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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17 20:20
*ㅈㅇㅁㅇ
+약간 ㅅㅈ
*초반 카프카의 변신 차용
어느날 아침 아이스는 마음에 걸리는 꿈에서 깨어났을 때 자신이 침대 속에서 한 마리의 고양이로 변한 것을 깨달았다.
그는 굽은 등을 옆으로 누이고 고개를 약간 숙인 채 이불 위에 고양이 특유의 쌕쌕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둥근 몸에 비해 긴 잿빛 꼬리가 무의식중에 살랑거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어떻게 된 일일까 아이스는 생각했다.
꿈은 아니었다.
지금 시야로 보이는 너무나 큰 자신의 방은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낯익은 모습이었다.
새벽까지 보고 있던 교본들이 흩어져 있는 책상 위쪽에는 늘 착용하던 손목시계가 보였다.
아이스는 창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빈틈없이 깨끗한 창문에는 빗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날씨가 음산한 탓인지 이 기묘한 상황 탓인지 아이스는 기분이 불쾌해졌다.
아이스는 침대 옆 탁상시계를 보았다.
벌써 7시였다.
아침 7시 정각을 알려주고 있었다. 알람을 6시에 맞춰 놓았고 분명 알람이 울렸을 텐데 그 소리를 듣고도 어떻게 계속 잠을 잘 수 있었을까.
평소 깊게 잠드는 편은 아니였을텐데. 아이스는 침대 위에서 몸을 일으키고는 방에 딸린 욕실로 들어가 세면대 위로 뛰어올라갔다. 거울에 비친 모습은 여타 고양이와 다른 옅은 잿빛 눈동자의 반질반질 윤이 나는 짙은 잿빛 털 일색의 그것이었다.
“아이스 무슨 일 있어?”
이른 이 시간에 문 밖에서 슬라이더의 목소리가 들렸다.
‘별일 없다’고 안심을 시키려했지만 그런 짧은 문장대신 고양이의 울음 비슷한 것이 목구멍에서 울려나왔다.
이 상황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그 짧은 순간 아이스는 날카로운 발톱을 숨기고 있는 뭉텅한 발로 창밖으로 뛰어나갔다. 열린 창문 사이로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 슬라이더의 뒷모습이 보였다. 쓸데없는 걱정을 하지 않기를 바라며 아이스는 관사를 빠져나갔다.
이른 아침, 부슬부슬 내리는 빗속을 걸으면서도 아이스는 혼란스러웠다.
아직 봐야할 교본들과 미처 끝맺지 못한 과제들, 이틀 뒤에는 다시 비행훈련을 할 텐데. 머리 속에는 온통 탑건 수석을 지키기 위해 해야 할 일들로 가득한데 자신은 지금 회색 고양이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어디로 향할지 모르는 채 계속해서 앞으로 앞으로 나가는 도중 기지에 웬 고양이냐고 호기심을 보이며 잡으려는 사람들 때문에 신경이 곤두서서 이리저리 피해 다녔다.
가랑비에 몸이 젖어가는 것도 모르고 한나절을 걷다보니 사람들의 발걸음이 드문 기지의 어느 지저분한 격납고에서 갑자기 오른 열에 고통스럽게 끙끙거리는 자신이 있었다. 몇 번이나 목소리를 내어보았지만 낮게 울리는 동물의 울음소리라 기분이 좋지 않아 소리를 내려는 시도를 포기했다.
소리를 내려고 노력할수록 지금 고양이가 되어버렸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이 짜증스럽기만 했다.
낡고 지저분한 격납고라도 언제든 정비사들이 드나들 수 있는 장소라 자리를 옮기고 싶었지만 열이 오른 작은 몸뚱이는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자꾸만 감기는 눈을 애써 뜨고 있는 것조차 벅찬 상황 속에 가까이 사람이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신경이 극도로 곤두섰다.
오늘 만난 사람들은 죄다 자신을 피하거나 잡으려고 드는 둘 중 하나의 반응이었으니까.
“고양이?”
어쩐지 귀에 익숙한 목소리.
“다 젖었잖아.”
밤의 습성을 가진 고양이의 눈동자에 비친 것은 낯익은 인물이었다.
“힘이 없네.”
조심스럽게 다가오는 손을 보다 얼굴로 시선을 돌리자 걱정스러운 듯 봄날의 갓 돋은 여린 잎을 연상케 하는 맑은 눈동자가 보였다.
“아픈거야?”
마치 상대가 자신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하는 것처럼 걱정하는 투에 아이스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따뜻함이 깃 든 손으로 경계심을 풀려고 천천히 쓰다듬는 손길과 안쓰러워하는 표정은, 눈 앞의 인물에게 처음 보는 것이라 어쩐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지금 맞은편에 쭈그리고 앉아 눈을 맞추고 있는 남자는 아이스에게 결코 이런 얼굴을 보여주지 않았을 것이 분명했으니까.
“야옹아, 이리 와~”
한 손으로 우산을 들고 있다가 무슨 생각인지 한편으로 밀어두고 열에 들떠 웅크리고 있는 아이스의 몸을 안았다. 빠르게 점프수트 지퍼를 열어 비에 젖어 축축한 아이스를 그 안으로 밀어넣고는 천천히 일어서서 낡은 격납고를 벗어났다. 심장이 두근거리는 소리가 따뜻한 체온과 함께 예민한 귓가에 울렸다.
