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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01 1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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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질데이빗으로 앞을 보지 못하는 안마사와 몸이 망가진 세책점 장수가 ㅂㄱㅅㄷ
그 세책점에는 없는 책이 없다던데.
혹시 모르지. 맹인이 볼 수 있는 책이 있을지.
버질의 발걸음을 세책점으로 이끈 건, 바로 약방 어른이 했던 이 말 덕분이었어. 없는 책이 없다는 에임스 세책점, 그 주인인 데이빗 에임스는 본디 상인 집안의 자식으로. 오로지 책 하나로 제국 전역에 세책점을 세울 정도로 수완이 좋은 인물이었다지. 각기 따로 움직이던 책쾌들의 유통망을 구축한 건 물론이고, 필사본을 제법 값을 잘 쳐주어 매입해준다니 그의 책방에 책이 가득 차는 건 시간문제였어. 또한 박리다매로 책을 싼 값에 빌려주니 책쾌에게서 책을 살 수 없는 가난한 이들에게도 독서의 기회가 수월하게 열릴 수 있었지. 그건 버질에게도 마찬가지였어.
버질은 앞을 보지 못해. 하지만 앞을 보지 못한다고 해서 호기심도 사라지는 건 아니지. 앞을 보지 못하는 버질에게 세책점에서 추천한 책은 종이가 아닌 나무를 조각한 목간 두루마리였어. 글자를 양각으로 새겨 손으로 더듬어 읽을 수 있도록 만들었지. 물론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을 위한 글자는 제국에 없었기 때문에, 그 모양은 앞을 볼 수 있는 사람들이 아는 글자 그대로였어. 버질은 이때 목간을 더듬어 처음으로 글자라는 것의 모양을 알았어. 목간을 빌린 버질은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손으로 훑으며 글자의 감촉을 손에 새겨 두고, 동네 글선생에게 그 글자의 뜻을 일일이 들어 외웠지. 자연히 목간 한묶음을 완전히 읽기 위해선 한 해도 더 걸렸고, 목간 역시 대여기간 때문에 무수히 반납하고 다시 빌려야 했지만 버질은 그 덕분에 처음으로 책을 완독할 수 있었지. 그때부터 버질은 독서의 기쁨을 깨달았어.
반면, 약방 어른은 제 농담 같은 말이 현실이 될 줄은 몰랐던 모양이야. 버질이 독서의 재미에 푹 빠져 있는 모양새를 못마땅히 생각하던 그는 글줄 하나 읽겠다고 끙끙 거릴 시간에 손님이라도 하나 더 받는게 어떻겠냐며 투덜거렸지. 물론 말은 퉁명스러워도 동네 약방이 버질 덕분에 제법 손님이 오기 시작했으니, 버질이 책을 읽겠다고 고집을 부리면 약방 어른도 만류할 도리는 없었어. 버질은 약방 어른의 말을 가볍게 웃으며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지.
사실 버질은 의원이었어. 스승인 노의원이 그에게 의술을 사사했고, 실력도 눈 뜬 사람들 못지 않게 좋아 몇몇 사람도 고쳐낸 적이 있는 의원이지. 그럼에도 스승이 돌아가신 뒤 아무리 노력해도 사람들은 눈이 먼 젊은 의원의 침술을 믿지 못했어. 아, 저 봉사 놈이 실수랍시고 침을 내 눈알에 찌르기라도 하면 어쩌냔 말이야! 마을 사람들의 조소에 버질은 화도 내지 못하고 씁쓸하게 웃었지. 나라도 눈 먼 의원의 침을 맞고 싶진 않을 거야, 하고 말야.
그 대신 버질은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았어. 농사가 한창인 농부들이 근육통이 오거나 할 때면 종종 약방을 찾았는데 이때 약재 관리를 돕던 버질이 안마를 도왔거든. 그의 안마 실력이 어찌나 뛰어난지 하루 농사일이 끝나면 약방을 찾는 손님이 한둘이 아니었어. 약방 주인도 버질의 실력에 흡족해했지. 눈이 안 보여도, 냄새만 맡아도 약재를 곧잘 찾는데다 안마 실력까지 뛰어나 사람들을 끌어모으니 이만한 복덩이가 어딨겠냐고.
그렇게 약방의 신묘한 손기술을 지닌 이에 대한 소문이 파다하던 즈음의 일이야.
버질이 약방에서 퇴근하여 집으로 돌아왔을 때, 한 손님이 그의 집까지 찾아왔어. 사연을 듣자하니 마차 사고를 당해 온 몸이 뒤틀려버린 병자라고 해. 근골이 이미 상하여 굳었기에, 그런 병자는 어떤 의원이 찾아와도 낫게 할 수는 없지. 그건 손님 본인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야. 그는 그저, 몸의 통증이 일순간만이라도 낫길 원했지. 그는 버질에게 애원했어. 통증을 낫게 해준다면, 뭐든 해주겠노라고 말야. 버질은 약방으로도 모자라 집까지 찾아온 손님을 받을 생각이 없었지만, 그 한 마디에 생각이 바뀐 듯했어. 그는 저녁에 읽을 생각이던 목간을 마룻바닥에 내려놓고 손님을 방에 들였어.
