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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4.24 18:31
잘 지내요?
막상 쓰려니까 괜히 부끄럽네요.
형한테 주소 물어볼 때, 형이 그랬죠?
그런 건 왜 묻냐고. 편지라도 쓸 거냐고.
당연하죠. 쓸 거니까 물어봤죠.

이래뵈도 편지 쓰는 데는 자신 있는 편이라구요.
몰랐죠?
형은 편지 같은 거 써 본 적 있어요?
아마 없을 것 같은데.

혹시 이 편지가 마음에 들면 내킬 때 답장해 주세요.
뭐, 그럴 일은 없을 것 같긴 하지만.

사실, 이 편지...
러브ㄹ 형한테 알려 주고 싶은 게 있어서 쓰는 거예요.
형은 몰랐겠지만, 사실 내가 형 좋아하고 있던 거 알아요?

like 말고, love의 감정으로.
어때요?
놀랐죠?
아. 보고 말할 자신이 없어서 여기까지 와서 편지로 쓰는 건데...

형 얼굴이 궁금하긴 하네요.
무슨 생각하고 있어요?
계속 읽고는 있어요?

아무리 싫은 표정 짓고 찢어서 버린대도
나는 알 수가 없으니까 아무렇지도 않아요.
약 오르죠?
 
형은 몰랐겠지만 나는 아주 오래 전부터 형을 알았거든요.
"알았다"기 보다는 그냥 "봤다"는 표현이 맞을지도 모르겠네요.
어쨌든, 나는 형이 아는 것보다 오래전부터 형에 대해서 생각했어요.
처음부터 좋아했냐고 하면... 그런 건 아니지만.

아니, 이것도 거짓말이네요.
좋아했나봐요. 그땐 몰랐지만.

그래서 시간이 많이 흐른 다음에 만났을 때도 단번에 알 수 있었어요.
아, 그때 그 형이다.
사실, 계속 좋아했던 게 맞나 봐요.

그렇지만, 나는 바보라서...
내가 좋아한다는 걸 알았을 땐 이미 좀 늦었더라구요.
기억 나요?
졸업하고 오랜만에 간식 사들고 연습하는 거 보러 왔던 날.
교문 앞에서 여자 친구랑 뽀뽀하는 거 나한테 들킨 거 알았어요?

아. 이건 솔직히 내 잘못 아니잖아요.
그렇게 벌건 대낮에 거기서 그러고 있던 형 잘 못이지.

알게 된 건 그 때쯤이려나.
그 뒤로도 종종 왔었잖아요.
그때마다 여자친구 숨기느라 고생 좀 하셨더라고요.
별로 재능은 없는 거 같았지만.
그거 알아요?
학교 앞 카페에 여자친구 숨겨두고 오는 거 백호랑 태웅이도 알아요.
형도 어쩔 수 없는 바보인가 봐요.

내가 미국 간다고 말하던 날에
부럽다고 말해 준 거 고마웠어요.
사실, 형이 아무렇지도 않아 할까봐 내심 초조했거든요.
그래. 그렇구나. 이제 못 보겠구나. 잘 지내. 안녕.
그렇게 끝날까봐 너무 무서웠어요.
그런데 형이 머리 쥐어 뜯으면서 부럽다고 제일 먼저 말해줘서 좋았어요.
배 아파서라도 나를 한번쯤 떠올려 주겠구나 싶었죠.

그래서 용기내서 주소도 물어봤던 거에요.
그때부터 이미 이런 편지 쓸 생각 하고 있었던 거 맞아요.
형은 바보라서 또 속은 거고요.

이렇게라도 말하고 나니 뭔가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요.
반대로 무거워진 부분도 있지만 차차 나아지겠죠.

미국에서 사는 건 좋은 점도 많지만, 힘든 일도 많아서
아마 금방 괜찮아질 거예요.

끝까지 읽었어요?
나는 아직 형이 좋아요.
그건 어쩔 수 없어요.

아까 답장해 줬으면 좋겠다고 했지만,
이런 마음 무겁고, 부담스럽다는 거절이라면...
굳이 답장할 필요 없어요.

