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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28 00:33
오타ㅈㅇ
개연성은 둘의 와꾸로...
평소에 그냥 지나치기만 했던 카페인데. 그 날은 연일 이어진 회의와 마감, 연장 근무 때문에 체력이 한계까지 다다른 날의 오후였다. 가로수의 나뭇잎들이 머리 위보단 발치에 더 많이 쌓여가는 계절이었다. 컴퓨터 앞에 앉아 있다 눈이 빠질듯한 느낌에 자리에서 일어나 회사 밖으로 나왔다.
이미 아침에 출근하면서 한 번 들이킨 카페인의 약효는 점심 시간이 지나자 증발해버렸다. 재충전의 간격이 점차 짧아지는게 걱정도 되었지만 일이 문제였다. 지금 서두르지 않으면 최악의 상황에선 크리스마스 휴가까지 반납해야 할지도 몰랐다. 원래 가던 카페를 가려면 큰 도로를 두 번 건너야 했기 때문에 망설여졌다. 날이 쌀쌀해져서 그런가 길 위를 지나는 연인들의 물리적인 간격이 지난 계절보다 훨씬 가까워진 것 같았다. 몇 해 전엔 나도 저랬지. 괜히 코 끝이 시려 한 번 훌쩍였다.
서른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니 모든 일에 점점 무뎌지긴 했다만, 연애 감정만큼은 그러지 않길 바랐다. 좋은 사람은 찾기 힘들다, 라고 했다만. 그 좋은 사람은 예고 없이 눈 앞에 뚝 떨어지기 마련이기 때문에 늘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하는데. 그 날의 난 그러질 못했다.
뜨끈뜨끈하게 달아오를 눈두덩이를 꾹꾹 누르며 더 걷기가 힘들어져 가장 가까이에 있는 카페로 들어갔다. 생각보다 출입문이 무거워 팔에 단단히 힘을 주고 밀어야 했다. 사무실 의자에만 앉아서 하는 운동이라곤 손가락으로 마우스커서만 까딱이는거라.
끙 소리를 내야 할 정도로 무겁게 움직이던 문이 가볍게 휙 하고 앞으로 밀려나며 열렸다. 순간 중심을 잃어 비틀거렸고 뒤에서 문을 밀고 따라들어온 키가 큰 남자는 어, 죄송합니다, 라고 말한 뒤 나를 앞질러 카페 안 쪽으로 들어갔다. 카페 안의 테이블엔 오후의 커피를 즐기는 몇 몇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녹색 앞치마를 두르고 수염을 잘 다듬은 남자가 카운터를 보고 있었다. 난 눈을 가늘게 뜨고 천천히 카운터 윗편에 초크로 휘갈겨 쓴 메뉴를 훑었다.
카운터 뒤 부엌 또는 창고로 이어지는 듯한 문으로 아까 본인을 앞질러 갔던 남자가 앞치마를 두르며 나오고 있었다. 구불거리는 머리카락에, 큰 키에, 곧게 벌어진 어깨. 입고 있는 검정색 평범한 후드티가 평범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잘 어울리는 피지컬이었다. 수염이 난 남자에게 말을 걸며 웃는데 입매가 매우 시원했다. 피곤에 절은 상태인데도 저런게 눈에 들어오다니, 뭐지, 나. 이정도로 간절한거야?괜히 민망해졌다. 그도 그럴게 타인과 육체적인 접촉도 마지막 연애가 끝나면서 함께 끝나버렸으니까.
오늘 일찍 왔네. 오후 연습 일찍 끝나서요. 그럼 난 물품 정리 할테니까 카운터 좀 봐라. 두 사람의 대화를 티내지 않고 엿듣다가 예!하는 그의 씩씩한 목소리에 난 반쯤 나가려던 정신을 긁어모아 카운터 앞에 섰다.
"뭘로 드릴까요?"
"따뜻한 아이스 라떼요"
"...예?"
"네??"
지금 생각해 보면 정신은 빠져나간지 오래였고, 내가 긁어 모았던 건 머릿속에 습관처럼 주문하던 단어들이었던 것 같다. 그것들이 잘못 조합되어 나왔던게 문제지만 난 전혀 눈치채지 못했었다. 그도 다시 나에게 물어 보지 못했던 건 내가 너무 자연스럽고도 당당하게 주문했기 때문이리라. 내 뒤에 선 참을성 없는 또 다른 손님이 큼큼 거리며 눈치를 줘서 그는 알겠다고 하며 내 주문을 처리했다.
"왜 두잔이죠?"
픽업 카운터엔 따뜻한 라떼 한 잔과 아이스 라떼 한 잔 총 두 잔이 나와있었다. 나는 이게 뭔가 싶어 그를 쳐다봤고, 그는 이 상황이 웃기다는 듯, (하지만 결코 비웃는 건 아니었다) 피식 웃었다.
손님이 따뜻한 아이스 라떼를 시키셨어요. 평소 같으면 그럴리 없다고 조금 따졌겠지만 내 컨디션으로 미루어보아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것 같았다.그리고 나의 전의를 상실하게 미소 앞에서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미안해요, 한잔 값 더 계산할게요."
허둥지둥 지갑을 다시 찾아 계산하려는 나에게 남자는 됐다고 했다.
"됐어요. 원래는 뭐였어요?"
"... 따뜻한거요."
그는 내 쪽으로 따뜻한 라떼가 담긴 컵을 밀었고, 아이스는 자기가 마시겠다며 냉큼 가져갔다. 저기 그래도.. 지갑을 연 나는 지폐를 꺼내 건네려했지만 그가 손사레 치며 '차이라떼 시키신 분!' 하고 다음 주문을 외쳤다. 나는 엉거주춤 서 있다가 작게 감사하다는 고개짓을 하고 돌아나왔다. 마지막으로 출입문을 열기 전에 한 번 더 뒤돌아 보니 그는 벌써 잊었다는 듯 카운터 보기에 바빴다.
그 카페에 가면 주문을 제대로 하려고 속으로 몇 번이나 연습을 했지만. 그가 주문을 받을 때도 아닐 때도 있었다. 주문 외에 별 다른 얘기가 오간 것도 아니었다. 바로 사무실에 들어가기 싫은 날엔 도로변이 내다보이는 창문을 따라 놓인 스툴에 앉아 몇 모금 홀짝이기도 했다. 바깥을 내다 보기도 했지만 의자를 빙글 돌려 카운터 쪽을, 아니 그를 더 많이 바라본 것 같다.
양 팔을 벌려 카운터를 짚고 서 있는 모습이나 큰 몸을 움직여 커피를 내리고 얼굴을 아는 손님이 오면 크게 웃으며 이런저런 얘기를 주고 받는게 보였다. 그러다 눈이 마주칠 것 같으면 몸을 돌려 아닌척 하며 밖을 다시 내다보았다. 몰래 훔쳐보는듯한 행동에 누군가 오해하진 않을까 뜨끔하면서도 그의 호탕한 웃음 소리를 듣고 있으면 오전 업무에 쌓였던 피로가 가시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그 카페에 거의 매일 오후 출근 도장을 찍다시피 하게 됐다. 그가 없던 적도 있지만, 지루한 일상에 작은 기대가 생기면 하루를 버틸 힘이 생기는거니까.
그 날은 유독 출근하기가 싫었다. 이마를 짚으니 약간 뜨끈했다. 하루 병가를 낼까 했지만 얼마 안 남은 마감일이랑 연말 행사 진행 때문에 내가 빠지면 고생할 팀원들이 눈에 훤했다. 그래도 제 시간엔 도착하지 못할 것 같아 늦는다고만 연락을 해놨다.
