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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4.27 17:45
오타ㅈㅇ 캐붕ㅈㅇ 걍 다 ㅈㅇ
호열은 눈을 벅벅 비볐음. 잠이 부족했지만 결혼식에 가는 날은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야 했으니까.
청첩장
푸르른 여름날.....
서로 아끼며... 바다와 같은...
.... 축복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신랑 송 태 섭
신부 이 한 나
태섭이 준 연한 하늘색의 청첩장엔 양호열 이름 석 자가 적혀있었음.
한 달 전, 호열은 태섭에게 연락을 받았음. 그렇게 막 친하진 않지만 오며가며 만난 사이고 북산 농구부에 백호군단도 빠질 수 없는 사이가 됐으니까.
한나도 같이 만나도 되겠지? 란 문자에 호열은 눈치를 챘음. 결혼하는구나.
집 근처 카페에서 만난 태섭은 조금은 차분해보였음. 얼굴은 잔뜩 웃고 있었지만.
우리 결혼한다.
오, 축하드려요.
호열에게 청첩장을 준 태섭은 백호랑 군단녀석들하고 같이 와라 하며 호열의 어깨를 두드렸음. 잠깐 귀국한 게 결혼때문이었군. 옆에 있던 한나에게도 축하드려요 결혼식 꼭 갈게요 하고 사람 좋게 웃어 보인 호열은 적당히 얘기를 나누다 집에 왔음.
결혼이라... 호열은 자연스레 정대만을 떠올렸음. 결혼식에서 만나게 되겠지 란 생각을 하며 담배를 입에 문 호열은 베란다로 나갔음. 날이 따뜻해져 슬슬 여름옷도 꺼내야겠다는 생각을 했음.
-
호열은 고등학교 졸업 후 정대만과 다시 만날 일은 없다고 생각했음. 실제로도 그랬고. 백호가 있다면 좀 달랐겠지만 백호는 졸업과 동시에 미국으로 갔으니까.
호열이 대만과 다시 만난 건... 그러니까, 호열이 26살, 대만이 28살이었을 때였음. 호열은 서점 겸 헌책방을 운영했는데 거기에 대만이 손님으로 왔음. 그게 둘 다 성인이 되고난 후 첫 만남이었지.
어?
앞치마를 하고 안경을 쓴 양호열, 하얀 니트에 여전하지만 조금 더 내추럴하게 넘긴 머리까지. 대만은 호열을 보고 너무 놀라 주먹을 꽉 쥐었음.
오랜만이네요. 이 근처 살아요?
호열은 알고 있었지만 괜히 한 번 물어봤음. 처음 가게를 낸다고 했을 때, 미국에 있는 백호에게 그쪽 동네에 내려고 라고 했다가 아직 만만이 거기 살텐데? 하는 소리를 들었으니까. 만만.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었지. 국가대표이자 프로농구 득점왕 중학 엠브이피 그리고 농구에 미친 불꽃남자 정대만.
어? 어... 너 여기서 일 하는지는 몰랐네.
자주 보겠네요. 농구... 스포츠 코너는 저쪽이에요.
아 그게... 난 육아책...
육아요? 육아는 이쪽. 대만 군... 애 있어요?
아!!! 아냐!!! 조카가 생겨서 그래.
조카요? 대만 군 외동이잖아.
어엉. 친한 선수가 아빠가 됐거든. 선물로 주려고.
그럼 포장도 해드릴게요. 제일 잘 나가는 건 우측 상단 2번째 칸에 있는 초보 부모를 위한 육아 한 걸음 책이에요.
그럼...
대만은 긴 다리로 휘적휘적 걸어 단박에 육아책을 꺼내왔음. 이미 백화점에도 다녀왔는지 한 손엔 아기용품 마크가 찍힌 쇼핑백을 들고 있었지.
호열은 카운터 밑에 있는 포장지와 리본으로 능숙하게 책 포장을 했음. 끈으로 잘 묶은 후 엽서를 불쑥 내밀었음.
편지 쓸래요?
아... 그래.
대만에게 펜을 넘겨준 후, 호열은 쇼핑백을 꺼냈음. 서점 마크가 찍힌 브라운백. 대만이 엽서를 다 썼다며 넘겨주자 호열은 싱긋 웃으며 엽서를 잘 끼워넣었음.
이건 선물.
어?
요즘 잘 나가는 책이에요. 대만 군도 한 번 읽어봐요.
책 띠지엔 호열의 글씨체로 짧은 서평이 적혀있었음
[사랑을 하기엔 바쁜 사람들을 위한 책.
이 책의 작가는 남자주인공 시마를 통해...]
대만은 띠지를 가만 보다 고맙다며 봉투를 챙겨 나갔음. 호열은 나가는 대만의 뒷모습을 보다 새로운 띠지를 꺼내 아까 읽은 책의 서평을 적기 시작했음.
일주일 후, 대만은 호열의 서점을 찾아왔음. 책 재밌더라 라는 말과 함께.
읽었어요?
어. 틈틈이.
동료들이 깜짝 놀랐겠는데?
맞아... 아 아니!!! 하여튼 한 권 더 추천해주라.
이제 취미를 독서로 하려구요?
응. 꽤 괜찮더라고. 좀 차분해지더라.
호열은 대만에게 어떤 장르를 좋아하냐고 물으려다 그냥 최근에 제일 재밌게 읽었던 추리소설을 하나 건넸음.
가볍게 읽기 좋아요. 뒤로 갈수록 흥미진진하고 범인이 누굴지 생각하다 읽으면 금방 읽게 돼요.
흐음, 그래. 이걸로 할게.
호열은 책을 포장했음. 이번에도 브라운 페이퍼, 마지막은 역시나 리본을 묶어줬지. 대만은 내가 읽을 건데 왜? 하는 표정으로 호열을 봤음.
이렇게 포장된 책은 가서 열어보면 엄청 두근거리거든요. 대만 군도 한 번 그 두근거림을 느껴봐요. 무슨 책인지 알지만서도 상당히 기분이 좋아요.
