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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27 21:12
#행맨밥으로호위기사밥냥이
노곤해 늘어진 몸 위로 따뜻한 공기가 간지럽게 떠다녔다. 부드럽게 몸을 쓰다듬던 손길은 좋지만 지금은 조금만 더 자고 싶었다. 밥은 몸을 웅크려 이불 속으로 숨어들었다.
"나도 안 깨우고 싶은데 너 뭐라도 먹어야 해."
웃음기 담긴 낮은 목소리가 꼭 노래같았다. 듣기 좋아 품에 파고드니 다시 뜨끈한 감촉이 온 몸을 감쌌다. 머리를 살살 쓸어주는손을 따라 고개를 들려는데, 귓가에 속삭이는 허밍을 따라 목울대를 울리려는데... 귀에 들리는 건 감기걸린 쥐가 찍찍거리는 듯한 소음이었다! 밥은 호위기사의 본능을 발휘해 재빨리 몸을 곤두세웠다. 물론 온몸을 강타하는 통증에 바로 다시 엎어졌지만.
"일어나지도 못하겠어? 품에 안고 먹여줘야 하나?"
진짜 베이비가 따로 없네. 큭큭거리는 웃음이 얄미워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올리자 눈 앞에 머리가 조금 삐친 채로 웃는 악당놈이 있었다. 입가에 미소를 가득 담고, 아주 사랑스럽다는 눈으로 밥을 보고 있었다. 밥은 그 얼굴을 홀린듯이 보다 손에 머리를 꿍 박았다.
"정말, 네가 고양이야? 그럼 아- 해봐."
"아..."
내가 고양이지 그럼 뭐람. 밥이 눈을 비비며 궁시렁거리는 동안 악당놈, 아니 제이크는 스프를 입에 넣어주고 잡초만큼 쓴 사탕에 물까지 먹였다. 아침에는 메이저 주인님이 마시는 꿀탄 우유를 같이 먹어야 하는데. 그건 하나도 안 쓴데. 그렇게 말했다 혀가 얼얼해질 만큼 단 입맞춤을 받았다. 그건 좋았다.
밥은 메이저 도련님의 정식 호위기사로 세상의 이치를 꿰뚫어보는 이지와 호위기사로서의 충성심을 두루 갖춘 품위있는 고양이었다. 그런 밥에게 악당놈은 뻔뻔하게도 말도 안 되는 요구를 들이밀었다.
"다시 돌아가라니까?"
"니가 원하는 게 뭔진 알겠는데, 내가 그렇게 말할 일은 없어."
악당놈이 원하는 게 단순히 고양이 밥이 보고 싶은 거라면 그렇게 해 줬을 것이다. 뭐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아직 밥도 모르지만. 아무튼 노력은 해 봤을거라는 얘기다. 하지만 악당놈이 바라는 건 그게 아니었다. 고양이로 변해보라고? 왜? 밥이 묻자 악당놈은 심술궂은(진짜 양아치같았다) 미소를 지으며 선언했다. 널 어깨에 얹고 성을 한 바퀴 돌거야. 마을도, 시장도, 골목 어귀도. 그러면 모두가 네가 내 소유인 걸 알겠지. 뻔뻔하기 그지없는 작태에 밥은 어디서부터 악당놈의 오류를 고쳐줘야할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일단 고양이는 누구의 소유가 아니야. 나도 고양이니까 누구의 소유가 아니고. 그리고 굳이 따지자면 난 메이저 도련님의 호위기사지 네 고양이 마스코트가 아니란 말야. 그리고 메이저 주인님 어깨에 올라타지도 않는다고. 밥의 길고 상세한, 사실관계만을 담백하게 짚은 설명 끝에 악당놈이 답했다.
그래서 고양이 언제 돼?
그 얄미운 미소를 보며 밥은 부들부들 떨었다. 어젯밤에 마음을 나누고 몸을 섞은 인간을 쳐도 될까? 아직 온 몸이 쑤시는데 기대만큼 세게 때리지 못하면 어쩌지?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는데 문 밖에서 작게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롭, 로버트...! 바, 아니 로버트 거기 있어요?"
"주인니임!"
반가운 목소리에 밥이 신나게 문 쪽으로 점프했다. 그리고 착지할 뻔 하다 엎어져 굴렀다. 온 몸이 삐그덕거리며 비명을 질러댔다. 찔끔찔끔 흐르는 눈물을 달고 겨우 일어나려고 하는데 거센 손길이 밥을 다시 바닥에 밀쳤다. 아악!
"이... 이게 뭐야!"
"메이저! 애를 이렇게 밀치면,"
"우리 밥이 얼룩고양이가 됐잖아!!!"
"그 사람 별명이 행맨이야. 군대에서나 들을 법한 별명이지 않아? 마크는 말뿐이라고 하길래 난 그런 줄로만 알았는데 아니었어! 마크는 어쩜, 사람이 그리 다정하고 착한지..."
메이저가 쿠키 부스러기를 온 사방에 흩날리며 울분을 토했다. 밥은 엉거주춤하게 앉아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다 마지막 말을 듣고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다. 메이저가 앉은 자리가 엉망진창이 되는 게 하루이틀 일은 아니었지만 오늘은 특히 더 심각했다. 평소같았다면 쿠키는 손이 아니라 이로 부숴먹는 거라고 했겠지만... 밥은 상당히 쫄아 있었다.