「....」
아이스는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어째서 인적이 드문 낡고 지저분한 격납고에 찾아왔던 것일까.
흐린 날씨에 제대로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격납고의 시커멓게 드리운 그림자에 가려진 고양이인 자신의 존재를 알아챌 리가 없었을텐데. 망설임 없이 다가와 내민 손길은 다정하고 조심스럽기만 했다. 이해할 수 없는 현실에 짜증이 치밀어 오르고 열에 들떠 불안했던 감정은 천천히 수그러들고 아이스는 그렇게 얌전히 품속에 안겨있었다.
“매버릭 혹시 아이스 봤...응?? 너 임신했냐?”
“씨발 슬라이더 죽을래?”
“미안미안 농담. 안에 뭐야? 뭔데 불룩 한거냐?”
반쯤 내린 지퍼 안에 둥글게 몸을 말고 있는 아이스를 슬쩍 보여주면서 PX에서 우유를 꺼내들었다. 그제야 이 상황을 알 것 같다는 표정의 슬라이더.
“그 고양이한테 주려고?”
“이 녀석 기운이 없어 보여서...비도 오는데 큰일이잖아.”
“아아..그래서. 우리 매버릭 착한 아이네.”
“좋은 말 할 때 꺼져줄래?”
“아이고 무서워라. 그나저나 아이스 본 적 없어?”
“아이스? 몰라. 주말이라 외출한 거 아냐?”
“그런가? 아침 일찍 빌릴게 있어서 갔는데 관사에 없더라고.”
계산을 마친 우유를 잠시 맡기고 불편하게 축 처진 아이스를 고쳐 안는걸 보고 슬라이더가 자신보다 훨씬 작은 매버릭의 머리통을 기특하다는 듯 쓱쓱 쓰다듬었다.
“비행할 때는 까칠하더니 귀엽네.”
“그만해라 진짜.”
아이스는 거친 언행과 다르게 귀 끝이 빨갛게 물들어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을 보면서 언제부터 자신의 RIO와 이렇게 평범한 대화를 하고 친분을 쌓았던 건지 궁금해졌다. 그러고 보니 아이스에게는 먼저 말을 건 적도 없고 일상적인 대화 자체가 성립이 안됐던 것 같은데.
“야옹아. 이제 조금만 더 가면 집이야.”
점점 거칠게 내리는 굵은 빗방울을 보면서 품안에 아이스를 고쳐 안고 조금 전과는 달리 발걸음을 재촉하며 관사에 도착했을 때는 흠뻑 젖어 물이 뚝뚝 떨어지는 상태였지만 아이스를 안고 있는 상의 안쪽만은 젖지 않고 따뜻한 온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현관문을 열자 차갑고 습한 공기가 한꺼번에 빠져나갔다.
아이스를 안은 채 쿵쿵 발소리를 내며 욕실에 차곡차곡 개어둔 수건을 두어개 꺼내고는 천천히 그의 몸을 닦아주었다.
물기 가득한 짧은 머리카락이 형광등 불빛에 반짝거리고 보송보송한 수건으로 물기를 빨아내듯 아이스의 몸을 주물거리며 본인의 코끝에서 물방울이 떨어지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렇게 열중하고 있었다.
늘 아이스를 향해서 날이 선 모습만 보다가 이렇게 온순한 얼굴도 할 수 있구나. 새삼 어린 티가 나기도 했다.
분명 아이스를 위해서지만 제3자처럼 그의 행동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자고 일어나니 고양이가 된 아침부터 현재까지 이상한 일뿐이었다.
“이럴 때 드라이기가 있으면 좋은데..여기에는 없어.”
아이스의 젖은 몸을 다 닦고 나자 자신은 대충대충 물기를 닦아내며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아이스는 천천히 주변을 살펴보았다. 자신의 방만큼이나 살풍경했다. 군인답게 정리정돈이 잘 되어있긴 하지만 정리라고 할 것도 없이 그다지 생활감이 보이는 살림살이가 있지도 않았고 여러 종류의 비행관련 서적과 새로 받은 교본, 과제물들만이 책상 위에 흐트러져 있었다.
“배고프지? 야옹아, 조금만 기다려.”
대답할 리가 없는 아이스를 한번 들었다 바닥에 조심스럽게 내려주고 곧바로 작은 냄비에 우유를 붓고 가스레인지에 불을 올렸다. 그리고는 천천히 젖은 점프 수트를 벗었다.
옷장 안은 빈약하다고 표현할만한 몇 가지의 옷들만 있었다.
흰 반팔 셔츠 몇벌과 한여름에도 입고 다니는 낡은 무스탕, 청바지, 근무복과 해군정복 그리고 먹색의 셔츠와 실내용 바지 한 벌
젖은 점프수트를 옷걸이에 걸고는 통풍이 잘 될 만한 곳에 걸어두는 그의 벗은 뒷모습을 보다보니 드러나는 부분 외에 옷으로 감출 수 있는 대부분의 피부에는 크고 작은 상처들이 남아 깨끗한 이목구비와는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깨끗하고 곱상한 표면적인 모습만 알았던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거친 비행과 한계까지 몰아붙이는 고된 훈련, 때때로 징계를 빙자한 상관의 폭력, 서로간의 경쟁으로 인한 물리력을 동반한 다툼.