대만은 책을 건네받았음. 값을 지불하고 나가려하자 호열이 소리쳤음.
후기 말 해주러 꼭 와요!!
대만은 그날 술 약속도 무시하고 책을 읽었음. 집에 돌아가 포장을 푸는 순간 호열과 나눴던 대화가, 그 자식한테서 나는 옅은 담배 향과 섬유유연제 향이 나 대만의 얼굴이 붉어졌음.
대만은 그렇게 후기를 말해주러, 책을 사러 1주일에 한 번은 꼭 호열의 서점으로 향했음.
그렇게 다니기를 3개월, 대만은 호열에 대해 아는 게 꽤 많아졌음. 점원이자 사장이라는 것, 원래는 바이크샵에서 정비 일을 했는데 영 자기 취향이 아니라 서점을 차렸다는 것, 이 곳에 온지도 벌써 5년이 됐다는 것, 서점은 2년 정도 됐다는 것, 마지막 연애는 2년 전이라는 것, 돌봐주는 고양이가 있다는 것, 담배도 여전히 피운다는 것, 가끔 피아노를 친다는 것, 그리고 여전히 농구를 본다는 것.
대만은 호열이 최근 자신의 경기를 봤다고 하자 매우 놀랐음. 봐도 강백호가 있는 nba만 볼 거라 생각했기 때문에.
봤죠. 대만 군이 버저비터로 득점했잖아요, 2쿼터에서.
너 농구도 보냐.
그럼요. 일단 스포츠는 거의 다 봐요. 야구도 보고 농구도... 가끔 복싱이나 레슬링도 보고.
대만은 뭔가 쑥스러워서 뒷머리를 매만졌음 그러자 호열은 대만을 놀리고 싶어서ㅋㅋ 말을 덧붙임
근데 3쿼터 시작하자마자 최동오라는 선수한테 더 눈이 가더라구요.
야아!!!
호열은 정말 놀리기 좋은 사람이네 하고 생각했음. 톡 건드리면 바로 발끈하는 점이 아주 골려주고 싶었음.
오늘도 책?
엉? 어. 오늘은 이거.
대만은 그새 취향이란 게 좀 생겨서 본인이 직접 책을 고르기 시작했음. 대만이 보통 고르는 책들은 소설 그 중에서도 추리소설과 공상과학 소설이었음.
손질된 머리, 스킨향이 나는 향수, 깔끔한 자켓 비싸보이는 손목시계를 찬 대만에게 호열은 일부러 깔끔해보이는 네이비 리본이 아닌 물방울 무늬의 핫핑크 리본으로 책을 포장해줬음. 어쩔 땐 레이스가 잔뜩인 흰 리본. 대만은 좀... 얌전한 리본은 없냐? 하고 물었지만 호열은 그럴 때마다 쿡쿡 웃으며 다음에 해줄게요 하고 말았음. 고맙다며 책을 집어든 대만은 그럼 다음에 올게 하고 문을 열었지.
호열은 대만의 뒷모습을 보며 리본과 대만이 꽤 잘 어울린다 생각했음.
사실 오늘... 호열은 대만이 골라온 책 사이에 쪽지를 하나 넣어놨음.
[저녁 같이 할래요? 토요일 6시. 서점 옆에 있는 레스토랑, 맛이 좋거든요.]
충동적인 행동이었음. 요 몇 달 호열은 대만에게 흥미가 생기기 시작했거든...
이제껏 호열이 사귄 사람들은 전부 어딘가가 정대만을 닮아있었음. 키가 크다거나 눈 색이 옅다거나 쉽게 발끈한다거나 무언가에 푹 빠진다거나.. 진지하다거나... 하지만 그 사람들은 정대만이 아니니 오래 갈 수 없었음. 언제 한 번은 사귀던 사람이 호열에게 누군지 모르겠지만 나한테서 그 사람 좀 그만 찾을래? 너 나랑 사귀는 거야 그 사람이 아니라 라고 한 적도 있었음. 그 후 호열은 연애를 그만뒀지. 그땐 그 사람이 누군지 궁금했는데... 호열은 열심히 책을 고르는 대만의 옆모습을 보고 알아차렸음. 그게 정대만이었다니. 호열은 괜스레 큼큼 목을 가다듬었음.
호열이 자신의 마음을 인정하기까진 오래 걸리지 않았음. 그래서 호열은 대만이 10번째로 책을 사러 온 날 결심했음. 질질 끄는 건 자기 스타일이 아니었으니까.
서평을 쓸 때만 들었던 펜으로 서평이 아닌 다른 걸 적으려 하자 손이 벌벌 떨렸음.
그리고 그 주 토요일 5시 45분, 대만은 평소보다 더 신경 쓴 차림으로 호열의 가게에 찾아왔음.
왔어요?
호열은 대만을 향해 미소를 지었음. 자기도 오늘 좀 신경써서 단골 손님인 고등학생이 사장님 오늘 좀 멋져보여요 라고 해줬거든. 조금은 부끄러웠고 조금은 설렜음.
대만은 얼굴이 붉어진 채 뒷정리를 하는 호열을 찬찬히 살펴봤음. 팽팽히 당겨지는 셔츠에 가려진 등근육의 움직임을 볼 때마다 숨을 멈췄음.
둘은 같이 셔터를 내리고 레스토랑에 가 저녁을 먹었음. 대만은 탄산수를 마셨고 호열은 와인을 한 잔 했음. 대만은 와인은 한 잔만 마셔도 취해서... 하고 말끝을 흐렸지.
둘은 시시콜콜한 얘기를 나눴음. 그건 농구얘기가 되기도 했고, 고교시절 얘기기도 했고, 서로 다른 중학교에 다녔던 시절이기도 했음. 식사가 끝난 후엔 자연스레 산책을 했고 마지막 도착지는 호열의 집이었음.
