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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24 21:26



​​“아야야. 살살 좀 해라.”

​“그러니까 조심 좀 하지.”
 

저 녀석 딱 봐도 일부러 아프게 하는 거구만. 생긴 거랑 다르게 포악한 면이 있다. 대만은 투덜대며 티셔츠를 내렸다.
 

​“한창 때 애들이랑 어울려주다 보면 어쩔 수 없다고.”

​“너무 응석 받아주니까 그런 거 아냐?”
 

학생들보다 더 자주 양호실을 찾는 교사가 말이 되냐. 준호는 입버릇처럼 잔소리를 덧붙인다. 
 

“무릎은 괜찮고?”

​“엉.”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지만, 선수 생활을 접은 지 2년이 다 되어가는 데도 여전히 표정이 살짝 어두워진다. 
 

​“그러고보니 태섭이, 아예 들어온다더라.”

​“뭐? 재계약 안됐대?”

​“자세한 건 모르겠고. 치수한테 물어보든지. 귀국 환영 파티나 열자고 해서, 너한테도 얼굴 비추라고 당부했거든.”

​“오지 말래도 갈거야. 누가 보면 원수라도 진 줄 알겠다.”

​“그야 너, 태섭이네 여동생 결혼 때도 빠지고 그 뒤에도 크게 싸웠잖아.”

​“안싸웠거든?”

​“멱살은 잡았지만 싸운 건 아니다?”
 

말문이 막혀 대만은 입을 오므렸다. 그래도 그건, 싸움이라고 치부하기엔 묘한 기억이었기에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야 옆에서 보면 싸운 걸로밖에 안보였겠지.
 

​“아무튼 나중에 문자 보내놓을 테니까 까먹지 말고 얼굴이나 비춰.”
 

​찰싹. 하고 처치가 끝난 등을 두드리는 바람에 대만은 오만상을 찡그리며 일어섰다. 이럴 땐 조금 얄밉달까. 마침 티오가 났을 때 준호가 적절히 부추겨준 덕에 지금의 일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라 기본적으로는 고마운 마음이 있지만 말이다. 오랜만에 한쪽 눈썹 끝이 잔뜩 올라간 녀석의 얼굴을 떠올리니 어쩐지 마음 한 켠이 울렁거려왔다.
 

<왜요, 이 해먹었던 곳 새로 해넣게? 근데 어쩌나, 지금이면 턱까지 나갈 수도 있는데.>
 

뭐가 그렇게 열받았던 건지. 양호실을 나와 복도를 걷다 문득 녀석의 이글거리던 눈이 떠올랐다. 애들처럼 치고 받고 싸울 나이도 아니었는데 왜 그랬나 모르겠다. 
 

“열 받게 하는 재주가 있는 놈이긴 하지.”
 

송태섭이 들으면 기가 막혀 할 소리를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대만은 창고로 향했다.


 

***


 

​“대박, 저거 송태섭 맞는 거 같은데?”

​“뭐야, 누군데.”

​“농구선수, 느바까지 뛰는 완전 네임드.”

​“닮은 사람 아님?”

​​​“아니 근데 유튭이랑 존똑. 맞다니까?”
 

늘 보는 학교 선생님이 조금 튀는 옷만 입어도 몰려드는 나이의 아이들이다. 종례 시간 즈음, 교문 바깥을 커다란 캐리어까지 끌고 온 채로 서성이는 외부인이란 얼마나 흥미로운 일인지. 창문으로 아이들이 조금 몰려드나 싶더니, 이내 경비가 무언가 이야기를 하러 갔고, 문제의 농구 선수를 닮았다는 남자는 정문에서 모습을 감췄다. 잠실 체조 경기장 3층에서도 최애를 면봉에서 사람으로 바꿔준다는 폰카에 남은 인영만이 남아 웅성거림에 활기를 더해주었을 뿐이다.
 

