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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25 2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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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못 및 날조주의







태섭이 마지막 경기를 하고 돌아간 후, 공항에서 나름대로의 찐한 작별을 하고 나서 대만은 바로 시즌 경기를 이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올스타전이 열렸고 두 사람은 오랜만에 코트에서 다시 만났다. 가족과 함께 왔던 태섭은 이틀의 행사 일정을 마치고 곧바로 제주로 돌아갔다. 대만은 아쉬워했지만, 현재 대만의 팀이 꽤 좋은 성적을 내고 있었기에 태섭은 지체하지 않았다.

공항에서 대만의 배웅을 받으며 태섭은 대만에게 당신의 팀이 우승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대만은 내내 태섭의 등짝에 달라붙어 왜 이렇게 빨리 돌아가야 하는지, 곁에서 날 응원해 줄 수 없는지, 애교인지 어리광인지 모를 것을 잔뜩 부렸다. 그래서 처음에는 그를 달래기 위해 꺼낸 말이었다.

막상 말을 꺼내고 났더니 정말로 우승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태섭은 내친김에 이번 시즌의 트로피를 전부 쓸어오면 어떻겠냐고, 갑작스러운 승리 욕구를 불태웠다. 제법 진지한 모습으로 그랬다. 나는 못했으니, 그의 팀이라도 좋은 성적을 냈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다. 솔직한 감정을 드러냈더니 간만에 대만의 눈동자에서 불꽃이 타올랐다.

그의 머릿속에는 정규 리그 우승 트로피와 챔피언 트로피를 양손에 들고 감격에 젖은 태섭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리고 제 몸만 한 트로피를 끌어안고 있는 태섭을 쏙 빼닮은 제 딸의 모습까지도. 세상에 그보다 더 감격스러운 일이 또 있을까. 게다가 태섭의 가족들이 모두 축하해주는 분위기에서라면, 제가 계획하고 있는 것도 조금 더 수월하게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정대만은 시즌이 모두 마무리되고 난 후 태섭에게 청혼 할 예정이다. 트로피를 하나도 아니고 두 개나 들고 간다면 모두 두 팔을 벌려 대만을 환영해 줄 것만 같단 생각이 든다. 급기야 양 볼에 태섭과 태은의 뽀뽀를 받는 것까지 상상하고 나서, 대만은 태섭에게 꼭 그러겠다고 새끼손가락을 걸고 약속했다.

물론 혼자서 해낼 수 있는 일은 아니긴 했으나, 대만은 꼭 해내고야 말겠다고 다짐했다. 게다가 그의 팀은 언제나 우승 후보 중 하나로 손꼽히기도 했고. 작년에는 안타깝게 모두 문턱에서 고배를 마셔야 했지만.

농구 코트에 들어서면 늘 그랬지만 대만은 더욱 열과 성을 다해 경기에 임했다. 정규 리그는 안타깝게도 2위에 머물렀다. 대만은 태섭, 태은과의 연락도 미루고 연습에 매진했다. 플레이오프에서 단 두 개의 경기에 모든 걸 불태울 것처럼 경기를 치렀고 치열한 접전 끝에 결국 챔피언은 대만의 팀에게 돌아갔다.

마지막 경기가 있던 날 대만은 경기 최고 득점을 기록했다. 신들린 3점 슛 덕분이었다. 아라의 커피숍이 바빠져 경기장에는 직접 갈 수 없을 거라고 하고선 몰래 경기장을 찾은 태섭은 적잖이 놀랐다. 언젠가, 절대 뛰어넘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강팀과 겨뤘던, 그와 함께 뛰었던 코트가 생각났다.

팀의 우승이 결정되자마자 대만은 어딘가를 향해 주먹을 불끈 쥐어 내밀었다. 그곳에는 당연하게도 태섭이 있었다. 못 온다고 한데다 모자까지 푹 눌러쓰고 왔는데, 언제 눈치챘지. 태섭은 야구모자를 더 꾹 눌러썼다. 그날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에서 저녁 먹을 계획은 10초 만에 사라지고, 태섭은 대만의 집에서 새벽까지 도파민이 넘쳐흐르는 대만을 받아내야만 했다.