이불을 걷고 일어나 창문을 여니 어제보다 훨씬 더 차가워진 공기가 코로 들어와 폐부를 씻었다. 한기에 부르르 몸이 떨렸다. 평소라면 머리 손질도 하고 옷차림에 신경 썼겠지만 오늘은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옷장 안에 개어진 도톰한 스웨터를 꺼내 입고 정전기로 뻗은 머리를 손으로 대충 넘긴 뒤 안경을 썼다. 동료들은 우스갯소리로 오스틴이 안경 쓴 날은 저기압이란거야, 라고 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집을 나서기 전에 거울을 보니 나이에 맞지 않게 너무 학생같이 입었나 싶었지만 몸이 안 좋으니 그런게 뭐 대수냐는 생각이 먼저였다. 평소 같으면 차를 탔겠지만 오늘은 운전하는 수고로움은 덜고 싶어 대중 교통을 탔다. 한창 붐비는 출근 시간은 지난터라 앉아서 갈 수 있었다. 버스가 익숙한 대로변에 가까워지며 눈에 익은 카페가 보였다. 아침부터 강한 음료가 필요한 날인데. 늦은김에 팀원들것도 사다줄까.. 원래 모닝 커피는 늘 회사 옆 카페로 가는데.. 손가락이 하차 버튼을 눌렀다.
기대한 건 아니었지만. 오전에 그의 얼굴을 볼 수 있을거란 생각은 해본적 없어서 내심 반갑기도 했다. 오늘은 머리에 사람들이 조깅할때나 쓰는 헤어밴드를 하고 긴 소매의 축구유니폼 위에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다. 어쩐지 남다른 피지컬이라더니 운동을 하나보네. 부러우면서도 유니폼 아래 탄탄한 몸을 상상하자 볼이 화끈거리는 것 같았다.
그는 카운터에서 여학생들과 깔깔 웃으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다 뒤에 멀찍이 떨어져 기다리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기댔던 몸을 뒤로 물렸다. 두 여학생도 나를 한 번 돌아보곤 그럼 학교에서 보자, 라며 자리를 뜨자 카페 안에 남은건 그와 나 둘 뿐이었다. 대학생인가 보네. 축구 동아리일까? 내가 다가가자 그는 몸을 숙이며 웃었다.
"어, 안경 썼네요 오늘은."
내 변화를 알아챈 그에게 놀라 설레면서도 한편으론 그렇게 자주 들락거렸으니 모르는게 더 이상하지, 하는 생각이 동시에 들었다. 그래도 먼저 건네준 스몰톡에 답해야겠지해서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아침에 나오셨네요 오늘은."
"예?"
괜히 말했나. 마치 너의 근무 시간을 안다는 투의 말이었잖아. 주문이나 할걸.
"아~ 오늘은 오후에 연습이라서요."
입꼬리를 양쪽으로 당겨 웃으며 대답하는 그의 모습에 고개를 끄덕이고 없는 용기를 쥐어짜서 운동하세요? 라고 또 묻고 말았다. 물음에 뒤로 돌아 유니폼 번호를 보여주며 자랑스럽게 네!하고 대답하는 그였다.
원래는 계속 아침 연습이었는데. 코치님이 시간을 바꿔버렸다나. 축구를 대단히 좋아하는지 그의 이야기는 멈출 줄 몰랐다. 내심 속으로 카페에 다른 손님이 들어오지 말았으면 했다. 그의 가까이에 서서 이야기하는 걸 더 듣고 싶었다. 목소리까지 좋을 줄이야.
몸 안에서 나는 열기와 카페 안에 돌아가는 히터와 재잘거리는 그의 목소리 때문에 반쯤 멍해진 나는 그만
"그래서 몸이 좋은가봐요."
아. 그가 하던 말을 뚝 끊고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방금 한 말을 다시 복기하는데까지 10초 정도 걸린것 같다. 그 10초의 정적이 10분, 10시간이 된 느낌이었다. 나는 횡설수설하며 입밖으로 미끄러진 실수들을 담으려 사과했다. 성희롱이라고 생각하면 어떡하지, 아 절대 그런게 아닌데.
"미안해요, 정말, 전 이상한 의도로-"
횡설수설하며 몸을 더듬어 지갑을 찾으며 연신 미안하다 하는 내 모습이 웃겼는지 그는 큰 소리로 웃음을 떠뜨렸다. 얼굴이 홍당무가 됐을게 뻔하다. 고개를 들지 못하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주문, 주문할게요. 라고 더듬어 말했다.
"차가운 핫으로? 아니면 따뜻한 아이스로 하나요?"
처음에 내가 했던 주문 실수를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었다니. 그가 건네는 농담에 조금은 안심이 되어 나도 작게 따라 미소 지었다. 정말 미안해요, 라는 말에 됐다며 큰 손을 휘휘 내저었다.
"따뜻하고 따뜻한 걸로 할게요. 그리고.. 샷 추가도 부탁해요."
"오늘 많이 피곤하신가봐요?"
피.곤.이라는 말을 강조하며 웃는게 아까 했던 말실수를 이해한다는 뜻 같았다. 기다리고 있을 팀원들을 위한 음료도 주문하며 아침에 일어났는데 몸이 좋지 않아 일에 늦었거든요, 라고 덧붙였다. 포스기를 두드린 그는 요즘 감기 걸리기 딱 좋은 날씨죠. 조금만 기다리세요, 라며 몸을 돌려 음료를 제조하러 갔다.
주문한 음료가 나올때까지 그의 뒷모습을 쫓는데 유니폼 위에 써진 이름이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T U R N E R 터너터너터너터너터너.. 이름은 뭘까..
그에게 어울리는 이름을 하나둘 떠올리며 공상에 잠길무렵 준비된 음료가 나왔다. 6구짜리 캐리어에 꽂힌 6잔의 음료 중 하나 위엔 X라고 표시되어 있었다. X가 샷추가 된 내꺼겠지. 한 모금 마시고 정신차려야겠다 싶어 X 표시 된 음료를 꺼내드는데, 그가 있잖아요 하고 운을 뗀다.
"그거 핫초코에요. 몸이 안 좋은데 카페인 보단 낫지 않을까요?제 친구들도 그거 많이 사 먹거든요, 아플때."
예상치 못한 배려에 할 말은 없어진 내가 멍하니 서 있자 아. 설탕도 어차피 몸에 안 좋나?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그였다. 바꿔드릴까요? 라는 말이 필사적으로 고개를 도리질 한 나는 음료를 챙겨들어 카페 밖으로 나왔다. 뒤에서 단 거 먹으면 기분은 좋잖아요! 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컵에서 스며나온 온기가 손바닥 안으로 스스로 퍼지고 뚜껑의 작은 구멍으로 솔솔 달달한 냄새가 피어나왔다. 한모금 홀짝. 역시 달았다. 나이가 들면서 단 것도 자연스레 멀리하게 된 건 언제부터 였을까. 입 안에 퍼지는 달달한 맛에 그가 한 말 중 하나는 맞았단 생각이 들었다. 단 걸 먹으면 기분이 좋아진다는 말.
컵을 기울이자 뚜껑에 표시 된 X도 왠지 kiss 를 보내며 라는 뜻같이 읽혀 혼자 설렜다. 이거 완전 어린애가 된 기분이군.
핫초코 사건 이후 카페에 가면 그는 날 반가워하며 인사를 건넸다. 속으로 그가 나의 말실수를 다시 끄집어내진 않을까 조마조마 했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크리스마스가 가까워진 어느 날, 그는 내가 앉은 자리까지 직접 음료를 가져다주곤 그 옆에 앉기까지 했다. 원래 직접 서빙은 안 하는 걸로 아는데.. 비교적 한가해서 그런가 싶었다. 옆에 앉은 그는 내가 하는 일이 뭔지 궁금하다며 물었다. 왜 그렇게 커피를 자주 마시냐고.
"아침에도 왔다갔다 면서요?"
물론 카페인이 여러번 필요한 날도 있었지만 그냥 그 쪽이 있을까 싶어서요,가 더 정답이었다. (물론 입밖으론 절대 꺼내지 않았다.)
"그냥 전시 같은거 기획하고. 홍보하고 그래요."
시시한 나의 말투에도 그는 오- 하고 흥미롭단 감탄사를 뱉었다. 별로 대단하진 않아요. 처음엔 좋아서 시작했던 일들도 시간이 지나면 두근거림은 사라지고 지겨워지기도 하네요.
