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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2.25 00:58
망천화처럼 이연화 해독할 수 있는 약초가 있는데, 형질을 바꾸는 부작용이 있어서 떨떠름해하던 이연화와 그런 게 뭐가 중하냐 하던 주변사람들이 우당탕하는 게 보고싶다로 시작했던 거 2부
본편 이후 시점으로 ㅅㅍㅈㅇ 다병연화 비성연화
버려진 사당에서 귀장이 열리기 전까지, 세 사람은 잠시 계곡의 숲에 매복하여 어떤 이들이 들고 나는지 지켜보았다. 눈에 띄지 않는 흑색이나 회색 옷을 걸친 사람들이 연신 왔다갔다하며 물건을 나르거나 등불을 달았다. 좁은 길에 조그만 빛이 총총 달린 모양새가, 마치 깊은 산속에서 마주친 도깨비불처럼 보이기도 했다. 어스름한 저녁 시간이 되자 사당의 문이 열렸고, 그 앞에 두 남자가 선 채 방문객들의 통행증을 검사하기 시작했다. 이연화는 방다병과 함께 가면을 쓴 채 귀장으로 접근했다. 적비성은 언제 사라졌는지 보이지 않았다.
대문을 지키던 두 남자는, 방다병의 목패를 보자 별다른 말 없이 고갯짓했다. 장소가 암시장인 만큼, 가면을 쓴 손님 따위야 그리 새로울 것도 없다는 태도였다. 방다병은 어깨에 힘이 들어간 공자 행세를 하면서 발을 옮겼고, 이연화는 수행원인 척 그 곁에 가까이 붙어서는 안으로 들어갔다. 그 시선이 두 남자의 목덜미에 새겨진 작은 비수 문신을 스쳤다.
입구의 허름하다 못해 을씨년스러운 분위기와 달리, 사당 내부는 일반적인 시장처럼 활달한 기류를 띠었다. 좌판에 물건을 펼친 상인들뿐 아니라, 간식이며 술을 팔거나 방문객들에게 점을 봐주는 사람들도 보였다. 방다병이 어리둥절한 눈으로 장내를 훑었다.
"의외네. 불법적인 암시장이라기에 좀 더...은밀한 느낌일 줄 알았는데."
"음. 돈 많으신 공자님들까지 끌어들여 매출을 올리는 곳이잖아. 너무 불법적으로 보여도 곤란하지. 최대한 즐겁고 일상적인 느낌을 줘야 처음 오는 사람들도 안심하지 않겠어. 만에 하나 관아에서 기습하더라도 둘러댈 말이 있고."
이연화가 고개를 까딱하며 읊었다. 좌판들에는 여러 가지 이유로 쉽게 볼 수 없는 물건들이 즐비했다. 여러 사람들에게서 털어온 장물 골동품이나 장신구부터, 수입이 까다로워 좀처럼 사기 어려운 이국의 약재, 절도에 필요한 전문 장비와 무기들, 위험성이 높다는 이유로 시중 판매가 금지된 무공서와 사술 비급 따위가 뒤섞여 있었다. 아무래도 흉흉한 분위기를 띤 사람들은 후자에 많이 몰렸고, 부잣집 도련님이나 아가씨 같은 이들은 전자에 흥미를 보였다. 심각한 눈으로 좌판을 살피던 이연화가 넌지시 말했다.
"여긴 암시장 중에서도 꽤 수준이 높아. 쉽게 구할 수 없는 물건들을 모아 뒀어."
"그렇다는 건, 이 암시장과 연결된 범죄자들이 많다는 얘기네."
"귀장을 운영하는 건 생각보다 큰 조직일 수도 있겠어. 저기가 우리 목적지 같은데, 신중하게 움직이자고."
이연화가 시장 한편의 작은 좌판을 향해 가볍게 턱짓했다. 좌판 위에는 여러 첩의 약들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뚜껑이 열린 작은 상자도 몇 개 보였는데, 그 안에 놓인 환들이 까만 빛을 발했다. 약의 이름이나 효능 따위는 전혀 쓰여 있지 않았다. 좌판을 지키던 사람은 장년에서 노년으로 넘어가는 작은 체구의 남자였다. 길고 가느다란 수염을 지닌 남자는 자리에 앉아 약재를 조합하다가,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가끔씩 원하는 약이 있으면 얘기해보라 건네기도 했다. 너무나 평범한 의원 같은 모습에, 방다병이 미간을 살짝 좁혔다.
