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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3.05 21:25
ㅅㅇㅈㅇ
https://hygall.com/584083605 1편
- 직장인인 나, 미연시 게임의 주인공이 되어 최애와 재회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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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인공인 내가 공략불가 악역 캐릭터와 친해져 버린 건에 대하여
https://hygall.com/585622460 3편
- 악역 캐릭터를 너무 좋아해 쓰러뜨릴 수 없어 곤란한 주인공의 이야기입니다만?
4편
게임 속 주인공으로 환생해 버린 내가 공략 불가였던 히든 루트를 개척했습니다
3년마다 도래하는 대규모의 연회, 이 시기에는 전교의 모든 학생들과 교수가 참여하여 파티를 즐긴다.
전교생이 참여하는 만큼 교류도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이때만큼은 모두가 성적에 대한 고민을 잊어버리고 신나게 놀고 먹는다. 그야말로 전교생의 화합과 결속을 위한 축제라고 할 수 있겠다.
취지는 이러하나… 안타깝게도 게임 내에서는 이 연회의 즐거움이 잘 묘사되지 않는다. 아다치가 억울하게 무고에 휘말려 한바탕 뒤집어지고, 거의 무슨 공개 처형식마냥 흘러가니 쿠로사와로서도 썩 달갑지 않은 때였다.
한편, 연회가 가까워질수록 모두가 하루하루 들떠가는 와중에도 아다치는 언제나 평소처럼 조용하게 지낼뿐이었다.
딱히 즐거워 보이지도 않았고, 기대가 있어 보이지도 않는다. 어차피 그는 누구와도 교류할 수 없을 테니 늘 그렇듯 남들 눈에 안 띄게 조용히 숨어 시간을 보낼 작정이겠지.
생각해 보면 게임 속에서도 아다치는 비슷하게 행동했다. 어디에 짱박혀 있는 건지 연회 내내 모습을 보이지도 않았고, 봤다는 이도 없는데 대체 무슨 연유로 치한 혐의를 뒤집어쓰게 된 건지 그 사정에 대해서는 묘사된 바가 없다.
그저 갑자기 끌려나와서는 아다치가 누굴 희롱하려 했다는 추문이 씌워지고 속전속결로 인민재판이 시작된다.
아다치와 멀어지게 되지 않았다면 내내 자신의 곁에 둬서 플래그를 파괴할 수도 있었을 텐데….
쿠로사와가 길게 한숨을 쉬었다. 자세한 원인을 알 수가 없으니 어디서부터 개입해야 하는지도 답답한 상황, 차라리 아다치의 주위에 맴돌 수 있는 명분이라도 있으면 나을 텐데 이래 봬도 주인공인 쿠로사와는 이래저래 바쁜 몸이었다.
진귀한 빛의 마법사와 친해지고 싶어하는 이들이 한둘이 아닌 만큼 그들을 상대하는 것만으로도 정신없을 거란 소리.
한편, 쿠로사와는 게임 속 연회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수많은 디테일을 떠올리기 위해 잠도 미뤄가며 면밀하게 타임라인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정말로 아다치는 그 연회에 없었을까? 학생 전원이 필참인 만큼 아무리 왕따여도 끼워는 주었을 것이다. 단지 아무도 그에게 다가갈 일이 없을 거고, 본인도 그걸 아니까 최대한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숨어 있었을 확률이 높았다.
아니면 파티가 진행되는 내내 연회장 밖을 돌아다니고 있었거나. 하지만 차마 이건 아니길 바랐다. 겨울인 만큼 더럽게 추웠을 텐데….
더 답답한 것은 기본적으로 연회에는 남녀 한 쌍이 파트너를 이뤄서 참석하는 게 전통이다. 그렇기에 연회가 시작될 즈음이면 대부분의 학생들이 짝을 지어 함께하기로 약속하는데, 그것이 어려운 이들도 당연히 있기 마련이지만 안쓰럽게도 아다치는 좀 어나더 레벨이었다.
작중에서는 그와 함께 참석하느니 차라리 혼자 가겠다는 결연함까지 다지는 엑스트라 여자애들도 있었을 정도. 일단 남자로서의 매력을 떠나서 그가 처한 입장이나 어둠의 마법사라는 특징 때문에 가까이 하기도 싫고 무섭다는 입장.
쿠로사와는 또 절규했었다. 이럴 거면 동성 파트너라도 허용해 줄 것이지, 개같은 호모포비아 새끼들 같으니….
아무튼 이게 어째서 문제가 되느냐, 아다치의 행적을 증명해 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그나마 파트너가 있으면 일단은 같이 붙어 다닐 테니 충분히 알리바이가 성립되고, 파트너 입장에서도 없는 사실을 지어낼 수는 없으니까.
하지만 이런 전개는 절대 일어날 수 없다.
쿠로사와는 히로인 중 한 명에게라도 부탁해 볼까 싶었지만 그건 당치도 않은 짓이다. 그녀들도 조금이라도 더 마음에 드는 파트너를 고를 권리가 있고, 그걸 무시하면서까지 부탁할 명분도 없다. 애초에 둘 사이를 멀어지게 만든 장본인들이니 아다치도 무척이나 불편하겠지.
아니, 자신의 일이라고 생각하면 화가 날 것이다. 원하지 않는 동정심은 오히려 불쾌하기만 할 뿐이니까.
연회날이 가까워질수록 쿠로사와는 좀처럼 침착함을 유지하기가 힘들어졌다. 극복하지 못하면 아다치와의 인연이 어떻게 흘러갈지 모른다.
결국 급해진 쿠로사와가 선택한 건 정공법이었다.
아다치야 점심 이후의 휴게 시간에는 늘 화원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을 테니 적당한 핑계로 히로인들을 떨궈낸 후 조급함에 두근거리는 심장, 거친 숨을 내쉬며 그에게로 향했다.
다짜고짜 그에게 무슨 말을 할지조차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연회에 대해 이상하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만 경고라도 해 주고 싶은 마음만이 전부였다.
쿠로사와는 스스로에게 실망했다. 그렇게나 오래 덕질을 해 왔던 만큼 자신이 아는 아다치라면 그날 어떤 행동을 할지 당연하게 예측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는데, 그가 위기에 휘말릴 만한 원인에 대한 힌트가 없으니 완전히 오리무중이었다.
결국 쿠로사와가 숨을 몰아쉬며 화원에 도착했을 때, 그곳에서 NPC마냥 주변의 풍경에 동화되어 가만히 앉아 있는 아다치를 발견할 수 있었다.
형형색색 여러 가지 꽃들이 살랑살랑 바람에 나부끼는 공간에서 독보적으로 눈에 띄는 뒤통수, 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검은 머리칼을 지닌 아다치는 무척이나 이질적인 분위기를 뽐내고 있다. 그 이질적인 느낌이 쿠로사와에게는 무척이나 아름답게 보인다는 걸 그는 알고 있을까.
“아다치! 다행이다, 여기 있었구나.“
”… 쿠로사와?“
”꼭…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서. 부탁이니까 들어줘.”
자신을 부르자마자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나 버리는 아다치, 아마 목소리만 들었어도 누구인지 알았겠지.
아다치가 또 도망갈까 봐 쿠로사와는 헉헉거리면서도 애써 단호한 얼굴을 하고 못을 박았다.
그 와중에 떨리는 눈빛,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저 처연한 얼굴이 왜 이리도 가슴을 떨리게 만드는지…. 이전의 세계였다면 쿠로사와는 스크린샷 버튼을 몇 번이고 연타했을 것이 분명했다. 귀여워, 놀란 토끼 같아….
아다치는 당장이라도 울어 버릴 둣한 기세였다. 미즈키를 통해 쿠로사와가 자신 때문에 당하지 않아도 될 괴롭힘을 당하고 있었단 걸 알게 되고, 그를 위해서라도 쿠로사와의 주변에서 사라져 주는 것을 선택했으니까.
쿠로사와는 아다치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단번에 알아차렸다. 그의 마음 아픈 배려를 모를 리 없는 게 당연하다.
“아다치, 네가 왜 이러는지 나도 알고 있어. 하지만 그건 절대 너 때문이 아니야. 애초에 신경 쓰지도 않았으니까.“
”… 난 쿠로사와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서-“
”그런 적 없어! 난 너와 지냈던 모든 순간이 정말 즐거웠고, 행복했어. 다른 사람들이 뭐라 말하든 상관없어. 욕할 거면 하라고 해, 적어도 나에게는 네가 더 중요한 존재니까.”
말문이 막혀 버린 아다치가 당혹스러운 얼굴로 멍하니 쿠로사와를 바라본다. 이해가 안 되겠지, 하필이면 왜 자신에게 이렇게까지 하는 건지.
하지만 쿠로사와는 구태여 그를 이해시키고자 하는 생각 따윈 없었다. 앞으로 다가올 위기를 막기 위해서라도 그가 자신의 말을 들을 준비를 하도록 만들어야 했으니까.
이미 수많은 그의 죽음을 봐 왔다지만 이렇게 생생한 현실로 그걸 또 경험하고 싶지는 않았다.
둘 사이에 잠깐의 정적이 흘렀음에도 아다치는 여전히 안절부절하고 있었다. 무언가 말하려는 듯 숨을 들이키려다가도 입술을 깨물며 눌러 참는 등 불안한 모습.
그러나 쿠로사와는 아다치를 재촉하지 않고 오히려 부드러운 어조로 타이르듯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아다치가 날 위해 꾸준히 배려해 준 건 알고 있어. 하지만 오늘은… 잠깐이라도 좋으니까 이야길 나누고 싶어.“
”아, 응…. 알겠어.“
아다치는 슬쩍슬쩍 쿠로사와의 눈치를 살피는 듯하면서도 그의 앞에서 떠나지는 않았다.
자신에게 그렇게나 단호하게 말하던 쿠로사와는 처음이었다. 그리고 여태까지 그를 피해 다녔던 것이 무색하게 쿠로사와는 여전히 아다치가 중요한 존재라 말해 준다. 모든 이들이, 심지어 자신조차도 스스로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데 쿠로사와만큼은 그렇지 않았다.
아다치는 결국 그를 밀어내는 데에 실패했다. 아무리 멀어지려 해도 쿠로사와는 한결같이 자신을 봐 주는데 어떻게 그를 거부할 수 있을까?
아다치애게 있어서 쿠로사와는 모두를 비추는 태양 그 자체였다. 그 빛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기에 스스로 숨어 그의 눈앞에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면 당연하게 내리쬐었고, 아다치도 그 대상에서 예외는 아니었다. 그래서 그가 좋았다.
결국 이번에도 먼저 다가온 쪽은 쿠로사와구나. 아다치는 새삼스럽게 스스로가 부끄러워진다. 매번 도움도, 위로도 잔뜩 받고 있는데 정작 자신은 쿠로사와에게 피해만 주니까.
난 왜 이렇게 태어난 걸까.
그런 아다치의 우울한 머릿속을 백지로 만든 것은 생각지도 못한 쿠로사와의 한마디였다.
“저기, 아다치. 혹시 이번 연회에 뭘 할 예정이야?”
“연회? 아, 딱히 할 일은 없어서…. 그냥 적당한 곳에서 혼자 있지 않으려나.”
“… 괜찮다면, 도중에 말이야. 나랑 같이 빠져나오지 않을래?“
아다치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진심으로 하는 말인가? 싶은 표정에 쿠로사와는 하마터면 웃음이 터질 뻔했다.
말로 하지 않아도 속마음이 훤히 드러나는 이 순수함, 이렇게나 귀여운 구석이 많은데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연기를 해야 한다는 건 무척이나 힘든 일이었다.
“같이…? 그것도 연회 도중에?”
“응. 그날, 좀 일찍 쉬고 싶어서. 하지만 혼자는 외롭기도 하고, 사람이 별로 없는 곳이라면 신경 쓸 문제도 많이 없을 것 같다고 할까….“
”뭐, 그건 그렇겠지만. 하지만, 쿠로사와는 이미 파트너 있지 않아? 도중에 사라져 버리면 서운해 할 텐데.“
솔직히 파트너의 반응 따윈 알 바 아니었다. 애초에 쿠로사와가 같이 가자고 부탁한 것도 아니고, 파트너의 눈치를 보느라 아다치의 파멸 플래그를 막지 못하게 된다면 이만한 삽질이 또 없을 것이다.
못내 걱정된다는 눈빛을 하고 있는 아다치에게 상냥하게 웃어 준 쿠로사와, 그에게 굳이 파트너를 구할 생각이 없냐고는 묻지 않았다. 게임에서도 혼자 다녔다는데 현실이 됐다고 뭐가 달라지겠냐만은….
다만, 쿠로사와는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느끼고 있던 진심을 그에게 전할뿐이었다.
“… 실은, 내 파트너가 되어 줄 사람이 아다치였다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을 했었어.“
”아, 응. 나, 남자지만….“
”동성 파트너가 가능했다면 아다치에게 부탁했을 거야.“
아다치의 뺨이 또 발그레하게 달아올랐다. 연회에서 파트너가 되어 함께한다는 건 꽤 커다란 의미를 지닌다. 그동안 관심이 있었던 상대에게 제안하는 것이 보통이고, 이를 계기로 커플로 발전하게 되는 경우가 상당히 많았으니까.
