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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02 16:20
“살려주시게! 내게는 아내와 처자식이ㅡ!”

빛 하나 들지 않는 곳간에서 무릎을 꿇어 앉은 검은머리 남자가 식칼을 치켜들었다. 마치 내려찍는 듯한 모양새에 그 아래 목이 잡힌 이가 버둥대며 소리쳤다. 틈새로 이를 지켜보던 잔디머리 남자는 순간 마주친 눈빛에 문을 박차고 뛰어들었다.

‘사람이다!’

이쪽을 돌아본 눈동자는 이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에 사람임을 확신한 이의 난입에 주의가 흐트러졌다. 검은머리가 뒤를 돌아본 순간 인간 외의 괴력으로 내동댕이쳐진다.

“……!”

뭔가 잘못됐다. 검은머리 사내가 나동그라질 때 보인 녀석에 잔디머리는 이를 직감했다. 그가 본 것은 사람의 상반신에 물고기 꼬리가 달린 놈이었다. 이어 눈 깜짝할 새 두 팔로 바닥을 기어온 놈이 날카로운 이빨로 발목을 깨무니 그의 눈앞이 아찔해진다.

‘자네 아들은 매우 강한 기를 타고났구만. 하지만 그 때문에 요화살이 끼었어. 저 기운을 탐낼 요괴들에게 평생 쫒길 거란 얘기지. 부처님 밑에 숨어들어 살기라도 하지 않는 한 머지않아 요괴들이 서로 잡아먹으려 들게야.’

그순간 어릴 적 우연히 마을을 지나던 스님이 한 얘기가 잔디머리의 뇌리를 스쳤다. 스님의 말이 걸렸던 부모님은 걱정되는 마음에 아이를 검도장에 보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원체 씩씩했던 아이는 이후 요괴가 꼬이는 체질이라 숨어살 바에야 제가 그놈들을 사냥하고 다니겠다며 고향을 나섰다. 그리하야 요괴사냥꾼이 된 이래 지금처럼 죽음에 근접하기도 처음이었다.

‘끝이다.’

발목을 물린 순간 마비라도 된 양 뻣뻣하게 쓰러진 잔디머리의 몸 위로 반인반어의 녀석이 타고 올랐다. 놈은 뱀처럼 긴 혓바닥으로 입술을 훔치며 그를 내려다봤다. 이어 주체 못한 군침이 잔디머리의 얼굴 위로 뚝뚝 흐르니 낄낄대며 웃는 소리가 귓전을 맴돌았다.




몇시간 전, 늦은 밤 중에 깊은 산속을 헤매던 잔디머리 남자가 멀리 불빛을 발견하고 쫓아오지만 그곳에는 담장에 둘러싸인 기와집이 한 채 있을 뿐이었다. 사내가 두루 살피니 담장 위 놓인 기왓장은 성한 곳이 없으며 이음새가 들뜬 대문은 쓰러지기 직전이라. 버려진 지 수십년은 될 법한 폐가는 도깨비불에라도 홀린 양 깜깜하기만 했다. 그럼에도 내리 삼일을 산중에서 헤맨 선비의 행색이 초라하니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안에 아무도 안 계십니까? 산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중인데 하룻밤만 묵게 해주셨으면 합니다!”

낡은 대문이 부서져라 두드린 남자는 염치도 없이 목청을 높였다. 한여름의 무더위에도 집 주변은 풀벌레 우는 소리 하나 없이 한기마저 들었다. 산을 헤매는 동안 그를 괴롭히던 산모기도 어느샌가 자취를 감췄다. 이를 눈치챈 남자가 고요한 집의 대문을 또 한번 주먹으로 두드릴 때였다.

“아무도 안, 헉!!!”

개미 한 마리 지나는 기척도 없었음이다. 그런데 숨막힐 듯한 적막 속에서 대문 틈새를 비집고 까만 동공이 그를 주시하는 게 아닌가. 남자가 놀란 가슴을 부여잡으니 안에서 빗장 푸는 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녹슨 경첩이 우는 소리와 함께 열린 문너머에는 흰 도포를 두른 짧은 검은머리의 사내가 나타났다. 핏기 없는 안색에 눈밑이 거무죽죽했던 이는 서릿발 같은 눈매를 가지고 있었다.

“길을 잃고 산을 헤매는 중인데 하룻밤만 머물 수 있겠습니까? 이슬만 피하게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들어오시지요.”

검은머리 남자는 키가 컸다. 190은 넘어뵈는 이를 올려다보며 말하니 그는 미심쩍은 얼굴을 하면서도 문을 열어둔 채 먼저 몸을 돌렸다. 잔디머리 남자가 갓끈을 풀며 안에 들어서니 몸을 덮치는 한기가 더욱 심해진다. 작은 마당 역시 잡초가 무성한 기와집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 대청마루 앞에서 돌아선 검은머리 남자는 갓을 벗은 이의 얼굴을 보고는 잠시 멈칫했다. 구름 사이로 드러난 달빛에 손님을 보는 남자의 눈동자가 붉게 물들었던 것도 같다. 뿐일까, 뭘 하다 왔는지 기생오라비같이 생긴 얼굴과 달리 두 손은 핏빛 범벅이니 그제사 발견한 모양새에 손님 역시 마당 중간에서 멈칫했다. 집주인도 무얼 보고 놀랐는지 아는 눈치였다.

“닭을 잡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야밤에 불 하나 없이 캄캄한 집 안에서 닭을 잡는다는 게 얼마나 기이할까. 그러나 집주인은 이를 신경쓰지 않는 듯했다. 손님이 슬그머니 뒷걸음칠 때는 손수 건넌방 문을 열어주며 좀전의 탐탁찮아 하던 표정을 바꾸기도 했다. 어느샌가 집은 방마다 호롱불이 켜져 환한 상태였다. 방금까지의 캄캄한 집이 거짓말이라는 듯이.

“씻을 물을 데워올 테니 안에서 기다리시지요.”

입꼬리를 올려 미소지은 집주인의 목소리가 고막을 감싸며 진동한다. 그에 홀린 듯 고개를 끄덕인 손님이 안으로 들어가니 방 문이 닫혔다. 바람 한점 없는 방 안에서 호롱불이 어지러이 흔들리고 있었다.




삼일 전, 요괴사냥꾼 롤로노아 조로는 일 하나를 의뢰받았다.

“팔척요괴?”
“어, 키가 팔척에 유령거미처럼 길쭉한 팔다리를 가진 요괴래. 목격자 말에 따르면 얼굴은 새하얗고 붉은 눈을 하고 있다더라. 산짐승이랑 사람을 잡아먹는다나 봐.”

조로는 주막 앞에 놓인 청상에 앉아 얘기를 듣고 있었다. 얘기를 전하던 이는 덮수룩한 검은머리가 제멋대로 흐트러진 모습이 백수건달 같아봬도 주변 일대를 관리하는 원님이었다. 이 마을 또한 여기 속했는데 대고을이라 칭할만큼 면적이 넓어 면면히 살펴도 문제가 끊이질 않았다. 그러니 지금 일도 외주를 주는 것 아닌가. 과거에 어쩌다 함께 요괴를 퇴치한 일로 친구가 된 조로는 이른 나이에 원님이 된 루피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놈만 해치우면 되냐?”

시원스런 말에 루피가 고개를 끄덕일 때다. 부엌에서 요란한 다급한 소리가 들려온 것은.

“살려주시게! 내게는 아내와 처자식이ㅡ!”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도마 위로 칼을 내려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꽤 경쾌한 소리 직후 청상 위로 한상 거하게 차려진 것은 이 지역 특산품인 인면어 회와 막걸리였다. 루피가 미리 말해둔 모양인지 회쳐진 물고기는 팔뚝만해서 통통하게 살이 올랐다. 다만 거슬리는 건 접시 위에 장식된 머리와 꼬링일까. 물론 갓 잡은 싱싱함을 표하기는 그만이라 하나 인면어는 사람 얼굴을 모방한 물고기다. 뿐이랴, 사람의 목소리도 흉내내서 이를 깨름칙하게 여기는 이도 많았다. 횟감으로 일품인데다 낚는 맛도 좋아 낚시꾼들 사이에서 알아주는 요어라지만 말이다.

‘그 요괴가 비를 부르는 모양인가 봐. 아랫 마을은 몇년새 여름마다 겪는 수해가 심해지고 있어. 윗 마을인 이곳도 잦은 비 때문에 산사태를 걱정할 지경이고.’

루피가 말한 제일 큰 걱정은 이것이었다. 숲이 울창한 산이라 아직까지 산사태는 일어난 적 없으나 계속 강수량이 불어나면 사고는 예견됨이었다. 루피는 진짜 일이 터지기 전에 막고자 함이었다. 다만 예상 외였던 건 사람을 잡아먹는 요괴니만큼 비교적 찾기 쉬운 곳에 둥지를 틀었다고 했다. 제가 친절하게 나무기둥에 이정표도 표시해뒀으니 반나절이면 도착할 거라고. 그러나 루피가 자신만만하게 말한 것과 달리 조로는 꼬박 삼일을 헤맸고 드디어 찾은 둥지는 짐승길도 나지 않은 깊은 산중에 숨어 있었다. 이에 조로는 요괴를 처치하고 산을 내려가면 루피에게 단단히 한마디 해줄 참이었더랬다.

“하…….”

여기까지가 반인반어에게 발목을 물리고 잡아먹히기 직전 기절한 조로가 깨어난 뒤 자초지종을 설명한 대목이었다. 그를 치료해주고 돌봐줌이 분명한 검은머리 남자는 팔짱을 낀 채 긴 숨을 쉬었다. 그리고는 인상을 구기며 말하는 거였다.

“너 둥지를 잘못 찾아왔다. 여긴 옆마을이야.”
“그럴리가! 네놈은 요괴가 분명해! 내 눈은 틀리지 않아!”
“내 말부터 들어라! 내가 요괴인 건 맞는데 네가 찾는 팔척 놈의 둥지는 옆산에 있다! 그것도 산 초입 근처에! 나처럼 짐승도 오지 않는 깊은 산중은 아니란 소리지! 너야말로 여긴 어떻게 찾아온 거냐?! 한발만 삐끗해도 벼랑 밑으로 떨어져 목이 부러졌을 텐데!”
“어쩐지… 길이 험하더라니……!”

그제야 깨달은 듯한 잔디머리 조로가 이불을 들추고 일어나려 했다. 그러나 발목에서 격통을 느끼고 몸을 움츠릴 뿐이었다. 그 앞에서 양반다리를 하고 앉은 검은머리가 혀차는 소리를 냈다. 한심함이 가득 담긴 소리였다.

“섣불리 움직일 생각일랑 말아라. 나 아니었으면 너 발목이 절단날 뻔했으니까.”
“그게 무슨 소리야?”

