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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3.11 22:40
망천화처럼 이연화 해독할 수 있는 약초가 있는데, 형질을 바꾸는 부작용이 있어서 떨떠름해하던 이연화와 그런 게 뭐가 중하냐 하던 주변사람들이 우당탕하는 게 보고싶다로 시작했던 거 2부
본편 이후 시점으로 ㅅㅍㅈㅇ 다병연화 비성연화
"어이쿠."
이연화가 묘하게 맥빠지는 소리를 내며 몸을 틀었다. 적의 마지막 검격이 그 옷자락을 스치듯이 지나갔다. 그러나 이연화의 공격은 상대를 스치기만 하지 않았다. 마지막까지 이연화를 상대하던 호위 대장의 몸은, 금방 베인 통나무처럼 쓰러져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이연화는 피 묻은 세검을 늘어뜨린 채, 아직 땅을 딛고 선 다섯 명의 남자를 돌아보았다. 두 명의 세우단원과 두 명의 신가 사람, 그리고 부들부들 떨면서도 용케 도망치지 않은 심부름꾼이었다(어쩌면 다리에 힘이 풀려 뛰지 못했는지도 몰랐다).
"나쁘지 않은 사병들이네요. 확실히 돈은 인재를 모으나 봅니다."
이연화가 건넸다. 그 말을 조롱으로 이해한 신가 가주의 낯빛이 붉어졌으나, 사실 이연화는 꽤 진심으로 건넨 말이었다. 황성사의 정예까지는 못 되었지만, 과거에 상대했던 어룡우마방 정도의 수준은 되었다. 기절할 것처럼 떠는 신우련의 옆에서, 가주가 이를 갈며 물었다.
"대체 우릴 어쩌겠다는 거요? 내 사병들을 모두 베었으니, 이제 우리를 겁박하여 거짓 자백이라도 받아낼 셈인가?"
"설마 그럴 리야 있겠습니까. 지금은 그럴 시간도 없답니다. 하지만 세우단주-그러니까, 동생분은 제가 데려가야겠습니다. 제가 일행을 도우러 떠난 사이 빼돌리시면 곤란하지 않습니까? 안전히 잘 모시고 있다가 백천원에 인계할 것이니, 가주는 부디 심려치 마시지요."
이연화가 짐짓 성실하게 대꾸하자, 가주의 눈이 분노로 가늘어졌다. 신우련이 그 팔을 잡고 애원했다.
"형님...형님, 살려주십시오. 끌려가면 죽습니다, 형님...."
"걱정 마십시오. 지금까지 파악한 전말에 의하면 당신은 중죄를 지었으나 주범은 아니니, 목숨까지 잃지는 않을 겁니다. 아마도요."
"당신은 대체 누구이기에 이리도 우리 집안을 능멸하시오? 방 공자와 함께 움직이는 것을 보니, 당신 역시 신분을 감춘 형탐인가? 백천원이 최근 사고문의 현판을 다시 달았다던데, 이런 행패가 그들의 정의와 협이오?"
가주가 분연히 말했다. 이거 참. 이연화가 극적인 한숨을 쉬었다. 켕기는 부분이 많은 사람들일수록, 상대의 명분을 따지며 논점을 흐리려 들었다.
"제가 신분을 감춘 무엇이든, 이 집안에서 불법적인 행위가 일어났던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이리 증좌가 분명하고, 제가 댁들처럼 대놓고 살초를 쓰며 대적한 것도 아닌데, 어찌 정의와 협을 운운하며 헛된 시간을 끌려 하십니까? 백천원의 누구든, 이런 상황에서는 달리 대응하지 않았을 겁니다. 사고문주에게 물어도 마찬가지일걸요."
"그럼 우리가 정식으로 그들에게 이 상황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겠소. 백천원의 불피백석이 공식적인 체포령을 내린다면 그에 따를 테니, 오늘은 이만 물러가시오! 형탐 하나의 말 때문에 우리 집안 사람을 내어줄 수는 없소."
그깟 며칠 벌겠다고 참 성가시네 구네. 이연화가 면사 아래에서 입맛을 다셨다. 사실 이런 입씨름 따위는 무시하고 신우련의 뒷덜미를 채어갈 수도 있었지만, 어쨌든 불피백석에게 괜한 불편을 끼치고 싶지는 않았다. 잠시 고민하던 이연화가 입을 열었다.
"백천원에서 공식적인 체포령을 내린다면 그에 따른다고 하셨지요?"
"그렇소."
"비록 문주의 이름을 마다하였다 하나 불피백석은 이상이를 사고문주로 생각하니, 이상이가 체포령을 제안하면 그에 따르겠지요?"
이연화의 질문에, 가주의 미간이 움찔했다. 남자는 함정을 뒤늦게 발견한 산짐승처럼 이연화를 훑어보았다. "그렇겠지요?" 이연화가 눈웃음을 지으며 재차 묻자, 가주가 마른침을 삼켰다. "그렇...그렇소." 남자가 등을 떠밀리듯 대답했다. 한숨을 푹 쉰 이연화가 불만스레 중얼거리며 품을 뒤졌다. "이걸 이런 식으로 쓰면 뒷말이 돌 텐데...설마 이런 상황을 예상하고 떠맡긴 건 아니겠지." 석수의 단호하다 못해 무시무시한 얼굴을 떠올리면서, 이연화는 곧 손에 잡힌 물건을 꺼내 들었다. 한사코 거부했음에도, 불피백석이 더욱 한사코 자신에게 안겨둔 물건이었다.
"자요, 보이십니까?"
심드렁하게 말하는 이연화의 손에서, 사고문주의 영패가 달빛을 반사했다. 눈을 가늘게 뜬 채 그 패의 글자를 식별하던 사람들은, 곧 나름의 방식대로 경악을 표했다. 세우단원들은 싸움에 참여하지 않은 스스로를 격찬하는 얼굴로 얼른 무릎을 꿇은 채 뭐든 하겠다 말했고, 심부름꾼과 신우련은 창백하게 질려 입을 벌렸으며, 신가의 가주는 상체를 살짝 뒤로 물리며 중얼거렸다. 그 눈이 처음으로 휘둥그렇게 벌어져 있었다.
