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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24 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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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학기 시험이 끝났다. 종합 평가는 방학이 된 후 우편으로 도착했다. 떨리는 손으로 뜯어본 성적 증명서에 제일 중요한 부분만 노려보았다. 그곳에는 2가 아닌 1이 적혀있었다. 2학년 수석, 68명 중 1등. 그 자리를 2학기 만에 되찾아온 날이었다. 잔소리는 시험에서 이기고 말하라는 그 애가 떠올랐다. 치켜선 눈썹, 일그러진 눈매 아래로 가려진 커다란 눈망울, 접시에 삐뚤게 놓인 오렌지 같은 입술. 떠올리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눈꺼풀에 새겨진 듯 선명했다. 얼른 만나고 싶었다. 성적표를 들이밀고 이제 누가 바보냐고 묻고 싶었다. 불만 가득한 눈빛으로 노려보겠지. 그 앞에서 자신 넘치는 미소로 이죽거리고 싶었다. 다음 성적으로는 내기를 걸어보는 건 어떨까. 하하, 생각만 해도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지금 가족들과 찌는 듯한 더위를 피해 크루즈 여행을 앞두고 있다는 사실만 아니라면 이 가방 안에 학교에 가져갈 물건을 넣고 있었겠지. 개학까지 앞으로 42일 남았다. 학교에서는 멈추게 하고 싶어도 흐르던 시간이 학교에서 나오자마자 멈춘 것 같았다. 40일 동안 피터의 얼굴을 보지 못한다. 눈을 감으면 선명한 그의 모습도 실물에 비할까. 아쉬움에 책상 위에 둔 사진을 들었다. 초점이 맞지 않아서 흐릿하게 나온 폴라로이드다. 사진 안에 담긴 그를 바라보다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검지로 그의 머리를 쓸었다. 직접 만져볼 수 없으니까 사진에 대고 원 없이 쓰다듬었다. 그의 얇은 머리카락 사이로 손가락을 넣고 쓸어 넘겨주면 짜증스럽게 인상을 찌푸리고 손을 쳐내겠지. 아니다. 저를 만지는 것도 싫어하지만 제 손에 다른 사람이 닿는 것도 싫어하는 것 같았다. 자신의 손을 피해서 자리를 옮길지도 모르겠다. 상상할수록 그리움은 커져갔다. 덧셈인 줄 알았더니 곱셈이었나? 비좁은 가슴과 머리에 그 애로 가득 차서 답답하다. 사진을 노려보다가 그의 작은 뺨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한없이 답답한 마음을 이렇게 푸는 방법 말곤 떠오르는 게 없었다. 필름 위에 남은 입술 자국을 엄지로 눌러 지웠다. 얼른, 네가 보고 싶어.
개학 일주일 전, 기숙사가 개방되었다. 유학생을 위한 배려였다. 다들 하루 전에나 기숙사로 돌아오는데 톰은 사흘이나 빠르게 돌아와 제 방에 짐을 풀고 있었다. 톰은 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안달이 나서 여행 가방을 비우고 하루에도 두세 번씩 짐가방을 열어 뭘 더 넣고, 가끔은 뺐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항상 창밖을 내다보고 식사를 할 때도 가벼운 스몰토크조차 일절 하지 않고 실수가 늘었다. 뭘 흘리면서 먹은 적이 없는데 식기를 떨어뜨리거나 음식을 물고 식사 시간이 끝나도록 식사를 마치지 못한다고 어머니가 불평을 하더랬다. 물론, 톰에게 자각이 있는 게 아니라 어머니의 불평으로 인지한 내용이었다. 어머니의 성격상 조금 과장도 붙었겠지. 설마 내가 입에 음식을 대고 있다가 그대로 포크로 입술을 찔렀을까. 그날 거울을 보니 아랫입술에 구멍이 세 개 나긴 했더라. 어머니가 집이 불편하면 빨리 가라고 성을 냈다. 죄송하다 말도 못 하고 쫓겨나듯 학교로 돌아왔다. 어머니께 죄송한 마음도 있었지만 곧 피터를 볼 생각에 두근거렸다. 피터를 한 번에 업고 갈 수 있게 근력 운동도 꾸준히 했다. 키도 더 컸다. 피터가 축 늘어져도 발이 끌리는 일은 없겠지. 짐 사이에 몰래 포장지를 씌운 초콜릿과 캐러멜도 챙겼다. 팬케이크에 시럽을 뿌리는 양을 봐서는 단 걸 좋아하는 듯했으니까. 무슨 생각을 해도 그 애가 먼저 보고 싶었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
피터는 개학 첫날에도 보이지 않았다. 입학식을 준비하는 동안은 수업이 거의 없었다. 피터가 또 어딘가 처박혔을 거라고 생각해서 학교 구석구석을 찾아다녔다. 피터는 머리카락 한 올조차 보이지 않았다. 입학식을 마치고 1학년 안내가 끝났을 때 톰은 사감을 찾았다.