파일럿 치고는 가볍고 작은 편인 매버릭은 결코 파일럿 평균이라 할 수 없는 덩치라 이 자리까지 오기까지 배로 힘들었을텐데 알고 싶지 않았던 것을 알게되서 마음이 어지러워졌다. 그저 비행밖에 모르는 비협조적이고 이기적인 꼴통이라고 생각해왔는데.
“자, 이거 먹어.”
미지근하게 데워진 우유를 작은 접시에 담아 식탁 위에 앉은 아이스에게 내밀고 의자에 앉아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우유가 싫어?”
희미한 미소를 띄며 말을 붙였다. 고양이가 된 아이스가 대답해줄 리가 없는데. 쓸쓸한 표정이었다.
그러고보니 하루 종일 먹은 게 없었다.
고양이인 채로 먹어야 한다는 사실이 인간인 자신에게는 저항감이 있어서 머뭇거렸다.
“고양이치고는 되게 건방지구나.”
웃으며 말하고 있지만 왠지 누군가를 떠올리는 듯 조금 난처한 표정이었다.
적당히 먹기좋게 데워준 우유는 어쩐지 달콤한 맛이 나는 것 같았다. 아이스가 우유를 먹기 시작하자 그제야 안심한 듯 자리를 뜨고는 흐트러진 것을 정리하면서 좁은 집안을 돌아다니다 커튼도 쳐지지 않은 제법 찬바람이 새어 들어오는 창에 서서 멍하니 세차게 내리는 비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스에게 말을 건네는 조용한 말투며 그저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침묵을 지키는 모습은 내가 아는 항상 소란스러운 그 남자가 아닌 것 같았다.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 다 비운 우유접시를 뒤로하고 가벼운 도약을 하며 소리 없이 다가갔다.
“다 먹었어?”
말 못하는 고양이에게 대답을 기다리는 듯 묻는 바보같은, 어린 매버릭.
“야옹아. 비가 많이 내려. 캄캄한 밤인데도 떨어지는 빗방울이 보여.”
아이스는 쓰다듬는 그 손을 (고양이의) 본능적으로 꽉 물어버렸다.
“정말 냉정한게 아이스랑 똑같네.”
정말로 손이 아픈 듯 확실히 남은 이빨 자국을 문지르며 투덜거렸다. 그러면서도 다시 그 품안으로 아이스를 안아들고는 방으로 들어갔다. 미리 깔아놓은 이불 속으로 몸을 집어넣고는 아이스를 껴안고 키득거렸다.
“비가 와서 추워. 그러니까 오늘은 이렇게 안고 자는거야.”
예상하지 못한 그의 행동에 그렇게 내기 싫었던 고양이 울음소리를 내자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싫어? 정말 똑같네. 똑같아. 그 녀석이랑. 걔는 나한테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얼굴로 매번 싫은 소리만 하거든. 다들 날 싫어한다나. 적보다 내가 모두에게 위험하다고...그래서 모두 싫어한데”
키득거리는 웃음 사이로 들리는 중얼거림을 듣고 나니 아이스는 마음이 좋지 않았다. 아무리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주변을 위험하게 한다고, 그는 그런 비행을 즐기는 것 같아 좀 더 주변을 살피고 동료로서 안전한 비행을 요구했을 뿐인데 상처 가득한 울적한 얼굴이라니. 아이스는 매버릭을 잘못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ice cold, no mistakes라고 인정받는 콜사인이 무색해졌다. 안겨있기 싫다는 거부의사를 밝혔음에도 놓아줄 의사가 없는 듯 꼭 안고 잠에 빠져드는 얼굴에 외로움이 묻어있어 그런 그의 얼굴을 눈동자에 새기다 아이스도 곧 잠이 들었다.
“야옹아?”
고양이 특유의 동그랗게 몸을 말고 아이스는 오늘을 걱정을 하고 있었다. 어제 내린 세찬 비는 여전히 멈출 줄 모르고 쏟아지고, 매버릭은 소파에 앉아 탁자에 두 다리를 쭉 뻗고 창밖을 쳐다보기를 두어시간.
이상한 일이였다.
언제나 우리는 만나면 다툼뿐이었는데 지금은 무겁게 내리는 비 소리를 들으며 같은 공간에서 같은시간 같이 숨쉬며 각자의 생각에 잠겨 침묵을 지키고 있다는 것이.
“모처럼 휴일인데...”
배 위에 아이스를 올리고 귀 뒤를 몇 번이고 다정하게 쓰다듬어주었다. 아이스로서는 굴욕적인 상황이었지만 인간이었던 자신이 고양이 몸의 기분 좋은 본능을 누르기는 어려웠다.
이 기분 좋은 손길에 조금 전까지 돌아갈 수 있을지 걱정하며 초조했던 마음이 점점 누그러졌다. 어제 그를 만나기 직전까지 머리 속을 떠나지 않았던 일들을 뒤로 하고 편안히 잠들었던 것처럼.
“기분 좋아?”
본능적인 갸릉갸릉 소리에 매버릭이 낮고 조용하게 웃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울적한 얼굴로 어두운 바깥풍경을 보고 있어서 아이스 앞에서 보이던 날선 감정이 쉬이 드러나던 때와 전혀 다른 사람 같아 낯설었는데.