"설마, 저 자가 심악일까? 너무...."
"평범한 겉모습만으로 정체를 판단할 수는 없지. 일단 가서 봐야 할 텐데, 너무 저길 노리고 온 분위기를 풍기지 않는 편이 좋겠어. 만에 하나라도 저 자가 심악이라면, 분명 금원맹의 추적을 경계하고 있을 거야."
"일리 있네. 그럼 저 옆에 먼저 들르자."
방다병이 수상한 약방 옆의 가게를 가리켰다. 역시 수상한 부적 따위를 파는 좌판이었다. 이연화가 고개를 끄덕하자, 방다병은 괜히 헛기침을 하고는 과시적인 걸음으로 부적 가게를 향했다. 좌판을 관리하던 여자가 반색하며 손짓했다.
"공자님, 와서 한 번 보세요. 원하시는 건 뭐든 이뤄주는 부적들입니다. 재물운, 연애운, 건강운, 원하는 걸 말씀해 보세요."
"부적이라니, 그런 건 미신이 아니오? 뭐 그렇게 특별한 효험이 있소?"
방다병이 뚱하게 의심하듯 이야기하자, 여자가 좌판을 가리키며 목소리를 높였다. 주로 붉은빛이나 금빛 천으로 만들어진 주머니들 옆에, 여러 종류의 부적들이 늘어서 있었다. "몰라서 하시는 말씀이에요. 제 부적의 효험을 본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요! 십 년이나 아이를 못 가지다가 회임하게 된 부인도 있고, 짝사랑하던 사람과 두 달만에 결혼하게 된 낭자도 있답니다. 다 죽어가던 사람이 영험한 힘으로 되살아난 적도 있다고요!" 영 믿기 어려운 말들을 들으며, 이연화는 내심 웃음을 삼켰다. 되도 않는 소리로 여러 종류의 약들을 팔던 자신이 떠오른 탓이었다.
"짝사랑하던 사람과 두 달만에 결혼한 사람이 있다고? 정말이오?"
방다병이 관심 있는 척 물었다. 여자가 열정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그 남자가 자기 쪽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는다고 펑펑 울었는데, 얼마 후에 결혼한 걸 보고 저조차 놀랐지 뭡니까. 공자님도 이루어지길 바라는 사랑이 있으신가 보지요?" 여자의 물음에, 방다병은 대답 대신 머쓱한 헛기침과 함께 고개를 돌렸다. 이연화가 미간을 살짝 좁힌 채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얘 지금 연기하는 거야, 아니야? 하지만 어느 쪽이든, 자신이 할 역할은 변하지 않았다. 목을 가다듬고, 이연화는 난처해하는 수행원의 말투를 능청스레 만들어냈다.
"도련님, 설마 그 낭자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안 된다니까요, 그 낭자는 이미 정혼한 사람도 있는데-."
"시끄러워, 네가 뭘 알아."
방다병이 짐짓 퉁명스레 대꾸했다. '도련님'을 향해 뭐라 더 타박하려던 때, 이연화의 눈으로 익숙한 인영이 들어왔다. 통행증을 갖지는 않았으나, 이 자리에 있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이연화가 간곡히 말했다.
"분명히 말씀드렸습니다. 저는 잠시 뒷간에 다녀올 테니, 그 사이에 이상한 거 사시면 안 돼요. 마님께 여기 왔다는 사실만 들켜도 경을 칠 텐데-."
"알았어, 알았으니까 얼른 다녀와."
방다병이 잔소리를 피하는 도련님처럼 휘휘 손짓했다. 크게 한숨을 쉰 이연화는, 곁눈으로 잠깐 약방 주인의 손을 살피고는 얼른 발을 옮겼다. 적비성은 귀장 구석의 그늘에 비스듬히 선 채 팔짱을 끼고 있었다. 큰 체격의 남자가 대도를 지고 서 있음에도, 그 기척이 마치 산의 바위처럼 잠잠했다. 이연화가 그 옆으로 미끄러지듯 다가가 물었다.
