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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10 23:33
허니 좋은데 좋아한다는 게 뭔지도 모르고 표현하는 법도 몰라서 히히졸졸 따라만 다니는 눅스...에게 감기는 허니... 넘 귀여울 것 같지 않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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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게 내가 분명히 강아지를 키우고 싶댔지.
허니는 저 멀리 철제 선반 너머 둥실 올라온 민둥머리를 보며 한숨을 폭 내쉬었다.

“쟤는 눈만 가리면 자기가 안 보이는 줄 아나 봐.”
대그가 재밌다는 듯이 속삭였다. 어, 눈썹까지 올라왔다. 그걸 가만히 듣고 있자니 화들짝 숨는 동그란 머리가 퍽 볼 만하다. 이쪽은 보이지도 않을 거면서 왜 숨어있나 했더니 청각에 온 신경을 기울인 모양이지. 그런데 어쩌나. 이번엔 다리가 튀어나왔는걸.

잘 먹지도 못하고 자라 깡마른 주제에 키는 어린 나무보다도 큰 저 ‘보이’는, 한 때 발할라에 갈 뻔한 워보이였으며 지금은 피스—peace—보이를 자청하는, 수색용 새끼 케인코르소 키우는 일을 맡아 하고 싶어하던 허니에게 케이퍼블이 웃으며 떠넘긴 강아지도 사람도 아닌 무언가였다. 목줄만 없을 뿐이지 따지자면 사람보다는 강아지에 더 가까운.

아니, 도저히 사람일 리가 없는.



퓨리오사의 혁명 이후, 장비 회수를 위해 함께 투입되었던 허니에 의해 빈사 상태로 실려온 걔는 처음에 스스로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했다. 아저씨들 말로는 이미 송장이건 반송장이건 죽은 목숨이랬는데, 허니는 왠지 걔를 두고 가기가 싫었다. 당연히 임모탄은 좋아하지 않을 짓거리겠지. 그런데 세상이 달라졌잖아.
어쩐지 걔는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갈기갈기 찢겨 모래바람에 삭아가는 진짜 송장들과는 걔가 좀 달라 보여서. 거기에 그대로 묻어두고 왔다가는 오래도록 꿈자리가 사나울 것 같아서. 그래서 피 뚝뚝 흘리며 기절한 몸뚱아리 이고지고 업어 왔다.

걔는 달이 꼬박 차고 기운 후에야 깨어났다. 자기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여기가 발할라야? 너는 여신이야? 같은 소리만 하길래 뭣 됐다 싶었더니만, 답은 다른 워보이들이 알려줬다. 걔 이름은 눅스랬다. 원래도 맹한 구석이 있었는데 웬 바보 천치가 돼서 돌아왔다며 낄낄댔다. 걔네들을 스패너 휘둘러 쫓아내 놓고 상처투성이 말간 얼굴을 내려다보고 있으려니까 마음 저 깊은 곳에서부터 뭔가가 치받아 올라오는 게, 좀. 그러니까 그게 좀. 그때부터 걘 좀 짜증났던 것 같다.
그러나 동시에 허니는 알았다. 시타델에 병자가 편히 누울 수 있는 곳은 없다는 것을. 임모탄이 죽고 부발리니가 통치하며 살기 좋아졌다고는 해도 웨이스트랜드는 웨이스트랜드였다. 폭주족들이 판치는 곳. 마음껏 마시지도 먹지도 못하는 곳.
인력은 곧 자원이다. 쓸모 없는 사람은 곧 짐덩어리다.