“톰, 무슨 일이니?”
“궁금한 게 있어서요. 피터 미첼, 그 애 학교에 안 돌아왔나요?”
“피터는 사정 상 다음 주에나 온다더구나.”
“무슨 사정이요?”
프라이버시. 그런 대답이라면 거기서 멈춰야 했다. 톰은 사감을 한 번 더 붙잡았다. 그 애가 어디 있는지 너무 궁금해서 잠이 오질 않았다. 그래서, 안 되는 걸 알면서도 질문을 더 했다.
“그래. 어머니가 위독하다더라.”
실수다. 묻지 말걸. 사생활에 대해서 물어봐서 결과적으로 좋은 게 하나 없었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어떡하지? 걱정해도 도와줄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톰은 사감에게 인사를 하고 사감실에서 돌아 나왔다. 그가 돌아오기만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영영 돌아오지 않으면? 젠장, 괜히 물었어. 피터의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돌아오면 꼭 집 전화번호를 물어보자. 싫다고 하면 편지를 쓰겠다고 주소도 물어보자. 오늘도 입맛이 없었다.
-
피터는 달이 가득 찬 밤에 돌아왔다. 늦은 시각 굳게 닫힌 교정을 열고 넘어왔다. 톰의 눈에 들어온 피터는 어딘가 피곤해 보였다. 쌀쌀한 날씨에 코트를 입고 있었다. 평소와 다른 반듯하고 말쑥한 모양이 새 옷인 모양이다. 코트 안에는 교복을 입고 온 줄 알았더니 까만 정장이었다. 넥타이까지 까만 것이 느낌이 안 좋았다.
왜…… 나쁜 예감은, 항상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걸까.
다음 날, 피터와 교사의 대화를 훔쳐 들은 동급생들이 수군거렸다. 피터가 어머니의 장례식 때문에 늦게 돌아왔다는 이야기였다. 아버지의 사고. 어머니의 병. 떠돌이 생활. 학교 이사단의 후원. 무엇 하나 좋은 소식이 없었다. 동급생 중에 떠벌리기 좋아하는 녀석이 제 부모에게 들은 피터의 사정까지 덧붙였다. 당사자가 없는 자리에서 그의 배경이 퍼즐처럼 맞춰지고 있었다. 이때까지 느껴온 불편한 편애의 사유들이, 그 애의 불행이, 끊임없이 타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듣기 싫었다. 그러나 들을 수밖에 없었다. 그 애는 지금 기숙사 방문을 잠그고 나오지 않으니까. 화제에 끼어든 아이들 사이에 동정론이 퍼졌다. 자신의 처지와 비교해서 피터 미첼은 밑바닥 인생인 걸 깨달은 것이다. 엘리트 코스를 밟을 자신들에 비하면, 아니 비교할 것이 하나도 없었다. 뭘 해도 피터가 사회에 나가서 저들의 위로 오를 일이 없다고 판단했겠지. 순수한 마음에서 나오는 공감과 측은지심이 아니라 계급 짓기 좋아하는 녀석들의 단순하고, 비열한 사유였다. 톰은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났다. 더 들을 것도 없었다.