“너한테 꼭 어울리는 이름이 있지만, 이름 붙여주면 정이 들 것 같아서 관둘래.”
다시 미소가 사라진 쓸쓸한 표정이다. 무슨 생각하는지 알 수 없다고 느끼는 상대가 저 매버릭이라니 이상한 일이다.
매버릭이 갑자기 아이스를 번쩍 안더니 촉촉한 코끝에 입을 맞췄다. 정이 들기 싫어서 이름을 지어주지 않겠다고 말한 것치고는 애정이 담은 행동이었다. 하지만 이 돌발행위가 싫지 않은 건 고양이라서일까. 구스와 있을 때도 그렇고 슬라이더 앞에서도 거침없이 입을 놀리는 타입이라고 생각했는데 간간이 아이스에게 붙이는 말 외에는 조용했고 활발하게 움직이지도 않았다.
조용히 비행관련 서적을 읽던지 묵묵히 고민하며 과제를 성실하게 해치우고 있을 뿐이었다. 때때로 손끝으로 아이스의 턱밑을 간지럽히더니 제가 기분이 좋은지 가끔씩 웃었다.
저녁부터 천둥이 울리고 번개가 치며 비바람이 몰아쳤다.
침대 등받이에 기대앉아 한손으로 아이스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한결같이 따뜻한 손으로.
“야옹아, 이거 봐봐 이 사람이 듀크 미첼이라고 우리 아빠야. 멋지지?”
지갑에서 꺼낸 낡은 사진 한장.
A-4 스카이호크 공격기를 배경으로 건장하고 잘생긴 파일럿과 목마를 타고 있는 해군 모자를 쓰고 웃고 있는 작은 아이.
서로 그다지 닮지는 않았지만 어쩐지 미소만큼은 판에 찍은 듯 닮아 다정한 부자 사이임을 알 수 있었다. 매버릭은 그 사진을 계속 바라보며 아이스에게 하듯 듀크 미첼을 어루만졌다. 그 손끝의 다정함을 보상해줄 사람이 매버릭에게는 과거에도 지금도 없는 것이다. 그런 사실을 이해하고 있는 자신에게 아이스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구스에게만 각별한 애정을 주고받음이 예외인 매버릭임을 알고 있지만 아예 다른 이에게 애정을 받는 것에 미련을 버리고 체념한 맨 얼굴을 본 것 같았다. 지금까지 그에게 했던 스스로 옳다고 여긴 행위들이 상처를 주고 매몰찬 행동이었다는 생각에 한심해졌다.
그런 아이스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코끝에 또 입을 맞추려는 매버릭의 손을 다시 꽉 물어버렸다. 분명 아플텐데 바보처럼 웃고 있었다.
비가 그친 다음 날 아침, 눈을 뜨자 아이스는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옆에는 고양이처럼 웅크리고 자고 있는 매버릭이 보였다.
깨지 않기를 바라며 흘러내린 이불을 덮어주고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관사를 벗어났다. 아이스는 곧장 자신의 관사로 돌아가 지난 이틀 동안의 모험 아닌 모험으로 인한 이런저런 생각에 잠겼다. 두어시간 후에 슬라이더가 이틀 동안 어디 갔었냐며 찾아오고 난 후에야 복잡한 마음이 정리가 되었다.
이틀에 걸친 거센 비는 높고 푸른 하늘 길을 열어주었고 만족스러운 비행 훈련을 마친 아이스는 문제의 격납고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 곳에는 예상대로 안절부절하고 있는 작은 체구의 흑발의 어린 남자가 있었다. 아마도 아이스를 찾고 있는 것이겠지.
이틀이라는 짧은 시간동안 정을 주는 건 쉬운 일일 것이다.
그는 사랑받기를 체념했지만 애정을 베풀 줄 아는 상냥한 사람이니까.
“어디로 간거야, 고양아.”
가까이 다가가도 눈치를 채지 못하고 격납고에 쌓인 고물이 된 부품 사이를 뒤지며 열심히 찾고 있었다.
“잃어버린 장비라도 찾고 있어?”
굽혔던 허리를 펴며 고개를 돌려 말을 붙인 상대를 멍하니 보던 매버릭은 목소리의 주인이 아이스라는 것을 깨닫고는 곧 예의 그 새침하고 날선 표정으로 바뀌었다.
“아니면 야.옹.이.라도 찾고 있는 거야?”
“?”
곧바로 당황을 숨기며 아닌척 하지만 쫑긋 선 귀 끝이 점점 붉게 물들어갔다. 앙다문 입술, 흔들리는 녹안을 보면서 아이스에게 다정한 손으로 안아준 것처럼 이번에는 자신이 손을 내밀 차례인가?
불현듯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을 깨닫고 아이스는 매버릭이 이틀 동안의 자신을 알아채길 바라며 그의 손을 물어버렸다.
매버릭은 깜짝 놀라 뭐하는 짓이냐고 화를 내고 있었지만 어쩐지 그때처럼 다정하고도 쓸쓸하게 웃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 여리고 서툰 다정함을 가진 피트 매버릭 미첼의 고운 얼굴에 드리운 외로움의 그늘을 아이스는 자신의 손으로 걷어주고 싶었다.