알 굵은 감자 두 알을 헌납하고도 책임자는 줄 수 있는 시간이 하룻밤밖에 없댔다. 어린 소년의 잃어버린 과거를 찾아 모험을 펼치기에 웨이스트랜드는 그리 여유롭고 온정 넘치지 못했다. 고철이 된 자동차는 한 시라도 빨리 새로운 부품들로 제 할 일을 다해야 했다. 그래서 허니는 밤새도록 흙먼지 덕지덕지 낀 크롬 언덕을 뒤졌다. 그리고 동이 환히 터오다 못해 다들 채비를 하고 일터로 어정어정 걸어나올 무렵에—어떻게 보아도 쓸모가 있을 것 같지는 않은—용수철 달린 새머리 하나를 끄집어낼 수 있었다. 삐걱삐걱삐걱삐걱 정신 사나운 소리를 내며 이리저리 고개를 움직이는 새대가리 용수철의 뒷면에는 조그만 음각으로 N, U, ...그리고 X.
그날 밤을 꼴딱 새우는 바람에 다음 날에는 일하는 내내 꾸벅꾸벅 졸다 공업용 절단기에 머리를 집어넣을 뻔도 하고, 흙때를 덮어쓰고 자잘한 상처도 좀 났지만 쟤를 구한 건 나니까. 이제 쟤의 목숨과 인생에는 나한테도 조금은 책임이 있는 거니까.
그러니까 허니는 망설임 없이 도움이 될지 어떨지도 모를 단서 하나를 찾아 고철 더미를 뒤질 수도 있었고, 찾아낸 수확물을 들고 한달음에 걔한테로 달려갈 수도 있었던 것이다.



눅스의 호리호리한 몸뚱이에는 거의 얇은 책 한 권 만큼이나 많은 것들이 새겨져 있었다. 8기통 엔진을 그려넣은 그림들이며 입술에 새겨진 세로줄의 칼자국들, 양쪽 허벅다리를 빼곡히 덮은 누군가의 이름들까지.

걔는 암덩어리인 줄 알던 혹에마저도 얼굴을 그려넣고 별명을 붙여 친구 삼는 애였다. 래리랑, 배리. 대충 귀여운 이름을 갖다 붙인 줄 알았는데, 가장 친했던 친구들의 이름이었댔다. 릭투스를 겨눈 총을 막아서다 한날한시에 죽었다고. 그 두 친구들의 복수를 바로 얼마 전 눅스가 직접 했으니 참 공교로운 일이다.
눅스는 몸이 좋지 않으면 오늘따라 래리와 배리가 날 좀 괴롭힌다고 말했다. 미안하지만 허니는 그런 얘기를 들을 때마다 이미 죽은 사람들을 또 한 번 발할라로 보내버리고 싶어졌다.
다리에 새긴 이름들도 친구들이니? 물으면 긍정의 답변이 돌아왔다. 임모탄을 위해 죽고 기억되는 것은 영예로운 일이었는데, 사람들은 할 일이 많고 죽는 친구들도 많아서. 자꾸만 잊혀지는 친구들을 기억하려고 새기기 시작한 거랬다. 허니는 문신을 갓 새긴 워보이들이 피를 철철 흘리며 돌아다니던 것을 떠올리고 물었다. 이거 새길 때 안 아팠어?
그럼 걔는 말했다. 엄청엄청 아팠어!
또 싱겁게 헤헤 웃으면서.

허니가 끄집어낸 새대가리는 제 할 일을 다했다. 장렬히 제 할 일을 마치고—허니의 사물함 한켠에 안착하여 안락한 노후를 보내는 중이다. 삐걱삐걱삐걱삐걱.
그걸 처음 받아들고 뭔지도 모르면서 크게 기뻐한 눅스는 빠른 속도로 기억과 기력을 동시에 회복했다. 먹은 것도 없으면서 어디서 그런 힘이 났는지 별다를 후유증도 없었다. 딱 하나만 빼고.



눅스는 심각한 분리불안증을 앓고 있었다.
걔는 이곳저곳에서 나타나선 사방팔방으로 몸을 날렸다. 허니가 다칠 뻔하면 대신 다쳤고, 다칠 뻔하지 않아도 대신 다쳤다. 몸을 날리기 직전에 늘상 남기는 대사는 덤이었다. 날 기억해줘!
야, 눅스, 그렇게 죽으면 개죽음이야. 세상에, 걔가 그렇게 잘못되면 기억이야 못 할 수가 없겠다만 심각한 트라우마를 앓게 생겼다. 아니, 이미 시작되어버린 것만 같다. 그뿐일까. 어디서 자꾸만 잡동사니들을 주워와서 선물해주기 시작했다. 예쁘잖아. 허니가 생각나서. 그럼 그때 그 새대가리도 나를 닮아서 선물했었다는 뜻이니.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걔는 항상 허니야, 허니야, 그랬다. 한 번 부를 것을 세 번은 더 불렀다. 부르길래 돌아보면 그냥 세로줄 죽죽 간 입술 늘려 헤헤 웃었다. 허니가 자신의 목소리를 듣고 반응해 주는 것이 기쁘다는 듯이. 그게 눅스의 유일한 목적이었다.
처음 몇 번은 부르면 부르는 대로 돌아봐 주다 목에 담이 오게 생긴 허니가 너 대체 왜 그래? 발칵 짜증내면 별로 미안하지도 않으면서 미안하댔다. 이름이 예뻐서 기억하고 싶은 거랬다. 이름이 예쁘면 그렇게 불러제끼지 않아도 알아서 기억에 남아야 하는 거 아닌가? 이유를 들으니 더 이해가 안 됐다.