나도 모르게 자조적인 말투에 전에 그가 열과 성을 담아 축구 얘기를 하던 모습이 스쳐지나갔다. 한창일 나이엔 내 말이 별로 와닿지 않겠지 싶으면서도 한편으론 창피하기도 했다. 그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단 표정으로 웃어서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연말엔 공간 대관이 쉽지 않아 전시 계약 따내기가 어렵거든요. 최근에 속 썩이는게 해결되긴 했는데.. 크리스마스도 반납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전시 배치랑, 홍보 이런거 생각하면요. 온기가 퍼지는 머그잔을 만지면서 카페를 둘러보니 그제서야 조그맣게 여기저기 달린 크리스마스 장식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한켠에 세워진 트리 위에 별을 가리키며 저거 제가 단거에요, 라고 했다.
"여긴 크리스마스엔 닫죠?"
그는 고개를 돌려 카운터 뒤에 사장님으로 추정 되는 수염난 남자를 힐끗 보더니 아마 그럴 것 같아요, 했다. 나는 부럽네요, 라고 말하며 라떼를 한모금 홀짝였다.
결국 크리스마스를 반납해야 했다. 새해에 전시 오프닝을 맞추고 싶단 요구에 오늘까지 현장에 나가 전시물을 배치를 최종 마무리했는데 여간 깐깐한게 아니라 여러번 같은 일을 반복해야 했다. 방문객 예상 동선 체크하고나니 겨울이라 짧아진 해는 어느새 넘어가 주위가 컴컴했다. 팀원들은 바로 현장에서 집으로 가라고 돌려 보냈고, 오늘 있었던 일을 서류 정리해서 파일로 만들어야해 사무실에 들렀다. 저장 버튼을 누르고 나니 배에선 꼬르륵 소리가 났다. 낮에 누군가 밖에서 급하게 사와 먹은 베이글 샌드위치가 오늘 마지막 식사였던게 그제야 생각났다.
그래도 크리스마스인데 왠지 집에서 해먹긴 싫었다. 뭐라도 먹을까 해서 사무실 문을 잠그고 나왔지만 일찍이 크리스마스-새해 휴가에 돌입한 가게들이 대부분이 있었고 예약된 손님들도 붐비는 가게들 뿐이었다. 자리가 있다 해도 저 많은 행복한 이들을 비집고 들어가 초라하게 혼자 밥을 먹긴 또 싫었다. 발길 가는대로 걷다 적당한데가 있으면 들어가고 아니면 말아야지, 했던게 어느새 돌고 돌아 그가 일하는 카페가 있는 거리까지 오게 됐다.
분명 깜깜해야 할 카페에선 불빛이 세어나오고 있었다. 크리스마스엔 쉰다너니.. 설마하고 슬쩍 몸을 기울여 창문으로 들여다보니 카운터에 턱을 괴고 앉아 핸드폰만 보고 있는 그가 눈에 들어왔다. 역시나 무거운 출입문을 끙끙대며 열고 들어가니 반사적으로 몸을 튕겨 일어난 그가 어서오세요!하고 인사했다. 내가 카운터로 걸어가자 아는 얼굴이라는 듯 씩 웃어보였다.
"... 쉰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런 줄 알았는데, 혹시나 대목일까. 사장님이 열자고 해서요. 물론 본인은 진즉 가셨지만?"
"그래서 손님은 많았어요?"
"뭐 적당히요. 마감하려고 했는데 딱 누가 들어오길래 이 사람만 받고 끝내야지 했는데, 당신이네요."
"아, 커피를 사려는건 아니었는데..."
반가워서 인사라도 할까해서 들어왔다는 말은 왠지 부끄러워 하지 못했는데 순간 배에서 난 꼬르륵 소리가 커서 더 창피해지고 말았다.
"저녁 안 먹었어요?"
"네, 일이 바빠서 놓쳤네요."
"그럼 같이 뭐라도 먹을래요?"
예기치 못한 제안에 예? 하고 되물었지만 그는 내 대답이 뭐든 신경 안 쓰는 것 같았다. 빨리 정리하고 나올게요, 잠깐만요. 하고 앞치마 끈을 푸르며 카운터 옆에 딸린 문으로 쏙 사라진 그였다.
나는 재빨리 머리를 굴려 회사 근처 남자 둘이 갈만한 곳을 떠올리려 애썼다. 어딜가야 적당하지? 너무 비싼데 가면 안되겠지. 혹시 본인이 산다고하면 괜히 부담스러울 수 있잖아. 아. 어딜가야하지. 전에 마크랑 이자벨이랑 갔던 곳? 아냐, 거기는 음악이 너무 시끄러워 소리지르면서 얘기해야 했잖아. 저번에 추천 받아 갔던데는? 거긴 인테리어가 너무 올드해. 크리스마스 같이 로맨틱한 날 저녁에 남자 둘이 가도 이상하지 않을 그런 곳이 어디냔 말이다.
머릿속에서 [장소]라는 서랍이 열리고 그 안에 있는 인덱스카드가 A부터 Z까지 차례대로 촤라락 넘어가는 모양새가 그러지는 와중 나갈 채비를 마친 그가 나왔다.
스포츠 브랜드 로고가 크게 박힌 롱패딩에 크로스백을 옆으로 멘 그를 보자 마지막으로 떠올렸던 레스토랑은 더더욱 안 되겠단 생각이 들었다. 거긴 나이 지긋한 부부나 연인들이 많이 가는 곳이니까.
"가고 싶은데 있어요?"
카페 문을 잠그며 그가 물었고 가끔 친구들을 만나 한잔 씩 하는 펍이 그냥 적당하겠다 싶었다. 물론 오늘 문을 연다면 말이다. 하나 있는데, 좀 걸어야 해요 라는 말에 좋다며 따라나서는 그였다.
다행히도 펍은 영업중이었다. 여기 괜찮아요? 안에 자리가 있나 보고 올게요, 라고 묻는데 그의 표정이 썩 좋지 않았다.
"어..음.. 여긴 안될 것 같아요."
"그래요?"
"제가 술을 못하거든요."
아. 미처 생각지 못한 조건이었다. 운동에 진심인 그라서 몸을 엄청 신경 쓸텐데, 그것까지 고려하지 못한 것이었다.
"아, 운동해서 몸 신경 쓰이죠, 아무래도."
"아니 그건 아니고요."
이어지는 다음 말에 댕~하고 종이 크게 울리더니 머리를 맞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빅맥세트 2개 나왔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지하철역 근처 패스트푸드점에서 그와 나는 트레이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있었다. 트레이 위엔 콜라 두잔, 감자튀김 (하나는 라지 사이즈였다), 햄버거 2개가 놓여있었다.
맞은 편에 앉은 그가 씩 웃으며 잘먹겠습니다! 하고 햄버거 포장지를 벗겼다. 옆으로 벗어 치운 롱패딩. 그제서야 그가 입고 있는 축구 유니폼 앞면 가슴팍에 크게 대문자로 익숙한 하이스쿨 이름이 박힌게 눈에 들어왔다.
제가 술을 못하거든요.
아니 그건 아니고요.
미성년자라서요.
미성년자라서요.
미성년자라서요.
어려봤자 대학 입학한지 얼마 안 됐겠지 싶었는데, 고등학생이라니. 물론 6개월 뒤면 졸업을 앞둔 졸업반이라곤 했지만. 그래도! 그래도! 어린애를 보고 몸이 좋다느니, 한 번 더 보고싶어서 카페에 들렀다느니 했던 그 모든 말과 생각에 두 볼이 다 화끈거렸다. 내가 아무말 않고 멍하니 있자 그가 재밌다는 듯 웃었다.
"내가 어려서 실망했어요?"
"...응? 아니, 그런 것 아닌데.."
"그러면 잭팟?"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대답한다고 한게 또 이상하게 들리는 것 같아 수습하려고 하는데
"크리스마스에 몸 좋은 어린 애랑 햄버거 먹는거 나쁘지 않죠?"