버질은 진정 효과가 있는 향을 피웠어. 손에는 향유를 발랐고, 힘겹게 엎드려 있는 손님의 몸을 어루만지며 형태를 그렸어. 내려앉은 어깨, 뒤틀린 등허리. 길고 곧은 손가락이 힘을 주어 누르니 읏, 하는 신음이 나오지. 조금 아프실 겁니다. 말을 덧붙인 버질은 능숙하게 뭉쳐 있던 근육을 어루만지며 풀기 시작했어. 손님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어. 어쩌면, 버질이 보지 못하는 너머에서 고개를 끄덕였을 수도 있지. 버질은 손끝의 감촉으로 그의 인체를 가늠했어. 사람의 몸이 이리도 부서졌건만, 그럼에도 살아있을 수 있다는 것이 놀라울 정도지. 당했다던 마차사고는 분명 빠른 조치가 이루어질 수도 없을 만큼 끔찍한 사고였던 건 분명해. 버질은 부드럽게 뒷목을 만져 주었어. 뒷목이 굳어 있으면 두통으로 갈 수 있지요. 말을 덧붙이며 말야. 마침내 안마가 끝난 뒤, 버질은 안마를 마쳤음을 알리며 향을 껐어. 옷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어. 버질이 미소를 띠며 물었어.
몸은 좀 어떻습니까?
덕분에, 아주 가볍소.
다행입니다.
…어디서 이런 걸 배웠소?
돌아가신 스승님께 의술을 배워 그 덕을 본 것도 있고, 홀로 이런저런 착오를 하며 배웠지요.
의술을 배웠소? 허면 의원일텐데 어찌 약방에서….
소경의 침술을 믿을 사람은 많지 않으니까요.
….
그래서, 침을 쓰지 않고 사람의 고통을 덜어주는 방법을 찾았답니다.
손님은 잠시 말이 없었어. 그는 약간의 침묵 끝에 입을 열었지.
다음에 또 와도 되겠소?
네. 근육은 한 번으로 풀리지 않을테니 이곳으로 또 오셔도 좋습니다.
약방이 아니고?
… 몸을 보이기 싫으신 것 같아서요.
짧은 침묵이 흘렀지. 손님은 천천히, 입을 열어 말했어. 고맙소, 그 한 마디에 버질은 빙그레 웃었어.
그것이, 버질과 데이빗의 첫 만남이었어.
에임스 세책점의 주인, 데이빗 에임스.
세책점으로 쌓아올린 부만큼이나 수려한 외견으로도 유명했던 이의 삶은 끔찍한 마차 사고를 당하면서 뒤틀리고 말았지. 데이빗 에임스가 살아난 건 행운인가, 불운인가. 수려하고 아름답던 외양은 부서진 마차에 찢겨지고 짓눌려 일그러졌고, 몸의 절반이 무너졌지. 보통 사람이라면 죽었어야 할 사고에서 살아난 데이빗 에임스는 끔찍한 고통 속에서 눈을 떴지. 이미 그의 삶이 진창으로 처박힌 뒤에 말야. 내심 자랑스럽게 생각했던 외모는 망가졌고, 몸은 불편하기 이를 데 없었어. 괴물과도 같은 흉측한 몰골인지라 그는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대궐과도 같은 집에 틀어박혀 나올 생각도 하지 못했지. 이에 에임스 세책점의 존망에 대해서도 많은 이야기가 나왔지만, 결론적으로 데이빗 에임스는 세책점의 경영에서 손을 떼지 않았어. 썩어도 준치라더니, 타고난 상인 답게 그는 방 안에 들어앉아 세책점의 운영을 손바닥 들여다보듯 훤히 들여다보았지. 그의 안배로 사업은 흔들리지 않았어. 하지만 데이빗의 몸과 마음은 점점 지쳐갔지.
그는 매일 전신을 엄습해오는 고통과 두통에 시달려야 했어.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었고 먹는 것도 제대로 먹을 수 없었지. 그런 끔찍한 고통 속을 헤매이는 데이빗에게, 상단의 회계와 법률을 맡고 있는 측근, 토미 아저씨가 말했어. 저 너머 약방에 어떤 통증도 쉽게 가시게 만드는 신묘한 손기술을 지닌 자가 있노라고.
데이빗은 한줄기 희망을 가지고 그를 찾았어.
그렇게 버질을 만났지.
한때, 세책점을 찾아온 소경.
데이빗이 직접 목간을 건네주었던, 그때 그 사람을 말이야.
두 사람의 시간은 해가 오롯이 지는 저녁과, 달이 오롯이 뜨는 짧은 밤 사이에 주로 이루어졌어.
데이빗은 버질에게 이름을 밝히지 않았고, 버질은 굳이 데이빗의 이름을 묻지 않았지. 버질에게 데이빗은 손님이었고, 손님에게 버질은 자네, 또는 그대일 뿐이었지. 그럼에도 두 사람 사이에는 함께 한 시간들이 차곡차곡 쌓이기 시작했지. 데이빗은 버질에게 삯을 주며 이따금씩 질 좋은 목간을 구해 주었어. 버질은 목간 만으로도 삯이 넘친다면서 기쁘게 웃었어. 데이빗은 그런 버질의 미소가 참 좋았어. 처음에는 그저 목간을 가져다줄 뿐이었는데, 그 다음에는 버질의 손끝을 쥐고 글을 알려주고 있었지. 그 뿐만 아니라 버질에게 시를 읽어주기도 했어. 버질, 다정한 버질, 상냥한 버질. 앞을 보지 못하는 버질. 버질은 어색하게 시선을 돌리지도 않고,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입꼬리를 올리지도 않아. 뒤에서 수군거리지도 않지. 버질 앞에서 데이빗은 사고를 당하기 이전, 그때로 돌아가는 기분이었어. 버질이 데이빗의 삶에 스미는 건 그렇게도 평온하고도 조용하게 이루어졌어.