그래서 냉철한 시선으로 걔가 하고 있는 양을, 딱 세 권 꽁쳐 두고 닳도록 읽은 연애 소설의 논리에 빗대어 치밀하게 분석하고 있노라면.
유레카!
허니는 이게 바로 ‘그거’인가 보다 싶은 것이다.

“너는 나를 연모하는 거네.”
“연모하는 게 뭔데?”
“생각만 해도 만지고 싶은 거. 보기만 해도 막 이렇게 닿고 싶은 거.”
그랬더니 걔는 머리 굴러가는 소리가 이쪽까지 들리도록 곰곰이도 생각하더니만 이윽고 활짝 웃으면서,
“아냐! 그럼 나는 허니를 안 연모해!” 그랬다.

바보. 이 바보 멍청이가.
그럼 허니는 왜 그러는지도 모르면서 골이 잔뜩 나서는, 저리 가. 쫓아다니지 마. 말 걸지 마. 나 도와주려고 하지도 마. 그런 말들을 하고.
걔는 허니가 왜 그러는지도 모르면서 저리 안 가고. 계속 쫓아다니고. 말을 걸고. 자꾸만 잡동사니같은 것들을 주려고 하고. 희생하려고 하고.

허니에게 눅스란 대략 그런 존재였다. 왜 저러는지 도저히 영문을 모르겠고, 그런데 자꾸 거슬리고. 그렇다고 곁에 없으면, 없으면,



그래. 지금 눅스는 허니의 곁에 없다. 거진 일주일 째 필사적인 도망을 감행하는 중으로 그 어처구니가 없는 사연이란 허니도 알고 케이퍼블도 알고 대그도, 치도도, 토스트도 알고 생체기술자도 알고 왠지 세 달에 한 번 오는 맥스도 알았다.

대대적인 분류 작업이 있었다.
그 ‘분류’란 암환자로 간주되던 사람들 중 오진단을 가려내기 시작한 것을 말한다. 사건의 시작은 암환자인 줄로만 알았던 사람들 중 배급이 확대된 식량을 먹고 깨끗한 물을 마시며 건강을 회복하는 인원이 생겨난 것이었는데, 생체기술자에 의해 그들의 어깻죽지에 암덩어리로 여겨지던 혹의 상당수에서 사망 원인이라 치기 힘들 정도로 이상반응이 없었다는 사실까지 관찰되면서 일이 빠르게 진행되기 시작했다.
죽음의 공포에 떨지 않아도 될 사람들이 는다는 건 분명 희소식이다. 그러나 그것이 말처럼 희망적이지만은 않았는데, 그 분류 과정이라는 것이 지나치게 원시적이고 야만적이기까지 했던 탓이다. 모든 혹들을 일일이 칼로 째서 도려내는 것이 방법이랄 것의 전부였으니까.
도려낸 조직 내부가 붉은 살덩어리나 하얀 지방덩어리라면 그건 단순한 혹, 비정상적으로 변형된 조직이 나오면 암덩어리. 마취풀은 귀한 작물이라 마취도 없이 생살을 찢는 고통에 몸부림치다 기절하기는 다반사고, 어떤 중독은 암보다 더한 질병이기도 했지만 어쨌든 ‘작업’은 강행되었다. 갯수가 많은 순서부터 한 명씩.

어깨 위에 두 친구들을 키우는 눅스도 물론 예외없이 ‘작업’ 대상이었다. 그러나 그리도 용감무쌍하던 그는 왜인지 잔뜩 두려운 기색이었다.
네 개째까지만 해도 아무렇지 않은 체하더니. 세 개째의 차례가 다가올 무렵 똥 마려운 개처럼 불안해 보이던 눅스는 본인 차례가 코앞에 오자 기어이 도망을 쳤다.