“야, 포카리 뛰어간다, 포카리”

​“존나 잘생기심”

​“아 내 말이 맞다니까, 송태섭 체육 후배잖아”
 

교실마다 난리가 난 것도 모르고, 대만은 성큼성큼 운동장을 지나쳐 교문 바깥으로 나갔다. 난데없이 지금 학교 앞이라니 어이가 없었지만, 무슨 급한 일이라도 생겼나 싶어서 걸음이 빨라졌다.
 

​“잘 지냈어요?”

​“너…, 그 캐리어는 뭔데.”
 

경비에게 쫓겨나 한 10미터 쯤 떨어진 벤치에 앉아있던 태섭은 태연한 얼굴로 대답했다.
 

​“공항에서 오는 길이라.”

​“엥?”

​“오늘 좀 재워주세요. 끝나는 거 몇 시?”
 

자주 연락하는 사이도 아닌 놈이 무턱대고 일하는 곳까지 찾아왔다고 하니 괜히 걱정했던 게 바보같이 느껴졌다. 그야 예의 같은 걸 차릴 사이도 아니고, 재워달라는 놈 굳이 돌려보낼 이유도 딱히 없지만 뜻밖이긴 하다. 2년 만에 다시 보는 주제에 이렇게 넉살이 좋았던가?
 

“집으로 안 가고?”

​“아 그 집은 팔려서. 아직 못 구했어요.”

​“엉? 어머니는 어쩌시고.”

​“새 집으로 들어갔지.”
 

그럼 그 집으로 우선 가면 되지 않나? 하는 당연한 질문이 따르기 전에 태섭이 말을 잇는 게 더 빨랐다.
 

“신혼이셔서 방해하기 좀.”

​“아.”
 

일순 표정관리에 실패한 대만은 헛기침을 하고 얼떨결에 허락을 하고 말았다.
 

​“그래 뭐. 그럼 좀 기다려라. 뭐라도 마시고 있던지.”
 

어머니가 신혼이라니, 자녀들 다 키워놓고 나서야 재혼하신건가? 하는 나름의 추론에 정신이 팔려있다보니 어느새 교무실 앞이다.
 

​“아!”
 

그러고 보니 돈이라면 차고 넘칠 녀석이 호텔은 왜 놔두고? 괘씸한 놈 같으니.
 

​“왜요, 무슨 일이세요, 정쌤?”

​“아뇨, 그냥…… 갑자기 후배가 와서요.”
 

무심결에 큰 소리를 내버린 것이 멋적어 큼큼 거리며 교무실에 들어서니 호기심 어린 시선이 여럿 보였다. 그야 학교 앞을 어슬렁거린다는 정체불명의 남자는 아무래도 잠깐 지나치면서 보는 사람에게도 눈에 띨 만큼 화려한 인상의 남자였기 때문이다.
 

​“아까 수학쌤이 안그래도 누가 정문 앞에 계속 서 있다고 하던데, 정쌤 손님이었어요?”

​“네, 뭐. 고등학교 후뱁니다.”
 

그러자 여지껏 가만 있던 파티션 너머에서 누군가 벌떡 일어났다.
 

“거 혹시 그 미국에서 프로로 뛴다는 송 선수 아입니까?”
 

서울 살이가 10년째인데도 흥분하면 곧잘 사투리가 튀어나오는 분이다. 그러고 보니 이 학교에 대만이 처음 오게 되었을 때에도 팬이라며 한동안 시달렸었지. 대만은 나중에 꼭 사인을 받아주겠다는 약속을 하고서야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농구라는 스포츠가 여기선 비주류다. 대중에게까지 이름이 알려진 선수는 몇 명 없었고, 송태섭은 그나마 꽤 젊은 나이에 외국에서 뛰고 있다는 점이 눈에 띠어서 다른 해외파 선수들과 함께 간혹 언급되는 정도였다.
 

​‘그래도 제법 유명인이구만, 이 자식.’
 