그런데 쿠로사와가 자신에게 파트너를 부탁한다고? 쿠로사와도 자기가 한 말이 어떤 의미로 들릴지 모르지는 않을 것 같은데, 좀처럼 쿠로사와에게 시선을 마주치지 못한 채 홀로 머릿속이 복잡해진 아다치….
그리고 쿠로사와는 당연히 아다치가 생각한 그대로의 의미를 담고 말한 것이 맞았다. ‘나, 너한테 관심 있어’, ‘너랑 잘 되고 싶어’를 이쪽 세계에 맞는 방식으로 돌려서 플러팅을 날려 본 건데… 글쎄, 쿠로사와는 아다치가 이것을 눈치채 줄 거란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근본적으로 헤테로 게임이니까.
“미안, 이런 건 역시 곤란하겠지. 아무래도 남자끼리고, 아다치에게도 부담스러운 일이 될 테니까.“
“… 그렇지 않아.”
“어?”
“별로… 곤란하거나, 부담스럽다거나…. 그렇지는 않다고 할까…. 애초에 그런 제안을 받을 거라곤 생각도 못했고, 나도 쿠로사와라면….“
부족한 말주변으로 더듬거리며 애써 대답하지만 긴장감에 꼬물거리는 손가락까지는 숨길 수 없는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요약하자면, “싫지는 않다.” 허둥지둥 이런 적이 처음이라며 횡설수설하는 아다치, 쿠로사와는 예상치 못하게 벅차오르는 마음을 혼신의 힘을 다해 입술을 깨물며 참아야만 했다.
거절하지 않았다. 쿠로사와의 의도를 알았다고 한들, 아다치의 성격상 대놓고 극혐은 안 하더라도 좀 난처한 얼굴이 되어 아예 모르는 척을 해 버릴 줄 알았는데 의외로 정면으로 받아 주었다. 같은 성별이라는 건 아다치에게 있어서 그다지 크게 고려할 요소가 아니었던 걸까.
어떤 쪽이든 상관없었다. 어쨌든 아다치는 쿠로사와를 밀어내지 않았고, 아다치의 그런 모습에 쿠로사와는 어째선지 깊은 안도감을 느낄 수 있었다. 이에 가까이 다가온 쿠로사와는 아다치의 손을 살며시 감싸쥐며 말했다.
“그렇다면… 디너가 끝나면 그때부터는 아다치가 내 파트너가 되어 줄래?“
”그렇게 빨리? 앗, 그것보다도… 정말로? 내가?”
“응. 이런 파티에는 딱히 흥미가 없기도 하고, 역시 나는 아다치와 있을 때 가장 즐거운 것 같네. 괜찮다면 같이 어울려 줬으면 해.”
“아, 나야 뭐… 응. 괜찮아.“
쿠로사와랑 함께 있는 건 아다치 역시도 즐거운 일이었다. 일단은 즐겁고 말고를 떠나 쿠로사와가 좋았으니까.
그러나 그러한 속내까진 차마 말하지 못하고 고개만 끄덕이는 아다치, 쿠로사와는 드디어 한시름 놓을 수 있게 되었다. 아다치에게 위기가 찾아오는 것은 디너가 끝나고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른 후이다.
처음부터 함께하지 못하는 것은 아쉽지만 어쩔 수 없겠지. 아다치로서도 욕먹을 걸 뻔히 알면서 많은 사람들이 모인 장소에 모습을 드러내는 건 상당히 부담스러운 일이 될 거고, 쿠로사와는 일단은 주인공인 만큼 그를 찾는 이들과의 사소한 이벤트를 쳐내야 했다. 이를 다 쌩까면 어떻게 되는지는 잘 모른다. 게임에서는 선택할 기회조차 없었으니까.
그저… 사건이 벌어지기 전에 무사히 아다치를 빼내는 것만이 지금의 목표였다.
여러 의미로 모두를 두근거리게 만들었던 연회가 드디어 시작되고야 말았다.
아다치와 잠깐의 소통이 있었다고 해서 예전처럼 다시 살갑게 대화를 나누거나 하는 일은 없었지만 적어도 마주친 시선을 어색하게 피하지는 않게 되었으니 그것으로 충분.
쿠로사와의 파트너는 미즈키로 결정되었다. 히로인들이야 당연히 쿠로사와가 자신을 선택해 주길 바랐으나, 그녀들에게 별다른 관심이 없었던 쿠로사와는 자신을 두고 이런저런 경쟁 구도를 만드는 이들에게 지쳐 “에라, 모르겠다”를 시전하며 드러누워 버렸으니.
뭔 짓을 해도 “난 몰라”로 일관해 버리는 쿠로사와에 그녀들의 선택지는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 그냥 알아서 하는 것.
나름대로 자신들만의 내기를 벌인 끝에 최종 승자는 미즈키가 된 모양이었다.
나머지 히로인들은 어떻게 되는 거냐고? 그건 쿠로사와가 알 바는 아니었다. 원래도 예쁘고 좋은 집안 출신인 애들이니 관심을 표하는 남학생들도 많을 텐데, 그중에서 제일 괜찮은 녀석으로 골라서 참석하겠지.
연회장에는 역시나 아다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사실상 말만 끼워 준다뿐이지 파트너도 구하지 못한 상태로 등장해 봐야 모두의 비웃음거리만 될 뿐이니 아다치라고 그 사실을 모르지는 않았다. 빠져도 신경 쓸 사람은 없을 테고.
쿠로사와는 디너 타임이 오기만을 기다린다. 그와 스몰토크라도 나누며 안면을 트고 싶어하는 사람은 많았지만 쿠로사와는 그들에게 별다른 흥미가 없다.
미즈키만 해도 순간순간 쿠로사와가 지루해하는 걸 눈치채고는 그의 주변에 몰려드는 사람들을 적절하게 돌려보내며 쉴 틈을 만들어 주곤 했으니까.
“역시 쿠로사와군은 인기가 많네요. 다들 친해지고 싶은가 봐요.“
”… 그런가. 난 딱히 뭔가를 하지는 않았는데.“
”존재만으로도 특별한 사람이니까요.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희망을 주고, 안심할 수 있게 되잖아요.“
쿠로사와는 미즈키의 대답에 씁쓸한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요컨대, 빛의 마법을 타고나지 않았다면 다른 이들에게 당연하다는 듯 사랑받을 일은 없었을 것이며 아다치 또한 어둠의 마법을 타고나지 않았다면 특별히 미움받으며 살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의 성격상 많은 인기까지는 아니더라도 소소한 관계를 이루며 정말 평범하게 살아가지 않았을까?
”… 뭔가 슬퍼지네. 빛의 마법을 다룬다는 이유만으로 이렇게 모두가 다가온다는 게. 그에 비하면….”
“꼭 그런 것만은 아닐 거예요. 쿠로사와군은 누구에게나 좋은 사람이니까. 아다치군도… 그렇겠죠.”
미즈키는 쿠로사와가 느끼는 바에 대해 공감을 꽤 잘해 주는 편이었다. 소문이나 편견에 상관없이 아다치에게 도움받았던 것에 대해서도 늘 고마워했고, 지난번 쿠로사와를 위해 자신이 먼저 싫은 소리를 하기 전에 스스로 물러나 주었던 일이 꽤 감명깊게 남았던 모양이었다.
한편, 쿠로사와가 자신에게 특별한 감정이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는 인물이기도 했다. 본래 게임에서도 수동적인 태도를 지닌 것과는 달리 꽤 예민한 편이라 주인공의 사소한 대사 하나에도 반응이 달라지는 캐릭터였기에 당연한 일.
연회의 파트너가 된다면 무언가 달라질 거라는 기대라도 품었을지도 모르지만… 아마도 이쯤이면 그녀도 느꼈을 것이다. 쿠로사와는 애초에 이 연회를 즐길 생각조차 없다는 걸.
미즈키는 굳이 쿠로사와에게 많은 대화를 시도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편한 기색은 아니었고, 그저 소소하게 흐르는 시간을 묵묵히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쿠로사와 역시 그런 그녀에게 예의상으로나마 배려를 해 주었다. 우선은 자신을 불편하게 만들지 않기 위해 애써 준 것에 대한 보답이었고, 쿠로사와가 언제든 자리를 뜨더라도 잡지 않을 것임을 알기에 그에 대한 고마움에서 기인한 것이기도 했다.
연회는 시간이 갈수록 소란스러워진다. 밝은 분위기의 음악, 화려하고 맛있는 먹을거리와 음료, 다같이 화려하게 꾸미고 나온 자리인 만큼 평소보다 들뜬 마음에 좀 더 활동적으로 변하기도 했다. 물론, 그 안에 아다치는 해당되지 않았지만.
아다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이전에 잠깐이나마 대화를 나누었을 땐 산책로를 걷는다거나 테라스가 위치한 휴게 장소에서 불멍을 때리며 홀로 시간을 보낼 예정이라고 했었지.
지금은 모두들 한창 웃고 떠들며 놀고 있을 시간이기에 그곳을 찾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니까.
당장이라도 아다치를 찾아가고 싶은 마음을 꾹꾹 눌러삼키며 자신에게 흥미를 가지고 찾아온 마탑의 학회장이나 황실의 일원 등 저명한 이들을 상대하던 쿠로사와는 과거의 능력을 살려 훌륭하게 대처하고 있었다.
약속된 시간이 다가올 무렵, 점점 초조해진 쿠로사와는 아다치를 찾으러 갈 때가 됐음을 짐작했다.
미즈키 또한 쿠로사와가 간다고 하면 알아서 본인도 돌아가든가, 다른 히로인들과 놀러 갈 생각이었기에 별다른 반대는 하지 않았지만 묘하게 긴장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그의 모습이 의아하기도 했다.
그렇게 연회장을 나서기 위해 1층으로 향하던 둘은 당황스럽지 않을 수 없는 광경을 목격하고야 말았다.
기절한 상태의 여학생을 품에 안아 든 아다치가 경비원을 향해 무어라 짜증을 내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으니.
쿠로사와는 눈치챘다.
아, 이건… 아다치가 억울하게 죄를 뒤집어쓰게 되는 사건의 발단이 바로 이것이었구나.
아니나 다를까, 경악한 미즈키와 쿠로사와가 달려오자 경비원과 대치 중이던 아다치가 그들을 보며 안도하는 표정을 짓는다. 상식적으로 여학생에게 뭔 짓을 하려고 했었다면 이럴 수가 없었겠지.
아다치의 품에 안겨 있는 여학생은 안색이 창백하게 질린 채 축 늘어져 있었다. 죽지는 않았고, 정신을 놓지는 않은 듯하나 까딱하면 큰일이 날 수도 있는 상태였는데….
아마도 아다치에 대한 편견이 해소되지 않았다면 미즈키가 가장 먼저 그를 쓰레기 취급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일단은 쿠로사와도 같이 있고, 오해도 풀어진 상태이니 그녀 역시 침착하게 상황을 짚어 보고자 했다.
“너, 어둠의 마법사지? 마법으로 이 여학생을 위험에 빠뜨린 거 다 알고 있으니까 수작 부릴 생각 마.”
“아니라고요! 그런 적도 없고, 이 애가 갑자기 쓰러져서 데려온 것뿐이에요.”
“저기, 일단은 어떻게 된 일인지 아다치의 이야기를 들어 보죠. 아다치는 그런 짓을 할 사람이 아니니까.”
“…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아다치군은 지금까지 사람을 해치기 위한 목적으로 마법을 쓴 적도 없고, 뭔가 오해가 있을지도 몰라요.”
경비원의 경멸 어린 시비에 2차전이 발발하기 직전, 쿠로사와가 끼어들어 맥을 끊었다. 미즈키가 거들기까지 하니 경비원도 한층 기세가 누그러진 모습.
아다치의 사정은 이러하였다.
파트너도 없고, 어차피 자기가 끼어서 놀 자리도 아니니 휴게 장소에 짱박혀 있다가 심심해서 산책을 하던 도중에 벌어진 일이었다. 이 여자애가 피곤한 기색을 한 채 홀로 돌아다니고 있길래 괜한 오해가 생기는 건 싫어 그녀가 사라지길 기다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쓰러졌다.
화들짝 놀란 아다치가 반사적으로 다가가 확인해 보니 좀처럼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끙끙대기만 하는 모습, 어떻게 해야 하지? 짧은 순간에 수많은 생각이 교차했다.
그러다 결국 날도 추운데 이런 차림을 한 상태로 그냥 내버려 두면 얼어죽을까 봐 일단은 본인이 안아들고 건물 안으로 뛰어온 것이다.
그런데 경비원이 자신을 알아보자마자 의심하며 자꾸 가로막으니 그의 입장에선 답답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대로 놔두기엔 한 시가 아까운 위급한 상황인데.
“… 그렇게 된 거야. 사람이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까 뭔가 길게 생각할 여유가 없었고.”