그렇지만 저게 도망친 게 맞을까. 그냥 허니를 쫓아다니던 것에서 훔쳐보는 걸로 바뀌었다고 보는 게 맞지 않을까. 치도가 쑥덕인 대로, 눅스의 행방이란 빤한 것이어서 허니는 그런대로 수월하게 눅스를 부여잡고 기행의 이유를 따져물을 수 있었다.
그러나 친구들을 보내줄 준비가 아직 안 돼서, 라는 답변에는 잠자코 그를 놓아줄 수밖에 없었다. 눅스의 죽은 친구들의 얘기는 허니에게 있어 약한 부분이었다.

그러나 순번이 한 개째에 이르렀을 즈음에 허니는 결국 참지 못하고 더욱 열심히 숨어다니는 눅스를 또다시 낚아채고 말았다. 어영부영 차례를 미루던 눅스의 어깻죽지에 그새 조그맣게 새 혹이 생겨났던 것이다.
허니는 금세 분통이 터졌다. 이 키만 큰 바보가 도대체 답답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는 혹 주제에 친구들은 무슨 웃기는 소리. 래리, 배리, 그 다음엔 뭔데. 걘 해리니? 그러다 네가 잘못되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이야. 뭐든 해 보는 게 가만히 있다가 서서히 죽는 것보단 낫잖아. 맨날 죽겠다고 뛰어드는 게 자기면서 뭐가 문젠데. 대체 뭐가 무서워서.

그러다 문득, 허니는 그런 생각을 했다. 눅스에게는 살 생각이 없을 수도 있겠다. 쟤는 그냥 죽은 사람들을 기억하고, 냅다 희생해서 운 좋게 누군가를 구하고, 그러다 일찍 죽어 그 빌어먹을 발할라인지 뭔지에나 가서 이미 죽은 이들을 만나는 게 삶의 유일한 목표일 수도 있겠다.

임모탄이 죽고 부인들의 손에 아쿠아 콜라가 해방되며 퓨리오사가 식량의 균등한 배분을 실현했어도 아포칼립스는 아포칼립스라—허니는 아포칼립스에서 나고 자라 무엇이 아포칼립스이고 비-아포칼립스인지는 잘 몰랐지만—여전히 거동이 가능한 모두가 일을 해야 했고 간간이 무법자들과의 크고작은 전투를 치러야 했으며 사나흘에 한 끼만 먹고 버텨야 하는 날들도 많았다. 그래도, 그런데도, 허니는 언젠가부터 더 좋은 날이 오리라는 것을 믿었다. 임모탄의 죄악이 그의 숨통을 끊은 것처럼. 구원자처럼 어느 날에 기적같이 나타나 주지 않아도, 그건 서서히 시대처럼 올 거라고.

눅스의 멱살을 냅다 쥐어잡은 손아귀가 부들부들 떨렸다. “당장 가. 가서 치료 받아. 정말 나를 위한다면 대신 다칠 생각 말고 함께 해줄 생각을 해. 희생하려면 그런 식으로 하란 말야.”

그러나 그 모든 가능성 속에서 누군가가 함께하지 못하는 선택지는 한 가지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당혹스러운 낯으로 허니의 얼굴을 한참 내려다보던 눅스는 결국 답지 않게 착잡한 표정으로 생체기술자를 찾았다. 그렇게 찾아도 도마뱀만치 잘도 도망다니더니만. 허니에게 꼭 붙들려 얌전히 대령된 눅스를 본 그는 묘한 기색을 띠었지만, 곧 도구를 닦고 사람 한 명이 누울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허니에게 힘없이 잡혀 있던 눅스는 이제 도리어 허니의 손을 꽉 쥐고 있었다. 원래는 안 되고 자시고, 수술 받으러 누굴 달고 온 사람은 그동안 한 명도 없었는데. 생체기술자의 눈초리에도 눅스는 완강했다. 허니가 없으면 아무것도 안 하겠다는 의미를 가득 담은 무언의 고집에 허니는 조용히 그의 곁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여기 있을게. 그 혹덩어리들 잘라내서 네가 괜찮은 걸 확인하기 전까지는 어디에도 안 갈게.
예리한 칼날이 단번에 마른 어깨를 갈랐다.
눅스의 창백한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달리 나올 것도 없어 보이는 살가죽을 참 많이도 쑤셔댔다. 눅스는 잘도 이를 악물고 신음을 삼켜냈지만 허니의 손만은 간절하게 붙들고 늘어졌다. 그러다 참을 수가 없을 때면, “허니, 허니야.....” 다 쉬어터진 목소리로 그랬다.