삶에 스민다는 것. 그건 데이빗만 그런 것도 아니야. 버질은 데이빗이 제 손끝을 잡아주는 것이 좋았어. 조곤조곤 글을 읽어주는 목소리도 좋았고, 아닌 척 생각해주는 것도 좋았어. 그는 안마할 때는 오롯이 몸을 내맡기면서도 안마를 하지 않을 때에는 누구도 몸에 닿는 걸 허락하지 않아. 버질이 데이빗과 닿을 수 있는 건 목간을 읽을 때 닿는 손끝과 손끝 뿐이지. 그럼에도, 버질은 데이빗을 기다렸어. 해가 저물면 저녁 어스름과 함께 찾아오는 발소리를 늘 고대했지.
그때엔 그 누구도 그 마음이 연모인 것을 알지 못했어.
조용하던 연못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처럼, 평온한 나날에도 파문이 일어났어. 버질의 안마 솜씨가 유명해지면서, 황족의 귀에도 소문이 들어갔거든.
버질을 부른 이는 황제의 막내 아우인 정헌공, 크리스 나이트 카잔스키였어. 제국에서 가장 뛰어난 천재로 드높은 명성을 지닌 이는 다른 카잔스키 황족들이 그러하듯 제 비를 깊이 사랑했어. 그것이 어느 정도냐면, 재치 있고 온후하기로 소문난 그가 비의 일이라면 다른 사람처럼 바뀔 정도였지. 이는 정헌공의 비인 데이빗 숀이 선황 시절에 고초를 겪고 심한 후유증을 앓고 있기 때문이야. 한때 황자의 호위였고, 현 황제 즉위 이후 황실의 근위대장 직까지 맡았던 이가 새벽이면 실체 없는 고통에 두 다리를 쓰지 못할 정도로 고통을 호소하지. 어떤 의원도 이를 고치지 못했어. 정헌공이 문밖으로 내친 의원만 다섯 수레는 넘을 것이라는 말이 돌 정도야. 이는 정헌공의 인상에 괴팍함을 더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지.
그러던 중 버질의 소문이 들려왔던 거야. 정헌공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를 불러들였어. 버질의 초라한 집에 데이빗이 아닌 황가의 문양이 새겨진 수레가 당도했어. 이 나라에서 황친의 부름을 거절할 수 있는 이는 같은 황친 뿐이지. 버질은 초라한 보퉁이를 들고 마차에 올라탔어. 그는 시시각각 바뀌는 풍경을 바라보며 저녁마다 찾아오던 손님을 생각했지. 그가 기다리지 말아야 할텐데, 하고 말야.
버질은 그렇게 푸른 기와로 지은 저택에 입성했어. 황친이 사는 저택 중 소박한 편에 속하다고는 하나 황제의 총애를 받는 아우인만큼 저택의 모습에 부족함은 없었지. 유감인 건 버질이 그 풍경을 전혀 볼 수 없다는 거야. 버질은 지팡이를 짚고 하인의 안내에 따라 정헌공에게로 향했지. 버질은 정헌공의 처소에서 부부를 만났어. 공비는 버질을 퍽 못마땅하게 생각했어. 어찌 앞이 보이지 않는 자를 의원으로 데려와 절 놀리려 하시냐며, 외려 정헌공을 타박했지. 하지만 정헌공의 생각은 달랐어. 앞이 보이는 자들도 그대의 병증을 치유하지 못하니, 앞을 보고 못 보고가 무엇이 중요하겠냐며 말야. 정헌공에 말에 달리 책 잡을 구석은 없었기에, 공비는 못마땅해도 결국 그 뜻을 따를 수밖에 없었지.
그렇게 첫날, 정헌공비는 간만에 숙면에 들었어.
새벽에 깨지 않고, 조용히 말야.
그런 나날들이 며칠이 반복되자, 버질을 대하는 정헌공비의 태도도 달라졌지. 그는 본디 황친의 비이기 이전에 무인이었던 사람이지. 그는 지나치게 솔직한 면이 흠이긴 하나 소탈하며 강직한 사람이었고, 재능이 있는 이를 아끼는 사람이었어. 공비의 태도가 달라지자 정헌공의 저택에서 일하는 모든 이들이 버질을 존중하기 시작했지. 공비는 버질을 오랜 지기처럼 대했어. 버질은 공비의 호의에 깊은 감사를 올렸지. 정헌공 역시 버질이 공비의 묵은 고통을 해결해내자 크게 기뻐하며 전답을 선물했어. 하지만 사실 버질은 그런 선물들보다도, 돌아가야 할 장소가 있었지.
그는 왔을까.
하루, 이틀, 사흘…. 버질은 데이빗을 생각했어. 따뜻한 햇살이 피부 위로 내려앉을 때에도, 비가 오는 소리를 들을 때에도, 정헌공의 비가 완연히 달라진 안색으로 공의 곁에서 환한 목소리로 담소를 나눌 때에도 말야. 그러다보니 버질은 정헌공의 앞에 나아가 고했지. 이제는 돌아가겠노라고, 말야.