“우연이라기엔 좀 작위적이지 않나? 저주라도 걸었겠지.“
”전 아다치를 믿습니다. 그는 타인을 해칠 이유도, 그럴 사람도 아니에요. 증거도 없이 함부로 의심하지 말고 빠지세요.“
경비원이 의심을 표할 때마다 쿠로사와는 가차없이 까칠하게 받아치며 그의 시비를 저지했다.
뭐, 예상했다는 듯한 아다치의 표정을 보아하니 본인도 어느 정도는 이런 오해를 받을 걸 각오했던 모양이지만…. 게임 내에서도 비슷했지만 그때는 그를 믿어 줄 사람이 없었던데다 여자애는 기절한 상태라 그의 변호를 해 줄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던 게 일이 커져 버렸던 거겠지.
결국 아다치가 억울하게 몰려 스스로 자취를 감췄고, 그 이후에야 오해가 풀렸다는 걸 보면 이 여자애가 회복해서 진실을 밝혔을 땐 이미 늦은 상황이었던 거다.
미즈키는 아다치가 안아들고 있는 여학생을 유심히 살펴보더니 한숨을 쉬며 침착하게 어떻게 된 일인지 정리했다.
“역시… 마법을 쓴 흔적은 없어요. 게다가 이건, 드레스 때문인 것 같네요. 코르셋을 무리하게 조인 탓에 흉통에 가해지는 압박이 심했던 모양이에요.“
쿠로사와는 안도감이 밀려옴과 동시에 상당히 빡쳤다.
사람이 죽을 위기에서 용기를 내 구해놨더니 돌아온 게 모든 이의 손가락질, 무고였다니. 그리고 이것이 파멸의 시작에 일조한 셈이니 모든 미래를 아는 쿠로사와로서는 화가 안 날 수가 없었다.
그는 그렇게 다혈질적인 성격은 아니었다. 그러나 게임 내에서 수없이 봤던 아다치의 절망, 그리고 그가 지독한 괴로움에 시달리는 것을 보며 함께 울었던 그 기억들이 이 일을 도저히 넘길 수 없도록 만들었다.
만약 타이밍이 엇갈려 아다치를 마주치지 못했다면? 그리고 때가 늦어 아다치가 꼼짝없이 없는 죄를 뒤집어쓰게 되었다면? 게다가 잠깐이라고는 해도 아다치는 분명 억울하게 매도당하는 중이었다. 그야말로 피가 거꾸로 치솟는 상황.
“당장 아다치에게 사과하세요. 아무런 사정도 모르면서 다짜고짜 의심부터 하고 몰아세우다니. 그는 하마터면 누명을 쓸 뻔했다고요.“
”… 쿠로사와….”
“하지만 어둠의 마법사잖아요? 그러니까 모르는 일이죠. 의심하는 게 당연-“
”당연하지 않습니다. 당신 말대로 어둠의 마법사라고 해서 나쁜 짓을 벌일 게 분명하다면 진작 그랬겠죠. 우리가 나타나기 전에 당신부터 모가지가 날아갔을 테니까! 아다치에겐 그럴 만한 힘이 있음에도 그쪽이 살아 있는 게 근거입니다.“
전례없이 분노하며 열변을 토하는 쿠로사와에 모두가 당황스러운 반응을 보였다. 피해를 입은 당사자인 아다치도, 미즈키도 어리둥절한 얼굴이 되었으며 아다치를 가로막고 그를 의심하던 경비원 역시 마찬가지였다.
당연히 이들도 자신처럼 생각할 거라 여겼을 테니. 그러나 다른 이들은 몰라도 쿠로사와 만큼은 절대 그럴 리가 없었고, 애초에 이 일을 대비해 사건이 벌어지기 전에 막을 심산이었던 만큼 그냥 넘길 생각 또한 없었다.
늘 부드럽던 평소와 달리 무섭게 돌변해 경비원을 몰아붙이는 쿠로사와, 오죽했으면 아다치가 진정하라고 그를 말릴 정도였다.
“쿠로사와, 일단은… 이 애, 상태가 많이 안 좋아 보이니까 먼저 안전한 곳에 옮기자.”
“그래요, 이것부터 해결해요.”
둘이 함께 뜯어 말리자 다소 진정한 쿠로사와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가 득득 갈리는 기분이었다. 이때의 사건으로 인해 아다치가 얼마나 괴로워했던가?
지금은 환자가 있으니 어쩔 수 없지만 나중에라도 저 새낀 반드시 가만두지 않으리란 생각으로 한 수 접어 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끝까지 사과는 안 하는 것 봐라.
“가만히 입 다문다고 그냥 넘어갈 거라 생각한다면 오산입니다.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해 주겠어.”
네놈은 괘씸죄 추가다….
마지막까지 으르렁대는 쿠로사와의 기세에 눌렸는지 경비원은 겁에 질린 표정으로 위축되어 있을 뿐이었다.
여학생의 처우는 미즈키에게 맡기기로 했다. 남자인 두 사람이 뭘 도울 수 있는 것도 없을 거고, 옮겨다 놓은 것만으로도 할 일은 다 했을뿐더러 뭐 또 거들 일이 없나 멀뚱멀뚱 서 있는 두 사람을 보고는 됐으니까 꺼지라는 뉘앙스로 내쫓는 미즈키에 의해 자연스레 쫓겨난 상황.
두 사람은 그제서야 서로를 향해 미소를 지어 보일 수 있었다. 그리고 파멸 플래그는 완벽하게 분쇄.
경비원이 앙심을 품고 일을 키운다고 해도 아다치로서는 자신의 결백을 증명할 수 있는 완전한 증인을 두 명이나 확보했으니 걱정될 일도 없다.
두 사람은 그 길로 연회장을 빠져나왔다. 한 차례 태풍이 지나간 듯한 느낌이지만 그래도 잘 지나갔으니 후련한 것은 당연했고, 아다치의 파멸을 막았다는 사실에 쿠로사와는 그동안의 긴장감이 모두 풀려 하마터면 주저앉을 뻔했다.
그런 그의 속을 알 리가 없던 아다치는 그저 꿋꿋하게 자신을 믿어 주고 결백을 밝혀 준 쿠로사와에게 무한한 감사를 느끼고 있었다. 쿠로사와가 없었다면 아마도….
“… 쿠로사와, 정말 고마워. 또 이렇게 날 구해 주고…. 그리고 믿어 줘서 굉장히 기뻤어.”
”난 아다치가 억울한 일을 겪는 게 싫었을뿐이야. 좋은 일을 했는데도 의심을 받는 건 옳지 않은 일이잖아?“
”그건… 그렇지만. 난 원래부터 이미지가 좋지 않아서. 쿠로사와가 아니었다면 분명 곤란해졌겠지.“
쿠로사와는 살며시 아다치의 손에 깍지를 끼었다. 조금 흠칫하는 움직임이 있긴 했지만 거부는 하지 않는 아다치, 이내 느릿느릿 맞잡아오는 이 움직임이 사랑스럽다.
아마도 아다치에겐 살면서 같은 동성과 이런 스킨십을 할 일 따윈 없었을 것이다. 모든 것이 생소한 상황에서 거부를 표하지 않는다는 건 그동안 해 왔던 쿠로사와의 노력은 헛된 것이 아니라는 증거였다.
“저기, 아다치. 괜찮다면 오늘… 내 방에서 자고 가지 않을래? 조금 있으면 한밤중이 될 테니까.“
”아, 뭐…. 응. 오늘은 함께 있기로 했고.“
머뭇거리면서도 끄덕이는 이 모습이 얼마나 귀여운지 본인은 모르고 있다는 게 답답할 따름이다.
아다치는 과연 쿨톤일까, 웜톤일까? 아니면 내가 평생 완주하지 못 할 사랑의 마라톤? 아니면 내 인생에 뛰어든 행복 일 톤이려나? 아니면 내 인생의 달달한 메가톤?
의식의 흐름에 이끌려 설레는 마음을 주접으로 풀어내는 중인 쿠로사와, 그의 모습은 마치 누구나 설렐 정도로 그림 같았지만 속내는 전혀 딴판이었다.
***
쿠로사와의 기숙사로 향한 두 사람은 정말 오랜만에 평화로운 시간을 즐겼다.
아무도 방해하지 않고, 아무도 안 좋은 시선을 보낼 일이 없는 그런 평화로운 시간. 둘은 함께 핫초코를 마시며 달콤한 딸기케이크를 먹었다.
디너 타임에 아다치는 내내 다른 곳에 있었기에 끼니를 굶지는 않은 걸까 걱정은 했었지만 그게 무색하게도 선물받은 주먹밥을 맛있게 먹고, 함께 받은 과자를 주워 먹었더니 배고프지는 않다는 말에 쿠로사와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선물을 줬다고? 누가?
“아, 그게… 하나비가 주고 갔었어. 그동안 미안했었다고. 연회에 오지 않을 거라면 받아 두라고 해서….“
”그랬구나…. 다행이네, 아다치를 좋아하는 사람이 나 이외에도 늘어난 모양이야.“
히로인들도 본성은 착하다. 게임 내에선 아다치를 싫어하는 모습만 보여서 그렇지, 기본적으로는 상냥하다.
오늘 미즈키가 아다치를 도와준 것처럼 하나비 역시 나름대로 아다치를 생각해 주었기에 몰래 배려해 준 거겠지. 하지만 자신이 미처 챙기지 못한 부분이 있었단 사실에 조금 우울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나… 실은 좀 여러 가지 생각을 하고 있었거든. 어차피 모두에게 미움받을 수밖에 없고,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하는 삶이라면…. 이대로 살아가는 게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까 하고. 존재 자체가 모두에게 재앙이라고 했으니까.“
”절대 그렇지 않아. 아다치도 알고 있잖아? 마법은 사용하기 나름이니까. 게다가… 넌 재앙 같은 게 아냐.“
”… 이렇게 말해 주는 쿠로사와도 있고, 쿠로사와 덕분에 많은 게 달라졌다고 할까…. 정말 많은 위로가 됐거든. 날 지지해 주는 사람이 생겼다는 것만으로도.“
아다치는 다시 수줍게 웃어 보였다.
쿠로사와로 인해 스스로를 갉아먹는 비난에서 조금은 용기를 얻었고, 누군가와 교류하는 것이 즐거운 일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흑마법을 쓴다고 해서 자신 또한 반드시 악이 아니라는 당연한 사실을 깨닫게 해 준 사람도 그였으니.
덕분에 아다치는 자신의 마법적 속성과 인격을 분리해서 생각하는 법을 깨우쳤다. 그것만으로도 자신에게 향하는 비난에서 오는 상처가 크게 줄었으니 굉장한 일.
두 사람은 어두운 방 안에서 침대에 나란히 앉아 찬란하게 밤을 밝히는 달빛을 함께 구경 중이었다. 이런 맑은 하늘을 볼 때면 쿠로사와는 늘 이런 생각을 한다. 이전에 살던 도쿄에 비하면 이런 건 참 좋다고. 선명한 달빛, 별빛은 그 전까진 구경하기 힘들었으니.
자신의 뒤를 이어 목욕을 마치고 뽀송한 상태로 수줍게 등장한 아다치가 보이자마자 쿠로사와는 심장이 멎을 뻔했다. 미칠듯한 두근거림을 참아내며 그와 함께 감상하는 밤하늘이라, 혼자 볼 때는 몰랐지만 이보다 로맨틱한 일이 또 있을까 싶은 순간이었다.
그리고 잔잔하게 귓가로 스며드는 아다치의 목소리를 듣던 쿠로사와는 언제나 그렇듯 다정하게 대답해 주었다.
“그건 전부 아다치 스스로의 능력이야. 난 운이 좋게 아다치의 그런 면모를 발견하고 호감을 가진 것뿐이니까. 나야말로 빛을 다룬다는 것 말고는 아무런 특이점도 없는데 말이야.“
”그렇지 않아. 쿠로사와는… 누구라도 좋아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빛이라는 능력이 아니었더라도.“
”… 어째서?“
”그거야… 당연하지 않을까. 쿠로사와가 내 장점을 찾아 주고, 그걸 알게 도와준 것처럼. 쿠로사와는 언제나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기꺼이 노력해 주고, 웃음을 짓게 만들어 줘. 마치 햇살 같이 말이야. 네게 닿으면 아무리 어두운 것들이라도 밝게 빛나거든. 그건 마법만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냐.”
쿠로사와의 마음이 먹먹해지기 시작했다.
이 세계에 오기 전에도, 후에도 그의 주변에 가득했던 사람들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을까? 생각해 보면 한 명, 한 명 얼굴은 기억나지 않더라도 모두 웃음을 띄우고 있었던 것만큼은 같았다. 그들이 짓는 웃음에 별다른 의미를 느낀 적은 없었는데… 아다치의 말을 듣는 순간 어쩐지 아주 중요한 것들을 놓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세상을 너무 삐딱하게 바라보고 있던 것은 쿠로사와 유이치 본인일지도 모른다고. 그들의 웃음을 그저 자신의 외적인 부분만 바라본 결과라며, 멋대로 가볍게 치부해 버렸던 것이다. 자신이 아다치에게 그랬던 것처럼 그들도 생각보다 쿠로사와의 많은 것을 보고 다가온 것일지도 모르는데.