정규 리그 2위에, 시즌 챔피언으로 모든 시즌이 마무리되자 대만은 곧장 제주도로 향했다. 그에게는 한 달이 조금 넘는 휴식이 주어졌는데, 비록 시즌 MVP는 되지 못했지만, 마지막 경기 승리의 주역이었던 포상으로 한 달에서 일주일이라는 추가 기간을 더 받았다. -대만의 마지막 경기를 보러 왔던 태섭은 경기 이틀 후 먼저 제주로 돌아갔다.-

대만은 제주도에 지난번과 같은 호텔을 예약하며 생각했다. 이번에는 전세든 뭐든 꼭 제주도에 살 집을 구해야겠다고. 그냥 태섭이, 태은이랑 같이 살 집을 사버리면 안 되나. 그런 생각도 했지만, 혼자 섣불리 결정한 일은 아니니 꾹 눌러 참았다. 근데 그렇다고 집을 사지 못할 이유도 없는데.

제주에 도착해 대만은 제일 먼저 렌터카를 빌리고 태섭에게 전화를 걸었다. 짧은 안부를 주고받고, 커피숍을 향해 운전하다가 대만이 충동적으로 말했다. 나 차랑 집 사도 돼? 너무 일상적으로 나온 물음에 태섭이 되물었다. 뭘 사요? 내 차랑, 너 그리고 태은이랑 같이 살 집.

잠시 정적이 흘렀다. 푸핫, 웃음소리가 들렸다. 왜, 왜 웃어. 태섭이 웃음기를 가득 머금고 말했다. 선배는 정말 내 예상을 한 치도 벗어나지 않네요. 뭐, 뭐. 태섭은 대만이 제주에 오기 전, 왠지 이번에 오면 차와 집 얘기를 꺼낼 것만 같았더란다. 그래도 선배 성격에 오래 참았네요. 덧붙이는 말에 대만은 딱히 반박하지 못하는 대신 말했다. 차는 대형 SUV가 좋을 것 같고 집은, 방 몇 칸이 좋아? 적어도 세 칸은 있어야 할 것 같지?

너무 당연하게 함께 살 집을 이야기하는 대만에게 태섭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괜히 부끄러워 입술만 꾹 물었다. 사실 당장 함께 살 생각은 하지 못했는데, 이렇게 갑자기? 싶기는 했으나 가슴이 뛰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엄마한테 뭐라고 말해야 하지.

태섭이 적잖게 걱정하는 것도 모르고, 대만은 그날 바로 태섭을 끌고 송스커피 근처에 있는 자동차 대리점에 갔다. 태섭은 제 차가 있으니 굳이 사지 않아도 될 것 같다고 뒤늦게 말려봤지만, 대만은 조금 더 커다란 차가 좋다며 고집을 부렸다. 몇 마디 더 보태 말리려던 태섭은 어차피 그의 고집을 꺾을 수 없을 것 같아 좋을 대로 하게 두기로 했다.

대만은 통 크게 그 자리에서 일시불로 최신형 SUV를 구입했다. 그러고선 우쭐한 얼굴로 태섭을 보았다. 대체 왜 이렇게 비싸고 큰 차를 사겠다는 건지 모르겠네요. 약간 한숨을 섞어 태섭이 중얼대자, 대만이 진지한 얼굴로 그랬다. 너는 우리 딸이 외동이었으면 좋겠냐? 나는 전혀 아니다. 외동은 외로워. 내가 외동이잖냐. 태섭이 기막혀 입을 벌리고 대만을 보았다.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대만이 말했다. 적어도 둘은 더 낳아줘.

미쳤나 봐, 진짜. 태섭이 인상을 확 쓰고 대만을 노려보았다가 고개를 돌렸다. 얼굴이 자꾸만 달아올랐다. 알았지? 태섭아, 알았지? 대답을 조르는 대만에게서 애써 얼굴을 피하고 몸을 뒤로 물리다가 태섭이 마지못해 말했다. 은퇴하고 나면 생각해 볼게요. 뭣이? 너무 늦어!!

