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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4.21 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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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화기 너머로 들려온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심장을 움켜쥐었다. 한참동안 저도 모르게 숨을 참고 있다는 걸 깨달은 것은 그 남자가 낮게 웃는 소리를 낸 시점이었다. 누구냐는 물음이 목 끝까지 올라와 입이 벌어졌으나 이내 다물고 말았다. 여태껏 영화로 예습하지 않았나. 그리고 영화가 아니어도 직감이 알려준다.
태섭은 전화를 끊으려고 귓가에서 전화를 떼며 집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에헤이! 아니지. 아니지~ 그러면 안 될텐데?"

손가락을 튕기는 소리와 함께 남자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고요한 새벽은 귓가에서 이미 멀어진 전화소리도 이렇게 선명하게 들리게 만든다. 그 자리에 굳어있다 다시 베란다 난간으로 다가가 밖을 내다보았다. 남자는 이쪽을 올려다보고 있었는데 멀어서 잘 보이지는 않지만 웃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당신 누구야."

뻔한 질문을 던졌다. 답을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가로등 아래 서있는 남자가 어느 조직에 소속되어있는지를. 남자는 킥킥거리며 웃기만 했다. 태섭은 난간 가까이에 붙으며 남자를 다그치려 했다.
그러나 베란다 문이 열리는 통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전화기를 떨어뜨렸고, 통화는 그대로 끊어졌다. 베란다문을 연 사람은 당연하게도 남편이다.

"뭐해?"

놀란 가슴께를 움켜쥔 태섭은 바닥에 떨어진 자신의 휴대전화와 잠이 덜 깨 눈도 뜨지 못하고 인상을 찡그리고 있는 대만의 얼굴을 빠르게 번갈아보았다.

"아니, 아니예요. 아무 것도... 아무 것도 아니예요."
"근데 왜 그렇게 놀라?"
"시, 시끄러웠어요?"
"응? 아니, 그냥 잠결에 옆에 네가 없어서 깬 건데...그래서 뭐하고 있었는데?"
"달재랑 통화를... 좀..... 했어요. 너무 길었죠? 자러 가요."

태섭은 대만의 몸을 돌려 집안으로 떠밀었다. 대만은 요란하게 하품을 하며 안방으로 다시 들어갔고 태섭은 바닥에 떨어진 휴대전화를 주운 뒤 난간 밖을 내다보았다. 그 남자는 주머니에 양 손을 넣은 채로 이쪽을 빤히 쳐다보다 눈이 마주치니 천천히 뒤돌아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렇게 고요한데도, 눈 앞에서 걸어가는 뒷모습이 뻔히 보이는데도 남자의 발소리가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집 안에서 혹시 폰이 깨졌는지 묻는 목소리가 들렸다. 태섭은 그제야 손에 쥔 전화를 내려다보았다. 액정이 완전히 박살나있었다.

방으로 들어가니 눈을 감고 얕은 잠을 자고 있는 대만이 바로 기척을 느끼고 이불을 들어올렸다. 꾸물거리며 기어들어간 이불 속은 체온으로 데워져있어 무척 따뜻했다. 태섭은 눈을 감으며 대만의 품에 파고들었다. 대만은 눈도 뜨지 않고 제 품에 파고든 태섭을 팔로 감싸 꽉 끌어안았다.

"폰은?"
"액정이 나갔어요."
"그래....."

숨소리가 더 많이 섞인 목소리가 잦아들고 느린 호흡이 일정해진 것이 느껴졌다. 가슴께에 닿은 귀에서 심장소리가 들렸다. 규칙적인 박동에 잠이 몰려와 스르르 잠이 들었다.


