을 먹곤 했다.
“놓고 내일 와서 찾아가. 아침에 데려다 줄게.”
“왜. 또 차선 변경 못한다고 잔소리 하는거야? 배웠다니까.”
로버트는 짜증을 낼 조짐을 보였고, 제이크는 그것이 지금 이 상황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루벤 샌드위치 사왔어. 먹으면서 운전 못하잖아?”
제이크는 자신의 차 안에 놓인, 벌써 기름이 베어나와 약간 투명한 색으로 젖기 시작한 브라운 백을 턱으로 가리키며 로버트의 손을 잡아 당겨 차갑게 식은 손과 그 팔을 제 뜨끈한 겨드랑이에 끼웠다. 고소한 기름냄새와 바삭하게 구운 두꺼운 베이컨, 그리고 노릇한 해시브라운과 머스터드 향을 맡은 모양인지 로버트의 얼굴은 다소 누그러져서 운전해서 가고 싶은데에- 라고 말했지만 제이크는 그 사이의 간격을 놓치지 않고 밥의 보드라운 볼에 입을 살짝 맞추고는
“집에 가서 먹으면 식을텐데?”
카운터 펀치를 날렸다. 밥은 눈알을 굴리더니 조르르 제이크의 랭글러의 조수석에 올랐다. 제이크는 그 뒷모습을 보면서 악당처럼 웃었다. 다시 환호성이 들렸다. 제이크 행맨 세러신 아니, 루벤 샌드위치에 10포인트. 그리고 세트 체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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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이 되면 산타모니카와 말리부도 공식적인 가을을 선언한다. 그 말인 즉슨, 단정하게 고른 길이로 깎인 정원의 잔디밭은 더욱 무성해지고 교묘하게 계산된 조합으로 심어진 꽃나무와 희게 칠해진 야트막한 울타리 근처, 난장이 인형들이 세워진 젖은 이끼 연못 따위가 마치 약속이나 한 것 처럼 일 년중 가장 아름다워 지는 때가 온다는 뜻이다. 제이크 세러신은 실지 매년 캘리포니아에서 가장 으뜸가는 가드닝 회사에서 파견한 정원사들이 빈틈없이 가꾼 잔디를 가로질러, 촘촘하게 쌓아 올린 고른 회색 벽돌로 깔아 가로지른 드라이브웨이가 1마일정도 이어지며, 그 오른편으로는 풀장과 풀하우스, 왼편으로는 아담한 차고를 지나야 만날 수 있는 3층짜리 산타모니카 저택에 살고 있다. 그곳의 리빙룸, 응접실, 그리고 넓은 검정색 대리석으로 상판을 댄 아일랜드 식탁에 세가지 이상의 과일과 제 계절을 찾은 꽃이 꽂힌 화병이 교묘한 구도로 놓여져 있는 주방은 철마다 미세스 세러신의 감독 하에 유명한 사진작가들이 찍은 사진으로 미국에서 가장 많은 가정주부들과 게이들이 즐겨 읽는 잡지에 실린다. 산타모니카의 자랑이요, 동시에 점잖은 쓰리피트 수트를 입고, 적당히 그을은 건강한 피부색에 어울리는 우아한 파스텔톤 드레스를 입은 엄마의 옆에 서서 미소짓는 것에 익숙한 아버지가 그런 것과 같이, 이 서부에서 으뜸가는 부러움의 상징인 세러신 저택의 미래의 주인이 될 제이크였다. 제이크를 아는 말리부의 여자아이들 중 그런 세러신 저택의 안주인이 되는것을 상상해본 적이 있는 아이를 찾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일이 아니었다. 제이크 역시 세러신 저택을 좋아한다. 언제나 결벽적일정도로 각을 맞춘 커텐들과 잡지에서 실린 사진과 차이를 느끼기 어려운 식탁과 주방의 넘쳐나는 스낵과 과일들, 늘 푸르고 싱그러우며 일정한 모양을 내어 정돈된 정원수들과 아침 조깅을 하고 돌아외 숨을 들이쉬면 싱그러운 내음을 내는 정원의 잘깎인 잔디까지. 제이크 세러신은 거의 평생을, 미국의 마지막 남은 풍요의 상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그림같은 집에서 자라왔다.
