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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12 23:36
https://hygall.com/593411342
처음 가본 벤의 집은 이게 헐리웃 스케일인가 단박에 체감됐어. 휘황한 풀이나 수백 개의 방이 딸린 건 아니어도 근사한 선셋을 감상할 수 있는 고지대에 위치해 있고 보안이 훌륭한 빌리지가 능히 윤택함을 짐작케 해. 허니도 독립된 공간을 자가로 소유하고 있지만 보안이 철저한 이런 빌리지에 오려면 시간이 좀 더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듦.
" 뭐 마실래? "
" 아무거나 "
보통 친구 집에 가면 이 나라 사람들은 비어를 내어 오는데 이 남자는 우아한 영국인 게 느껴져. 고마워. 기포가 몽글몽글 피어 오르는 핑크색 스파클링 와인이 톡 쏘면서도 달큰하니 쇼핑하느라 후덥지근했던 기분과 텁텁한 입안을 가라앉히며 자동 입가에 웃음을 머금게 했어.
" 테라스 구경해도 될까? "
" 물론 "
테라스로 나가는 문을 열자 청징한 바람이 불어 옷깃 사이로 스며 들어와. 태탕한 캘리포니아지만 바람은 잦지 않아 허니가 사는 루프탑에선 어쩌다 만끽할 수 있는 것인데 베벌리힐즈에선 적당히 기분을 좋을 정도의 바람이 마음을 간질이게 했어. 한 발씩 앞으로 걸음을 디딜 때마다 바람이 허니와 벤 사이를 유영하며 꼭 왈츠를 추는 것만 같아.
" 한 잔 더 마실래 ? " 삽시간에 비워진 잔을 보며 뒤따라온 벤이 말했어. " 응, 부탁해. " 허니는 멀리 가지 않고도 이 근사한 풍경을 매일 감상할 수 있는 벤이 부러워. 아예 와인을 통째로 가져온 벤이 이번에도 똑같이 잔을 채우면 허니는 저 혼자 벤의 잔에 부딪히며 챙그랑 소릴 낼 거야.
" 드라마 잘 되길 기원해! "
" 혼자만 하는 게 어디 있어? 다시 다시! "
한 박자 늦은 벤이 입을 삐죽이자 허니는 입술을 앙다물며 비집고 나오는 웃음을 가무리고 있겠지.
" 우리의 재회를 축하하며-! "
이번엔 벤이 일방적으로 멘트를 끊는데 허니는 그 순간, 그 말이 더없이 달콤하게 느껴지는 거야. 말 그대로 정말 재회를 기념하는 단순한 말이거늘 적당히 얼굴과 몸에 스며 기분을 달근달근하게 하는 바람 때문인지, 근사한 풍광을 배경으로 두고 있어서인지, 어쩌다 엑스트라로서 제 인생에 출연했어야 할 사람이 너무 자주 나타나는 게 정말이지 영화 아니고는 설명할 수 없어 지금 이 순간이 마치 소설의 절정 부분 혹은 인생에서 가장 강렬한 순간에 도달해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그것도 아니라면 채 두 잔도 되지 않은 와인에 벌써 취해 유난히 그 말이 달콤하게 들렸는지도.
" 넌, 참.. "
허니는 정말이지 아무것도 안 했는데 찰나에 저를 무너뜨리는 벤의 행동이 새삼 참담하게 다가올 거 같다. 이게 데이트든, 아니든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어. 인생에 있어서 찰나일지라도 아무 걱정 없이 그저 아름다운 것을 보고 감탄하고 기꺼워하며 순간의 행복을 오롯하게 느낄 수 있는 시간이 생각보다 별로 없잖아. 헌데 벤을 만나고부터는 그런 순간순간의 떨림과 행복이 자주 주어지고 있어. 지금도 그래. 그가 싱글임을 확인사살하고 난 후 이곳으로 오긴 했지만, 집을 오기로 한 순간부터 엷게 떨리던 심장을 필두로 들어오자마자 건넨 센스 있는 와인, 여리면서도 상쾌한 바람에 기분이 좋아졌어. 또 저는 벤의 성공을 빌었는데 벤은 ' 우리 ' 라고 2인칭으로 묶는 것도 내심 좋아.