-
톰의 손에는 봉투 하나와 잼이 들려있었다. 주머니에는 사감실에서 빌린 열쇠도 하나 들어있었다. 유리병을 떨어뜨리지 않게 한 손에 힘겹게 들고 피터의 방문을 두드렸다. 노크 소리에도 조용했다. 톰은 크게 숨을 내쉬고 한 번 더 노크를 했다. 그래도 열리지 않으면 억지로 문을 열고 들어갈 생각이었다. 마음속으로 열까지 세고 주머니에 손을 넣으려고 하자 문이 열렸다. 문고리만 조금 돌아간 정도였다. 톰은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잽싸게 몸을 집어넣었다. 피터는 문을 열어주고서 침대에 앉아있었다. 언제부터 안 먹은 건지 눈가는 움푹 파여있었다. 말할 기운도 없는지 고개를 숙이고 바닥만 보고 있었다.
“마멀레이드 좋아해?”
“…….”
“여행 가서 사 온 초콜릿도 있어.”
“……먹기 싫어.”
“하나만 먹어.”
“왜?”
짧은 질문에 톰은 말문이 막혔다. 답은 어렵지 않았다. 네가 이대로 죽을 것 같으니까. 네가 죽음과 너무 가까이 있으니까. 먹으면 살아야 하니까. 하나도 입 밖으로 낼 수가 없었다.
“맛있으니까.”
톰은 의자를 끌어와 피터 앞에 마주 앉았다. 가져온 봉투에서 꺼낸 초콜릿의 포장을 풀었다. 제 입으로 먼저 넣고 봉투를 바닥에 던졌다. 피터는 시야에 들어온 초콜릿 봉투를 보고 짜증을 냈다.
“바닥에, 버리지 마.”
“다 먹고 내가 치울게.”
톰은 하나 더 꺼내서 이번에는 피터의 입에 넣어주었다. 다행히 뱉지는 않았다. 입에 넣고 있으면 체온에 녹아 서서히 목으로 넘어갈 터였다. 톰의 입에서 녹고 있는 것처럼. 얼마 안 가서 배꼽 근처에서 위장이 요동치는 소리가 났다. 배탈이라도 난 것처럼 꼬르륵거렸다. 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닥에 버린 포장지를 주워들고 가져온 봉투는 그대로 놓고 방문을 열었다.
“이제 갈게.”
“……왜?”
“그야, 곧 점호시간이니까.”
문을 닫고 나올 때까지 피터의 시선은 톰의 발을 쫓았다. 톰도 알고 있었다. 피터에게 위로가 필요하다는 것을. 그러나 그 어느 것 하나도 피터의 입에서 듣지 못한 이야기들이기에 피터가 원하는 것을 줄 수가 없었다. 몰라야 했던 것들이다.
“피터 미첼, 내일 보자.”
“…….”
“굿나잇.”
“……너도.”
톰은 귀를 의심했다. 하지만 그걸로 충분했다. 조심스럽게 문을 닫고 제 방을 향해 걸었다. 발소리에서 망설임이 느껴져서는 안 된다. 그렇게 생각하니 순식간에 제 방에 도착했다. 그의 성격을 생각하면 모르는 척해주는 게 정답이었겠지? 답안지도 없는 문제를 푸느라 머리가 터질 것처럼 아팠다. 톰은 오늘도 잠들지 못했다. 기대와 흥분이 아닌 불안함에 쉽게 잠을 이루지 못했다. 얼른 해가 뜨면 좋겠다. 다시 그 애의 얼굴을 보러 가고 싶었다. 닫힌 방문과 복도가 먼 나라처럼 느껴졌다.