현관문을 열자마자 입술이 맞닿았고 그 뒤로는 자연스러웠음. 호열은 대만의 척추를 만지작거리며 대만에게 남자와 자본 적 있냐 물었고 대만은 눈이 풀린 채 고개를 끄덕였음. 호열은 울컥했음. 뭐 자기도 오는 여자 남자 안 가리고 다 잤지만 정대만이 그랬다는 건... 뭔가 참을 수 없었음.
풀었어요? 밑에?
아... 아니... 오늘은 이럴 줄 몰랐어가지고...
그래요? 그럼 제가 풀어줄게요.
호열은 대만을 침실로 끌고 들어갔음. 옷을 벗길 때마다 대만은 몸을 흠칫 떨었음. 셔츠를 벗겨내는 손길에 대만은 흐응... 하고 비음을 흘렸음. 호열은 대만의 목을 따라 입을 맞췄음.
내일 일정 없죠?
응... 흐으.. 아... 거긴 하지마아...
그날 호열은 처음으로 잠자리 후에 침대에서 담배를 태우지 않았음. 대신 엎드려 누운 대만에게 짧게 키스한 후 베란다로 나가 바람을 맞아가며 담배를 태웠음. 다 태운 후엔 아주 오래도록 바람을 맞았음. 기분 좋은 바람에 머리가 살랑거렸음.
-
그렇게 둘은 걍 종종 만나서 밥 먹고.. 영화 보고 연인들이 할 법한 것들을 함. 이 날도 밥 먹고 카페 갔다가 같이 쇼핑 좀 하고 자연스레 호열의 집에 갔음. 대만의 집에 간다는 선택지는 없었음. 침대도 방도 모든 게 대만의 것이 더 좋았지만 호열의 집 보다 멀어 가는데만 15분 정도 걸리기 때문에.. 둘은 그 시간도 참을 수 없었음.
관계가 끝나면 호열은 당연스레 물과 수건을 가져왔음. 가져온 물을 입에 대주자마자 벌컥벌컥 마시는 대만에게 짧게 키스하자 대만은 푸스스 웃었음. 이제 호열은 아예 담배를 태우지 않았기에 잔 후에는 대만을 더 케어해줬지.
너 진짜 다정하네.
그래요?
응. 엄청.
이게 다정한가? 그 전에 만났던 놈들은 이렇게 안 해줬어요?
호열이 놈 이라고 칭하자 대만은 호열을 흘긋 봤음. 그러더니 고갤 끄덕였음.
어. 나몰라라 하는 놈들이 더 많았어. 바로 옆에서 담배 태우는 놈들도 많았고.
어떻게 그러지? 이렇게...
호열은 말을 멈추고 대만의 앞머리를 살짝 넘겨줬음. 담배 끊은 거 아는 구나. 대만의 앞머리는 고등학생 때 보다 더 길어져서 호열의 손가락에 감겼고 대만은 그런 호열의 뒷목을 잡아 자기 품에 쓰러지게 했음. 호열이 자신의 심장박동이 느껴질까 걱정할 정도로 둘의 맨 가슴이 밀착됐지.
야 말 이어서 더 해 봐.
싫어요.
해 봐.
아... 제발.
이렇게 다음에 뭐라 하려고 했어?
...
응?
... 예쁜데.
대만은 호열의 마지막 말을 듣고 푸핫 웃으면 그래 나 예쁘지 하며 호열을 끌어안았음.
그날 대만은 온몸을 감싸는 쾌감 사이에서 귓가에 들리는 좋아해요를 듣고 정말 간지럽다고 생각했음.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울었고 자기도 모르게 조르게 됐음. 호열은 그런 대만의 눈물을 핥았고 대만이 원하는 걸 전부 줬음.
사귀자라는 말이 없어도 자연스레 연인이 됐음. 둘은 사람들 눈을 피해 몰래 손을 잡았고 동이 틀 때까지 통화를 했고 여름밤엔 좋아한다고 소리도 쳐봤고 한겨울엔 내리는 눈을 맞으며 로맨스 드라마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음.
궁금한 거 있는데 나 언제부터 좋아했어요?
어?
언제부터 좋아했냐구.
음... 처음 좋아한 건 고3 겨울. 그리고... 최근엔 네 서점 처음 갔을 때. 그냥 너 니트 입은 거 보자마자 심장 뛰던데.
진짜? 거짓말 아냐? 고3?
이런 걸로 구라 안 치지. 진짜야.
고3 때 나를 왜 좋아했어?
아 부끄럽게 뭘 자꾸 물어?
궁금하잖아. 무석중 아이돌이었... 아! 왜 때려. 거기다 지금은 농구선수 인기투표 하면 1,2위를 다투는 정대만이 날 좋아한다는데.
하... 진짜... 너 진짜... 너 진짜 진짜 이상해애...
말 해주면 하루종일 형이라 불러줄게.
야 내가 그런 거에 넘어가겠냐? ...진짜?
응.
몰라... 그냥... 그때 네가 날 보면서 대만 군 하는데 좋았어. 네가 부르면 다른 느낌이 들어서... 됐냐?
그랬구나.
형이라 불러 봐. 이제.
그걸 믿네.
야 미친 거 아냐?!
대만은 호열의 등을 퍽 소리나게 때렸음. 그러자 푸하하 웃던 호열이 혀어엉 동생 아픈데... 하며 끈적하게 대만을 쳐다보자 대만은 얼굴을 가렸음. 그리고 그날 밤, 대만은 호열이 자신을 꼭 끌어안은 후, 잘 자요 형 사랑해요 하고 속삭이자 얼굴을 붉게 물들인 채 기분 좋게 잠에 들었음. 영원한 사랑은 없다고 생각하는 둘이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영원할 거 같았음.
그리고 그 생각은 3년 뒤에 끝을 맞이했음.
사소한 것으로 시작했지만 종국엔 개처럼 싸웠음. 말하지 말 걸 하는 순간에도 입은 벌어졌고 그런 생각은 말 걸 하는 순간에도 생각은 깊어만 갔음. 마지막에 내뱉어진 말은 눈 앞에 있는 이 남자에겐 절대 하고 싶지 않은 말이었음.