그 사이 한 달이 흘렀어.
버질이 정헌공의 저택에 불려간 지 한 달이지. 처음 데이빗은 정헌공에게 버질이 불려갔다는 소식에 크게 놀랐어. 정헌공은 현 황제가 아끼는 막내 아우였고, 높은 천재성 만큼이나 성정이 죽 끓듯 끓는다는 인물이지. 그 저택에서, 공비를 치료하지 못해 내쫓긴 의원이 한둘도 아니며 성하지 못한 몸으로 나온 자들도 여럿 되었어. 행여 몸도 성치 못한 버질이 그곳에서 자칫 잘못하여 치도곤을 당할까, 데이빗은 근심했지. 그는 에임스 가문의 상단을 통해 수소문한 끝에 버질이 어찌 지내는지 전해 들었어.
다행히도 버질이 그곳에서 몸을 다치는 일은 없었어. 오히려 정헌공 부부가 버질을 총애한다지. 그는 데이빗의 앞에서 그랬듯 평온하고 안온하게 지냈어. 그는 향과 향유, 안마 등으로 공비의 오랜 심병을 해결했다지. 데이빗은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한편으로, 복잡한 심경에 사로잡혔어. 황친의 일을 해결했으니 버질의 앞에 놓인 건 탄탄대로 뿐이야. 가난한 집에서 목간 쪼가리를 들고 손으로 더듬어 읽을 필요도 없이, 으리으리한 기와집에서 사람을 써서 책을 읽을 수도 있겠지. 기쁜 일이야. 그렇지만.
저도 모르는 사이 너무도 많은 마음을 내어주었던 걸까.
버질은 어디에서도 잘 살 사람이었지. 그에게 데이빗은 그리 특별한 사람은 아니야. 무수히 많은 환자, 그 중 한 사람일 뿐이지. 언제고 멀어질 수 있는 그런 사이 말야. 하지만 데이빗은 아니었어. 데이빗은, 혼란스러웠지. 사실 잘 모르겠다고. 고작 눈 먼 안마사, 그 자가 무엇이라고.
그러니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며 버질의 집을 찾았어. 짙은 풀잎 냄새가 만개하는 숲 속, 풀뿌리와 나무뿌리가 도드라진 땅을 지나면 드러나는 작고 초라한 초가집. 사람이 없던 지 한 달이 지났지만 거미줄 하나 자라지 않은 건 데이빗이 불편한 몸으로도 그곳을 치웠기 때문이야. 데이빗은 가만히 앉아 버질이 놓고 간 목간을 어루만졌어. 그 목간은 데이빗이 직접 의뢰를 한 제품으로, 현 황제의 큰 아우이자 선황의 2황자인 진양공, 닉 리버스 카잔스키의 시문을 새긴 목간이었지. 정헌공이 제 비라면 껌벅 죽는 것처럼 진양공 역시 궁인 출신의 반려를 무척 아꼈어. 그는 제 아내를 처음 만났던 순간에 썼던 시를 시문에 실었지. 데이빗은 두 눈을 감고, 버질이 그랬던 것처럼 목간을 더듬어 읽었지.
지난 해, 오늘 이 대문 안에서
사람 얼굴 복사꽃이 함께 붉었네.
부드럽게 불어온 바람이 데이빗의 뺨을 스쳤어.
그 사람 얼굴은 어디로 갔을까.
데이빗이 마지막 구절을 더듬던 그때였어. 문득 어떤 손이 데이빗의 손등 위로 내려앉았지. 데이빗이 두 눈을 떴어.
복사꽃은 예전처럼 봄바람에 웃고 있네.
다른 목소리가 마지막 구절을 읊었지. 데이빗은 말없이 버질을 보았어. 버질은 데이빗을 보며 미소를 띠었어.
마치 봄바람처럼, 따뜻하게.
안녕하세요? …데이빗.
그렇게 두 사람은 다시 재회했어.
.. 같은 이야기가 보고 싶다 ㅋㅋㅋㅋㅋㅋㅋ
사실 버질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데이빗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을 것 같다. 앞을 보지 못하고, 향을 쓰는 만큼 코에 민감해서 목간을 준 사람이 자주 쓰던 특유의 은은한 향을 놓치지 않았을 듯. 그런데다 에임스 세책점에서나 들여올 법한 목간을 잔뜩 가져다줌 + 근래 이 근방에서 마차 사고를 당한 인물이 데이빗 에임스 밖에 없음. 이래서 알았을 듯...
그래서 딱복이 치료할 때도 데이빗을 떠올렸겠지. 이름이 같아서... 그 사람도 이렇게 환하게 피어나 웃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아무튼 의식의 흐름대로 횡설수설 쓴 글이 여기까지 올 줄 몰랐음 ㅠㅠㅠ
아무튼 마지막이다! 그간 읽어줘서 ㅋㅁㅋㅁ
*데이빗과 버질이 읊은 한시는 당나라 시인 최호의 시임.
去年今日此門中 지난해 오늘 이 대문 안에서
人面桃花相映紅 사람 얼굴 복사꽃이 함께 붉었네
人面不知何處去 그 사람 얼굴은 어디로 갔을까
桃花依舊笑春風 복사꽃은 예전처럼 봄바람에 웃고 있네
#아이스매브 크오 버질데이빗 약크리스딱복 약약닉스테판
2. 시니어슈슈/몽고메리리처, 몽포드: https://hygall.com/591277559
3. 아이스매브/닉스테판/크리스딱복 : https://hygall.com/591582732
버질데이빗으로 앞을 보지 못하는 안마사와 몸이 망가진 세책점 장수가 ㅂㄱㅅㄷ
그 세책점에는 없는 책이 없다던데.