"뭐 좀 알아냈어?"
"혹시 달리 약을 파는 자가 있을까 싶어, 상인들에게 확인해 봤다. 귀장에 항상 좌판을 펴는 약방은 저기 하나라더군."
적비성이 방다병 근처를 턱짓했다. 이연화의 눈이 슬쩍 가늘어졌다.
"저 사람이 심악이든 아니든, 심악과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높아. 다루는 약재들이 아무래도 수상해. 시장 의원들이 통상 쓰는 종류가 아니야."
"장이 파한 다음 저 자의 뒤를 밟아보면 그만이다. 심악을 바로 만나면 가장 좋겠지만, 설령 아니라도 다른 단서를 찾을 수 있겠지."
음. 고개를 끄덕이던 이연화의 눈이 이상해졌다. 금방 떠나리라고 생각했던 것과 달리, 방다병은 부적들을 찬찬히 훑어보다가 어떤 물건을 하나 골랐다. 상인에게 뭐라 질문까지 하는 모습이 퍽 진지했다. 이연화가 어이없게 중얼거렸다. "아니, 저걸 왜 사? 관심만 보이면 되지, 살 필요는 없는데. 이런 곳에서 파는 물건들이 저렴할 리도 없고." 적비성이 코웃음을 쳤다. 두 남자의 반응을 알 길 없이, 방다병은 빨간 비단 주머니에 든 부적을 소중히 품에 넣었다. 단지 연기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성실한 태도였다. 의심스러운 눈으로 방다병을 응시하며, 이연화가 팔짱을 낀 채 말했다.
"저 녀석, 오늘 좀 이상하지 않아? 아침부터 자꾸 정신이 딴 데 팔린 것 같단 말이지."
"난 덜 시끄러워서 차라리 낫던데."
적비성이 비웃듯이 대꾸했다. 이연화는 그 태도에 신경 쓰지 않고 고개를 갸웃했다.
"어제 약을 잘못 먹은 영향이 아직 남았나? 있다 확인해 보고, 맥이 이상하면 내력을 넣어줘야겠어."
"됐다. 내게 아무 영향도 주지 못했으니, 그리 강한 약은 아니었을 거야. 기껏해야 네게 혼자 음심이라도 느끼고 기함한 거겠지."
적비성이 이죽거리듯 꺼낸 말에, 이연화는 그만 사레가 들려 기침을 한 차례 뱉었다. 십 년 동안 꽤 뻔뻔해졌다고 자부했으나, 금원맹주가 타의 없이 툭툭 내뱉는 거친 언사에는 아직도 가끔 당황할 때가 있었다. 이연화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적비성을 흘겨보았다.
"너는 진짜...말 좀 가려서 해. 음심은 무슨 음심이야. 방다병을 모함하지 마."
"모함이라니, 그게 뭐 별일이라고. 각인한 사람과 한 침상에서 자는데 욕정하지 않는 게 이상하지."
적비성이 당당하게 말했다. 오히려 이연화나 방다병이 퍽 유난을 떤다고 핀잔을 주는 듯한 투였다. 이연화의 눈썹이 높이 올라갔다.
"그럼 뭐, 너도 그런 적이 있어?"
"당연하지 않나? 너도 마찬가지일 텐데."
"아니거든."
이연화가 반사적으로 부정하며 고개를 돌렸다. 짐짓 태연한 옆모습을 유심히 바라보던 적비성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이럴 때에는 거짓말이 능숙하지 않군." 놀리는 듯한 말에, 이연화가 상대를 가리키며 경고처럼 건넸다. 가끔씩 치미는 성욕이 자연스러운 현상이란 것쯤은 알고 있었으나, 당사자 중 하나와 그에 관한 대화를 나누고 싶지는 않았다.
"너, 그렇다고 자다가 이상하게 건드리지 마. 그럼 각인통이고 뭐고 내쫓아버릴 테니까."
"네가 다시 부주의하게 당하지 않는 한, 내가 네게 정사를 강제할 일은 없다. 네 명이 걸린 일이라면 망설이지 않을 테니, 알아서 조심해."