자주 누군가를 웃게 하거나 행복하게 할 수 있다면 그건 참 대단한 재주이자 매력인데 어떤 ' 순간 ' 이나 혹은 어떤 대상의 ' 그 점 '이 무지 좋으면 그게 좋으면서도 동시에 슬퍼지곤 하잖아. 그건 마치 여행에서 몹시 근사한 풍광을 보면 좋으면서도 그 막대함에 어찌할 지 몰라 자동 눈물이 나오는 이치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는데 저를 자주 웃게 하고 기분 좋게 만드는 벤이, 좋으면서도 제가 어떻게 컨트롤할 수 없는 막대함과 무력함을 지녀 동시에 참담함도 느껴. 이런 순간들이 제 삶에 계속 이어진다는 보장도 없고, 애초에 그런 걸 믿을 순진한 나이도 아니니까 좋으면서도 좋으니까 그만 울고 싶어질 거야.
허니는 두 번째 잔을 다 비우고 연거푸 세 번째 잔을 청했어. 안 돼. 요리 해주기로 했잖아. 이것만, 한 잔만 더어~ 일부러 콧소리를 내며 답지 않게 졸랐더니 벤은 낮게 코웃음을 치지만 금방 잔을 채워줄 거야. 허니는 저를 마구 헝클러뜨리는 벤을 지우듯 빠르게 감정을 빨리 해체시켜버렸어. 계속 벤을 보거나 아니면 쟤가 지껄이는 말을 듣고 있다간 간만에 좋은 시간이 신파로 물들지도 모른다 생각했어.
레시피만 알려 달라 했지만 조리법을 모르니 기실 허니가 요리 다 하는 셈이 되겠다. 허니야 어릴 적에 숱하게 먹었고 가끔 생각나면 만들어 먹기도 해 오랜만에 맛보는 음식 정도였는데 벤은 사정이 달랐지. 십여 년 만에 조우하는 음식은 단숨에 허니와의 추억도 소환해 왔는데 이런저런 추억을 얘기하다 보니 벅차면서도 참담했던 기분은 온데 간데 없이 사라지고 적당히 배가 불러오면서 밀려오는 만족감에 다시금 입가를 실그러뜨리게 될 거 같다.
" 지도를 보면서 대충 감을 잡고 확인 차 물어본 건데 친히 숙소까지 데려다 주더라고. 너무 고마워서 거듭 고맙다고 했더니 아니나 다를까 네 말대로 돈을 요구하더라고. "
" 맞아. 사실 아프리카 전역이 그래. 뭘 하나 구경하려 해도 다 돈을 요구해. 그걸 계속 겪다 보면 노이로제 걸릴 지경이야. 그래도 벤이 겪은 건 숙소를 정확히, 빠르게 도달한 대가니까 양호한 수준이었네 뭘. "
북아프리카 여행을 할 때 주의점을 당부했는데 이집트에서 헤어진 뒤 혼자 카사블랑카를 여행할 때 벤은 숙소 위치를 묻다가 역시나 구걸을 당했다고 하는 거야.
" 벤은 그래도 백인 남자라 그 정도야. 동양인 여자는.. 인종 차별은 기본이거니와 지나가기만 해도 캣콜링이 일상인 그곳에서는 사실 뜨거운 정을 느끼기 전에 적대감이나 불쾌감을 더 많이 적립하게 돼. "
" 심해? "
" 많이. 심지어 유명한 호텔에서조차 직원들이 칭챙총을 말할 정도야. 첫날, 벤이 백인 남자라서 우리가 열기구를 탈 수 있었던 거지, 내 일행이 만일 같은 동양인 남자였다면 난 꼼짝 없이 중국인 그룹으로 갔을 거야. 내 일행이 중국 사람이든 일본인이든 상관 없어. 그저 동양인을 전부 중국인으로 묶어버리는 것도 그들만의 차별 방식이지. "
" ... "
벤은 단지 중국어를 하지 못해 제게 부탁을 한 거라고만 생각했는데 내막을 알고 보니 세계에 만연한 차별, 특히 여성일수록 더 많은 것을 감수해야 한다는 걸 뒤늦게 절감해. 카사블랑카 여행 당시 주의를 기울였어도 거의 반 빼앗기에 가까운 구걸이 불편하고 내키질 않았는데 제가 겪은 건 애교 수준인 거야. 반면 그때 여행으로 깨닫고 체득한 것도 있어. 사정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시민들 사정이 대체로 윤택한 것과는 거리가 있는 터라 대부분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않은 상황인데 그 와중에 정을 베풀어주었던 구두 수선점의 할아버지 기억이 벤에게도 꽤 오랜 기억으로 남아 있어. 그래서 아무리 애옥한 상황에서도 절대 비굴하거나 남에게 위해를 가하거나 인색하게 굴거나 열등감을 표출하지 말아야 한다는 걸 깨달았어. 왜냐면 그때의 편린으로 여행에서의 불편하고 내키질 않았던 다른 기억을 전부 상쇄하고 그때를 추억하며 무엇보다 허니를 그리워할 수 있게 됐거든.