-


가게에 출근한 태섭은 바로 노트북을 켜 오늘의 예약목록을 확인했다. 책장에 꽂아둔 노트에 수기로 적어둔 것과도 비교하며 누락된 것은 없는지 이중으로 확인했다. 오늘 오전에는 예약건이 하나밖에 없었다. 오후에는 평소보다 많은 건수가 있어 오전 예약건을 손님이 수령해가고 나면 잠시 외출해 휴대전화를 as센터에 맡겨야겠다고 생각했다. 노트북으로 메신저를 켜고 달재에게 액정이 깨져 연락이 안 된다는 메세지를 보낸 뒤 예약사항을 확인하고 꽃다발과 바구니를 만들었다. 살짝 한가한 시간에는 거울을 보며 아침에 남편이 깜짝 선물이라며 차량 글러브박스에서 꺼낸 피어싱을 끼고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이윽고 메세지를 확인했는지 달재가 가게로 들어와 또 어떤 범죄상황에 휘말린 것은 아닌지 걱정했다. 태섭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입을 크게 벌리며 웃었다. 그 사람들과 아주 관련없지 않아도 전화는 자기가 떨어뜨려서 깨뜨렸으니 달재가 상상한대로 몸싸움을 벌이다 그렇게 된 것은 아니니 말이다.

근처 분식집에서 김밥을 사와 점심으로 먹으며 수다를 떨고 있을 쯤, 가게 문 앞에 익숙한 차가 서더니 운전석에서 대만이 내려 헐레벌떡 뛰어들어왔다. 일하는 중에 짬을 내어 새 폰을 사온 것이다. 태섭은 액정만 교체하면 되는데 왜 그랬냐고 하면서도 올라간 입꼬리를 감추지 못했다.
복귀해야해 급히 나가는 대만에게 달재가 인사했다. 그들은 마치 어색한 사이처럼 보였다. 태섭은 달재의 인사를 받아주며 어깨를 쥐는 남편을 보았다. 그 손길은 퍽 익숙해보였다.
그들이 바람을 피웠다 의심을 하는 것이 아니다. 언젠가 보았던 메세지를 떠올리면 그들은 명백한 상하관계에 있는 것으로 보였고, 어깨를 살짝 누르는 듯한 저 손은 압박에 가까웠다. 달재의 몸이 순간적으로 움츠러드는 것을 봐도 그러했다. 태섭은 이에 대해 달재에게 추궁을 해야할지 고민했다. 그들이 함구하는 이상 무얼 근거로 캐물을 것인가. 대화를 몰래 봤다? 입 밖으로 꺼내기 떳떳하지 못하거니와 한편으로는 부끄러운 일이다.


-


며칠만에 분위기 좋은 식당에서 외식할 생각에 신이 난 태섭은 콧노래를 부르며 꽃을 다듬었다. 줄기를 자르는 가위의 소리가 경쾌했다. 박자에 맞춰서 딱소리가 나니 더 흥이 났다. 얼마나 기분이 좋았는지 손님 몇 명이 오늘 기분이 좋아보인다고 웃을 정도였다.
남편은 일찍 일을 마치고 데리러 오겠다고 했다. 태섭은 매대에 둘 꽃다발을 만들며 남은 예약목록을 살펴보았다. 그러다 팔로 가위를 쳐 바닥에 떨어졌고 동시에 가게 문이 열리며 종이 울렸다. 높은 목소리로 인사를 하며 바닥에 떨어진 가위를 주웠다. 묵직한 구둣소리가 들렸다. 걸음은 카운터 앞에 와서 멈췄고 손님이 예약한 꽃바구니를 찾으러 왔다고 말했다.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노트북 화면의 예약내역을 보며 물었다. 오늘 바구니 예약건은 하나밖에 없지만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늘 확인하는 과정이다.

"최동오."
"네. 최동....."

