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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30 21:04
"그 많은 햄은 어디에 쓸 거야?"

기병대장의 물음에 한 페보니우스 기사가 답했다.

"아...이건 응급 보급 포인트에 가져다 놓을 겁니다. 설산에서 길 잃은 모험가들이 체력을 보충할 수 있도록 말이죠. 안전상의 이유로 초보 모험가는 설산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통제하고 있지만, 그게 어디 마음대로 되나요."
"응급 보급 포인트에 정기적으로 식량을 보충해서 그나마 생존 확률을 올려준다라...통제하기 힘든 모험가 상대로는 나름 최선의 방법이로군. 그거 이리 줘, 내가 가져다 놓을게."
"네? 케이아 대장님이 직접요?"
"이래 봬도 난 얼음 신의 눈을 가지고 있어서 추위에는 강하다고. 본부에 일이 있어서 드래곤 스파인에 자주 올 수는 없지만, 오늘은 기왕 온 김에 돕는 걸로 하지."

페보니우스 기사는 감사의 인사와 함께 네 개의 햄과 응급 보급 포인트의 위치가 표시된 지도를 건넸다. 지도 속 포인트는 세 군데였기에 케이아가 의문을 품자 그 표정을 알아챈 듯 기사가 설명을 덧붙였다.

"원래는 각 포인트마다 한 개씩 햄을 배치하는데 오늘은 실수로 네 덩이가 배달됐거든요. 저 혼자 이걸 먹을 수도 없으니, 보급 포인트 중 마음에 드는 곳에 두 덩이를 배치하시면 됩니다."
"마음에 드는 곳 말이지...알았어."
"뭐, 배가 고프시면 대장님이 드셔도 상관없지만 말이에요, 하하."

케이아는 지도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세 개의 보급 포인트를 확인했다. 깊게 고민할 필요 없이 기지에서 가장 먼 보급 포인트에 더 많은 양의 햄을 배치하는 것이 효율적일 것이다. 
첫 번째 포인트에 도착한 케이아는 어렵지 않게 보급 상자를 찾아 햄을 넣었다. 짭짤하고 감칠맛이 돌아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즐기는 이 염장 식품은 설산의 낮은 온도에서 오랫동안 품질을 유지할 것이다. 두 번째 포인트에는 우인단 텐트가 있었지만, 텐트를 친 사람들은 자리를 비운 상태였기에 케이아는 별다른 충돌 없이 보급 상자에 햄을 넣었다. 두 번째 포인트를 지나 세 번째에 도착할 무렵, 한층 거세진 눈발이 케이아의 시야를 방해했다. 보기보다 따뜻한 털망토도 눈바람에는 제대로 기능하지 못했기에 케이아는 어깨를 잔뜩 움츠린 채 보급 상자를 찾아헤맸다. 

'얼음 신의 눈을 가져서 추위에 강하다는 건 괜한 허세였을지도...'

안대를 한 탓에 남들보다 좁은 시야로 열심히 두리번거리다, 케이아는 끝내 한 바위 근처에서 반쯤 파묻힌 상자 모서리를 발견했다. 눈밭에 부츠가 푹푹 빠지도록 뛰어간 케이아는 빠르게 일을 마치려 했으나 상자의 상태를 마주하곤 이마를 짚었다. 멀리서 봤을 때는 그저 눈에 파묻혀 있는 줄 알았는데, 상자를 뒤덮은 눈은 이미 결정끼리 꽁꽁 뭉쳐 단단하게 얼어 있었다.

"제기랄..."

아무도 들을 리 없는 설산 한 구석에서 작게 욕을 했지만 어차피 상황을 해결할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손수 얼음을 깨는 것이다. 보급 상자 앞에 주저앉은 케이아는 한손검을 쥔 채, 손잡이로 얼음을 내려찍기 시작했다. 

퍽- 퍽-

페보니우스 검의 손잡이 끝에 장식으로 달린 매의 정수리가 사정없이 얼음에 부딪히는 모습을 보자 조금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다. 일이 끝나고 몬드성으로 돌아가면 광택제를 발라 잘 닦아주는 수밖에.

퍽,퍽- 퍽-

이윽고 얼음 한 부분이 떨어져 나갔지만 여전히 반 이상 파묻혀있는 보급 상자를 구출하기에는 부족했다. 추위 속에서 무겁고 단단한 검을 쥐고 반복적으로 충격을 가하는 작업은 힘들었기에 케이아는 빨개진 손을 두어번 털고는 손바닥에 입김을 후후 불었다. 그러고는 다시 검을 높게 치켜드는데-

"대체 뭘 하는 거야?"