"이상이...당신이 사고문주 이상이라고?"
"미, 믿을 수 없어. 사고문주가 왜 그런 꼴로...분명히 어디서 만들어온 가짜일 테지!"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네요. 전 이걸 별로 받고 싶지 않았거든요."
신우련의 외침에, 이연화가 쓴웃음을 지은 채 영패를 바라보았다. 몇 번이고 돌려주려 시도했지만, 불피백석은 어떻게든 이연화의 짐이나 옷가지 안에 영패를 숨겨두었다. '주인 없는 귀물을 계속 보관하는 것도 일이란 걸 모르십니까!' 석수의 부르짖음에, 이연화는 결국 가지고만 있겠다며 그 영패를 지니고 다녔다. 어차피 명분뿐인 영패였으니, 이를 휘두르며 백천원의 행정 체계에 혼란을 줄 마음은 없었다. 적어도 오늘이 되기 전까지는 그랬다. 다섯의 입막음을 잘 해놔야겠다고 생각하며, 이연화는 영패를 다시 품에 넣었다.
가주가 이를 꽉 악물었다. 정말 인정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 영패가 진짜라는 걸 어찌 믿소?" 뻔한 말이 흘러나온 순간, 이연화는 짜증스러운 기분으로 자신의 체취를 슬쩍 풀었다. 이 소모적인 대치를 빨리 끝내버리고 싶었다. 피와 쇠 냄새가 난무하던 뒤뜰에, 이내 희미한 연꽃 냄새가 감돌기 시작했다. 다섯 명이 놀란 눈을 깜박였다. 이연화가 피식 웃었다.
"사고문주가 연꽃 냄새를 풍기는 음인이 되었다. 그 소문 정도는 알고 계시겠지요? 이제 만족하십니까?"
가주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 얼굴로 낭패감와 패배감이 어지러이 번졌다.
결국 고개를 비스듬히 숙인 가주의 옆에서, 신우련은 제대로 숨소리도 내지 못한 채 뻐끔거렸다. 애처롭게 형님 소리만 반복하던 그 앞으로, 이연화가 파사보를 밟아 한달음에 다다랐다. 유령이라도 마주한 것처럼 악 소리를 지른 신우련을 점혈하여 어깨에 척 둘러메고, 이연화는 두 명의 세우단원을 향해 말했다. "당신들은 어디 가지 말고, 이곳에서 가주가 증좌를 없애지 못하도록 감시해 주시지요. 그러면 방면도 고려해 볼 테니." 단원들이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호위 무사들도 모두 쓰러졌으니, 아무리 말단 단원이라 해도 신가에서 그들을 저지할 방도는 마땅치 않을 터였다.
선화루에 도착하여, 이연화는 설약에게 신우련을 인계했다. 설약은 선화루의 단골이었던 장년인을 바로 알아보고 놀란 얼굴을 했으나, 이내 아무렇지 않게 나서 남자의 손발을 묶었다. 기절한 신우련을 벽장에 밀어 넣어버리고, 설약은 이연화에게 걱정스레 전했다.
"선생, 여랑이 두 번째로 떠난 세우단 무리를 따라갔습니다. 마지막으로 보낸 쪽지에선 그들의 뒤를 밟아 여현 북쪽의 청망산 자락에 들어가는 중이라 하였는데, 그 뒤로 소식이 없습니다. 벌써 한 시진이 다 되어 갑니다."
"저런, 만일의 경우에는 방향만 식별하면 된다 하였는데...저도 어서 그리로 가보겠습니다. 제 일행 둘은 이미 출발했겠지요?"
"예. 소식을 듣자마자 바로 가셨습니다."
그 말을 듣기 무섭게, 이연화는 제비처럼 날아 밤하늘을 뚫듯이 가로질렀다. 세찬 바람에 긴 머리칼이 나부꼈다.
방다병과 적비성의 행선지가 더 위험하다 했던 것은 빈말이 아니었다. 심악과 문걸은 통상의 무림인들과 다소 동떨어진 존재였다. 자신의 성과에 대한 집착은 있었으나, 그 집착에 정정당당함 따위는 조금도 들어 있지 않았다. 적비성과 방다병 역시 수많은 악인들을 경험한 만큼 절대 쉽게 당할 사람들은 아니었지만, 전장에서는 눈 깜박할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랐다. 며칠 동안 하도 잔소리들이 심하니, 이번에는 내가 잠깐 물러났지만. 이연화가 내심 한숨을 삼켰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답지 않은 결정이었다.
조금 전, 신가에는 최소한 한 명이 남아 뒤처리를 해야 했다. 하지만 적비성을 남겨두면 불필요한 살인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아 보였고, 방다병을 남겨두면 만에 하나라도 비열한 수에 당하지 않을까 염려가 되었다. 그렇다고 둘을 함께 남겨둔 채 홀로 심악과 문걸의 뒤를 쫓을 수도 없었다. 그 두 사람은 분명 허튼소리 말라며 이연화를 흘겨본 다음, 저들이 좋을 대로 행동했을 터였다. 물론 어떻게든 입씨름을 하거나 그 둘을 속여 따돌릴 수도 있었지만-과거에 몇 차례나 그랬듯이-어쩐지 오늘은 영 내키지가 않았다.
내가 누군가의 반대를 예상하고 행동을 바꾼 적이 있던가? 심지어 덜 무모한 방향으로? 어두운 능선을 향하면서, 이연화가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이와 이연화가 어쩔 수 없이 공유하던 특성들 중 하나는, 바로 남의 말을 잘 듣지 않는 점이었다. 서로 이유는 조금씩 달랐으나, 이상이도 이연화도 자신이 확신한 부분에서는 마치 질주하는 코뿔소처럼 끝없이 고집을 부렸다. 비록 반역의 날처럼 막중한 위험이 따르는 상황은 아니었지만, 이연화는 자신이 타인의 마음을 고려하여 보다 안전한 길을 취했다는 사실에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누군가가 자신에게 이만큼 영향을 끼치도록 내버려둔 것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이연화가 된 뒤로는 처음인 것 같은데."