아까 메이저는 말 그대로 공포영화에나 나올 법한 비명을 지르며 밥을 질질 끌어냈다. 놀란 밥이 종이인형처럼 질질 끌려가자 당연하게도 악당놈이 메이저를 저지했다. 아마 말리려고 했을 거다. 하지만 메이저는 악당놈이 가까이 다가오자 괴성을 지르며 손에 집히는 모든 걸 집어던지기 시작했다. 꼭 괴수와 사투를 벌이는 주인공처럼. 악을 쓰면서 가까이 오지 말라고 하는 모습이 꼭 주인공 아빠 같았다. 영화였다면 아마 괴수의 일격에 운명을 달리 했겠지만 다행히도 메이저는 성의 안주인이라 살아남았다. 아닌가? 어쩌면 악당놈도 진짜 메이저가 무서웠을지도 모른다. 금방이라도 기절할 것 같은 얼굴로 숨이 넘어가도록 소리를 질렀으니까. 결국 악당놈이 두 손을 들며 둘을 보내준 덕에 둘은 무사히 방을 탈출했다.
"이건, 이건 아니지!!!"
"맞아! 이건 아니야!"
메이저의 격한 일갈에 밥은 부스러기를 모으던 손을 멈추고 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를 끄덕일 때마다 아래가 묵직한 둔통으로 찌릿했다. 하지만 엉덩이가 아프다고 하면 메이저는 들고 있는 숟가락으로 악당놈의 목을 딸 기세였다. 이전의 메이저에게서 그토록 바라던, 하지만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용맹한 모습이었다. 밥은 울컥 밀려오는 감동에 양 손을 모아 가슴에 대었다.와, 우리 주인님 너무 멋져! 밥의 팬보이같은 모습에 메이저의 고개가 조금씩 치켜올라갔다.
"이제까지 네가 날 지켜줬지만 밥, 나도 널 지킬 수 있다고. 너 괴롭히는 악당놈 내가 다 무찔러줄게!!"
"무찔러줘! 악당놈은 나 괴롭히기나 하고!"
"맞아!! 또 뭐라고 했어, 그놈이!"
"토끼라고 했어!! 난 고양인데!!"
"그럴 순 없어! 널 좋아한다면 네 모든 걸 좋아해야지!!"
"맞아!! 날 좋아한다면 내 털무늬까지 좋아해야지!!!"
"털무늬가 줄무늬든 얼룩무늬든!!"
"그건 내가 싫어. 미안."
"... 아! 밥, 밥, 이거 봐!!"
밥의 단호한 거절에 메이저가 눈을 굴리다 급하게 서재 책상 아래로 들어가 뭘 꺼내왔다. 예쁘게 싸인 보자기를 펼쳐보자 작은 망토가 있었다. 고양이나 입을 법한 작은 크기였지만 메이저의 네글리제만큼이나 부드럽고 윤기나는 진녹색 원단에 목 부분에는 밥의 눈보다 커다란 에메랄드가 박혀 있었다.
"너 입으면 딱 예쁠 것 같아서 내가 부탁해서 만들었어."
"정말, 정말 멋져...!"
밥의 수줍은 찬사에 메이저가 발을 굴렀다. 얼른 입어봐, 고양이로 변해 봐! 하지만 밥도 어떻게 고양이로 변하는지 아직 정확히 아는 게 아니었다. 야외 창고에 뭐가 있다는 것만 빼고서는. 그 곳에 뭐가 있는 건 분명했으나 정확한 실험과 검증 단계를 거친 건 아니었다. 거기까지 생각하자 밥의 호기심이 고개를 불쑥 들이밀었다. 그 곳에 가봐야만 했다.
둘은 스텔스 파일럿처럼 조용히 야외 창고에 도착하는 데 성공했다. 악당놈이나 소기름악당이 없어 다행이었다. 실험에 불순물이 개입하는 것만큼 귀찮은 일이 없으니까.
"여기 서 봐. 아닌가? 거기?"
메이저의 시도도 좋았지만 뭔가 부족했다. 단순히 그 자리에 위치한 것만으로 몸이 바뀌었을리가 없었다. 밥은 지난 기억들을 되짚으며 창고 환경을 하나씩 검토하고 쓸모없는 요인들을 지워나갔다.
"여기 앉아보는 건? 으, 여기 너무 더워... 벽에 붙어 있을래."
"앉거나 서는 게 아니었어. 위치가 아니라 다른 촉발되는 매개가 있었는데..."
"피닉스한테 가볼까? 뭔가 알고 있을지도 몰라."
"사건 현장을 기억해보자. 어지럽고, 퀴퀴하고, 정신없었어."
"어, 개미다."
"개미?"
메이저가 구석에 쪼그린 채로 신나게 손짓했다. 밥은 머리를 굴리면서도 메이저의 옆에 착 붙어앉았다. 모서리에서 개미들이 일렬로 지나가고 있었다.
"저 개미들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그러게. 개미는 키우면 재밌을까?"
"저 구멍인가?"
밥은 자기 덩치도 잊고 개미들이 나오는 틈새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인간 눈이 어찌나 쓸모없는지 환한 대낮인데도 보이는 게 하나도 없었다. 허공에 손가락을 넣어서 휘적거리자 뿌연 먼지가 퍼졌다. 코 점막이 간질거리고 머리가 뿌예지며 콧속 깊은 곳에서 재채기가 올라올 때, 밥은 깨달았다.
이거구나!
그순간 밥을 둘러싼 공기가 재채기를 하듯 흔들리고, 밥은 늘 그래왔듯 우아하게 착지했다.
"밥이다!! 어떻게 된거야!!"
"우애애애앵!"
"헛, 그거야?"
"뫄웅!!"
맞아!! 먼지였어!!
"개미구나!!"
메이저가 밥을 안아들고 방방 뛰었다. 밥은 앞발로 열심히 틈새를 가리키다 포기하고 메이저의 팔에 고개를 부볐다. 아무튼 알았으니 된 거 아닐까? 메이저는 잽싸게 밥에게 옷을 입히곤 소리를 질렀다. 너무 귀여워!!