그러나 어쩐지 요즈음에 와서 그는 자신을 보면 고개를 갸우뚱하면서도 더이상 낯선이를 볼때 그러하듯 요란하게 짖지 않는, 제 주인인 로버트를 닮아 탐스러운 황금빛 털을 가진 골드리트리버가 테두리가 촘촘하게 바느질 된 가죽 목줄을 하고 정원을 뛰노는 플로이드가의 2층집을 더 좋아하게 되었다. 그곳의 주방은 좁고 언제나 어수선하게 로버트와, 또 묘하게 로버트와 닮은 듯 닮지 않은 그의 형과 누나들의 사진으로 빼곡하게 장식된 냉장고가 있다. 어디까지나 제이크의 기준에 당류가 너무 많은 시리얼 박스들은 종류별로 삐뚤빼뚤 늘어 서 있으며 이미 그 집의 애완견이 더이상 관심을 가지지 않게 된 어린 강아지들이 쓰는 발치용 장난감 따위가 굴러다니기도 한다.
로버트는 아침에 잠에 덜 깨어 제 방이 있는 2층에서 주방으로 내려올 때에 아일랜드 식탁의 대리석 모서리에 부딪혀 옆구리에 멍이 들곤 한다. 복도에서 주방으로 들어서는 입구가 너무 좁은 탓에, 유난히 뒤뚱거리며 걷는 로버트가 부주의한 탓 제법 비틀거리다 일어나는 일이었다. 집안 누구도 그걸 대단치 않게 여기는 것이 이상했던 제이크는 플로이드 가에 드나들기 시작한지 몇주 되지 않아 시내의 잡화점에서 아이를 키우는 집에 존재하는 온갖 모서리 끝을 뭉툭하게 감싸도록 만들어진 알록달록한 색의 부드러운 스펀지 커버를 잔뜩샀다. 그리곤 그것들을 로버트의 옆구리와 종아리를 노리는 집안 구석구석의 모서리에 가져다 붙였다. 처음에 이 것들을 자신의 집 곳곳에 '장식'해도 좋겠냐고 제이크가 집의 주인인 미세스 플로이드에게 물었을 때에, 그녀는 한창 심각한 독서 -아마도 제이크는 그 책이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 따위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그녀는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를 읽고 있었다- 에 빠져 있느라 그 것들이 어떤 색깔을 가졌는지 제대로 보지 못했던 것이 분명했다. 여튼, 세러신 저택이었다면 문턱을 넘지도 못했을 그 우스꽝스러운 스펀지들 덕분에 로버트의 몸에서는 멍이 사라졌다. 집안 누구도 로버트가 집안의 모서리 괴물들에게 괴롭힘을 당한다는 사실을 개의치 않았던 것도 신기했지만, 사실 제이크는 로버트의 엄마나 형,누나들, 그리고 집을 자주 비우는 편이긴 하지만 그의 아버지마저도 집에 이 지나치게 현란한 색색의 스펀지들이 유난스레 늘어났다는 점을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사실이 더 놀라웠다. 제이크의 집에서라면 이건 거의 형사 고소 수준의 사건이 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이크는 자신이 사는 수영장과 풀하우스가 딸린 3층짜리 저택보다 바로 제가 지금 향하고 있는 로버트의 집을 꽤나 좋아하게 되었다.
로버트는 차를 놓고 왔다며 투덜거리긴 했지만 곧 루벤 샌드위치를 먹기 위해 입을 벌리고 씹어 대느라 조용해 졌다. 학교 주차장을 빠져 나온 차는 외곽도로 입구를 지나쳐서 로버트의 집으로 향했다. 간격이 자로 잰 듯 고르게 심어진 키가 휘엉청하게 큰 야자수나무의 꼭지 너머로 꽤나 부피가 커진 달이 도로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이제 막 가을에 접어든 캘리포니아의 공기는 상쾌하고 바삭거렸다. 제이크는 이맘때 즈음의 산타모니카를 가장 좋아한다. 추수감사절, 크리스마스, 그리고 새해. 사람들이 행복하지기 시작하는 계절이기 때문이다.
“너 나타샤 할로윈 파티에 뭐 입고 갈거야?”
제이크가 분위기에 취해서 볼륨을 올린 음악에 발을 까닥이던 로버트가, 기름기가 묻은 손을 차 시트에 그대로 닦더니 시트에 뒷통수를 비비며 제이크에게 물었다.
“응? 할로윈?”
그렇다, 모든 가을의 시작은 사실 할로윈부터 시작된다. 제이크는 언제나 그 사실을 잊었다.
“응. 참고로 너 작년에 입어던거 엄청 구렸어(lame)”
“작년?”