허니는 그에 대답해줄 수 없었다. 응, 나 여기 있어. 괜찮아. 넌 괜찮을 거야 눅스, 해줄 수가 없었다.
목구멍을 치받고 올라오는 덩어리들을 삼키느라. 미안함? 울음? 걱정? 그 무엇도 아닌, 실은 그 모든 것이 한데 엉겨붙은 덩어리들을 눌러내느라 겨우 눅스의 손만 마주잡았다. 그마저도 땀에 흥건히 젖어 자꾸만 미끄러져내리는 것을 고쳐잡고, 또 고쳐잡고.

눅스는 그 와중에도 자꾸만 허니를 보려고 했다.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것들을 흘려내느라 힘겹게 눈을 껌벅이면서도 악착같이 눈동자로 허니를 쫓았다. 그동안 도망다니느라 가까이서 못 본 한을 여기서 풀겠다는 듯이. 그런데 그 눈이 지나치게 절박해서 허니는 하염없이 겁이 났다. 얘는 죽으러 온 게 아닌데. 남들처럼 잠깐 아프고 나서, 아무 일 없다는 듯이 걸어나갈 텐데도. 그러나 생각보다 뿌리가 깊다며 한참 중얼대는 소리를 뒤로하고 붉게 충혈된 눈이 서서히 초점을 잃다 느리게 감겼을 때, “됐다. 정상이야!” 칼이 들린 투박한 손아귀에 거멓게 죽지 않고 새붉기만 한 핏덩어리들이.



피를 많이 흘렸댔다. 원래도 빈혈을 앓고 있던 눅스라 잠시 정신을 잃은 거랬다. 물 좀 흘려넣어 주고, 수혈 좀 받고 잠시 쉬면 곧 일어날 거랬다. 쌓인 일이 많아 일터로 끌려가면서도 허니는 멍하니 그런 말들을 곱씹고 있었다. 많이 고통스러우리라는 것쯤 알고 있었고, 기절하는 사람들도 이미 많았고, 눅스가 암이 아니라는 것은 그중 다행이고. 그런데도 머릿속을 깡그리 차지한 그 간절한 손과, 핏발 선 눈이 자꾸만.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도 일을 해야만 했다. 그것이 잡념들을 조금이라도 덜어낼 수 있는 방법이었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도 죽어가는 것을 업어온 때부터 사람 피말리기 선수인 걔가 깨어날 기미가 없어도. 그저 묵묵히 일하며 기다려야만 했다. 그러지 않은들 어쩔 수가 없으니까.
그러다 눅스가 깨어났다는 소식을 전해들었을 때, 허니는 찾아가지 않았다.

알고 상상하는 것과 실제로 직면하는 것의 간극은 얼마나 큰가. 무서워하던 애를 마음의 준비할 시간도 주지 않고 칼끝으로 밀어넣었다. 저의 욕심 때문에. 그리고 그 결과를 참으로 못나게도 회피하는 중이다. 잠자리에 들어 눈을 감으면 온몸에서 피를 철철 흘리며 죽어가는 눅스가 그랬다. 정말 너를 위한다면 함께 해줄 생각을 하라고 했잖아. 그런데 정작 너는 왜 함께 있어주지 않아?
아. 누군가의 손자국대로 멍이 남은 손등이 끊어지도록 시큰댔다.