모든 게 거침없어진 메이저는 성 곳곳을 누비며 만나는 모든 이들에게 밥을 사자 새끼를 자랑하듯 들이밀었다. 우리 밥이에요! 너무너무 귀엽죠! 사람들의 반응도 대체로 호의적이어서 둘의 기분은 갈수록 두둥실 떠올랐다. 그렇게 서른 명쯤 지나치다 메이저가 복도에 우뚝 멈춰섰다.
"이건 마크를 꼭 보여줘야겠어."
그건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아, 주인님! 하지만 오늘따라 메이저는 거침없었고 결국 밥은 소기름악당과 불쾌할 정도로 가까이 얼굴을 맞대어야 했다. 으.
"귀엽죠!"
"내 사랑, 뛰었나요? 붉어진 볼이 사랑스러워요."
짐작대로 소기름악당은 밥을 본 체도 안하고 자연스럽게 메이저에게 차를 권했다. 소기름악당이 주는 거면 사약이라도 받을 메이저가 그제야 자리에 앉아 밥을 무릎 위에 내려놓았다.
"당신 고양이도 오랜만이네요. 그 소년은 어디 갔나요? 로버트였나. 오늘도 심부름을 보냈나요?"
마크의 눈이 메이저에서부터 무릎 위의 밥으로 천천히 내려갔다. 갈수록 험악해지는 눈썹은 덤이었다. 밥도 질세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메이저의 무릎 위에서 꼬리를 살랑거렸다.
"어, 음, 아... 네에! 그... 갔어요, 오늘도..."
"그러고 보니 그 고양이와 소년은 도통 같이 있는 모습을 본 적이 없는 것 같군요."
"밥이요? 로버트가요? 아니, 밥이요? 그런가요?"
주인님, 진정해! 밥이 앞발로 메이저의 무릎을 도닥거렸다. 진정이 되기는커녕 앞발만 붙잡혔지만.
"괜찮아요, 내 사랑. 고양이들은 원체 여간 변덕스런 족속이 아니랍니다. 오죽하면 요물이라 불리겠어요."
마크가 가식적인 미소를 지우고 처음 봤던 그 날처럼 밥을 응시했다. 아주 커다랗고 골치아픈 눈엣가시를 보는 것처럼. 악당놈과 똑같은 눈동자로, 아주 다른 눈을 하고.
"그러니 내 사랑, 당신이 그 요물에 홀려 잠시 이지를 잃어버려도 내 품 안에서는 하나도 걱정할 게 없답니다."
저 소기름악당, 내가 누군지 아네?
분명 소기름악당은 모든 걸 알고 있었다.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모든 걸 모르는 척 메이저를 감싸고 있는 게 참 웃겼다. 꼴보기 싫고 좋네. 현명하고 의무에 충실하며 메이저에게 무심했던 그 모든 좋은 사람들을 합쳐도 메이저에게는 고양이 한 마리보다 못했는데 말야.
밥은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자리를 피해주려 했다. 어차피 메이저는 소기름악당에 빠져 밥이 있는지 없는지도 까먹은 것 같았으니까. 이건 밥 나름의 둘을 향한 분명한 선의이자 호의였다.
"그런데 내 사랑. 저 고양이가 두른 천이 어딘가 낯이 익군요. 제가 지난 봄 당신을 위해 특별히 가져온 공단과 비슷한걸요."
"어어... 마크, 저 그게."
"브로치도 지난 사냥대회 때 우승 수상으로 받아 당신께 안겨드린 보석과 꽤나 비슷한 것 같은데... 내 사랑이 보석이 예쁘다고 해서 제가 부상까지 입어가며 쟁취했던, 우리 사랑의 증표 말입니다."
"사, 사랑의 증표요?"
"야오오오옹."
메이저가 밥을 쓰다듬던 손길이 점차 거세졌다. 잘못 보면 밥에게 손에 밴 땀이라도 닦는 것처럼.
"공단의 푸르른 녹색을 보니 우리의 첫 호수 데이트가 떠오르는군요. 제겐 너무나 소중한 추억이라 그 날을 기념해서 당신께 선물했는걸요. 물론 내 사랑도 기억하고 있겠죠?"
"웱."
"밥, 예쁘게 있어야지? 그, 으음."
메이저의 손이 밥을 가렸다. 입을 가리려고 한 것 같은데 눈이 가려졌다는 것만 빼면 별 문제는 없었다.
"보석을 받고 아이처럼 기뻐하던 메이저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해요. 그때 다쳤던 다리가 아직도 가끔 욱신거리지만 당신의 웃는 모습을 볼 수 있다면 나는 뭐든 할 수 있어요."
"...고마워요, 마크!"
"내 사랑도 그렇죠? 아, 다리가..."
"마크!"
메이저가 벌떡 일어났다. 당연히 밥은 굴러떨어지지는 않고 무사히 착지했다. 호위기사에게 그 정도는 문제도 아니다. 문제는 역시 저 소기름악당이다. 진짜, 진짜 재수없는 놈!! 밥은 그놈의 구두에 구멍을 내줄까 고민하다 메이저를 위해 참기로 했다. 하지만 망토를 돌려주기는 싫어. 밥은 뒤에서 들리는 소리는 들리지도 않는단 듯이 도도히 살짝 열린 문틈으로 빠져나갔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망토는 하나도 안 편했다. 천은 털을 눌러 답답했고 목에서 절그럭거리는 보석은 돌덩이처럼 무거웠다. 그래도 밥은 열심히 돌아다녔다. 복도도, 부엌도, 바깥 창고도, 로비와 둥그렇게 올라가는 계단도, 악당놈이 낮이면 눌러앉아있는 서재도 갔다! 슬슬 늘어지는 몸뚱이를 붙들고 침실도 갔다. 그러고 나니 이제 갈 데가 없었다. 뭐, 딱히 만날 사람은 없지만, 만나서 보여줄 것도 없지만 이상하게 기분이 좋지 않았다. 정원까지 나와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이 귀찮은 거 그냥 머리만 빠져나갈까 고민하고 있는데 저 멀리서 반가운 냄새가 났다.