혹시 모르지. 맹인이 볼 수 있는 책이 있을지.
버질의 발걸음을 세책점으로 이끈 건, 바로 약방 어른이 했던 이 말 덕분이었어. 없는 책이 없다는 에임스 세책점, 그 주인인 데이빗 에임스는 본디 상인 집안의 자식으로. 오로지 책 하나로 제국 전역에 세책점을 세울 정도로 수완이 좋은 인물이었다지. 각기 따로 움직이던 책쾌들의 유통망을 구축한 건 물론이고, 필사본을 제법 값을 잘 쳐주어 매입해준다니 그의 책방에 책이 가득 차는 건 시간문제였어. 또한 박리다매로 책을 싼 값에 빌려주니 책쾌에게서 책을 살 수 없는 가난한 이들에게도 독서의 기회가 수월하게 열릴 수 있었지. 그건 버질에게도 마찬가지였어.
버질은 앞을 보지 못해. 하지만 앞을 보지 못한다고 해서 호기심도 사라지는 건 아니지. 앞을 보지 못하는 버질에게 세책점에서 추천한 책은 종이가 아닌 나무를 조각한 목간 두루마리였어. 글자를 양각으로 새겨 손으로 더듬어 읽을 수 있도록 만들었지. 물론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을 위한 글자는 제국에 없었기 때문에, 그 모양은 앞을 볼 수 있는 사람들이 아는 글자 그대로였어. 버질은 이때 목간을 더듬어 처음으로 글자라는 것의 모양을 알았어. 목간을 빌린 버질은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손으로 훑으며 글자의 감촉을 손에 새겨 두고, 동네 글선생에게 그 글자의 뜻을 일일이 들어 외웠지. 자연히 목간 한묶음을 완전히 읽기 위해선 한 해도 더 걸렸고, 목간 역시 대여기간 때문에 무수히 반납하고 다시 빌려야 했지만 버질은 그 덕분에 처음으로 책을 완독할 수 있었지. 그때부터 버질은 독서의 기쁨을 깨달았어.
반면, 약방 어른은 제 농담 같은 말이 현실이 될 줄은 몰랐던 모양이야. 버질이 독서의 재미에 푹 빠져 있는 모양새를 못마땅히 생각하던 그는 글줄 하나 읽겠다고 끙끙 거릴 시간에 손님이라도 하나 더 받는게 어떻겠냐며 투덜거렸지. 물론 말은 퉁명스러워도 동네 약방이 버질 덕분에 제법 손님이 오기 시작했으니, 버질이 책을 읽겠다고 고집을 부리면 약방 어른도 만류할 도리는 없었어. 버질은 약방 어른의 말을 가볍게 웃으며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지.
사실 버질은 의원이었어. 스승인 노의원이 그에게 의술을 사사했고, 실력도 눈 뜬 사람들 못지 않게 좋아 몇몇 사람도 고쳐낸 적이 있는 의원이지. 그럼에도 스승이 돌아가신 뒤 아무리 노력해도 사람들은 눈이 먼 젊은 의원의 침술을 믿지 못했어. 아, 저 봉사 놈이 실수랍시고 침을 내 눈알에 찌르기라도 하면 어쩌냔 말이야! 마을 사람들의 조소에 버질은 화도 내지 못하고 씁쓸하게 웃었지. 나라도 눈 먼 의원의 침을 맞고 싶진 않을 거야, 하고 말야.
그 대신 버질은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았어. 농사가 한창인 농부들이 근육통이 오거나 할 때면 종종 약방을 찾았는데 이때 약재 관리를 돕던 버질이 안마를 도왔거든. 그의 안마 실력이 어찌나 뛰어난지 하루 농사일이 끝나면 약방을 찾는 손님이 한둘이 아니었어. 약방 주인도 버질의 실력에 흡족해했지. 눈이 안 보여도, 냄새만 맡아도 약재를 곧잘 찾는데다 안마 실력까지 뛰어나 사람들을 끌어모으니 이만한 복덩이가 어딨겠냐고.
그렇게 약방의 신묘한 손기술을 지닌 이에 대한 소문이 파다하던 즈음의 일이야.
버질이 약방에서 퇴근하여 집으로 돌아왔을 때, 한 손님이 그의 집까지 찾아왔어. 사연을 듣자하니 마차 사고를 당해 온 몸이 뒤틀려버린 병자라고 해. 근골이 이미 상하여 굳었기에, 그런 병자는 어떤 의원이 찾아와도 낫게 할 수는 없지. 그건 손님 본인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야. 그는 그저, 몸의 통증이 일순간만이라도 낫길 원했지. 그는 버질에게 애원했어. 통증을 낫게 해준다면, 뭐든 해주겠노라고 말야. 버질은 약방으로도 모자라 집까지 찾아온 손님을 받을 생각이 없었지만, 그 한 마디에 생각이 바뀐 듯했어. 그는 저녁에 읽을 생각이던 목간을 마룻바닥에 내려놓고 손님을 방에 들였어.
