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잘못 본 줄 알았는데, 진짜네."
일리노이 주에 살고 있던 내 전남친이자 애아빠를 캘리포니아 한복판에서 만날 확률은? 씨팔, 애낳고 욕 끊었는데 다시 하게 생겼네, 아무튼 십팔퍼센트보다는 적지 않을까. 그것도, 내가 차린 카페에서. 얘는, 물론 대학을 여기로 왔다는 건 아는데- 그렇게 가족 좋아하는 놈이 여기 정착을 했다고? 비행기로도 거의 다섯시간을 타야 오는데? 차타고 하루 24시간 하고도 다섯시간을 쉬지 않고도 달려야 오는데?
"... 어어, 안녕. 오랜만이네. 잘 지냈어?"
"잘지냈냐는 말이 나와? 그렇게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져놓고,"
"맘미!"
아들. 이렇게... 안 도와주기 있니. 너 분명 코 잔다고 했잖아... 원래 너 낮잠 자면 한시간도 넘게 자면서, 지금 이십분밖에 안됐는데 깨기 있니. 내 다리를 폭 끌어안는 알렉스는 또 다른 문제라서, 아이를 안아올리고 다시 마주했다. 바로 알아볼까봐 걱정한 게 무색하게도 알렉스는 상대가 성인 남자라는 걸 느꼈는지 내 어깨에 얼굴을 파묻고 들지 않았다.
"알렉스, 엄마 친구야. 인사할래?"
"으응, 아니, 시러... 무서어."
"어어, 알았어. 미안, 애가 자기 삼촌 빼고 성인 남자는 낯을 좀 가려. 커피 뭐 마실래? 오늘 첫손님이라 무료인데."
"... 뭐, 네 카페일 테니까 나중에 천천히 이야기하자. 일단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잔 줄래? ... 그리고 알렉스, 아저씨는 테일러야. 엄마 친군데."
"맘미 여기 친구 업서. 무서운 사라미야."
"... 교육을 잘 시켰나보네."
"아무래도 세상이 무섭다 보니까... 하하, 미안. 금방 내려줄게. 알렉스, 엄마아들, 잠깐만 내려갈까? 아저씨 커피 줘야하는데. 그리고 아저씨는 진짜 엄마친구 맞아. 안 무서워해도 돼. 범블삼촌이랑 친구야."
"엄마 커피 내릴동안 아저씨랑 놀래? ... 아저씨 공룡 스티커도 있는데."
"... 진짜?"
"진짜. 아저씨 가방에 있어. 꺼내서 보여줄까? 티라노도 있고, 브라키오사우르스도 있고- 스테고도 있고..."
"... 그걸 왜 가방에 챙겨다녀?"
"조카 주려고 사뒀는데 못 준 거니까 그런 눈으로 쳐다보지 마. 알렉스, 삼촌이랑 놀자."
알렉스는 공룡이라는 소리에 힐끗 테일러를 보더니 내려달라는 눈치를 보였다. 그러더니 야무지게 제 전용 자리에 가서 앉더니 옆자리를 탁탁 치며 이리 오라는 시늉을 했다. 대책없이 대범한 건... 그래, 나를 닮았지. 그러니까 남자친구가 게이라는 걸 알자마자 집안 분위기에 편승해서 한국으로 도망갔겠지.
"여기 커피. 알렉스, 아저씨 바지에다가 스티커 붙이면 안돼."
"그치만 테이삼추니가 그래도 된댔는데!"
"... 내가 된다고 했어. 공룡 에디션 청바지 멋지잖아."
"말도 안되는 소리 하지 마. 그리고 렉스, 아까는 무서운 사람이라더니."
"맘미가 친구라구 해짜나!"
해맑기도 해라. 이와중에 뭘 캐묻지는 않는 걸 보니까 뭘 모르는 모양인데 다행이다.... 싶었는데. 손님이 좀 빠지고, 빵을 야무지게 하나 먹은 알렉스가 잠들자마자 테일러가 눈을 번뜩이는 게 뒤통수로도 느껴진다.
"... 그래서, 알렉스는 누가봐도 내 애인 것 같은데. 도망간 거에 이어서, 내 애는 왜 숨긴 거야?"