조금 움직였다고 식은땀이 흥건해진 조로가 묻는다. 동시에 이불을 들추니 무릎까지 걷어붙인 바지 아래로 붕대에 칭칭 감긴 발목 하나가 보였다. 이번에는 반쯤 엎어지다시피 한 조로가 장탄식을 할 차례였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인어한테 당할 뻔한 걸 내가 구해준 거다.”
“…….”
“주제는 아는 모양이로군. 조용해진 걸 보니. 녀석은 네가 도망가지 못하게 발목을 망가트려서 범하려 했다. 요력이 저급한 놈이라 다행이었지. 그러니 눈이 돌아간 놈이 그 자리에서 널 범하려 든 걸 요행수로 알아라. 날 의식할만 한 요력이 있었으면 널 끌고 자리를 피했을 테니까.”

아마 그리 됐다면 죽을 때까지 놈에게 범해져 기를 빼앗겼을 테다. 오래전 스님이 해준 잡아먹힌다는 말에 다른 뜻이 있음을 알기란 오래지 않았다. 스님의 말처럼 한살한살 나이를 먹을수록 점점 강한 요괴들이 꼬여들었고 이말인즉 지능 역시 높은 놈들이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이놈들은 육신을 먹어치워 단발성으로 요력을 더하기보다 꾸준히 더 많은 힘을 키우는 방법을 파악했다. 성적인 접촉을 통해서. 역시나 눈앞의 검은머리는 또다시 쯧쯧 혀를 차며 조로를 나무라듯 입을 놀렸다.

“제 팔자를 알고 있으면 절간에 들어가 죽은 듯 살 것이지 뭐하자고 요괴는 잡으러 다니는 거냐? 네놈은. 놈들에게 붙잡혔다가는 곱게 죽지도 못할 걸 뻔히 알면서.”
“그리 얌전한 성미는 아니라서 말이지. 그나저나 구해준 건 고마워. 인사할게. ……난 요괴사냥꾼 롤로노아 조로라고 하는데 그쪽은 이름이?”
“쳇, 트라팔라 로우, 설표요괴다.”
“…….”

설표는 깎아지른 암반지대가 두드러지는 고산지대를 주무대로 삼는다. 일반인은 평생 한번 보기도 어려운 생물이었다. 그런고로 로우는 제 말에도 별 반응이 없던 조로 앞에 원형태를 꺼내들었다. 사람 얼굴이 뒤로 주욱 늘어나더니 회색 호랑이를 연상케하는 인상이 비쳤다 사라지니 그제야 조로의 눈이 커졌다. 머리 위로 동그랗게 남은 귀가 유난히 폭신해 보였다.

“…고양이?”
“아니야!!!”

그건 감미로운 목소리가 하악질로 바뀌던 순간이었다.





사람은 안 먹는다고 했다. 냄새나고 더러워서. 추접스런 것들이 떼지어 생활하니 그 근방에만 가도 똥내에 현기증이 온다며 로우는 질겁했다. 그게 자신이 사람을 먹지 않는 이유이며 아무도 접근 못할 험지에 둥지를 튼 까닭이라고. 궁금증을 참지 못해 로우를 기어코 설표로 변하게 한 조로는 로우의 등을 타고 나와 본 풍경에 놀랐더랬다. 설표는 특유의 큼직하고 푹신한 발로 수직에 가까운 절벽의 불규칙한 굴곡을 타고 오르내리면서도 반동이 없다시피했다. 하지만 이건 놈이 설표라 그런 것이니 조로는 제가 그 밤중에 정말 어떻게 여길 지났을까 싶을 따름이었다. 벼랑 반대편에는 가파른 숲길이나마 있긴 했으나 이곳은 산짐승도 다니기 힘들 정도로 우거진 정글이었다. 두 사람은 그나마 이쪽을 통해 왔으리라 짐작했으나 머리까지 자란 풀숲은 조로가 기절한 이틀 동안 사람 하나 들고난 흔적을 지우기 충분했다. 그렇게 짧은 탐방을 마치고 돌아온 집에서 로우가 다시 사람으로 변할 때 조로는 제가 있는 곳이 안방임을 깨달았다. 뒤돌아선 나신의 사내가 바지의 허리끈을 동여매고 저고리와 흰 도포를 두를 때까지 조로는 이불 위에 얌전히 앉아있었다. 조로는 그제야 또 제가 한 잘못을 깨달았다.

“저기, 옆구리에 베인 상처 내 탓인 거지? 정말 미안하다. 뭐라 사죄해야 될지…….”
“집어쳐라. 날 죽이려 했으면서!”
“난 네가 정말 팔척요괴인 줄 알고 그랬지.”
“내 키가 어딜 봐서 팔척인데?! 넌 눈을 폼으로 달고 다니냐?!”
“왼쪽 눈은 폼이야.”
“이ㅡ!!”

저것도 농담이라고 하는 소리인가. 세로로 난 칼자국이 덧씌워진 왼쪽눈꺼풀 사이로 꺼내서 보여준 건 반구 형태의 의안이었다. 그리고는 맹구처럼 헤헤 웃는 꼬락서니가 로우는 말이 안 나올 정도다. 아마 저것도 요괴에게 당했으려나. 발목을 치료하며 전신에 걸쳐 크고 작은 흉터가 많던 몸을 보게 된 로우는 다시 혀차는 소리를 내고는 눈을 돌려버렸다. 사람의 몸은 연약해서 요괴에게 당한 상처는 대개 흉터로 남기 마련이었다.




로우의 말에 의하면 사람을 잡아먹는 요괴는 약한 거랬다. 사람은 뼈만 많지 먹을 건 적은데다 그나마도 잡내가 심하다고. 때문에 타고나길 약하거나 부상 등의 이유로 사냥이 어려운 경우가 아니고서는 굳이 사람을 잡아먹지는 않는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을 사냥하는데다 먹기까지 하는 놈은 매우 고약한 취향을 가졌다는 것도. 짐승도 썪은 고기를 즐기는 것들이 있다지 않은가. 실로 설표요괴는 인간을 무척 싫어했다.

“그럼 네 말대로면 팔척요괴는 썪은 걸 좋아한단 말이지?”

얘기 끝에 조로가 질문을 던지니 로우는 조용했다. 지금 그는 불 지핀 아궁이 앞에서 밥을 하는 중이었다. 다른 모습이 설표여서 그렇지 로우는 채소와 고기가 적절히 배합된 식사를 즐긴다고 했다. 물론 요괴의 생활방식은 천차만별이니 대개의 인간들이 알고 있는 날것을 즐긴다거나 흡혈을 한다거나 하는 행위가 틀린 건 아니라는 말도 했지만 자신은 절대 여기 포함되지 않는다는 말 또한 있었다. 아궁이 위로 솥단지에 밥물이 끓어오르는 동안 로우는 이를 얼마나 강조했는지 모른다.

“왜 말이 없어? 내가 잘못 짚은 거야?”

조로는 안방과 부엌이 연결된 문지방에 앉아있었다. 로우가 만들어준 지팡이에 몸을 기대고서. 그에 부뚜막이 끝나는 자리에 위로 내린 두 발을 물끄러미 보던 로우가 뜸들이기만 남은 가마솥을 맨손으로 들어 옮겼다.

“너 손ㅡ!!”
“호들갑떨지 마라. 고작 이런 일에 상처 입을 만한 몸이 아니다.”

무쇠로 된 가마솥은 직전까지 불에 지글지글 끓은 상태였다. 그것을 가뿐히 옆에 미뤄둔 로우는 새 무쇠솥을 활활 타는 아궁이 위로 올려 물을 채우고 탕거리를 만드는 거였다. 그곳에는 로우가 갓 잡아와 손질한 토끼 고기가 들어갈 예정이었다. 그리고 어영부영 더부살게 된 조로는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신경쓸 것 없다, 인간. 지금 네 상태로 나가봐야 그놈 먹이가 되기 십상이다. …애초에 인어한테 물린 것에 내 부주의도 있으니까.”
“내가 널 오해하고 습격하다 그렇게 된 건데 뭘 그런 것까지 신경쓰고 그러냐?”

조로는 별생각 없이 웃었지만 로우는 아니었다. 고작 스물한해를 산 애송이랬나. 그에 비하면 로우는 세 배 이상을 살아온 셈이다. 하니 그는 첫눈에 조로를 알아봤음이다. 놈의 직업이 요괴사냥꾼이라는 것을. 다만 삼일간 길을 잃고 산속을 헤맨 건 틀림없어서 하룻밤만 묵게 하고 내쫓을 심산이었다. 이는 옆산에 둥지를 튼 팔척요괴 때문에 인정을 베풂이었는데 먼저 잡아놓은 인어가 신경쓰였다. 그래서 조로가 잠든 밤중에 놈을 처리하려다 사달이 난 것 아닌가. 혼자가 익숙했던 로우는 여태 곳간 문 잠그는 걸 깜빡한 것을 후회했다. 그러면 조로가 인어 독에 부상 입지는 않았을 텐데 하고 말이다. 인어 독은 맹독에 속했으니 로우가 제때 처치하지 않았더라면 조로는 죽었으리라.

“팔척요괴는 삼백살이 넘게 살아온 요물이다. 인간이 함부로 상대할 수 있는 놈이 아니야. 더욱이 네가 가진 기운을 생각하면 그녀석은…….”
“그건 붙어봐야 아는 거지.”
“내가 하는 말을 들어라, 좀!!”

저녁 식사를 마친 다음이었다. 산속의 밤은 일찍 찾아왔으니 하루를 마감하는 것도 빠르기 마련이다. 이부자리가 펴진 안방에서 조로의 발목에 새 붕대를 갈아주던 로우는 결국 큰소리를 냈다. 호롱불이 일렁이는 방 안에서 그는 처치를 끝낸 발목을 끌어당겨 조로와 마주했다.

“너도 명색이 요괴사냥꾼이니 요괴의 생리에 대해 모른다고는 않겠지? 우리들이 가장 중요시 하는 게 무엇인지를.”
“요력을 말하는 거지?”
“그래, 요력. 우리들한테 이것은 생명이자 힘이다.”

요괴를 불로불사에 가깝게 만드는 것이 요력이었다. 타고나기도 천차만별인 이것을 높이는 방법 또한 다양했는데 제일 쉬운 건 오랜 기간 공덕을 쌓은 승려를 잡아먹거나 요력이 높은 요괴를 취하는 거였다. 하나 요괴 또한 이지를 가진 것들과 아닌 것들의 구분이 명확하니 동족을 취한다는 개념 또한 국한된 일부만 생각할 수 있는 일이다. 동족 역시 취하는 대신 먹는 것으로 요력을 흡수할 수 있음은 마찬가지였고.