반사적으로 들은 이름을 확인하듯 말하던 태섭의 동작이 멈췄다. 카운터에 올려두고 마지막 포장과 장식을 하던 손이 천천히 내려갔다. 태섭은 이 목소리를 기억한다. 새벽의 수화기에서 들리던 그 오싹한 목소리. 태섭은 고개를 천천히 들고 손님을 쳐다보았다. 그 날 새벽과 달리 일부러 구둣소리를 내며 들어왔구나.
아무 대응도 하지 못하고 굳어있는 사이 남자의 어깨 너머로 가게 문이 열리는 것이 보였다. 들어온 사람은 늘 웃는 낯을 하며 친근하게 다가왔던 정우성이었다. 태섭은 아래에 내린 손을 슬금슬금 움직여 원예가위를 잡으려했다. 앞에 선 남자가 쾅소리나게 내리치며 안을 침범해 태섭의 손을 짓눌렀다.

"역시 사람 상대하는 사장님이라 그런지 목소리를 잘 기억하는군 그래? 낮에 보니 더 귀엽네."

남자는 거의 사백안이 될 정도로 눈을 크게 뜨며 미소를 지었다.

"그 겁에 질린 얼굴이 말이야."
"태섭이 안녕~ 오랜만이네. 내가 저번에 말했지? 동오형."

우성이 카운터로 걸어왔고 커다란 남자가 둘이 이쪽을 내려다보아 위압감이 들었다.

".... 저한테 무슨 볼일이시죠. 전 그냥 평범한 소시민인데요."
"네가 어떻게 평범해. 네 남편 누군지 몰라?"
"몰라요. 제 남편은 그냥 회사원이예요. 경찰 부르기 전에 나가주세요."
"나 손님이야. 저 꽃바구니 예약한 손님."
"......"
"여긴 손님이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차별하는 가게인가?"
"나쁘다 태섭아~ 너 그런 사람이었니? 우리 엄마가 여기 꽃을 얼마나 좋아하는데~"

마지막에 말을 얹는 정우성이 퍽 얄미워 왁왁거리며 한 대 때리고 싶었다. 그럴 수 있는 건 그가 평범한 사람인줄 알았을 때나 가능한 일이니 지금은 입술을 깨물며 삼키는 수밖에 없다. 곤경에 처한 태섭에게 한줄기 빛처럼 나타난 사람은 다름아닌 친구, 이달재였다.

"사장님, 지금 꽃다발 포장될까요?"

최동오와 정우성의 무표정한 얼굴이 이달재를 쳐다본다. 뒤를 돌아보느라 몸을 일으켜 짓눌렸던 태섭의 손도 자유로워졌다. 틈이 생기자마자 잽싸게 손을 빼내니 최동오가 다시 고개를 천천히 돌려 태섭을 보았다.

"정대만한테 전해둬. 이 최동오가 돌아왔다고."

문으로 걸어가던 그는 매대 앞에 선 달재의 곁에 서서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꼼꼼히 훑어보고는 입으로 무언가를 작게 중얼거리고나서 밖으로 나갔다. 뒤따라가던 우성이 황급히 다시 돌아와 바구니를 챙겼다.

"이건 원래 내 거니까 가져간다?"

우성이 나가면서 낸 종소리가 잦아들고도 태섭과 달재는 그 자리에 한참을 가만히 서있었다. 끔찍한 침묵이 흘렀다. 태섭은 타이밍 좋게 들어와 되도 않는 손님 행세를 하는 달재에게서 확신을 얻었다.

"너 알고 찾아온 거지."
"......"

달재는 선선히 미소를 짓기만 할 뿐 말이 없었다.

"대만이 형이 가게로 가보래? cctv로 봤어?"
"분위기가 이상하니까...."

달재의 손에 쥐고 있는 휴대폰의 화면이 켜졌다. 두 사람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화면으로 모였다 다시 서로를 보았다. 달재는 빠르게 화면을 확인한 뒤 바지 뒤주머니에 폰을 집어넣었다. 카페에서 음료를 사올테니 잠깐 얘기를 하자는 권유에도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지금은 시간이 안 되는데 저녁을 같이 먹는 건 어떠냐고 되물었다. 저녁에는 남편과 저녁약속이 있으니 거절할 수 밖에 없는 제안이었다. 그리고 일부러 거절할 제안을 한 것도 알고 있다.