그만하자.
그만해요.
호열은 대만의 말에 그대로 집을 박차고 나왔음. 이럴 때마저 잘 맞는다는 사실에 미칠 거 같았음. 호열은 대만의 집 1층에 있는 편의점에 들어가 담배와 라이터를 샀음 대만과 사귀면서부터 입에 대지 않았기에 3년 만에 산 거였음. 3년 사이에 호열이 자주 태우던 담배는 단종이 됐음. 그건 없는데요 하는 점원의 말에 호열은 뒷머리를 만지작거리다 그냥 8미리로 아무거나 달라고 했음. 차에 타 비닐을 벗겨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곤 필터만 잘근잘근 씹던 호열은 라이터를 손에서 굴렸음. 한참을.
담배에 불을 붙이자 익숙한 향이 났음. 호열은 속이 타들어가는 기분을 느끼며 깊게 빨아들였음.
호열은 조수석에 놓인 정대만 전용 쿠션을 바라보다 시동을 걸었음. 그리곤 그새 다 타버린 담배를 절반 정도 물이 남은 생수병 안에 빠뜨린 후, 담배를 한 대 더 꺼내 물었지. 오늘은 드라이브는 좀 더 외롭고 길겠다는 생각을 했음.
헤어진 후, 대만은 호열의 생활반경엔 발도 들이지 않았음. 마주치면 어떨지 알 거 같으면서도 모르겠어서... 둘은 그렇게 1년이 넘도록 마주한 적이 없었음. 하지만 양호열은 정대만의 소식을 알게 됐음. 당연했음. 잘 나가는 프로농구선수는 알려하지 않아도 매체에서 계속 떠들어댔으니까... 잘 나가는 모델과의 루머나 시즌 최고 득점, 하물며 커피 광고로도... 호열은 집에 있는 티비에 천을 덮었음. 이렇게까지 해야하나 싶었지만 볼 때마다 그리고 들릴 때마다 심장이 쪼개지는 기분이 들어서...
그러다 헤어진 지 1년이 조금 넘었을 때 만날 일이 생길 듯. 북산 농구부 모임날 호열은 오라는 문자에 거절의사를 밝혔음. 가면 대만 군이 있겠지 싶어서.. 물론 호열도 대만도 자신의 연애사를 떠벌리는 스타일은 아니라 철판 깔고 가면 아무도 모를 게 분명했음. 그치만... 대만의 앞에선 잘만 하는 표정 숨기기도 잘 못 하는 자신이기에... 호열은 그만뒀음. 보고 싶었지만..
하지만 항상 예외는 생기지. 간만에 한 귀국에 그리운 친구들을 만났으니 굉장히 신나 잔뜩 마신 백호가 호열에게 자신을 데리러 와 줄 수 있냐고 물어봤거든. 백호는 막 취한 건 아닌데 너무 마셨다는 말을 덧붙였음. 호열은 잔뜩 새는 백호의 발음에 흔쾌히 수락했음. 대만이 신경쓰였지만 이제 1년이나 지났고... 백호를 챙겨줄 사람은 자기가 아니면 군단 녀석들 뿐인데 군단 녀석들은 죄다 고향에 있으니... 가야만 한다는 생각을 했음. 사실 맘 한 구석엔 정대만 얼굴이라도 볼 수 있겠다라는 생각이 가득했지.
아니나 다를까 도착해서 보니 이미 백호는 그 커다란 몸을 잔뜩 구긴 채 앉아있었음. 그 앞엔 대만이 술잔을 쥔 채 엎어져 자고 있었지. 호열은 대만의 옆얼굴을 빤히 봤음. 여전히 고운 옆태에 정갈한 눈썹 그 밑에 감춰진 올리브색 눈. 열이 올라 붉어진 입술은 술 때문인지 촉촉했음. 호열이 대만에게 손을 뻗으려는 순간 누군가 호열을 불렀음.
호열이니?
아... 오랜만이네요.
백호 데리러 왔구나.
준호였음. 손수건에 손을 닦던 준호는 대만을 바라보다 대만인 내가 데려갈테니 백호랑 조심히 가 하고 웃었음. 잘 부탁...까지만 말한 호열은 내가 뭐라고.. 란 생각에 입을 다물고 백호를 깨웠음.
백호야 가자.
눗... 호여리냐...
그래. 호열이야. 이제 슬슬 일어나지?
으응... 여ㅇ..ㅜ랑... 만만쓰는...
우물거리는 백호의 말에 호열이 입술만 깨물자 준호가 대신 입을 열었음.
백호야 태웅이는 윤대협 선수가 데려갔고 대만인 내가 데려가니까 너는 호열이랑 가면 돼~ 다음에 또 한국 들어오면 보자! 조심히 가!
준호는 그렇게 말하며 백호의 등을 툭툭 쳤음. 그리곤 호열을 바라보며 조심히 가 하고 대만을 부축해 나갔음.
호열은 대만의 뒷모습을 빤히 보다 백호의 옆에 앉아 가슴께를 꾸욱 눌렀음. 1년이 지난다고 다 되는 게 아니네... 시간이 약이라더니. 거짓말. 일부러 입은 하얀 니트 반소매가 너무 초라했음.
-
야 정대만 호열이랑 뭔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다만 이제 걔 없어. 그러니까 자는 척 그만해라. 힘들다.
...어때 보여?
너? 아님 양호열?
후으... 걔.
여전히 어딘가가 날카롭네... 정도?
하하... 그렇구나.
대만은 깊게 숨을 내쉬더니 준호에게 고맙다며 이제 혼자 가도 돼 하곤 택시를 탔음. 창밖에 보이는 빨갛고 노란 불빛들을 보며 안절부절 못하던 대만은 결국 중간에 내려 집까지 걸어갔음. 왜 이렇게 땅이 울렁이는지 왜 이렇게 눈이 뿌얘지는지 왜 이렇게 아픈지...
대만은 아직도 이별을 겪는 중이었음. 1년이 넘도록.