‘네게 닿으면 아무리 어두운 것들이라도 빛나거든.’ 아다치는 그들의 웃음 지은 얼굴에서 쿠로사와가 놓친 많은 것들을 봐 왔던 걸지도 몰랐다.
너는 또 다시 내게 깊은 위로를 주는구나. 아다치는 또 다시 쿠로사와의 안식처가 되어 주었고, 지금까지 그에게 수도 없이 반해 왔을 쿠로사와는 다시 한 번 격렬한 설렘에 휘말리고 말았다.
“나는 쿠로사와를 보며 항상 대단하다고 느꼈으니까. 늘 생기가 가득하고, 따스한 낮이라는 생각이 들었어.“
아다치는 그렇게 말하며 반짝거리는 눈망울로 쿠로사와를 바라보았다. 밤의 어두운 장막이 내려앉았음에도 별빛보다 더욱 선명하게 반짝인다. 그럼에도 너무나도 깊고 새카만, 그러면서도 맑은 눈동자에서 쿠로사와는 도저히 시선을 돌릴 수가 없었다.
아, 뭔가 위험한 느낌. 도저히 헤어나올 수 없을 것만 같은 기분. 쿠로사와는 마치 자신이 최면에라도 걸린 듯했다. 실제로 눈앞의 아다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도.
“… 뭔가 아이러니하네. 나는 밤을 더 좋아해. 낮에 열심히 활동을 하고, 지친 몸을 뉘일 수 있는 유일한 때니까. 휴식이라고 할까, 어쩐지 해방되는 느낌.“
“그랬구나. 그런 시각은 신선하네. 보통은 밤은 위험하다거나 불길하다고 해서 싫어하는 사람이 많을 텐데.“
본인도 모르게 귀여운 웃음을 지으며 쿠로사와의 말에 맞장구를 치는 아다치, 쿠로사와는 그런 그의 모습을 시야에 가득 담으며 대답했다. 손을 뻗어 그의 머리칼을, 또는 뺨을 어루만지고 싶은 마음을 꾹 참으면서.
“낮이 지나면 밤이 오는 건 그런 의미겠지. 지쳐 있을 때 마음껏 휴식을 취하기 위해 꼭 필요한 시간. 내게 있어서 아다치는 그런 존재야. 어쩌면 모두에게도.“
”… 그런가?“
”조금 어렵지만…. 글쎄, 나는 그런 의미로 어둠을 좋아하니까. 그래서 아다치를 좋아할 수밖에 없는 걸지도 모르겠어.”
이번에는 보다 명백한 의미가 담긴 문장이었다. 아다치 역시도 쿠로사와가 어떤 말을 하고 싶은 건지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다시 마주쳤지만 누구 한 명 피하지 않은 채로 눈빛의 교환은 꽤나 길게 이어졌다.
고요한 적막 속, 스스로의 심장이 동요하는 것을 느끼며 달빛이 훑고 가는 서로의 모습만을 오래도록 바라보고 있었다.
쿠로사와는 자신도 모르게 점점 아다치에게 가까워지고 있었다. 조금씩 떨려오는 그의 눈빛, 그러나 물러나지는 않는 모습에 두 사람의 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가까웠다.
미약하게 피부에 닿아 오는 서로의 따뜻한 숨결, 그리고 좋은 향기가 코끝에 스며들 때 즈음에 쿠로사와는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고백했다.
“… 난, 아다치를 좀 더 알아가고 싶어. 더 가까워져서, 너에게 닿고 싶었어.”
“쿠로사와….”
더 이상은 참을 수 없었다. 깊게 내려앉은 어둠 속에서 선명하게 들려오는 그의 고백은 아다치의 심장을 뒤흔들기 시작했고, 자신도 모르게 쿠로사와의 옷자락을 부여잡은 그의 손길이 떨리고 있었다.
어쩌면 동성이냐 아니냐는 이제 와서 크게 중요한 사실이 아닐지도 몰랐다. 누군가 가르쳐 준 사람이 없었음에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으니까. 그리고 아다치는 대답했다.
“나, 나도, 쿠로사와에게… 닿고 싶어. 좀 더….”
달빛에 비춰진 두 사람의 실루엣이 완전하게 겹쳐졌다.
조금의 틈도 허락하지 않을 것처럼, 서늘한 밤공기에도 홧홧하게 달아오르는 열기가 퍼지기 시작하며 둘은 점점 더 깊게 서로에게 빠져들었다.
조금은 질척한 마찰음과 함께 이어지는 첫 키스는 달콤함을 느낄 새도 없이 짜릿하기만 했고, 그 중독적인 느낌에 모든 것을 잊은 채 서로를 부여잡고 필사적으로 껴안으며 점점 거칠어지는 호흡을 교환하기도 했다.
이건 꿈일까, 너무나도 자극적이고 행복한 그런 꿈이 아닐까…. 쿠로사와는 주체할 수 없는 흥분이라는 것이 이런 기분이라는 사실을 새로이 깨닫게 된 건지도 몰랐다.
자신에게 안겨 몇 번이고, 깊고 진득한 입맞춤을 받아들여 주는 아다치의 존재가 믿기지 않아서. 그리고 이 사랑스러움을 참을 수가 없어 더욱 집요하게 탐할 수밖에 없었다.
어느새 두 사람은 서로의 몸을 겹친 채 침대에 누워 그 어느 때보다도 적나라하게 온기를 교환하고 있었다.
쿠로사와의 손길이 닿는 족족 아다치는 나른한 듯한 신음을 맞닿아 있는 입술 새로 흘렸고, 그것은 더욱 깊은 관계로 이어지는 신호탄과도 같았다.
터질듯이 뛰는 심장, 쿠로사와의 손이 다소 조급하게 아다치의 옷깃을 헤치고 그의 살결을 어루만지는 동안 쿠로사와는 아다치에게 온전히 자신의 마음을 담아 속삭였다.
“아다치, 진심으로… 좋아하고 있었어.”, “이젠 놓치지 않아.” 이런 속삭임이 계속되는 동안 아다치는 대답해 줄 수조차 없었다. 한마디 한마디가 엄청나게 심장을 흔들어댔으니까.
그저 스스로도 민망한 신음만을 흘리며 절로 몸이 움찔거렸고, 떨리는 손으로 쿠로사와의 어깨를 부여잡으며 간신히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것이 고작이었다.
“… 나, 나도… 쿠로사와가… 좋아.”
그 후로는 이성 따윈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아다치는 쿠로사와가 자신의 옷을 풀어헤치고 드러난 맨몸 곳곳에 키스를 남길 때마다 머릿속이 하얘지는 기분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고, 쿠로사와는 자신의 마음을 받아들인 이 사랑스러운 존재를 그냥 놔둘 생각이 없었다. 그럴 정신도 없었고.
몇 번이고 키스를 주고받으면서도 아다치의 목덜미, 쇄골, 그리고 가슴팍과 배, 옆구리 등 하얗던 그의 살결이 쿠로사와의 흔적으로 물들어가는 동안 아다치는 경험해 보지 못했던 흥분이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부끄러워서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쿠로사와에게 안기는 것이 너무나도 뜨겁고 두근거려서, 그의 손길이 살결에 닿는 것이 너무나도 기분 좋아서, 누구에게도 드러낸 적 없었던 속살이 그에게 보여지는 것이 너무도 자극적이었고, 그의 입맞춤이 온몸을 지나는 것이 너무나도 짜릿했던 탓이었다.
감당하기 힘든 흥분감과 부끄러움에 잠깐이나마 숨을 돌리며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물기가 어린 채 떨리는 중인 눈빛을 한 아다치를 발견하고 나서야 쿠로사와는 조금이나마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리고 몰려드는 자괴감, 그를 향한 죄책감.
난 정말 구제불능인 쓰레기구나…. 마음을 받아 주었다고 해서 바로 덮쳐 버리기나 하고, 갑작스러운 자신의 급발진에 아다치가 겁먹기라도 한다면 정말 끔찍한 일이 되겠지.
아다치에게 있어서 애정, 그리고 사랑이란 한 번도 경험해 보지 않았던 미지의 세계 그 자체다. 그를 향한 마음에 눈이 멀어 성욕에 지배당한 채 밀어붙인다면 분명 좋지 않은 기억을 남길지도 몰랐다. 그런 이기적인 사랑은 쿠로사와 스스로도 원했던 바가 아니었고.
“정말 미안해, 아다치. 내 마음을 네가 받아 주었다는 사실이 너무 기뻐서… 나도 모르게 거칠어져 버렸네. 많이 놀랐을 것 같아.”
“… 어? 어어, 그게… 난…. 멀쩡해! 괜찮아. 이런 건 처음이니까 조금 놀라긴 했지만… 아무튼 괜찮아.”
격렬해진 심장의 박동이 좀처럼 잦아들지를 않는다. 그것은 쿠로사와도, 아다치도 그러했다.
그러나 쿠로사와는 불쑥불쑥 들이미는 욕심을 필사적으로 억눌렀다. 이렇게나 맑은 눈으로 자신만을 바라보는 아다치를… 드디어 닿을 수 있게 된 그를 최대한으로 소중하게 아껴 주고 싶었다. 차근차근 그에게 충분히 사랑을 준 뒤에 아프지 않도록, 좀 더 편한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쿠로사와는 형편없이 흐트러진 아다치의 옷매무새를 조심스럽게 다시 정리해 주었다. 실컷 탐한 것 같은데도 여전히 치솟는 갈증에 손끝이 떨려왔지만 참았다.
아다치는 다소 얼떨떨한 표정이긴 했으나 쿠로사와의 행동에 의문을 품지는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럴 새도 없었다. 쿠로사와가 또 다시 뺨이며 이마에, 그리고 입술에 수차례 뽀뽀를 남겨댔기 때문.
“널 어쩌면 좋지. 정말로 사랑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어.”
“내가? 난… 딱히 아무것도….“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이미 아다치의 모든 것이 좋으니까. 귀여워.“
아다치가 우는 듯한 소리를 내며 두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려 버렸다. 터질 듯이 밀려오는 부끄러움에 더는 견딜 수가 없어졌으니까. 쿠로사와에게서 듣는 애정 어린 달콤한 말 하나하나가 묵직하게 심장을 후드려패고 있었다.
“… 귀엽다거나, 사랑스럽다거나…. 이런 말 들어 본 적도 없어서. 뭔가 기분이 이상해.”
“앞으로는 익숙해질 거야. 내게 있어서 아다치는 정말로 그런 사람이니까. 귀엽고, 사랑스럽고. 정말로 좋아해.”
악, 쿠로사와! 이제 그만! 아다치는 속으로 비명을 지르는 중이었다. 도무지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밀려오는 설레는 가슴에 제대로 된 생각조차 하기 힘든 상황.
이미 과부하가 걸려 버린 아다치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쿠로사와는 그 어느 때보다도 환하게 웃으며 그를 꼬옥 끌어안고 누워 버릴 뿐이었다.
언제나 그렇듯 쿠로사와의 품은 온기가 가득하면서도 단단한 안정감이 있었지만 오늘은 어쩐지 평소보다 더 뜨거운 느낌. 아다치는 조용히 심호흡을 하며 느릿느릿한 손길로 그를 마주안는다. 그런 조심스러운 화답이 쿠로사와를 얼마나 벅차게 만드는지도 모르고.
“… 저기, 쿠로사와?”
“응, 아다치.”
“그, 우리… 이렇게 되면… 그거지? 그러니까-”
“응! 이제부터는 연인이네. 아다치와 나는 연애를 시작하게 된 거니까.”
연애… 쿠로사와랑 내가…. 쿠로사와를 마주안은 아다치의 손에 힘이 실리며 그의 등짝을 부여잡는다. 차마 대답하기엔 또 다시 치솟는 부끄러움. 아예 쿠로사와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어 버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해 버리는 아다치의 몸짓에 쿠로사와 역시도 조용히 입술을 깨물며 벅차오르는 가슴을 꾹꾹 누르기 바쁠 지경이었다.
아다치를 알게 되고, 그에게 빠져들었던 시간이 무려 7년. 그동안의 아다치는 불러도 들을 수 없고, 손을 뻗어도 닿을 수 없는 그런 존재였다. 언제나 쿠로사와의 컴퓨터 안에, 스마트폰 안에, 그리고 게임 안에서만 있는 캐릭터.
하지만 지금의 아다치는 그렇지 않았다. 쿠로사와가 그의 이름을 부르면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돌아보았으며 자신의 마음을 전하면 기꺼이 받아들여 주는 등 일방적이 아닌 쌍방의 상호작용이 가능한 한 명의 사람. 그리고 연인이다.
이곳에 전생한 것을 넘어 더욱 커다란 기적이 일어났다.
그리고 마지막 기적의 마무리는 쿠로사와 유이치 자신의 손으로 이루어야 할 숙명, 자신이 있는 한 아다치는 절대로 죽지 않을 것이다.