" 나 사실 그때 여행으로 내 캐릭터를 완성시킨 것도 있어. "
" ? "
" 재키 앤 라이언 영화 보면 라이언 성격이 내가 바라는 나? 내가 되고 싶은 나? 로 투영해 많이 넣었어. "
" 나 그 영화 너무 좋아해! "
" 진짜? "
" 응, 네 영화 중에서 제일 좋더라."
" Really? "
허니는 고갤 세차게 흔들었어. 제가 출연한 영화를 본 건 물론이거니와 매우 좋아한다는 말에 벤 얼굴은 마치 십대 소년의 천진함으로 환하게 피어났겠다.
" 어떤 점을 투영했는데? "
" 거기서 라이언은 이리저리 떠돌아 다니는 방랑자 음악가잖아. 늘 화물 열차 사이에 몸을 숨겨 전국을 떠돌며 오늘은 누굴 만날지, 내일은 또 무슨 일이 일어날 지 모른 채 그저 물 흐르듯 흘러가며 버스킹으로 자신의 꿈을 간신히 이어나가는 유랑자. 그런 생활을 이어 나가니까 늘 따가운 눈총 내지는 아쉬운 소릴 듣는 사정에 자주 놓이는데 그런 척박한 환경 안에서도 거칠거나 비굴하거나 드라이하지 않고 따뜻해. 또 빈한한 사정에 열등감도 없고 막연한 미래에 절망하지도 않아. 그 수선점 할아버지처럼. 그래서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서도 내가 되고자 하는 바를 녹여냈어. "
" Hmmm.. "
허니는 잠시 턱을 매만지다 뜬금 없이 벤에게 손을 내밀었어. 내놔. 뭘? 내 놓으라고..! 갑자기 손을 내밀며 대뜸 내놓으라는 말에 벤은 그저 영문 모를 얼굴만 하겠다.
" 내가 라이언 캐릭터를 구축할 수 있게 영감을 줬으니 돈 달라고! "
허니의 액션은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었어. 하나는 벤이 바라고 되고 싶은 나에서 정말로 자신이 되고 싶은 나로 지금 완성되었는지 테스트한 거였고 - 그러니까 느닷없는 이런 생떼나 강제에도 거칠게 굴지 않고 친절하고 넉넉하게 베풀어줄 수 있는 따뜻한 사람이 되었는지 시험한 거였고 - 다른 하나는 여행에서 호되게 당한 구걸 경험을 소환해 영감을 핑계로 장난친 거여라.
벤은 곧 허니의 의중을 알아차리곤 소파에 몸을 접어가며 웃겠지. 추억을 바로 소환해 장난치는 재치도 재치인데 단순히 장난으로만 치부하며 거절할 순 없어. 자기가 되고 싶은 이상형을 녹여냈다고 했는데 만일 거절하면 아직 그만큼 인격적으로 도달하지 못했거나 자긴 그런 사람이 아니란 뜻이 되니 마냥 장난으로만 치부하긴 상당히 고단수야. 그렇다고 돈을 주자니 또 액수를 얼마로 해야 할지도 애매한 거야.
사실 허니 말이 아예 틀린 건 아닌 게 그 여행을 통해서 추억을 새긴 건 물론, 캐릭터 구축에도 도움을 받았으니 뒤늦게 허니에게 보답을 하는 것도 억울하다는 생각은 안 들어. 오늘 요리도 자기가 보답을 하고 싶은 건데 결과적으로 또 허니에게 보답을 받은 셈이 됐고. 결국 벤은 허니의 재치와 기지에 한참 웃다 웃음을 멈추곤 갑자기 손을 뒤로 하더니 자기가 하고 있던 목걸이를 풀어 허니 손에 떨어뜨려 줬으면 좋겠다.
" 아끼는 거야. "
" ? "
가지라는 투라 눈썹을 까딱하니까 이번엔 허니가 진심이냐고 토끼눈을 하겠지. 진짜? 거듭되는 물음에도 고개만 끄덕이길래 이게 헐리우드에 사는 배우의 사이즈인가 살짝 얼떨떨해 있는 사이 벤이 허니 손바닥에 있는 목걸이를 집어서 직접 목에 걸어주겠다. 그리곤 목걸이 뒷면에 BB 라고 새겨진 제 이름 이니셜을 보며 잘 간직해 달라고 하는 거지.
.... 허니는 이니셜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생각했어. 장난으로 한 건데 이거 받아도 되는 걸까..?