이연화가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옛날에는 말 그대로 어렸기에, 누군가에게서 영향을 얼마나 받을지 유연하게 결정하기가 어려웠다. 이상이는 마치 해면처럼 타인을 받아들였다. 좋은 사람, 나쁜 사람, 정직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어지럽게 뒤섞여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름을 바꾼 후부터, 더 이상 그 누구에게도 영향을 받지 않으려 문을 닫아버렸다. 세상과 다시 교류해봐야, 자신에게도 타인에게도 좋지 않으리라 속단한 결과였다.
"멍청아. 왜 지금까지 이런 생각이야?"
이연화가 스스로를 타박하며 나무 꼭대기를 살짝 밟았다. 순식간에 탄력을 얻은 몸이 다시 허공을 날았다.
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적비성과 방다병에게 티내지 않으려 무진 애를 썼으나, 이연화는 요 며칠 사이 꽤 복잡하고도 격렬한 내적 갈등에 빠져 있었다. 각인이라는 심대한 주제를 두고 대치하던 두 개의 세력이, 날이 갈수록 대등해져 이연화의 골을 울려댄 탓이었다. 각인 초기부터 일방적으로 억눌려 있던 한쪽 목소리는, 이연화가 심마에 빠져 허우적거리다 벗어난 날을 기점으로 급작스레 기세등등해졌다. 가장 취약한 밑바닥을 드러낸 후에도 내쳐지지 않고 오히려 더욱 단단히 붙들린 순간, 심경의 저울추가 한편으로 훅 기울어진 탓이었다.
왜 각인을 유지하면 안 되지? 그들이 저렇게 원하고 나 역시 싫지 않은데, 왜 시도조차 해보면 안 돼? 내가 망가졌든 아니든 상관없다고 하잖아. 각인을 유지하든 안 하든, 내 울타리 안에 이미 비집고 들어온 이들이라고. 무슨 일이 생겼을 때 고통스럽기는 마찬가지야. 오히려 각인으로 묶인 채 서로의 뒤를 긴밀히 봐주며 지내면...어쩌면 최악의 결과는 나오지 않을지도 몰라. 적어도 그 사람처럼 내 심장을 부숴놓지는 않겠지. 더 이상 아침에 춥게 일어날 필요도, 영원히 홀로 떠가는 기분에 갇힐 필요도 없어. 그 목소리는 이연화를 유혹하듯 끊임없이 속삭였다. 그 속삭임에 이끌려 어떤 절벽을 향해 주춤주춤 다가갈 때마다, 또 다른 단어들이 익숙한 밧줄처럼 이연화의 발목을 잡아당겼다.
너 미쳤어? 아무리 그래도 각인은 말이 안 돼. 이런 일을 했다가 잘못되면, 그 후폭풍을 감당할 수 있겠어? 그리고, 방다병의 미래는 어쩔 거야? 적비성이야 신경 쓸 가문이 없다 쳐. 하지만 그리 젊고 창창한 공자를 정말 네 여생에 매어두려고? 방 상서와 하 당주에게는 뭐라 설명할 건데? 이런 일에서까지 제멋대로 이기적인 결정을 내릴 셈이야? 이연화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며칠 사이 혼자 있을 때마다, 이연화의 심중에서는 늘 같은 내용의 전투가 치열하게 벌어지다 흐지부지 마무리되었다.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이런 상황이 반복된다면, 어떤 결정도 선뜻 내리지 못한 채 기나긴 시간이 흐를지도 몰랐다. 그 두 사람에게는 퍽 비겁한 일이 될 터였다.
각인은 됐으니, 지금은 할 일에 집중이나 해. 그 싸움 바깥에 섰던 한 줄기의 이성이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차가운 밤공기가 정신을 일깨우듯 뺨을 스쳤다. 높다란 곳에 우뚝 선 채 어두운 산세를 노려보듯 훑다가, 이연화는 곧 좁은 산길에서 상자를 들고 이동하던 사람들을 발견했다. 그 선두에는 심악과 문걸이 서 있었다. 이연화가 미간을 좁혔다. 방다병과 적비성은 어디에 있을까? 가슴을 스친 한 줄기의 불안감을 갈무리하며, 이연화가 훌쩍 뛰어 그 앞으로 내려앉았다. 심악과 문걸을 비롯한 자들이 놀란 눈으로 이연화를 보았다. 빽 비명을 내지른 노인이 이연화를 삿대질했다.
"넌, 넌 또 뭐냐? 왜 선화루의 무용수가 이런 곳에-."
"무용수가...무용수가 아니오."
문걸이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부상이라도 입었는지, 남자는 가슴에 손을 댄 채 약간 비틀거리고 있었다. 그 입가로 선혈이 말라붙어 있었다.
"내 일행들과 여랑 낭자는 어디 있습니까?"
이연화가 에두르지 않고 물었다. 그들이 운반하던 재물 상자 따위는 별달리 신경이 쓰이지도 않았다. 심장이 빠르게 쿵쿵거렸다. 심악이 이를 드러낸 채 끽끽대고 웃었다. 주름진 얼굴로 한 줄기의 희열이 번득였다.
"그놈들은 죽었어!"
뭐라고? 이연화의 미간 골이 깊어졌다. 겉으로는 거의 드러나지 않았지만, 순간 가슴이 철렁 떨어지면서 손으로 힘이 들어갔다.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반사적으로 부정하며, 이연화가 조용히 마른침을 삼켰다. 각인한 대상이 정말로 사라졌다면, 자신에게도 어떤 충격이나 여파가 느껴졌을 터였다. 그럴 리가 없어. 심호흡과 함께 주문처럼 되뇌며, 이연화가 차갑게 쏘아붙였다.
"정말 그렇다면, 너희는 오늘 살지 못한다."
칼을 채 뽑기도 전이었으나, 그 몸에서 불길한 살의가 폭발하듯 번져 나왔다. 심상찮은 기색을 감지했는지, 단원들이 재빨리 상자를 내려놓고는 무기를 꺼냈다. 문걸이 얼른 오른손을 펴 들어 그들을 막았다. "멈춰라!" 수하들이 놀란 눈으로 문걸을 보았다. 문걸이 헐떡이며 말했다.