뭔 말이 일케 많은지 말 존나 많아서 재회하는 건 나오지도 않았네...
호열은 눈을 벅벅 비볐음. 잠이 부족했지만 결혼식에 가는 날은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야 했으니까.
청첩장
푸르른 여름날.....
서로 아끼며... 바다와 같은...
.... 축복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신랑 송 태 섭
신부 이 한 나
태섭이 준 연한 하늘색의 청첩장엔 양호열 이름 석 자가 적혀있었음.
한 달 전, 호열은 태섭에게 연락을 받았음. 그렇게 막 친하진 않지만 오며가며 만난 사이고 북산 농구부에 백호군단도 빠질 수 없는 사이가 됐으니까.
한나도 같이 만나도 되겠지? 란 문자에 호열은 눈치를 챘음. 결혼하는구나.
집 근처 카페에서 만난 태섭은 조금은 차분해보였음. 얼굴은 잔뜩 웃고 있었지만.
우리 결혼한다.
오, 축하드려요.
호열에게 청첩장을 준 태섭은 백호랑 군단녀석들하고 같이 와라 하며 호열의 어깨를 두드렸음. 잠깐 귀국한 게 결혼때문이었군. 옆에 있던 한나에게도 축하드려요 결혼식 꼭 갈게요 하고 사람 좋게 웃어 보인 호열은 적당히 얘기를 나누다 집에 왔음.
결혼이라... 호열은 자연스레 정대만을 떠올렸음. 결혼식에서 만나게 되겠지 란 생각을 하며 담배를 입에 문 호열은 베란다로 나갔음. 날이 따뜻해져 슬슬 여름옷도 꺼내야겠다는 생각을 했음.
-
호열은 고등학교 졸업 후 정대만과 다시 만날 일은 없다고 생각했음. 실제로도 그랬고. 백호가 있다면 좀 달랐겠지만 백호는 졸업과 동시에 미국으로 갔으니까.
호열이 대만과 다시 만난 건... 그러니까, 호열이 26살, 대만이 28살이었을 때였음. 호열은 서점 겸 헌책방을 운영했는데 거기에 대만이 손님으로 왔음. 그게 둘 다 성인이 되고난 후 첫 만남이었지.
어?
앞치마를 하고 안경을 쓴 양호열, 하얀 니트에 여전하지만 조금 더 내추럴하게 넘긴 머리까지. 대만은 호열을 보고 너무 놀라 주먹을 꽉 쥐었음.
오랜만이네요. 이 근처 살아요?
호열은 알고 있었지만 괜히 한 번 물어봤음. 처음 가게를 낸다고 했을 때, 미국에 있는 백호에게 그쪽 동네에 내려고 라고 했다가 아직 만만이 거기 살텐데? 하는 소리를 들었으니까. 만만.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었지. 국가대표이자 프로농구 득점왕 중학 엠브이피 그리고 농구에 미친 불꽃남자 정대만.
어? 어... 너 여기서 일 하는지는 몰랐네.
자주 보겠네요. 농구... 스포츠 코너는 저쪽이에요.
아 그게... 난 육아책...
육아요? 육아는 이쪽. 대만 군... 애 있어요?
아!!! 아냐!!! 조카가 생겨서 그래.
조카요? 대만 군 외동이잖아.
어엉. 친한 선수가 아빠가 됐거든. 선물로 주려고.
그럼 포장도 해드릴게요. 제일 잘 나가는 건 우측 상단 2번째 칸에 있는 초보 부모를 위한 육아 한 걸음 책이에요.
그럼...
대만은 긴 다리로 휘적휘적 걸어 단박에 육아책을 꺼내왔음. 이미 백화점에도 다녀왔는지 한 손엔 아기용품 마크가 찍힌 쇼핑백을 들고 있었지.
호열은 카운터 밑에 있는 포장지와 리본으로 능숙하게 책 포장을 했음. 끈으로 잘 묶은 후 엽서를 불쑥 내밀었음.
편지 쓸래요?
아... 그래.
대만에게 펜을 넘겨준 후, 호열은 쇼핑백을 꺼냈음. 서점 마크가 찍힌 브라운백. 대만이 엽서를 다 썼다며 넘겨주자 호열은 싱긋 웃으며 엽서를 잘 끼워넣었음.
이건 선물.
어?
요즘 잘 나가는 책이에요. 대만 군도 한 번 읽어봐요.
책 띠지엔 호열의 글씨체로 짧은 서평이 적혀있었음
[사랑을 하기엔 바쁜 사람들을 위한 책.
이 책의 작가는 남자주인공 시마를 통해...]
대만은 띠지를 가만 보다 고맙다며 봉투를 챙겨 나갔음. 호열은 나가는 대만의 뒷모습을 보다 새로운 띠지를 꺼내 아까 읽은 책의 서평을 적기 시작했음.
일주일 후, 대만은 호열의 서점을 찾아왔음. 책 재밌더라 라는 말과 함께.
읽었어요?
어. 틈틈이.
동료들이 깜짝 놀랐겠는데?
맞아... 아 아니!!! 하여튼 한 권 더 추천해주라.
이제 취미를 독서로 하려구요?
응. 꽤 괜찮더라고. 좀 차분해지더라.
호열은 대만에게 어떤 장르를 좋아하냐고 물으려다 그냥 최근에 제일 재밌게 읽었던 추리소설을 하나 건넸음.
가볍게 읽기 좋아요. 뒤로 갈수록 흥미진진하고 범인이 누굴지 생각하다 읽으면 금방 읽게 돼요.
흐음, 그래. 이걸로 할게.
호열은 책을 포장했음. 이번에도 브라운 페이퍼, 마지막은 역시나 리본을 묶어줬지. 대만은 내가 읽을 건데 왜? 하는 표정으로 호열을 봤음.
이렇게 포장된 책은 가서 열어보면 엄청 두근거리거든요. 대만 군도 한 번 그 두근거림을 느껴봐요. 무슨 책인지 알지만서도 상당히 기분이 좋아요.