“하지만 한번 취함을 당한 요괴는 요력이 고갈돼 다신 전으로 돌아가지 못하지. 요력이 고갈된 놈은 그저 인간보다 조금 강한 생물일 뿐이야. 운 좋게 인간과 비슷한 형태를 했다면 그들 속에 섞여 살 수 있겠지만 아니라면 산짐승의 먹이로 전락한다.”
“우와, 잠깐만! 나 이렇게까지 자세히 알 필요는 없는데…….”
“닥치고 내 말 들어! 널 위해 하는 소리니까!”

조로는 요괴의 적나라한 성생활까지 알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동족끼리는 단순히 잡아먹는 것 말고 다른 방식으로 요력을 빼앗을 수 있다 건 실로 충격적이었으니까. 물론 그 역시 같은 의미로 위협을 당한 적은 왕왕 있으나 이런 일이 요괴들 사이에서 빈번했다는 걸 한낱 인간이 어찌 알겠나. 더불어 인간인 자신은 이런 건 굳이 몰라도 되겠지 싶은 생각도 들었다. 그런 이유로 눈을 돌리니 턱을 쥐는 손길이 있었다. 기생오라비로 본 첫인상과 달리 잘생긴 얼굴이 조로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매우 드물지만 특별한 기를 타고나는 인간이 있다는 얘기를 들은 적 있어. 나도 실제로 본 건 네놈이 처음이지만 한눈에 알아보겠더군. 그리고 요괴는 한번 취해짐으로써 모든 요력을 상실하지만 네놈은 우리들에게 화수분이나 다름없는 존재다. 단지 몇번 취하고 버릴 물건이 아니라는 소리지.”
“하지만 넌 내게 아무짓도 안 하잖아.”
“나같은 요괴를 만난 게 네 천운인 거다! 네놈은 한번 잡히면 죽을 때까지 착취당한다는 걸 이해 못한 거냐? 그러니 내일이라도 당장 이 산을 떠나 절에라도 박혀 살아라! 민가까지는 내가 데려다주마!”
“나더러 평생 두려움에 떨며 살라고?”

얄쌍하니 시원스레 빠진 입꼬리가 비틀린다. 로우에게 턱이 붙들렸음에도 마주한 눈빛은 당당하기 그지없다. 이리 타고난 게 무슨 죄라고 평생을 숨어 살란 말인가. 그럴 바에는 할 수 있는 데까지 발악하다 죽음을 맞이하는 게 낫겠다. 절대 쉬이 끌려가 당해주지는 않을 것이다. 그정도 근성은 있는 조로였다. 이를 느꼈음인지 로우 역시 포기한 듯 털썩 주저앉았다. 그 앞에서 조로는 또 속없는 소리를 했다.

“그래도 너처럼 착한 요괴도 있으니 됐잖아. 안 그래?”
“누가 착하다고ㅡ!”
“난 요괴는 다 나쁜놈들만 있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네. 너처럼 친절한 녀석도 있구나.”
“난 친절하지 않아! 아니, 그것보다 나같은 요괴가 드문 거라니까?! 네놈은 특히 더 요괴라면 무조건 경계해야 된다! 지금도 이렇게 군침도는 냄새를 흘려대는데……!”

아무래도 놈에게 우려스런 선입관을 심어준 것 같다. 저처럼 이성적인 요괴가 있을지 모른다며 친화적인 태도를 취할 듯한 잔디머리에 로우의 속이 더욱 답답해졌다. 이를 반영하듯 무심코 뱉은 소리를 급히 삼키지만 흘러나온 말은 어쩔 수 없음이다. 잠시 눈이 동그래졌던 조로는 바로 태평하게 실실댔대도 말이다.

“괜찮아. 너도 요괴니까 그럴 수 있지.”

수십년 요괴 인생에 이토록 복장 터지는 생물은 처음이었다. 역시 인간은 싫다고 생각한 로우가 머리를 마구 헝클일 때였다. 돌연 멈칫한 그가 손짓으로 호롱불을 끄더니 조로를 덮치듯 끌어안았다. 한여름치고 싸늘한 산속 공기가 습해진 것도 이쯤이었다.

“쉿.”

조로와 스푼처럼 포개진 로우가 이불을 덮어씌우며 바람소리를 냈다. 그순간 멀리서부터 아스라한 빗소리가 들린다. 팔척요괴가 비를 몰고다니는 놈이랬던가. 날씨를 부릴 줄 아는 요괴는 요력 또한 매우 높은 상급이었다. 이윽고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오는데 마당으로 난 장지문너머 기이한 그림자가 서성였다.

“로우, 자네 있는가? 내 옆산의 팔척요괴일세.”

힘없이 들려온 낮은 음성은 여성도 남성도 아니었다. 다만 공기를 타고 넘어온 음성에 조로는 온몸의 솜털이 쭈뼛 서는 걸 느꼈다. 그때 대문을 또 한 차례 흔드는 손길이 있었으니 문앞의 그림자는 마당너머의 대문을 두드리던 자의 것이라 하기 어려움이다. 그것도 그림자는 허공에서 뱀 처럼 꼬부라진 모양새에 긴 머리를 늘어트리지 않았나. 조로가 이불 틈새로 이를 확인할 때 문지방너머로 음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네 벌써 자는가? 냄새가 나는 걸 보니 집에 있는 건 분명한데.”

이어 그림자는 코를 킁킁대는 소리를 냈다.

“흡!”

그순간 조로가 놀란 건 목뒤를 핥아올리던 까슬한 혀의 감촉 때문이었다. 지금까지는 봐준 거라는 양 입을 틀어막은 손과 몸을 옥죄는 팔힘이 엄청났다. 덕분에 소리가 새는 건 막았지만 목덜미를 핥아올리는 행위는 더욱 짙어졌다.
잡아먹힌다고 생각한 순간에 허리춤이 풀린 바지 사이로 문질러지는 것이 있었다.




조로는 로우의 의도를 알았다. 영역표시는 사람 냄새를 지우기에 제일 효과적이었다. 그런 고로 목덜미에 침을 바르고 또 음경을 꺼내 스스로 자극하는 것 아니겠나. 그사이 눈앞의 기이한 그림자는 장지문 주위를 배회하며 연신 코를 킁킁거렸다. 조로의 뒤에서는 속전속결로 진한 점액질의 요도구선액을 방출하는 로우가 있었다. 이어 그것을 피부에 직접 펴발라주니 조로는 눈을 꽉 감고 이를 사려물며 참을 따름이었다. 지금 상태로는 팔척요괴에게 존재를 들켜봐야 좋을 게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허공에 기이하게 떠있던 머리가 멈칫했다. 추적추적 내리는 빗소리와 함께 아스라이 웃는 소리가 들릴 때 조로의 입을 감싼 손은 유달리 털이 푹신하고 커다란 발바닥으로 변했다. 조로는 얼굴을 다 감쌀 정도로 큰 앞발과 함께 등 뒤로 불룩 솟은 털뭉치의 육중함을 느꼈다.

“달큰한 냄새는 역시 설표 자네 것이었나 보이. 덕분에 내 가랑이가 다 저릿하지 뭔가. 오늘은 가네만 다시 올 테니 그땐 술이나 한잔 함세.”

영역표시를 위해 방출되는 체액에는 거북하고 강렬한 냄새가 섞이기 마련이다. 이는 약한 녀석에게는 공포로, 경쟁자에게는 거부감으로 작용했다. 눅눅한 공기에 실린 체취를 맡은 팔척요괴 역시 슬그머니 물러나는 것을 보면 말이다. 그럼에도 연인을 꼬시듯 사근한 말을 하는 것은 전부 속임수였다. 본디 요괴란 이득 없는 친절을 베풀지 않았다.

“그럼 쉬게나.”

그러고도 말과 달리 사라지지 않는 그림자에 설표는 길다란 꼬리를 크게 내려쳤다. 몸 길이 대비 삼분의 이쯤 되는 근육다발이 채찍처럼 휘둘러지니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소리가 가히 벼락이라도 내려친 듯하다. 설표의 수북한 가슴털에 감싸이지 않았더라면 인간은 귀머거리가 됐을 성싶다. 그 벼락같은 불호령에 그제야 문너머 기이한 그림자도 흐흐 웃는 소리를 내더니 점점 물러났다. 이윽고 추적추적 내리던 빗소리가 완전히 잠잠해진 뒤에야 조로가 이불을 걷어내지만 습기를 잔뜩 머금은 공기는 눅눅하기 그지없었다. 온몸을 덮는 꿉꿉함에도 조로는 체액이 점철된 둔부 위로 바지를 끌어올리는 걸 망설이지 않았다. 애써 묻혀준 체취가 몸에 배는데는 뜸들이기가 최고였으니, 그는 시간도 보낼 겸 유난히 도톰한 설표의 앞발을 만지작대기 시작했다. 암벽을 노니던 육구는 거칠기 그지없으나 발볼록살의 푹신함과 꼬순내는 조로가 얼굴을 파묻게 만들기 충분했다. 인간이 언제 이렇게 커다란 육구를 코앞에서 보고 만질 수 있겠는가. 본디 동물을 좋아했던 조로는 제게 닥친 상황을 즐기기로 했다. 덕분에 자신의 체취를 더 강하게 내뿜고자 본체로 돌아간 로우는 인간형태로 돌아오지 못했고 말이다. 그래도 제가 한 행동의 이유를 눈치채고 고분고분한 조로를 보니 만족감이 듦에 짧고 낮은 콧바람 소리를 냈다. 이는 코와 입을 이용해 내는 소리로 친근함을 표하는 거였다.

“오, 로우 너 지금 애교부리냐?”

긴장된 순간이 지난 덕인지 조로는 안도한 음성이었다. 그리고 로우는 자연스레 제 이름을 부른 인간이 싫지 않았다. 잔뜩 굳어있던 어깨가 풀어져서 몸을 전부 제게 기대오는 것 역시도. 녀석의 타고난 기운은 요괴라면 진수성찬이 끝도 없이 나오는 잔칫상이지 않던가. 이는 아무리 먹어도 질리지 않는 맛이요 가장 강렬한 쾌락이었다. 그러니 팔척요괴도 냄새를 좇아 여기까지 온 것일테다. 다만 놈은 아직 조로가 산을 헤매는 동안 곳곳에 누더기처럼 묻은 냄새의 실체를 단정하지 못했을 뿐이다. 팔척요괴는 피와 살생을 즐길지나 신중한 성격이었다.

“푸르르 푸르르.”

또다시 조로의 머리 위에서 낮고 짧은 콧바람이 들려온다. 동시에 축축한 코로 가볍게 머리통을 건드리니 육구에 얼굴을 박고 킁킁대던 조로가 힐끗 돌아본다. 그 얼굴은 남자다움에도 매끈하며 고운 선을 가지고 있었다.