"우에애애애애앵!"
밥은 절그럭절그럭 열심히 소리를 내며 뛰어갔다. 바람에 몸이 들썩일 때마다 망토가 팔락거리는 것도 이번엔 마음에 들었다. 아마 커다란 말처럼 멋지게 보일지도 몰라! 밥은 가슴을 잔뜩 부풀리며 고대하던 사람 앞에 섰다. 꼬리를 바짝 세운채로.
"그게 뭐야."
어, 이게 아닌데.
"이거 마크 세러신 거 아냐? 그 인간이 이거 구해오라고 날 얼마나 들들 볶았는데! 이 돌멩인 또 뭐야. 메이저 준다고 상인 네 명을 갈아치운 그거네."
한참이나 콩닥거렸던 가슴이 차갑게 식어 쪼그라들었다. 밥의 둥실둥실 부풀었던 마음도. 악당놈은 인상을 팍 찌푸리며 밥에게 마지막 쐐기를 박았다.
"그거 하지 마. 하나도 안 어울려."
악당놈이 주저앉아 자기 무릎을 툭툭 쳤다. 하나도 안 어울린다고 말해 놓곤. 밥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 꼬리를 바닥에 팡팡 쳤다. 메이저에게 돌아갈까 싶었지만 내키지 않았다. 다들 예쁘다고 했는데 악당놈은 왜 그럴까? 시위라도 하듯 바닥에 딱 붙어있는 밥을 보며 악당놈이 웃음을 터트리곤 일어섰다.
"진짜 손 많이 가는 베이비네."
그런 말이나 하고선 성큼 다가와 밥을 낚아채갔다. 왜? 안 예쁘다며! 있는 힘껏 몸부림을 쳤지만 악당놈은 밥의 엉덩이를 톡톡 두드리며 되도 않는 훈계나 했다. 진짜 싫다. 갑자기 모든 게 싫어졌다. 망토도 싫고 보석도 싫어. 악당놈은 더 싫어. 손 콱 물고 도망갈거야! 얼룩고양이 소리나 듣게 만들고, 망토도 안 어울린다고 하고.
"넌 먼지에 푹 파묻힌 모습일 때가 더 예뻐. 이거 걸리적거리는 거 아니야? 뛰는 거 보니까 불편하겠던데."
뭐, 그렇긴 했다. 맨날 먼지라고 놀렸을 땐 언제고 또 그렇게 말하니까 스르르 기분이 풀리는 것 같...을리가 없지. 고양이란 그렇게 간지러운 말에 홀랑 넘어가는 지조 없는 존재가 아니다.
"이건 주인 돌려주자. 몸도 욱신거릴텐데 이런 거 달고 있으면 더 피곤해."
마크 세러신이 너 때문에 울고 있을 거라고. 골려주고 싶은 건 알겠는데 이만하면 충분히 약올랐을 거야. 가서 낮잠이나 자자. 넌 좀 더 자야해. 나도 그렇고. 자신을 품에 꽉 안고 낮게 조곤조곤 타이르는 목소리가 나쁘지 않았다. 망토에 눌려 있던 목과 등이 산들바람을 기쁘게 맞는 것도 괜찮았다. 밥은 눈 앞에 보이는 손을 살짝 깨물어줄까 고민하다 대신 혀로 살짝 핥아줬다. 인간은 그루밍을 못하니까, 고양이 혀라도 필요하면 하라고.
"착하네. 눈이라도 감고 있어."
그렇게 말하니까 또 갑자기 졸린 듯도 했다. 하지만 자지는 않을 거다. 그냥 눈만 잠깐 감고 있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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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깝게도 소기름악당이 보석과 천을 돌려받는 광경은 보지 못했다. 역시 너무 쉽게 돌려준 것 같아 속이 쓰렸다. 사악한 놈, 나쁜 놈, 주인님을 채간 불한당같은 놈! 하지만 밥의 궁시렁거림은 악당놈의 손에 들린 새 선물을 보자마자 싹 잊혀졌다.
"이게 더 잘 어울려."
오묘한 색의 리본이었다. 이렇게 보면 초록색인데 저렇게 보면 파란색이고. 밥은 한참이나 고개를 옆으로 흔들며 악당놈의 손에 담긴 선물을 구경했다. 크기도 딱 알맞고 아무리 뛰어도 귀찮을 정도로 흔들리지도 않을 것 같았다. 딱 기분이 좋을 정도로만 옆에서 살랑이겠지.
"이것도 귀한 거야. 내가 하사받은 망토를 좀 잘랐어. 이거 들키면 나 반역죄로 잡혀간다?"
"무엥...."
"너만 조용히 하면 안 잡혀가. 우린 이제 공범이야. 같이 안 잡히던가, 같이 잡혀가던가."
악당놈은 이런 순간까지도 악당놈다웠다. 제이크 세러신, 기사단장, 행맨, 악당놈. 뭐가 진짜 모습이지? 하지만 뭐든 악당놈이 보여주는 모습이 나쁘지 않았다. 밥은 악당놈의 손 앞에 앉아 고개를 내밀었다. 다가오는 손길은 답지 않게 조심스럽고 섬세했다.
"예쁘다."