호텔에 묵으며 쓰는 돈이 너무 아깝다는 말로 태섭을 설득한 대만은 기어코 일주일 만에 집을 매매 계약하기에 이르렀다. 처음에는 전세로 집을 구한다고 며칠을 돌아다니더니, 마침 완공된 집이 우리에게 딱 맞춤인 것 같다고 태섭을 끌고 갔다. 지금 사는 동네와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그곳은 단층에 꽤 넓은 단독주택이었는데, 시세보다 조금 싼 가격이었다.

왜 시세보다 싼 가격인지 태섭은 부동산에 물었고, 신혼부부가 살 집이라 그렇다는데요- 얼버무리듯 한 대답에 의심의 눈길을 거두지 않았다. 태섭은 어딘가 불안해서 이 집을 계약하는 건 싫다고 했다. 결국 대만은 사실 알고 보니 이 집을 소유한 주인이 제 부모님과 연이 닿아 있었다고 고백했다. 그래서 이곳에 대만이 들어온다면, 시세보다 싸게 해준다고 했단다.

근데 이렇게 좋은 집을 지어서 왜 본인이 안 산대요? 하는 말에 대만은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본인은 더 좋은데 이미 살고 있으니까. 그냥 직업이야, 직업. 아무튼 여기 좋지? 계약해도 되지? 반짝이는 눈으로, 대단히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대만이 태섭에게 물었다.

태섭은 입술을 꾹 물었다. 괜히 장난기가 올라왔다. 난 같이 산다고 한 적 없는데요? 조금 퉁명스러운 말투에 대만의 눈썹이 아래로 쳐졌다. 아, 왜애. 가족이 다 같이 살아야지, 태섭아. 금세도 침울해진 목소리가 귀여워 태섭이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생각 좀 해볼게요. 대만이 쪼르르 달려와 태섭의 허리에 매달렸다.





송스커피의 휴일, 다 함께 수목원과 분재원, 민속 마을 등 다양한 볼거리가 가득한 공원엘 갔다. 태은은 처음에는 여기저기 바삐 뛰어다니다가 지치면 유모차에 타고, 곧 다시 내려와 또 뛰어다녔다. 두어 시간 동안 몇 번 같은 행동을 반복하던 에너자이저 같던 아이는 점심으로 어른과 같은 크기의 공깃밥을 한 그릇 반이나 먹고 유모차 안에서 곤하게 잠이 들었다.

그래서 수목원 안에서는 두 팀으로 나뉘었다. 태은은 향희와 아라가 데리고 갔고, 태섭은 대만과 동행했다. 배려받는 기분에 조금 머쓱했다. 대만과 손을 잡고 푸른 초목 속을 걷다가, 태섭은 곧 웃음이 터졌다. 그를 웃게 한 것은 저것 좀 봐, 태은이 같다. 자그마한 청설모가 빠르게 나무를 타는 모습을 보며 대만이 한 말이었다.

태섭아, 태섭아. 대만은 계속 태섭을 불렀고 곧잘 실없는 소리를 했다. 어떤 큰 나무는 본인을 닮았다 했고, 어떤 작은 나무는 태섭을 닮았다고 했다. 태섭이 반발했다. 나는 저 나무예요. 태섭은 뻔뻔하게 수목원에서 가장 오래됐다는 나무를 가리켰다. 음, 그렇네. 대만이 진지하게 대답하니 태섭이 조금 멋쩍어졌다. 뭐예요, 하하. 웃어넘기려니 금세 다가온 대만이 짧게 입을 맞춰왔다.

오후 서너 시쯤 공원을 나서 가까운 해수욕장에 갔다. 흔히 보는 바다지만, 평소에 보던 것과는 풍경이 달랐다. 내리 두 시간을 푹 잔 태은은 또다시 신이 나서 모래사장을 뛰어다녔다. 아직 물이 차가워서 물에는 들어가면 안 된다는 말에 아이는 이내 침울한 표정을 했다.

대만이 볼록한 태은의 볼을 엄지와 검지로 꾹 눌렀다. 태섭을 닮아 도톰한 입술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들렸다. 대만이 피식대자, 압빠- 웃찌 마아! 하더니 결국 아이가 더 소리 높여 웃어버렸다. 대만이 신발과 양말을 벗어 던졌다. 바짓단을 두 번 접고 나서는 번쩍 태은을 안아 들었다. 파도가 치는 앞으로 가자 태은이 신이 나 비명을 질렀다.