+약간 ㅅㅈ
*초반 카프카의 변신 차용
어느날 아침 아이스는 마음에 걸리는 꿈에서 깨어났을 때 자신이 침대 속에서 한 마리의 고양이로 변한 것을 깨달았다.
그는 굽은 등을 옆으로 누이고 고개를 약간 숙인 채 이불 위에 고양이 특유의 쌕쌕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둥근 몸에 비해 긴 잿빛 꼬리가 무의식중에 살랑거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어떻게 된 일일까 아이스는 생각했다.
꿈은 아니었다.
지금 시야로 보이는 너무나 큰 자신의 방은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낯익은 모습이었다.
새벽까지 보고 있던 교본들이 흩어져 있는 책상 위쪽에는 늘 착용하던 손목시계가 보였다.
아이스는 창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빈틈없이 깨끗한 창문에는 빗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날씨가 음산한 탓인지 이 기묘한 상황 탓인지 아이스는 기분이 불쾌해졌다.
아이스는 침대 옆 탁상시계를 보았다.
벌써 7시였다.
아침 7시 정각을 알려주고 있었다. 알람을 6시에 맞춰 놓았고 분명 알람이 울렸을 텐데 그 소리를 듣고도 어떻게 계속 잠을 잘 수 있었을까.
평소 깊게 잠드는 편은 아니였을텐데. 아이스는 침대 위에서 몸을 일으키고는 방에 딸린 욕실로 들어가 세면대 위로 뛰어올라갔다. 거울에 비친 모습은 여타 고양이와 다른 옅은 잿빛 눈동자의 반질반질 윤이 나는 짙은 잿빛 털 일색의 그것이었다.
“아이스 무슨 일 있어?”
이른 이 시간에 문 밖에서 슬라이더의 목소리가 들렸다.
‘별일 없다’고 안심을 시키려했지만 그런 짧은 문장대신 고양이의 울음 비슷한 것이 목구멍에서 울려나왔다.
이 상황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그 짧은 순간 아이스는 날카로운 발톱을 숨기고 있는 뭉텅한 발로 창밖으로 뛰어나갔다. 열린 창문 사이로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 슬라이더의 뒷모습이 보였다. 쓸데없는 걱정을 하지 않기를 바라며 아이스는 관사를 빠져나갔다.
이른 아침, 부슬부슬 내리는 빗속을 걸으면서도 아이스는 혼란스러웠다.
아직 봐야할 교본들과 미처 끝맺지 못한 과제들, 이틀 뒤에는 다시 비행훈련을 할 텐데. 머리 속에는 온통 탑건 수석을 지키기 위해 해야 할 일들로 가득한데 자신은 지금 회색 고양이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어디로 향할지 모르는 채 계속해서 앞으로 앞으로 나가는 도중 기지에 웬 고양이냐고 호기심을 보이며 잡으려는 사람들 때문에 신경이 곤두서서 이리저리 피해 다녔다.
가랑비에 몸이 젖어가는 것도 모르고 한나절을 걷다보니 사람들의 발걸음이 드문 기지의 어느 지저분한 격납고에서 갑자기 오른 열에 고통스럽게 끙끙거리는 자신이 있었다. 몇 번이나 목소리를 내어보았지만 낮게 울리는 동물의 울음소리라 기분이 좋지 않아 소리를 내려는 시도를 포기했다.
소리를 내려고 노력할수록 지금 고양이가 되어버렸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이 짜증스럽기만 했다.
낡고 지저분한 격납고라도 언제든 정비사들이 드나들 수 있는 장소라 자리를 옮기고 싶었지만 열이 오른 작은 몸뚱이는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자꾸만 감기는 눈을 애써 뜨고 있는 것조차 벅찬 상황 속에 가까이 사람이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신경이 극도로 곤두섰다.
오늘 만난 사람들은 죄다 자신을 피하거나 잡으려고 드는 둘 중 하나의 반응이었으니까.
“고양이?”
어쩐지 귀에 익숙한 목소리.
“다 젖었잖아.”
밤의 습성을 가진 고양이의 눈동자에 비친 것은 낯익은 인물이었다.
“힘이 없네.”
조심스럽게 다가오는 손을 보다 얼굴로 시선을 돌리자 걱정스러운 듯 봄날의 갓 돋은 여린 잎을 연상케 하는 맑은 눈동자가 보였다.
“아픈거야?”
마치 상대가 자신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하는 것처럼 걱정하는 투에 아이스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따뜻함이 깃 든 손으로 경계심을 풀려고 천천히 쓰다듬는 손길과 안쓰러워하는 표정은, 눈 앞의 인물에게 처음 보는 것이라 어쩐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지금 맞은편에 쭈그리고 앉아 눈을 맞추고 있는 남자는 아이스에게 결코 이런 얼굴을 보여주지 않았을 것이 분명했으니까.
“야옹아, 이리 와~”
한 손으로 우산을 들고 있다가 무슨 생각인지 한편으로 밀어두고 열에 들떠 웅크리고 있는 아이스의 몸을 안았다. 빠르게 점프수트 지퍼를 열어 비에 젖어 축축한 아이스를 그 안으로 밀어넣고는 천천히 일어서서 낡은 격납고를 벗어났다. 심장이 두근거리는 소리가 따뜻한 체온과 함께 예민한 귓가에 울렸다.