"너희는 못 이긴다...물론 나도 마찬가지고."
"왜 그러나? 그 두 놈도 처치했는데, 자네가 아무리 부상을 입었단들 이 머릿수로 하나를 못 죽일까!"
"저번에 만났을 때, 나는 당신이 금원맹주인 줄 알았소."
발악하듯 외치는 심악을 무시하고, 문걸이 이연화를 향해 건넸다. 이연화가 눈썹을 까딱했다. 그렇게 오해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아직 방다병과 자신의 정체에 대해서는 파악하지 못했을 때이니, 뒤꽁무니에 붙은 정체불명의 강자를 만나면 아무래도 금원맹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니더군. 저 동굴 안에서 만난 자가 금원맹주였어. 그리고 그 애송이는...백천원의 방 형탐이었고. 그러면, 당신이 누군지는 분명하지." 메마른 웃음소리를 흘리던 문걸이 고개를 들었다. 그 입에서 붉은 피 한 줄기가 새로이 흘러나왔다.
"이 문주. 나와 거래를 합시다."
"문주? 누가 문주라는 거야?"
심악이 눈을 크게 떴다. 문걸이 혀를 차며 돌아보았다.
"우리가 운이 나빠, 이번 일에 사고문주를 끌어들였소. 이상이의 소문을 들었다면, 그가 처단에 무정하다는 것쯤은 잘 알 테지. 지금 잘 판단하지 않으면 우리 모두 죽소."
무생벽이 눈이 조금 더 커졌다. "사고, 사고문? 이상...." 노인은 몇 개 남지 않은 이빨이 다 보일 만큼 입을 벌렸다가, 이내 겁을 집어먹은 듯 조용해졌다. 그 양팔이 품의 짐꾸러미를 단단히 끌어안았다. 이연화가 문걸을 향해 물었다.
"무슨 거래를 말하는 겁니까?"
"내 안의 강기를 없애주면...일행들의 위치와, 그곳의 진법을 해제하는 방도를 알려주겠소. 그들이 아직 살아있다면...구할 수도 있겠지."
문걸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적비성의 강기에 당했나 보군. 이연화가 냉랭한 눈으로 상대의 상태를 살폈다. 아마도 문걸의 어깨너머로 보이는 동굴은, 세우단이 두 번째 은신처로 삼던 공간인 듯했다. 이연화의 시선이 곧 심악과 다른 단원들을 향했다.
"내가 당신을 치료하는 동안, 남은 자들이 달려들지 않을 거라고 어찌 장담합니까?"
"심악은 이런 상황에 쓸 만한 약을 갖고 있지 않소. 저 안에서 이미 모두 써버렸거든. 내 수하들은 오로지 내 말만 들으니, 별일 없을 거요. 그리고 누가 당신을 공격하면 치료를 받지 못하니, 가장 손해를 보는 사람은 나이지 않소?"
문걸의 말에, 이연화는 칼자루에서 잠시 손을 떼었다. 간계를 잘 꾸미는 습성을 가졌지만, 남자는 기본적으로 일신의 안녕을 가장 먼저 챙기는 자였다. 이연화가 고개를 까딱했다. "이리 와서 앉으시오." 문걸이 헉헉거리며 이연화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 낯빛이 시퍼렇게 변해 있었다. 남자의 등에 손을 대어 보니, 적비성의 강기가 이미 모든 경맥을 찢어발길 듯이 날뛰고 있었다. 방다병 때처럼 시일을 두고 발작하게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상대를 바로 죽이기 위해 심어진 것이었다.
내력이 어느 정도 돌아오지 않았다면 시도조차 하지 못했을 일이었다. 이연화는 양주만의 내력을 끌어올리며 강기가 갈 수 있는 길을 제한하기 시작했다. 문걸의 입에서 한 줄기의 피가 새로이 흘러내렸다. 비풍백양과 양주만이 사납게 날뛰며 부딪치다가, 이내 함께 춤을 추듯 뒤섞여 휘돌기 시작했다. 한두 번 겪어본 내력이라야 말이지. 이연화가 내심 쓰게 웃었다. 그는 비풍백양에 이제 지나칠 만큼 익숙해져 있었다. 이연화는 이내 강기를 정확히 짚어내, 몇 개의 혈도로 분산시켜 흩어냈다.
그와 거의 동시에, 문걸의 내력이 역으로 이연화를 찌르려 달려들었다. 상대가 지친 틈을 노린, 수풀 속의 뱀과 같은 공격이었다.
이연화의 얼굴이 날카로운 빛을 띠었다. 상대가 아무리 민첩하다 해도, 예상 내의 공격에 당할 고수는 없었다. 이연화는 싸늘하다 못해 무감한 눈으로 그 뒤통수를 바라보며, 강기를 없애는 일에 열중하던 내력을 한데 모아 일순 상대의 내부를 후려쳤다. 문걸의 눈이 크게 뜨였다. 온몸의 경맥이 바로 터질 듯이 들끓으면서, 그 입으로 몇 움큼의 선혈이 울컥 터져 나왔다. 문걸의 사지가 끈 떨어진 인형처럼 축 늘어졌다. 심악이 당황하여 손가락질하며 물러났다.
"이, 이게 무슨, 무슨, 당신은 야, 약속, 약속을, 약속했지 않소!"
"난 약속을 지켰습니다. 내가 강기를 없애자마자, 역으로 나를 공격하려 든 사람은 부단주입니다. 내가 얕은 악행에 순순히 당하지 않았다 하여 억울해하시진 마시지요."
이연화가 냉소했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칼을 빼든 세우단원과 심악이 흠칫거리며 두어 발짝 물러났다. 이연화는 세검을 빼 들어, 그대로 문걸의 목덜미에 가져다 댔다. 남자는 조금도 움직이지 못한 채, 벌어진 입에서 시뻘건 피만 줄줄 뱉어내고 있었다. 칼끝으로 그 머리를 덮은 삿갓을 걷어내고, 이연화는 성난 귀신처럼 그 정수리를 노려보며 물었다.