이번에는 적비성이 경고하듯 건넸다. "알았어, 알았어." 이연화는 평소처럼 대충 한 손을 내저으며 대꾸하고, 어느새 약방 좌판으로 이동한 방다병을 향해 총총 걸어갔다. 뒤통수에 빤히 박힌 시선이 따가웠다. 이연화가 어깨를 한 차례 으쓱했다. 그는 자신의 눈에 가장 빠르고 효율적인 길을 택할 뿐, 순전히 무모하게 굴고 싶어 위험을 감수하는 것이 아니었다. 많은 이들이 오해하는 부분이었으나 그리 설명해봐야 말다툼만 벌일 듯했기에, 이연화는 잰걸음으로 방다병에게 다가가 물었다.
"도련님. 이번엔 뭘 보고 계십니까?"
"아, 이 주인장이 신묘한 약들을 팔고 있다기에."
"신묘한 약들이요? 원하시면 명의의 약을 살 수 있는데, 왜 이런 데서 돈을 쓰시려는 거예요."
"명의라고 해도 세상의 약들을 모두 알지 못하는데, 어찌 그리 견문이 좁게 굴어? 그럼 주인장, 고맙소. 나중에 또 봅시다."
방다병이 남자를 향해 건넸다. 의원이 얼른 고개를 숙이며 웃었다. "아이고, 예. 감사합니다, 공자님." 방다병에게 받은 돈주머니가 그 손에 들려 있었다. 남자는 곧 좌판 뒤쪽에서 약 찌꺼기 따위를 모아 정리하던 일꾼 노인에게 돈주머니를 건넸다. "큰 돈이니 잘 넣어둬." 남자의 지시에, 노인은 허리를 꾸벅 숙이고는 작은 상자 안에 돈을 넣었다. 이연화가 짐짓 한탄하는 얼굴로 돌아보았다.
"도련님, 또 뭘 사신 거예요. 돈을 함부로 쓰지 마시라고 마님께서도-."
"됐어, 이미 끝난 일이야. 어서 가자."
방다병이 거만하게 손짓했다. 저 녀석, 이런 버릇없는 도련님 행세가 썩 어울리네. 하긴 처음 봤을 때에는 딱 그런 인상이었지. 이연화가 내심 픽 웃으며 그 뒤를 따랐다. "그래서, 도련님. 거금을 쓰며 뭘 알아내셨습니까?" 농담처럼 건네자, 방다병이 앞머리를 휙 넘기고는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그 손에는 환이 담긴 상자가 하나 들려 있었다.
"일단 저 자의 약을 샀어. 내가 부적 파는 사람과 했던 대화를 들은 탓인지, 내게 필요한 약이 있다며 추천해 주더라고. 효능을 들어보니 딱 신 공자가 썼던 약 같아서, 자세한 용법과 주의사항을 설명해 달라고 했지. 그랬더니 뭐라고 했게?"
"음. 약이 녹을 때 배꽃 냄새가 진하게 날 테니, 그걸 숨길 수 있는 술이나 음식에 타라고 했어?"
이연화가 천연덕스럽게 받자, 방다병이 고개를 끄덕했다.
"맞아. 바로 이게 피해자들이 먹었던 약이 분명해. 내가 약을 살 때 목패를 확인하더라고. 목패에 새겨진 번호를 장부에 적어두던데, 그 장부를 손에 넣으면 신 공자가 그 약을 샀다는 사실을 입증할 수 있을 거야."
"훌륭하네, 방다병."
그 어깨를 손등으로 탁 치며 건네자, 방다병이 함박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그 웃음은 오래 가지 않았다. 청년은 이내 퍽 불쾌한 얼굴로 어깨너머를 슬쩍 돌아보며 투덜거렸다.
"저 양반과 대화하는데 속이 뒤집혀 혼났어. 결국 이런 일에서 사람의 마음은 몸을 따라가게 되어 있으니, 일단 저지른 다음 생각하라는 거야. 이런 곳까지 와서 약을 살 정성이면, 그 사람도 나와 각인하는 게 행복할 거라면서 말이야. 아무리 약 파는 상인이라지만 대체 무슨 헛소리인지 모르겠다니까. 그건 정성이 아니라 비열한 편법이잖아. 사람 마음을 대체 뭘로 보는 거야?"