「....」
아이스는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어째서 인적이 드문 낡고 지저분한 격납고에 찾아왔던 것일까.
흐린 날씨에 제대로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격납고의 시커멓게 드리운 그림자에 가려진 고양이인 자신의 존재를 알아챌 리가 없었을텐데. 망설임 없이 다가와 내민 손길은 다정하고 조심스럽기만 했다. 이해할 수 없는 현실에 짜증이 치밀어 오르고 열에 들떠 불안했던 감정은 천천히 수그러들고 아이스는 그렇게 얌전히 품속에 안겨있었다.
“매버릭 혹시 아이스 봤...응?? 너 임신했냐?”
“씨발 슬라이더 죽을래?”
“미안미안 농담. 안에 뭐야? 뭔데 불룩 한거냐?”
반쯤 내린 지퍼 안에 둥글게 몸을 말고 있는 아이스를 슬쩍 보여주면서 PX에서 우유를 꺼내들었다. 그제야 이 상황을 알 것 같다는 표정의 슬라이더.
“그 고양이한테 주려고?”
“이 녀석 기운이 없어 보여서...비도 오는데 큰일이잖아.”
“아아..그래서. 우리 매버릭 착한 아이네.”
“좋은 말 할 때 꺼져줄래?”
“아이고 무서워라. 그나저나 아이스 본 적 없어?”
“아이스? 몰라. 주말이라 외출한 거 아냐?”
“그런가? 아침 일찍 빌릴게 있어서 갔는데 관사에 없더라고.”
계산을 마친 우유를 잠시 맡기고 불편하게 축 처진 아이스를 고쳐 안는걸 보고 슬라이더가 자신보다 훨씬 작은 매버릭의 머리통을 기특하다는 듯 쓱쓱 쓰다듬었다.
“비행할 때는 까칠하더니 귀엽네.”
“그만해라 진짜.”
아이스는 거친 언행과 다르게 귀 끝이 빨갛게 물들어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을 보면서 언제부터 자신의 RIO와 이렇게 평범한 대화를 하고 친분을 쌓았던 건지 궁금해졌다. 그러고 보니 아이스에게는 먼저 말을 건 적도 없고 일상적인 대화 자체가 성립이 안됐던 것 같은데.
“야옹아. 이제 조금만 더 가면 집이야.”
점점 거칠게 내리는 굵은 빗방울을 보면서 품안에 아이스를 고쳐 안고 조금 전과는 달리 발걸음을 재촉하며 관사에 도착했을 때는 흠뻑 젖어 물이 뚝뚝 떨어지는 상태였지만 아이스를 안고 있는 상의 안쪽만은 젖지 않고 따뜻한 온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현관문을 열자 차갑고 습한 공기가 한꺼번에 빠져나갔다.
아이스를 안은 채 쿵쿵 발소리를 내며 욕실에 차곡차곡 개어둔 수건을 두어개 꺼내고는 천천히 그의 몸을 닦아주었다.
물기 가득한 짧은 머리카락이 형광등 불빛에 반짝거리고 보송보송한 수건으로 물기를 빨아내듯 아이스의 몸을 주물거리며 본인의 코끝에서 물방울이 떨어지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렇게 열중하고 있었다.
늘 아이스를 향해서 날이 선 모습만 보다가 이렇게 온순한 얼굴도 할 수 있구나. 새삼 어린 티가 나기도 했다.
분명 아이스를 위해서지만 제3자처럼 그의 행동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자고 일어나니 고양이가 된 아침부터 현재까지 이상한 일뿐이었다.
“이럴 때 드라이기가 있으면 좋은데..여기에는 없어.”
아이스의 젖은 몸을 다 닦고 나자 자신은 대충대충 물기를 닦아내며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아이스는 천천히 주변을 살펴보았다. 자신의 방만큼이나 살풍경했다. 군인답게 정리정돈이 잘 되어있긴 하지만 정리라고 할 것도 없이 그다지 생활감이 보이는 살림살이가 있지도 않았고 여러 종류의 비행관련 서적과 새로 받은 교본, 과제물들만이 책상 위에 흐트러져 있었다.
“배고프지? 야옹아, 조금만 기다려.”
대답할 리가 없는 아이스를 한번 들었다 바닥에 조심스럽게 내려주고 곧바로 작은 냄비에 우유를 붓고 가스레인지에 불을 올렸다. 그리고는 천천히 젖은 점프 수트를 벗었다.
옷장 안은 빈약하다고 표현할만한 몇 가지의 옷들만 있었다.
흰 반팔 셔츠 몇벌과 한여름에도 입고 다니는 낡은 무스탕, 청바지, 근무복과 해군정복 그리고 먹색의 셔츠와 실내용 바지 한 벌
젖은 점프수트를 옷걸이에 걸고는 통풍이 잘 될 만한 곳에 걸어두는 그의 벗은 뒷모습을 보다보니 드러나는 부분 외에 옷으로 감출 수 있는 대부분의 피부에는 크고 작은 상처들이 남아 깨끗한 이목구비와는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깨끗하고 곱상한 표면적인 모습만 알았던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거친 비행과 한계까지 몰아붙이는 고된 훈련, 때때로 징계를 빙자한 상관의 폭력, 서로간의 경쟁으로 인한 물리력을 동반한 다툼.