바다 근처를 한참 뛰어다니다가 지친 대만이 태은을 안고 모래사장에 털퍽 주저앉았다. 양말을 벗겨서 발끝만 물에 닿게 했던 터라, 대만은 티셔츠 끝자락으로 태은의 젖은 발을 닦아주었다. 간지러운지 까륵 웃던 태은이 대만의 어깨 위로 올라갔다. 아빠, 이것 봐. 꺄하하- 해맑은 웃음소리에 태섭이 가까이 다가왔다.


"태은아, 대만 아빠 힘들어. 내려와."


그러자 대만이 우리 아가 완전 솜털 같아서 괜찮은데? 하고는 태은을 양손으로 붙들어 공중에서 왔다 갔다 했다. 또 까르륵 웃던 아이를 다시 품으로 데려와 봉긋한 볼에 몇 번이고 입술을 내렸다. 어느새 세 사람 가까이 온 아라가 제 신발을 엉덩이에 깔고 앉았다.


"두껍아, 두껍아. 헌 집 줄게, 새집 다오."


아라의 까랑까랑한 목소리에 아이가 대만의 복부에 파고들었던 고개를 들었다. 아라가 두껍아, 두껍아. 다시 반복했다. 태은은 토닥토닥 모래를 두드리는 모습을 흥미롭게 지켜보기 시작했다. 태섭이 아라를 따라 스니커즈를 벗어, 태은을 납작이 누른 제 스니커즈 한 짝에 앉혔다.

곧 고사리 같은 손이 모래로 파고들어 두꺼바, 두꺼바- 아라를 흉내 내며 토닥인다. 태섭도 운동화 위에 앉아 셋이 같이 모래를 토닥였다. 대만은 서로의 손을 모래와 함께 만지고 노는 쏙 빼닮은 세 사람을 뿌듯한 얼굴로 보다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향희도 웃음을 머금고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대만은 주변을 둘러보다가 성큼 걸음으로 빠르게 모래사장을 벗어났다. 해수욕장 근처 슈퍼에서 돗자리 하나를 사고, 신문지를 얻었다. 다시 모래사장으로 돌아온 대만은 신문지를 접어 모래로 집을 짓고 있는 세 사람의 엉덩이 아래에 신발 대신 신문지를 깔아주었다. 돗자리는 가장 평평한 자리를 찾아 깔았다.


"어머니, 여기 앉으세요."


조금 멋쩍게 웃던 향희가 주춤대며 돗자리로 걸어왔다.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나란히 돗자리에 앉았다. 몇 미터 떨어진 곳에서 비슷한 얼굴을 한 세 사람이 모래를 두드리며 노래를 불렀다가, 까르륵 웃는다. 제법 하이톤의 아라와 태은의 목소리에, 그보다 저음인 태섭의 목소리가 한데 섞인다. 대만은 그런 세 사람이 귀여워 푸핫- 웃음을 터뜨렸다.

어쩐지 조금 머쓱한 기분이 들어 고개를 돌렸을 때, 조금 수줍은 웃음을 짓고 있는 향희의 얼굴이 보였다. 본래 태섭을 많이 닮긴 했지만, 그 수줍은 웃음조차도 그와 많이 닮은 것 같아 대만은 저도 모르게 물끄러미 향희를 쳐다보았다. 향희가 대만의 시선을 느낀 듯 고개를 돌렸다. 대만은 흠칫 놀라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조개 껍질 묶어~ 그녀의 목에 걸고~"


태섭과 아라가 합창을 하자, 조개 묶거어- 목에 걸고오- 태은이 반박자 정도 뒤에 단어만 뒤따라 했다. 제법 단단해 보이는 아치형의 모래가 쌓인다. 바람이 살짝 불었다. 대만은 목을 가다듬었다. 대만은 태섭을, 그리고 그와 닮은 그의 가족을 사랑했다.


"어머니."


제법 진지한 목소리에 향희가 다시 대만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조금 웃음기를 머금고 있다.


"..저, 음. 저 실은, 허락해 주신다면 태섭이와.. 결혼하고 싶습니다..!"


말을 마치고 대만은 아차 싶어 뒤늦게 무릎을 꿇었다. 향희는 대만에게로 향했던 고개를 다시 앞의 세 사람에게로 고정한 채이다.