마치아카 쿠로아다 동정마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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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직장인인 나, 미연시 게임의 주인공이 되어 최애와 재회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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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인공인 내가 공략불가 악역 캐릭터와 친해져 버린 건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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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악역 캐릭터를 너무 좋아해 쓰러뜨릴 수 없어 곤란한 주인공의 이야기입니다만?
4편
게임 속 주인공으로 환생해 버린 내가 공략 불가였던 히든 루트를 개척했습니다
3년마다 도래하는 대규모의 연회, 이 시기에는 전교의 모든 학생들과 교수가 참여하여 파티를 즐긴다.
전교생이 참여하는 만큼 교류도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이때만큼은 모두가 성적에 대한 고민을 잊어버리고 신나게 놀고 먹는다. 그야말로 전교생의 화합과 결속을 위한 축제라고 할 수 있겠다.
취지는 이러하나… 안타깝게도 게임 내에서는 이 연회의 즐거움이 잘 묘사되지 않는다. 아다치가 억울하게 무고에 휘말려 한바탕 뒤집어지고, 거의 무슨 공개 처형식마냥 흘러가니 쿠로사와로서도 썩 달갑지 않은 때였다.
한편, 연회가 가까워질수록 모두가 하루하루 들떠가는 와중에도 아다치는 언제나 평소처럼 조용하게 지낼뿐이었다.
딱히 즐거워 보이지도 않았고, 기대가 있어 보이지도 않는다. 어차피 그는 누구와도 교류할 수 없을 테니 늘 그렇듯 남들 눈에 안 띄게 조용히 숨어 시간을 보낼 작정이겠지.
생각해 보면 게임 속에서도 아다치는 비슷하게 행동했다. 어디에 짱박혀 있는 건지 연회 내내 모습을 보이지도 않았고, 봤다는 이도 없는데 대체 무슨 연유로 치한 혐의를 뒤집어쓰게 된 건지 그 사정에 대해서는 묘사된 바가 없다.
그저 갑자기 끌려나와서는 아다치가 누굴 희롱하려 했다는 추문이 씌워지고 속전속결로 인민재판이 시작된다.
아다치와 멀어지게 되지 않았다면 내내 자신의 곁에 둬서 플래그를 파괴할 수도 있었을 텐데….
쿠로사와가 길게 한숨을 쉬었다. 자세한 원인을 알 수가 없으니 어디서부터 개입해야 하는지도 답답한 상황, 차라리 아다치의 주위에 맴돌 수 있는 명분이라도 있으면 나을 텐데 이래 봬도 주인공인 쿠로사와는 이래저래 바쁜 몸이었다.
진귀한 빛의 마법사와 친해지고 싶어하는 이들이 한둘이 아닌 만큼 그들을 상대하는 것만으로도 정신없을 거란 소리.
한편, 쿠로사와는 게임 속 연회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수많은 디테일을 떠올리기 위해 잠도 미뤄가며 면밀하게 타임라인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정말로 아다치는 그 연회에 없었을까? 학생 전원이 필참인 만큼 아무리 왕따여도 끼워는 주었을 것이다. 단지 아무도 그에게 다가갈 일이 없을 거고, 본인도 그걸 아니까 최대한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숨어 있었을 확률이 높았다.
아니면 파티가 진행되는 내내 연회장 밖을 돌아다니고 있었거나. 하지만 차마 이건 아니길 바랐다. 겨울인 만큼 더럽게 추웠을 텐데….
더 답답한 것은 기본적으로 연회에는 남녀 한 쌍이 파트너를 이뤄서 참석하는 게 전통이다. 그렇기에 연회가 시작될 즈음이면 대부분의 학생들이 짝을 지어 함께하기로 약속하는데, 그것이 어려운 이들도 당연히 있기 마련이지만 안쓰럽게도 아다치는 좀 어나더 레벨이었다.
작중에서는 그와 함께 참석하느니 차라리 혼자 가겠다는 결연함까지 다지는 엑스트라 여자애들도 있었을 정도. 일단 남자로서의 매력을 떠나서 그가 처한 입장이나 어둠의 마법사라는 특징 때문에 가까이 하기도 싫고 무섭다는 입장.
쿠로사와는 또 절규했었다. 이럴 거면 동성 파트너라도 허용해 줄 것이지, 개같은 호모포비아 새끼들 같으니….
아무튼 이게 어째서 문제가 되느냐, 아다치의 행적을 증명해 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그나마 파트너가 있으면 일단은 같이 붙어 다닐 테니 충분히 알리바이가 성립되고, 파트너 입장에서도 없는 사실을 지어낼 수는 없으니까.
하지만 이런 전개는 절대 일어날 수 없다.
쿠로사와는 히로인 중 한 명에게라도 부탁해 볼까 싶었지만 그건 당치도 않은 짓이다. 그녀들도 조금이라도 더 마음에 드는 파트너를 고를 권리가 있고, 그걸 무시하면서까지 부탁할 명분도 없다. 애초에 둘 사이를 멀어지게 만든 장본인들이니 아다치도 무척이나 불편하겠지.
아니, 자신의 일이라고 생각하면 화가 날 것이다. 원하지 않는 동정심은 오히려 불쾌하기만 할 뿐이니까.
연회날이 가까워질수록 쿠로사와는 좀처럼 침착함을 유지하기가 힘들어졌다. 극복하지 못하면 아다치와의 인연이 어떻게 흘러갈지 모른다.
결국 급해진 쿠로사와가 선택한 건 정공법이었다.
아다치야 점심 이후의 휴게 시간에는 늘 화원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을 테니 적당한 핑계로 히로인들을 떨궈낸 후 조급함에 두근거리는 심장, 거친 숨을 내쉬며 그에게로 향했다.
다짜고짜 그에게 무슨 말을 할지조차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연회에 대해 이상하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만 경고라도 해 주고 싶은 마음만이 전부였다.
쿠로사와는 스스로에게 실망했다. 그렇게나 오래 덕질을 해 왔던 만큼 자신이 아는 아다치라면 그날 어떤 행동을 할지 당연하게 예측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는데, 그가 위기에 휘말릴 만한 원인에 대한 힌트가 없으니 완전히 오리무중이었다.
결국 쿠로사와가 숨을 몰아쉬며 화원에 도착했을 때, 그곳에서 NPC마냥 주변의 풍경에 동화되어 가만히 앉아 있는 아다치를 발견할 수 있었다.
형형색색 여러 가지 꽃들이 살랑살랑 바람에 나부끼는 공간에서 독보적으로 눈에 띄는 뒤통수, 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검은 머리칼을 지닌 아다치는 무척이나 이질적인 분위기를 뽐내고 있다. 그 이질적인 느낌이 쿠로사와에게는 무척이나 아름답게 보인다는 걸 그는 알고 있을까.
“아다치! 다행이다, 여기 있었구나.“
”… 쿠로사와?“
”꼭…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서. 부탁이니까 들어줘.”
자신을 부르자마자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나 버리는 아다치, 아마 목소리만 들었어도 누구인지 알았겠지.
아다치가 또 도망갈까 봐 쿠로사와는 헉헉거리면서도 애써 단호한 얼굴을 하고 못을 박았다.
그 와중에 떨리는 눈빛,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저 처연한 얼굴이 왜 이리도 가슴을 떨리게 만드는지…. 이전의 세계였다면 쿠로사와는 스크린샷 버튼을 몇 번이고 연타했을 것이 분명했다. 귀여워, 놀란 토끼 같아….
아다치는 당장이라도 울어 버릴 둣한 기세였다. 미즈키를 통해 쿠로사와가 자신 때문에 당하지 않아도 될 괴롭힘을 당하고 있었단 걸 알게 되고, 그를 위해서라도 쿠로사와의 주변에서 사라져 주는 것을 선택했으니까.
쿠로사와는 아다치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단번에 알아차렸다. 그의 마음 아픈 배려를 모를 리 없는 게 당연하다.
“아다치, 네가 왜 이러는지 나도 알고 있어. 하지만 그건 절대 너 때문이 아니야. 애초에 신경 쓰지도 않았으니까.“
”… 난 쿠로사와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서-“
”그런 적 없어! 난 너와 지냈던 모든 순간이 정말 즐거웠고, 행복했어. 다른 사람들이 뭐라 말하든 상관없어. 욕할 거면 하라고 해, 적어도 나에게는 네가 더 중요한 존재니까.”
말문이 막혀 버린 아다치가 당혹스러운 얼굴로 멍하니 쿠로사와를 바라본다. 이해가 안 되겠지, 하필이면 왜 자신에게 이렇게까지 하는 건지.
하지만 쿠로사와는 구태여 그를 이해시키고자 하는 생각 따윈 없었다. 앞으로 다가올 위기를 막기 위해서라도 그가 자신의 말을 들을 준비를 하도록 만들어야 했으니까.
이미 수많은 그의 죽음을 봐 왔다지만 이렇게 생생한 현실로 그걸 또 경험하고 싶지는 않았다.
둘 사이에 잠깐의 정적이 흘렀음에도 아다치는 여전히 안절부절하고 있었다. 무언가 말하려는 듯 숨을 들이키려다가도 입술을 깨물며 눌러 참는 등 불안한 모습.
그러나 쿠로사와는 아다치를 재촉하지 않고 오히려 부드러운 어조로 타이르듯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아다치가 날 위해 꾸준히 배려해 준 건 알고 있어. 하지만 오늘은… 잠깐이라도 좋으니까 이야길 나누고 싶어.“
”아, 응…. 알겠어.“
아다치는 슬쩍슬쩍 쿠로사와의 눈치를 살피는 듯하면서도 그의 앞에서 떠나지는 않았다.
자신에게 그렇게나 단호하게 말하던 쿠로사와는 처음이었다. 그리고 여태까지 그를 피해 다녔던 것이 무색하게 쿠로사와는 여전히 아다치가 중요한 존재라 말해 준다. 모든 이들이, 심지어 자신조차도 스스로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데 쿠로사와만큼은 그렇지 않았다.
아다치는 결국 그를 밀어내는 데에 실패했다. 아무리 멀어지려 해도 쿠로사와는 한결같이 자신을 봐 주는데 어떻게 그를 거부할 수 있을까?
아다치애게 있어서 쿠로사와는 모두를 비추는 태양 그 자체였다. 그 빛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기에 스스로 숨어 그의 눈앞에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면 당연하게 내리쬐었고, 아다치도 그 대상에서 예외는 아니었다. 그래서 그가 좋았다.
결국 이번에도 먼저 다가온 쪽은 쿠로사와구나. 아다치는 새삼스럽게 스스로가 부끄러워진다. 매번 도움도, 위로도 잔뜩 받고 있는데 정작 자신은 쿠로사와에게 피해만 주니까.
난 왜 이렇게 태어난 걸까.
그런 아다치의 우울한 머릿속을 백지로 만든 것은 생각지도 못한 쿠로사와의 한마디였다.
“저기, 아다치. 혹시 이번 연회에 뭘 할 예정이야?”
“연회? 아, 딱히 할 일은 없어서…. 그냥 적당한 곳에서 혼자 있지 않으려나.”
“… 괜찮다면, 도중에 말이야. 나랑 같이 빠져나오지 않을래?“
아다치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진심으로 하는 말인가? 싶은 표정에 쿠로사와는 하마터면 웃음이 터질 뻔했다.
말로 하지 않아도 속마음이 훤히 드러나는 이 순수함, 이렇게나 귀여운 구석이 많은데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연기를 해야 한다는 건 무척이나 힘든 일이었다.
“같이…? 그것도 연회 도중에?”
“응. 그날, 좀 일찍 쉬고 싶어서. 하지만 혼자는 외롭기도 하고, 사람이 별로 없는 곳이라면 신경 쓸 문제도 많이 없을 것 같다고 할까….“
”뭐, 그건 그렇겠지만. 하지만, 쿠로사와는 이미 파트너 있지 않아? 도중에 사라져 버리면 서운해 할 텐데.“
솔직히 파트너의 반응 따윈 알 바 아니었다. 애초에 쿠로사와가 같이 가자고 부탁한 것도 아니고, 파트너의 눈치를 보느라 아다치의 파멸 플래그를 막지 못하게 된다면 이만한 삽질이 또 없을 것이다.
못내 걱정된다는 눈빛을 하고 있는 아다치에게 상냥하게 웃어 준 쿠로사와, 그에게 굳이 파트너를 구할 생각이 없냐고는 묻지 않았다. 게임에서도 혼자 다녔다는데 현실이 됐다고 뭐가 달라지겠냐만은….
다만, 쿠로사와는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느끼고 있던 진심을 그에게 전할뿐이었다.
“… 실은, 내 파트너가 되어 줄 사람이 아다치였다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을 했었어.“
”아, 응. 나, 남자지만….“
”동성 파트너가 가능했다면 아다치에게 부탁했을 거야.“
아다치의 뺨이 또 발그레하게 달아올랐다. 연회에서 파트너가 되어 함께한다는 건 꽤 커다란 의미를 지닌다. 그동안 관심이 있었던 상대에게 제안하는 것이 보통이고, 이를 계기로 커플로 발전하게 되는 경우가 상당히 많았으니까.