"하나만 물을게. 네가 언젠가 얘기했던, 대만이 형이 나에게 해가 될 일은 하지 않을 거라는 말. 그거 진짜야?"
"물론이지."

태섭은 가게를 나가는 달재를 문까지 졸졸 따라갔다. 몸의 반이 바깥으로 나간 달재가 손바닥을 보이며 더 나오지 말라는 표시를 했다. 제법 단호해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태섭은 한발짝 뒤로 물러났다.

"그럼 하나만 더 물을게. 너도 안전해?"
"......내가 위험할 일이 뭐가 있어."

밖을 나가는 달재의 시선이 특정한 곳에 고정되어 있는 것을 보았다. 닫힌 유리문 너머로 그 시선의 끝을 따라가니 건물의 그늘 아래에 서있는 인영이 보였다. 그 손에는 익숙한 꽃바구니가 들려있었다.


-


"오~ 안녕 친구야?"
"제가 왜 당신 친구예요."
"우리 동갑이잖아. 너랑~ 나랑~ 태섭이랑~ 우리 모두 동갑내기 친구."
"됐어. 그 새끼 어차피 병신 깍두기새낀데."

옆에서 말없이 담배를 피우던 동오가 벽에 붙인 등을 떼고 가까이 걸어왔다. 그는 최근에 대만의 훼방으로 산왕건설이 큰 수주를 놓친 것에 대해 욕지거리를 늘어놓았다. 달재는 눈의 초점을 흐리고 그들과 눈을 마주치지 않은채 대부분 흘려듣다가 말이 끝나는 순간에 치고 들어갔다.

"그러게 잘 하시지 그러셨어요."

그 말이 제대로 심기를 건드렸는지 코웃음을 치는 소리가 들렸다.

"성가시게 구는 정대만이 손 씻고 이 바닥 뜨면 좋은 거 아닌가요. 지금 불평하시는 일도 없을 텐데 뭐가 그리 아니꼬우신지 모르겠어요."

우성이 동그랗게 뜬 눈으로 손으로 입을 가리고 동오를 쳐다보았다. 여기서 말을 얹었다간 저 구둣발에 걷어차일 것이 분명하기에 입을 다물었다. 그런데 예상 외로 동오는 큰 반응이 없었다. 표정에 변화도 없었다.

"그래. 아주 행복해 뒤지시겠네. 근데 내가 정대만 그 새끼를 존나 오래 전부터 봐서 아는데..."

동오가 담배 꽁초를 바닥에 내던지듯 버렸다. 불티가 옷에 튀어 탄 자국이 남았다.

"그 새끼는 씨발 존나 개싸이코 새끼야. 또라이라고 씨발. 내가 살면서 미친놈을 존나게 봤는데 그 새끼같은 또라인 못 봤다. 주기적으로 사람 패죽이지 않으면 성에 안 차는 사이코가 뭐? 경찰도 죽여서 묻은 적도 있는 게 사람 안 죽이고 얼마나 버틸 거 같냐? 글러먹은 새끼.... 지 마누라나 안 쳐죽이면 다행이겠네. 그 꼴도 볼만하겠다."

뭐가 그리 재밌는지 혼자 목젖이 보일 정도로 웃던 최동오는 별안간 안색을 굳히더니 달재의 얼굴에 침을 뱉고 가버렸다. 달재는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있다 두 거구가 사라진 뒤 노트북 가방에 들어있는 물티슈를 꺼내 얼굴을 닦았다. 깊은 한숨을 쉬었다. 앞에서는 강단있게 떨지 않고 잘 말했지만 아무래도 이런 모욕적인 태도와 언사는 견디기 힘든 것이다.