아이스매브 아맵
3학기 시험이 끝났다. 종합 평가는 방학이 된 후 우편으로 도착했다. 떨리는 손으로 뜯어본 성적 증명서에 제일 중요한 부분만 노려보았다. 그곳에는 2가 아닌 1이 적혀있었다. 2학년 수석, 68명 중 1등. 그 자리를 2학기 만에 되찾아온 날이었다. 잔소리는 시험에서 이기고 말하라는 그 애가 떠올랐다. 치켜선 눈썹, 일그러진 눈매 아래로 가려진 커다란 눈망울, 접시에 삐뚤게 놓인 오렌지 같은 입술. 떠올리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눈꺼풀에 새겨진 듯 선명했다. 얼른 만나고 싶었다. 성적표를 들이밀고 이제 누가 바보냐고 묻고 싶었다. 불만 가득한 눈빛으로 노려보겠지. 그 앞에서 자신 넘치는 미소로 이죽거리고 싶었다. 다음 성적으로는 내기를 걸어보는 건 어떨까. 하하, 생각만 해도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지금 가족들과 찌는 듯한 더위를 피해 크루즈 여행을 앞두고 있다는 사실만 아니라면 이 가방 안에 학교에 가져갈 물건을 넣고 있었겠지. 개학까지 앞으로 42일 남았다. 학교에서는 멈추게 하고 싶어도 흐르던 시간이 학교에서 나오자마자 멈춘 것 같았다. 40일 동안 피터의 얼굴을 보지 못한다. 눈을 감으면 선명한 그의 모습도 실물에 비할까. 아쉬움에 책상 위에 둔 사진을 들었다. 초점이 맞지 않아서 흐릿하게 나온 폴라로이드다. 사진 안에 담긴 그를 바라보다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검지로 그의 머리를 쓸었다. 직접 만져볼 수 없으니까 사진에 대고 원 없이 쓰다듬었다. 그의 얇은 머리카락 사이로 손가락을 넣고 쓸어 넘겨주면 짜증스럽게 인상을 찌푸리고 손을 쳐내겠지. 아니다. 저를 만지는 것도 싫어하지만 제 손에 다른 사람이 닿는 것도 싫어하는 것 같았다. 자신의 손을 피해서 자리를 옮길지도 모르겠다. 상상할수록 그리움은 커져갔다. 덧셈인 줄 알았더니 곱셈이었나? 비좁은 가슴과 머리에 그 애로 가득 차서 답답하다. 사진을 노려보다가 그의 작은 뺨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한없이 답답한 마음을 이렇게 푸는 방법 말곤 떠오르는 게 없었다. 필름 위에 남은 입술 자국을 엄지로 눌러 지웠다. 얼른, 네가 보고 싶어.
개학 일주일 전, 기숙사가 개방되었다. 유학생을 위한 배려였다. 다들 하루 전에나 기숙사로 돌아오는데 톰은 사흘이나 빠르게 돌아와 제 방에 짐을 풀고 있었다. 톰은 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안달이 나서 여행 가방을 비우고 하루에도 두세 번씩 짐가방을 열어 뭘 더 넣고, 가끔은 뺐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항상 창밖을 내다보고 식사를 할 때도 가벼운 스몰토크조차 일절 하지 않고 실수가 늘었다. 뭘 흘리면서 먹은 적이 없는데 식기를 떨어뜨리거나 음식을 물고 식사 시간이 끝나도록 식사를 마치지 못한다고 어머니가 불평을 하더랬다. 물론, 톰에게 자각이 있는 게 아니라 어머니의 불평으로 인지한 내용이었다. 어머니의 성격상 조금 과장도 붙었겠지. 설마 내가 입에 음식을 대고 있다가 그대로 포크로 입술을 찔렀을까. 그날 거울을 보니 아랫입술에 구멍이 세 개 나긴 했더라. 어머니가 집이 불편하면 빨리 가라고 성을 냈다. 죄송하다 말도 못 하고 쫓겨나듯 학교로 돌아왔다. 어머니께 죄송한 마음도 있었지만 곧 피터를 볼 생각에 두근거렸다. 피터를 한 번에 업고 갈 수 있게 근력 운동도 꾸준히 했다. 키도 더 컸다. 피터가 축 늘어져도 발이 끌리는 일은 없겠지. 짐 사이에 몰래 포장지를 씌운 초콜릿과 캐러멜도 챙겼다. 팬케이크에 시럽을 뿌리는 양을 봐서는 단 걸 좋아하는 듯했으니까. 무슨 생각을 해도 그 애가 먼저 보고 싶었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
피터는 개학 첫날에도 보이지 않았다. 입학식을 준비하는 동안은 수업이 거의 없었다. 피터가 또 어딘가 처박혔을 거라고 생각해서 학교 구석구석을 찾아다녔다. 피터는 머리카락 한 올조차 보이지 않았다. 입학식을 마치고 1학년 안내가 끝났을 때 톰은 사감을 찾았다.