제이크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얼굴을 찡그렸다. 작년에 내가 밥을 만난적이 있던가? 물론 같은 학교였으니 만났을 수도 있다. 제이크는 로버트가 제 생각을 그대로 들었다면 떠들었을 말을 스스로 되새겼다. 작년이라면 로버트는 열다섯살이었고 제이크에게는…
“응. 너 캡/틴 아메리카 입었잖아. 근데 헬멧은 코믹스 버전이고 바디수트는 시네마 유니버스 버전이었는데 파란색이랑 빨간색 스트라이프가 뒤바뀌어 있었다고.“
그랬나?
로버트는 본인도 기억하지 못하는 제이크의 당연하게도 구린 코스튬을 잘도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리고 블/랙위/도우랑 키스했잖아. 그거 정말 웩이었어”
엉터리 블/랙위도/우 여자친구가 있었다는 사실까지.
“블랙위도우는 절대 캡/틴 아메리카랑 키스 안해.”
제이크는 놀랐음에도 전방에서 시선을 거두지 않는 아주 능숙하고 모범적인 운전자였다. 로버트는 루벤 샌드위치가 꽤나 마음에 드는지 반을 다 먹고, 부스럭거리는 종이 포장을 벗겨 내어 나머지를 먹기 시작했다.
“너 작년에 나타샤 파티에 있었다구?”
말리부 베이 하이에 라크로스 주장 제이크 세러신이 있다면, 치어리딩 팀에는 나타샤 트레이스가 있다. 그런 나타샤 트레이스의 할로윈 파티는 학교의 모든 아이들이 가고 싶어하는 파티였으므로 사실 로버트가 작년의 어느 때 그 파티에 있었다는 사실이 이상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로버트는 2년을 월반 한, 언제나 수업에서 가장 뛰어난 학생임과 동시에 또래보다 작고 연약한 아이였다. 사실 동급생 누구도 로버트에게 먼저 친구를 하자고 나서지 않았다. 제이크는 작년에, 자신이 이 꼬마를 발견하기 전, 그러니까 열다섯살의 로버트가 다들 보드카를 섞은 펀치를 마시고 코스튬 아래 자신을 숨기고 모두 고삐 풀린 듯 놀아대는 어수선한 나타샤 트레이스의 결코 ‘건전하다’고는 할 수 없을 할로윈 파티 어딘가에 있는 것을 상상했다. 눈앞이 아찔했다.
“응. 나 매년 가는데. 덕분에 네 형편없는 코스튬 잘 봤다. 웩!”
로버트는 혀를 길게 내밀고 정말로 구토라도 하려는 것인 양 얼굴을 찌푸렸다. 그리고는 정말로 입가심이 필요한 것 처럼 제이크가 루벤 샌드위치와 함께 사온 라임에이드를 스트로로 쪽쪽 빨아 먹었다. 볼이 쏙 들어가 움푹한 볼우물을 만들었다. 제이크는 머릿속에서 뎅뎅뎅 스코어를 빼앗겼다는 신호처럼 울리는 종소리를 들으며 착찹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마른 볼을 손가락으로 쓸어 내렸다. 그맘 때 즈음 만났던 여자애라면… 아, 제이크는 가까스로 묻어둔 기억속에서 불과 일년이 지나지 않았던 때의 알록달록하고 흉측하기 짝이 없는 할로윈 코스튬과 미지근한 맥주 냄새가 나는 키스들을 떠올렸다.
한편 샌드위치를 먹던 것을 멈춘 로버트는 기름이 묻은 손가락을 활짝 벌린채 입고있던 셔츠에 대강 닦고는, 차 바닥에 내려두었던 백팩을 꺼내 지퍼를 열어 그 주둥이에 고개를 거의 집어넣고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내며 무엇인가를 찾았다. 캘리포니아 교통국이 예비면허를 발급한 것으로, 로버트 플로이드가 어느정도 운전석에 앉기에 적합하다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사실 그는 조수석, 특히 ‘제이크 세러신’이 모는 차의 조수석에 앉기에는 그다지 모범적이라고 할수 없었다. 로버트는 조수석에서 산만했고 툭하면 초콜릿 크런치가 묻은 아이스바나, 샌드위치, 콘도그 따위를 먹으며 부스러기나 소스를 흘리고 기름이 묻은 손을 아무데나 닦았으며, 음료를 먹다 흘리기도 했다. 또는 제이크의 안전운전에는 전혀 도움을 주지 않으려는듯 굴었는데, 베이딩 팬츠만 입고 다리를 모아 조수석에 올라 앉은채 닌텐도 게임을 하며 슈퍼마리오가 버섯을 먹게 하여 몸집을 키우는 것에 집중하느라 제이크의 다른 곳이 더 커질 수도 있다는 사실엔 전혀 관심이 없다는 점이 그것을 방증했다.