-


꽃무늬 패브릭 소파에 앉은 달재의 얼굴에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옥색 테이블과 그 위에 올려진 재떨이. 가게 안에 배어있는 담배의 쩐내. 그리고 턴테이블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이 시간여행을 하는 듯한 감각을 느끼게 했다. 아직도 이런 다방이 존재한다는 것이 신기했다.
달재를 이런 오래된 다방에 불러낸 사람은 약속시간보다 14분은 늦게 왔다. 옆을 지나칠 때는 담배냄새가 훅 끼쳐왔다. 상대는 맞은편에 털썩 앉으며 달재를 힐끗 쳐다보더니 제 옷을 끌어당겨 냄새를 맡았다.

"에이 씨발. 냄새 다 뱄잖아."

누군가의 이름을 대며 걷어차야겠다는 말을 신경질적으로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제법 살벌했다. 달재는 상대의 눈치를 보며 다리를 모으고 두 손을 무릎 위에 얌전히 올려두었다.

"나 담배 안 핀다. 나 아니야 이거."

얼마 전에 친구가 소개한 정혼자는 그 당시와 매우 다른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삼자대면했을 당시에는 진중하고 매너가 좋은 사람이었고 욕은 물론 거친 말 한 마디도 할 줄 모르는 사람같았는데. 친구에게 숱하게 들었던 말에서도 분명 그런 사람이었다.

"내가 우리 태섭이의 친구를 부른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어라? 잠깐만... 이게 어디갔지...."

바지 주머니를 뒤적거리다 일어나서 손을 깊숙하게 넣어 휘젓고 뒷주머니도 뒤지더니 셔츠의 가슴주머니에서 명함을 찾았다. 자리에 다시 앉은 상대방은 자신만만한 얼굴로 소리나게 명함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달재의 앞으로 밀었다. 두 손으로 조심스레 명함을 집어들어 글자를 읽는 달재를 향해 친구의 예비남편은 자기를 좀 도와달라고 말했다.
달재는 명함과 친구의 연인의 얼굴을 번갈아보았다. 친구에게 소개받을 때 받았던 멀쩡한 명함과는 다른 것이었다. 거기엔 그럴듯한 회사이름과 직책도 적혀있었는데 이건 회사는 물론 명함을 건넨 사람의 이름도 없거니와 누가 보아도 이상하고 불법적인 일을 하는 집단이란 기운이 물씬 풍겼다.

"내가 제법 유명인에 인기스타거든?"

제 입으로 저런 낯간지러운 말을 뻔뻔하게 늘어놓는 사람인줄은 몰랐다. 그는 자기를 어이없게 쳐다보는 달재를 무시하고 자기가 이 일이 얼마나 적성에 잘 맞고 좋아하는지를 떠벌렸다. 듣기만 해도 속이 메스꺼워지는 일화도 늘어놓았다. 들으며 달재는 생각했다. 친구가 미친 사이코한테 단단히 잘못 걸렸다고. 지금 눈 앞에 앉은 남자는 사람의 고통과 비명을 즐기는 사람이고 정작 피를 묻히는 건 더럽다며 싫어하는 변태라고.

"설마 태섭이를 때리시...는 건 아니시죠?"

오랜 절친에게 그가 가학적인 성향을 드러내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남자는 잠시 얼굴을 굳히고 달재를 노려보았다. 그는 험악한 얼굴로 친구의 침대사정까지 궁금해하냐며 기분나빠했다. 그 말을 들은 달재가 더 황당해했다. 평소에 폭력을 휘두르는지가 궁금했을 뿐인데. 그걸 물은 것이 아니라며 다급하게 손을 내젓는데 남자는 됐다며 손사래를 쳤다.

"태섭이가 때릴 데가 어디 있냐. 껴안고 뽀뽀하기도 아까워 죽겠구만."

때린다는 말에 질색하고 친구의 어디가 매력적이고 귀엽고 사랑스러운지 말하는 입과 헤벌레한 얼굴은 과연 진실을 보여주고 있었다. 달재는 깨달았다. 친구가 사랑에 미친 사이코한테 잘못 걸렸구나.