“톰, 무슨 일이니?”
“궁금한 게 있어서요. 피터 미첼, 그 애 학교에 안 돌아왔나요?”
“피터는 사정 상 다음 주에나 온다더구나.”
“무슨 사정이요?”
프라이버시. 그런 대답이라면 거기서 멈춰야 했다. 톰은 사감을 한 번 더 붙잡았다. 그 애가 어디 있는지 너무 궁금해서 잠이 오질 않았다. 그래서, 안 되는 걸 알면서도 질문을 더 했다.
“그래. 어머니가 위독하다더라.”
실수다. 묻지 말걸. 사생활에 대해서 물어봐서 결과적으로 좋은 게 하나 없었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어떡하지? 걱정해도 도와줄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톰은 사감에게 인사를 하고 사감실에서 돌아 나왔다. 그가 돌아오기만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영영 돌아오지 않으면? 젠장, 괜히 물었어. 피터의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돌아오면 꼭 집 전화번호를 물어보자. 싫다고 하면 편지를 쓰겠다고 주소도 물어보자. 오늘도 입맛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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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는 달이 가득 찬 밤에 돌아왔다. 늦은 시각 굳게 닫힌 교정을 열고 넘어왔다. 톰의 눈에 들어온 피터는 어딘가 피곤해 보였다. 쌀쌀한 날씨에 코트를 입고 있었다. 평소와 다른 반듯하고 말쑥한 모양이 새 옷인 모양이다. 코트 안에는 교복을 입고 온 줄 알았더니 까만 정장이었다. 넥타이까지 까만 것이 느낌이 안 좋았다.
왜…… 나쁜 예감은, 항상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걸까.
다음 날, 피터와 교사의 대화를 훔쳐 들은 동급생들이 수군거렸다. 피터가 어머니의 장례식 때문에 늦게 돌아왔다는 이야기였다. 아버지의 사고. 어머니의 병. 떠돌이 생활. 학교 이사단의 후원. 무엇 하나 좋은 소식이 없었다. 동급생 중에 떠벌리기 좋아하는 녀석이 제 부모에게 들은 피터의 사정까지 덧붙였다. 당사자가 없는 자리에서 그의 배경이 퍼즐처럼 맞춰지고 있었다. 이때까지 느껴온 불편한 편애의 사유들이, 그 애의 불행이, 끊임없이 타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듣기 싫었다. 그러나 들을 수밖에 없었다. 그 애는 지금 기숙사 방문을 잠그고 나오지 않으니까. 화제에 끼어든 아이들 사이에 동정론이 퍼졌다. 자신의 처지와 비교해서 피터 미첼은 밑바닥 인생인 걸 깨달은 것이다. 엘리트 코스를 밟을 자신들에 비하면, 아니 비교할 것이 하나도 없었다. 뭘 해도 피터가 사회에 나가서 저들의 위로 오를 일이 없다고 판단했겠지. 순수한 마음에서 나오는 공감과 측은지심이 아니라 계급 짓기 좋아하는 녀석들의 단순하고, 비열한 사유였다. 톰은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났다. 더 들을 것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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톰의 손에는 봉투 하나와 잼이 들려있었다. 주머니에는 사감실에서 빌린 열쇠도 하나 들어있었다. 유리병을 떨어뜨리지 않게 한 손에 힘겹게 들고 피터의 방문을 두드렸다. 노크 소리에도 조용했다. 톰은 크게 숨을 내쉬고 한 번 더 노크를 했다. 그래도 열리지 않으면 억지로 문을 열고 들어갈 생각이었다. 마음속으로 열까지 세고 주머니에 손을 넣으려고 하자 문이 열렸다. 문고리만 조금 돌아간 정도였다. 톰은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잽싸게 몸을 집어넣었다. 피터는 문을 열어주고서 침대에 앉아있었다. 언제부터 안 먹은 건지 눈가는 움푹 파여있었다. 말할 기운도 없는지 고개를 숙이고 바닥만 보고 있었다.