버질은 진정 효과가 있는 향을 피웠어. 손에는 향유를 발랐고, 힘겹게 엎드려 있는 손님의 몸을 어루만지며 형태를 그렸어. 내려앉은 어깨, 뒤틀린 등허리. 길고 곧은 손가락이 힘을 주어 누르니 읏, 하는 신음이 나오지. 조금 아프실 겁니다. 말을 덧붙인 버질은 능숙하게 뭉쳐 있던 근육을 어루만지며 풀기 시작했어. 손님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어. 어쩌면, 버질이 보지 못하는 너머에서 고개를 끄덕였을 수도 있지. 버질은 손끝의 감촉으로 그의 인체를 가늠했어. 사람의 몸이 이리도 부서졌건만, 그럼에도 살아있을 수 있다는 것이 놀라울 정도지. 당했다던 마차사고는 분명 빠른 조치가 이루어질 수도 없을 만큼 끔찍한 사고였던 건 분명해. 버질은 부드럽게 뒷목을 만져 주었어. 뒷목이 굳어 있으면 두통으로 갈 수 있지요. 말을 덧붙이며 말야. 마침내 안마가 끝난 뒤, 버질은 안마를 마쳤음을 알리며 향을 껐어. 옷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어. 버질이 미소를 띠며 물었어.
몸은 좀 어떻습니까?
덕분에, 아주 가볍소.
다행입니다.
…어디서 이런 걸 배웠소?
돌아가신 스승님께 의술을 배워 그 덕을 본 것도 있고, 홀로 이런저런 착오를 하며 배웠지요.
의술을 배웠소? 허면 의원일텐데 어찌 약방에서….
소경의 침술을 믿을 사람은 많지 않으니까요.
….
그래서, 침을 쓰지 않고 사람의 고통을 덜어주는 방법을 찾았답니다.
손님은 잠시 말이 없었어. 그는 약간의 침묵 끝에 입을 열었지.
다음에 또 와도 되겠소?
네. 근육은 한 번으로 풀리지 않을테니 이곳으로 또 오셔도 좋습니다.
약방이 아니고?
… 몸을 보이기 싫으신 것 같아서요.
짧은 침묵이 흘렀지. 손님은 천천히, 입을 열어 말했어. 고맙소, 그 한 마디에 버질은 빙그레 웃었어.
그것이, 버질과 데이빗의 첫 만남이었어.
에임스 세책점의 주인, 데이빗 에임스.
세책점으로 쌓아올린 부만큼이나 수려한 외견으로도 유명했던 이의 삶은 끔찍한 마차 사고를 당하면서 뒤틀리고 말았지. 데이빗 에임스가 살아난 건 행운인가, 불운인가. 수려하고 아름답던 외양은 부서진 마차에 찢겨지고 짓눌려 일그러졌고, 몸의 절반이 무너졌지. 보통 사람이라면 죽었어야 할 사고에서 살아난 데이빗 에임스는 끔찍한 고통 속에서 눈을 떴지. 이미 그의 삶이 진창으로 처박힌 뒤에 말야. 내심 자랑스럽게 생각했던 외모는 망가졌고, 몸은 불편하기 이를 데 없었어. 괴물과도 같은 흉측한 몰골인지라 그는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대궐과도 같은 집에 틀어박혀 나올 생각도 하지 못했지. 이에 에임스 세책점의 존망에 대해서도 많은 이야기가 나왔지만, 결론적으로 데이빗 에임스는 세책점의 경영에서 손을 떼지 않았어. 썩어도 준치라더니, 타고난 상인 답게 그는 방 안에 들어앉아 세책점의 운영을 손바닥 들여다보듯 훤히 들여다보았지. 그의 안배로 사업은 흔들리지 않았어. 하지만 데이빗의 몸과 마음은 점점 지쳐갔지.
그는 매일 전신을 엄습해오는 고통과 두통에 시달려야 했어.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었고 먹는 것도 제대로 먹을 수 없었지. 그런 끔찍한 고통 속을 헤매이는 데이빗에게, 상단의 회계와 법률을 맡고 있는 측근, 토미 아저씨가 말했어. 저 너머 약방에 어떤 통증도 쉽게 가시게 만드는 신묘한 손기술을 지닌 자가 있노라고.
데이빗은 한줄기 희망을 가지고 그를 찾았어.
그렇게 버질을 만났지.
한때, 세책점을 찾아온 소경.
데이빗이 직접 목간을 건네주었던, 그때 그 사람을 말이야.
두 사람의 시간은 해가 오롯이 지는 저녁과, 달이 오롯이 뜨는 짧은 밤 사이에 주로 이루어졌어.
데이빗은 버질에게 이름을 밝히지 않았고, 버질은 굳이 데이빗의 이름을 묻지 않았지. 버질에게 데이빗은 손님이었고, 손님에게 버질은 자네, 또는 그대일 뿐이었지. 그럼에도 두 사람 사이에는 함께 한 시간들이 차곡차곡 쌓이기 시작했지. 데이빗은 버질에게 삯을 주며 이따금씩 질 좋은 목간을 구해 주었어. 버질은 목간 만으로도 삯이 넘친다면서 기쁘게 웃었어. 데이빗은 그런 버질의 미소가 참 좋았어. 처음에는 그저 목간을 가져다줄 뿐이었는데, 그 다음에는 버질의 손끝을 쥐고 글을 알려주고 있었지. 그 뿐만 아니라 버질에게 시를 읽어주기도 했어. 버질, 다정한 버질, 상냥한 버질. 앞을 보지 못하는 버질. 버질은 어색하게 시선을 돌리지도 않고,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입꼬리를 올리지도 않아. 뒤에서 수군거리지도 않지. 버질 앞에서 데이빗은 사고를 당하기 이전, 그때로 돌아가는 기분이었어. 버질이 데이빗의 삶에 스미는 건 그렇게도 평온하고도 조용하게 이루어졌어.