"하여간 태섭이 친구야. 내가 은퇴를 하면 아쉬워서 좆대가리 들이대고 비비는 새끼들이 존나 많을 거란 말이야. 개중엔 그 더러운 걸 태섭이한테 들이대는 씨발놈도 있을 거라고."
"어...음....... 네에......"

조폭이나 야쿠자는 조직이나 업계를 떠나는 사람에게 보복을 한다지. 그런 걸 저렇게 말하는 거겠지? 표현이 육성으로 듣기 거북할만큼 거칠다.

"내 주변엔 신상캐는데는 도가 터서 숨 쉬는 것보다 쉬운 애들이 널렸어. 어? 무슨 말인지 알겠냐?"
"형님네 조직.....아니 회사에서 태섭이를 가만두지 않을 거라는 말쓰...."
"아니!"

남자가 주먹으로 테이블을 세게 내리쳤다. 어찌나 세게 내리쳤는지 테이블 위에 놓인 재떨이가 트램펄린을 뛰듯 덜그럭거리는 소리를 냈다. 남자는 우리 애들은 그런 치사한 짓을 하지 않는다며 으르렁거렸다. 그렇다면 그 치사한 짓을 할 다른 사람들이 있단 말이렷다. 달재는 눈을 꾹 감고 마음에도 없는 죄송하단 소리를 했다.

"내가 작업 끝낼 때까지만 도와줘."
"무슨 말인지 이해했습니다. 그래도 죄송합니다만 아무리 태섭이를 위해서라도 불법적인 일을 할 순 없어요."
"하아... 씹... 친구야. 내가 진짜 너한테 부탁하는 거 같아? 내가 너한테 사람을 패라고 했냐, 죽이라고 했냐?"

남자가 머리를 쓸어넘기느라 손을 올리는데 순간 때리려는 위협을 가하는 줄 안 달재가 어깨를 움츠렸다.

"그리고 누가 불법이래? 탐정 이제 합법화된 거 몰라?"

원래는 흥신소였다는 얘기구나. 머리가 핑 돌았다. 살면서 절대 얽힐 일이 없다고 생각한 방향인데.

"월급도 섭섭지 않게 줄거야. 너 어디 가서 이만한 돈 못 받는다?"

남자가 제시한 금액은 과연 억소리가 날만한 엄청난 금액이었다. 결정타로 사이가 나쁜 조직에서 이미 태섭이를 주시하고 있다는 말을 했다. 그들의 교제기간이 제법 길었으며 결혼하기로 했으니 그쪽 눈에 들어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고민에 빠진 달재는 결국 친구의 안전을 택하기로 했다. 친구의 예비남편은 그제야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러더니 엉거주춤하게 일어나 친근하게 굴며 달재의 등을 두드리고 일으켜 세웠다. 심지어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았던 이름을 부르면서. 손바닥 뒤집듯 바뀌는 태도에 소름이 돋았다.

다방을 나간 대만이 제일 먼저 한 일은 지금 입고 있는 옷과 정확히 똑같은 제품을 구입해 최대한 사용감을 만들어내고 그가 사용하는 향수를 뿌린 뒤 입는 것이었다. 입고 있던 옷은 고민도 하지 않고 쓰레기통에 버렸다.

"담배피는데 구라쳤다고 태섭이가 생각하면 어쩌냐. 내가 구라쟁이가 되잖아."

얼이 빠진채 서있는 달재의 코에 머리통을 들이밀며 담배냄새가 나는지 묻기도 했다. 쓰레기통에 버려진 옷을 보는 달재에게 태섭이가 준 선물은 없다는 이상한 소리를 했다. 태섭이가 준 거면 진작에 세탁소에 맡겼다며 의기양양하게 구는데 그의 사고방식을 종잡을 수가 없었다.