대만은 책을 건네받았음. 값을 지불하고 나가려하자 호열이 소리쳤음.
후기 말 해주러 꼭 와요!!
대만은 그날 술 약속도 무시하고 책을 읽었음. 집에 돌아가 포장을 푸는 순간 호열과 나눴던 대화가, 그 자식한테서 나는 옅은 담배 향과 섬유유연제 향이 나 대만의 얼굴이 붉어졌음.
대만은 그렇게 후기를 말해주러, 책을 사러 1주일에 한 번은 꼭 호열의 서점으로 향했음.
그렇게 다니기를 3개월, 대만은 호열에 대해 아는 게 꽤 많아졌음. 점원이자 사장이라는 것, 원래는 바이크샵에서 정비 일을 했는데 영 자기 취향이 아니라 서점을 차렸다는 것, 이 곳에 온지도 벌써 5년이 됐다는 것, 서점은 2년 정도 됐다는 것, 마지막 연애는 2년 전이라는 것, 돌봐주는 고양이가 있다는 것, 담배도 여전히 피운다는 것, 가끔 피아노를 친다는 것, 그리고 여전히 농구를 본다는 것.
대만은 호열이 최근 자신의 경기를 봤다고 하자 매우 놀랐음. 봐도 강백호가 있는 nba만 볼 거라 생각했기 때문에.
봤죠. 대만 군이 버저비터로 득점했잖아요, 2쿼터에서.
너 농구도 보냐.
그럼요. 일단 스포츠는 거의 다 봐요. 야구도 보고 농구도... 가끔 복싱이나 레슬링도 보고.
대만은 뭔가 쑥스러워서 뒷머리를 매만졌음 그러자 호열은 대만을 놀리고 싶어서ㅋㅋ 말을 덧붙임
근데 3쿼터 시작하자마자 최동오라는 선수한테 더 눈이 가더라구요.
야아!!!
호열은 정말 놀리기 좋은 사람이네 하고 생각했음. 톡 건드리면 바로 발끈하는 점이 아주 골려주고 싶었음.
오늘도 책?
엉? 어. 오늘은 이거.
대만은 그새 취향이란 게 좀 생겨서 본인이 직접 책을 고르기 시작했음. 대만이 보통 고르는 책들은 소설 그 중에서도 추리소설과 공상과학 소설이었음.
손질된 머리, 스킨향이 나는 향수, 깔끔한 자켓 비싸보이는 손목시계를 찬 대만에게 호열은 일부러 깔끔해보이는 네이비 리본이 아닌 물방울 무늬의 핫핑크 리본으로 책을 포장해줬음. 어쩔 땐 레이스가 잔뜩인 흰 리본. 대만은 좀... 얌전한 리본은 없냐? 하고 물었지만 호열은 그럴 때마다 쿡쿡 웃으며 다음에 해줄게요 하고 말았음. 고맙다며 책을 집어든 대만은 그럼 다음에 올게 하고 문을 열었지.
호열은 대만의 뒷모습을 보며 리본과 대만이 꽤 잘 어울린다 생각했음.
사실 오늘... 호열은 대만이 골라온 책 사이에 쪽지를 하나 넣어놨음.
[저녁 같이 할래요? 토요일 6시. 서점 옆에 있는 레스토랑, 맛이 좋거든요.]
충동적인 행동이었음. 요 몇 달 호열은 대만에게 흥미가 생기기 시작했거든...
이제껏 호열이 사귄 사람들은 전부 어딘가가 정대만을 닮아있었음. 키가 크다거나 눈 색이 옅다거나 쉽게 발끈한다거나 무언가에 푹 빠진다거나.. 진지하다거나... 하지만 그 사람들은 정대만이 아니니 오래 갈 수 없었음. 언제 한 번은 사귀던 사람이 호열에게 누군지 모르겠지만 나한테서 그 사람 좀 그만 찾을래? 너 나랑 사귀는 거야 그 사람이 아니라 라고 한 적도 있었음. 그 후 호열은 연애를 그만뒀지. 그땐 그 사람이 누군지 궁금했는데... 호열은 열심히 책을 고르는 대만의 옆모습을 보고 알아차렸음. 그게 정대만이었다니. 호열은 괜스레 큼큼 목을 가다듬었음.
호열이 자신의 마음을 인정하기까진 오래 걸리지 않았음. 그래서 호열은 대만이 10번째로 책을 사러 온 날 결심했음. 질질 끄는 건 자기 스타일이 아니었으니까.
서평을 쓸 때만 들었던 펜으로 서평이 아닌 다른 걸 적으려 하자 손이 벌벌 떨렸음.
그리고 그 주 토요일 5시 45분, 대만은 평소보다 더 신경 쓴 차림으로 호열의 가게에 찾아왔음.
왔어요?
호열은 대만을 향해 미소를 지었음. 자기도 오늘 좀 신경써서 단골 손님인 고등학생이 사장님 오늘 좀 멋져보여요 라고 해줬거든. 조금은 부끄러웠고 조금은 설렜음.
대만은 얼굴이 붉어진 채 뒷정리를 하는 호열을 찬찬히 살펴봤음. 팽팽히 당겨지는 셔츠에 가려진 등근육의 움직임을 볼 때마다 숨을 멈췄음.
둘은 같이 셔터를 내리고 레스토랑에 가 저녁을 먹었음. 대만은 탄산수를 마셨고 호열은 와인을 한 잔 했음. 대만은 와인은 한 잔만 마셔도 취해서... 하고 말끝을 흐렸지.
둘은 시시콜콜한 얘기를 나눴음. 그건 농구얘기가 되기도 했고, 고교시절 얘기기도 했고, 서로 다른 중학교에 다녔던 시절이기도 했음. 식사가 끝난 후엔 자연스레 산책을 했고 마지막 도착지는 호열의 집이었음.