"좌판에 있던 다른 약들도 사람을 낫게 만드는 건 아닐 거야. 저 자가 심악이든 아니든, 심악과의 연결고리인 건 분명해. 아까 적비성을 만났어. 밖에서 합류해 기다리다가, 귀장이 닫히면 저 의원의 뒤를 밟아보자고."
방다병이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그 얼굴이 협행을 할 때의 협객답게 생생히 반짝거렸다. 이연화가 피식 웃었다. 내가 어릴 때에도 저랬었나? 너무 오래 전이라 기억도 안 나네. 어쩐지 이 녀석은 나이가 많아지고 경험이 쌓이더라도, 늘 천진할 만큼 정의로운 구석이 있을 것 같단 말이지. 어디서 이용당하지 않게 잘 가르쳐야겠다. 내심 그렇게 다짐하면서, 이연화는 방다병과 함께 귀장 밖으로 발을 옮겼다.
귀장이 파하기까지, 세 사람은 보이지 않는 곳에 몸을 숨기고 관련자들의 동태를 살폈다. 셋 모두 일정 수준을 뛰어넘은 고수들이라, 누군가에게 기척을 들킬 걱정은 불필요했다. 기다리는 사이, 이연화는 미리 챙겨온 만두까지 방다병과 적비성에게 하나씩 나눠주었다. 출출했다며 얼른 밝은 얼굴로 만두를 받아 먹던 방다병에게, 이연화가 문득 떠올라 물었다.
"아, 방다병. 아까 대체 무슨 부적을 산 거야?"
방다병의 눈이 동그래졌다. 입에 들었던 만두를 꿀꺽 삼키고, 청년은 머쓱한 얼굴로 뺨을 긁적였다. 품을 뒤진 손에 붉은 비단 주머니가 딸려나왔다. 헛기침을 한 번 하더니, 방다병은 그것을 이연화에게 쑥 내밀었다. 이연화가 괴상한 눈으로 주머니와 방다병을 번갈아 보았다.
"뭐야, 이게 뭔데."
"그...건강을 기원하는 부적이래. 별로 안 비쌌어."
방다병이 변명하듯 덧붙이며 이연화의 손에 주머니를 쥐어주었다. 이연화가 더욱 해괴한 표정을 지었다.
"난 이제 건강한데, 왜 이런 걸 샀어? 항상 군자의 도를 얘기하더니, 어울리지 않게 미신에 돈을 낭비하고 그래."
"네가 워낙 안 건강할 짓을 많이 하잖아! 내가 너 아픈 걸 오래 보기도 했고. 그래서...그냥 샀어. 혹시 모르니까 갖고 있어."
방다병이 입을 내민 채 뚱하게 말했다. 만두를 먹던 적비성이 그 부적 주머니를 낚아챘다. "남의 물건을 왜 뺏고 그래?" 방다병이 삿대질하며 소리죽여 비난했다.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적비성은 주머니를 열어 안을 확인했다. 누런 종이에 그린 부적 하나와, 작은 향 조각 하나가 들어 있었다. 향 냄새를 맡은 적비성이 다시 주머니를 닫아 이연화에게 내밀었다.
"나쁠 건 없으니 들고 다녀라."
"흥, 괜히 생색은. 내가 그런 것도 확인 안하고 줬을까봐?"
방다병이 툴툴거렸다. 향 냄새를 확인한 이연화가 눈을 깜박였다. 이것은 심신이 매우 피로하거나 불안할 때, 즉각적인 진통과 진정 효과를 발휘하는 안신향이었다. 건강을 기원하는 부적과 썩 어울리는 조합이었다. 이연화가 방다병을 힐끗 보았다. 방다병은 초라한 생일 선물을 건네준 다음 안절부절못하는 소년처럼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잠시 고민하다, 이연화는 결국 쓴웃음을 지었다.
"알았어, 고마워."