대만이 부탁한 역할은 간단했다. 출근을 하는 등의 일로 대만이 태섭의 곁을 비우면 멀찍이서 비밀경호하는 것이었다. 사각지대가 없을 정도로 촘촘하게 가게 내부에 설치된 카메라와 주변을 찍는 카메라를 들여다보는 일이 제일 많았다. 에피소드라고 할 만한 것이 생기면 대만에게 보고를 해야했다. 진상은 보고 제 1순위였다. 보고받은 대만은 해당 시간의 영상을 확인하고 그 진상을 특정해 길에서 괜히 시비를 거는 등 반드시 보복을 가했다.

짬을 내 본업인 프로그래밍을 하기도 했다. 당연하게도 이는 대만의 조직인 북산에서 시켜서 하는 일이었는데, 언젠가 대만에게 이끌려 사무실에 갔을 때 권준호라는 사람이 웃으며 달재의 프로그래밍 능력을 높이 사 탐을 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한 그가 시키는 일이라곤 그들이 운영하는 불법도박사이트의 알고리즘을 더욱 정교하고 교묘하게 만드는 것 뿐이었다. 분명 나중에 제대로 된 회사로 이직하는데 도움이나 경력이 될 거라고 했는데 이게 정말 도움이 될까.


-


태섭은 붉은 벽돌로 된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긴장되어 입이 바짝 말랐다. 몇 걸음 뒤로 물러서 시트지가 발라진 2층 창문을 쳐다보았다. 심호흡을 하고 침을 한 번 삼킨 뒤 발을 내딛었다.
계단을 내려오는 느긋한 발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난간을 잡은 손을 비롯한 몸이 얼어붙어 눈만 도르륵 굴렸다. 이내 손에 담배갑과 종이컵을 쥔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이쪽에 두 번 다시 오지 말라고 했을 텐데..."

스쿠터 옆에 서서 담배를 피우던 남자였다. 그의 말투와 인상은 상당히 부드러움에도 어쩐지 압박감이 느껴졌다. 안경을 쓰고 있어 이지적인 느낌을 주기도 했다. 2층의 기척을 살핀 남자는 태섭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건물 밖으로 이끌었다.

건물 사이 골목으로 데려간 남자는 태섭을 앞에 두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담배에 불을 붙여 깊이 빨아들이고 태섭의 얼굴에 연기를 내뱉었다. 태섭은 입을 꾹 다물고 숨을 참으며 머리와 손을 내저었다. 남자는 다른 사람들은 사무실 안에서 그냥 담배를 피우지만 자기는 안에서 피우는 것이 별로라며 물어보지도 않은 정보를 늘어놓았다. 연기가 어느 정도 가셨다고 생각해 달재가 여기 있는지 묻는데 짙은 담배냄새가 훅 끼쳐왔다. 남자는 언뜻 보면 표정 변화가 없어보일 정도로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달재는 사무실에 안 와요."

남자는 종이컵에 담긴 커피를 마셨다. 태섭은 그 와중에도 담배에 커피믹스라니 입냄새가 참 고약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태섭의 의중을 읽었는지 남자의 눈이 휘어졌다.

"빨리 가는 게 나을 걸. 당신이 여기 온 거 대만이가 알면 길길이 날뛸 거라서."
"말 안 해요."
"아니."

다 마신 빈 종이컵을 재떨이로 쓰며 담배꽁초를 버린 남자는 새 담배를 꺼내물고 손가락으로 제 귓불을 톡톡 건드렸다.

"그 귀걸이랑 폰으로 위치추적해서 다 알아요. 매번 당신 위치 들여다보는 건 아니지만, 봤다가 여기있는 거 들키면 어쩌려고."

놀라서 말이 안 나왔다. 태섭은 떨리는 손으로 왼쪽 귀에 단 피어싱을 만져보았다. 아무리 만져봐도 평범한 피어싱과 다를 바가 없었다.