히죽거리며 한 입 크게 베어무는 그를 보니 두 볼이 다 화끈거렸다. 더이상 입을 열었다간 무슨 말 실수를 할지 몰라서 덜덜 떨리는 손으로 햄버거 포장지를 살살 벗겨냈다. 그는 이미 손에 든 버거를 반 먹은 상태였다. 어린애들의 식욕이란.. 햄버거 하나 더 시켜도 돼죠? 라니.
"12월 31일엔 뭐해요?
"....어? 그 날 회사에서 연말 모임 하겠지?"
"많이 늦어요?'
"...응?"
나도 모르게 말이 짧아진 걸 알아챈 그가 좋아요, 말 편하게 해요, 라고 했다. 햄버거는 포장지가 덜 벗겨진 채로 손에 들려 있었고 나는 무의식 중에 빨대로 입을 가져가 쪼로록 콜라를 한 모금 빨았다. 찌릿한 탄산이 식도를 타고 넘어가자 나갔던 정신이 조금 돌아오는 듯 했다.
"새해 카운트다운 하러 안 갈래요?"
도무지 이 대화가 이해되지 않는 내가 잘 모르겠단 표정을 하자 그 쪽이 생각하는 거 맞아요, 란다.
"그쪽이라니 참, 이름이 뭐에요? 난 칼럼 터너인데"
"난 오스틴.. 오스틴 버틀러야."
오스틴 버틀러.
그의 혀끝이 가지런한 치아 뒤에 붙었다 떨어지며 내 이름을 부르는데 살갗위로 오소소 소름이 돋는게 느껴졌다.
"그래서 카운트다운 하러 갈래요? 말래요?"
"..너랑? 나랑?"
헷갈린다는 나의 얼굴에 칼럼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웃다가
"아 진짜! 지금 데이트 신청 하는거잖아요!"
"데이트? 나한테?"
"그럼 그동안 음료 두 잔 주고 핫초코 타주고! 원래 오늘도 안 여는 날인데! 내가 왜 나왔겠어요?"
-
기껏 몸 데워 놨더니 오후 연습이 취소란다. 집에 다시 갈까 했는데 시간이 떠서 그냥 카페로 향했다. 도착하니 문 앞에서 낑낑 대는 사람이 보였다. 그러게 내가 문 좀 바꾸자니까 사장님 진짜.
도와주려 다가가니 좋은 향수 냄새가 난다. 오. 기분이 좋아지는 향이었다. 내가 문을 한 손으로 휙 밀자 몸이 튕겨나가 휘청거린다. 죄송합니다- 하며 힐끔 봤는데, 처연하고 피곤에 절은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일찍 오냐는 사장님에 말해 연습이 취소 됐다고 했다. 앞치마를 두르고 카운터로 나가니 잔뜩 피곤하지만 아름다운 얼굴의 그가 주문할 차례였다. 따뜻한 아이스 라떼라니. 다시 물어볼까 했으나 큰 눈을 꿈뻑이며 자연스레 서 있길래 그냥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두 잔 만들어 주지 뭐. 두 잔을 건네니 이게 뭐냐는 얼굴이었다. 따뜻한 아이스 라떼 시켰다고 말하자 미안하다며 지갑을 열어 돈을 더 지불하려 했다.
아이스는 결국 내가 먹었다. 내가 타준 라떼를 두 손으로 꼭 쥐고 나가 거리를 지나는 그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입에 있는 얼음을 와득와득 씹었다. 불이라도 끄는 심정으로.
그는 종종 오후에 들렀다. 어떤 날은 음료를 가지고 바로 나가기도 했고 어떤 날은 앉아서 밖을 구경하기도 했다. 카운터를 보면서 힐끗 쳐다보면 이쪽을 보고 있었던가도 싶은데, 몸을 휙 돌려버리는 그였다. 창으로 스며든 초겨울 파리한 햇살이 그의 금발 머리에서 반짝반짝 빛났다.
그러던 그가 아침에 모습을 드러냈다. 안경을 쓰고 있었는데 귀여웠다. 입은 스웨터도 귀여웠지. 안경 썼네요 라는 나의 말에 아침에 나왔냐고 되묻는 그였다. 마치 나의 근무 시간을 다 알고 있다는 듯. 머리에 쓰고 있는 헤어밴드가 우스꽝스러워 보이진 않을까 싶었는데 운동를 하냐는 말에 신이나서 또 자랑해 버리고 말았다.
근데 그 다음 말이 그래서 몸이 좋나봐요, 라니. 반칙 아닌가? 나만 관심 있는게 아니었단 말이지.
합리적 의심을 하는 나의 모습을 오해한 그가 연거푸 사과를 해왔다. 그것도 귀여웠지. 평소와 다르게 샷을 추가해 달라길래 물으니 몸이 안 좋다나. 그래서 멋대로 핫초코를 만들어 버렸다. 뚜껑위에 X까지 표시해선. 키스를 보낸다는 마음으로.
핫초코 이후로 그와 나의 심리적 거리는 조금 더 가까워진 듯 했다. 이전보다 편하게 내 대화에 대답해줘서 한 번은 특별히 음료를 자리까지 서빙한 뒤 옆에 자리 잡고 앉았다. 그러다 알게 된 건 크리스마스에도 일할지 모른다는 그의 안타까운 소식.
물론 우리 가게는 크리스마스부터 새해까지 닫을 계획이었다. 그가 가고 난 뒤 50대 50인 확률을 걸고 사장님께 졸라 내가 카페 문을 열겠다고 했다. 사람들이 더 많이 외출하니까 대목일지도 모른다는 말부터 해서 이상한 말까지 구구절절 지어내 결국 키를 받아내고 말았다.
손님들은 거의 없는거나 마찬가지였다. 여기는 오피스 지구 였고, 크리스마스엔 문 여는 회사는 없었으니까. 아마 그의 회사도 그러지 않을까. 어느덧 해는 저물고 하릴없이 스마트폰 스크린만 죽죽 긋고 있는데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려 봤더니 큰 문 뒤로 작은 금발의 머리통이 쏙 하고 나왔다.
딱히 커피를 사러 온건 아니라는 그의 말에. 그럼 왜? 혹시 나 때문에? 라는 생각이 들며 이대로 밀어붙여 볼까 했다.
순간 그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길래 같이 뭐라도 먹으러 갈까요? 라고 물었다. 그가 싫다고 할까봐 대답도 듣기 전에 정리하고 나오겠다며 옷을 걸치러 뒷문으로 들어왔다.
이럴줄 알았으면 옷 좀 다른거 입고 올 걸. 운동하는 애라 뭔 옷들이 전부 스포츠 브랜드에. 가방까지 크로스로 메니 영락없는 고등학생이었다. 레스토랑 이런델 데려가야 하는데 이런 옷이면 좀 그렇잖아. 에라 모르겠다, 하고 나왔는데 자리에 망부석처럼 서서 한 곳을 응시하며 골똘히 생각하는 그가 보였다. 설마 제안을 어떻게 거절해야 할지 고민하는 건 아니겠지.
다행히도 그건 아니었으나, 우리가 도착한 곳은 펍이었다. 이런. 난 술은 못하는데.
그러고보니 내가 미성년자라는 말을 안 했었구나.
-
오스틴은 지금 이게 맞는가 싶었다. 그러니까 앞에 앉아 두번째 햄버거에 집중한 이 어린 녀석이 나같이 나이 많은 사람한테 데이트 신청이라고. 얼떨떨하면서도 싫지는 않은 이 기분. 서서히 불안함이 가시자 오스틴이 작게 바람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어. 웃었다. 간다는 말이죠?"
"그 날 연말 모임 있는데.."
"기다릴게요."
근데 왜 이렇게 못 먹어요? 칼럼은 앞에 놓인 감자튀김 중 제일 긴걸 집어 케찹에 찍어 오스틴의 입 앞으로 가져갔다. 오스틴이 망설이마 입을 작게 벌리자 안으로 쏙 넣어주곤 만족스럽게 웃었다.