짧게 말하고 주머니를 품에 넣자, 방다병은 조금 안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했다. 짐짓 아무렇지 않은 태도로 다시 만두를 먹으며, 이연화는 눈앞의 두 남자를 힐끗 일별했다. 최근에는 정말로 안신향 따위가 필요하지 않을 만큼 숙면하고 있었으나, 그 원인을 솔직히 꺼낼 수야 없었다. 어쩐지 희미한 낭패감에 사로잡혀, 이연화는 자기도 모르게 눈가를 살짝 만졌다. 물론 불현듯 치미는 성욕으로 곤란했던 순간도 있었지만, 사실 오늘 잠자리에서 깨어났을 때 이연화를 가장 괴롭히던 것은 그런 욕망이 아니었다.
동이 트던 시각, 이연화는 두 몸뚱이 사이에서 눈을 뜨고는 멍하게 생각했다. 이런 아침도 나쁘지 않네. 순간이었지만, 그것은 아무런 꾸밈도 없는 진심이었다. 아침 공기는 싸늘했으나, 사람 셋이 붙어 잔 침상엔 한기는커녕 뜨끈한 온기가 가득했다. 편안함과 이어진 안정감이 달콤하게 몸을 녹였다. 영웅 이상이로 살 때에도, 떠돌이 이연화로 살 때에도 그는 긴장을 완전히 늦춰본 일이 거의 없었다. 위험은 도처에 있었으며 밤에는 늘 혼자였다. 이상이로 살 때에는 적과 원수들이 너무 많았고, 이연화로 살 때에는 삶 자체가 도전이었다.
이연화가 평화로운 숨을 길게 내쉬었다. 살짝 좁기는 해도, 여생 동안 그들과 이렇게 푹 쉬고 일어날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마저 들었다. 난생 처음 느껴보는 종류의, 은근하면서도 절실한 욕구였다.
눈이 번쩍 뜨였다. 자신이 대체 무슨 생각을 떠올렸는지 한 발짝 늦게 깨닫고, 이연화는 잠이 다 달아난 기분으로 몸을 벌떡 일으켰다. 스스로에게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절로 터져 나왔다. 진저리를 치듯이 고개를 흔들며, 이연화는 이성의 목소리를 불러오고자 애썼다. 고작 이런 기분으로 깨어나고자 두 사람의 삶을 자신과 묶어버리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미쳤다고 할 만큼 비합리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그에 저항하듯, 머리 한편에서 아주 조그만 목소리가 속삭였다. 왜 그러면 안 되는데? 어차피 두 사람이 먼저 얘기한 일인걸. 정말 싫었다면, 네 성정에 이미 어디론가 최선을 다해 잠적하거나 매정한 말로 밀어냈겠지. 대체 무슨 저울질을 하는 거야? 이연화의 미간으로 깊은 골이 패였다. 그 목소리를 향해 말도 안 되는 일이라 윽박지르고 싶었으나, 숙면의 여파인지 총명한 머리가 금방 그럴듯한 이유를 자아내지 못했다. 금원맹주의 입장이라든가, 방다병의 집안 문제 같은 것들이 갑작스레 변명처럼 느껴졌다. 불행 중 다행으로, 그 순간 방다병이 뒤척이며 일어날 기미를 보인 탓에 이연화의 혼란은 잠시 멈추었다.
마지막 만두 한 입을 먹고 방다병이 자연스레 건넨 물을 받아 마시며, 이연화는 고개를 갸웃했다. 설마, 내가 아침에 잠시나마 그런 생각을 했던 것도 약의 탓은 아니겠지? 잠깐 고민해 보았으나 아무래도 회의적이었다. 자신은 어제 공자들에게 술을 따라주었을 뿐 거의 음주하지 않았다. 적비성이 영향을 받지 않았다면, 자신의 사정 역시 비슷했을 터였다. 방다병의 말간 얼굴을 힐끔 보며, 이연화는 스스로의 양심을 뒤늦게나마 질책했다. 저런 전도유망한 아이를 내 여생에 붙들어 두다니, 아무리 너라도 지나치게 뻔뻔하지 않아? 내심 코웃음을 치는데, 적비성의 손이 어깨를 툭 건드렸다.
"그놈이 움직인다."