"말해. 내 사람들은 어디 있지?"
본편 이후 시점으로 ㅅㅍㅈㅇ 다병연화 비성연화
"어이쿠."
이연화가 묘하게 맥빠지는 소리를 내며 몸을 틀었다. 적의 마지막 검격이 그 옷자락을 스치듯이 지나갔다. 그러나 이연화의 공격은 상대를 스치기만 하지 않았다. 마지막까지 이연화를 상대하던 호위 대장의 몸은, 금방 베인 통나무처럼 쓰러져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이연화는 피 묻은 세검을 늘어뜨린 채, 아직 땅을 딛고 선 다섯 명의 남자를 돌아보았다. 두 명의 세우단원과 두 명의 신가 사람, 그리고 부들부들 떨면서도 용케 도망치지 않은 심부름꾼이었다(어쩌면 다리에 힘이 풀려 뛰지 못했는지도 몰랐다).
"나쁘지 않은 사병들이네요. 확실히 돈은 인재를 모으나 봅니다."
이연화가 건넸다. 그 말을 조롱으로 이해한 신가 가주의 낯빛이 붉어졌으나, 사실 이연화는 꽤 진심으로 건넨 말이었다. 황성사의 정예까지는 못 되었지만, 과거에 상대했던 어룡우마방 정도의 수준은 되었다. 기절할 것처럼 떠는 신우련의 옆에서, 가주가 이를 갈며 물었다.
"대체 우릴 어쩌겠다는 거요? 내 사병들을 모두 베었으니, 이제 우리를 겁박하여 거짓 자백이라도 받아낼 셈인가?"
"설마 그럴 리야 있겠습니까. 지금은 그럴 시간도 없답니다. 하지만 세우단주-그러니까, 동생분은 제가 데려가야겠습니다. 제가 일행을 도우러 떠난 사이 빼돌리시면 곤란하지 않습니까? 안전히 잘 모시고 있다가 백천원에 인계할 것이니, 가주는 부디 심려치 마시지요."
이연화가 짐짓 성실하게 대꾸하자, 가주의 눈이 분노로 가늘어졌다. 신우련이 그 팔을 잡고 애원했다.
"형님...형님, 살려주십시오. 끌려가면 죽습니다, 형님...."
"걱정 마십시오. 지금까지 파악한 전말에 의하면 당신은 중죄를 지었으나 주범은 아니니, 목숨까지 잃지는 않을 겁니다. 아마도요."
"당신은 대체 누구이기에 이리도 우리 집안을 능멸하시오? 방 공자와 함께 움직이는 것을 보니, 당신 역시 신분을 감춘 형탐인가? 백천원이 최근 사고문의 현판을 다시 달았다던데, 이런 행패가 그들의 정의와 협이오?"
가주가 분연히 말했다. 이거 참. 이연화가 극적인 한숨을 쉬었다. 켕기는 부분이 많은 사람들일수록, 상대의 명분을 따지며 논점을 흐리려 들었다.
"제가 신분을 감춘 무엇이든, 이 집안에서 불법적인 행위가 일어났던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이리 증좌가 분명하고, 제가 댁들처럼 대놓고 살초를 쓰며 대적한 것도 아닌데, 어찌 정의와 협을 운운하며 헛된 시간을 끌려 하십니까? 백천원의 누구든, 이런 상황에서는 달리 대응하지 않았을 겁니다. 사고문주에게 물어도 마찬가지일걸요."
"그럼 우리가 정식으로 그들에게 이 상황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겠소. 백천원의 불피백석이 공식적인 체포령을 내린다면 그에 따를 테니, 오늘은 이만 물러가시오! 형탐 하나의 말 때문에 우리 집안 사람을 내어줄 수는 없소."
그깟 며칠 벌겠다고 참 성가시네 구네. 이연화가 면사 아래에서 입맛을 다셨다. 사실 이런 입씨름 따위는 무시하고 신우련의 뒷덜미를 채어갈 수도 있었지만, 어쨌든 불피백석에게 괜한 불편을 끼치고 싶지는 않았다. 잠시 고민하던 이연화가 입을 열었다.
"백천원에서 공식적인 체포령을 내린다면 그에 따른다고 하셨지요?"
"그렇소."
"비록 문주의 이름을 마다하였다 하나 불피백석은 이상이를 사고문주로 생각하니, 이상이가 체포령을 제안하면 그에 따르겠지요?"
이연화의 질문에, 가주의 미간이 움찔했다. 남자는 함정을 뒤늦게 발견한 산짐승처럼 이연화를 훑어보았다. "그렇겠지요?" 이연화가 눈웃음을 지으며 재차 묻자, 가주가 마른침을 삼켰다. "그렇...그렇소." 남자가 등을 떠밀리듯 대답했다. 한숨을 푹 쉰 이연화가 불만스레 중얼거리며 품을 뒤졌다. "이걸 이런 식으로 쓰면 뒷말이 돌 텐데...설마 이런 상황을 예상하고 떠맡긴 건 아니겠지." 석수의 단호하다 못해 무시무시한 얼굴을 떠올리면서, 이연화는 곧 손에 잡힌 물건을 꺼내 들었다. 한사코 거부했음에도, 불피백석이 더욱 한사코 자신에게 안겨둔 물건이었다.
"자요, 보이십니까?"
심드렁하게 말하는 이연화의 손에서, 사고문주의 영패가 달빛을 반사했다. 눈을 가늘게 뜬 채 그 패의 글자를 식별하던 사람들은, 곧 나름의 방식대로 경악을 표했다. 세우단원들은 싸움에 참여하지 않은 스스로를 격찬하는 얼굴로 얼른 무릎을 꿇은 채 뭐든 하겠다 말했고, 심부름꾼과 신우련은 창백하게 질려 입을 벌렸으며, 신가의 가주는 상체를 살짝 뒤로 물리며 중얼거렸다. 그 눈이 처음으로 휘둥그렇게 벌어져 있었다.
"이상이...당신이 사고문주 이상이라고?"