"..가, 갑작스럽게 죄송합니다. 아직 태섭이에게는 말 못 했는데.. 조만간 이야기하려고... 어, 반지는 이미 사놨구요. 이번에는 어머니께 먼저 말씀드리고 싶어서요."


허둥대는 대만의 말에도 향희는 아무 대답 없이 세 사람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순서가 틀렸나. 대만은 어색해져 말을 덧붙였다.


"그, 사실 제가.. 중간에 태섭이랑 헤어지는 바람에 태은이가 태어난 걸 몰랐는데. 그러니까 그게 저는.. 예전에도 헤어지고 싶지 않았는데요. 아무튼, 너무 뒤늦게 알아서.. 그동안 태섭이 고생시켜서 정말 죄송합니다. 뒤늦게 나타나서는 또 이렇게 멋대로 굴어서 정말로 죄송해요. 그래도.. 진심으로 태섭이를 사랑.. 사랑합니다."


대만은 한 손으로 그렁해진 눈가를 얼른 닦아냈다. 지난 과거와 태섭을 생각하니 코끝이 찡했다.


"..예전에 태섭이가, 여기 오기 전에 잠깐 다른 마을에 있었어요."


작게 들리는 목소리에 대만이 향희를 향해 목을 쭉 뺐다. 차분한 목소리가 말을 이었다.


"어느 날은 태섭이에게서 편지가 왔었는데.. 임신했다고 하더군요. 사실은 너무 놀랐었어요. 갑자기.. 당황스럽기도 하고. 헤어진 사람의 아이라고 하기에 지우라고 해야 하나 그런 생각도 했었어요. 그런데 사랑하는 사람의 아이라고 낳고 싶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그냥.. 낳게 해주자고 생각했어요."


얼마 전 태섭은 향희의 방을 찾았다. 이부자리를 정리하던 향희가 부드러운 표정으로 태섭을 맞았다. 태섭은 조금 멋쩍게 웃고는 다짜고짜 무릎을 꿇었다. 왜 그래, 태섭아. 향희가 당황하며 태섭의 팔을 붙들었다. 죄송해요, 엄마.

태섭은 향희에게 임신과 아이를 낳아 키우겠다고 결정한 사실을 통보했던, 다소 시일이 지난 일을 죄송하다며 사과했다. 향희는 태섭의 팔을 부드럽게 쓸었다. 태연한 척 말을 하는 태섭의 팔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태섭은 엄마가 제 팔이 떨리고 있는 것을 눈치챈 사실을 알았지만, 차마 팔을 놓을 수 없었다.

대신 그는 입술을 꾹 물고, 작게 숨을 내쉰 다음 말을 이었다. 예전에 대만과 사귀고 헤어졌던 것, 한국으로 돌아와 잠깐 다시 만났다가 임신을 한 것. 그에게는 숨기고 아이를 낳았는데 그가 저를 찾아 제주도로 오게 되었고, 지금은 다시 서로에게 좋은 감정을 느끼게 된 것까지. 최대한 간략하게 설명했지만, 엄마에게 연애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는 것은 낯간지러웠다.

향희는 가만히 태섭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고요하게 물었다.


'그 사람을, 사랑하니?'


쑥스럽기도 하고, 조금 민망한 기분에 태섭은 고개를 숙이고 작게 대답했다.


'...사랑..해요.'
'그럼 됐어.'
'네?'
'사랑하면 됐어, 태섭아. 괜찮아.'
'...엄마.'


향희가 태섭의 손을 잡았다. 땀이 흠뻑 배어 있었다. 향희는 긴장한 아들의 모습이 귀여워 조금 웃고, 양손으로 태섭의 손을 감싸 쥐었다.


'그 사람도 널 사랑하고 너도 그 사람을 사랑하면, 엄마는 괜찮아. 엄마도 좋아.'


모든 것을 포용하듯 부드러운 말투와 표정에 태섭은 가슴이 찡해졌다. 솔직히 말하면 태은을 낳기 전까지만 해도 태섭은 향희가 조금 불편했다. 하지만 임신 사실을 알린 후 향희의 태도는 태섭을 조금이나마 편하게 해주었다. 태은이 태어난 후에는 마법 같을 정도로, 마치 어릴 적과 같이 사이가 좋아졌다고 생각했다.