"그거느은... 첫째로, 도망가게 된 이유는 내가 아니라 우리 엄마아빠야. 그때 우리 집 가세가 좀 기울어서... 다같이 미국을 떠났지. 그리고 애를 숨긴 거는, 음... 네 생각해서 숨긴 건데. 어차피 우리는 결혼은 못할 테니까."
"왜 못해? 기반이 없어서? 어려서?"
"... 네 성적 지향이, 그, 헤테로가 아니잖아?"
"헤테로가 아니면 내가 널 무슨 수로 임신시켰는데? 뭐 그땐 손만 잡아도 애가 생겼어? 네가 마리아야? 수태고지라도 받았어?"
"... 그, 자각하기 전에 방황... 정도로 생각했지. 왜냐하면,"
네가 존나 말도 안되는 소리하겠지만 들어나 보자, 하는 눈으로 날 보는 테일러를 보자니 조금 기가 죽었다. 신랄하게 내 추측이 개소리라고 반박까지 하는 걸 보자니 진짜 아닌가.
"... 너같은 애가 날 좋아할 리가 없으니까."
"뭐?"
"그냥, 범블 쌍둥이누나라서... 닮았잖아. 그리고 넌 눈치가 빠르니까, 내가 널 좋아하는 거 알고 한번 사귀어주고 말자 한 줄 알았지."
"... 어디서부터 뭘 반박해야하는지 모르겠는데. 지금 내가 이해한 바로는... 넌 내가 범블을 좋아하는데, 커밍아웃을 하긴 힘드니까 옆에 있던 대체재인 너를 발견했고, 마침 네가 나를 좋아하길래 위장용으로 사귄 거라고 생각한 거네? 그리고나서 내 애를 임신하게 됐는데, 게이인 내가 싫어할까봐 바다건너서 도망갔고... 보니까 이 넓은 미국땅에 만나겠어 하는 마음으로 캘리포니아에 정착했는데, 내가 나타났고?"
"... 추리를 잘하네."
"... 미안한데 허니, 너 범블이랑 하나도 안 닮았어. 대체재로 생각하기엔 넌 미세스 비 판박이고, 범블은 미스터 비 판박이야. 웃을때나 좀 닮았겠지. 얼굴 근육 쓰는 게 가족이라 비슷할 테니까. 그리고, 나는 게이가 아니야. 고백할 자신이 없어서 맨날 니네 집에 범블 핑계대고 놀러갔던 등신은 맞아도."
"..."
"네가 임신했다고 말했으면, 누구보다 좋아했겠지. 내가 네 옆에 평생 붙어있을 이유가 생겼으니까. 그런데, 그렇게 말도 안되는 이유로 몇년을 피해다녔다?"
"... 미안해."
"뭐가 미안한데. 대화 한번 안해보고 도망간 거? 아니면 게이로 오해한 거? 아니면 또 뭐 있냐, 너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사귀고 스킨십하고 임신시킨 쓰레기로 생각한 거?"
"... 그거 다, 미안해. ... 아빠인 것도, 지금 알려줘서 미안."
"됐어. 괜찮지는 않은데, 아무튼 들킨 이상 너 더이상 도망은 못가. 범블 이새끼도, 어쩐지 미국에 왔다고 하길래 만났거든. 네 이야기만 물어보면 입을 싹 다물더라니."
"... 진짜 미안해."
"진짜 미안하면, 더 도망갈 생각하지 마. 너 사람 미치게 하는 데 재주 있으니까. ... 알렉스한테는 또 뭐라고 설명해야 해?"
할 말이 없어서 테일러 품에 안겨서 푹 잠들어 있는 알렉스만 쳐다봤다. 이렇게 보니까 둘이 더 닮았네. 내가 낳았는데 왜 쟤만 닮았냐, 진짜. 꼬불거리는 곱슬머리까지도 똑닮아서 언젠가 들키긴 들켰겠다 싶었다. 우물쭈물하는 나를 보고 테일러가 이리 오라는 듯 제 옆을 손으로 두드렸다. 옆에 슬며시 앉자 팔을 뻗어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이마에 입맞추는 게 자연스러워서 괜히 입술이 닿았던 곳만 손으로 문질렀다.
난 여전히 모든 게 서툰데, 얘는 서운할 만큼이나 능숙하다.
테잨너붕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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