삶에 스민다는 것. 그건 데이빗만 그런 것도 아니야. 버질은 데이빗이 제 손끝을 잡아주는 것이 좋았어. 조곤조곤 글을 읽어주는 목소리도 좋았고, 아닌 척 생각해주는 것도 좋았어. 그는 안마할 때는 오롯이 몸을 내맡기면서도 안마를 하지 않을 때에는 누구도 몸에 닿는 걸 허락하지 않아. 버질이 데이빗과 닿을 수 있는 건 목간을 읽을 때 닿는 손끝과 손끝 뿐이지. 그럼에도, 버질은 데이빗을 기다렸어. 해가 저물면 저녁 어스름과 함께 찾아오는 발소리를 늘 고대했지.
그때엔 그 누구도 그 마음이 연모인 것을 알지 못했어.
조용하던 연못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처럼, 평온한 나날에도 파문이 일어났어. 버질의 안마 솜씨가 유명해지면서, 황족의 귀에도 소문이 들어갔거든.
버질을 부른 이는 황제의 막내 아우인 정헌공, 크리스 나이트 카잔스키였어. 제국에서 가장 뛰어난 천재로 드높은 명성을 지닌 이는 다른 카잔스키 황족들이 그러하듯 제 비를 깊이 사랑했어. 그것이 어느 정도냐면, 재치 있고 온후하기로 소문난 그가 비의 일이라면 다른 사람처럼 바뀔 정도였지. 이는 정헌공의 비인 데이빗 숀이 선황 시절에 고초를 겪고 심한 후유증을 앓고 있기 때문이야. 한때 황자의 호위였고, 현 황제 즉위 이후 황실의 근위대장 직까지 맡았던 이가 새벽이면 실체 없는 고통에 두 다리를 쓰지 못할 정도로 고통을 호소하지. 어떤 의원도 이를 고치지 못했어. 정헌공이 문밖으로 내친 의원만 다섯 수레는 넘을 것이라는 말이 돌 정도야. 이는 정헌공의 인상에 괴팍함을 더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지.
그러던 중 버질의 소문이 들려왔던 거야. 정헌공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를 불러들였어. 버질의 초라한 집에 데이빗이 아닌 황가의 문양이 새겨진 수레가 당도했어. 이 나라에서 황친의 부름을 거절할 수 있는 이는 같은 황친 뿐이지. 버질은 초라한 보퉁이를 들고 마차에 올라탔어. 그는 시시각각 바뀌는 풍경을 바라보며 저녁마다 찾아오던 손님을 생각했지. 그가 기다리지 말아야 할텐데, 하고 말야.
버질은 그렇게 푸른 기와로 지은 저택에 입성했어. 황친이 사는 저택 중 소박한 편에 속하다고는 하나 황제의 총애를 받는 아우인만큼 저택의 모습에 부족함은 없었지. 유감인 건 버질이 그 풍경을 전혀 볼 수 없다는 거야. 버질은 지팡이를 짚고 하인의 안내에 따라 정헌공에게로 향했지. 버질은 정헌공의 처소에서 부부를 만났어. 공비는 버질을 퍽 못마땅하게 생각했어. 어찌 앞이 보이지 않는 자를 의원으로 데려와 절 놀리려 하시냐며, 외려 정헌공을 타박했지. 하지만 정헌공의 생각은 달랐어. 앞이 보이는 자들도 그대의 병증을 치유하지 못하니, 앞을 보고 못 보고가 무엇이 중요하겠냐며 말야. 정헌공에 말에 달리 책 잡을 구석은 없었기에, 공비는 못마땅해도 결국 그 뜻을 따를 수밖에 없었지.
그렇게 첫날, 정헌공비는 간만에 숙면에 들었어.
새벽에 깨지 않고, 조용히 말야.
그런 나날들이 며칠이 반복되자, 버질을 대하는 정헌공비의 태도도 달라졌지. 그는 본디 황친의 비이기 이전에 무인이었던 사람이지. 그는 지나치게 솔직한 면이 흠이긴 하나 소탈하며 강직한 사람이었고, 재능이 있는 이를 아끼는 사람이었어. 공비의 태도가 달라지자 정헌공의 저택에서 일하는 모든 이들이 버질을 존중하기 시작했지. 공비는 버질을 오랜 지기처럼 대했어. 버질은 공비의 호의에 깊은 감사를 올렸지. 정헌공 역시 버질이 공비의 묵은 고통을 해결해내자 크게 기뻐하며 전답을 선물했어. 하지만 사실 버질은 그런 선물들보다도, 돌아가야 할 장소가 있었지.
그는 왔을까.
하루, 이틀, 사흘…. 버질은 데이빗을 생각했어. 따뜻한 햇살이 피부 위로 내려앉을 때에도, 비가 오는 소리를 들을 때에도, 정헌공의 비가 완연히 달라진 안색으로 공의 곁에서 환한 목소리로 담소를 나눌 때에도 말야. 그러다보니 버질은 정헌공의 앞에 나아가 고했지. 이제는 돌아가겠노라고, 말야.