칼럼오틴버 칼틴버
개연성은 둘의 와꾸로...
평소에 그냥 지나치기만 했던 카페인데. 그 날은 연일 이어진 회의와 마감, 연장 근무 때문에 체력이 한계까지 다다른 날의 오후였다. 가로수의 나뭇잎들이 머리 위보단 발치에 더 많이 쌓여가는 계절이었다. 컴퓨터 앞에 앉아 있다 눈이 빠질듯한 느낌에 자리에서 일어나 회사 밖으로 나왔다.
이미 아침에 출근하면서 한 번 들이킨 카페인의 약효는 점심 시간이 지나자 증발해버렸다. 재충전의 간격이 점차 짧아지는게 걱정도 되었지만 일이 문제였다. 지금 서두르지 않으면 최악의 상황에선 크리스마스 휴가까지 반납해야 할지도 몰랐다. 원래 가던 카페를 가려면 큰 도로를 두 번 건너야 했기 때문에 망설여졌다. 날이 쌀쌀해져서 그런가 길 위를 지나는 연인들의 물리적인 간격이 지난 계절보다 훨씬 가까워진 것 같았다. 몇 해 전엔 나도 저랬지. 괜히 코 끝이 시려 한 번 훌쩍였다.
서른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니 모든 일에 점점 무뎌지긴 했다만, 연애 감정만큼은 그러지 않길 바랐다. 좋은 사람은 찾기 힘들다, 라고 했다만. 그 좋은 사람은 예고 없이 눈 앞에 뚝 떨어지기 마련이기 때문에 늘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하는데. 그 날의 난 그러질 못했다.
뜨끈뜨끈하게 달아오를 눈두덩이를 꾹꾹 누르며 더 걷기가 힘들어져 가장 가까이에 있는 카페로 들어갔다. 생각보다 출입문이 무거워 팔에 단단히 힘을 주고 밀어야 했다. 사무실 의자에만 앉아서 하는 운동이라곤 손가락으로 마우스커서만 까딱이는거라.
끙 소리를 내야 할 정도로 무겁게 움직이던 문이 가볍게 휙 하고 앞으로 밀려나며 열렸다. 순간 중심을 잃어 비틀거렸고 뒤에서 문을 밀고 따라들어온 키가 큰 남자는 어, 죄송합니다, 라고 말한 뒤 나를 앞질러 카페 안 쪽으로 들어갔다. 카페 안의 테이블엔 오후의 커피를 즐기는 몇 몇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녹색 앞치마를 두르고 수염을 잘 다듬은 남자가 카운터를 보고 있었다. 난 눈을 가늘게 뜨고 천천히 카운터 윗편에 초크로 휘갈겨 쓴 메뉴를 훑었다.
카운터 뒤 부엌 또는 창고로 이어지는 듯한 문으로 아까 본인을 앞질러 갔던 남자가 앞치마를 두르며 나오고 있었다. 구불거리는 머리카락에, 큰 키에, 곧게 벌어진 어깨. 입고 있는 검정색 평범한 후드티가 평범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잘 어울리는 피지컬이었다. 수염이 난 남자에게 말을 걸며 웃는데 입매가 매우 시원했다. 피곤에 절은 상태인데도 저런게 눈에 들어오다니, 뭐지, 나. 이정도로 간절한거야?괜히 민망해졌다. 그도 그럴게 타인과 육체적인 접촉도 마지막 연애가 끝나면서 함께 끝나버렸으니까.
오늘 일찍 왔네. 오후 연습 일찍 끝나서요. 그럼 난 물품 정리 할테니까 카운터 좀 봐라. 두 사람의 대화를 티내지 않고 엿듣다가 예!하는 그의 씩씩한 목소리에 난 반쯤 나가려던 정신을 긁어모아 카운터 앞에 섰다.
"뭘로 드릴까요?"
"따뜻한 아이스 라떼요"
"...예?"
"네??"
지금 생각해 보면 정신은 빠져나간지 오래였고, 내가 긁어 모았던 건 머릿속에 습관처럼 주문하던 단어들이었던 것 같다. 그것들이 잘못 조합되어 나왔던게 문제지만 난 전혀 눈치채지 못했었다. 그도 다시 나에게 물어 보지 못했던 건 내가 너무 자연스럽고도 당당하게 주문했기 때문이리라. 내 뒤에 선 참을성 없는 또 다른 손님이 큼큼 거리며 눈치를 줘서 그는 알겠다고 하며 내 주문을 처리했다.
"왜 두잔이죠?"
픽업 카운터엔 따뜻한 라떼 한 잔과 아이스 라떼 한 잔 총 두 잔이 나와있었다. 나는 이게 뭔가 싶어 그를 쳐다봤고, 그는 이 상황이 웃기다는 듯, (하지만 결코 비웃는 건 아니었다) 피식 웃었다.
손님이 따뜻한 아이스 라떼를 시키셨어요. 평소 같으면 그럴리 없다고 조금 따졌겠지만 내 컨디션으로 미루어보아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것 같았다.그리고 나의 전의를 상실하게 미소 앞에서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미안해요, 한잔 값 더 계산할게요."
허둥지둥 지갑을 다시 찾아 계산하려는 나에게 남자는 됐다고 했다.
"됐어요. 원래는 뭐였어요?"
"... 따뜻한거요."
그는 내 쪽으로 따뜻한 라떼가 담긴 컵을 밀었고, 아이스는 자기가 마시겠다며 냉큼 가져갔다. 저기 그래도.. 지갑을 연 나는 지폐를 꺼내 건네려했지만 그가 손사레 치며 '차이라떼 시키신 분!' 하고 다음 주문을 외쳤다. 나는 엉거주춤 서 있다가 작게 감사하다는 고개짓을 하고 돌아나왔다. 마지막으로 출입문을 열기 전에 한 번 더 뒤돌아 보니 그는 벌써 잊었다는 듯 카운터 보기에 바빴다.
그 카페에 가면 주문을 제대로 하려고 속으로 몇 번이나 연습을 했지만. 그가 주문을 받을 때도 아닐 때도 있었다. 주문 외에 별 다른 얘기가 오간 것도 아니었다. 바로 사무실에 들어가기 싫은 날엔 도로변이 내다보이는 창문을 따라 놓인 스툴에 앉아 몇 모금 홀짝이기도 했다. 바깥을 내다 보기도 했지만 의자를 빙글 돌려 카운터 쪽을, 아니 그를 더 많이 바라본 것 같다.
양 팔을 벌려 카운터를 짚고 서 있는 모습이나 큰 몸을 움직여 커피를 내리고 얼굴을 아는 손님이 오면 크게 웃으며 이런저런 얘기를 주고 받는게 보였다. 그러다 눈이 마주칠 것 같으면 몸을 돌려 아닌척 하며 밖을 다시 내다보았다. 몰래 훔쳐보는듯한 행동에 누군가 오해하진 않을까 뜨끔하면서도 그의 호탕한 웃음 소리를 듣고 있으면 오전 업무에 쌓였던 피로가 가시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그 카페에 거의 매일 오후 출근 도장을 찍다시피 하게 됐다. 그가 없던 적도 있지만, 지루한 일상에 작은 기대가 생기면 하루를 버틸 힘이 생기는거니까.
그 날은 유독 출근하기가 싫었다. 이마를 짚으니 약간 뜨끈했다. 하루 병가를 낼까 했지만 얼마 안 남은 마감일이랑 연말 행사 진행 때문에 내가 빠지면 고생할 팀원들이 눈에 훤했다. 그래도 제 시간엔 도착하지 못할 것 같아 늦는다고만 연락을 해놨다.