"미, 믿을 수 없어. 사고문주가 왜 그런 꼴로...분명히 어디서 만들어온 가짜일 테지!"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네요. 전 이걸 별로 받고 싶지 않았거든요."
신우련의 외침에, 이연화가 쓴웃음을 지은 채 영패를 바라보았다. 몇 번이고 돌려주려 시도했지만, 불피백석은 어떻게든 이연화의 짐이나 옷가지 안에 영패를 숨겨두었다. '주인 없는 귀물을 계속 보관하는 것도 일이란 걸 모르십니까!' 석수의 부르짖음에, 이연화는 결국 가지고만 있겠다며 그 영패를 지니고 다녔다. 어차피 명분뿐인 영패였으니, 이를 휘두르며 백천원의 행정 체계에 혼란을 줄 마음은 없었다. 적어도 오늘이 되기 전까지는 그랬다. 다섯의 입막음을 잘 해놔야겠다고 생각하며, 이연화는 영패를 다시 품에 넣었다.
가주가 이를 꽉 악물었다. 정말 인정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 영패가 진짜라는 걸 어찌 믿소?" 뻔한 말이 흘러나온 순간, 이연화는 짜증스러운 기분으로 자신의 체취를 슬쩍 풀었다. 이 소모적인 대치를 빨리 끝내버리고 싶었다. 피와 쇠 냄새가 난무하던 뒤뜰에, 이내 희미한 연꽃 냄새가 감돌기 시작했다. 다섯 명이 놀란 눈을 깜박였다. 이연화가 피식 웃었다.
"사고문주가 연꽃 냄새를 풍기는 음인이 되었다. 그 소문 정도는 알고 계시겠지요? 이제 만족하십니까?"
가주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 얼굴로 낭패감와 패배감이 어지러이 번졌다.
결국 고개를 비스듬히 숙인 가주의 옆에서, 신우련은 제대로 숨소리도 내지 못한 채 뻐끔거렸다. 애처롭게 형님 소리만 반복하던 그 앞으로, 이연화가 파사보를 밟아 한달음에 다다랐다. 유령이라도 마주한 것처럼 악 소리를 지른 신우련을 점혈하여 어깨에 척 둘러메고, 이연화는 두 명의 세우단원을 향해 말했다. "당신들은 어디 가지 말고, 이곳에서 가주가 증좌를 없애지 못하도록 감시해 주시지요. 그러면 방면도 고려해 볼 테니." 단원들이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호위 무사들도 모두 쓰러졌으니, 아무리 말단 단원이라 해도 신가에서 그들을 저지할 방도는 마땅치 않을 터였다.
선화루에 도착하여, 이연화는 설약에게 신우련을 인계했다. 설약은 선화루의 단골이었던 장년인을 바로 알아보고 놀란 얼굴을 했으나, 이내 아무렇지 않게 나서 남자의 손발을 묶었다. 기절한 신우련을 벽장에 밀어 넣어버리고, 설약은 이연화에게 걱정스레 전했다.
"선생, 여랑이 두 번째로 떠난 세우단 무리를 따라갔습니다. 마지막으로 보낸 쪽지에선 그들의 뒤를 밟아 여현 북쪽의 청망산 자락에 들어가는 중이라 하였는데, 그 뒤로 소식이 없습니다. 벌써 한 시진이 다 되어 갑니다."
"저런, 만일의 경우에는 방향만 식별하면 된다 하였는데...저도 어서 그리로 가보겠습니다. 제 일행 둘은 이미 출발했겠지요?"
"예. 소식을 듣자마자 바로 가셨습니다."
그 말을 듣기 무섭게, 이연화는 제비처럼 날아 밤하늘을 뚫듯이 가로질렀다. 세찬 바람에 긴 머리칼이 나부꼈다.
방다병과 적비성의 행선지가 더 위험하다 했던 것은 빈말이 아니었다. 심악과 문걸은 통상의 무림인들과 다소 동떨어진 존재였다. 자신의 성과에 대한 집착은 있었으나, 그 집착에 정정당당함 따위는 조금도 들어 있지 않았다. 적비성과 방다병 역시 수많은 악인들을 경험한 만큼 절대 쉽게 당할 사람들은 아니었지만, 전장에서는 눈 깜박할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랐다. 며칠 동안 하도 잔소리들이 심하니, 이번에는 내가 잠깐 물러났지만. 이연화가 내심 한숨을 삼켰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답지 않은 결정이었다.
조금 전, 신가에는 최소한 한 명이 남아 뒤처리를 해야 했다. 하지만 적비성을 남겨두면 불필요한 살인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아 보였고, 방다병을 남겨두면 만에 하나라도 비열한 수에 당하지 않을까 염려가 되었다. 그렇다고 둘을 함께 남겨둔 채 홀로 심악과 문걸의 뒤를 쫓을 수도 없었다. 그 두 사람은 분명 허튼소리 말라며 이연화를 흘겨본 다음, 저들이 좋을 대로 행동했을 터였다. 물론 어떻게든 입씨름을 하거나 그 둘을 속여 따돌릴 수도 있었지만-과거에 몇 차례나 그랬듯이-어쩐지 오늘은 영 내키지가 않았다.
내가 누군가의 반대를 예상하고 행동을 바꾼 적이 있던가? 심지어 덜 무모한 방향으로? 어두운 능선을 향하면서, 이연화가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이와 이연화가 어쩔 수 없이 공유하던 특성들 중 하나는, 바로 남의 말을 잘 듣지 않는 점이었다. 서로 이유는 조금씩 달랐으나, 이상이도 이연화도 자신이 확신한 부분에서는 마치 질주하는 코뿔소처럼 끝없이 고집을 부렸다. 비록 반역의 날처럼 막중한 위험이 따르는 상황은 아니었지만, 이연화는 자신이 타인의 마음을 고려하여 보다 안전한 길을 취했다는 사실에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누군가가 자신에게 이만큼 영향을 끼치도록 내버려둔 것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이연화가 된 뒤로는 처음인 것 같은데."