그 사이 한 달이 흘렀어.
버질이 정헌공의 저택에 불려간 지 한 달이지. 처음 데이빗은 정헌공에게 버질이 불려갔다는 소식에 크게 놀랐어. 정헌공은 현 황제가 아끼는 막내 아우였고, 높은 천재성 만큼이나 성정이 죽 끓듯 끓는다는 인물이지. 그 저택에서, 공비를 치료하지 못해 내쫓긴 의원이 한둘도 아니며 성하지 못한 몸으로 나온 자들도 여럿 되었어. 행여 몸도 성치 못한 버질이 그곳에서 자칫 잘못하여 치도곤을 당할까, 데이빗은 근심했지. 그는 에임스 가문의 상단을 통해 수소문한 끝에 버질이 어찌 지내는지 전해 들었어.
다행히도 버질이 그곳에서 몸을 다치는 일은 없었어. 오히려 정헌공 부부가 버질을 총애한다지. 그는 데이빗의 앞에서 그랬듯 평온하고 안온하게 지냈어. 그는 향과 향유, 안마 등으로 공비의 오랜 심병을 해결했다지. 데이빗은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한편으로, 복잡한 심경에 사로잡혔어. 황친의 일을 해결했으니 버질의 앞에 놓인 건 탄탄대로 뿐이야. 가난한 집에서 목간 쪼가리를 들고 손으로 더듬어 읽을 필요도 없이, 으리으리한 기와집에서 사람을 써서 책을 읽을 수도 있겠지. 기쁜 일이야. 그렇지만.
저도 모르는 사이 너무도 많은 마음을 내어주었던 걸까.
버질은 어디에서도 잘 살 사람이었지. 그에게 데이빗은 그리 특별한 사람은 아니야. 무수히 많은 환자, 그 중 한 사람일 뿐이지. 언제고 멀어질 수 있는 그런 사이 말야. 하지만 데이빗은 아니었어. 데이빗은, 혼란스러웠지. 사실 잘 모르겠다고. 고작 눈 먼 안마사, 그 자가 무엇이라고.
그러니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며 버질의 집을 찾았어. 짙은 풀잎 냄새가 만개하는 숲 속, 풀뿌리와 나무뿌리가 도드라진 땅을 지나면 드러나는 작고 초라한 초가집. 사람이 없던 지 한 달이 지났지만 거미줄 하나 자라지 않은 건 데이빗이 불편한 몸으로도 그곳을 치웠기 때문이야. 데이빗은 가만히 앉아 버질이 놓고 간 목간을 어루만졌어. 그 목간은 데이빗이 직접 의뢰를 한 제품으로, 현 황제의 큰 아우이자 선황의 2황자인 진양공, 닉 리버스 카잔스키의 시문을 새긴 목간이었지. 정헌공이 제 비라면 껌벅 죽는 것처럼 진양공 역시 궁인 출신의 반려를 무척 아꼈어. 그는 제 아내를 처음 만났던 순간에 썼던 시를 시문에 실었지. 데이빗은 두 눈을 감고, 버질이 그랬던 것처럼 목간을 더듬어 읽었지.
지난 해, 오늘 이 대문 안에서
사람 얼굴 복사꽃이 함께 붉었네.
부드럽게 불어온 바람이 데이빗의 뺨을 스쳤어.
그 사람 얼굴은 어디로 갔을까.
데이빗이 마지막 구절을 더듬던 그때였어. 문득 어떤 손이 데이빗의 손등 위로 내려앉았지. 데이빗이 두 눈을 떴어.
복사꽃은 예전처럼 봄바람에 웃고 있네.
다른 목소리가 마지막 구절을 읊었지. 데이빗은 말없이 버질을 보았어. 버질은 데이빗을 보며 미소를 띠었어.
마치 봄바람처럼, 따뜻하게.
안녕하세요? …데이빗.
그렇게 두 사람은 다시 재회했어.
.. 같은 이야기가 보고 싶다 ㅋㅋㅋㅋㅋㅋㅋ
사실 버질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데이빗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을 것 같다. 앞을 보지 못하고, 향을 쓰는 만큼 코에 민감해서 목간을 준 사람이 자주 쓰던 특유의 은은한 향을 놓치지 않았을 듯. 그런데다 에임스 세책점에서나 들여올 법한 목간을 잔뜩 가져다줌 + 근래 이 근방에서 마차 사고를 당한 인물이 데이빗 에임스 밖에 없음. 이래서 알았을 듯...
그래서 딱복이 치료할 때도 데이빗을 떠올렸겠지. 이름이 같아서... 그 사람도 이렇게 환하게 피어나 웃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아무튼 의식의 흐름대로 횡설수설 쓴 글이 여기까지 올 줄 몰랐음 ㅠㅠㅠ
아무튼 마지막이다! 그간 읽어줘서 ㅋㅁㅋㅁ
*데이빗과 버질이 읊은 한시는 당나라 시인 최호의 시임.
去年今日此門中 지난해 오늘 이 대문 안에서
人面桃花相映紅 사람 얼굴 복사꽃이 함께 붉었네
人面不知何處去 그 사람 얼굴은 어디로 갔을까
桃花依舊笑春風 복사꽃은 예전처럼 봄바람에 웃고 있네
#아이스매브 크오 버질데이빗 약크리스딱복 약약닉스테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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