설거지 한 뒤 시각을 보니 해가 훌쩍 이울어 가고 있겠다. 내일을 위해서라면 작별이 마땅하지만 목걸이 무게 때문인지, 아까 내리 석 잔을 먹은 와인 때문인지, 식곤증 때문인지 몸은 자꾸만 소파 안으로 파고만 들어라. 조금만 더 있다 가자, 벤이 태워줄 거야. 하며 밍기적거리고 있는데 식사도 다 끝났고 해마저 저물기 시작하니 새삼 둘만 있는 적막함이 더 크게 다가올 거 같다. 티 마실래? 좋지. 결국 이 적요함을 깨고자 벤이 티를 준비하러 나서면 허니는 서둘러 티비를 켜서 어색함을 좀 더 덮기 위해 애쓸 거 같다.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는데 딱히 구미에 당기는 게 없어 대충 스포츠 채널 한 군데로 돌려놓고 벤을 기다리니 곧 따끈한 밀크티가 배달될 거야. 허니는 우유막이 생길 정도로 아주 뜨겁게 데운 우유를 넣는 게 좋은데 제 레시피를 말했다간 이 영국인은 이상한 밀크티를 마신다며 얼굴을 일그러뜨릴 게 분명해.
" 맞다. 그거 한다! " 벤이 리모컨을 가져와 채널을 돌렸어. 광고 중인 화면 위로는 CBS 채널의 토크쇼가 곧 방송될 거라고 떠 있어라. 이어 광고가 끝나고 쇼가 시작되면 벤이 양손으로 동그랗게 잔을 말아 잡곤 소파에 몸을 기대는데 쇼 게스트는 다름 아닌 벤이겠다.
" 어? 혹시? " 화면 속 모습을 보건대 이건 3주 전 차에서 만난 그날이야. 아아- 그때 녹화한 방송이구나. 그땐 의상을 실어 간 터라 차 안에선 니트를 입고 있었는데 방송에선 보다 근사한 성장 차림으로 나오니까 색달라 보여. 허니는 늘 화면에서만 보던 사람이 바로 옆에 있는 게 신기하기도 하고 이 순간 자체가 너무 기이해 벤 얼굴을 화면과 번갈아 보는데 벤은 그저 와유하듯 반은 소파에 누워 여유로운 낯일 거야.
( H : 토크쇼 호스트 / B : 벤 반스 )
H : 웰컴 벤 반스, 어떻게 지냈어요?
B : 얼마 전에 공연을 막 마쳤고요. 반년 전 드라마 촬영을 끝내고 이제 방영을 앞두고 있어요.
H : 오, 공연은 어땠어요?
B : 첫 앨범이라 무사히 잘 치른 것에 만족하고 도와준 친구들과 스탭들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있어요. 공연에 와 주신 모든 분들, 진심으로 감사해요.
H : 오늘 참 멋져요. 당신 43살이죠? 10살은 어려 보여요.
B : 감사해요.
H : 드라마에서 보던 키리건 장군님과 상당히 달라 보이는데요? 새로운 시즌에선 면도한 키리건 장군님과 만나는 건가요?
B : 하하하핫.
호스트가 말끔히 면도한, 벤의 외양에 칭찬과 동시에 질문을 던지자 벤은 예의 호방한 웃음을 터트릴 거야.
B : 면도한 키리건은 아니에요. 하지만 새 시즌은 기대하셔도 좋아요.
H : 우린 키리건이 죽은 후 키리건 닮은꼴의 소프 오페라 드라마가 나오는 줄 알았어요.
(일동 폭소)
H : 드라마가 아니라면 다른 프로젝트에서 변신을 꾀한 건가요?
B : 아뇨, 아뇨. 그냥 면도한 거예요.
벤이 손사래 치며 웃자 방청객 쪽에서 LOVE BEARD !! 외쳐. 좌중은 또 한 번 폭소하고 호스트는 이렇게 묻는 거지.
H : 심경의 변화가 있었을지도 몰라요. 오디션에 계속 고배를 마셨다던가, (좌중 웃음바다) 아니면 게이들에게 인기 있는 남자로 랭크돼 갑자기 벤이 오 마이..! 이랬던 거죠.
B : 하하하핫, 아니에요. 절대요. 단지 어느 날 친구와 식사를 하는데.. 그 친구가 정말, 정말 오랜만에 만난 친구거든요. 그 친구가 보기엔 달라진 제 모습이 굉장히 오일리 했나 봐요. 어쩌면 오랜만에 본 사람 시선은, 마치 가글을 한 입안처럼, 많이 덧칠하지 않은 스케치북처럼 순일한 상태일 거잖아요. 그게 맞을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어 결국 이렇게 됐네요?