원래대로라면 잔업을 좀 더 할 생각이었지만, 최대한 서둘러 일을 마치고 나서니 밖은 어느새 어둑어둑했다. 송태섭은 아까와 별로 차이가 없는 모습으로 이어폰을 빼며 일어났다. 호텔이라도 잡으면 되지, 고등학교 선배를 찾아와서 다짜고짜 재워달라니. 따지고 싶은 마음이 들다가도 약간 초췌해진 몰골을 보고 있자니 하룻밤 재우는 게 뭐 대수인가 싶어졌다.
 

“하여간, 요령 없이 그러고 기다리고 있을 일이냐. 어디 카페에라도 가 있지.”

​“뭐, 여기도 재밌었어요.”

​“음?”
 

하교길을 나서면서 아까 그 남자를 발견한 학생들이 우르르 몰려와 이것 저것 캐묻고 사인도 받고 셀카도 찍고 인스타에도 인증해서 한바탕 난리가 났었다는 것은,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다.
 

​“저녁은?”

​“일단 좀 씻고 자고 싶은데.”

​“그래, 그럼. 간단히 집에 있는 걸로 먹지 뭐.”
 

집까지는 걸어서 15분. 보통 성인 남자 걸음으론 20분 이상 걸릴 테지만 썩어도 준치라고 남들보다 긴 보폭에 걸음도 빠르다 보니 출퇴근은 가뿐한 편이었다. 대만은 흘끔 옆에서 걷는 태섭을 곁눈질로 바라보았다. 큼지막한 캐리어를 끌고 오르막이나 턱이 있는 길도 잘만 따라오는 걸 보니 과연 현역이다. 그 사이 몸도 더 두꺼워진 것 같았다.
 

“근데 왜 갑자기 국내로 들어오게 된 건데?”

​“응? 아. 준호 선배한테 들었겠네요.”

​“이적할 팀은 정해진 거야?”

​“아직 얘기중이라 확실하진 않아요.”
 

그러고보면 태섭은 자기 얘길 먼저 줄줄 늘어놓는 편은 아니었다. 저쪽에서 재계약이 불발된 건지, 아니면 다른 계기가 있었는지 궁금하긴 하지만 어쩐지 바로 묻기는 껄끄러운 기분이 된다. 원하지 않는 계기로 코트를 뛸 수 없게 되었을 때 얼마나 상심했던가. 더구나 송태섭은…….
 

“이젠 죽을 소린 안하고 사나 보네요.”

​“야, 내가 뭐 얼마나 그랬다고!”

​“말 같지도 않은 소리 해서 열 받았던 생각 나서요.”

​“뭐 그건. 쪽팔리니까 좀 넘어가라 좀.”
 

그래, 송태섭 저 건방진 후배는, 한참 자신이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허덕이고 있던 걸 억지로 끄집어 내서 한 대 패려고 협박했던 놈 아닌가. 지나고 보니 역시 이 놈 말이 맞았어서 재수없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했더랬지. 인생의 첫사랑이자 끝사랑, 농구에 대한 치열한 사랑이 마침내 강제로 끝나버렸던 그 때, 어쩌면 그런 과격한 처방이 있어서 생각보다 훌훌 털어버릴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혼자 사는 집 치곤 너무 넓지 않아요?”
 

현관 안에 들어오자마자 한 바퀴 둘러 본 녀석의 소감이다. 
 

​“혼자 사려고 샀던 집은 아니어서 그렇지 뭐.”

​“음.”
 

눈치 빠른 녀석의 얼굴에 약간 묘한 기색이 스쳤다. 어차피 다 아물어서 더 아프지도 않은데, 남들이 신경쓰는 것이 더 불편했다. 대만은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도 되는 듯 술술 근황을 풀어놓았다.
 

​“결혼 직전까지 갔다가 파혼. 근데 어차피 집안 분들끼리 얘기하다가 자기들끼리 정리한 거라 별로 신경 쓸 필요 없어.”

​“무슨 드라마 같네요.”

​“근데 뭐 나도 그렇게 맘에 안들진 않았거든. 착한 사람이었고. 그쪽도 뭐랄까, 결혼이란 것 자체에 크게 의미를 안두는 타입이더라고.”
 