로우는 동이 트기 전에 출발하자고 했다. 조로를 산 아래 민가까지 데려다 주겠다며. 당장 출발치 않는 건 혹시 모를 팔척요괴의 존재 때문이었다. 조로 역시 발목이 낫는 게 먼저라는 건 동의하는지라 두 사람은 남은 시간을 뜬 눈으로 버티고자 했다. 그리고 이런 얘기를 나누기 위해 로우가 사람 형태로 돌아왔을 때의 조로는 아쉬운 기색이었다.

“놈은 신중한만큼 집요한 성격이다. 인간 냄새를 맡고 내 집까지 찾아온 이상 바로 포기하지는 않을 거야. 내 냄새로 가리는 것도 고작해야 일이틀이겠지. 그러니 내가 널 마을 초입에 내려주면 지체 없이 떠나라. 최대한 멀어질수록 좋아.”
“…….”
“이봐, 너 내 얘기 듣고 있냐?”
“설표 모습으로는 말 못해?”

애써 로우가 묻혀둔 체취를 최대한 오래 유지하려면 안 씻는 게 최선이지만 그러기는 어려웠다. 팔척요괴가 다녀간 뒤의 공기는 눅눅하기 그지없어서 결국 두 사람은 차례로 물을 끼얹고 왔으니. 로우는 부엌 한쪽에 마련된 목욕통을 두번째로 사용한 뒤 뒷정리까지 하고 안방으로 들어왔다. 그리고는 조로의 발목 상처를 다시 처치해주며 아까의 얘기를 이어가던 중이었다. 비록 산에서 캐온 약초를 빻아 붙인 자리에 새 무명천을 감아 고정한 그는 조로의 물음에 기가 차서 쳐다봤다지만 말이다.

“지금 네 목숨이 걸린 얘기 중인데 농담이 나와?”
“그래서 정말 아까 모습으로 말은 못한다고?”
“그 모습으로는 무슨 말을 해도 네가 알아듣지 못해. 네 하찮은 고막에는 으르렁대는 소리로만 들릴 테니까. 그보다 너, 여태 내가 한 말을 듣기는 했냐?”
“그래. 내 몸에서 네 냄새가 사라지기 전에 최대한 멀리 가라고 했잖아.”

두 손을 뒤로 짚은 조로의 얼굴이 의기양양하다. 그는 푹신한 이불 위에서 로우에게 다리를 내준 그대로 입끝을 끌어올렸다. 그 당찬 모습에 로우는 대꾸할 기력도 사라진 듯 한숨을 내쉬었다. 요즘 젊은 것들은 다 저 모양인가 하는 생각과 함께. 그럼에도 불구하고 잠시 뒤 로우는 다시 설표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범과 견줄만 한 설표의 품에 겁도 없이 기어들어간 조로는 푹신한 육구를 만져대기 바빴고 말이다. 눈을 지긋이 감은 설표는 밤새 거슬림과 간지러움을 참듯 콧등을 움찔댈 뿐이었다.




로우가 둥지를 튼 곳은 산새가 험준하고 암벽이 많기로 유명하다. 특히 로우는 산꼭대기 밑에 집을 뒀으니 여기서 하산한다면 사지 멀쩡한 장정도 꼬박 하루가 걸릴 터였다. 그것도 범이나 멧돼지에게 살아남았을 때의 이야기였고. 때문에 로우는 볼수록 조로가 어떻게 제 집에까지 왔는지 신기할 따름이었다.

“오, 진짜 빠르다.”

밤 산행만큼 위험한 게 없다지만 그건 인간에 한해서였다. 로우야말로 산의 주인이었으니 그가 다니는 길목은 범과 멧돼지도 얼씬치 않았다. 산에 모여드는 잡다한 요괴들 또한 마찬가지고. 주변에 무심했던 로우는 소란만 피우지 않으면 제 영역에 들어오는 것들을 방치했는데 그럼에도 지레 겁먹은 놈들이 도리어 몸을 사렸다. 덕분에 험준한 산새며 깎아지른 암벽이며 설표의 등을 타고 날아온 듯한 경험의 조로는 마을 초입에 선 장승이 보이자 아쉬운 마음이 든다. 이때 사람 얼굴을 깎아놓은 키 큰 나무가 멀리 보일쯤 멈춰선 설표는 조로가 내리기 쉽게 엎드려주기도 했다. 그리고는 마을에 들어서는 것을 봐야 겠다는 양 있으니 지팡이를 짚고 절뚝이며 걸어온 조로가 멀뚱히 바라보는 거였다. 어깨에 야무지게 봇짐도 멘 조로는 몸을 일으킨 설표가 콧등으로 떠밀었을 때야 마지못해 걸음을 뗐다.

“이대로 헤어지기 아쉽네. 발목 다 낫거든 너 다시 보러 와도 돼?”
“푸르르.”
“꼭 오라고?”

친근함 어린 콧바람에 조로가 농을 건내며 웃었다. 검은 바탕의 속이 비치는 얇은 도포를 두른 조로는 갓끈을 목에 두르고 뒤로 넘긴 모양새였다. 애써 서생 흉내를 내놓고 분위기는 대놓고 야생의 날것이라 로우는 첫눈에 조로의 직업을 의심했었다. 그럼에도 놈을 받아줬던 건 꼬박 삼일을 산속에서 헤맨 모양새가 거지꼴이어서였다지만. 그래놓고 실은 사람 잡아 죽이는 게 취미인 놈이 부러 찾기 쉬운 곳에 튼 둥지를 놔두고 노련한 채삼꾼도 쉬이 접근치 못할 제 집 문을 두드렸다는 기막힌 말에 로우는 여전히 걱정이 앞섰다. 그런 녀석이 요괴를 불러들이는 기운을 가졌다는 것도. 로우의 눈에 갓 스물이나 될법한 잔디머리 인간은 엄벙덤벙이 따로없었다. 해서 아무리 길 옆 나무들 사이로 몸을 숨겼다 하나 사람들 눈에 띄기 십상인 설표는 조로가 멀어질 때까지 자리를 뜨지 못했다. 그러다 드디어 웅크린 몸을 일으킨 건 후덥지근한 바람결에 눅눅한 내음이 한가득 실려오면서였다.

“…….”

긴 장마가 낀 여름이어도 이 주변은 수십년간 수해가 없던 곳이었다. 산에서 내려오는 계곡과 연결된 강줄기의 폭은 넓고 수심이 깊은데다 육지와 물길의 고저가 뚜렷했기 때문이다. 한데 팔척요괴가 둥지를 튼 몇년 사이 심심찮게 강 주위 아랫마을이 크고 작은 수해를 입기 시작했다. 놈이 비를 부리는 탓이었는데 이는 녀석이 강 하류의 썪은 물에서 태어났음을 뜻했다. 그곳에서 억울하게 죽은 것들의 원념이 놈의 시작이었으리라.
로우가 태어나기 약 삼백여년 전의 일이다. 강 하류에 위치한 두 마을간에 벌어진 칼부림은 지금까지 구전으로 전해내려 왔으니. 민물어업을 생으로 삼던 두 마을간의 대립이 불러온 참극은 결국 하루만에 강 하류를 새빨간 피로 물들게 했단다. 강 상류까지 올라온 악취에 관리가 파견됐을 때 하류는 썪다 만 시체 백여구가 떠내려가지도 않고 고여있었다고.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두 마을 사람들이 전부 나자빠진 강 하류를 점령한 건 죽어서도 놓지 못한 탐욕과 증오였다. 그 진창 속에서 구더기처럼 득시글댄 건 형태도 이지도 없던 요괴들이었을 테고. 이렇듯 대부분의 요괴는 그릇된 탄생에서 비롯했으니 처음은 일정한 형태도 없는 오물덩어리에 지나지 않았다. 그것은 수년에 걸쳐 사념을 먹이로 삼고 저와 비슷한 것을 집어삼키는 방식으로 일정한 형태를 갖추게 된다. 그렇게 수십, 수백년이 지나면 이무기와 같은 존재가 되는데 팔척요괴와 같은 것들은 아무리 요력을 높여도 거기까지였다. 요괴를 부리는 요괴, 즉 용이 되려면 태생부터 달라야 함이었으니 이무기, 염사의 반열에 오른 요괴가 잉태해 낳은 존재여야 했다. 날 때부터 설표와 인간 형태를 지닌 로우처럼. 또한 이는 탐욕과 증오를 그릇으로 태어난 팔척요괴가 호시탐탐 그를 잡아먹으려 드는 이유이기도 했다.




팔척요괴가 불러들인 비는 썪은 내를 동반한다. 본모습으로 변한 로우는 이를 기민하게 눈치챘다. 때문에 의심 많은 놈이 상황을 살피려 저를 찾을까 재빨리 둥지로 돌아왔던 그가 이상함을 느낀 건 늦은 밤이었다.
그는 이제 고작 육십년을 좀 넘게 살아왔을 뿐이었다. 한데 인간과의 제대로 된 교류는 처음이던 그는 오늘 하루 자꾸 넋을 놓고 말았다. 로우는 고작 삼일 머물렀을 뿐인 인간에게 제가 정을 준 것도 몰랐다. 그래, 한낱 인간따위에게. 때문에 그는 조로가 생각날 때마다 부정하기 바빴다. 팔척요괴에 대해서도 깜빡 잊었을만큼. 그러다 늦은 밤에 문득 팔척요괴의 존재를 상기하고는 온몸의 털이 쭈뼛 서는 기분을 맛본 것이다. 놈이 옆산에 둥지를 튼 이래 신경전을 벌여오면서 로우도 깨닫는 게 있었다. 힘을 향한 욕망에 있어 놈은 가장 집요하다는 걸. 그러니 이무기가 용을 삼키려드는 것 아닌가. 비록 진짜 용이 되려면 한참 더 커야한달지라도. 하지만 분명한 건 로우는 태생부터 급이 나뉜다는 점이다. 때문에 로우를 몇번이나 덮치려 시도한 건 팔척요괴가 처음이었다. 녀석은 힘을 구함에 있어 이렇게나 포기를 몰랐다.

“크르르릉!”

설마 하는 예감이 확신으로 바뀌는 건 산 밑에 가까워지면서다. 공기 중에 섞인 진한 물내음, 그 축축함 사이로 스며든 썪은내가 밤 중의 산을 달음박질하던 설표를 자극했다. 별안간 널리 퍼지는 산주인의 울음에 풀벌레 소리마저 고요해진다. 마을 초입과 가까워질수록 둥그렇게 선 귀에 들려오는 건 추적추적 내리는 빗소리였다.