벤이 수염 없이 매끈한 턱을 슥슥 만지며 웃으니 방청객들은 친구 말을 곧이곧대로 접수한 벤의 순진하기도 하고, 귀엽기도 해 일순간 얕은 환호와 소란이 일 거야. 그리고 미국 남자들은 대부분 수염 있는 상태를 선호한다는 걸 미루어 볼 때, 벤이 이렇게 바뀌도록 만든 친구는 능히 이성이었음을 짐작 가능케 했어. 그래서 이 발언을 놓칠 리 없는 사회자가 엽렵하게 캐치하고 말겠다.
H : 당신의 경우는 많은 여성분들이 당신의 수염을 사랑하는데요, 그 친구분은 아니었나 봐요?
화면을 지켜보던 허니는 누가 봐도 자길 지칭하는 듯한 발언에 놀라 몸이 굳겠지. 한편 바로 옆에 앉아 있는 벤은 무릎을 접어 제 앞으로 당긴 다음 밀크티를 홀짝이며 능청맞게 끄덕일 거 같다. 방청객들은 오일리 하다는 의견을 동의할 수 없다는 듯 NO!!! 외치더니 어디선가 NO, CALL ME DADDY!! 라고 해서 또 한 번 일동 폭소했음 좋겠다.
H : 벤, 방금 Call me daddy 라고 하는데요?
B : (마른 세수)
H : 친구분은 당신이 이런 캐릭터로 소비되는 걸 알고 있습니까?
B : 아마, 아마 모를 거예요.
대담하면서도 노골적인 팬의 도발에 어찌할 바를 모르던 벤의 얼굴이 끝내 발그레해지며 마지막엔 해탈한 듯 영혼 탈곡한 얼굴을 하겠지. 화면을 지켜보던 허니도 웃음을 간신히 삼키며 벤을 흘깃 쳐다보는데 마치 티비에서 걸어 나온 듯 귀까지 발갛게 물들어 쿠션에 얼굴을 묻고 있는 벤이 보일 거야. 아, 귀여워.
H : 그 친구분이 남자는 아니겠고 여성이겠지요?
(마치 가려운 곳을 긁었다는 듯 다시 한 번 장내가 술렁거림)
호스트는 결국 민망함에 똥 마려운 강아지마냥 초조해하기도 하고 어찌할 바를 몰라 시선을 가만두지 못하는 벤을 기어코 단두대 앞으로 세우겠다. 잠시 뒤 벤의 겨우 얼굴을 수습하곤 어깰 으쓱하며 노코멘트를 고수하지만 그럴수록 의혹만 가중돼 방청객들은 특별한 사람 내지는 의미 있는 사람일 것이라고 추측하며 부러움 반 (오일리하다는 의견을 동의할 수 없다는) 원성 반을 보내며 소란스럽겠지.
대충 친구라고 부치면 될 것을 끝까지 함구하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아 의혹만 커졌음에 허니는 결국 당황하고, 무릎을 말고 얼굴을 묻고 있던 벤은 뒤늦게 방청객들에게 고자질 하듯 허니를 향해 엄지 손가락을 펴 허니 막 가리켜라.
H : 좋아요, 당신의 그 친구분이 이 방송을 꼭 보시길 기원해요. 벤은 절대 오일리 하지 않아요. 많은 여성들이 이렇게 폭동을 일으킬 만큼 아주 핫해요.
호스트의 조크와 벤의 수줍음으로 점철된 쇼는 몇 번이나 폭소를 연출했고, 약간의 대화를 거친 뒤 드라마는 다가오는 n월부터 방송됩니다 멘트와 함께 카메라가 멀어지면서 박수와 함께 앵글 아웃될 거야.
쇼가 끝나자마자 허니는 그렇게 말하면 어떡하냐는 투로 벤의 어깨를 가볍게 잡고 흔드는데 벤은 저항 없이 그대로 흔들리며 킥킥거리겠지. 사실 벤이 딱히 뭘 어떻게 한 것도 아니건만 심장이 꽉 조여지면서 무지 난처하고 세상에서 갑자기 중심에 서게 된 것만 같은 황홀함과 민망함을 동시에 획득하게 만드니 허니는 정말 참담한 기분이 들어.
좋은데.. 나쁘진 않은데.. 황홀하면서도 10층에서 1층으로 곤두박질 치고 마는 참담함의 연속이야. 계속하다간 정말 견디지 못할 것만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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