'태섭아, 넌 잘못한 게 없단다. 눈치 보지 않아도 돼.'
'..죄송해요, 엄마.'


어쩌면 오래도록 듣고 싶었던 말에, 급기야 태섭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향희는 태섭의 등을 연신 쓸어냈다. 울지 마, 괜찮아. 그 말이 오래도록 마음에 남아 태섭은 소리 없이 울었다. 모자는 내내 두 손을 굳게 잡고 있었다.

향희는 눈을 한 번 감았다 떴다. 두 사람이 처음으로 만난 게 태섭이 중학교 때라고 했었나. 한때 그녀가 끝내 넘지 못했던 아들의 철장을, 어쩌면 지금 제 눈앞에 있는 남자가 넘었는지도 모른다. 태섭은 조금 수줍게 말했었다. 아마도 그가 자신의 "첫" 사랑이라고. 처음이란 하나밖에 없어서 어쩔땐 조금 서운하기도 한데, 그래서 유일한 존재이기도 하다고. 어쩌면 평생 함께해야 할 사람인가 봐요.

살며시 웃는 태섭의 얼굴에 향희는 안심했다. 그래서 그녀도, 자신에게는 조금 낯선 어떤 남자의 존재를 한 번 믿어보기로 했다.


"남편과 첫째 아이를 잃고, 내내 저 아이는 내 눈치를 봤어요. 솔직하게 감정을 드러내지 못하는 건 그래서 일지도 몰라요. 내가 서툴러서.. 저 아이를 그렇게 만들었어요. 그래도 나보다는 훨씬 강한 아이예요, 우리 태섭이. 잘 부탁해요. 서툴지만 정이 많고 착한 아이예요."
"어머니를 닮아 강하고 올곧고 따스한 사람이에요, 태섭이는. 많이 사랑하고 많이 아껴주겠습니다."
"..고마워요."


사려 깊은 말에 향희는 조금 수줍게 미소를 지었다. 저야말로 감사합니다, 어머니. 대만도 부끄럽다는 듯 웃었다. 멋쩍은 분위기를 털어내려 향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법 모양이 잡힌 모래성을 보며 과장되게 감탄사를 뱉었다. 태은이가 했니? 다정한 목소리에 의기양양해진 태은이 배를 불뚝 내밀었다. 웅, 할모니! 태니가 해써!!

향희의 품으로 달려들어 태은이 조잘댔다. 대만이 뿌듯한 표정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는 사이, 태섭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돗자리 위에 혼자 있는 대만의 곁으로 다가갔다. 방금 저희 곁으로 다가온 향희의 볼이 조금 발그레했다. 무슨 이야기를 나눴지. 궁금한 마음에 태섭은 대만의 옆에 털썩 앉았다.

대만은 조금 전 향희와의 대화 때문인지 조금 멋쩍은 기분이 들어 흠, 괜히 목을 가다듬었다. 태섭의 얼굴 반대편으로 시선을 두었다. 태섭은 그런 대만을 쳐다보며 조금 더 옆으로 바짝 다가가 앉았다. 어깨가 살짝 닿았다.


"..선배."
"으응?"


저를 부르는 소리에 대만의 고개가 반사적으로 태섭에게로 향했다. 다갈색 눈동자가 저를 빤히 쳐다보고 있다. 왜, 왜. 괜히 멋쩍게 나온 듯한 대꾸에 태섭은 왠지 웃음이 났다. 당황하는 듯한 모습이 귀엽게 느껴졌다. 무슨 말을 했는지 궁금했지만, 딱히 몰라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쁜 얘기를 나눈 것 같은 분위기는 아니었기에.

어느새 자리를 털고 일어난 아라와 태은이 모래사장을 뛰어다녔다. 아라가 도망을 치고 태은이 아라를 붙잡으려는 모양새다. 향희가 손뼉을 치며 태은을 응원했다. 잘한다, 아가. 달려! 문득 귓가에 들리는 향희의 목소리가, 태섭은 마치 오래전 형과 저를 향해 응원을 보내던 것과 겹쳐서 들렸다. 괜히 코 끝이 찡하다.