이연화가 고개를 돌렸다. 방다병에게 약을 판 남자가, 일꾼 노인을 거느리고 귀장을 나오던 참이었다. 세 사람이 시선을 교환했다. 깊은 밤, 세 명의 고수는 어떤 소리나 기척도 없이 약 장사의 뒤를 밟기 시작했다.
본편 이후 시점으로 ㅅㅍㅈㅇ 다병연화 비성연화
버려진 사당에서 귀장이 열리기 전까지, 세 사람은 잠시 계곡의 숲에 매복하여 어떤 이들이 들고 나는지 지켜보았다. 눈에 띄지 않는 흑색이나 회색 옷을 걸친 사람들이 연신 왔다갔다하며 물건을 나르거나 등불을 달았다. 좁은 길에 조그만 빛이 총총 달린 모양새가, 마치 깊은 산속에서 마주친 도깨비불처럼 보이기도 했다. 어스름한 저녁 시간이 되자 사당의 문이 열렸고, 그 앞에 두 남자가 선 채 방문객들의 통행증을 검사하기 시작했다. 이연화는 방다병과 함께 가면을 쓴 채 귀장으로 접근했다. 적비성은 언제 사라졌는지 보이지 않았다.
대문을 지키던 두 남자는, 방다병의 목패를 보자 별다른 말 없이 고갯짓했다. 장소가 암시장인 만큼, 가면을 쓴 손님 따위야 그리 새로울 것도 없다는 태도였다. 방다병은 어깨에 힘이 들어간 공자 행세를 하면서 발을 옮겼고, 이연화는 수행원인 척 그 곁에 가까이 붙어서는 안으로 들어갔다. 그 시선이 두 남자의 목덜미에 새겨진 작은 비수 문신을 스쳤다.
입구의 허름하다 못해 을씨년스러운 분위기와 달리, 사당 내부는 일반적인 시장처럼 활달한 기류를 띠었다. 좌판에 물건을 펼친 상인들뿐 아니라, 간식이며 술을 팔거나 방문객들에게 점을 봐주는 사람들도 보였다. 방다병이 어리둥절한 눈으로 장내를 훑었다.
"의외네. 불법적인 암시장이라기에 좀 더...은밀한 느낌일 줄 알았는데."
"음. 돈 많으신 공자님들까지 끌어들여 매출을 올리는 곳이잖아. 너무 불법적으로 보여도 곤란하지. 최대한 즐겁고 일상적인 느낌을 줘야 처음 오는 사람들도 안심하지 않겠어. 만에 하나 관아에서 기습하더라도 둘러댈 말이 있고."
이연화가 고개를 까딱하며 읊었다. 좌판들에는 여러 가지 이유로 쉽게 볼 수 없는 물건들이 즐비했다. 여러 사람들에게서 털어온 장물 골동품이나 장신구부터, 수입이 까다로워 좀처럼 사기 어려운 이국의 약재, 절도에 필요한 전문 장비와 무기들, 위험성이 높다는 이유로 시중 판매가 금지된 무공서와 사술 비급 따위가 뒤섞여 있었다. 아무래도 흉흉한 분위기를 띤 사람들은 후자에 많이 몰렸고, 부잣집 도련님이나 아가씨 같은 이들은 전자에 흥미를 보였다. 심각한 눈으로 좌판을 살피던 이연화가 넌지시 말했다.
"여긴 암시장 중에서도 꽤 수준이 높아. 쉽게 구할 수 없는 물건들을 모아 뒀어."
"그렇다는 건, 이 암시장과 연결된 범죄자들이 많다는 얘기네."
"귀장을 운영하는 건 생각보다 큰 조직일 수도 있겠어. 저기가 우리 목적지 같은데, 신중하게 움직이자고."
이연화가 시장 한편의 작은 좌판을 향해 가볍게 턱짓했다. 좌판 위에는 여러 첩의 약들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뚜껑이 열린 작은 상자도 몇 개 보였는데, 그 안에 놓인 환들이 까만 빛을 발했다. 약의 이름이나 효능 따위는 전혀 쓰여 있지 않았다. 좌판을 지키던 사람은 장년에서 노년으로 넘어가는 작은 체구의 남자였다. 길고 가느다란 수염을 지닌 남자는 자리에 앉아 약재를 조합하다가,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가끔씩 원하는 약이 있으면 얘기해보라 건네기도 했다. 너무나 평범한 의원 같은 모습에, 방다병이 미간을 살짝 좁혔다.