파일럿 치고는 가볍고 작은 편인 매버릭은 결코 파일럿 평균이라 할 수 없는 덩치라 이 자리까지 오기까지 배로 힘들었을텐데 알고 싶지 않았던 것을 알게되서 마음이 어지러워졌다. 그저 비행밖에 모르는 비협조적이고 이기적인 꼴통이라고 생각해왔는데.
“자, 이거 먹어.”
미지근하게 데워진 우유를 작은 접시에 담아 식탁 위에 앉은 아이스에게 내밀고 의자에 앉아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우유가 싫어?”
희미한 미소를 띄며 말을 붙였다. 고양이가 된 아이스가 대답해줄 리가 없는데. 쓸쓸한 표정이었다.
그러고보니 하루 종일 먹은 게 없었다.
고양이인 채로 먹어야 한다는 사실이 인간인 자신에게는 저항감이 있어서 머뭇거렸다.
“고양이치고는 되게 건방지구나.”
웃으며 말하고 있지만 왠지 누군가를 떠올리는 듯 조금 난처한 표정이었다.
적당히 먹기좋게 데워준 우유는 어쩐지 달콤한 맛이 나는 것 같았다. 아이스가 우유를 먹기 시작하자 그제야 안심한 듯 자리를 뜨고는 흐트러진 것을 정리하면서 좁은 집안을 돌아다니다 커튼도 쳐지지 않은 제법 찬바람이 새어 들어오는 창에 서서 멍하니 세차게 내리는 비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스에게 말을 건네는 조용한 말투며 그저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침묵을 지키는 모습은 내가 아는 항상 소란스러운 그 남자가 아닌 것 같았다.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 다 비운 우유접시를 뒤로하고 가벼운 도약을 하며 소리 없이 다가갔다.
“다 먹었어?”
말 못하는 고양이에게 대답을 기다리는 듯 묻는 바보같은, 어린 매버릭.
“야옹아. 비가 많이 내려. 캄캄한 밤인데도 떨어지는 빗방울이 보여.”
아이스는 쓰다듬는 그 손을 (고양이의) 본능적으로 꽉 물어버렸다.
“정말 냉정한게 아이스랑 똑같네.”
정말로 손이 아픈 듯 확실히 남은 이빨 자국을 문지르며 투덜거렸다. 그러면서도 다시 그 품안으로 아이스를 안아들고는 방으로 들어갔다. 미리 깔아놓은 이불 속으로 몸을 집어넣고는 아이스를 껴안고 키득거렸다.
“비가 와서 추워. 그러니까 오늘은 이렇게 안고 자는거야.”
예상하지 못한 그의 행동에 그렇게 내기 싫었던 고양이 울음소리를 내자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싫어? 정말 똑같네. 똑같아. 그 녀석이랑. 걔는 나한테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얼굴로 매번 싫은 소리만 하거든. 다들 날 싫어한다나. 적보다 내가 모두에게 위험하다고...그래서 모두 싫어한데”
키득거리는 웃음 사이로 들리는 중얼거림을 듣고 나니 아이스는 마음이 좋지 않았다. 아무리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주변을 위험하게 한다고, 그는 그런 비행을 즐기는 것 같아 좀 더 주변을 살피고 동료로서 안전한 비행을 요구했을 뿐인데 상처 가득한 울적한 얼굴이라니. 아이스는 매버릭을 잘못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ice cold, no mistakes라고 인정받는 콜사인이 무색해졌다. 안겨있기 싫다는 거부의사를 밝혔음에도 놓아줄 의사가 없는 듯 꼭 안고 잠에 빠져드는 얼굴에 외로움이 묻어있어 그런 그의 얼굴을 눈동자에 새기다 아이스도 곧 잠이 들었다.
“야옹아?”
고양이 특유의 동그랗게 몸을 말고 아이스는 오늘을 걱정을 하고 있었다. 어제 내린 세찬 비는 여전히 멈출 줄 모르고 쏟아지고, 매버릭은 소파에 앉아 탁자에 두 다리를 쭉 뻗고 창밖을 쳐다보기를 두어시간.
이상한 일이였다.
언제나 우리는 만나면 다툼뿐이었는데 지금은 무겁게 내리는 비 소리를 들으며 같은 공간에서 같은시간 같이 숨쉬며 각자의 생각에 잠겨 침묵을 지키고 있다는 것이.
“모처럼 휴일인데...”
배 위에 아이스를 올리고 귀 뒤를 몇 번이고 다정하게 쓰다듬어주었다. 아이스로서는 굴욕적인 상황이었지만 인간이었던 자신이 고양이 몸의 기분 좋은 본능을 누르기는 어려웠다.
이 기분 좋은 손길에 조금 전까지 돌아갈 수 있을지 걱정하며 초조했던 마음이 점점 누그러졌다. 어제 그를 만나기 직전까지 머리 속을 떠나지 않았던 일들을 뒤로 하고 편안히 잠들었던 것처럼.
“기분 좋아?”
본능적인 갸릉갸릉 소리에 매버릭이 낮고 조용하게 웃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울적한 얼굴로 어두운 바깥풍경을 보고 있어서 아이스 앞에서 보이던 날선 감정이 쉬이 드러나던 때와 전혀 다른 사람 같아 낯설었는데.