"고마어요."
"뭐가?"
"..그냥, 여러 가지로요."


이번에는 태섭이 쑥스러워져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대만이 덥석 태섭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나도 고맙다, 태섭아."


짐짓 진지한 목소리에 태섭은 제 어깨 위에 올려진 대만의 손을 잡았다. 둘은 잠시 향희가 있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번에는 아라에게서 도망치던 태은이 꺅꺅 소리를 지르며 향희의 품에 안겨 들었다.


"너는 어머니를 참 많이 닮았어."
"..좀 그렇긴 해요."
"응. 그래서 부드러우면서도 강하고, 배려 있고 올곧아."


저와 향희를 향한 칭찬을 듣던 태섭의 어깨가 안으로 말려들었다. 부끄러워서 귀가 금세 발그레하게 변했다. 대만은 태섭의 관자놀이에 얼른 입을 맞췄다. 태섭아.


"우리, 어머니한테 같이 효도하자. 맛있는 것, 좋은 것 다 해드리고 보여드리고 그러자."


이 사람은 대체 나를 왜 이렇게 사랑해 줄까. 언젠가 그런 의문을 가진 적이 있었다. 왜 나를 좋아할까. 한창 연애하던 시절 선배는 내가 왜 좋아요? 물어보면 대만은 잘 모르겠다고 했다. 처음엔 그냥 거슬렸고 그래서 자꾸 보다 보니 그게 관심이 되고 어느새 좋아하는 감정이 되었다고 했다.

사실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데 장황하거나 거창한 이유는 필요치 않다. 물론 태섭에게는 대만을 좋아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어린 시절, 어떤 관계도 쌓지 않고 혼자가 되고 싶었던 때 대만은 쉽게 태섭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는 늘 그랬다, 태섭의 인생에 있어서. 한 번도 제가 먼저 원했던 적이 없었다. 농구 코트에서 농구공을 가져가던 순간에도, 옥상으로 불러내던 순간에도.

그렇게 원치 않던 순간에 제 인생에 끼어든 남자는 생각보다 오래 태섭의 마음에 머물러 있다. 밀어내도 언제고 옆을 보면 정대만이 있었다.


"...형."
"어, 으응? 엉??"


선배가 아닌 호칭에 대만이 의아해하는 사이, 태섭이 무슨 선언이라도 하듯 말했다.


"사랑해요."
"어? 으으응?! 뭐라고?"


태섭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순식간에 제 가족에게로 갔다. 여전히 귀를 붉게 물들인 채로.


"뭐야? 왜 저래? 송태섭, 형부 울렸어?"


아라가 의아하게 던진 말에 태섭은 제가 도망쳐 온 자리로 고개를 돌렸다. 대만이 넋이 나간 것 같은 얼굴로 눈물을 뚝뚝 흘리고 앉아 있다. 벌어진 입이 움찔거렸다. 풉, 웃음이 터졌다. 태섭이 가까이 다가가 허리를 숙였다. 대만의 볼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선배, 왜 울어요?"


아무것도 모른다는 물음에 대만이 입술을 안으로 감쳐물었다. 어느새 아장아장 태섭을 따라온 태은이 조잘댔다.


"압빠- 대마니 압빠, 울보야?"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끼던 대만이 벌떡 일어나 태섭을 끌어안았다. 바보처럼 울면 안된다고 생각했지만, 자꾸만 눈물이 나왔다.


"..나두, 나두 사랑해. 송태서업-"


그러더니 태섭의 뒤에 있던 태은을 또 끌어당겨 안았다.


"우리 태으니, 태으니도 사랑해애- 허잉.."


대만은 뭉개진 발음으로 말하곤 숫제 엉엉 울어버린다. 그때 '여기 보세요~' 촬영을 알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라가 어느새 가까이 다가와 핸드폰으로 연신 사진을 찍었다. 여기 보세, 여기 보세요~ 여기~ 마구 누르는 셔터에 알림음이 반복해서 울렸다.

대만에게 목을 끌어안긴 태섭이 재빠르게 몸을 빼내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슬라이드를 밀어 카메라를 켜고 태섭도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태은은 대만이 우는 모습을 보고 장난스럽게 웃었다가 대만이 태은의 작은 품에 얼굴을 묻고 사랑해, 우리 가족- 목을 놓으니 조금 겁먹은 듯한 표정을 했다.