이불을 걷고 일어나 창문을 여니 어제보다 훨씬 더 차가워진 공기가 코로 들어와 폐부를 씻었다. 한기에 부르르 몸이 떨렸다. 평소라면 머리 손질도 하고 옷차림에 신경 썼겠지만 오늘은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옷장 안에 개어진 도톰한 스웨터를 꺼내 입고 정전기로 뻗은 머리를 손으로 대충 넘긴 뒤 안경을 썼다. 동료들은 우스갯소리로 오스틴이 안경 쓴 날은 저기압이란거야, 라고 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집을 나서기 전에 거울을 보니 나이에 맞지 않게 너무 학생같이 입었나 싶었지만 몸이 안 좋으니 그런게 뭐 대수냐는 생각이 먼저였다. 평소 같으면 차를 탔겠지만 오늘은 운전하는 수고로움은 덜고 싶어 대중 교통을 탔다. 한창 붐비는 출근 시간은 지난터라 앉아서 갈 수 있었다. 버스가 익숙한 대로변에 가까워지며 눈에 익은 카페가 보였다. 아침부터 강한 음료가 필요한 날인데. 늦은김에 팀원들것도 사다줄까.. 원래 모닝 커피는 늘 회사 옆 카페로 가는데.. 손가락이 하차 버튼을 눌렀다.
기대한 건 아니었지만. 오전에 그의 얼굴을 볼 수 있을거란 생각은 해본적 없어서 내심 반갑기도 했다. 오늘은 머리에 사람들이 조깅할때나 쓰는 헤어밴드를 하고 긴 소매의 축구유니폼 위에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다. 어쩐지 남다른 피지컬이라더니 운동을 하나보네. 부러우면서도 유니폼 아래 탄탄한 몸을 상상하자 볼이 화끈거리는 것 같았다.
그는 카운터에서 여학생들과 깔깔 웃으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다 뒤에 멀찍이 떨어져 기다리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기댔던 몸을 뒤로 물렸다. 두 여학생도 나를 한 번 돌아보곤 그럼 학교에서 보자, 라며 자리를 뜨자 카페 안에 남은건 그와 나 둘 뿐이었다. 대학생인가 보네. 축구 동아리일까? 내가 다가가자 그는 몸을 숙이며 웃었다.
"어, 안경 썼네요 오늘은."
내 변화를 알아챈 그에게 놀라 설레면서도 한편으론 그렇게 자주 들락거렸으니 모르는게 더 이상하지, 하는 생각이 동시에 들었다. 그래도 먼저 건네준 스몰톡에 답해야겠지해서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아침에 나오셨네요 오늘은."
"예?"
괜히 말했나. 마치 너의 근무 시간을 안다는 투의 말이었잖아. 주문이나 할걸.
"아~ 오늘은 오후에 연습이라서요."
입꼬리를 양쪽으로 당겨 웃으며 대답하는 그의 모습에 고개를 끄덕이고 없는 용기를 쥐어짜서 운동하세요? 라고 또 묻고 말았다. 물음에 뒤로 돌아 유니폼 번호를 보여주며 자랑스럽게 네!하고 대답하는 그였다.
원래는 계속 아침 연습이었는데. 코치님이 시간을 바꿔버렸다나. 축구를 대단히 좋아하는지 그의 이야기는 멈출 줄 몰랐다. 내심 속으로 카페에 다른 손님이 들어오지 말았으면 했다. 그의 가까이에 서서 이야기하는 걸 더 듣고 싶었다. 목소리까지 좋을 줄이야.
몸 안에서 나는 열기와 카페 안에 돌아가는 히터와 재잘거리는 그의 목소리 때문에 반쯤 멍해진 나는 그만
"그래서 몸이 좋은가봐요."
아. 그가 하던 말을 뚝 끊고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방금 한 말을 다시 복기하는데까지 10초 정도 걸린것 같다. 그 10초의 정적이 10분, 10시간이 된 느낌이었다. 나는 횡설수설하며 입밖으로 미끄러진 실수들을 담으려 사과했다. 성희롱이라고 생각하면 어떡하지, 아 절대 그런게 아닌데.
"미안해요, 정말, 전 이상한 의도로-"
횡설수설하며 몸을 더듬어 지갑을 찾으며 연신 미안하다 하는 내 모습이 웃겼는지 그는 큰 소리로 웃음을 떠뜨렸다. 얼굴이 홍당무가 됐을게 뻔하다. 고개를 들지 못하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주문, 주문할게요. 라고 더듬어 말했다.
"차가운 핫으로? 아니면 따뜻한 아이스로 하나요?"
처음에 내가 했던 주문 실수를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었다니. 그가 건네는 농담에 조금은 안심이 되어 나도 작게 따라 미소 지었다. 정말 미안해요, 라는 말에 됐다며 큰 손을 휘휘 내저었다.
"따뜻하고 따뜻한 걸로 할게요. 그리고.. 샷 추가도 부탁해요."
"오늘 많이 피곤하신가봐요?"
피.곤.이라는 말을 강조하며 웃는게 아까 했던 말실수를 이해한다는 뜻 같았다. 기다리고 있을 팀원들을 위한 음료도 주문하며 아침에 일어났는데 몸이 좋지 않아 일에 늦었거든요, 라고 덧붙였다. 포스기를 두드린 그는 요즘 감기 걸리기 딱 좋은 날씨죠. 조금만 기다리세요, 라며 몸을 돌려 음료를 제조하러 갔다.
주문한 음료가 나올때까지 그의 뒷모습을 쫓는데 유니폼 위에 써진 이름이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T U R N E R 터너터너터너터너터너.. 이름은 뭘까..
그에게 어울리는 이름을 하나둘 떠올리며 공상에 잠길무렵 준비된 음료가 나왔다. 6구짜리 캐리어에 꽂힌 6잔의 음료 중 하나 위엔 X라고 표시되어 있었다. X가 샷추가 된 내꺼겠지. 한 모금 마시고 정신차려야겠다 싶어 X 표시 된 음료를 꺼내드는데, 그가 있잖아요 하고 운을 뗀다.
"그거 핫초코에요. 몸이 안 좋은데 카페인 보단 낫지 않을까요?제 친구들도 그거 많이 사 먹거든요, 아플때."
예상치 못한 배려에 할 말은 없어진 내가 멍하니 서 있자 아. 설탕도 어차피 몸에 안 좋나?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그였다. 바꿔드릴까요? 라는 말이 필사적으로 고개를 도리질 한 나는 음료를 챙겨들어 카페 밖으로 나왔다. 뒤에서 단 거 먹으면 기분은 좋잖아요! 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컵에서 스며나온 온기가 손바닥 안으로 스스로 퍼지고 뚜껑의 작은 구멍으로 솔솔 달달한 냄새가 피어나왔다. 한모금 홀짝. 역시 달았다. 나이가 들면서 단 것도 자연스레 멀리하게 된 건 언제부터 였을까. 입 안에 퍼지는 달달한 맛에 그가 한 말 중 하나는 맞았단 생각이 들었다. 단 걸 먹으면 기분이 좋아진다는 말.
컵을 기울이자 뚜껑에 표시 된 X도 왠지 kiss 를 보내며 라는 뜻같이 읽혀 혼자 설렜다. 이거 완전 어린애가 된 기분이군.
핫초코 사건 이후 카페에 가면 그는 날 반가워하며 인사를 건넸다. 속으로 그가 나의 말실수를 다시 끄집어내진 않을까 조마조마 했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크리스마스가 가까워진 어느 날, 그는 내가 앉은 자리까지 직접 음료를 가져다주곤 그 옆에 앉기까지 했다. 원래 직접 서빙은 안 하는 걸로 아는데.. 비교적 한가해서 그런가 싶었다. 옆에 앉은 그는 내가 하는 일이 뭔지 궁금하다며 물었다. 왜 그렇게 커피를 자주 마시냐고.
"아침에도 왔다갔다 면서요?"
물론 카페인이 여러번 필요한 날도 있었지만 그냥 그 쪽이 있을까 싶어서요,가 더 정답이었다. (물론 입밖으론 절대 꺼내지 않았다.)
"그냥 전시 같은거 기획하고. 홍보하고 그래요."
시시한 나의 말투에도 그는 오- 하고 흥미롭단 감탄사를 뱉었다. 별로 대단하진 않아요. 처음엔 좋아서 시작했던 일들도 시간이 지나면 두근거림은 사라지고 지겨워지기도 하네요.