우리 집안 사람들이 이상하긴 하지. 털털하게 웃으며 대만은 비어 있는 방을 열고 환기부터 시켰다. 짐이 많지 않아서 운동용 매트를 상시로 펼쳐놓고 공이 굴러다니는 방이었다. 특별히 어지럽지 않아도 먼지 때문에 청소기는 한 번 돌려야 할 것 같았다.
 

​“일단 씻어.”
 

이내 말끔해진 태섭이 수건으로 몸을 대충 두른 채로 나와서 이부 자리에 털썩 주저 앉았다. 배는 고프지 않다고 했지만 그래도 손님인데 싶어서 대만은 냉장고에 있던 단백질 드링크를 가져다 놓았다. 식단이라면 평소에도 질릴 만큼 하고 있다. 태섭은 어쩐지 피식 웃음이 났다.
 

​“밥 같은 거 해먹긴 해요?”

​“뭐 인마, 니가 먼저 잠부터 잔다며. 일어나면 뭐든 먹여줄 테니까 불평 금지.”

​“뭐든요?”

​“왜 뭐 먹고 싶은 거라도 있냐?”
 

여기서 ‘선배요.’ 라는 말이라도 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 아무리 생각해도 성적인 의미로 이해해주지도 않을 것이다. 잘해야 카니발리즘 섞인 농담으로 들어서 질색하는 정도겠지. 태섭은 가망 없는 자신의 짝사랑을 비관하며 드러누웠다.
 

​“자고 일어나서 생각할래요.”

​“엉.”
 

아직 이른 저녁이었지만 장거리 비행에, 몇 시간을 밖에서 기다렸으니 피곤할만도 하다. 대만은 방 불을 끄고 나가며 문을 닫았다. 천장을 잠시 바라보던 태섭은 그대로 누워 잠을 청했다. 어째서인지 잠은 오지 않았다.
 

‘진짜 저질렀네.’
 

어쩌자고 이 사람을 찾아왔을까. 무턱대고 얼굴을 보면 뭔가 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기대했던 것과 달리 여전히 가능성은 없고 정대만은 눈치가 없으며 송태섭은 겁쟁이였다. 
 

​‘다들 어떻게 이런 걸 해내는 거야.’
 

뒤척이며 돌아 눕는다. 

한창 시즌 도중이었던 데다가 어머니는 극구 사양하였으므로, 재혼은 예식 없이 혼인 신고만으로 지나갔다. 송아라의 결혼식에서 이것 저것 도와주던 마음씨 좋아보이던 어머니의 회사 동료. 어쩐지 느낌이 쎄하다 싶더라니만, 이미 그때 만난지 한참 되었다는 걸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다. 
 

<이젠 너희 둘 다 안심이니까.>
 

화상 통화로도 수줍게 행복해하는 표정을 감출 수 없었다. 이 집의 대장이 되어야 한다고 이를 악물고 홀로서기를 하려고 애쓰던 시절에는 미처 상상하지 못했던 미래였다. 어쩌면 부채감에서 놓여 자유로워진 것은 어머니 만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마침 구단에서의 계약 기간 종료를 앞두고 있었기 때문에 결단은 순식간에 이뤄졌다.
 

조금 더 솔직해지자.

조금 더 행복해지자.
 

이제는 그래도 될 것 같았을 때 머릿 속에 불현듯 떠올린 얼굴이 이 인간이라니. 자존심 상해 죽을 것 같았지만 취향이 그렇게 생겨먹은 걸 뭐 어쩌란 말인가. 
 

​‘잘생긴 건 여전하네.’
 