“마멀레이드 좋아해?”
“…….”
“여행 가서 사 온 초콜릿도 있어.”
“……먹기 싫어.”
“하나만 먹어.”
“왜?”
짧은 질문에 톰은 말문이 막혔다. 답은 어렵지 않았다. 네가 이대로 죽을 것 같으니까. 네가 죽음과 너무 가까이 있으니까. 먹으면 살아야 하니까. 하나도 입 밖으로 낼 수가 없었다.
“맛있으니까.”
톰은 의자를 끌어와 피터 앞에 마주 앉았다. 가져온 봉투에서 꺼낸 초콜릿의 포장을 풀었다. 제 입으로 먼저 넣고 봉투를 바닥에 던졌다. 피터는 시야에 들어온 초콜릿 봉투를 보고 짜증을 냈다.
“바닥에, 버리지 마.”
“다 먹고 내가 치울게.”
톰은 하나 더 꺼내서 이번에는 피터의 입에 넣어주었다. 다행히 뱉지는 않았다. 입에 넣고 있으면 체온에 녹아 서서히 목으로 넘어갈 터였다. 톰의 입에서 녹고 있는 것처럼. 얼마 안 가서 배꼽 근처에서 위장이 요동치는 소리가 났다. 배탈이라도 난 것처럼 꼬르륵거렸다. 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닥에 버린 포장지를 주워들고 가져온 봉투는 그대로 놓고 방문을 열었다.
“이제 갈게.”
“……왜?”
“그야, 곧 점호시간이니까.”
문을 닫고 나올 때까지 피터의 시선은 톰의 발을 쫓았다. 톰도 알고 있었다. 피터에게 위로가 필요하다는 것을. 그러나 그 어느 것 하나도 피터의 입에서 듣지 못한 이야기들이기에 피터가 원하는 것을 줄 수가 없었다. 몰라야 했던 것들이다.
“피터 미첼, 내일 보자.”
“…….”
“굿나잇.”
“……너도.”
톰은 귀를 의심했다. 하지만 그걸로 충분했다. 조심스럽게 문을 닫고 제 방을 향해 걸었다. 발소리에서 망설임이 느껴져서는 안 된다. 그렇게 생각하니 순식간에 제 방에 도착했다. 그의 성격을 생각하면 모르는 척해주는 게 정답이었겠지? 답안지도 없는 문제를 푸느라 머리가 터질 것처럼 아팠다. 톰은 오늘도 잠들지 못했다. 기대와 흥분이 아닌 불안함에 쉽게 잠을 이루지 못했다. 얼른 해가 뜨면 좋겠다. 다시 그 애의 얼굴을 보러 가고 싶었다. 닫힌 방문과 복도가 먼 나라처럼 느껴졌다.
아이스매브 아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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