나도 모르게 자조적인 말투에 전에 그가 열과 성을 담아 축구 얘기를 하던 모습이 스쳐지나갔다. 한창일 나이엔 내 말이 별로 와닿지 않겠지 싶으면서도 한편으론 창피하기도 했다. 그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단 표정으로 웃어서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연말엔 공간 대관이 쉽지 않아 전시 계약 따내기가 어렵거든요. 최근에 속 썩이는게 해결되긴 했는데.. 크리스마스도 반납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전시 배치랑, 홍보 이런거 생각하면요. 온기가 퍼지는 머그잔을 만지면서 카페를 둘러보니 그제서야 조그맣게 여기저기 달린 크리스마스 장식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한켠에 세워진 트리 위에 별을 가리키며 저거 제가 단거에요, 라고 했다.
"여긴 크리스마스엔 닫죠?"
그는 고개를 돌려 카운터 뒤에 사장님으로 추정 되는 수염난 남자를 힐끗 보더니 아마 그럴 것 같아요, 했다. 나는 부럽네요, 라고 말하며 라떼를 한모금 홀짝였다.
결국 크리스마스를 반납해야 했다. 새해에 전시 오프닝을 맞추고 싶단 요구에 오늘까지 현장에 나가 전시물을 배치를 최종 마무리했는데 여간 깐깐한게 아니라 여러번 같은 일을 반복해야 했다. 방문객 예상 동선 체크하고나니 겨울이라 짧아진 해는 어느새 넘어가 주위가 컴컴했다. 팀원들은 바로 현장에서 집으로 가라고 돌려 보냈고, 오늘 있었던 일을 서류 정리해서 파일로 만들어야해 사무실에 들렀다. 저장 버튼을 누르고 나니 배에선 꼬르륵 소리가 났다. 낮에 누군가 밖에서 급하게 사와 먹은 베이글 샌드위치가 오늘 마지막 식사였던게 그제야 생각났다.
그래도 크리스마스인데 왠지 집에서 해먹긴 싫었다. 뭐라도 먹을까 해서 사무실 문을 잠그고 나왔지만 일찍이 크리스마스-새해 휴가에 돌입한 가게들이 대부분이 있었고 예약된 손님들도 붐비는 가게들 뿐이었다. 자리가 있다 해도 저 많은 행복한 이들을 비집고 들어가 초라하게 혼자 밥을 먹긴 또 싫었다. 발길 가는대로 걷다 적당한데가 있으면 들어가고 아니면 말아야지, 했던게 어느새 돌고 돌아 그가 일하는 카페가 있는 거리까지 오게 됐다.
분명 깜깜해야 할 카페에선 불빛이 세어나오고 있었다. 크리스마스엔 쉰다너니.. 설마하고 슬쩍 몸을 기울여 창문으로 들여다보니 카운터에 턱을 괴고 앉아 핸드폰만 보고 있는 그가 눈에 들어왔다. 역시나 무거운 출입문을 끙끙대며 열고 들어가니 반사적으로 몸을 튕겨 일어난 그가 어서오세요!하고 인사했다. 내가 카운터로 걸어가자 아는 얼굴이라는 듯 씩 웃어보였다.
"... 쉰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런 줄 알았는데, 혹시나 대목일까. 사장님이 열자고 해서요. 물론 본인은 진즉 가셨지만?"
"그래서 손님은 많았어요?"
"뭐 적당히요. 마감하려고 했는데 딱 누가 들어오길래 이 사람만 받고 끝내야지 했는데, 당신이네요."
"아, 커피를 사려는건 아니었는데..."
반가워서 인사라도 할까해서 들어왔다는 말은 왠지 부끄러워 하지 못했는데 순간 배에서 난 꼬르륵 소리가 커서 더 창피해지고 말았다.
"저녁 안 먹었어요?"
"네, 일이 바빠서 놓쳤네요."
"그럼 같이 뭐라도 먹을래요?"
예기치 못한 제안에 예? 하고 되물었지만 그는 내 대답이 뭐든 신경 안 쓰는 것 같았다. 빨리 정리하고 나올게요, 잠깐만요. 하고 앞치마 끈을 푸르며 카운터 옆에 딸린 문으로 쏙 사라진 그였다.
나는 재빨리 머리를 굴려 회사 근처 남자 둘이 갈만한 곳을 떠올리려 애썼다. 어딜가야 적당하지? 너무 비싼데 가면 안되겠지. 혹시 본인이 산다고하면 괜히 부담스러울 수 있잖아. 아. 어딜가야하지. 전에 마크랑 이자벨이랑 갔던 곳? 아냐, 거기는 음악이 너무 시끄러워 소리지르면서 얘기해야 했잖아. 저번에 추천 받아 갔던데는? 거긴 인테리어가 너무 올드해. 크리스마스 같이 로맨틱한 날 저녁에 남자 둘이 가도 이상하지 않을 그런 곳이 어디냔 말이다.
머릿속에서 [장소]라는 서랍이 열리고 그 안에 있는 인덱스카드가 A부터 Z까지 차례대로 촤라락 넘어가는 모양새가 그러지는 와중 나갈 채비를 마친 그가 나왔다.
스포츠 브랜드 로고가 크게 박힌 롱패딩에 크로스백을 옆으로 멘 그를 보자 마지막으로 떠올렸던 레스토랑은 더더욱 안 되겠단 생각이 들었다. 거긴 나이 지긋한 부부나 연인들이 많이 가는 곳이니까.
"가고 싶은데 있어요?"
카페 문을 잠그며 그가 물었고 가끔 친구들을 만나 한잔 씩 하는 펍이 그냥 적당하겠다 싶었다. 물론 오늘 문을 연다면 말이다. 하나 있는데, 좀 걸어야 해요 라는 말에 좋다며 따라나서는 그였다.
다행히도 펍은 영업중이었다. 여기 괜찮아요? 안에 자리가 있나 보고 올게요, 라고 묻는데 그의 표정이 썩 좋지 않았다.
"어..음.. 여긴 안될 것 같아요."
"그래요?"
"제가 술을 못하거든요."
아. 미처 생각지 못한 조건이었다. 운동에 진심인 그라서 몸을 엄청 신경 쓸텐데, 그것까지 고려하지 못한 것이었다.
"아, 운동해서 몸 신경 쓰이죠, 아무래도."
"아니 그건 아니고요."
이어지는 다음 말에 댕~하고 종이 크게 울리더니 머리를 맞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빅맥세트 2개 나왔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지하철역 근처 패스트푸드점에서 그와 나는 트레이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있었다. 트레이 위엔 콜라 두잔, 감자튀김 (하나는 라지 사이즈였다), 햄버거 2개가 놓여있었다.
맞은 편에 앉은 그가 씩 웃으며 잘먹겠습니다! 하고 햄버거 포장지를 벗겼다. 옆으로 벗어 치운 롱패딩. 그제서야 그가 입고 있는 축구 유니폼 앞면 가슴팍에 크게 대문자로 익숙한 하이스쿨 이름이 박힌게 눈에 들어왔다.
제가 술을 못하거든요.
아니 그건 아니고요.
미성년자라서요.
미성년자라서요.
미성년자라서요.
어려봤자 대학 입학한지 얼마 안 됐겠지 싶었는데, 고등학생이라니. 물론 6개월 뒤면 졸업을 앞둔 졸업반이라곤 했지만. 그래도! 그래도! 어린애를 보고 몸이 좋다느니, 한 번 더 보고싶어서 카페에 들렀다느니 했던 그 모든 말과 생각에 두 볼이 다 화끈거렸다. 내가 아무말 않고 멍하니 있자 그가 재밌다는 듯 웃었다.
"내가 어려서 실망했어요?"
"...응? 아니, 그런 것 아닌데.."
"그러면 잭팟?"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대답한다고 한게 또 이상하게 들리는 것 같아 수습하려고 하는데
"크리스마스에 몸 좋은 어린 애랑 햄버거 먹는거 나쁘지 않죠?"