학생들 반응만 봐도 대충 어떻게 살고 있을지 눈에 보였다. 예전부터 남녀를 안 가리고 특히 동성들에게 수상할 정도로 인기가 많았던 사람이다. 꺼뭇꺼뭇한 남학생들이 남자 체육 선생을 포카리라고 부르고 있다는 것도 기가 찬 일이다. 그래도 예전엔 여자 운은 별로 없는 편이었는데 지금은 여학생들에게까지 꽤나 사랑받고 있는 것 같았다. ‘한국 프로 농구의 유망주. 발군의 센스와 폭발적인 득점력을 겸비한 스코어러.’ 그런 것보다 화제가 되었던 것이 ‘핏감 쩌는 SM상 국대’ 짤이었다는 거, 아마 저 인간 지금도 모르고 있을 것이다.
 

​‘어떻게든 만나고 나면 방법이 보일 것 같았는데.’
 

방법 같은 건 모르겠고, 그냥 옆에서 같이 지내고 싶다는 원초적 본능 밖에는 확실해진 게 없었다. 구체적으로 그래서 뭘 어떻게 하고 싶은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지만, 그동안 억눌러온 감정은 한 번 흘러넘친 상태로 출렁거려서 다시 주워 담기가 힘들었다. 태섭은 무심코 킁 하고 침구의 냄새를 맡고 잘 세탁된 정갈한 면 냄새에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애를 썼다.


 

***


 

달칵 거리는 소리에 눈을 뜬 대만은 잠결에 화들짝 놀라 상반신을 벌떡 일으켰다. 동시에 어젯밤 태섭을 묵게 했던 일이 떠올라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혼자 사는 집이다 보니, 누군가 다른 사람의 기척에 눈을 뜬다는 것이 낯설었다.
 

“배고파서 깼냐?”

​“일찍 잤잖아요.”
 

좋은 냄새가 난다 싶었는데, 뭘로 만든 건지 모처럼 제대로 된 식사가 차려져 있었다. 그야 최소한의 재료는 준비되어 있었지만 (된장이라든가) 당장 국에 들어간 두부나 애호박은 출처를 알 수 없어서 멍하니 보고 있자니 태섭이 주방 한쪽을 가리켰다.
 

​“아. 편의점에도 간단한 야채는 팔더라구요.”

​“장까지 보고 왔어?”

​“그냥 새벽 운동 간 김에.”

​“뭔, 남의 집에 자러 와서 새벽부터 운동을 가냐. 어휴. 이 자식 이거 몸 딴딴한 거 봐.”
 

질린다는 얼굴로 팔뚝을 더듬는 손에 하마터면 엎지를 뻔한 국을 무사히 내려놓고 태섭은 자기도 모르게 팔에 힘을 주었다.
 

​“얼굴이나 씻고 와요. 밥 퍼 놓을 테니까.”

​“짱이다, 너. 우렁각시 뭐 그런 거 같아.”

“뭐래 짜증나게.”
 

호다닥 욕실로 사라진 대만의 시야에서 자유로워지자, 태섭은 한숨을 깊게 쉰다. 손이 닿았던 곳이 화끈거려서 불에 타는 것 같았다. 얼른 거실로 나가 한쪽에 세워진 전신 거울을 보니 다행히 보기에는 멀쩡했다. 포커페이스라 다행이다. 이게 뭐라고. 애들도 아니고, 이런 걸로 일일히 긴장하고 의식하냐. 거울 속의 자신을 한 대 패주고 싶다가도 좋아하던 대만의 얼굴을 떠올리니 가슴 한 쪽이 간질간질해왔다.
 

아침이란 신기해서 창문을 통해 밝게 햇살이 쏟아지면 사람은 평소의 2배쯤 낙관적이 되곤 한다. 뭘 하고 싶은 지도 모르는 상태로 그저 함께 마주 앉아 밥을 먹고 있을 뿐인데, 송태섭은 꽤 기분이 좋았다. 더구나 대만이 자연스럽게 꺼낸 대화의 주제는 마침 기다리고 있던 것이었다.
 

​“구단이 정해져야 집도 구하겠네.”

​“응, 뭐. 아무래도 그렇죠.”

​“그럼 그때까지 계속 그냥 돌아다닐 거?”
 

