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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09 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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렌은 슌스케가 저를 기억하지 못해도 괜찮았다. 제가 전부 기억하고 있었으니까. 슌스케를 천천히 제 옆으로 데려와, 온전히 제 품 안에 안겨 쉬게 하는 날, 전부 말해주겠노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렌이 간과한 것이 있었다. 제 세상의 전부였던 할아버지를 잃고 차디찬 현실에 던져진 슌스케는 웃는 법을 잊어버렸을만큼 건조하게 메말라버렸다는 것을. 매일 학교와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는 탓에 렌은 슌스케와 대화할 틈을 전혀 찾을 수가 없었다. 바로 눈 앞에 슌스케가 있지만 제 손에 닿지 않았다.
"...오메가 경매대회?"
지금 시대가 어떤 시대인데 아직도...렌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으나 그를 눈치채지 못한 후배는 렌이 관심을 가져준다는 사실에 신나 더욱 더 호들갑을 떨었다.
"네!!!이번에는 드디어 미치에다가 출전한다고 했거든요!!"
"뭐...?"
"제가 아까 학생회실 가서 잠깐 보고왔는데 장난아ㄴ...선배?선배?!"
학생회실로 향하는 렌의 발걸음이 점점 빨라지다못해 달음박질로 변했다.
"아 메구로선배! 오셨어요?"
"선배!"
저를 돌아보는 슌스케의 모습만이 눈에 아로새겨졌다. 피부가 비치는 시스루 셔츠에 짧은 반바지와 원래 얼굴을 찾아볼수 없을 정도로 짙고 퇴폐적인 메이크업은 원래도 어딘가 아슬아슬해보이던 슌스케를 한층 더 위험해보이게 만들고 있었다.
"미치...에다?"
렌은 복잡해지는 감정을 애써 감춘 채
"...아, 학과주점말인데, 칵테일까지는 허락받아왔어. 도수 제한은 있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슌스케에게서 거둬내었다. 잠깐이라도 좋으니 그들이 슌스케를 보지 않았으면 했다.
"선배가 어떻게..?설마...절 사신게 선배에요?"
저와 눈이 마주치자 당혹스러워서 어쩔줄몰라하는 모습에 슌스케를 이 모습으로 만든 이들을 향해 깊은 곳에서부터 분노가 끓어올랐다. 그래서였다.
"집에 가."
"네?"
"여긴 내가 있을테니까 너는 집 가라고. 축제기간 끝나면 바로 시험이잖아."
"선배는요?"
"선배도 시험기간이잖아요."
"이번에는 나 이겨야되는거 아니야?"
제가 생각해도 차가운 목소리가 튀어나와버린건.
"대체 저 왜 사셨어요."
"그냥."
"그냥...이요?"
"안 나가? 그럼 내가 나가주고."
슌스케를 방 안에 둔 채 그대로 나온 렌은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오로지 둘만 남은 방 안, 주홍빛이 도는 야릇한 빛깔의 조명 아래 반짝이던 땀에 살짝 젖은 머리칼, 저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붉게 물든던 뺨, 그보다 더 붉던 입술은 베어물면 체리향이 터질 것 같....
"....미친놈....."
렌은 실소를 터뜨렸다. 지금 이 상황에 이러고싶냐. 그날 이후, 저를 피해다니는 슌스케에 렌은 스스로를 향한 조소를 지었다. 내가 너를 어떻게 다시 찾아냈는데. 이렇게 되어버린걸까.
"G사 조사하려고?"
결국 도서관에서 마주친 슌스케에게 먼저 말을 걸어버렸다. 지친 기색으로 한숨을 내쉬는 처연한 얼굴을 더는 모르는 척 할 수가 없었다.
"네."
"열심이네, 늦은 시간까지."
"저 혼자니까 어쩔수없잖아요. 선배야말로 왜 이 시간까지 자료 찾고계세요?선배가 발표 준비하는 대신 조원분들이 자료 조사해주기로 한거 아니였어요?"
슌스케는 제가 피해다닌게 무색해질 정도로 제 대화에 자연스레 어울려주었다.
비 오는 날은, 렌이 제일 싫어하는 날씨였지만 슌스케와 단둘이 동아리실에서 서로를 마주보던 그 날은 예외였다.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도, 조금 눅눅한 분위기도, 서로의 숨소리와 펜 소리,자판소리만이 들리는 공간이 좋았다.
귀비와 대군의 악행에 대한 증거 수집과 동시에 학교 과제들과 시험까지 준비하는 것은 그 아무리 렌이라 해도 몸에 무리가 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언제 잠든지도 모르는 새에 잠이 들었고
'어차피 전하는 여기서 도망가지 못하실거에요. '
지.....가지마세요...
'여기에 얌전히 계시면 목숨은 살려드릴게요.'
혼자는...싫어요...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않는게 좋을거에요.'
살려주세요.....절 내보내주세요...
"...배....선배....?"
끔찍한 악몽을 꾸었다. 도망친지 오래라고 생각했던 그 악몽 속을 하염없이 헤메일 때, 제 손 안에 잡히는 따뜻한 온기에 저를 괴롭히던 모든 존재들의 잔상들이 거짓말처럼 흩어져 사라져갔다.
"저 어디 안가요. 담요 가져올게요."
저를 달래는 목소리가 너무 달콤하게 들려와서 눈을 뜨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렌은 그저, 다시 제 손에 잡혀온 존재를 놓지 않게 더 꼭 잡았다.