로버트는 가방에서 구형 모델의 아이폰을 꺼냈고 짧뚱하게 손톱이 깎인 통통하고 동글동글한 손가락으로 그것을 능숙하게 조작했다.
“그래서 올해 코스튬은 정했냐니깐?”
로버트는 핸드폰의 화면에서 눈을 떼지않고 말했다. 제이크는 아직도 몸매를 과장되게 드러내느라 캘리포니아의 10월 날씨는 전혀 고려하지 않은, 지나치게 꽉끼는 가죽 오버올을 입은 ‘블/랙위/도우’와 멍청해보이고 우스꽝스러운 엉터리 영웅 코스튬을 입고 들큰하게 취한채 입맞춤을 나누는 ‘캡/틴 아메리카’를 머릿속에 그리며 착잡한 마음을 가눌길이 없어 입을 여는데에 조금 시간이 걸렸다. 제이크가 운전에 가까스로 열중하는 동안, 로버트는 빠르게 손가락을 놀리면서 스마트폰을 조작해 계속해서 화면 속의 어떤 것을 스크린샷으로 찍었다. 아마도 새로 나온 ‘스/파이/더’맨 피규어 따위의 시세를 검색하는 것이리라
차는 이제 제이크에게 마저 익숙하고 어수선한 로버트네 집의 정원을 지나 차고로 통하는 드라이브웨이로 들어섰다. 제이크는 능숙하게 휠을 조작해 차를 주차했다. 로버트가 운전을 해 돌아올 것을 생각해 열어 둔 것을 보이는 차고로는 아주 들어가지 않고 후진해서 차를 금방 뺄 수 있도록 바로 입구에 멈추어 선 후에 브레이크를 걸었다. 조용하고 단정한 동네는 어스름이 내려 앉아 지나는 사람이 드물었다.
로버트는 여전히 스마트폰을 만지작 거리면서 딴청을 부렸다. 들척지근한 루벤 샌드위치의 뒷 맛이 아직 입안에 감돈다.
“베이비”
“응”
동글동글하게 살이 맺힌 턱 끝을 만지는 제이크의 손을 귀찮다는 듯이 떼어내며 로버트가 대답했다. 제이크는 시트에 옆얼굴을 묻고 로버트 손을 잡았다. 동글동글 조약돌같은 손톱을 만지면서 제이크가 불현듯 수줍게, 천천히 입을 열었다.
“키스할까?”
로버트는 아이폰에 들어갈 듯 숙이고 있던 고개를 돌려 제이크를 보았다. 제이크는 어쩐지 희미하게 웃거나 울거나 하는 표정을 하고 있었는데, 그게 괜스레 근사해서 로버트는 조금 심술이 났다.
제이크 세러신은 이름으로 불릴 때 보다 ‘그 애’라고 불릴 때가 더 많은 사내애였다. 제이크는 말리부 베이 고등학교의 ‘랭글러를 타는 남자애’였고, ‘라크로스 주장’이었고 때로는 ‘산타모니카의 가장 근사한 집에 사는 남자애’이기도 했고, 말리부 베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모델로 일하다 지금은 뉴욕에서 일하는 ‘할리 세러신의 근사한 남동생’이기도 했다. 그 애는 언제나 그렇게 불렸다. 왜 그 애 있잖아. 랄프로렌 셔츠가 기가막히게 잘 어울리는.
제이크가 학교의 카페테리아에 나타나는 것만으로도 그 곳의 공기는 순식간에 바뀌었다. 늘씬한 스트레잇 팬츠에 말리부 베이 고등학교의 상징인 을씨년스런 곰의 얼굴이 앰블럼으로 그려진 점퍼를 입은 그 애가 마치 트로피나 되는 것처럼, 그 애의 옆에서 캘리포니아의 허영심 많은 열일곱살 소녀들은 의기양양해 졌다. 제이크 세러신은 그 여자애들의 장신구 역할을 충실히 할 줄 아는 남자애였다. 값비싸고 작고 실용적인 부분이라곤 없는 반짝이는 손가방 같은 것들 말이다.
