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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25 07:00

 

 

휴우...”

수업이 끝난 뒤. 강징은 책상 위로 길게 엎어지며 한숨을 쉬었음.

좋아하는 수업은 집중해서 듣는 편인데, 오늘은 교수님의 농담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음. 주변 학생들이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길래 흠칫 몸을 세운 강징은 제가 완전히 넋이 나가 있던 것을 깨달았음.

마치 연애라도 하는 것 같잖아.

강징은 차가운 책상의 감촉으로 뺨을 식히며 바닥을 퉁퉁 찼음.

어처구니 없게.

연애는 무슨, 가문들 약속으로 억지로 맺어져가지고. 사실은 성격이나 취미 등, 무엇 하나 아는 것도 없는 상대랑 몸만 섞었다가 생긴 감정이라니.

그렇지만 이상하든 어이없든, 자꾸만 그가 머릿속에 떠오르는 게 현실이었음.

잠시도 멈추지 않고 밀려오는 물결처럼 퍼부어지던 매력적인 향기를 떠올리다 보면 애가 탔고, 알몸이 된 채 그에게 안기고 마음대로 다루어지던 일을 생각하면 부끄러운데도 몸이 달아올랐음.

이래서 양음인의 결합은 사랑 따위보다 열 배는 믿을만하다고들 하는 건가?

이성적으로 생각해보면 분명 끔찍한 일인데. 친하지도 않은 양인에게 덮쳐졌지, 그 밑에서 마치 창부처럼 앙앙거렸지... 그런데도 생각하다보면 도무지 떨쳐낼 수 없는 육체적인 인력이 밀려와 수치심마저도 다 덮어버리는 듯했음.

 

 

다시 대학생으로 돌아온 강징은 이제 그를 만나면 어떻게 될까, 어떤 태도로 대해야 할까 상상하고 고민하다가 고개를 붕붕 저어 털어버리곤 함.

그런데 그를 보고 싶다고 생각하자마자 수시로 불러내던 부친의 전화가 뚝 끊어져버림.

강징은 은근이 짜증이 나며 한편으론 시무룩해졌음.

그는 연락도 안 하는구나. 내 번호는 알 텐데.

왜냐하면 강징도 남망기의 연락처를 받은지 오래였거든.

남망기와 헤어진 날로부터 약 3주가 지났을 때, 마침내 부친이 연회에 갈 준비를 하라고 전화를 걸어 오자 강징은 무척 두근거렸음.

 

 

 

 

 

 

이번의 모임은 또 누구누구의 취임식이라고 해서 유명 호텔의 아래층에서 열렸음.

우연히 이사간 아파트와 가까웠기 때문에 강징은 부친의 차를 기다리는 대신 혼자 택시를 타고 호텔 앞에 내렸음.

아직 시간이 일러서인지 연회장에는 사람들이 드문드문했음.

강징은 괜시리 눈을 피하는 것처럼 사람이 없는 곳을 골라 이동하는 한편으로 그가 와 있지 않은지 조심스럽게 탐색했음.

포장된 간식이 이르게 놓인 테이블이며, 가득 쌓인 반짝이는 글라스의 산, 풍성하게 놓인 꽃항아리 등등이 아직 준비가 완전히 끝나지 않았음에도 호화로워 보였음.

연회장을 다 둘러보아도 남씨 사람들은 아무도 보이지 않아서 너무 일렀나 싶었던 강징은 문득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저를 흘긋거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쫓기듯이 열린 문 밖으로 나왔음. 뒷정원에도 파티가 있는 듯 음식이 놓인 테이블이 줄지어 있는 것이 보였고, 기존의 관목 더미에도 꽃이 많이 피어 화사한 풍경이었음.

여기도 머물러 있을만한 곳은 아니다 싶어서 도로 들어가려던 강징의 눈에 언뜻 신경 쓰이는 실루엣이 스쳤음.

긴가민가하던 강징은 살그머니 다가가 나무 그늘 아래로 몸을 숙였음.

낮은 벽처럼 다듬은 관목 뒤로 한아름은 될 듯한 안개꽃 한무더기가 피어 있었음. 그리고 그 뒤로 짙푸른 나무 한그루를 두고 사이에 숨듯이 하여 한 쌍의 남녀가 서로를 마주보고 있었지.

언뜻 남망기를 발견하고 화틋 뺨이 분홍색으로 물들려던 강징은, 곧장 어른어른하게 미소를 지으려던 입가가 굳어지고 말았음.