그거면 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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텀 너무 길게 안하려고 하는데 이게 최선이다 습습... 그래도 완결낼테니 걱정안해도됨
늘 재밌게 읽어줘서 고맙조
노곤해 늘어진 몸 위로 따뜻한 공기가 간지럽게 떠다녔다. 부드럽게 몸을 쓰다듬던 손길은 좋지만 지금은 조금만 더 자고 싶었다. 밥은 몸을 웅크려 이불 속으로 숨어들었다.
"나도 안 깨우고 싶은데 너 뭐라도 먹어야 해."
웃음기 담긴 낮은 목소리가 꼭 노래같았다. 듣기 좋아 품에 파고드니 다시 뜨끈한 감촉이 온 몸을 감쌌다. 머리를 살살 쓸어주는손을 따라 고개를 들려는데, 귓가에 속삭이는 허밍을 따라 목울대를 울리려는데... 귀에 들리는 건 감기걸린 쥐가 찍찍거리는 듯한 소음이었다! 밥은 호위기사의 본능을 발휘해 재빨리 몸을 곤두세웠다. 물론 온몸을 강타하는 통증에 바로 다시 엎어졌지만.
"일어나지도 못하겠어? 품에 안고 먹여줘야 하나?"
진짜 베이비가 따로 없네. 큭큭거리는 웃음이 얄미워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올리자 눈 앞에 머리가 조금 삐친 채로 웃는 악당놈이 있었다. 입가에 미소를 가득 담고, 아주 사랑스럽다는 눈으로 밥을 보고 있었다. 밥은 그 얼굴을 홀린듯이 보다 손에 머리를 꿍 박았다.
"정말, 네가 고양이야? 그럼 아- 해봐."
"아..."
내가 고양이지 그럼 뭐람. 밥이 눈을 비비며 궁시렁거리는 동안 악당놈, 아니 제이크는 스프를 입에 넣어주고 잡초만큼 쓴 사탕에 물까지 먹였다. 아침에는 메이저 주인님이 마시는 꿀탄 우유를 같이 먹어야 하는데. 그건 하나도 안 쓴데. 그렇게 말했다 혀가 얼얼해질 만큼 단 입맞춤을 받았다. 그건 좋았다.
밥은 메이저 도련님의 정식 호위기사로 세상의 이치를 꿰뚫어보는 이지와 호위기사로서의 충성심을 두루 갖춘 품위있는 고양이었다. 그런 밥에게 악당놈은 뻔뻔하게도 말도 안 되는 요구를 들이밀었다.
"다시 돌아가라니까?"
"니가 원하는 게 뭔진 알겠는데, 내가 그렇게 말할 일은 없어."
악당놈이 원하는 게 단순히 고양이 밥이 보고 싶은 거라면 그렇게 해 줬을 것이다. 뭐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아직 밥도 모르지만. 아무튼 노력은 해 봤을거라는 얘기다. 하지만 악당놈이 바라는 건 그게 아니었다. 고양이로 변해보라고? 왜? 밥이 묻자 악당놈은 심술궂은(진짜 양아치같았다) 미소를 지으며 선언했다. 널 어깨에 얹고 성을 한 바퀴 돌거야. 마을도, 시장도, 골목 어귀도. 그러면 모두가 네가 내 소유인 걸 알겠지. 뻔뻔하기 그지없는 작태에 밥은 어디서부터 악당놈의 오류를 고쳐줘야할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일단 고양이는 누구의 소유가 아니야. 나도 고양이니까 누구의 소유가 아니고. 그리고 굳이 따지자면 난 메이저 도련님의 호위기사지 네 고양이 마스코트가 아니란 말야. 그리고 메이저 주인님 어깨에 올라타지도 않는다고. 밥의 길고 상세한, 사실관계만을 담백하게 짚은 설명 끝에 악당놈이 답했다.
그래서 고양이 언제 돼?
그 얄미운 미소를 보며 밥은 부들부들 떨었다. 어젯밤에 마음을 나누고 몸을 섞은 인간을 쳐도 될까? 아직 온 몸이 쑤시는데 기대만큼 세게 때리지 못하면 어쩌지?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는데 문 밖에서 작게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롭, 로버트...! 바, 아니 로버트 거기 있어요?"
"주인니임!"
반가운 목소리에 밥이 신나게 문 쪽으로 점프했다. 그리고 착지할 뻔 하다 엎어져 굴렀다. 온 몸이 삐그덕거리며 비명을 질러댔다. 찔끔찔끔 흐르는 눈물을 달고 겨우 일어나려고 하는데 거센 손길이 밥을 다시 바닥에 밀쳤다. 아악!
"이... 이게 뭐야!"
"메이저! 애를 이렇게 밀치면,"
"우리 밥이 얼룩고양이가 됐잖아!!!"
"그 사람 별명이 행맨이야. 군대에서나 들을 법한 별명이지 않아? 마크는 말뿐이라고 하길래 난 그런 줄로만 알았는데 아니었어! 마크는 어쩜, 사람이 그리 다정하고 착한지..."
메이저가 쿠키 부스러기를 온 사방에 흩날리며 울분을 토했다. 밥은 엉거주춤하게 앉아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다 마지막 말을 듣고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다. 메이저가 앉은 자리가 엉망진창이 되는 게 하루이틀 일은 아니었지만 오늘은 특히 더 심각했다. 평소같았다면 쿠키는 손이 아니라 이로 부숴먹는 거라고 했겠지만... 밥은 상당히 쫄아 있었다.