히죽거리며 한 입 크게 베어무는 그를 보니 두 볼이 다 화끈거렸다. 더이상 입을 열었다간 무슨 말 실수를 할지 몰라서 덜덜 떨리는 손으로 햄버거 포장지를 살살 벗겨냈다. 그는 이미 손에 든 버거를 반 먹은 상태였다. 어린애들의 식욕이란.. 햄버거 하나 더 시켜도 돼죠? 라니.
"12월 31일엔 뭐해요?
"....어? 그 날 회사에서 연말 모임 하겠지?"
"많이 늦어요?'
"...응?"
나도 모르게 말이 짧아진 걸 알아챈 그가 좋아요, 말 편하게 해요, 라고 했다. 햄버거는 포장지가 덜 벗겨진 채로 손에 들려 있었고 나는 무의식 중에 빨대로 입을 가져가 쪼로록 콜라를 한 모금 빨았다. 찌릿한 탄산이 식도를 타고 넘어가자 나갔던 정신이 조금 돌아오는 듯 했다.
"새해 카운트다운 하러 안 갈래요?"
도무지 이 대화가 이해되지 않는 내가 잘 모르겠단 표정을 하자 그 쪽이 생각하는 거 맞아요, 란다.
"그쪽이라니 참, 이름이 뭐에요? 난 칼럼 터너인데"
"난 오스틴.. 오스틴 버틀러야."
오스틴 버틀러.
그의 혀끝이 가지런한 치아 뒤에 붙었다 떨어지며 내 이름을 부르는데 살갗위로 오소소 소름이 돋는게 느껴졌다.
"그래서 카운트다운 하러 갈래요? 말래요?"
"..너랑? 나랑?"
헷갈린다는 나의 얼굴에 칼럼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웃다가
"아 진짜! 지금 데이트 신청 하는거잖아요!"
"데이트? 나한테?"
"그럼 그동안 음료 두 잔 주고 핫초코 타주고! 원래 오늘도 안 여는 날인데! 내가 왜 나왔겠어요?"
-
기껏 몸 데워 놨더니 오후 연습이 취소란다. 집에 다시 갈까 했는데 시간이 떠서 그냥 카페로 향했다. 도착하니 문 앞에서 낑낑 대는 사람이 보였다. 그러게 내가 문 좀 바꾸자니까 사장님 진짜.
도와주려 다가가니 좋은 향수 냄새가 난다. 오. 기분이 좋아지는 향이었다. 내가 문을 한 손으로 휙 밀자 몸이 튕겨나가 휘청거린다. 죄송합니다- 하며 힐끔 봤는데, 처연하고 피곤에 절은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일찍 오냐는 사장님에 말해 연습이 취소 됐다고 했다. 앞치마를 두르고 카운터로 나가니 잔뜩 피곤하지만 아름다운 얼굴의 그가 주문할 차례였다. 따뜻한 아이스 라떼라니. 다시 물어볼까 했으나 큰 눈을 꿈뻑이며 자연스레 서 있길래 그냥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두 잔 만들어 주지 뭐. 두 잔을 건네니 이게 뭐냐는 얼굴이었다. 따뜻한 아이스 라떼 시켰다고 말하자 미안하다며 지갑을 열어 돈을 더 지불하려 했다.
아이스는 결국 내가 먹었다. 내가 타준 라떼를 두 손으로 꼭 쥐고 나가 거리를 지나는 그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입에 있는 얼음을 와득와득 씹었다. 불이라도 끄는 심정으로.
그는 종종 오후에 들렀다. 어떤 날은 음료를 가지고 바로 나가기도 했고 어떤 날은 앉아서 밖을 구경하기도 했다. 카운터를 보면서 힐끗 쳐다보면 이쪽을 보고 있었던가도 싶은데, 몸을 휙 돌려버리는 그였다. 창으로 스며든 초겨울 파리한 햇살이 그의 금발 머리에서 반짝반짝 빛났다.
그러던 그가 아침에 모습을 드러냈다. 안경을 쓰고 있었는데 귀여웠다. 입은 스웨터도 귀여웠지. 안경 썼네요 라는 나의 말에 아침에 나왔냐고 되묻는 그였다. 마치 나의 근무 시간을 다 알고 있다는 듯. 머리에 쓰고 있는 헤어밴드가 우스꽝스러워 보이진 않을까 싶었는데 운동를 하냐는 말에 신이나서 또 자랑해 버리고 말았다.
근데 그 다음 말이 그래서 몸이 좋나봐요, 라니. 반칙 아닌가? 나만 관심 있는게 아니었단 말이지.
합리적 의심을 하는 나의 모습을 오해한 그가 연거푸 사과를 해왔다. 그것도 귀여웠지. 평소와 다르게 샷을 추가해 달라길래 물으니 몸이 안 좋다나. 그래서 멋대로 핫초코를 만들어 버렸다. 뚜껑위에 X까지 표시해선. 키스를 보낸다는 마음으로.
핫초코 이후로 그와 나의 심리적 거리는 조금 더 가까워진 듯 했다. 이전보다 편하게 내 대화에 대답해줘서 한 번은 특별히 음료를 자리까지 서빙한 뒤 옆에 자리 잡고 앉았다. 그러다 알게 된 건 크리스마스에도 일할지 모른다는 그의 안타까운 소식.
물론 우리 가게는 크리스마스부터 새해까지 닫을 계획이었다. 그가 가고 난 뒤 50대 50인 확률을 걸고 사장님께 졸라 내가 카페 문을 열겠다고 했다. 사람들이 더 많이 외출하니까 대목일지도 모른다는 말부터 해서 이상한 말까지 구구절절 지어내 결국 키를 받아내고 말았다.
손님들은 거의 없는거나 마찬가지였다. 여기는 오피스 지구 였고, 크리스마스엔 문 여는 회사는 없었으니까. 아마 그의 회사도 그러지 않을까. 어느덧 해는 저물고 하릴없이 스마트폰 스크린만 죽죽 긋고 있는데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려 봤더니 큰 문 뒤로 작은 금발의 머리통이 쏙 하고 나왔다.
딱히 커피를 사러 온건 아니라는 그의 말에. 그럼 왜? 혹시 나 때문에? 라는 생각이 들며 이대로 밀어붙여 볼까 했다.
순간 그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길래 같이 뭐라도 먹으러 갈까요? 라고 물었다. 그가 싫다고 할까봐 대답도 듣기 전에 정리하고 나오겠다며 옷을 걸치러 뒷문으로 들어왔다.
이럴줄 알았으면 옷 좀 다른거 입고 올 걸. 운동하는 애라 뭔 옷들이 전부 스포츠 브랜드에. 가방까지 크로스로 메니 영락없는 고등학생이었다. 레스토랑 이런델 데려가야 하는데 이런 옷이면 좀 그렇잖아. 에라 모르겠다, 하고 나왔는데 자리에 망부석처럼 서서 한 곳을 응시하며 골똘히 생각하는 그가 보였다. 설마 제안을 어떻게 거절해야 할지 고민하는 건 아니겠지.
다행히도 그건 아니었으나, 우리가 도착한 곳은 펍이었다. 이런. 난 술은 못하는데.
그러고보니 내가 미성년자라는 말을 안 했었구나.
-
오스틴은 지금 이게 맞는가 싶었다. 그러니까 앞에 앉아 두번째 햄버거에 집중한 이 어린 녀석이 나같이 나이 많은 사람한테 데이트 신청이라고. 얼떨떨하면서도 싫지는 않은 이 기분. 서서히 불안함이 가시자 오스틴이 작게 바람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어. 웃었다. 간다는 말이죠?"
"그 날 연말 모임 있는데.."
"기다릴게요."
근데 왜 이렇게 못 먹어요? 칼럼은 앞에 놓인 감자튀김 중 제일 긴걸 집어 케찹에 찍어 오스틴의 입 앞으로 가져갔다. 오스틴이 망설이마 입을 작게 벌리자 안으로 쏙 넣어주곤 만족스럽게 웃었다.
칼럼오틴버 칼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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