이제까지 강징이 대외적으로 보아 왔던 남망기는 차갑고 예의바르기만 한 모습이었음. 누가 말을 걸어도 길게 답하지 않았고-그것은 혈연이나 가장 가까운 그의 형님이 말을 걸어도 마찬가지였음- 마치 속세로부터 뚝 떨어진 사람인 양, 누구에게도 먼저 관심을 주는 일이 없었고 살갑게 대하지도 않았음.

그러니 타인들도 여간해서는 남망기에게 다가가지 않았지

그런데, 그랬던 그가.

낯선 여성을 향해 부드럽게 웃고 있었음.

남망기를 쳐다보며 서 있는 여성은 옆모습만 보아도 무척 사랑스러워 보였음.

작달막한 키에, 드러난 어깨는 유순하고 동그란 선을 그리고 있었음.

그녀는 남망기에게 스스럼없이 말을 던지는 것처럼 보였고, 심지어 놀리기까지 하는 것 같았음.

희고 고운 손이 가볍게 남망기의 가슴을 밀치자, 강징은 뭔가 끔찍한 거라도 본 것처럼 전율하며 얼어붙었음.

그래도 남망기는 말없이 웃으며, 유리알 같은 눈 안에서 상대를 사랑스럽게 느끼는 감정이 하나도 숨겨지지 않고 그득히 넘쳐나는 것 같았음.

강징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치다가 돌아서서 기둥 뒤로 완전히 숨어버렸음.

그 뒤에서 크게 심호흡을 하며 정신이 이상해져버릴 것 같은 충격을 가라앉히려고 애를 썼음.

아니, 아니. 왜 이러는 거야.

애초부터 정략혼이었잖아. 그런데 뭘 기대하고, 감정을 가졌던 거냐고.

뒤늦게 쏟아 넘치려는 마음을 수습하려고 했지만 절로 떠오르는 생각들을 막을 수가 없었음.

그 날, 그가 무척 다정하게 대해 주었기 때문에 나만은 특별취급을 받는 거라고 믿었어.

하지만 사실은 단순히 열락기였기 때문에, 내가 그의 향에 끌린 것처럼 그도 나에게 강제적으로 끌렸던 것뿐이지.

필요한 게 있으십니까?”

발소리도 내지 않고 귀신같이 정원을 빠져나온 강징에게 다가온 웨이터가 상냥하게 물었지만 강징은 눈길도 주지 않고 내처 달려서 호텔 밖으로 나와 버렸음.

한참 동안 길거리를 방황한 다음에야 낯선 곳에 서 있는 자신을 깨달았고, 한길에 서 있기에는 너무 고급스러운 차림의 저를 사람들이 흘끔거리고 있는 것을 알았음. 근처에 전철역이 보이자 강징은 그대로 계단을 타고 내려갔음. 그리고 더욱 짙어지는 사람들의 시선을 무시하고 전철에 흔들리며 집으로 돌아왔음.

아니나다를까 일정시간 후 폰이 마구 울리기 시작했지만 강징은 전원을 끄고 던져버렸음.

 

 

그로부터 몇 시간이 흘러, 연회가 끝나고 아파트로 찾아온 부친이 무섭게 야단을 쳤지만, 여느 때라면 간이 콩알만하게 되었을 강징은 아무 느낌도 들지 않았음.

앞으로는 멋대로 굴면 안 된다, 어릴때와는 상황이 다르고, 이제 어른이고, 또 단순한 결혼이 아니니까 항상 의무감을 잊지 말아야 한다느니.

강징의 진짜 속마음을 읽지 못하는 부친의 잔소리는 끝없이 이어졌음.

드라마나 영화 같은 걸 보고 이상한 생각은 말라, 재벌이라 마음대로 살지 못한다는 생각을 하거나, 반항심을 갖지는 말라고, 평범한 사람이라면 마음대로 살 수 있을 것 같냐고, 사람의 인생은 다 나름대로 고충이 있는 법이고 싫은 일도 해야 하는 법이라고.

부친의 말은 옳든 그르든 간에 강징의 맘 속 아픔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얘기들이었음.

강징은 눈을 내리깐 채 한 귀로 듣고 마냥 흘려버리며 부친이 재촉할 때마다 기계적으로 네, . 하고 영혼없는 대답만 했음.

그 동안 머릿속에는 행복하게 웃던 남망기의 아름다운 얼굴이 자꾸 떠올랐음.

알아채기도 어려울 정도로 엷디 엷은 미소만 보고 두근거렸던 자신이 바보같이 느껴졌어.

마침내 너무 아플 것 같아서 하지 않으려 했던 생각이 심연에서 솟아나와 엉망이 된 강징의 가슴을 정통으로 찔렀음.

---그렇게나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