아까 메이저는 말 그대로 공포영화에나 나올 법한 비명을 지르며 밥을 질질 끌어냈다. 놀란 밥이 종이인형처럼 질질 끌려가자 당연하게도 악당놈이 메이저를 저지했다. 아마 말리려고 했을 거다. 하지만 메이저는 악당놈이 가까이 다가오자 괴성을 지르며 손에 집히는 모든 걸 집어던지기 시작했다. 꼭 괴수와 사투를 벌이는 주인공처럼. 악을 쓰면서 가까이 오지 말라고 하는 모습이 꼭 주인공 아빠 같았다. 영화였다면 아마 괴수의 일격에 운명을 달리 했겠지만 다행히도 메이저는 성의 안주인이라 살아남았다. 아닌가? 어쩌면 악당놈도 진짜 메이저가 무서웠을지도 모른다. 금방이라도 기절할 것 같은 얼굴로 숨이 넘어가도록 소리를 질렀으니까. 결국 악당놈이 두 손을 들며 둘을 보내준 덕에 둘은 무사히 방을 탈출했다.
"이건, 이건 아니지!!!"
"맞아! 이건 아니야!"
메이저의 격한 일갈에 밥은 부스러기를 모으던 손을 멈추고 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를 끄덕일 때마다 아래가 묵직한 둔통으로 찌릿했다. 하지만 엉덩이가 아프다고 하면 메이저는 들고 있는 숟가락으로 악당놈의 목을 딸 기세였다. 이전의 메이저에게서 그토록 바라던, 하지만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용맹한 모습이었다. 밥은 울컥 밀려오는 감동에 양 손을 모아 가슴에 대었다.와, 우리 주인님 너무 멋져! 밥의 팬보이같은 모습에 메이저의 고개가 조금씩 치켜올라갔다.
"이제까지 네가 날 지켜줬지만 밥, 나도 널 지킬 수 있다고. 너 괴롭히는 악당놈 내가 다 무찔러줄게!!"
"무찔러줘! 악당놈은 나 괴롭히기나 하고!"
"맞아!! 또 뭐라고 했어, 그놈이!"
"토끼라고 했어!! 난 고양인데!!"
"그럴 순 없어! 널 좋아한다면 네 모든 걸 좋아해야지!!"
"맞아!! 날 좋아한다면 내 털무늬까지 좋아해야지!!!"
"털무늬가 줄무늬든 얼룩무늬든!!"
"그건 내가 싫어. 미안."
"... 아! 밥, 밥, 이거 봐!!"
밥의 단호한 거절에 메이저가 눈을 굴리다 급하게 서재 책상 아래로 들어가 뭘 꺼내왔다. 예쁘게 싸인 보자기를 펼쳐보자 작은 망토가 있었다. 고양이나 입을 법한 작은 크기였지만 메이저의 네글리제만큼이나 부드럽고 윤기나는 진녹색 원단에 목 부분에는 밥의 눈보다 커다란 에메랄드가 박혀 있었다.
"너 입으면 딱 예쁠 것 같아서 내가 부탁해서 만들었어."
"정말, 정말 멋져...!"
밥의 수줍은 찬사에 메이저가 발을 굴렀다. 얼른 입어봐, 고양이로 변해 봐! 하지만 밥도 어떻게 고양이로 변하는지 아직 정확히 아는 게 아니었다. 야외 창고에 뭐가 있다는 것만 빼고서는. 그 곳에 뭐가 있는 건 분명했으나 정확한 실험과 검증 단계를 거친 건 아니었다. 거기까지 생각하자 밥의 호기심이 고개를 불쑥 들이밀었다. 그 곳에 가봐야만 했다.
둘은 스텔스 파일럿처럼 조용히 야외 창고에 도착하는 데 성공했다. 악당놈이나 소기름악당이 없어 다행이었다. 실험에 불순물이 개입하는 것만큼 귀찮은 일이 없으니까.
"여기 서 봐. 아닌가? 거기?"
메이저의 시도도 좋았지만 뭔가 부족했다. 단순히 그 자리에 위치한 것만으로 몸이 바뀌었을리가 없었다. 밥은 지난 기억들을 되짚으며 창고 환경을 하나씩 검토하고 쓸모없는 요인들을 지워나갔다.
"여기 앉아보는 건? 으, 여기 너무 더워... 벽에 붙어 있을래."
"앉거나 서는 게 아니었어. 위치가 아니라 다른 촉발되는 매개가 있었는데..."
"피닉스한테 가볼까? 뭔가 알고 있을지도 몰라."
"사건 현장을 기억해보자. 어지럽고, 퀴퀴하고, 정신없었어."
"어, 개미다."
"개미?"
메이저가 구석에 쪼그린 채로 신나게 손짓했다. 밥은 머리를 굴리면서도 메이저의 옆에 착 붙어앉았다. 모서리에서 개미들이 일렬로 지나가고 있었다.
"저 개미들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그러게. 개미는 키우면 재밌을까?"
"저 구멍인가?"
밥은 자기 덩치도 잊고 개미들이 나오는 틈새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인간 눈이 어찌나 쓸모없는지 환한 대낮인데도 보이는 게 하나도 없었다. 허공에 손가락을 넣어서 휘적거리자 뿌연 먼지가 퍼졌다. 코 점막이 간질거리고 머리가 뿌예지며 콧속 깊은 곳에서 재채기가 올라올 때, 밥은 깨달았다.
이거구나!
그순간 밥을 둘러싼 공기가 재채기를 하듯 흔들리고, 밥은 늘 그래왔듯 우아하게 착지했다.
"밥이다!! 어떻게 된거야!!"
"우애애애앵!"
"헛, 그거야?"
"뫄웅!!"
맞아!! 먼지였어!!
"개미구나!!"
메이저가 밥을 안아들고 방방 뛰었다. 밥은 앞발로 열심히 틈새를 가리키다 포기하고 메이저의 팔에 고개를 부볐다. 아무튼 알았으니 된 거 아닐까? 메이저는 잽싸게 밥에게 옷을 입히곤 소리를 질렀다. 너무 귀여워!!