"그거 선배거에요."
"뭐?"
"선배 드시라고 사온거라고요. 단거 먹으면 피곤한거 좀 나아지실까싶어서."
"아...."
"혹시 단거 싫어하세요?"
"아니...좋아해."
나는 너를 좋아해 슌. 아직은 전하지못할 진심이였다. 슌스케가 가고서 그를 닮은 딸기 사탕의 껍질을 까 입에 집어넣은 렌은 입안에 퍼지는 달콤한 향에 어쩐지 눈물이 날거같았다.
"미치에다?"
"아 선배, 안녕하세요."
"친구랑 밥 먹으러 왔나봐?"
"데이트중입니다만...누구시죠?밋치랑 아는 사이신가요?"
애칭을 부르는 남자에 뱃속에서부터 불덩이가 끓어오르는듯 홧홧한 느낌에 휩싸였다. 네가 뭔데 슌스케를 밋치라고 불러. 나도 불러본 적 없는데 감히. 저조차 낯선 열기어린 감각이 렌을 지배해갔다.
"우산 감사했어요 선배."
"...발표준비하느라 바빠서 우산 안돌려주러 오는줄 알았는데."
그 낯선 감각의 이름을 끝내 알 수 없어 렌은 또다시 차갑게 대답해버렸다.
수업이 끝나고 강의실을 나오는 렌의 눈치를 살피던 타케다가 머뭇거리다가 그를 불렀다. 야 메구로.
"혹시 밋치후배가 너한테 잘못한거 있어?"
"아니."
"너 누구 발표할때 저격하고 그런적 한번도 없잖아. 오늘은 왜그런거야."
"......몰라 나도."
"뭔소리ㅇ...야야 어디가!! 오늘 동아리 모임은!!"
"갑자기 몸이 안좋아 술은 너희끼리 마셔."
....이게 아닌데. 왜 네앞에서만 나는 속수무책으로최악으로 치달을 수 밖에 없는걸까. 렌은 머리카락을 거칠게 헤집었다. 자신은 늘 정답만을 선택해왔다고 생각했는데 슌스케라는 문제에는 항상 정답만 비껴가는 기분이다.
"신경써주시는건 감사하지만 선배랑 밥먹는건 오늘이 처음이자 마지막일거에요. 저 내일 시험 끝나고 자퇴서 내러가거든요."
"무슨 일 있어?"
"결혼해요."
렌은 심장이 떨어져내리는 기분이 들었다. 결혼이라니.
"누구랑?그보다...너 애인 있었어?"
매일 너에 대한 보고를 받는데 네게 만나는 사람이 있다는 보고는 단 한번도 없었는데.
"애인이라뇨, 얼굴도 몰라요."
동궁으로 돌아오자마자 미치에다의 결혼상대에 대해 조사를 지시한 렌은 보고서를 읽고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미치에다 타케시....."
감히 내 신부를 다른 이에게 팔아넘기려고했다는거지. 렌의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이대로는 안되었다. 슌스케가 저를 기억해낼때까지 기다려주려고 했으나, 이제는 기다릴 여유가 없었다. 슌스케가 저를 기억하지 못하든,저를 어떻게 생각하든 전부 상관없었다. 그를 제 곁으로 데려와야했다. 렌은 대번에 황제궁으로 걸음을 옮겼다.
"...제 정인을 태자비로 맞이하고싶습니다."
태자의 그 한마디는 황궁을 뒤집어놓기 충분했다.
태자비를 상징하는 붉은색의 대례복을 입고 제게로 한걸음씩 걸어오는 슌스케의 모습이 슬로우모션으로 시야에 가득 찼다. 드디어, 진짜로 네가 내 신부가 되었구나 슌.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얼굴을 가리는 붉은 천을 들어올리자마자 저와 마주치는 두 눈동자. 많은 인파와 카메라에 둘러쌓여서도 오로지 저만을 똑바로 바라보는 눈동자가, 쓰레기와 오물로 뒤덮인 채 도망친 어린 왕자님을 향해 환하게 웃어주던 어린 아이의 반짝이고 사랑스럽던 눈동자와 겹쳐보여, 렌은 도저히 입을 맞추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으음...."
술이 들어가 조금 나른해진 몸, 온기가 맴도는 방 안. 그리고....
"쉬잇...선ㅂ...아니 태자전하 방금 전, 잠드셨어요."
너의 목소리와 너의 손길. 아아...아직도 꿈인가보다. 슌, 이거 꿈이지? 그럼 나 너한테 하고싶은 말 해도되지?
....ㅈ아해......
좋아해......슌.....
"네?선배 뭐라구요?"
.....사랑해. 너는 기억도 나지 않을 아주 오래 전부터.
눈꺼풀을 들어올리자마자 시야에 들어온 것은 제게 무릎을 내어준 채 꾸벅꾸벅 졸고 있는 새신부였다. 그런 슌스케가 깨지않도록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킨 렌은 슌스케의 몸을 안아올린 뒤 침대에 눕혔다. 국혼식의 고된 일정에 지쳤는지 곤히 잠든 이를 가만히 바라보던 렌이 천천히 얼굴을 내려 그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혼인 첫날밤에 신부에게 도둑키스를 해야만 하다니. 렌은 피식 웃었다.
"...날 전부 잊은 벌로 이 정도는 허락해줘."
어린 날의 나의 구원. 나의 태양. 나의 사랑. 이제부터는 내가 너를 지킬게.
메메밋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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