허니는 애써 감고 있던 눈을 번쩍 떴다. 잠에 들기는 애시당초에 글러먹었다. 밤이 깊어 보초 담당들을 제외한 대부분이 잠들어 있을 시간이었다. 곳곳에서 산발적으로 터지는 코골이 소리들을 뒤로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바위를 디딜 때마다 굳은살 거칠게 박힌 발바닥을 뚫고 냉기가 따라왔다. 깎아지른 절벽 아래로 물줄기가 졸졸 흐르고 그 아래로 왼편에 얕은 웅덩이가 하나. 오른편으로는 심은 지 채 2년이 안 되어 첫 열매조차 맺지 못한 어린 나무가 자라 있었다.
절벽을 통째로 다듬어 지어진 시타델의 요새에는 군데군데 홈처럼 파인 공간들이 많았다. 어느 날 갑자기 퓨리오사가 대동하고 나타난 부발리니들은 그곳에도 나무들을 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이 삼백 날에 이르자 아는 곳보다도 모르는 곳이 더 많을 정도가 돼서, 가장 높고 깊숙한 절벽에는 그 뿌리도 사람, 그 거름도 사람인 나무가 자란다는 괴소문까지 돌았다.

그래도 여전히 익숙하지 않은 색이다, 초록은. 살아온 날들의 대부분을 흙먼지와 금속의 색만을 보고 자란 허니에게 푸름이란 죽은 줄로만 알고 살았더니 난데없이 나타난 부모 정도의 존재감이었다.
그러다 문득 누군가의 푸른 눈동자를 떠올린 허니는 괜히 어깨를 푸르르 떨며 웅덩이께에 털썩 주저앉았다.

사실 안다. 걔는 깨어나자마자 허니부터 찾았으리라는 걸. 어미 따라다니는 새끼짐승 같은 눅스를 안다면 그걸 모를 수가 없었다. 늘상 눅스를 대하며 책임감부터 느끼는 허니에게도 병문안 한 번 가 주는 것쯤 별 일 아니어야 마땅했다. 그런데 참 모순되게도, 그래서 도망다녔다. 눅스는 좀 어떤지, 뭐라고 하던지. 묻지 않아도 다 아는 걔 소식을 듣기 싫어서 일 이야기 외에는 전부 피했다. 솔직해지건대, 깨어나길 그토록 기다렸으면서.

웨이스트랜드에서는 모든 것이 쉽고 또 간단했다. 그중 가장 쉬운 것이 우습게도 사람 목숨이었다. 삶의 이치란 거슬리는 존재가 있으면 죽여 없애고 갖고 싶은 것이 있어도 죽여서 빼앗는 것이었다. 체계가 없는 곳의 사람들이 그랬고 체계의 명령 하에 움직이는 사람들이 그랬다. 이곳에서 험한 꼴 당하지 않으려면 많이 배우고 빠르게 잊어버려야만 했다. 마음에 남는 것은 적을수록 좋다. 언젠가는 잃어버리게 될 것들이니까.

그러나 간단하지 않은 것들. 어느 날 시타델에 찾아온 씨앗들. 그것을 가져오는 데 걸린 20년, 그건 누군가는 20년 간 희망을 품었음을 의미했다. 세상은 나아질 수도 있다는 사실. 아주 중요한 것이 생긴다는 것. 그것을 영영 잃지 않을 수도 있다는 희망.
내 이름을 기억하고 싶다던 누군가의 반짝이는 눈.
아주 중요한 것이 생긴다는 것.
간단할 수 없는 것.



허니는 끌어안은 무릎 아래 자박하게 고인 물낯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보고 싶은 것 따위를 비출 리 없는 웅덩이는 그저 고요히 가라앉아 맺히는 것만을 비추고, 그림 같은 풍경 한가운데 영문 모르고 음울한 얼굴 하나만 동그마니.

왜?
마음 속에 퀴퀴하고 오래된 의문 하나가 피어올랐다. 너 왜 슬퍼해? 왜 침울한데? 네 마음 속에 담긴 것이 걱정과 염려뿐만은 아닌 거지. 그 너머로 죄책감, 혼란, 의문, 갈급함과 조급함, 그러니까 이를테면 그리움을—
눈을 질끈 감은 허니가 신경질적으로 수면을 흩었다. 물결이 이지러지자 도리어 수런대던 파문이 멎었다. 허니는 파동이 도로 가라앉는 양을 들여다보며 가만히 마음을 다스렸다. 선대로 너울대던 것이 점점이 넘실대고, 추를 매달고 수면 아래로 숨은 질문들이 둥실, 넋 빠진 얼굴 뒤편으로 희멀건 낯 하나를 더 비출 때까지.