태초의 요괴가 어둠 한구석에서 발생했다면 오랜 시간에 걸쳐 그들은 두 부류로 갈라졌다. 자연에 순응해 먹이사슬의 한 축으로 들어갔거나 여전히 어둠의 단면에서 부자연적으로 발생하거나. 예를 들자면 인어가 전자에 속했는데 그들은 여타 생물과 같은 종족보존 활동을 했다. 그들은 특정 시기에 바다에서 강을 거슬러 올라 알을 낳고 돌아갔는데 이때 태어나는 것이 인면어였다. 그렇게 태어난 놈들은 작을 때는 무리지어 다니다 덩치가 커진 뒤면 단독생활을 했다. 이쯤에는 동족포식도 쉬이 이뤄지기 때문이다. 하니 덩치가 커질수록 계곡에서 강으로 널리 퍼지던 놈들은 한 시기에 육지를 나와 바다를 찾아갔다. 해수에 몸을 담그고서야 비로소 인어로서의 탈피가 이뤄지던 광경은 성인 상반신만 한 물고기가 뻥 터지며 사방으로 피와 내장 비슷한 잔여물이 날아갔으니 딱히 볼만 한 것이 아니었다. 우연히라도 봤다가는 악몽을 꾸기 십상이었으니. 하지만 이렇듯 생태계의 일부가 됐더라도 요괴임은 분명했으니 요력이 존재하기 때문이었다. 단 이들의 요력은 독으로 치환됐고 지난날 로우가 인어를 잡으려한 건 이것을 취하기 위함이었다. 인어는 가장 강한 요독을 지녔다. 이것으로 할 수 있는 것 또한 상정 외였고 말이다.

“약속을 지켰으니 제발 그걸 주시오! 그게 없으면 내 부인은……!”
“오늘 새벽에 내가 준 환약 효과를 톡톡히 봤겠지? 뱃속에 눈덩이처럼 자란 종괴로 바닥을 굴러다니며 괴로워하던 네 부인이 하루를 어떻게 지내더냐? 고통이 너무 커 네게 차라리 절 죽여달라 빌던 여인 말이다.”
“매일이 오늘만 같으면 좋겠다고 했소! 병마에 시달린 후로 그사람 처음 웃었소이다! 내 시키는 대로 저 오늘 산을 넘어왔다는 여행객의 음식에 약을 섞어 재웠으니 제발 그 환약을 주시오!”

여관 주인인 남자는 부인의 병이 낫는 건 바라지도 않았다. 지금까지의 그는 부인이 살아있는 동안에 고통이나마 덜어지기를 원할 뿐이었다.
남자는 부부의 연을 맺고 고생만 하다 쓰러진 부인의 병을 고치려 손쓰지 않은 방도가 없었다. 용하다는 의원이며 좋은 약재며 백방으로 수소문해 찾아다니지 않았나. 그럼에도 일년 사이 급격히 상태가 나빠진 부인에 대한 소문은 평소 인간사에 관심 많던 팔척요괴도 알고 있었다. 그래봤자 병마에 고통스러워하는 부인과 전전긍긍하는 남편의 상황을 여흥거리로 봤을 뿐이지만 이렇게 쓰임이 있을 줄이야. 백년도 못 산 설표따위가 무슨 생각을 할지 팔척요괴는 꾀고도 남음이었다. 그는 시궁창과 같던 썪은 물에서 버러지로 태어나 이만큼 힘을 키워오지 않았나. 술수를 부리는 거라면 이쪽이 한수 위였다.

‘그렇게 된 거로군.’

섶나무를 가지를 엮어 만든 침상 위에서 문밖 상황을 엿듣던 조로는 비로소 사태를 파악했다. 이곳은 마을에 하나뿐인 여관이자 이 근방의 유일한 마계전이었다. 마계전이란 말을 대여해주는 곳이었는데 여관 주인은 대여소에 있던 말들에 예약이 됐다는 둥 아프다는 둥의 핑계를 대 조로의 발을 붙잡았다. 그러더니 막 일을 마치고 돌아온 적토마를 보여주면서 하루만 여기 묵고 내일 아침 일찍 이놈을 타는 게 어떻겠느냐 제안을 한 것이다. 그러나 조로가 여관 주인의 말을 따른 건 오롯이 발목 때문은 아니었다. 무식하지만 정 안 되면 걸어서라도 마을을 벗어나면 그만이었다. 그리 된다면 오는밤은 들판에서 잤을 테지만 사냥꾼 생활에 이는 특별할 것도 없다. 중요한 건 로우가 묻혀둔 냄새가 지위지기 전에 조금이라도 더 거리를 벌려두는 것이었으니. 그러나 조로에게 이것저것 떠보듯 질문했던 남자는 그가 오늘 막 산을 넘어온 여행객임을 확신한 뒤로 묘하게 불안한 기색이었다. 밥 한끼 먹고 말을 빌릴까 한다는 얘기에는 대놓고 싸게 해줄 테니 하루 묵고 가지 않겠느냐 제안하지 않았던가. 그에 함께 마굿간으로 향하던 조로가 빤히 쳐다보니 여관 주인은 허둥대며 변명했다.

‘목발까지 짚고 발도 절뚝이는데 서두르는 걸 보니 내 안타까워서 그러지. 뭐하면 내 이곳으로 마을 의원을 불러줄 수도 있네만.’
‘…처치는 해뒀으니 의원은 필요없어, 주인양반.’
‘내가 이 마을 의원을 잘 알아서 내 부름에는 열일 제쳐두고 올 텐데 말이야. 이 여름에 무리하다 덧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러나. 얕은 부상도 아닌 듯한데.’

틀린 말은 아니었으나 남자의 참견이 심한 것 또한 사실이었다. 때문에 조로가 이번에는 대꾸도 않고 빤한 시선을 보내니 지레 겁먹은 여관 주인이 한번 꼬리를 내렸다. 이로써 조용해지려나 싶던 찰나 마굿간에서는 또 조로가 짚는 말에 갖은 핑계를 붙이는 것 아닌가. 이쯤해서는 아무리 눈치가 없어도 뭔가 있구나 짐작함이었고 그 결과가 지금이었다. 목발 짚은 사람을 굳이 삼층 끝방으로 안내한 것도 이상한 건 매한가지였고 저녁에는 주문도 않은 진수성찬을 내주지 않았나. 말로는 마침 방이 없어 다친 사람을 삼층까지 오르게 한 게 미안했다는데 그걸 누가 믿겠나. 종업원을 시켜 방에 상을 들여놓고 가던 남자에 조로는 그릇마다 적당히 덜어내서 먹은 흔적만 남겼다. 그런 뒤 일찍 잠자리에 든 척 기다리려니 여관 문이 닫힐쯤 습한 공기와 추적추적 내리는 빗소리가 들려오는 게 아닌가. 아니나 다를까, 지금 장지문을 통해 보이는 그림자 두 개 중 하나는 덜덜 떠는 여관 주인의 것이요, 또 다른 하나는 칠척쯤 되는 몸에 목과 머리만 일척쯤 돼보이는 놈이었다. 이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조로는 팔척요괴가 인어의 독을 이용한 환약으로 여관 주인을 회유했구나 깨달았고. 하지만 요독의 진짜 위험성을 남자는 모르고 있음이라, 팔척요괴의 간사함에 조로는 이불 밑으로 검을 힘껏 움켜쥐었다. 평범한 사람은 요독이 당장의 고통을 잊게 해주는 대가로 무엇을 가져가는지 모를 테니까.

“자, 약속한 환약이다. 그걸 꾸준히 다 먹이면 네 부인의 병도 나을 거다.”
“저, 정말이오?”
“그래. 팥알만 한 환약 한 알로 네 부인이 하루를 어찌 보냈는지 봤지 않느냐? 나는 요괴일지나 너희 인간처럼 거짓말은 않는다.”

차분하며 기운 없던 음성은 중성적이었다. 듣기에 따라 남자 또는 여자로도 느껴졌는데 하나 분명한 건 인간을 향한 업신여김이었다. 그 역력한 감정에 사람이라면 반발심이 드는 게 당연하건만 그림자를 통해 본 남자는 머리 위로 떨어지던 주머니를 받는데 정신이 팔렸다.

“아아! 안 돼!!”

그순간 아슬하게 손을 빗겨난 주머니가 바닥을 치며 좌르륵 구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절망적인 음성과 함께 바닥에 무릎 꿇은 남자가 허겁지겁 쏟아진 환약을 주워담을 때 그 앞의 그림자는 교태스레 웃음을 흘릴 뿐이다.

“구십칠, 구십팔……! 안에 든 환약이 전부 몇 개였소?! 하루 열알씩 먹이라지 않았소? 내게 준 게 며칠분인지만 좀 알려주시오!”
“오늘 치까지 해서 정확히 열흘분이었다. 한 알이라도 부족하면 도로아미타불인 셈이지.”
“안 돼!! 하나가 모자라!! 나 때문에! 아아, 제발! 제발 부탁이오! 한 알이 부족하오! 제발 자비를 베풀어 주시면……!”

다리를 잡고 늘어진 남자에 장지문 앞에 선 팔척요괴가 흔들렸다. 구렁이처럼 길게 꼬아진 목이 한바퀴 돌아 등 뒤를 내려다보니 요사스레 웃음을 흘린다.

“나는 분명히 건넸어, 인간. 그걸 바닥에 쏟은 건 네 잘못 아니냐. 그런데 뻔뻔하게 내게 또 달라고?”
“제발 부탁이오! 아무리 찾아도 하나가 부족해!”
“그보다는 자정이 지나기 전에 남은 아홉알을 먼저 부인에게 먹여야지 않겠나? 오늘 당장 네놈 부인이 썪어문드러지는 꼴을 보기 싫다면 말이야.”
“아ㅡ!!”

계속 여기서 소란을 피워봐야 사람들만 깰 뿐이다. 겁 많은 남자는 삼층은 전부 비워놨으나 이층까지는 대부분의 방이 차있었다. 때문에 팔척요괴는 남자를 떨구기로 했고 밖은 곧 조용해졌다. 계단을 뛰어가는 소리로 보아 남자는 팔척요괴의 말에서 시급한 일을 떠올렸음이라. 그러니 놈이 말 끝에 붙인 진실도 제대로 파악치 못했음은 분명하다. 결국 약을 온전히 다 먹여도 그 부인은 썪어문드러진 시체로 육신만 살아 사람을 잡아먹는 괴물이 된다는 것 또한. 애당초 나약한 인간의 몸으로 요독을 받아들이는 건 무리였다.

“자아, 그럼 드디어 네놈을 보는구나. 설표가 숨겨둔 만찬을!”

굳게 닫힌 장지문이 열렸다. 침상에서 일어나 앉은 조로가 슬며시 검을 빼드니 빠끔 열린 문너머로 쭉 찢어진 눈이 온통 피로 물들어 안을 들여다봤다. 습기 가득한 축축함이 온몸을 짓누르는 순간이었다.