모든 게 거침없어진 메이저는 성 곳곳을 누비며 만나는 모든 이들에게 밥을 사자 새끼를 자랑하듯 들이밀었다. 우리 밥이에요! 너무너무 귀엽죠! 사람들의 반응도 대체로 호의적이어서 둘의 기분은 갈수록 두둥실 떠올랐다. 그렇게 서른 명쯤 지나치다 메이저가 복도에 우뚝 멈춰섰다.
"이건 마크를 꼭 보여줘야겠어."
그건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아, 주인님! 하지만 오늘따라 메이저는 거침없었고 결국 밥은 소기름악당과 불쾌할 정도로 가까이 얼굴을 맞대어야 했다. 으.
"귀엽죠!"
"내 사랑, 뛰었나요? 붉어진 볼이 사랑스러워요."
짐작대로 소기름악당은 밥을 본 체도 안하고 자연스럽게 메이저에게 차를 권했다. 소기름악당이 주는 거면 사약이라도 받을 메이저가 그제야 자리에 앉아 밥을 무릎 위에 내려놓았다.
"당신 고양이도 오랜만이네요. 그 소년은 어디 갔나요? 로버트였나. 오늘도 심부름을 보냈나요?"
마크의 눈이 메이저에서부터 무릎 위의 밥으로 천천히 내려갔다. 갈수록 험악해지는 눈썹은 덤이었다. 밥도 질세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메이저의 무릎 위에서 꼬리를 살랑거렸다.
"어, 음, 아... 네에! 그... 갔어요, 오늘도..."
"그러고 보니 그 고양이와 소년은 도통 같이 있는 모습을 본 적이 없는 것 같군요."
"밥이요? 로버트가요? 아니, 밥이요? 그런가요?"
주인님, 진정해! 밥이 앞발로 메이저의 무릎을 도닥거렸다. 진정이 되기는커녕 앞발만 붙잡혔지만.
"괜찮아요, 내 사랑. 고양이들은 원체 여간 변덕스런 족속이 아니랍니다. 오죽하면 요물이라 불리겠어요."
마크가 가식적인 미소를 지우고 처음 봤던 그 날처럼 밥을 응시했다. 아주 커다랗고 골치아픈 눈엣가시를 보는 것처럼. 악당놈과 똑같은 눈동자로, 아주 다른 눈을 하고.
"그러니 내 사랑, 당신이 그 요물에 홀려 잠시 이지를 잃어버려도 내 품 안에서는 하나도 걱정할 게 없답니다."
저 소기름악당, 내가 누군지 아네?
분명 소기름악당은 모든 걸 알고 있었다.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모든 걸 모르는 척 메이저를 감싸고 있는 게 참 웃겼다. 꼴보기 싫고 좋네. 현명하고 의무에 충실하며 메이저에게 무심했던 그 모든 좋은 사람들을 합쳐도 메이저에게는 고양이 한 마리보다 못했는데 말야.
밥은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자리를 피해주려 했다. 어차피 메이저는 소기름악당에 빠져 밥이 있는지 없는지도 까먹은 것 같았으니까. 이건 밥 나름의 둘을 향한 분명한 선의이자 호의였다.
"그런데 내 사랑. 저 고양이가 두른 천이 어딘가 낯이 익군요. 제가 지난 봄 당신을 위해 특별히 가져온 공단과 비슷한걸요."
"어어... 마크, 저 그게."
"브로치도 지난 사냥대회 때 우승 수상으로 받아 당신께 안겨드린 보석과 꽤나 비슷한 것 같은데... 내 사랑이 보석이 예쁘다고 해서 제가 부상까지 입어가며 쟁취했던, 우리 사랑의 증표 말입니다."
"사, 사랑의 증표요?"
"야오오오옹."
메이저가 밥을 쓰다듬던 손길이 점차 거세졌다. 잘못 보면 밥에게 손에 밴 땀이라도 닦는 것처럼.
"공단의 푸르른 녹색을 보니 우리의 첫 호수 데이트가 떠오르는군요. 제겐 너무나 소중한 추억이라 그 날을 기념해서 당신께 선물했는걸요. 물론 내 사랑도 기억하고 있겠죠?"
"웱."
"밥, 예쁘게 있어야지? 그, 으음."
메이저의 손이 밥을 가렸다. 입을 가리려고 한 것 같은데 눈이 가려졌다는 것만 빼면 별 문제는 없었다.
"보석을 받고 아이처럼 기뻐하던 메이저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해요. 그때 다쳤던 다리가 아직도 가끔 욱신거리지만 당신의 웃는 모습을 볼 수 있다면 나는 뭐든 할 수 있어요."
"...고마워요, 마크!"
"내 사랑도 그렇죠? 아, 다리가..."
"마크!"
메이저가 벌떡 일어났다. 당연히 밥은 굴러떨어지지는 않고 무사히 착지했다. 호위기사에게 그 정도는 문제도 아니다. 문제는 역시 저 소기름악당이다. 진짜, 진짜 재수없는 놈!! 밥은 그놈의 구두에 구멍을 내줄까 고민하다 메이저를 위해 참기로 했다. 하지만 망토를 돌려주기는 싫어. 밥은 뒤에서 들리는 소리는 들리지도 않는단 듯이 도도히 살짝 열린 문틈으로 빠져나갔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망토는 하나도 안 편했다. 천은 털을 눌러 답답했고 목에서 절그럭거리는 보석은 돌덩이처럼 무거웠다. 그래도 밥은 열심히 돌아다녔다. 복도도, 부엌도, 바깥 창고도, 로비와 둥그렇게 올라가는 계단도, 악당놈이 낮이면 눌러앉아있는 서재도 갔다! 슬슬 늘어지는 몸뚱이를 붙들고 침실도 갔다. 그러고 나니 이제 갈 데가 없었다. 뭐, 딱히 만날 사람은 없지만, 만나서 보여줄 것도 없지만 이상하게 기분이 좋지 않았다. 정원까지 나와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이 귀찮은 거 그냥 머리만 빠져나갈까 고민하고 있는데 저 멀리서 반가운 냄새가 났다.