태섭이 괜찮아, 태은아- 아빠 봐봐. 웃기지? 하고 다시 버튼을 눌렀다. 그렁그렁한 눈으로 태은이 태섭을 올려다봤다. 아빠 완전 울보다. 그렇지? 태섭이 웃으며 물었더니 아이가 발그레 웃었다. 태섭과 아라의 핸드폰 사진첩에 우는 대만과 울다가 웃는 태은의 얼굴이 점점 쌓였다.

대만이 눈물 가득한 얼굴을 들어 태섭을 올려다보며 또 그랬다. 태섭아, 사랑해애앵- 내가 잘할게. 이 사람 원래 이렇게 목청이 좋았나. 갸우뚱하다가 문득 고개를 돌린 곳에서 향희가 연신 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아라가 형부, 고만 좀 울어요. 지금 진짜 웃긴다고. 울고 웃는 소리가 귓가를 어지럽혔다.

정신없다고 생각하면서도 가슴이 묵직해지는 것을 느꼈다. 한쪽 구석이 간지럽다. 태섭은 지금 이 순간이 싫지 않다. 이렇게 정신없이, 하지만 행복함에 웃고 우는 날들이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이 기다리고 있을까. 핸드폰을 다시 주머니에 넣고 양손을 들어 엄지로 대만의 볼을 쓸어냈다. 뚝! 선배, 그만 울어요. 태섭의 말에 대만이 고개를 끄덕인다.

다시 그렁하게 눈물이 차오르는 눈동자를 보고 태섭은 웃었다. 그의 이마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태은이 나도, 나도. 하고는 대만의 볼에 뾰족이 내민 입술을 눌렀다. 대만이 킁, 콧물을 삼키고 으하하핫! 다소 과장되게 그러나 행복한 듯 웃었다. 나 왜 자꾸 눈물이 나지, 태섭아. 대만의 울먹이는 목소리를 들으며 태섭도 괜히 따라 나온 눈물을 삼켰다.

태섭은 이 푼수 같은 남자에게 가슴 깊은 사랑을 느끼며 손을 꽉 잡았다. 올리브색의 젖은 눈동자가 빤히 저를 쳐다본다. 태섭은 대만에게 말 대신 미소를 짓고,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대만의 품에 안긴 태은이 작은 손으로 대만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대만 아빠는 울보야."


어느새 아라와 향희는 손을 잡고 모래사장을 걷고 있었다. 태섭은 살짝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가슴 속 깊이 행복감을 느꼈다. 대만과 맞잡은 손이 따스했다. 이제 더는 불안하지 않았다.



한때 나는 당신을 사랑하면 할수록 아팠다. 불안하고, 불안정했다.

당신의 다정과 따스함을 느낄수록 마치 폐허 속에 있는 것 같았다. 당신이 나를 믿지 못해 나를 아프게 했을 땐 늪에 빠진 것 같았다. 다시는 나오지 못할 수도 있겠다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모두 자신에게서 비롯한 것이었다. 폐허도 늪도, 모두 내가 만들어 낸 허상이었다. 나의 나약함이 만들어낸 허상.

당신의 존재는 언제나 나를 굳건하게 만든다. 나를 무너뜨리고 아프게 한 적도 여러 번 있었지만, 그렇기에 당신을 생각하면 나는 언제나 강해질 수 있다. 가끔 부딪치고 깨지더라도 괜찮다.

당신 또한 나의 믿음만큼 내 곁에 있어 준다면.

우리는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서로가, 서로를 지탱하며 살아 나갈 수도 있다.

낙원은 멀리 있지 않다.

내가 있고 당신이 있는 한.

당신은 나의 낙원, 그리하여 당신과 함께라면 그곳은 어디든 낙원이다.

아니, 어쩌면 낙원보다 더 좋은.


당신과 함께 할 우리의 낙원에서 오래, 오래도록.









-Fin.






너무 늦었는데 혹시나 기다렸다면 미안하고 그동안 봐줘서고마웠어!💚💜



슬램덩크
대만태섭 미츠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