창백한 남자애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경악한 여자애를 보고 웃었다.
“어... 어떻게.....”
“어떻게 찾았냐고? 글쎄, 그냥 여기 있을 것 같았어. 항상 그래. 여기 어딘가에 허니가 있을 것 같은데- 하고 찾아가면 늘 허니가 있어. 좋은 능력인 것 같아. 대단한 선물이야!”

아아, 찔리는 게 있는 자의 침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허니의 꼭 다물린 입은 도통 벌어질 줄을 몰라서, 대신 눅스의 입이 또 움직였다. 여전히 웃는 낯이었다. 여느 때와 같이.

“생각해 봤는데, 나, 죽는 게 무서웠어.”
“...대단하네. 그걸 몸에 칼을 대고서야 깨닫다니.”
놀란 마음을 채 감추지 못한 대꾸는 저도 모르게 자꾸만 뾰족하고, 허니는 매 어절마다 후회했다. 이게 아닌데. 다시 만나면 이런 말이나 해주려고 한 게 아니었는데. 미안하다고, 걱정했다고, 또, ...보고 싶었다고.
그러나 허니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눅스는 개의치 않고 씩 웃더니 허니가 앉은 웅덩이로 척척 걸어들어왔다.

그리고는 허니의 옆에 끙차, 자리를 잡고 앉더니 대뜸,
“임모탄은 거짓말이었어도, 발할라는 있을 것 같아”
하는 것이다.
또 그 소리야. 그놈의 발할라 소리. 약간 김이 샌 허니는 대번에 세모눈을 떴다가 눅스의 드물게도 진지한 낯을 마주하곤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 아니, 그도 그럴 게. 얘는 일어난 지 얼마 안 됐잖아. 핏기 쪽 빠져 평소보다도 시허얘서 이제는 정말 반쪽 달 같잖아. 내가 여기서 뭐라고 했다가는 또 쓰러질 것 같다고.

허니의—다소 핵심에서 빗나간—배려에 힘입어 눅스의 말이 낮게, 중중거리며 이어졌다.
“발할라에 가면, 좋은 거 많은데. 그 중에 하나는 누군가 나를 기억해준다는 거였어. 예전에는, 임모탄 옆에서 운전할 때. 야, 너. 다들 그렇게 불러서 가끔은 이름을 잊기도 했어. 내 이름 말고. 동—그거. 동뇨, 친구 이름.”

수술 후 회복하느라 아래에만 겨우 하나 걸친 바지는 옷감이 얇아, 앉으며 당겨지자 다리의 우둘투둘한 실루엣이 어렴풋 드러났다. 눅스의 머릿속에, 아마도 음각으로 새겨졌을 수많은 양각들이.

“내가 최대한 기억하고 싶어서 몸에도 새기고, 시간이 나면 읽기도 하고, 그런데 이름을 모르는 친구가 죽을 때도 많아. 그러면 돌아와서 그때 이렇게 죽은 애가 누구인지 물어보는데, 거의 모른다고 해.”

그러나 선명한 순수함을 담은 초록처럼 푸른 눈은 흔들림 없이 허니를 직시하고.

“그래서 인상적이지 않은 채로 죽는 게 무서웠어. 누군가가 나를 기억해 줘야 하고, 그건 나 혼자의 욕, 욕—원하는 거지만. 발할라에 가기 위해서는 임모탄을 위해서 죽어야 하고. 그러니까 내 이름을 알 것만 같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희생하는 게 나한테는 좋은 기회였어.”

바닥을 점차로 짚으며 살금 뻗어오던 종잇장같은 손이, 끝내 허니에게 닿지는 않고.

“그렇지만 정말로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까 말야, 그 애들은 죽고 나서 내가 많이 기억하게 된 거잖아. 그럼 그 애들은 발할라에 가면 다시 볼 수 있잖아. 그런데 죽지 않은 사람을 너무 많이 기억하면, 허니, 그러면, 내가 죽고 나서는 못 보게 되는 거잖아.”

나는 허니의 눈에서 그곳을 보지만, 거기에 가도 허니를 볼 수 있을지는 몰라. 발할라는 뭐가 되게 많고, 아프지 않고, 배고프지 않고, 그런데 거기에 네가 없어서.