“너한테 꼭 어울리는 이름이 있지만, 이름 붙여주면 정이 들 것 같아서 관둘래.”
다시 미소가 사라진 쓸쓸한 표정이다. 무슨 생각하는지 알 수 없다고 느끼는 상대가 저 매버릭이라니 이상한 일이다.
매버릭이 갑자기 아이스를 번쩍 안더니 촉촉한 코끝에 입을 맞췄다. 정이 들기 싫어서 이름을 지어주지 않겠다고 말한 것치고는 애정이 담은 행동이었다. 하지만 이 돌발행위가 싫지 않은 건 고양이라서일까. 구스와 있을 때도 그렇고 슬라이더 앞에서도 거침없이 입을 놀리는 타입이라고 생각했는데 간간이 아이스에게 붙이는 말 외에는 조용했고 활발하게 움직이지도 않았다.
조용히 비행관련 서적을 읽던지 묵묵히 고민하며 과제를 성실하게 해치우고 있을 뿐이었다. 때때로 손끝으로 아이스의 턱밑을 간지럽히더니 제가 기분이 좋은지 가끔씩 웃었다.
저녁부터 천둥이 울리고 번개가 치며 비바람이 몰아쳤다.
침대 등받이에 기대앉아 한손으로 아이스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한결같이 따뜻한 손으로.
“야옹아, 이거 봐봐 이 사람이 듀크 미첼이라고 우리 아빠야. 멋지지?”
지갑에서 꺼낸 낡은 사진 한장.
A-4 스카이호크 공격기를 배경으로 건장하고 잘생긴 파일럿과 목마를 타고 있는 해군 모자를 쓰고 웃고 있는 작은 아이.
서로 그다지 닮지는 않았지만 어쩐지 미소만큼은 판에 찍은 듯 닮아 다정한 부자 사이임을 알 수 있었다. 매버릭은 그 사진을 계속 바라보며 아이스에게 하듯 듀크 미첼을 어루만졌다. 그 손끝의 다정함을 보상해줄 사람이 매버릭에게는 과거에도 지금도 없는 것이다. 그런 사실을 이해하고 있는 자신에게 아이스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구스에게만 각별한 애정을 주고받음이 예외인 매버릭임을 알고 있지만 아예 다른 이에게 애정을 받는 것에 미련을 버리고 체념한 맨 얼굴을 본 것 같았다. 지금까지 그에게 했던 스스로 옳다고 여긴 행위들이 상처를 주고 매몰찬 행동이었다는 생각에 한심해졌다.
그런 아이스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코끝에 또 입을 맞추려는 매버릭의 손을 다시 꽉 물어버렸다. 분명 아플텐데 바보처럼 웃고 있었다.
비가 그친 다음 날 아침, 눈을 뜨자 아이스는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옆에는 고양이처럼 웅크리고 자고 있는 매버릭이 보였다.
깨지 않기를 바라며 흘러내린 이불을 덮어주고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관사를 벗어났다. 아이스는 곧장 자신의 관사로 돌아가 지난 이틀 동안의 모험 아닌 모험으로 인한 이런저런 생각에 잠겼다. 두어시간 후에 슬라이더가 이틀 동안 어디 갔었냐며 찾아오고 난 후에야 복잡한 마음이 정리가 되었다.
이틀에 걸친 거센 비는 높고 푸른 하늘 길을 열어주었고 만족스러운 비행 훈련을 마친 아이스는 문제의 격납고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 곳에는 예상대로 안절부절하고 있는 작은 체구의 흑발의 어린 남자가 있었다. 아마도 아이스를 찾고 있는 것이겠지.
이틀이라는 짧은 시간동안 정을 주는 건 쉬운 일일 것이다.
그는 사랑받기를 체념했지만 애정을 베풀 줄 아는 상냥한 사람이니까.
“어디로 간거야, 고양아.”
가까이 다가가도 눈치를 채지 못하고 격납고에 쌓인 고물이 된 부품 사이를 뒤지며 열심히 찾고 있었다.
“잃어버린 장비라도 찾고 있어?”
굽혔던 허리를 펴며 고개를 돌려 말을 붙인 상대를 멍하니 보던 매버릭은 목소리의 주인이 아이스라는 것을 깨닫고는 곧 예의 그 새침하고 날선 표정으로 바뀌었다.
“아니면 야.옹.이.라도 찾고 있는 거야?”
“?”
곧바로 당황을 숨기며 아닌척 하지만 쫑긋 선 귀 끝이 점점 붉게 물들어갔다. 앙다문 입술, 흔들리는 녹안을 보면서 아이스에게 다정한 손으로 안아준 것처럼 이번에는 자신이 손을 내밀 차례인가?
불현듯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을 깨닫고 아이스는 매버릭이 이틀 동안의 자신을 알아채길 바라며 그의 손을 물어버렸다.
매버릭은 깜짝 놀라 뭐하는 짓이냐고 화를 내고 있었지만 어쩐지 그때처럼 다정하고도 쓸쓸하게 웃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 여리고 서툰 다정함을 가진 피트 매버릭 미첼의 고운 얼굴에 드리운 외로움의 그늘을 아이스는 자신의 손으로 걷어주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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