그런데 쿠로사와가 자신에게 파트너를 부탁한다고? 쿠로사와도 자기가 한 말이 어떤 의미로 들릴지 모르지는 않을 것 같은데, 좀처럼 쿠로사와에게 시선을 마주치지 못한 채 홀로 머릿속이 복잡해진 아다치….
그리고 쿠로사와는 당연히 아다치가 생각한 그대로의 의미를 담고 말한 것이 맞았다. ‘나, 너한테 관심 있어’, ‘너랑 잘 되고 싶어’를 이쪽 세계에 맞는 방식으로 돌려서 플러팅을 날려 본 건데… 글쎄, 쿠로사와는 아다치가 이것을 눈치채 줄 거란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근본적으로 헤테로 게임이니까.
“미안, 이런 건 역시 곤란하겠지. 아무래도 남자끼리고, 아다치에게도 부담스러운 일이 될 테니까.“
“… 그렇지 않아.”
“어?”
“별로… 곤란하거나, 부담스럽다거나…. 그렇지는 않다고 할까…. 애초에 그런 제안을 받을 거라곤 생각도 못했고, 나도 쿠로사와라면….“
부족한 말주변으로 더듬거리며 애써 대답하지만 긴장감에 꼬물거리는 손가락까지는 숨길 수 없는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요약하자면, “싫지는 않다.” 허둥지둥 이런 적이 처음이라며 횡설수설하는 아다치, 쿠로사와는 예상치 못하게 벅차오르는 마음을 혼신의 힘을 다해 입술을 깨물며 참아야만 했다.
거절하지 않았다. 쿠로사와의 의도를 알았다고 한들, 아다치의 성격상 대놓고 극혐은 안 하더라도 좀 난처한 얼굴이 되어 아예 모르는 척을 해 버릴 줄 알았는데 의외로 정면으로 받아 주었다. 같은 성별이라는 건 아다치에게 있어서 그다지 크게 고려할 요소가 아니었던 걸까.
어떤 쪽이든 상관없었다. 어쨌든 아다치는 쿠로사와를 밀어내지 않았고, 아다치의 그런 모습에 쿠로사와는 어째선지 깊은 안도감을 느낄 수 있었다. 이에 가까이 다가온 쿠로사와는 아다치의 손을 살며시 감싸쥐며 말했다.
“그렇다면… 디너가 끝나면 그때부터는 아다치가 내 파트너가 되어 줄래?“
”그렇게 빨리? 앗, 그것보다도… 정말로? 내가?”
“응. 이런 파티에는 딱히 흥미가 없기도 하고, 역시 나는 아다치와 있을 때 가장 즐거운 것 같네. 괜찮다면 같이 어울려 줬으면 해.”
“아, 나야 뭐… 응. 괜찮아.“
쿠로사와랑 함께 있는 건 아다치 역시도 즐거운 일이었다. 일단은 즐겁고 말고를 떠나 쿠로사와가 좋았으니까.
그러나 그러한 속내까진 차마 말하지 못하고 고개만 끄덕이는 아다치, 쿠로사와는 드디어 한시름 놓을 수 있게 되었다. 아다치에게 위기가 찾아오는 것은 디너가 끝나고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른 후이다.
처음부터 함께하지 못하는 것은 아쉽지만 어쩔 수 없겠지. 아다치로서도 욕먹을 걸 뻔히 알면서 많은 사람들이 모인 장소에 모습을 드러내는 건 상당히 부담스러운 일이 될 거고, 쿠로사와는 일단은 주인공인 만큼 그를 찾는 이들과의 사소한 이벤트를 쳐내야 했다. 이를 다 쌩까면 어떻게 되는지는 잘 모른다. 게임에서는 선택할 기회조차 없었으니까.
그저… 사건이 벌어지기 전에 무사히 아다치를 빼내는 것만이 지금의 목표였다.
여러 의미로 모두를 두근거리게 만들었던 연회가 드디어 시작되고야 말았다.
아다치와 잠깐의 소통이 있었다고 해서 예전처럼 다시 살갑게 대화를 나누거나 하는 일은 없었지만 적어도 마주친 시선을 어색하게 피하지는 않게 되었으니 그것으로 충분.
쿠로사와의 파트너는 미즈키로 결정되었다. 히로인들이야 당연히 쿠로사와가 자신을 선택해 주길 바랐으나, 그녀들에게 별다른 관심이 없었던 쿠로사와는 자신을 두고 이런저런 경쟁 구도를 만드는 이들에게 지쳐 “에라, 모르겠다”를 시전하며 드러누워 버렸으니.
뭔 짓을 해도 “난 몰라”로 일관해 버리는 쿠로사와에 그녀들의 선택지는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 그냥 알아서 하는 것.
나름대로 자신들만의 내기를 벌인 끝에 최종 승자는 미즈키가 된 모양이었다.
나머지 히로인들은 어떻게 되는 거냐고? 그건 쿠로사와가 알 바는 아니었다. 원래도 예쁘고 좋은 집안 출신인 애들이니 관심을 표하는 남학생들도 많을 텐데, 그중에서 제일 괜찮은 녀석으로 골라서 참석하겠지.
연회장에는 역시나 아다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사실상 말만 끼워 준다뿐이지 파트너도 구하지 못한 상태로 등장해 봐야 모두의 비웃음거리만 될 뿐이니 아다치라고 그 사실을 모르지는 않았다. 빠져도 신경 쓸 사람은 없을 테고.
쿠로사와는 디너 타임이 오기만을 기다린다. 그와 스몰토크라도 나누며 안면을 트고 싶어하는 사람은 많았지만 쿠로사와는 그들에게 별다른 흥미가 없다.
미즈키만 해도 순간순간 쿠로사와가 지루해하는 걸 눈치채고는 그의 주변에 몰려드는 사람들을 적절하게 돌려보내며 쉴 틈을 만들어 주곤 했으니까.
“역시 쿠로사와군은 인기가 많네요. 다들 친해지고 싶은가 봐요.“
”… 그런가. 난 딱히 뭔가를 하지는 않았는데.“
”존재만으로도 특별한 사람이니까요.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희망을 주고, 안심할 수 있게 되잖아요.“
쿠로사와는 미즈키의 대답에 씁쓸한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요컨대, 빛의 마법을 타고나지 않았다면 다른 이들에게 당연하다는 듯 사랑받을 일은 없었을 것이며 아다치 또한 어둠의 마법을 타고나지 않았다면 특별히 미움받으며 살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의 성격상 많은 인기까지는 아니더라도 소소한 관계를 이루며 정말 평범하게 살아가지 않았을까?
”… 뭔가 슬퍼지네. 빛의 마법을 다룬다는 이유만으로 이렇게 모두가 다가온다는 게. 그에 비하면….”
“꼭 그런 것만은 아닐 거예요. 쿠로사와군은 누구에게나 좋은 사람이니까. 아다치군도… 그렇겠죠.”
미즈키는 쿠로사와가 느끼는 바에 대해 공감을 꽤 잘해 주는 편이었다. 소문이나 편견에 상관없이 아다치에게 도움받았던 것에 대해서도 늘 고마워했고, 지난번 쿠로사와를 위해 자신이 먼저 싫은 소리를 하기 전에 스스로 물러나 주었던 일이 꽤 감명깊게 남았던 모양이었다.
한편, 쿠로사와가 자신에게 특별한 감정이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는 인물이기도 했다. 본래 게임에서도 수동적인 태도를 지닌 것과는 달리 꽤 예민한 편이라 주인공의 사소한 대사 하나에도 반응이 달라지는 캐릭터였기에 당연한 일.
연회의 파트너가 된다면 무언가 달라질 거라는 기대라도 품었을지도 모르지만… 아마도 이쯤이면 그녀도 느꼈을 것이다. 쿠로사와는 애초에 이 연회를 즐길 생각조차 없다는 걸.
미즈키는 굳이 쿠로사와에게 많은 대화를 시도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편한 기색은 아니었고, 그저 소소하게 흐르는 시간을 묵묵히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쿠로사와 역시 그런 그녀에게 예의상으로나마 배려를 해 주었다. 우선은 자신을 불편하게 만들지 않기 위해 애써 준 것에 대한 보답이었고, 쿠로사와가 언제든 자리를 뜨더라도 잡지 않을 것임을 알기에 그에 대한 고마움에서 기인한 것이기도 했다.
연회는 시간이 갈수록 소란스러워진다. 밝은 분위기의 음악, 화려하고 맛있는 먹을거리와 음료, 다같이 화려하게 꾸미고 나온 자리인 만큼 평소보다 들뜬 마음에 좀 더 활동적으로 변하기도 했다. 물론, 그 안에 아다치는 해당되지 않았지만.
아다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이전에 잠깐이나마 대화를 나누었을 땐 산책로를 걷는다거나 테라스가 위치한 휴게 장소에서 불멍을 때리며 홀로 시간을 보낼 예정이라고 했었지.
지금은 모두들 한창 웃고 떠들며 놀고 있을 시간이기에 그곳을 찾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니까.
당장이라도 아다치를 찾아가고 싶은 마음을 꾹꾹 눌러삼키며 자신에게 흥미를 가지고 찾아온 마탑의 학회장이나 황실의 일원 등 저명한 이들을 상대하던 쿠로사와는 과거의 능력을 살려 훌륭하게 대처하고 있었다.
약속된 시간이 다가올 무렵, 점점 초조해진 쿠로사와는 아다치를 찾으러 갈 때가 됐음을 짐작했다.
미즈키 또한 쿠로사와가 간다고 하면 알아서 본인도 돌아가든가, 다른 히로인들과 놀러 갈 생각이었기에 별다른 반대는 하지 않았지만 묘하게 긴장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그의 모습이 의아하기도 했다.
그렇게 연회장을 나서기 위해 1층으로 향하던 둘은 당황스럽지 않을 수 없는 광경을 목격하고야 말았다.
기절한 상태의 여학생을 품에 안아 든 아다치가 경비원을 향해 무어라 짜증을 내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으니.
쿠로사와는 눈치챘다.
아, 이건… 아다치가 억울하게 죄를 뒤집어쓰게 되는 사건의 발단이 바로 이것이었구나.
아니나 다를까, 경악한 미즈키와 쿠로사와가 달려오자 경비원과 대치 중이던 아다치가 그들을 보며 안도하는 표정을 짓는다. 상식적으로 여학생에게 뭔 짓을 하려고 했었다면 이럴 수가 없었겠지.
아다치의 품에 안겨 있는 여학생은 안색이 창백하게 질린 채 축 늘어져 있었다. 죽지는 않았고, 정신을 놓지는 않은 듯하나 까딱하면 큰일이 날 수도 있는 상태였는데….
아마도 아다치에 대한 편견이 해소되지 않았다면 미즈키가 가장 먼저 그를 쓰레기 취급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일단은 쿠로사와도 같이 있고, 오해도 풀어진 상태이니 그녀 역시 침착하게 상황을 짚어 보고자 했다.
“너, 어둠의 마법사지? 마법으로 이 여학생을 위험에 빠뜨린 거 다 알고 있으니까 수작 부릴 생각 마.”
“아니라고요! 그런 적도 없고, 이 애가 갑자기 쓰러져서 데려온 것뿐이에요.”
“저기, 일단은 어떻게 된 일인지 아다치의 이야기를 들어 보죠. 아다치는 그런 짓을 할 사람이 아니니까.”
“…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아다치군은 지금까지 사람을 해치기 위한 목적으로 마법을 쓴 적도 없고, 뭔가 오해가 있을지도 몰라요.”
경비원의 경멸 어린 시비에 2차전이 발발하기 직전, 쿠로사와가 끼어들어 맥을 끊었다. 미즈키가 거들기까지 하니 경비원도 한층 기세가 누그러진 모습.
아다치의 사정은 이러하였다.
파트너도 없고, 어차피 자기가 끼어서 놀 자리도 아니니 휴게 장소에 짱박혀 있다가 심심해서 산책을 하던 도중에 벌어진 일이었다. 이 여자애가 피곤한 기색을 한 채 홀로 돌아다니고 있길래 괜한 오해가 생기는 건 싫어 그녀가 사라지길 기다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쓰러졌다.
화들짝 놀란 아다치가 반사적으로 다가가 확인해 보니 좀처럼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끙끙대기만 하는 모습, 어떻게 해야 하지? 짧은 순간에 수많은 생각이 교차했다.
그러다 결국 날도 추운데 이런 차림을 한 상태로 그냥 내버려 두면 얼어죽을까 봐 일단은 본인이 안아들고 건물 안으로 뛰어온 것이다.
그런데 경비원이 자신을 알아보자마자 의심하며 자꾸 가로막으니 그의 입장에선 답답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대로 놔두기엔 한 시가 아까운 위급한 상황인데.
“… 그렇게 된 거야. 사람이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까 뭔가 길게 생각할 여유가 없었고.”