"우에애애애애앵!"
밥은 절그럭절그럭 열심히 소리를 내며 뛰어갔다. 바람에 몸이 들썩일 때마다 망토가 팔락거리는 것도 이번엔 마음에 들었다. 아마 커다란 말처럼 멋지게 보일지도 몰라! 밥은 가슴을 잔뜩 부풀리며 고대하던 사람 앞에 섰다. 꼬리를 바짝 세운채로.
"그게 뭐야."
어, 이게 아닌데.
"이거 마크 세러신 거 아냐? 그 인간이 이거 구해오라고 날 얼마나 들들 볶았는데! 이 돌멩인 또 뭐야. 메이저 준다고 상인 네 명을 갈아치운 그거네."
한참이나 콩닥거렸던 가슴이 차갑게 식어 쪼그라들었다. 밥의 둥실둥실 부풀었던 마음도. 악당놈은 인상을 팍 찌푸리며 밥에게 마지막 쐐기를 박았다.
"그거 하지 마. 하나도 안 어울려."
악당놈이 주저앉아 자기 무릎을 툭툭 쳤다. 하나도 안 어울린다고 말해 놓곤. 밥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 꼬리를 바닥에 팡팡 쳤다. 메이저에게 돌아갈까 싶었지만 내키지 않았다. 다들 예쁘다고 했는데 악당놈은 왜 그럴까? 시위라도 하듯 바닥에 딱 붙어있는 밥을 보며 악당놈이 웃음을 터트리곤 일어섰다.
"진짜 손 많이 가는 베이비네."
그런 말이나 하고선 성큼 다가와 밥을 낚아채갔다. 왜? 안 예쁘다며! 있는 힘껏 몸부림을 쳤지만 악당놈은 밥의 엉덩이를 톡톡 두드리며 되도 않는 훈계나 했다. 진짜 싫다. 갑자기 모든 게 싫어졌다. 망토도 싫고 보석도 싫어. 악당놈은 더 싫어. 손 콱 물고 도망갈거야! 얼룩고양이 소리나 듣게 만들고, 망토도 안 어울린다고 하고.
"넌 먼지에 푹 파묻힌 모습일 때가 더 예뻐. 이거 걸리적거리는 거 아니야? 뛰는 거 보니까 불편하겠던데."
뭐, 그렇긴 했다. 맨날 먼지라고 놀렸을 땐 언제고 또 그렇게 말하니까 스르르 기분이 풀리는 것 같...을리가 없지. 고양이란 그렇게 간지러운 말에 홀랑 넘어가는 지조 없는 존재가 아니다.
"이건 주인 돌려주자. 몸도 욱신거릴텐데 이런 거 달고 있으면 더 피곤해."
마크 세러신이 너 때문에 울고 있을 거라고. 골려주고 싶은 건 알겠는데 이만하면 충분히 약올랐을 거야. 가서 낮잠이나 자자. 넌 좀 더 자야해. 나도 그렇고. 자신을 품에 꽉 안고 낮게 조곤조곤 타이르는 목소리가 나쁘지 않았다. 망토에 눌려 있던 목과 등이 산들바람을 기쁘게 맞는 것도 괜찮았다. 밥은 눈 앞에 보이는 손을 살짝 깨물어줄까 고민하다 대신 혀로 살짝 핥아줬다. 인간은 그루밍을 못하니까, 고양이 혀라도 필요하면 하라고.
"착하네. 눈이라도 감고 있어."
그렇게 말하니까 또 갑자기 졸린 듯도 했다. 하지만 자지는 않을 거다. 그냥 눈만 잠깐 감고 있어야지.
-
안타깝게도 소기름악당이 보석과 천을 돌려받는 광경은 보지 못했다. 역시 너무 쉽게 돌려준 것 같아 속이 쓰렸다. 사악한 놈, 나쁜 놈, 주인님을 채간 불한당같은 놈! 하지만 밥의 궁시렁거림은 악당놈의 손에 들린 새 선물을 보자마자 싹 잊혀졌다.
"이게 더 잘 어울려."
오묘한 색의 리본이었다. 이렇게 보면 초록색인데 저렇게 보면 파란색이고. 밥은 한참이나 고개를 옆으로 흔들며 악당놈의 손에 담긴 선물을 구경했다. 크기도 딱 알맞고 아무리 뛰어도 귀찮을 정도로 흔들리지도 않을 것 같았다. 딱 기분이 좋을 정도로만 옆에서 살랑이겠지.
"이것도 귀한 거야. 내가 하사받은 망토를 좀 잘랐어. 이거 들키면 나 반역죄로 잡혀간다?"
"무엥...."
"너만 조용히 하면 안 잡혀가. 우린 이제 공범이야. 같이 안 잡히던가, 같이 잡혀가던가."
악당놈은 이런 순간까지도 악당놈다웠다. 제이크 세러신, 기사단장, 행맨, 악당놈. 뭐가 진짜 모습이지? 하지만 뭐든 악당놈이 보여주는 모습이 나쁘지 않았다. 밥은 악당놈의 손 앞에 앉아 고개를 내밀었다. 다가오는 손길은 답지 않게 조심스럽고 섬세했다.
"예쁘다."
그거면 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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텀 너무 길게 안하려고 하는데 이게 최선이다 습습... 그래도 완결낼테니 걱정안해도됨
늘 재밌게 읽어줘서 고맙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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