현관문을 열자마자 입술이 맞닿았고 그 뒤로는 자연스러웠음. 호열은 대만의 척추를 만지작거리며 대만에게 남자와 자본 적 있냐 물었고 대만은 눈이 풀린 채 고개를 끄덕였음. 호열은 울컥했음. 뭐 자기도 오는 여자 남자 안 가리고 다 잤지만 정대만이 그랬다는 건... 뭔가 참을 수 없었음.
풀었어요? 밑에?
아... 아니... 오늘은 이럴 줄 몰랐어가지고...
그래요? 그럼 제가 풀어줄게요.
호열은 대만을 침실로 끌고 들어갔음. 옷을 벗길 때마다 대만은 몸을 흠칫 떨었음. 셔츠를 벗겨내는 손길에 대만은 흐응... 하고 비음을 흘렸음. 호열은 대만의 목을 따라 입을 맞췄음.
내일 일정 없죠?
응... 흐으.. 아... 거긴 하지마아...
그날 호열은 처음으로 잠자리 후에 침대에서 담배를 태우지 않았음. 대신 엎드려 누운 대만에게 짧게 키스한 후 베란다로 나가 바람을 맞아가며 담배를 태웠음. 다 태운 후엔 아주 오래도록 바람을 맞았음. 기분 좋은 바람에 머리가 살랑거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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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둘은 걍 종종 만나서 밥 먹고.. 영화 보고 연인들이 할 법한 것들을 함. 이 날도 밥 먹고 카페 갔다가 같이 쇼핑 좀 하고 자연스레 호열의 집에 갔음. 대만의 집에 간다는 선택지는 없었음. 침대도 방도 모든 게 대만의 것이 더 좋았지만 호열의 집 보다 멀어 가는데만 15분 정도 걸리기 때문에.. 둘은 그 시간도 참을 수 없었음.
관계가 끝나면 호열은 당연스레 물과 수건을 가져왔음. 가져온 물을 입에 대주자마자 벌컥벌컥 마시는 대만에게 짧게 키스하자 대만은 푸스스 웃었음. 이제 호열은 아예 담배를 태우지 않았기에 잔 후에는 대만을 더 케어해줬지.
너 진짜 다정하네.
그래요?
응. 엄청.
이게 다정한가? 그 전에 만났던 놈들은 이렇게 안 해줬어요?
호열이 놈 이라고 칭하자 대만은 호열을 흘긋 봤음. 그러더니 고갤 끄덕였음.
어. 나몰라라 하는 놈들이 더 많았어. 바로 옆에서 담배 태우는 놈들도 많았고.
어떻게 그러지? 이렇게...
호열은 말을 멈추고 대만의 앞머리를 살짝 넘겨줬음. 담배 끊은 거 아는 구나. 대만의 앞머리는 고등학생 때 보다 더 길어져서 호열의 손가락에 감겼고 대만은 그런 호열의 뒷목을 잡아 자기 품에 쓰러지게 했음. 호열이 자신의 심장박동이 느껴질까 걱정할 정도로 둘의 맨 가슴이 밀착됐지.
야 말 이어서 더 해 봐.
싫어요.
해 봐.
아... 제발.
이렇게 다음에 뭐라 하려고 했어?
...
응?
... 예쁜데.
대만은 호열의 마지막 말을 듣고 푸핫 웃으면 그래 나 예쁘지 하며 호열을 끌어안았음.
그날 대만은 온몸을 감싸는 쾌감 사이에서 귓가에 들리는 좋아해요를 듣고 정말 간지럽다고 생각했음.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울었고 자기도 모르게 조르게 됐음. 호열은 그런 대만의 눈물을 핥았고 대만이 원하는 걸 전부 줬음.
사귀자라는 말이 없어도 자연스레 연인이 됐음. 둘은 사람들 눈을 피해 몰래 손을 잡았고 동이 틀 때까지 통화를 했고 여름밤엔 좋아한다고 소리도 쳐봤고 한겨울엔 내리는 눈을 맞으며 로맨스 드라마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음.
궁금한 거 있는데 나 언제부터 좋아했어요?
어?
언제부터 좋아했냐구.
음... 처음 좋아한 건 고3 겨울. 그리고... 최근엔 네 서점 처음 갔을 때. 그냥 너 니트 입은 거 보자마자 심장 뛰던데.
진짜? 거짓말 아냐? 고3?
이런 걸로 구라 안 치지. 진짜야.
고3 때 나를 왜 좋아했어?
아 부끄럽게 뭘 자꾸 물어?
궁금하잖아. 무석중 아이돌이었... 아! 왜 때려. 거기다 지금은 농구선수 인기투표 하면 1,2위를 다투는 정대만이 날 좋아한다는데.
하... 진짜... 너 진짜... 너 진짜 진짜 이상해애...
말 해주면 하루종일 형이라 불러줄게.
야 내가 그런 거에 넘어가겠냐? ...진짜?
응.
몰라... 그냥... 그때 네가 날 보면서 대만 군 하는데 좋았어. 네가 부르면 다른 느낌이 들어서... 됐냐?
그랬구나.
형이라 불러 봐. 이제.
그걸 믿네.
야 미친 거 아냐?!
대만은 호열의 등을 퍽 소리나게 때렸음. 그러자 푸하하 웃던 호열이 혀어엉 동생 아픈데... 하며 끈적하게 대만을 쳐다보자 대만은 얼굴을 가렸음. 그리고 그날 밤, 대만은 호열이 자신을 꼭 끌어안은 후, 잘 자요 형 사랑해요 하고 속삭이자 얼굴을 붉게 물들인 채 기분 좋게 잠에 들었음. 영원한 사랑은 없다고 생각하는 둘이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영원할 거 같았음.
그리고 그 생각은 3년 뒤에 끝을 맞이했음.
사소한 것으로 시작했지만 종국엔 개처럼 싸웠음. 말하지 말 걸 하는 순간에도 입은 벌어졌고 그런 생각은 말 걸 하는 순간에도 생각은 깊어만 갔음. 마지막에 내뱉어진 말은 눈 앞에 있는 이 남자에겐 절대 하고 싶지 않은 말이었음.
그만하자.
그만해요.