산 밑으로 내려오기 전의 일이다. 팔척요괴가 멀어지기까지 집안에서 뜸을 들이던 중에 조로는 잠을 쫓으려 멋대로 제 얘기를 시작했다. 로우가 본체인 설표로 돌아간 까닭에 얘기는 온전히 그 몫이었지만 조로는 개의치 않았다. 적당히 낮고 담백한 목소리는 탱글탱글한 육구에 빠져있었으니까. 때문에 호롱불도 꺼진 어둠 속에서 설표가 내려다보던 인간의 옆얼굴은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설표는 품에 안긴 인간이 말하는 내내 머리를 코끝으로 부비거나 낮은 목울림을 내거나 둥글고 푹신한 귀를 움직대는 등의 반응으로 대꾸해줬다. 때문에 내내 지루한 줄도 몰랐던 조로가 말을 멈춘 건 머리가 한차례 앞으로 밀리면서다. 코끝으로 툭 쳤을 뿐인데 맥없이 휘청하는 인간의 머리통이란 설표에게 있어 알사탕과 같았다. 맞은 곳을 문지르며 돌아보던 잔디머리 인간은 날카롭던 눈매를 나름 동그랗게 떴을 따름이지만.

“뭐야?”

탁! 꼬리가 경쾌하게 바닥을 내리치는 소리에 조로의 눈이 아래로 구른다. 조로가 말하는 동안 이런 반응은 처음이었다. 그러나 털이 복실복실한 가슴에 등을 바투붙인 그는 로우의 불만스런 표현을 이해하지 못하고 다시 머리를 돌렸다. 습기마저 끈적끈적한 한여름 밤이지만 체온 조절이 가능한 요괴의 몸은 죽부인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더 털에 파묻히듯 파고든 녀석은 육구를 붙잡은 손이 다시 꾹꾹 눌러댈 따름이었다. 맹꽁이 같은 놈이 다른 얘기로 넘어가려는 뻔한 상황에 로우는 또 한번 동그란 뒤통수를 뭉툭한 코끝으로 밀었다.

“왜?”

탁! 탁! 이번에는 회색 바탕의 점박이 무늬를 가진 덩치 위로 솟은 꼬리가 불만스레 바닥을 두번 내리쳤다. 그에 눈살을 찌푸린 조로는 얼굴을 들이밀고 소리 없이 콧등을 일그러트린 설표를 보고서야 의중을 살피듯 운을 뗐다. 그러느라 설표의 품안에서 조로는 마주보듯 몸을 돌렸다.

“얘기 그만해?”

탁!

“아냐? 그럼 다른 얘기할까? …무슨 얘기를 해야…….”
“크르릉…….”
“잠깐 기다려! 네가 무슨 얘기하는지 맞출 테니까 기다려, 웁!”

녀석이 사람 모습으로 변신하려는 걸 눈치챈 조로가 다급해질 때다. 커다란 앞발이 얼굴을 짓누른다 싶더니 올록볼록한 감촉이 사라졌다. 조로는 사람 손바닥에 눈이 가리워진 채 미성이 들려주는 묵뚝뚝한 말씨를 듣게 됐다.

“좀전에 한 부적 얘기나 자세히 해봐라, 인간.”

그제야 조로는 스치듯 한 얘기를 떠올렸다. 요괴 퇴치 의뢰가 들어와 절에서 받은 지 얼마 안 된 부적을 버려야 했다는 한마디를. 그리고는 무슨 요괴를 잡았는지로 넘어가려는 차에 제동이 들어온 거였다. 하지만 설표에서 사람 모습으로 돌아올 때 나신인 걸 의식했던 로우는 조로의 눈을 가리면서도 놓친 점이 있었다. 두 사람의 몸이 바투 붙어있다는 것과 그 역시 조로의 기운에 반응하는 요괴라는 것 말이다. 때문에 조로는 인간 몸으로 변하며 얽힌 다리 사이로 로우의 음경이 반쯤 발기해있음을 알 수 있었다.

“너 섰어?”
“닥쳐라, 인간! 네가 신경쓸 게 아니니까!”

돌연 허벅지 사이에 낀 다리가 올라와 늘어진 낭심을 툭 건드리는 것에 로우의 얼굴이 빨개졌다. 급격히 커진 성량에 묻어나는 건 당황스러움이었다. 때문에 눈이 가리워진 채 몸이 밀린 조로는 제 위로 올라탄 묵직한 무게감에도 웃음을 잃지 않았다. 킬킬대던 웃음에는 악의 없는 장난기 뿐이었다.

“같은 남자 손이라도 괜찮다면 도와줄까? 목숨을 구해준 은인인데 나도 은혜는 갚아야지.”
“도발하지 마라, 인간! 너는 정말 네 처지를 모르는 거냐?!”

조로의 기운은 고양이 앞에 놓인 개다래나무나 마찬가지다. 때문에 가장 요괴를 조심해야 될 놈이 도리어 밑으로 내린 손을 더듬대는 것에 로우는 환장할 지경이었다. 그 역시 탐스럽게 익은 복숭아 같은 녀석을 따먹지 않으려 노력하는 와중인데. 로우는 제가 태생부터 남다른 요괴임을 다행으로 여겼다. 그 덕에 이 천둥벌거숭이 같은 녀석을 두고 이성을 챙겼으니까. 이런 속도 모르고 앞의 놈은 눈이 가리워진 채 실실대는 꼴이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조로에게 올라타듯 누운 로우는 제 양물을 쥐려던 손을 피해 허리를 힘주어 누르며 생각했다. 한심한 저 모습도 제법 귀엽다고.

“……!!”
“어이. 누르는 건 좋은데 힘 좀 풀, 웁!”

얇고 성긴 본견으로 짜인 바지 한벌을 사에 두고 음경이 맞닿았다. 이어 고간을 꾹 누르는 감각에 조로가 그를 부를 때였다. 인간이 귀엽다니! 제가 한 생각에 충격 받은 로우가 순식간에 본체로 돌아갔다. 하지만 두툼한 육구와 풍덩한 털이 조로의 얼굴과 온몸을 뒤덮음에도 짓눌리는 감각은 없음이다. 이어 얼굴을 덮은 육구가 사라지고 회색 점박이 무늬의 설표가 네 발로 조로를 가두듯 서서 내려다봄이니 어두운 방 안에는 둘의 숨소리만 가득했다. 솔직히 이때 힐끗 눈을 밑으로 굴린 조로는 아까보다 더 발기한 듯한 음경의 흉폭한 생김새를 보고 뜨끔했음이다. 저런 거에 꿰뚫리면 요단강 건너는 건 일도 아니겠다 싶었으니까.




다시 설표로 변한 로우의 채근에 조로는 얘기를 풀었다. 그는 절대 도깨비 방망이 같은 놈의 것 때문에 순순히 말하는 건 아니라 되뇌면서도 아래를 힐끔대다 경고의 소리를 듣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게 로우는 조로의 말을 들을수록 기가 찼기 때문이다.
요괴가 꼬이는 기운을 가진 조로가 평상시 이를 방지하는 방법이란 공덕 높은 스님의 부적이라 했다. 대개 주지 스님이 직접 시사했는데 그 대신 귀가 닳도록 잔소리를 듣는 게 조로는 귀찮다고 말했다. 여기서 로우는 당연히 주지승 편이었다지만 말이다. 요괴를 가장 멀리해야 될 사람이 도리어 놈들을 사냥하고 다닌다는데 그들 입장에서 얼마나 할 말이 많겠는가. 그런데도 조로는 가는 절마다 한결같던 잔소리에 부적 없이 다니는 날이 더 많았단다. 그럴때면 오만 잡것들이 날파리처럼 꼬이는지라 민가를 피해 야영하는 일이 다반사였고. 때문에 설표로 변한 로우는 얘기 내내 꼬리로 바닥을 쳐야 했었다. 고작 지난밤의 일이었다.

“크릉!”

집채만 한 설표 한 마리가 마을 입구에 멈춰서며 목을 울렸다. 본격적으로 더해진 빗줄기에 어둡고 고요한 마을은 을씨년스럽기만 했다. 굵어진 빗발에 금새 진창이 된 거리를 솜털처럼 가뿐한 몸놀림으로 누빈 설표가 도착한 자리는 마을의 유일한 여관 앞이었다. 마을 입구에서부터 은은하게 번지던 썪은 내는 이곳에 유독 진한 악취를 풍긴다. 비릿한 쇠냄새와 함께. 기민한 코끝으로 이를 느낀 로우가 높게 둘러쳐진 담장을 바라볼 때였다.

“괴, 괴물, 으악!”

쿠르릉! 담장 안, 우뚝 솟은 기와건물 너머에서 비명과 함께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마침 울린 천둥소리가 비명을 삼키니 이 안에서 벌어지는 일은 아무도 모를 터였다. 오로지 설표요괴의 기민한 청각과 후각만이 삼층 기와 건물 안의 참상을 눈치챌 뿐이니, 그곳에는 이미 요물 하나가 자리잡았음이다. 요괴의 농간에 놀아나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니게 된 희생자가. 결국 여관 주인은 때맞춰 환약을 먹이는데 실패했으니 이성을 잃은 부인의 첫 희생양이 된 셈이었다. 이를 알 리 없던 로우는 조로가 벌써 희생양이 됐을까 하는 마음에 담장을 뛰어넘어 본관 문을 들이받았고.

“…….”

장정 팔뚝만 한 두께의 나무문이 종잇장처럼 나가 떨어졌다. 또 한차례 울린 천둥소리와 함께 하늘은 구멍이라도 뚫린 양 억수같은 비를 쏟았다. 잇달아 번개가 내려칠 적마다 보인 건물 내부는 사방에서 피냄새가 진동했다. 망가진 가재도구는 물론이고 바닥에는 각기 다른 몸뚱이가 굴러다니니 이곳이야말로 아비규환 아니던가. 그럼에도 이 생지옥에 서슴없이 발을 들인 설표는 가뿐한 몸놀림으로 사방을 뛰었다녔다. 피비린내와 오물 썪은 내가 가득한 이곳에서 냄새만으로 조로를 찾기란 요원했다. 때문에 설표는 커다란 장원같던 곳을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그러던 중 오른 삼층 객실 중 하나에서 기척이 느껴지니 열린 문 앞에 다다른 설표는 심히 마음이 일렁이는 걸 느꼈다.

‘이 냄새는……!’