낯익은 목소리와 함께 장갑을 낀 손이 불쑥 튀어나와 손목을 잡았다. 쪼그려 앉아 있던 케이아는 고개를 들어 목소리의 주인을 올려다보았다. 고풍스러운 갈색 코트와 불의 신의 눈, 맑은 날의 설산처럼 고운 빛이 도는 얼굴, 그리고 신의 눈과 같은 색으로 타오르는 머리카락. 그의 모습은 이곳의 환경과 꽤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넋이 나가있던 케이아는 그의 물음에 답할 차례라는 것을 상기하고 한 손으로 두 덩이의 햄을 들어올렸다.

"보다시피."
"햄?"
"응급 보급을 위한 이 상자에 햄을 넣어야 하거든. 꽁꽁 얼어서 안 열리지만."
"비켜 봐."

케이아를 자신의 뒤로 당겨 치운 다이루크는 얼음 덩이를 향해 대검을 휘두르더니 순식간에 물로 바꾸었다. 그의 신의 눈이 불 속성이라는 점에서 더이상의 설명은 필요 없을 것이다.

"휴...상자도 같이 박살내버리는줄 알았네."
"내가 그 정도도 조준 못할 줄 알았나?"
"으음? 다트로 멀쩡한 꽃병을 깬 건 누구였더라?"
"그 땐 네가 신경을 건드렸..."

꼬르륵

햄으로 상자를 채워 넣던 케이아가 뜬금없이 들려온 소리에 눈을 크게 떴다. 시선을 마주친 다이루크의 동공은 은근슬쩍 다른 곳을 향했다. 그러고보니 다이루크가 설산에 들어온 지 몇 시간이나 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햄 먹을래?"

케이아는 두 덩이 중 하나를 들어올리며 싱긋 웃었다.

"...아니, 응급 보급품이라며."
"다이루크 어르신의 배가 고픈 건 엄청난 응급 상황이잖아!"

사실은 햄 하나가 남는다고 설명해도 되지만, 케이아는 일부러 호들갑을 떨었다. 말투에 놀리는 의도가 다분히 묻어났기에 다이루크는 더 캐묻지 않고 코웃음을 쳤다.
눈발이 그쳐서 둘은 모닥불이 있는 곳에 털썩 앉았다. 케이아는 유용한 한손검으로 햄을 얇게 썰기 시작했고, 양손검 사용자인 다이루크는 군소리 없이 그것을 받아먹었다. 

"이렇게 먹으니까 냉채 수육 같지 않아? 우리 둘 다 좋아하는 흔치 않은 메뉴였지."
"네 입맛이 까다로운 탓이겠지." 
"누군가가 너무 어린애 입맛만 추구한 건 아니고?"
"어릴 때 어린애 입맛인 게 뭐가 나빠?"
"흐응, 그래서 지금은 어른 입맛이시다?"

다이루크는 눈을 가늘게 뜨고 구름 사이로 내려오는 한 줄기의 햇볕을 바라보았다. 하늘이 개고 시야가 탁 트이자 설산으로부터 한참 아래 지대의 너른 포도밭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곳의 다홍빛 점을 향해 케이아가 손가락을 뻗었다.

"여기서 보이네, 우리 집."
"그러게."

녀석이 무심코 '우리 집'이라고 칭했던 것을 한 박자 늦게 인지했지만 혹시라도 고쳐 말할까 봐 다이루크는 모른 척 햄을 씹었다.





"리제 씨, 조금 전 케이아 대장이 혼자 어디로 간 거죠?"

우연히 푸른 머리칼이 설산으로 향하는 것을 본 다이루크는 한 페보니우스 기사에게 말을 걸었다. 그는 케아아가 응급 보급 포인트에 식량을 공급하러 갔다고 대답했다. 

'그 녀석, 추위 많이 탈 텐데...' 

어릴 적 케이아는 여름을 좋아하는 만큼 겨울의 추위에는 약했다. 지금은 신의 눈도 생기고 어른이 되어 신체 조건도 달라졌지만 다이루크의 머리는 옛날 생각으로 가득 차 다른 생각이 떠오를 틈이 없었다. 결과적으로는 잘 된 일이었다. 설산을 사방팔방 뒤지며 찾아낸 케이아는 바닥에 쪼그려 앉아 얼음을 내리치는 뻘짓을 하고 있었으니. 적절한 때에 불 원소의 힘으로 도움을 줄 수 있었던 것은 다행이지만 간과한 점이 있다면 자신도 케이아를 찾아다니느라 체력 소모가 엄청났다는 것이다. 배에서는 배고픔을 알리는 신호가 참을 수 없이 울렸고, 소리를 들은 케이아는 장난스런 미소를 보이며 햄을 들어올렸다. 먹음직스러운 색깔로 염장된 살코기를 보자 침이 꿀꺽 넘어가지 않을 수 없었던 다이루크는 결국 모닥불 옆에 앉아 케이아가 잘라 주는 햄을 한동안 얌전히 받아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