“우연이라기엔 좀 작위적이지 않나? 저주라도 걸었겠지.“
”전 아다치를 믿습니다. 그는 타인을 해칠 이유도, 그럴 사람도 아니에요. 증거도 없이 함부로 의심하지 말고 빠지세요.“
경비원이 의심을 표할 때마다 쿠로사와는 가차없이 까칠하게 받아치며 그의 시비를 저지했다.
뭐, 예상했다는 듯한 아다치의 표정을 보아하니 본인도 어느 정도는 이런 오해를 받을 걸 각오했던 모양이지만…. 게임 내에서도 비슷했지만 그때는 그를 믿어 줄 사람이 없었던데다 여자애는 기절한 상태라 그의 변호를 해 줄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던 게 일이 커져 버렸던 거겠지.
결국 아다치가 억울하게 몰려 스스로 자취를 감췄고, 그 이후에야 오해가 풀렸다는 걸 보면 이 여자애가 회복해서 진실을 밝혔을 땐 이미 늦은 상황이었던 거다.
미즈키는 아다치가 안아들고 있는 여학생을 유심히 살펴보더니 한숨을 쉬며 침착하게 어떻게 된 일인지 정리했다.
“역시… 마법을 쓴 흔적은 없어요. 게다가 이건, 드레스 때문인 것 같네요. 코르셋을 무리하게 조인 탓에 흉통에 가해지는 압박이 심했던 모양이에요.“
쿠로사와는 안도감이 밀려옴과 동시에 상당히 빡쳤다.
사람이 죽을 위기에서 용기를 내 구해놨더니 돌아온 게 모든 이의 손가락질, 무고였다니. 그리고 이것이 파멸의 시작에 일조한 셈이니 모든 미래를 아는 쿠로사와로서는 화가 안 날 수가 없었다.
그는 그렇게 다혈질적인 성격은 아니었다. 그러나 게임 내에서 수없이 봤던 아다치의 절망, 그리고 그가 지독한 괴로움에 시달리는 것을 보며 함께 울었던 그 기억들이 이 일을 도저히 넘길 수 없도록 만들었다.
만약 타이밍이 엇갈려 아다치를 마주치지 못했다면? 그리고 때가 늦어 아다치가 꼼짝없이 없는 죄를 뒤집어쓰게 되었다면? 게다가 잠깐이라고는 해도 아다치는 분명 억울하게 매도당하는 중이었다. 그야말로 피가 거꾸로 치솟는 상황.
“당장 아다치에게 사과하세요. 아무런 사정도 모르면서 다짜고짜 의심부터 하고 몰아세우다니. 그는 하마터면 누명을 쓸 뻔했다고요.“
”… 쿠로사와….”
“하지만 어둠의 마법사잖아요? 그러니까 모르는 일이죠. 의심하는 게 당연-“
”당연하지 않습니다. 당신 말대로 어둠의 마법사라고 해서 나쁜 짓을 벌일 게 분명하다면 진작 그랬겠죠. 우리가 나타나기 전에 당신부터 모가지가 날아갔을 테니까! 아다치에겐 그럴 만한 힘이 있음에도 그쪽이 살아 있는 게 근거입니다.“
전례없이 분노하며 열변을 토하는 쿠로사와에 모두가 당황스러운 반응을 보였다. 피해를 입은 당사자인 아다치도, 미즈키도 어리둥절한 얼굴이 되었으며 아다치를 가로막고 그를 의심하던 경비원 역시 마찬가지였다.
당연히 이들도 자신처럼 생각할 거라 여겼을 테니. 그러나 다른 이들은 몰라도 쿠로사와 만큼은 절대 그럴 리가 없었고, 애초에 이 일을 대비해 사건이 벌어지기 전에 막을 심산이었던 만큼 그냥 넘길 생각 또한 없었다.
늘 부드럽던 평소와 달리 무섭게 돌변해 경비원을 몰아붙이는 쿠로사와, 오죽했으면 아다치가 진정하라고 그를 말릴 정도였다.
“쿠로사와, 일단은… 이 애, 상태가 많이 안 좋아 보이니까 먼저 안전한 곳에 옮기자.”
“그래요, 이것부터 해결해요.”
둘이 함께 뜯어 말리자 다소 진정한 쿠로사와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가 득득 갈리는 기분이었다. 이때의 사건으로 인해 아다치가 얼마나 괴로워했던가?
지금은 환자가 있으니 어쩔 수 없지만 나중에라도 저 새낀 반드시 가만두지 않으리란 생각으로 한 수 접어 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끝까지 사과는 안 하는 것 봐라.
“가만히 입 다문다고 그냥 넘어갈 거라 생각한다면 오산입니다.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해 주겠어.”
네놈은 괘씸죄 추가다….
마지막까지 으르렁대는 쿠로사와의 기세에 눌렸는지 경비원은 겁에 질린 표정으로 위축되어 있을 뿐이었다.
여학생의 처우는 미즈키에게 맡기기로 했다. 남자인 두 사람이 뭘 도울 수 있는 것도 없을 거고, 옮겨다 놓은 것만으로도 할 일은 다 했을뿐더러 뭐 또 거들 일이 없나 멀뚱멀뚱 서 있는 두 사람을 보고는 됐으니까 꺼지라는 뉘앙스로 내쫓는 미즈키에 의해 자연스레 쫓겨난 상황.
두 사람은 그제서야 서로를 향해 미소를 지어 보일 수 있었다. 그리고 파멸 플래그는 완벽하게 분쇄.
경비원이 앙심을 품고 일을 키운다고 해도 아다치로서는 자신의 결백을 증명할 수 있는 완전한 증인을 두 명이나 확보했으니 걱정될 일도 없다.
두 사람은 그 길로 연회장을 빠져나왔다. 한 차례 태풍이 지나간 듯한 느낌이지만 그래도 잘 지나갔으니 후련한 것은 당연했고, 아다치의 파멸을 막았다는 사실에 쿠로사와는 그동안의 긴장감이 모두 풀려 하마터면 주저앉을 뻔했다.
그런 그의 속을 알 리가 없던 아다치는 그저 꿋꿋하게 자신을 믿어 주고 결백을 밝혀 준 쿠로사와에게 무한한 감사를 느끼고 있었다. 쿠로사와가 없었다면 아마도….
“… 쿠로사와, 정말 고마워. 또 이렇게 날 구해 주고…. 그리고 믿어 줘서 굉장히 기뻤어.”
”난 아다치가 억울한 일을 겪는 게 싫었을뿐이야. 좋은 일을 했는데도 의심을 받는 건 옳지 않은 일이잖아?“
”그건… 그렇지만. 난 원래부터 이미지가 좋지 않아서. 쿠로사와가 아니었다면 분명 곤란해졌겠지.“
쿠로사와는 살며시 아다치의 손에 깍지를 끼었다. 조금 흠칫하는 움직임이 있긴 했지만 거부는 하지 않는 아다치, 이내 느릿느릿 맞잡아오는 이 움직임이 사랑스럽다.
아마도 아다치에겐 살면서 같은 동성과 이런 스킨십을 할 일 따윈 없었을 것이다. 모든 것이 생소한 상황에서 거부를 표하지 않는다는 건 그동안 해 왔던 쿠로사와의 노력은 헛된 것이 아니라는 증거였다.
“저기, 아다치. 괜찮다면 오늘… 내 방에서 자고 가지 않을래? 조금 있으면 한밤중이 될 테니까.“
”아, 뭐…. 응. 오늘은 함께 있기로 했고.“
머뭇거리면서도 끄덕이는 이 모습이 얼마나 귀여운지 본인은 모르고 있다는 게 답답할 따름이다.
아다치는 과연 쿨톤일까, 웜톤일까? 아니면 내가 평생 완주하지 못 할 사랑의 마라톤? 아니면 내 인생에 뛰어든 행복 일 톤이려나? 아니면 내 인생의 달달한 메가톤?
의식의 흐름에 이끌려 설레는 마음을 주접으로 풀어내는 중인 쿠로사와, 그의 모습은 마치 누구나 설렐 정도로 그림 같았지만 속내는 전혀 딴판이었다.
***
쿠로사와의 기숙사로 향한 두 사람은 정말 오랜만에 평화로운 시간을 즐겼다.
아무도 방해하지 않고, 아무도 안 좋은 시선을 보낼 일이 없는 그런 평화로운 시간. 둘은 함께 핫초코를 마시며 달콤한 딸기케이크를 먹었다.
디너 타임에 아다치는 내내 다른 곳에 있었기에 끼니를 굶지는 않은 걸까 걱정은 했었지만 그게 무색하게도 선물받은 주먹밥을 맛있게 먹고, 함께 받은 과자를 주워 먹었더니 배고프지는 않다는 말에 쿠로사와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선물을 줬다고? 누가?
“아, 그게… 하나비가 주고 갔었어. 그동안 미안했었다고. 연회에 오지 않을 거라면 받아 두라고 해서….“
”그랬구나…. 다행이네, 아다치를 좋아하는 사람이 나 이외에도 늘어난 모양이야.“
히로인들도 본성은 착하다. 게임 내에선 아다치를 싫어하는 모습만 보여서 그렇지, 기본적으로는 상냥하다.
오늘 미즈키가 아다치를 도와준 것처럼 하나비 역시 나름대로 아다치를 생각해 주었기에 몰래 배려해 준 거겠지. 하지만 자신이 미처 챙기지 못한 부분이 있었단 사실에 조금 우울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나… 실은 좀 여러 가지 생각을 하고 있었거든. 어차피 모두에게 미움받을 수밖에 없고,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하는 삶이라면…. 이대로 살아가는 게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까 하고. 존재 자체가 모두에게 재앙이라고 했으니까.“
”절대 그렇지 않아. 아다치도 알고 있잖아? 마법은 사용하기 나름이니까. 게다가… 넌 재앙 같은 게 아냐.“
”… 이렇게 말해 주는 쿠로사와도 있고, 쿠로사와 덕분에 많은 게 달라졌다고 할까…. 정말 많은 위로가 됐거든. 날 지지해 주는 사람이 생겼다는 것만으로도.“
아다치는 다시 수줍게 웃어 보였다.
쿠로사와로 인해 스스로를 갉아먹는 비난에서 조금은 용기를 얻었고, 누군가와 교류하는 것이 즐거운 일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흑마법을 쓴다고 해서 자신 또한 반드시 악이 아니라는 당연한 사실을 깨닫게 해 준 사람도 그였으니.
덕분에 아다치는 자신의 마법적 속성과 인격을 분리해서 생각하는 법을 깨우쳤다. 그것만으로도 자신에게 향하는 비난에서 오는 상처가 크게 줄었으니 굉장한 일.
두 사람은 어두운 방 안에서 침대에 나란히 앉아 찬란하게 밤을 밝히는 달빛을 함께 구경 중이었다. 이런 맑은 하늘을 볼 때면 쿠로사와는 늘 이런 생각을 한다. 이전에 살던 도쿄에 비하면 이런 건 참 좋다고. 선명한 달빛, 별빛은 그 전까진 구경하기 힘들었으니.
자신의 뒤를 이어 목욕을 마치고 뽀송한 상태로 수줍게 등장한 아다치가 보이자마자 쿠로사와는 심장이 멎을 뻔했다. 미칠듯한 두근거림을 참아내며 그와 함께 감상하는 밤하늘이라, 혼자 볼 때는 몰랐지만 이보다 로맨틱한 일이 또 있을까 싶은 순간이었다.
그리고 잔잔하게 귓가로 스며드는 아다치의 목소리를 듣던 쿠로사와는 언제나 그렇듯 다정하게 대답해 주었다.
“그건 전부 아다치 스스로의 능력이야. 난 운이 좋게 아다치의 그런 면모를 발견하고 호감을 가진 것뿐이니까. 나야말로 빛을 다룬다는 것 말고는 아무런 특이점도 없는데 말이야.“
”그렇지 않아. 쿠로사와는… 누구라도 좋아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빛이라는 능력이 아니었더라도.“
”… 어째서?“
”그거야… 당연하지 않을까. 쿠로사와가 내 장점을 찾아 주고, 그걸 알게 도와준 것처럼. 쿠로사와는 언제나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기꺼이 노력해 주고, 웃음을 짓게 만들어 줘. 마치 햇살 같이 말이야. 네게 닿으면 아무리 어두운 것들이라도 밝게 빛나거든. 그건 마법만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냐.”
쿠로사와의 마음이 먹먹해지기 시작했다.
이 세계에 오기 전에도, 후에도 그의 주변에 가득했던 사람들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을까? 생각해 보면 한 명, 한 명 얼굴은 기억나지 않더라도 모두 웃음을 띄우고 있었던 것만큼은 같았다. 그들이 짓는 웃음에 별다른 의미를 느낀 적은 없었는데… 아다치의 말을 듣는 순간 어쩐지 아주 중요한 것들을 놓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세상을 너무 삐딱하게 바라보고 있던 것은 쿠로사와 유이치 본인일지도 모른다고. 그들의 웃음을 그저 자신의 외적인 부분만 바라본 결과라며, 멋대로 가볍게 치부해 버렸던 것이다. 자신이 아다치에게 그랬던 것처럼 그들도 생각보다 쿠로사와의 많은 것을 보고 다가온 것일지도 모르는데.