호열은 대만의 말에 그대로 집을 박차고 나왔음. 이럴 때마저 잘 맞는다는 사실에 미칠 거 같았음. 호열은 대만의 집 1층에 있는 편의점에 들어가 담배와 라이터를 샀음 대만과 사귀면서부터 입에 대지 않았기에 3년 만에 산 거였음. 3년 사이에 호열이 자주 태우던 담배는 단종이 됐음. 그건 없는데요 하는 점원의 말에 호열은 뒷머리를 만지작거리다 그냥 8미리로 아무거나 달라고 했음. 차에 타 비닐을 벗겨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곤 필터만 잘근잘근 씹던 호열은 라이터를 손에서 굴렸음. 한참을.
담배에 불을 붙이자 익숙한 향이 났음. 호열은 속이 타들어가는 기분을 느끼며 깊게 빨아들였음.
호열은 조수석에 놓인 정대만 전용 쿠션을 바라보다 시동을 걸었음. 그리곤 그새 다 타버린 담배를 절반 정도 물이 남은 생수병 안에 빠뜨린 후, 담배를 한 대 더 꺼내 물었지. 오늘은 드라이브는 좀 더 외롭고 길겠다는 생각을 했음.
헤어진 후, 대만은 호열의 생활반경엔 발도 들이지 않았음. 마주치면 어떨지 알 거 같으면서도 모르겠어서... 둘은 그렇게 1년이 넘도록 마주한 적이 없었음. 하지만 양호열은 정대만의 소식을 알게 됐음. 당연했음. 잘 나가는 프로농구선수는 알려하지 않아도 매체에서 계속 떠들어댔으니까... 잘 나가는 모델과의 루머나 시즌 최고 득점, 하물며 커피 광고로도... 호열은 집에 있는 티비에 천을 덮었음. 이렇게까지 해야하나 싶었지만 볼 때마다 그리고 들릴 때마다 심장이 쪼개지는 기분이 들어서...
그러다 헤어진 지 1년이 조금 넘었을 때 만날 일이 생길 듯. 북산 농구부 모임날 호열은 오라는 문자에 거절의사를 밝혔음. 가면 대만 군이 있겠지 싶어서.. 물론 호열도 대만도 자신의 연애사를 떠벌리는 스타일은 아니라 철판 깔고 가면 아무도 모를 게 분명했음. 그치만... 대만의 앞에선 잘만 하는 표정 숨기기도 잘 못 하는 자신이기에... 호열은 그만뒀음. 보고 싶었지만..
하지만 항상 예외는 생기지. 간만에 한 귀국에 그리운 친구들을 만났으니 굉장히 신나 잔뜩 마신 백호가 호열에게 자신을 데리러 와 줄 수 있냐고 물어봤거든. 백호는 막 취한 건 아닌데 너무 마셨다는 말을 덧붙였음. 호열은 잔뜩 새는 백호의 발음에 흔쾌히 수락했음. 대만이 신경쓰였지만 이제 1년이나 지났고... 백호를 챙겨줄 사람은 자기가 아니면 군단 녀석들 뿐인데 군단 녀석들은 죄다 고향에 있으니... 가야만 한다는 생각을 했음. 사실 맘 한 구석엔 정대만 얼굴이라도 볼 수 있겠다라는 생각이 가득했지.
아니나 다를까 도착해서 보니 이미 백호는 그 커다란 몸을 잔뜩 구긴 채 앉아있었음. 그 앞엔 대만이 술잔을 쥔 채 엎어져 자고 있었지. 호열은 대만의 옆얼굴을 빤히 봤음. 여전히 고운 옆태에 정갈한 눈썹 그 밑에 감춰진 올리브색 눈. 열이 올라 붉어진 입술은 술 때문인지 촉촉했음. 호열이 대만에게 손을 뻗으려는 순간 누군가 호열을 불렀음.
호열이니?
아... 오랜만이네요.
백호 데리러 왔구나.
준호였음. 손수건에 손을 닦던 준호는 대만을 바라보다 대만인 내가 데려갈테니 백호랑 조심히 가 하고 웃었음. 잘 부탁...까지만 말한 호열은 내가 뭐라고.. 란 생각에 입을 다물고 백호를 깨웠음.
백호야 가자.
눗... 호여리냐...
그래. 호열이야. 이제 슬슬 일어나지?
으응... 여ㅇ..ㅜ랑... 만만쓰는...
우물거리는 백호의 말에 호열이 입술만 깨물자 준호가 대신 입을 열었음.
백호야 태웅이는 윤대협 선수가 데려갔고 대만인 내가 데려가니까 너는 호열이랑 가면 돼~ 다음에 또 한국 들어오면 보자! 조심히 가!
준호는 그렇게 말하며 백호의 등을 툭툭 쳤음. 그리곤 호열을 바라보며 조심히 가 하고 대만을 부축해 나갔음.
호열은 대만의 뒷모습을 빤히 보다 백호의 옆에 앉아 가슴께를 꾸욱 눌렀음. 1년이 지난다고 다 되는 게 아니네... 시간이 약이라더니. 거짓말. 일부러 입은 하얀 니트 반소매가 너무 초라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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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정대만 호열이랑 뭔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다만 이제 걔 없어. 그러니까 자는 척 그만해라. 힘들다.
...어때 보여?
너? 아님 양호열?
후으... 걔.
여전히 어딘가가 날카롭네... 정도?
하하... 그렇구나.
대만은 깊게 숨을 내쉬더니 준호에게 고맙다며 이제 혼자 가도 돼 하곤 택시를 탔음. 창밖에 보이는 빨갛고 노란 불빛들을 보며 안절부절 못하던 대만은 결국 중간에 내려 집까지 걸어갔음. 왜 이렇게 땅이 울렁이는지 왜 이렇게 눈이 뿌얘지는지 왜 이렇게 아픈지...
대만은 아직도 이별을 겪는 중이었음. 1년이 넘도록.
뭔 말이 일케 많은지 말 존나 많아서 재회하는 건 나오지도 않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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