"남편이 이쪽 세계에 안 엮이게 하려고 얼마나 피똥싸고 있는데 그것도 몰라주고... 하긴 그러니까 이러나. 걘 진짜 우리 중에서도 독보적이라 당신 기억 지우거나 조작해보겠다고 약을 쓸 수도 있으니 더 깊게 알려하지 말고 얌전히 집에 가."
"최동오란 사람에게 원한이라도 샀나요?"

방금 들은 말은 그새 잊어버렸나. 남자가 짧게 한숨을 쉬었다.

"걔들은 예전부터 사이가 안 좋았지. 아마 오랜 친구가 손 씻는다니까 서운해서 그런 게 아닐까?"

남자는 손목시계를 들여다본 뒤 주머니에서 폰을 꺼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상대가 전화를 받으니 차를 끌고 나오라는 통보만 하고 바로 끊었다. 이윽고 낡고 허름한 골목과 건물이 가득한 풍경에 어울리지 않는 깨끗하고 고급진 차가 나타났다. 남자는 뒷좌석 문을 열고 태섭을 잡아 끌어 차 안에 강제로 밀어넣었다. 차체에 팔을 올려 기대고 안의 태섭을 보며 이걸 마지막으로 다시는 얼굴을 보면 안 된다는 엄포를 놓는 것도 잊지 않았다.

"최동오에 관한 건 다 보고받고 있으니 알려주지 않아도 돼."

차 문을 닫은 남자는 운전석의 창문을 두드렸다. 창문이 내려가고 운전자의 귓가에 행선지를 말했다. 뒤이은 말은 너무 작아서 들리지 않았으나 두 사람의 눈동자가 태섭을 쳐다보고 있어 몹시 부담스러웠다.

"호기심 넘칠 나이는 지났잖아. 다신 여기에 관심두지 말고. 친구를 위해서라도."

그 말을 마지막으로 문이 닫히고 차가 출발했다. 차는 승차감이 몹시 좋았고 운전자의 솜씨도 좋아서 흔들림이나 도로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공중에 떠 미끄러져가는 기분이었다. 운전자는 태섭이 여러 번 말을 걸어도 묵묵부답이었다. 그 고요함 속에서 태섭은 뻣뻣한 자세를 유지하며 안경 쓴 남자의 말을 되짚어보았다. 친구를 위해서라는 마지막 말이 마음에 걸렸다. 그가 말하는 친구란 필시 달재를 이를테다.

언젠가 달재가 누군가에게 얻어맞은 듯 멍과 상처를 달고 있었던 때를 떠올렸다. 그 때는 바로 태섭이 납치를 당했던 때다. 그리고 그에 대해 타박을 받은 듯 했던 메세지. 아, 달재는 내 남편에게 얻어맞았구나. 나의 신변에 이상이 생기면 그 대가로 내 친구가 남편에게 폭행을 당하는구나.


차는 번화가와 가까운 교외에 태섭을 내려주었다. 운전자는 끝까지 말을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정차한 뒤 운전석에서 내려 뒷좌석의 문을 열어주고, 태섭이 내린 뒤 닫을 때도 아무 말이 없었고 심지어 가면으로 얼굴을 가리기까지 했다. 그래도 제법 큰 키에 가늘고 검은 머리카락이 대충 쓴 가면 위로 삐죽거리는 것이 잘 보였다.
그는 차에서 내린 태섭을 완전히 투명인간처럼 취급했다. 뒷좌석 문을 닫고 마치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듯 운전석에 다시 올라타 차를 몰고 가버렸다. 태섭은 머쓱하게 차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번화가를 향해 걸어가며 달재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2번 울리고 달재가 전화를 받았다. 주변이 점점 시끄러워지는 것과 대조적인 차분한 목소리였다.

"달재야. 나랑 만나서 얘기 좀 하자."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고층건물 사이로 해가 지는 것이 보였다. 강렬한 햇빛에 눈을 뜨기 힘들어 얼굴을 찡그렸다.




슬램덩크 대만태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