희미하게 맡아지는 체취가 낯익었다. 그순간 로우는 심장이 마구 뛰는 걸 느꼈다. 온통 붉게 물든 소복 차림의 요물은 어두운 방구석에서 무언가를 파먹기 바빴다.
쿵! 퍽! 뼈 부러지는 소리 또한 여느 물건과 같이 담백하기 그지없다. 그 속에 얼굴을 처박고 먹어치우는 소리가 들릴 때 문앞에 서있던 설표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마침 내리친 번갯불 사이로 번쩍인 설표의 얼굴은 도깨비가 따로없었다.
우르릉! 하늘에서 천둥이 울릴 때 날카로운 포효 소리가 쐐기처럼 쏘아졌다. 저음역대의 으르렁거림은 모든 방향으로 퍼지지만 고음역대의 포효는 한곳으로 집중돼 쏘아지는 형상이었다. 이는 보통 사람이라면 이것만으로 심장이 멈췄을만큼의 공포일 터다. 단지 인지 능력이 전무한 요물이어서 잠시 행동을 멈췄을 뿐.

“키엑!”

놈들의 습성은 움직이는 모든 것에 닥치는 대로 덤벼들고 먹어치우는 것이었으니 살떨리는 포효를 느끼고도 망설이지 않았다. 풀어헤친 머리와 남산만 한 배를 한 여인은 네 발로 엎드려 돌아서더니 눈 깜짝할 새 코앞까지 달려들었다. 그러나 장정의 사지를 맨손으로 찢어발기던 요물은 설표가 휘두른 앞발에 맥없이 엎어지고 만다. 나무 바닥이 갈라지며 얼굴이 파묻혔음에도 요물은 온몸을 요동쳤다. 뒤통수를 앞발로 내리누른 채 로우가 확인한 것은 요물이 먹어치우던 것의 정체였다. 부러진 갈비뼈가 삐죽삐죽 튀어나온 몸뚱어리는 내장을 파먹히는 중이었다. 상반신만 덩그러니 있던 몸을 무심히 보던 눈에 안도의 빛이 띤 건 턱이 반쯤 날아간 얼굴을 확인해서였고. 하필이면 비슷한 잔디머리를 해서 로우의 가슴을 철렁하게 만들었다. 피떡이 됐으나 전혀 다른 얼굴임을 확인한 로우는 그러나 방 한켠에 놓인 봇짐과 바닥에 널브러진 검집이 조로의 것임을 알아봤다.

“키에엑!”

이때 요물이 나무바닥을 부수고 탈출하려는 듯 팔과 무릎을 접었다. 괴성과 함께 활짝 펼친 손끝에서부터 나무바닥이 두부처럼 뭉개지는 것이 보인다. 하지만 이도 잠시로 설표가 조로의 봇짐에 눈을 둔 채 앞발을 힘주어 누르니 으깨지는 소리가 들려온다. 갈라진 나무바닥을 따라 거품 인 액체가 흐르던 순간에도 창밖의 빗소리는 그칠 줄을 몰랐다.
팔척요괴가 눈치챘구나. 오만방자한 놈의 술수에 놀아났음을 깨달은 설표는 방을 가로질러 문이 부서지고 없는 창문 너머로 뛰어내렸다. 삼층에서 낙하한 설표는 이층의 중간처마 역할을 하던 기와 잔해를 지나쳐 진흙탕에 안착했다. 그리고는 으르렁대며 한껏 목을 긁으니 그 소리가 장대비를 뚫고 산너머에까지 울려퍼졌다.




단언하건대 여관 주인의 불안한 모습에서 조로도 예상은 했지만 팔척요괴는 아니었다. 말이 옆마을이지 로우와 팔척요괴가 각자 둥지를 튼 산을 연결하는 능선의 봉만 천여개가 넘지 않던가. 이는 로우가 조로를 굳이 이 옆 마을에 데려다준 이유이기도 하다. 그리고 조로는 부상 중일지라도 팔척요괴만 아니라면 이길 자신이 있었다. 괜히 놈들을 불러들이는 기를 가지고 요괴사냥꾼을 하는 게 아니었으니. 비록 현실은 가장 피하고픈 녀석이 문틈새로 빨간 눈을 빛냈다지만 조로는 낙담하지 않았다. 그럴 시간에 차라리 칼을 한번 더 휘두를 사람이었다, 롤로노아 조로는.

“히히히히. 숨어봤자 소용없다, 인간. 괜히 성질 돋우지 말고 이리 나오거라. 내 너를 어여삐 여겨주마.”
“쳇.”

결국 다시 도망쳐온 곳이 산이다. 눈을 뜨기 힘든 장대비 속에서 풀숲에 몸을 낮춘 조로는 소름끼치는 목소리에 혀를 찼다. 그러다 산 전체를 관통하던 으르렁 소리에 조로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그동안에도 주변을 배회하며 낮고 힘없는 목소리를 내는 팔척요괴에 가장 기이한 것은 저 음성이 바로 옆에서 속삭이듯 선명하게 들린다는 점이다. 때문에 놀란 것만 몇번이던 조로는 이 역시 팔척놈의 농간임을 알아챘다. 그렇대도 놈의 목소리가 들릴 때면 간담이 서늘해지는 건 마찬가지였지만.

‘젠장, 다리가…….’

번개가 번쩍이고 천둥소리가 고막을 채우니 놈의 발소리도 들리질 않았다. 팔척과의 거리를 가늠키 어려웠던 조로는 움직여야 함을 알지만 다리가 말을 듣지 않는다. 무리한 발목에서 느껴지는 통증이 심상찮음에 조로는 때로 눈앞이 점멸하는 아찔함을 느꼈다. 그때였다.

“찾았다.”
“헉!”

검은 머리를 풀어헤치고 한쪽 눈에는 여전히 검이 박힌 얼굴이 뒤에서 나무를 돌아 나왔다. 뱀처럼 목만 길게 늘어난 형상에 조로는 생각할 것도 없이 검을 더 깊게 찔러올렸다. 깊숙이 들어간 검날이 두개골을 치고 나오는 소리가 섬뜩했다. 머리 위로 후두둑 떨어지던 핏물은 금새 비와 섞여 흘러내렸다. 하지만 그순간 조로는 아차 싶었다.

“거기로구나! 이히히히!”

팔척은 특히 인간을 농락하는 걸 즐기는 요괴였다. 그런 녀석의 특기는 환술을 이용한 정신 공격으로 이것에 당한 인간은 결국 미쳐버린다지 않았나. 이는 놈에게 당한 피해자 중 겨우 도망친 생존자의 증언이었다. 옆마을 여관에서 이삼십은 되는 무리를 만들어 함께 산을 넘어오던 중이었다고. 한데 아무리 산을 넘고 또 넘어도 같은 자리로 돌아오길 사흘째에 겁을 집어먹은 이들은 뿔뿔히 흩어졌다고 했다. 이들 중 살아 돌아온 건 단 두 명이었는데 산 속에서 집체만 산 설표를 보고 기절했다 깨어나니 마을 입구였다지 않았나. 조로는 이제사 원님인 루피에게 일을 의뢰받으며 들은 얘기를 떠올렸다.

“히히히히. 찾았다. 드디어 찾았다.”

장마철이기는 해도 유난히 쏟아붓는 빗줄기에 눈을 뜨는 것조차 힘들었다. 그럼에도 귓가에서 속살대는 목소리는 여전해서 조로는 잇새를 꽉 다물 뿐이었다.
두어시간 전, 여관에서 조로의 공격은 성공했었다. 문을 열고 달려들던 녀석의 한쪽 눈알에 칼을 박아넣은 뒤 창문으로 몸을 날렸으니까. 중간 처마에 걸쳐 푹신한 흙바닥에 떨어진 덕에 충격은 크지 않았지만 문제는 역시 발목이었다. 로우의 처치로 순조롭게 나아가던 발목은 산을 오르며 통증 또한 심해졌다. 절뚝이며 걷는 것도 더는 한계일만큼.

“읏…….”

놈의 환술에 반응한 덕에 위치를 들켰으니 살려면 움직여야 했다. 그러지 못한대도 절대 쉽게 붙잡혀줄 생각은 없던 조로가 나무에 몸을 의지해 일어섰을 때 위에서부터 목이 늘어지며 머리가 나타났다.

“찾았…!”

이번에도 조로는 한쪽 눈에 박혀 있던 검을 지체 없이 밀어넣었다. 또 한번 뒤통수를 비집고 튀어나온 검끝에 검은 머리카락이 성기었지만 그것은 꿈에서 깨어나듯 자취를 감췄다. 조로가 역시 이것도 환술이었나 생각할 때는 바로 옆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찾ㅡ!”

망설임은 없었다. 바로 몸을 돌려 눈알에 꽂힌 검을 잡으려던 순간 지지대를 잃은 조로의 몸이 뒤로 기울어졌다. 그러자 팔척은 한쪽 눈에 장검을 매달고 거미처럼 긴 팔을 이용해 조로의 허리를 휘어감았다.

“괴팍한 놈 같으니라고.”

푹! 조로는 아랑곳 않고 두 손으로 검을 잡아 밀어넣었다. 검끝이 두개골을 밀고 올라오는데도 이번에는 팔척이 사라지지 않았다. 이 또한 환상이려나 조로가 생각하던 순간에는 상체를 숙이고 내려다보던 놈이 팔에 힘을 주어 몸을 더 바짝 붙였다. 그럴수록 검 또한 더욱 깊숙이 박혀들어갔다.

“이제 만족하나? 히히히히.”
“…….”
“흐음… 설표 둥지에서 인간 냄새가 나기에 나는 그놈이 미친건가 했더니 이유가 있었네. 이토록 맛있는 냄새는 처음이야.”

뱀이구나. 유난히 길고 가는 혓바닥 끝이 두 갈래로 나뉘어진 걸 보면서 조로는 생각했다. 녀석은 손잡이만 남기고 깊숙이 들어간 검을 눈에 매단 채 머리를 내렸다. 그리고는 긴 혀를 내밀어 조로의 얼굴을 핥아올렸다. 녀석은 벌써 식탐에 눈이 먼 듯했다.

“네놈의 밑구멍까지 차분히 빨아먹고 싶지만 널 탐내는 녀석이 만만치 않아서 말이야. 흐음… 역시 머리부터 전부 삼켜야 하ㅡ!! 아, 좀!!!”
“왜? 내 거니까 찾아간다?”
“요괴가 말하고 있는데, 히익?!”
“히익? 너 방금 히익이라고 했냐?”

조로가 얌전했던 건 눈에 박힌 검을 되찾기 위해서였다. 때문에 팔척의 얘기는 전혀 듣고 있지 않았다. 오직 단번에 검을 빼들 순간만 노린 시도는 성공이었고 팔척은 한쪽 눈알에서 피를 철철 흘렸다. 생각지 못한 행동에 당황한 놈이 내려다볼 때의 인간은 전혀 겁먹은 기색이 없었고. 조로는 여전히 가늘고 긴 팔에 몸을 의지한 채 팔척을 올려다봤다.