이연화가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옛날에는 말 그대로 어렸기에, 누군가에게서 영향을 얼마나 받을지 유연하게 결정하기가 어려웠다. 이상이는 마치 해면처럼 타인을 받아들였다. 좋은 사람, 나쁜 사람, 정직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어지럽게 뒤섞여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름을 바꾼 후부터, 더 이상 그 누구에게도 영향을 받지 않으려 문을 닫아버렸다. 세상과 다시 교류해봐야, 자신에게도 타인에게도 좋지 않으리라 속단한 결과였다.
"멍청아. 왜 지금까지 이런 생각이야?"
이연화가 스스로를 타박하며 나무 꼭대기를 살짝 밟았다. 순식간에 탄력을 얻은 몸이 다시 허공을 날았다.
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적비성과 방다병에게 티내지 않으려 무진 애를 썼으나, 이연화는 요 며칠 사이 꽤 복잡하고도 격렬한 내적 갈등에 빠져 있었다. 각인이라는 심대한 주제를 두고 대치하던 두 개의 세력이, 날이 갈수록 대등해져 이연화의 골을 울려댄 탓이었다. 각인 초기부터 일방적으로 억눌려 있던 한쪽 목소리는, 이연화가 심마에 빠져 허우적거리다 벗어난 날을 기점으로 급작스레 기세등등해졌다. 가장 취약한 밑바닥을 드러낸 후에도 내쳐지지 않고 오히려 더욱 단단히 붙들린 순간, 심경의 저울추가 한편으로 훅 기울어진 탓이었다.
왜 각인을 유지하면 안 되지? 그들이 저렇게 원하고 나 역시 싫지 않은데, 왜 시도조차 해보면 안 돼? 내가 망가졌든 아니든 상관없다고 하잖아. 각인을 유지하든 안 하든, 내 울타리 안에 이미 비집고 들어온 이들이라고. 무슨 일이 생겼을 때 고통스럽기는 마찬가지야. 오히려 각인으로 묶인 채 서로의 뒤를 긴밀히 봐주며 지내면...어쩌면 최악의 결과는 나오지 않을지도 몰라. 적어도 그 사람처럼 내 심장을 부숴놓지는 않겠지. 더 이상 아침에 춥게 일어날 필요도, 영원히 홀로 떠가는 기분에 갇힐 필요도 없어. 그 목소리는 이연화를 유혹하듯 끊임없이 속삭였다. 그 속삭임에 이끌려 어떤 절벽을 향해 주춤주춤 다가갈 때마다, 또 다른 단어들이 익숙한 밧줄처럼 이연화의 발목을 잡아당겼다.
너 미쳤어? 아무리 그래도 각인은 말이 안 돼. 이런 일을 했다가 잘못되면, 그 후폭풍을 감당할 수 있겠어? 그리고, 방다병의 미래는 어쩔 거야? 적비성이야 신경 쓸 가문이 없다 쳐. 하지만 그리 젊고 창창한 공자를 정말 네 여생에 매어두려고? 방 상서와 하 당주에게는 뭐라 설명할 건데? 이런 일에서까지 제멋대로 이기적인 결정을 내릴 셈이야? 이연화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며칠 사이 혼자 있을 때마다, 이연화의 심중에서는 늘 같은 내용의 전투가 치열하게 벌어지다 흐지부지 마무리되었다.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이런 상황이 반복된다면, 어떤 결정도 선뜻 내리지 못한 채 기나긴 시간이 흐를지도 몰랐다. 그 두 사람에게는 퍽 비겁한 일이 될 터였다.
각인은 됐으니, 지금은 할 일에 집중이나 해. 그 싸움 바깥에 섰던 한 줄기의 이성이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차가운 밤공기가 정신을 일깨우듯 뺨을 스쳤다. 높다란 곳에 우뚝 선 채 어두운 산세를 노려보듯 훑다가, 이연화는 곧 좁은 산길에서 상자를 들고 이동하던 사람들을 발견했다. 그 선두에는 심악과 문걸이 서 있었다. 이연화가 미간을 좁혔다. 방다병과 적비성은 어디에 있을까? 가슴을 스친 한 줄기의 불안감을 갈무리하며, 이연화가 훌쩍 뛰어 그 앞으로 내려앉았다. 심악과 문걸을 비롯한 자들이 놀란 눈으로 이연화를 보았다. 빽 비명을 내지른 노인이 이연화를 삿대질했다.
"넌, 넌 또 뭐냐? 왜 선화루의 무용수가 이런 곳에-."
"무용수가...무용수가 아니오."
문걸이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부상이라도 입었는지, 남자는 가슴에 손을 댄 채 약간 비틀거리고 있었다. 그 입가로 선혈이 말라붙어 있었다.
"내 일행들과 여랑 낭자는 어디 있습니까?"
이연화가 에두르지 않고 물었다. 그들이 운반하던 재물 상자 따위는 별달리 신경이 쓰이지도 않았다. 심장이 빠르게 쿵쿵거렸다. 심악이 이를 드러낸 채 끽끽대고 웃었다. 주름진 얼굴로 한 줄기의 희열이 번득였다.
"그놈들은 죽었어!"
뭐라고? 이연화의 미간 골이 깊어졌다. 겉으로는 거의 드러나지 않았지만, 순간 가슴이 철렁 떨어지면서 손으로 힘이 들어갔다.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반사적으로 부정하며, 이연화가 조용히 마른침을 삼켰다. 각인한 대상이 정말로 사라졌다면, 자신에게도 어떤 충격이나 여파가 느껴졌을 터였다. 그럴 리가 없어. 심호흡과 함께 주문처럼 되뇌며, 이연화가 차갑게 쏘아붙였다.
"정말 그렇다면, 너희는 오늘 살지 못한다."
칼을 채 뽑기도 전이었으나, 그 몸에서 불길한 살의가 폭발하듯 번져 나왔다. 심상찮은 기색을 감지했는지, 단원들이 재빨리 상자를 내려놓고는 무기를 꺼냈다. 문걸이 얼른 오른손을 펴 들어 그들을 막았다. "멈춰라!" 수하들이 놀란 눈으로 문걸을 보았다. 문걸이 헐떡이며 말했다.