형은 알 것 같은데.
내가 사실 도망치는 걸 좋아한다는 것도.

그래서 많이 좋아했어요.
앞으로도 잊혀질 때까지만 좋아할게요.

그럼, 잘 지내요.
.
.
.
.

이 편지 보내고 n개월 동안 답장 없어서 태섭이는 그냥 거절당한 줄 알고 뚜벅뚜벅 걸어가고 있었는데
어느 날 학교 기숙사로 돌아가는 길에 갑자기 기숙사 사감이랑 싸우는 사람 뒷모습 발견하고 ?? 됐으면 좋겠다

동양인 정말 찾아 보기 힘든 동네고
이 학교는 특히나 자기가 거의 유일한 아시안인데...

길쭉한 팔다리 펄펄 흔들면서 한 손에는 종이쪼가리 하나 들고
히!!! 이즈!!!! 마이1!!! 보이!!! 프렌드!!!!!!!!
하고 어설픈 발음으로 화내는 웬 놈을 발견해서...

사감은 당최 뭔 말인지 모르겠고 부외자 출입금지라고만 하면서 저지하는데...
미치겠다는 듯이 커다란 손으로 머리 넘기는데 마치 긴 머리 넘기듯 빡빡 깎은 스포츠 머리를 넘기는 남자
어쩔 수 없다는 듯 뒤돌아서서 커다란 캐리어 손잡이 붙잡는 순간 태섭이랑 눈이 맞는데

야악!!!!!! 송태섭!!!!!!!!!

하고 우다다다ㅏ 달려오는 모습이 꿈결 같기도 하고 드디어 너무 힘든 나머지 정신이 나가버렸나 싶은 태섭이.

이런 건 얼굴 보고 말을 해야지!!! 진짜 싸가지라고는 눈곱만큼도!!!!
...여긴 어떻게 왔어요?
엉? 비행기 타고 왔지. 야야. 그건 그렇고 미국은 왜이렇게 넓냐. 공항에서 여기까지 오는 데도 하루가 꼬박 걸렸어.
...왜 왔어요?
야! 네가 갑자기 이런 편지만 남기고 답장도 하라, 하지말라 오락가락 하니까..! 전화도 못하고!
여기 있는 줄은 어떻게 알고...?
편지에 네가 다 써놨잖냐. 너 영어도 제법 잘 쓰더라? 의외...
아까 뭐라고 했어요?
엉? 아까 언제? 비행기 타고 왔다고 한 거?
아니. 그 전에.
지금 네 이름 성질내면서 불렀다고 화내냐? 너는 진짜 더 혼나 봐야 정신을 차...
내가 당신 보이 프렌드에요?
....?! ...아, 아니! 네가 나한테 고백 했잖아! 나 영어 잘 못해서 거기까진 설명을 못 ㅎ...

태섭이 어지러운 감정 결국 제어 못 하고 그대로 정대만 품에 안는데 태섭이가 있는 힘껏 안아도 그간 정대만도 더 커버려서 가슴팍에 얼굴 묻고 자기가 폭 안긴 것처럼 안기게 되겠지.

그리고 하얗고 얇은 면티만 입은 그 가슴에 얼굴 부비면서
하... 정대만 냄새....
하고 냄새 확인하고 나서야 꿈 아니라는 확신 가졌으면 좋겠다


대만이도 뭐...
처음에는 당황하다가 생각할 시간을 달라 뭐 이런 답장은 하지 말라니까(그렇게까진 말 안했음) 어떡하지 하다가
그렇다고 옳다구나 그럼 사귀자고 편지 보낼 수도 없고...

그러나 대만이 대쪽 같은 그 성격에
이런 건 얼굴 보고 얘기해야하니까...

몇달간 열심히 아르바이트에서 모은 돈으로 방학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짜고짜 편지에 적힌 주소까지 가기로 한 거임...

그러나 이 일련의 과정에서 약간? 여럼풋이 자기도 태섭이를 어쩌면 좋아할지도 모른다는 감각 같은 게 싹트는 중이라...
낯선땅에서 얼굴 보고 만났을 때

아 이거다

싶었을 거야 아마....


태섭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