태섭은 촉이 좋았다. 어쩐지 이런 흐름으로 가면 생각보다 쉽게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으리란 촉.
 

​“글쎄요. 어머니한테는 호텔에서 지낼 거라고 하긴 했는데.”

​“하루 이틀도 아니고 좀 아깝긴 하지. 뭐 너야 돈 걱정은 이제 없겠다만.”

​“그래도 뭔가 호텔 같은 데는 안정되진 않아서.”

​“그럼 집 구할 때까지 저 방 빌려줄까?”
 

빙고. 
 

​“그래도 돼요? 그럼 나야 땡큐죠.”
 

대만이 이야기를 무를 틈을 주지 않고 얼른 화제를 돌린다.
 

​“참, 귀국 파티 열어준다면서요? 장소 어디로 정한대요?”

​“어. 뭐 그런 건 보통 치수가 주최하니까. 알아보고 연락 주겠지. 이젠 직장 다니는 애들도 많아서 금요일 저녁이나 주말에 보게 되지 않을까?”
 

됐다. 이렇게 얼레벌레. 무작정 찾아온 대만의 집에서 태섭은 캐리어를 풀 수 있게 되었다. 생각지도 못한 수확이다.
 

​‘앞으로 뭘 어떻게 하고 싶은 건지는 아직도 모르겠지만’
 

지금은 일단 일상을 함께 보낼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 마냥 마음에 들었다. 출근 채비를 마친 대만을 배웅하고 괜히 한 번 바깥에 나갔다가 도어락을 열고 안으로 들어와본다. 북산의 14번이라 6314라니, 10대 때 정한 비번이 평생 간다는 게 이런건가 싶어서 괜히 웃음이 났다.

가능성 같은 건 없어도 좋다. 그런 용기를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서 배웠으니까.


 

***


 

​“쌤, 송태섭이랑 친해요?”

​“야, 송태섭이 뭐냐, 송태섭이. 걔가 나이가 몇인데.”
 

​학교에 와보니 애들은 어제 찾아온 손님 얘기로 난리가 났다. 잘생긴 사람 옆에 잘생긴 사람이라고 호들갑을 떨길래 그건 한 명이라고 정정해준 대만은 순식간에 아이들 몇 명에게 둘러쌓였다.
 

​“아 진짜 쌤! 개웃겨. 이거 좀 보세요!”

​“헐 완전 존잘!!”

​“복근 미친”
 

뭘 조잘거리나 했더니 얼굴 바로 앞에 들이댄 휴대폰 안에 송태섭의 이렇고 저런 상탈 사진 같은 게 띄워져 있다. 시합 중에 찍힌 것도 있는 것 같았지만 유니폼도 아닌 게 뭔가의 외국 광고 같아 보이는 것도 있었다.
 

​“아니 몸이 좋긴 하지. 근데 잘생긴 건 아니지 않냐?”

​“쌤 눈 원래 정수리에 달려서 여친 없잖아요”

​“야, 넌 그 얘기가 왜 나와.”

​“헐 진짜 없나 봐.”

​“쌤, 송태섭 여자친구 있어요?”

​“아니 그니까, 걔는 어른이라고. 뭐 개 이름 부르듯이 그럼 못 쓰지.”
 

중학생들이랑 진심으로 주거니 받거니 하는 사이 쉬는 시간을 알리는 종이 쳤다. 언제 그랬냐는 듯 매점으로 달려가는 모습을 보며 팔짱을 낀다. 인스타인지 뭔지. 애들이랑 같이 찍은 영상도 몇 개인가 강제 시청 당하고 나니 새삼 고등학생 시절의 태섭이 떠올랐다. 그 때 이 녀석이 수도 없이 고백했다가 차인 이야기를 풀면 정말 재밌을 것 같은데. 앞으로 송태섭이 하는 꼬라지 봐서 풀지 말지 정해야겠다고 속으로 생각하는 대만이었다.
 

그렇게 정대만과 송태섭, 동상이몽의 동거가 시작되었다.



태섭대만 태대 료미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