"너희는 못 이긴다...물론 나도 마찬가지고."
"왜 그러나? 그 두 놈도 처치했는데, 자네가 아무리 부상을 입었단들 이 머릿수로 하나를 못 죽일까!"
"저번에 만났을 때, 나는 당신이 금원맹주인 줄 알았소."
발악하듯 외치는 심악을 무시하고, 문걸이 이연화를 향해 건넸다. 이연화가 눈썹을 까딱했다. 그렇게 오해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아직 방다병과 자신의 정체에 대해서는 파악하지 못했을 때이니, 뒤꽁무니에 붙은 정체불명의 강자를 만나면 아무래도 금원맹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니더군. 저 동굴 안에서 만난 자가 금원맹주였어. 그리고 그 애송이는...백천원의 방 형탐이었고. 그러면, 당신이 누군지는 분명하지." 메마른 웃음소리를 흘리던 문걸이 고개를 들었다. 그 입에서 붉은 피 한 줄기가 새로이 흘러나왔다.
"이 문주. 나와 거래를 합시다."
"문주? 누가 문주라는 거야?"
심악이 눈을 크게 떴다. 문걸이 혀를 차며 돌아보았다.
"우리가 운이 나빠, 이번 일에 사고문주를 끌어들였소. 이상이의 소문을 들었다면, 그가 처단에 무정하다는 것쯤은 잘 알 테지. 지금 잘 판단하지 않으면 우리 모두 죽소."
무생벽이 눈이 조금 더 커졌다. "사고, 사고문? 이상...." 노인은 몇 개 남지 않은 이빨이 다 보일 만큼 입을 벌렸다가, 이내 겁을 집어먹은 듯 조용해졌다. 그 양팔이 품의 짐꾸러미를 단단히 끌어안았다. 이연화가 문걸을 향해 물었다.
"무슨 거래를 말하는 겁니까?"
"내 안의 강기를 없애주면...일행들의 위치와, 그곳의 진법을 해제하는 방도를 알려주겠소. 그들이 아직 살아있다면...구할 수도 있겠지."
문걸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적비성의 강기에 당했나 보군. 이연화가 냉랭한 눈으로 상대의 상태를 살폈다. 아마도 문걸의 어깨너머로 보이는 동굴은, 세우단이 두 번째 은신처로 삼던 공간인 듯했다. 이연화의 시선이 곧 심악과 다른 단원들을 향했다.
"내가 당신을 치료하는 동안, 남은 자들이 달려들지 않을 거라고 어찌 장담합니까?"
"심악은 이런 상황에 쓸 만한 약을 갖고 있지 않소. 저 안에서 이미 모두 써버렸거든. 내 수하들은 오로지 내 말만 들으니, 별일 없을 거요. 그리고 누가 당신을 공격하면 치료를 받지 못하니, 가장 손해를 보는 사람은 나이지 않소?"
문걸의 말에, 이연화는 칼자루에서 잠시 손을 떼었다. 간계를 잘 꾸미는 습성을 가졌지만, 남자는 기본적으로 일신의 안녕을 가장 먼저 챙기는 자였다. 이연화가 고개를 까딱했다. "이리 와서 앉으시오." 문걸이 헉헉거리며 이연화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 낯빛이 시퍼렇게 변해 있었다. 남자의 등에 손을 대어 보니, 적비성의 강기가 이미 모든 경맥을 찢어발길 듯이 날뛰고 있었다. 방다병 때처럼 시일을 두고 발작하게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상대를 바로 죽이기 위해 심어진 것이었다.
내력이 어느 정도 돌아오지 않았다면 시도조차 하지 못했을 일이었다. 이연화는 양주만의 내력을 끌어올리며 강기가 갈 수 있는 길을 제한하기 시작했다. 문걸의 입에서 한 줄기의 피가 새로이 흘러내렸다. 비풍백양과 양주만이 사납게 날뛰며 부딪치다가, 이내 함께 춤을 추듯 뒤섞여 휘돌기 시작했다. 한두 번 겪어본 내력이라야 말이지. 이연화가 내심 쓰게 웃었다. 그는 비풍백양에 이제 지나칠 만큼 익숙해져 있었다. 이연화는 이내 강기를 정확히 짚어내, 몇 개의 혈도로 분산시켜 흩어냈다.
그와 거의 동시에, 문걸의 내력이 역으로 이연화를 찌르려 달려들었다. 상대가 지친 틈을 노린, 수풀 속의 뱀과 같은 공격이었다.
이연화의 얼굴이 날카로운 빛을 띠었다. 상대가 아무리 민첩하다 해도, 예상 내의 공격에 당할 고수는 없었다. 이연화는 싸늘하다 못해 무감한 눈으로 그 뒤통수를 바라보며, 강기를 없애는 일에 열중하던 내력을 한데 모아 일순 상대의 내부를 후려쳤다. 문걸의 눈이 크게 뜨였다. 온몸의 경맥이 바로 터질 듯이 들끓으면서, 그 입으로 몇 움큼의 선혈이 울컥 터져 나왔다. 문걸의 사지가 끈 떨어진 인형처럼 축 늘어졌다. 심악이 당황하여 손가락질하며 물러났다.
"이, 이게 무슨, 무슨, 당신은 야, 약속, 약속을, 약속했지 않소!"
"난 약속을 지켰습니다. 내가 강기를 없애자마자, 역으로 나를 공격하려 든 사람은 부단주입니다. 내가 얕은 악행에 순순히 당하지 않았다 하여 억울해하시진 마시지요."
이연화가 냉소했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칼을 빼든 세우단원과 심악이 흠칫거리며 두어 발짝 물러났다. 이연화는 세검을 빼 들어, 그대로 문걸의 목덜미에 가져다 댔다. 남자는 조금도 움직이지 못한 채, 벌어진 입에서 시뻘건 피만 줄줄 뱉어내고 있었다. 칼끝으로 그 머리를 덮은 삿갓을 걷어내고, 이연화는 성난 귀신처럼 그 정수리를 노려보며 물었다.
"말해. 내 사람들은 어디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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