로버트는 카페테리아 구석 어딘가에서 지긋지긋한 락토프리 우유를 먹으면서, 영영 호주의 수도는 어디인지 그 이름 따위는 기억할 수도 없을 정도로 멍청하고 몸만 좋은 운동부 남자애 따위라고 ‘그 애’를 애써 무시했다. 하지만 나중에야 알게된 제이크 세러신은 지겨울 정도로 친절하고 잘 웃는 사내아이였다. ‘그 애’는 그리고 생각한 것 보다 훨씬 근사했다. 멀리서 봤을 땐 그저 평균을 웃도는 키나 건장한 체격 따위에 의한 착시일 뿐이라고 생각했던 얼굴도 가까이에서 보게되면 무척이나 섬세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로버트는 이제 알고 있다.
‘랭글러를 타는 남자애’따위로 불릴 때보다, 그 남자애의 랭글러 안에 타서 보는 제이크 세러신은 훨씬 근사하고 멋있다는 사실을.
그래, 인정 해야만 한다. 엉터리 캡/틴 아메리카 코스튬을 입고 블/랙위/도우와 징그러운(gross) 키스를 한다고 해도, 제이크 세러신은, 매력적인 남자애다. 어떤 여자애들 한번쯤은 자랑하고 싶어 할 만한 그런 산타 모니카의 근사한 남자애.
로버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제이크는 우스꽝스러웠던 어느때의 미지근한 맥주맛이 나는 키스들을 떠올린다. 그런 것과는 비교도 될 수 없을 정도로 달콤함을 알아버린 제이크의 ‘베이비’가 봤던 할로윈의 어느날, 제이크는 키스 후에 수줍은듯이 웃었다. 공주님 같네. 로버트는 닥터페퍼 캔을 찌그러트리며 그렇게 생각했었다. 외려 키스를 받았던, 과장되게 반짝이는 효과가 들어간 가죽 코스튬을 입은 여자애는 의기양양하게 빨간 입술에 호를 그리며 웃었더랬다. 마치 뭔가를 빼앗긴 기분이 들었었다. 나타샤의 집안은 현란한 템포의 음악으로 시끌벅적했고 아이들은 ‘캡/틴 아메리카’와 ‘블/랙 위/도우’의 끔찍한(gross) 키스를 보고도 아무렇지도 않게 웃고 떠들어 댔다. 비위도 좋아. 로버트는 또다시 동그란 턱을 모으며 그렇게 생각했고, 곧 아무도 자신이 있을거라 기대하지 않았을 그 파티를 떠났다.
그러나, 이제 제이크는 로버트에게 천천히 다가왔다. 캡/틴 아메리카 따위, 올해의 '코스튬'따위보다 훨씬 중요한 어떤 것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것은 아주 느리고 조심스러워서 로버트는 손 안에 있던 스마트폰을 힘주어 꽉 쥐었다.
제이크는 이제, 키스 전에 어떤식으로도 웃지 않았다. 대신 진중하고, 이맘때 즈음의 캘리포니아처럼 싱그러운 초록을 닮은 눈동자로 로버트를 보았다. 단순히 반짝거리고, 비싸고, 작고 쓸모없는 작은 가방따위와 비슷한 노릇을 하던 여자아이들의 트로피였던 '그 애'는 이제 더이상 없다. 대신 긴 팔로 로버트의 개에게 능숙하게 프리스비를 던지거나, 취미도 없는 히어로 영화를 보면서 가끔 지나치게 집중한 로버트에게 자신을 봐 달라고 팝콘을 한알씩 던지거나 하며 심술을 부리곤 하는 제이크 세러신은, 루벤 샌드위치의 고소한 기름 냄새가 아직 남은 로버트의 통통한 입술에 개의치 않고 가볍고 달콤한 키스를 몇번이고 내리 찍었다. 로버트는 작은 강아지처럼 끙끙거리다가 쥐고 있던 스마트폰을 놓았고, 제이크는 그런 로버트의 살이 없는 긴 팔을 제 목에 두르게 했다. 로버트는 반항없이 제이크의 목을 끌어 안았다. 루벤 샌드위치 마음에 들었나 보다? 순순히 키스를 받아 주다니, 기특한데. 제이크의 말을 듣고 로버트가 웃음을 터뜨렸다. 담엔 라임 에이드 말고 오렌지 주스로 사와. 로버트의 말에 제이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할로윈이 막 시작되려는 참이었다. 그것은 로버트가 가장 좋아하는 명절 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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