“너희 요괴놈들은 하나밖에 생각 못하지? 응?”
“무, 무슨……!”

조로의 검이 향한 곳은 팔척의 가랑이였다. 다리 사이로 우뚝 솟은 성기는 두 개였다. 갈고리같은 돌기가 빽빽히 돋아난 그것은 비에 흠뻑 젖은 옷 위로 선명한 모습을 자랑했다. 그리고 조로는 스스로 요괴의 발기한 음경을 가장 많이 본 인간일 것이라 단언할 수 있었다. 딱히 자랑할 거리는 못 된다지만 그의 기운에 끌려온 요괴라면 하나같이 음경을 빳빳하게 세웠으니 말이다. 조로의 검은 그 발기한 놈의 것을 썰기 직전이었다.

“인간은 절대 네놈들 상대가 안 된다고 생각하잖아. 나같은 놈도 있는데 말이야.”
“그, 그만해! 네녀석 대체 뭘하려고ㅡ! 네녀석따위 한입에 삼켜버리겠다!!!”

처음으로 다급해진 목소리가 한껏 높아졌다. 이어 쑥 올라가며 길어진 목과 머리가 구렁이로 변했다. 그 밑으로는 사람의 것을 한 형태가 여전히 조로의 허리를 붕여잡은 채였으니 구렁이의 아가리가 벌처럼 쏘아지던 순간이었다.




서서히 비가 그치고 멀리 동이 터오는 중이었다. 흠뻑 젖은 설표는 비로 인해 냄새가 사라진 산 속을 얼마나 헤매었던가. 행여 조로가 팔척에게 잡혀갔을까 놈의 둥지까지 찾아갔던 설표는 이제 화도 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조그맣고 사랑스럽던 인간이 부디 무사하기만을 바랄 뿐이다. 동시에 왜 녀석을 곁에서 떼어놓았을까 후회가 사무치니, 인간인 게 뭐 대수라고 거리를 두려던 제 행동을 후회하고 마는 것이다. 그냥 곁에 두고 제가 지키는 게 속 편했을 텐데. 밤새 산속을 이잡듯이 뒤지며 있는 대로 속이 끓던 로우는 스스로를 향한 모진 질책을 일삼았었다. 힘에 미쳐 정신나간 팔척놈이 벌써 조로를 뼈째 씹어먹기라도 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아니, 그자야말로 요력에 미친놈이니 절대 조로를 죽이지 않을 것이라 생각을 고쳐먹지만 이건 이것대로 또 로우의 정신을 돌게 했다. 요괴에게 조로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 아니던가. 이를 가장 잘 알고 있을 팔척놈이라면 이 밤사이 얼마든지 조로를 유린했을 확률이 높았다. 둥지에도 없는 걸 확인한 마당에 이 넓은 산속 어딘가에서 조로가 하염없이 놈에게 당하고 있을 걸 생각하자니 조로는 두 눈에 홧홧하게 핏발이 섰다. 그놈은 절대 곱게 죽이지 않으리라. 로우는 수십년을 살면서 이토록 분노하기도 처음이었다. 그렇게 온 산을 헤매다 돌아온 곳은 옆마을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산아래였다.

“조로…… 조로야!!!”
“어어? 너 왜 이리 늦, 우악 잠깐! 야! 너……!!!”

조로는 해를 등지고 서있었다. 몸은 온통 흙투성이로 바닥에 꽂아넣은 검에 의지해 앉아있었는데 특유의 잔디머리를 알아본 로우가 한달음에 뛰어왔다. 그리고는 사람으로 변해 소리치니 그제야 기척을 눈치챈 조로가 대번 질색하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게 본체에서 인간으로 변할 때는 옷이 없었고 또 조로 앞에서의 요괴라면 자연적으로 발기했으니까. 때문에 아무리 로우라도 질색해 물러나던 조로는 그러나 로우에게 사뿐히 들려 안기고 말았다. 저를 안아들고 진심으로 기쁜 얼굴을 한 로우의 얼굴에 난색을 비치던 조로 역시 결국 피식 웃고 말았다. 그 옆에는 열척은 훌쩍 넘는 구렁이 한마리가 간신히 숨만 붙어 있었고 말이다. 난자당한 놈은 로우를 알아보고도 하나 남은 눈을 겨우 굴려댈 뿐이었다. 로우는 그런 놈따위 안중에도 없다는 양 조로를 살피기 바빴다. 조로는 땅에 두 발이 닿자마자 비틀대는 걸 붙잡아주던 로우에게 금새 환한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지만.

“로우 너도 요력 모으지?”
“그보다 조로 너 발목부터 보자.”

로우는 제가 조로의 이름을 부르는 것도 몰랐다. 녀석의 발목이 먼저였으니까. 한쪽 무릎을 꿇고앉은 로우가 다친 발에 손을 뻗을 때 조로는 제 이름을 부른 녀석을 보며 슬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그리고는 다친 발을 뒤로 빼서 로우가 저를 올려다보게 만들었다. 이젠 뿌듯한 미소를 머금은 조로가 바닥에서 눈만 깜빡이는 구렁이를 손가락질했다.

“저자식 엄청 크고 세더라. 그러니까 요력도 많을 거야. 그치?”
“그렇지. 그게 왜?”

이쯤에서 먼저 눈치챈 구렁이가 꿈틀대며 쉭쉭 소리를 낼 때도 조로는 여전히 해맑은 얼굴이었다. 그 얼굴을 멍하니 보던 로우가 한발 늦게 상황을 파악했다.

“너 먹어. 그러라고 살려둔 거야.”

그순간 사람 모습으로 변한 팔척은 뚫린 배를 통해 내장이 쏟아져나오지 않도록 한손에 부여잡아야 했다. 이만한 중상을 입었으니 당연히 움직일 수 없었을 터. 그럼에도 꿈틀대는 몸부림은 갈비뼈가 다 드러나도록 비쩍 마른 몸을 더욱 안타깝게 했다. 몸을 일으킨 로우가 그런 놈과 조로를 번갈아보며 세상 심란한 표정을 지었다.




“오… 그럼 그 팔척요괴랑 트랑이랑…….”
“안 했어!! 그보다 누구더러 트랑이라는 거냐? 트라팔가다 트라팔가!”

의뢰를 완수했다며 원님 앞에 나타난 친구 곁에는 처음 보는 남자가 있었다. 누군지를 묻던 루피에 조로는 그간의 일을 설명하는데 막힘없었다. 그 옆에는 오라줄에 묶여 끌려온 팔척요괴가 있었고 이방과 호방직을 겸임했던 나미는 수고비가 두둑히 든 돈보따리를 마지못해 내줘야 했다. 그러던 중 이야기가 팔척놈의 요력을 빼앗는 대목에 당도했을 때 루피의 시선이 로우에게 향한 것이다. 저를 언제 봤다고 대번 이름을 막 불러대던 원님은 스물도 안 된 새파란 애송이었다. 그런 주제에 일년 전 요괴와 인간 사이에 벌어진 전쟁에서 큰 공을 세웠다는 말은 로우도 들어봄직하다. 인간이고 요괴고 속세와 어울리는 걸 싫어했던 로우는 산속에 둥지를 튼 이래 계속 박혀 살았다지만. 그런 로우가 둥지를 버리고 속세로 나온 것은 전부 옆의 패랭이를 쓴 잔디머리 때문이었다. 이녀석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에. 이는 로우에게 있어 첫정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대청마루에 앉아 술상을 앞에 두고 앉은 조로는 원님과 킬킬대기 바빴다. 속이 비치는 검은 도포에 갓을 쓴 로우는 대갓집 도련님이 따로없어뵈는데 잘생긴 얼굴이 무색하게 빨개진 얼굴이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진정하라는 양 허벅지를 자근자근 주무르는 손길에는 또 금새 다소곳한 표정을 했다. 술상 아래로 살며시 손을 붙잡아오는 녀석에 조로는 피식 웃기만 했다.

“몰랐는데 본인이 요력을 스스로 토해낼 수도 있나봐. 저놈도 어지간히 뒤가 쑤셔지는 건 싫었는지 로우가 몇마디 하니까 알아서 구슬을 토해내더라.”
“우와! 진짜??”

조로의 말에 루피가 눈을 반짝였다. 이어 자기도 보고 싶다며 떼를 쓰니 마루 밑에 포박돼 있던 팔척요괴는 세상 다 산 얼굴로 눈물을 흘렸다. 뒤를 쑤셔져서 빼앗기나 직접 토해내나 한번 요력을 내어주면 다시는 그것을 담을 수 없었다. 그저 인간보다 신체가 좀더 강한 생물이 될 뿐이었으니 삼백년 넘게 온갖 악행을 일삼으며 모은 요력을 잃은 놈은 이 모든 게 통탄스러울 뿐이었다. 그는 조로가 이토록 강한 줄 몰랐다. 로우가 애지중지한데다 여관에서도 도망부터 치기에 별볼일 없는 줄 알았던 거다. 조로가 민간인이 다칠까 자리를 피한 것은 생각도 못하고. 그러나 순간의 잘못된 선택에 삼백년 공들인 탑이 와르르 무너진 지금 후회해본들 무슨 소용이랴. 그렇게 팔척요괴는 모든 걸 체념했다.

“그래서 앞으로 두 사람 같이 다녀?”
“응, 그럴까 해. 로우 용 만들어 줘야지.”
“용?”
“응, 얘 꿈이래.”

루피의 물음에 조로가 술잔을 기울이며 말했다. 긴 장마 끝에 모처럼 찾아온 하늘이 푸르렀다. 살랑이며 불어온 바람결 사이로 붙잡은 손을 지긋이 움켜쥠에 조로를 향한 로우의 얼굴에는 감동의 빛이 한가득이다.

“조로야…….”
“크흡!”

지극히 감동한 로우가 조로를 부를 때 마루 밑에서는 팔척요괴가 통한의 눈물을 삼켰다. 용이 되고자 한 건 팔척요괴도 꿈이었다. 이무기가 되면 용이 될 수 있는 방법 또한 있었으니 그를 위한 삼백년이 아니었던가. 수없이 많은 요괴를 잡아먹고 온갖 악행을 일삼아 지금에 이르렀는데 백년도 안 된 설표에게 고이 모은 요력을 빼앗겼다. 뿐인가, 그 옆에는 요력이 화수분처럼 피어나게 해주는 녀석이 있었으니 로우가 꿈을 이루는 건 시간문제였다. 물론 그만큼 요기로 가득찬 인간을 노리는 요괴로 인해 더욱 험준한 앞날이 기다릴테지만 로우는 상관없었다. 녀석만 옆에 있어준다면. 설령 조로가 평범한 인간에 지나지 않았을지라도 로우는 필시 그에게 빠졌으리라. 로우는 이것을 단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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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조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