내가 널 기억해서.
그걸 여기 두고 가기 싫어서.

더듬대며 툭툭 끊어지는 문장으로나마 말을 마친 눅스는 이제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허니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평소라면 눅스가 말을 버벅일 때마다 낭랑히 끼어들어 이것저것 틀린 문장을 고쳐 주고 단어들을 정정해 주었어야 했을 허니의 목소리는 목구멍 깊숙이 자취를 감춘 지 오래다.

.....나 연모 안 한다며. 이 뻔뻔한 놈아. 그럼 난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해.
허니를 괴롭히던 수십 가지 의문들은 순식간에 간데없다. 대신 고백 없는 고백 공격에 머릿속이 쑥대밭이다. 황무지보다도 더한 모래지옥이다. 꼼짝없이 빨려들어가는 기분이다. 사람한테 붐스틱을, 왕 큰 폭탄을 던져 놓고도 혼자만 해맑은 저 시허연 무법자는, 멍하니 헤벌어진 허니의 입술을 보며 재미있는지 흉내내듯 똑같이 입을 벌리더니 그대로 헤헤 웃었다. 휘어지는 눈꼬리와, 물빛이 반사되어 빛나는 푸른 눈과, 함박웃음을 담기에 못내 버거워 보이는 흉터 많은 입술과. 그 모습이란 정말이지. 치도가 알려 준 쓸 만한 남자의 조건 두 가지—멋 하나도 없었고 쿨 하나도 안 했다.

그런데도,
이 바보가 뭐라는 거야. 코끝이 걷잡을 수 없이 매워서 허니는 다급히 고개를 숙였다. 마음 한 구석이 견딜 수 없이 설컹이는 바람에 울음이 날 것도 같고, 웃음이 날 것도 같고. 이런 감정은 그 어떤 책에서도 읽어본 바 없다.

“허니야? 허니야? 왜 그래?”
“가만히 있어.”
삽시간에 혼란스러운 기분에 휩싸여 이걸 가라앉힐 뭐라도 필요했다. 그래서 허니는 얼굴을 확인하려 낑낑대는 눅스의 머리통이라도 냅다 끌어안고 마구 쓰다듬었다. 밍숭하고 매끈한 촉감이 손끝에 닿아왔다. 따끈따끈한 생명의 온기도 함께. 시선 닿는 곳에는 여전히 뜻을 전부 알 수 없는 그림들이 어지럽게 새겨진 마른 등과, 종양덩어리 삼형제가 사라진 자리에 떡하니 붙은 큼직한 천조각이. 허니는 그제야 소리 없이 안도했다.
강아지 하나 키우는 거랑 다름없다더니. 케이퍼블이 거짓말했어. 역시 강아지랑은 거리가 멀지, 넌.

눅스,
등 뒤로 머뭇대며 마주 안아오는 팔의 무게가 느껴졌다. 믿을 수 없을 만치 가벼운 무게가. 조심스럽고, 또 간지러운 무게가.
내 눅스.







둘이 좋아한대요 얼레리꼴레리
눅스가 모지리는 아니라 다른 때도 저렇게 말 더듬고 그러지 않음. 익숙하지 않다 못해 거의 살면서 처음 얘기해보는 주제에 대해 말하는 거기도 하고, 최대한 정확한 언어로 표현하고 싶어서 저러는 거임. 매카닉 관련 대화할 때는 나름 유창함.
반면 허니는 책 많이 읽고 배우는 거 좋아하긴 하는데 세계관의 한계로 교육인프라가 마아않이 부족함+일하느라 대화할 시간 부족함+어림=언어구사와 감정 인지에 정상(?)세계관 기준 또래보다는 다소 서툰 편.
허니 본인은 모르지만 허니도 문장에 어색한 부분이 왕왕 있고, 눅스가 자꾸 자기 때문에 희생하려 드는 것도 불편해서 싫은 게 아니라 눅스가 다치고 위험하니까 싫은 거ㅇㅇ
좋은 글은 설명이 필요없이 글 자체만으로 이해되도록 해야 한다는데... 그렇게 됐다 읽어조서 코맙!

눅스너붕붕 홀트너붕붕
[Code: 66c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