‘네게 닿으면 아무리 어두운 것들이라도 빛나거든.’ 아다치는 그들의 웃음 지은 얼굴에서 쿠로사와가 놓친 많은 것들을 봐 왔던 걸지도 몰랐다.
너는 또 다시 내게 깊은 위로를 주는구나. 아다치는 또 다시 쿠로사와의 안식처가 되어 주었고, 지금까지 그에게 수도 없이 반해 왔을 쿠로사와는 다시 한 번 격렬한 설렘에 휘말리고 말았다.
“나는 쿠로사와를 보며 항상 대단하다고 느꼈으니까. 늘 생기가 가득하고, 따스한 낮이라는 생각이 들었어.“
아다치는 그렇게 말하며 반짝거리는 눈망울로 쿠로사와를 바라보았다. 밤의 어두운 장막이 내려앉았음에도 별빛보다 더욱 선명하게 반짝인다. 그럼에도 너무나도 깊고 새카만, 그러면서도 맑은 눈동자에서 쿠로사와는 도저히 시선을 돌릴 수가 없었다.
아, 뭔가 위험한 느낌. 도저히 헤어나올 수 없을 것만 같은 기분. 쿠로사와는 마치 자신이 최면에라도 걸린 듯했다. 실제로 눈앞의 아다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도.
“… 뭔가 아이러니하네. 나는 밤을 더 좋아해. 낮에 열심히 활동을 하고, 지친 몸을 뉘일 수 있는 유일한 때니까. 휴식이라고 할까, 어쩐지 해방되는 느낌.“
“그랬구나. 그런 시각은 신선하네. 보통은 밤은 위험하다거나 불길하다고 해서 싫어하는 사람이 많을 텐데.“
본인도 모르게 귀여운 웃음을 지으며 쿠로사와의 말에 맞장구를 치는 아다치, 쿠로사와는 그런 그의 모습을 시야에 가득 담으며 대답했다. 손을 뻗어 그의 머리칼을, 또는 뺨을 어루만지고 싶은 마음을 꾹 참으면서.
“낮이 지나면 밤이 오는 건 그런 의미겠지. 지쳐 있을 때 마음껏 휴식을 취하기 위해 꼭 필요한 시간. 내게 있어서 아다치는 그런 존재야. 어쩌면 모두에게도.“
”… 그런가?“
”조금 어렵지만…. 글쎄, 나는 그런 의미로 어둠을 좋아하니까. 그래서 아다치를 좋아할 수밖에 없는 걸지도 모르겠어.”
이번에는 보다 명백한 의미가 담긴 문장이었다. 아다치 역시도 쿠로사와가 어떤 말을 하고 싶은 건지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다시 마주쳤지만 누구 한 명 피하지 않은 채로 눈빛의 교환은 꽤나 길게 이어졌다.
고요한 적막 속, 스스로의 심장이 동요하는 것을 느끼며 달빛이 훑고 가는 서로의 모습만을 오래도록 바라보고 있었다.
쿠로사와는 자신도 모르게 점점 아다치에게 가까워지고 있었다. 조금씩 떨려오는 그의 눈빛, 그러나 물러나지는 않는 모습에 두 사람의 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가까웠다.
미약하게 피부에 닿아 오는 서로의 따뜻한 숨결, 그리고 좋은 향기가 코끝에 스며들 때 즈음에 쿠로사와는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고백했다.
“… 난, 아다치를 좀 더 알아가고 싶어. 더 가까워져서, 너에게 닿고 싶었어.”
“쿠로사와….”
더 이상은 참을 수 없었다. 깊게 내려앉은 어둠 속에서 선명하게 들려오는 그의 고백은 아다치의 심장을 뒤흔들기 시작했고, 자신도 모르게 쿠로사와의 옷자락을 부여잡은 그의 손길이 떨리고 있었다.
어쩌면 동성이냐 아니냐는 이제 와서 크게 중요한 사실이 아닐지도 몰랐다. 누군가 가르쳐 준 사람이 없었음에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으니까. 그리고 아다치는 대답했다.
“나, 나도, 쿠로사와에게… 닿고 싶어. 좀 더….”
달빛에 비춰진 두 사람의 실루엣이 완전하게 겹쳐졌다.
조금의 틈도 허락하지 않을 것처럼, 서늘한 밤공기에도 홧홧하게 달아오르는 열기가 퍼지기 시작하며 둘은 점점 더 깊게 서로에게 빠져들었다.
조금은 질척한 마찰음과 함께 이어지는 첫 키스는 달콤함을 느낄 새도 없이 짜릿하기만 했고, 그 중독적인 느낌에 모든 것을 잊은 채 서로를 부여잡고 필사적으로 껴안으며 점점 거칠어지는 호흡을 교환하기도 했다.
이건 꿈일까, 너무나도 자극적이고 행복한 그런 꿈이 아닐까…. 쿠로사와는 주체할 수 없는 흥분이라는 것이 이런 기분이라는 사실을 새로이 깨닫게 된 건지도 몰랐다.
자신에게 안겨 몇 번이고, 깊고 진득한 입맞춤을 받아들여 주는 아다치의 존재가 믿기지 않아서. 그리고 이 사랑스러움을 참을 수가 없어 더욱 집요하게 탐할 수밖에 없었다.
어느새 두 사람은 서로의 몸을 겹친 채 침대에 누워 그 어느 때보다도 적나라하게 온기를 교환하고 있었다.
쿠로사와의 손길이 닿는 족족 아다치는 나른한 듯한 신음을 맞닿아 있는 입술 새로 흘렸고, 그것은 더욱 깊은 관계로 이어지는 신호탄과도 같았다.
터질듯이 뛰는 심장, 쿠로사와의 손이 다소 조급하게 아다치의 옷깃을 헤치고 그의 살결을 어루만지는 동안 쿠로사와는 아다치에게 온전히 자신의 마음을 담아 속삭였다.
“아다치, 진심으로… 좋아하고 있었어.”, “이젠 놓치지 않아.” 이런 속삭임이 계속되는 동안 아다치는 대답해 줄 수조차 없었다. 한마디 한마디가 엄청나게 심장을 흔들어댔으니까.
그저 스스로도 민망한 신음만을 흘리며 절로 몸이 움찔거렸고, 떨리는 손으로 쿠로사와의 어깨를 부여잡으며 간신히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것이 고작이었다.
“… 나, 나도… 쿠로사와가… 좋아.”
그 후로는 이성 따윈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아다치는 쿠로사와가 자신의 옷을 풀어헤치고 드러난 맨몸 곳곳에 키스를 남길 때마다 머릿속이 하얘지는 기분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고, 쿠로사와는 자신의 마음을 받아들인 이 사랑스러운 존재를 그냥 놔둘 생각이 없었다. 그럴 정신도 없었고.
몇 번이고 키스를 주고받으면서도 아다치의 목덜미, 쇄골, 그리고 가슴팍과 배, 옆구리 등 하얗던 그의 살결이 쿠로사와의 흔적으로 물들어가는 동안 아다치는 경험해 보지 못했던 흥분이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부끄러워서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쿠로사와에게 안기는 것이 너무나도 뜨겁고 두근거려서, 그의 손길이 살결에 닿는 것이 너무나도 기분 좋아서, 누구에게도 드러낸 적 없었던 속살이 그에게 보여지는 것이 너무도 자극적이었고, 그의 입맞춤이 온몸을 지나는 것이 너무나도 짜릿했던 탓이었다.
감당하기 힘든 흥분감과 부끄러움에 잠깐이나마 숨을 돌리며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물기가 어린 채 떨리는 중인 눈빛을 한 아다치를 발견하고 나서야 쿠로사와는 조금이나마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리고 몰려드는 자괴감, 그를 향한 죄책감.
난 정말 구제불능인 쓰레기구나…. 마음을 받아 주었다고 해서 바로 덮쳐 버리기나 하고, 갑작스러운 자신의 급발진에 아다치가 겁먹기라도 한다면 정말 끔찍한 일이 되겠지.
아다치에게 있어서 애정, 그리고 사랑이란 한 번도 경험해 보지 않았던 미지의 세계 그 자체다. 그를 향한 마음에 눈이 멀어 성욕에 지배당한 채 밀어붙인다면 분명 좋지 않은 기억을 남길지도 몰랐다. 그런 이기적인 사랑은 쿠로사와 스스로도 원했던 바가 아니었고.
“정말 미안해, 아다치. 내 마음을 네가 받아 주었다는 사실이 너무 기뻐서… 나도 모르게 거칠어져 버렸네. 많이 놀랐을 것 같아.”
“… 어? 어어, 그게… 난…. 멀쩡해! 괜찮아. 이런 건 처음이니까 조금 놀라긴 했지만… 아무튼 괜찮아.”
격렬해진 심장의 박동이 좀처럼 잦아들지를 않는다. 그것은 쿠로사와도, 아다치도 그러했다.
그러나 쿠로사와는 불쑥불쑥 들이미는 욕심을 필사적으로 억눌렀다. 이렇게나 맑은 눈으로 자신만을 바라보는 아다치를… 드디어 닿을 수 있게 된 그를 최대한으로 소중하게 아껴 주고 싶었다. 차근차근 그에게 충분히 사랑을 준 뒤에 아프지 않도록, 좀 더 편한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쿠로사와는 형편없이 흐트러진 아다치의 옷매무새를 조심스럽게 다시 정리해 주었다. 실컷 탐한 것 같은데도 여전히 치솟는 갈증에 손끝이 떨려왔지만 참았다.
아다치는 다소 얼떨떨한 표정이긴 했으나 쿠로사와의 행동에 의문을 품지는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럴 새도 없었다. 쿠로사와가 또 다시 뺨이며 이마에, 그리고 입술에 수차례 뽀뽀를 남겨댔기 때문.
“널 어쩌면 좋지. 정말로 사랑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어.”
“내가? 난… 딱히 아무것도….“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이미 아다치의 모든 것이 좋으니까. 귀여워.“
아다치가 우는 듯한 소리를 내며 두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려 버렸다. 터질 듯이 밀려오는 부끄러움에 더는 견딜 수가 없어졌으니까. 쿠로사와에게서 듣는 애정 어린 달콤한 말 하나하나가 묵직하게 심장을 후드려패고 있었다.
“… 귀엽다거나, 사랑스럽다거나…. 이런 말 들어 본 적도 없어서. 뭔가 기분이 이상해.”
“앞으로는 익숙해질 거야. 내게 있어서 아다치는 정말로 그런 사람이니까. 귀엽고, 사랑스럽고. 정말로 좋아해.”
악, 쿠로사와! 이제 그만! 아다치는 속으로 비명을 지르는 중이었다. 도무지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밀려오는 설레는 가슴에 제대로 된 생각조차 하기 힘든 상황.
이미 과부하가 걸려 버린 아다치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쿠로사와는 그 어느 때보다도 환하게 웃으며 그를 꼬옥 끌어안고 누워 버릴 뿐이었다.
언제나 그렇듯 쿠로사와의 품은 온기가 가득하면서도 단단한 안정감이 있었지만 오늘은 어쩐지 평소보다 더 뜨거운 느낌. 아다치는 조용히 심호흡을 하며 느릿느릿한 손길로 그를 마주안는다. 그런 조심스러운 화답이 쿠로사와를 얼마나 벅차게 만드는지도 모르고.
“… 저기, 쿠로사와?”
“응, 아다치.”
“그, 우리… 이렇게 되면… 그거지? 그러니까-”
“응! 이제부터는 연인이네. 아다치와 나는 연애를 시작하게 된 거니까.”
연애… 쿠로사와랑 내가…. 쿠로사와를 마주안은 아다치의 손에 힘이 실리며 그의 등짝을 부여잡는다. 차마 대답하기엔 또 다시 치솟는 부끄러움. 아예 쿠로사와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어 버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해 버리는 아다치의 몸짓에 쿠로사와 역시도 조용히 입술을 깨물며 벅차오르는 가슴을 꾹꾹 누르기 바쁠 지경이었다.
아다치를 알게 되고, 그에게 빠져들었던 시간이 무려 7년. 그동안의 아다치는 불러도 들을 수 없고, 손을 뻗어도 닿을 수 없는 그런 존재였다. 언제나 쿠로사와의 컴퓨터 안에, 스마트폰 안에, 그리고 게임 안에서만 있는 캐릭터.
하지만 지금의 아다치는 그렇지 않았다. 쿠로사와가 그의 이름을 부르면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돌아보았으며 자신의 마음을 전하면 기꺼이 받아들여 주는 등 일방적이 아닌 쌍방의 상호작용이 가능한 한 명의 사람. 그리고 연인이다.
이곳에 전생한 것을 넘어 더욱 커다란 기적이 일어났다.
그리고 마지막 기적의 마무리는 쿠로사와 유이치 자신의 손으로 이루어야 할 숙명, 자신이 있는 한 아다치는 절대로 죽지 않을 것이다.
마치아카 쿠로아다 동정마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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