"설마, 저 자가 심악일까? 너무...."
"평범한 겉모습만으로 정체를 판단할 수는 없지. 일단 가서 봐야 할 텐데, 너무 저길 노리고 온 분위기를 풍기지 않는 편이 좋겠어. 만에 하나라도 저 자가 심악이라면, 분명 금원맹의 추적을 경계하고 있을 거야."
"일리 있네. 그럼 저 옆에 먼저 들르자."
방다병이 수상한 약방 옆의 가게를 가리켰다. 역시 수상한 부적 따위를 파는 좌판이었다. 이연화가 고개를 끄덕하자, 방다병은 괜히 헛기침을 하고는 과시적인 걸음으로 부적 가게를 향했다. 좌판을 관리하던 여자가 반색하며 손짓했다.
"공자님, 와서 한 번 보세요. 원하시는 건 뭐든 이뤄주는 부적들입니다. 재물운, 연애운, 건강운, 원하는 걸 말씀해 보세요."
"부적이라니, 그런 건 미신이 아니오? 뭐 그렇게 특별한 효험이 있소?"
방다병이 뚱하게 의심하듯 이야기하자, 여자가 좌판을 가리키며 목소리를 높였다. 주로 붉은빛이나 금빛 천으로 만들어진 주머니들 옆에, 여러 종류의 부적들이 늘어서 있었다. "몰라서 하시는 말씀이에요. 제 부적의 효험을 본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요! 십 년이나 아이를 못 가지다가 회임하게 된 부인도 있고, 짝사랑하던 사람과 두 달만에 결혼하게 된 낭자도 있답니다. 다 죽어가던 사람이 영험한 힘으로 되살아난 적도 있다고요!" 영 믿기 어려운 말들을 들으며, 이연화는 내심 웃음을 삼켰다. 되도 않는 소리로 여러 종류의 약들을 팔던 자신이 떠오른 탓이었다.
"짝사랑하던 사람과 두 달만에 결혼한 사람이 있다고? 정말이오?"
방다병이 관심 있는 척 물었다. 여자가 열정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그 남자가 자기 쪽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는다고 펑펑 울었는데, 얼마 후에 결혼한 걸 보고 저조차 놀랐지 뭡니까. 공자님도 이루어지길 바라는 사랑이 있으신가 보지요?" 여자의 물음에, 방다병은 대답 대신 머쓱한 헛기침과 함께 고개를 돌렸다. 이연화가 미간을 살짝 좁힌 채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얘 지금 연기하는 거야, 아니야? 하지만 어느 쪽이든, 자신이 할 역할은 변하지 않았다. 목을 가다듬고, 이연화는 난처해하는 수행원의 말투를 능청스레 만들어냈다.
"도련님, 설마 그 낭자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안 된다니까요, 그 낭자는 이미 정혼한 사람도 있는데-."
"시끄러워, 네가 뭘 알아."
방다병이 짐짓 퉁명스레 대꾸했다. '도련님'을 향해 뭐라 더 타박하려던 때, 이연화의 눈으로 익숙한 인영이 들어왔다. 통행증을 갖지는 않았으나, 이 자리에 있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이연화가 간곡히 말했다.
"분명히 말씀드렸습니다. 저는 잠시 뒷간에 다녀올 테니, 그 사이에 이상한 거 사시면 안 돼요. 마님께 여기 왔다는 사실만 들켜도 경을 칠 텐데-."
"알았어, 알았으니까 얼른 다녀와."
방다병이 잔소리를 피하는 도련님처럼 휘휘 손짓했다. 크게 한숨을 쉰 이연화는, 곁눈으로 잠깐 약방 주인의 손을 살피고는 얼른 발을 옮겼다. 적비성은 귀장 구석의 그늘에 비스듬히 선 채 팔짱을 끼고 있었다. 큰 체격의 남자가 대도를 지고 서 있음에도, 그 기척이 마치 산의 바위처럼 잠잠했다. 이연화가 그 옆으로 미끄러지듯 다가가 물었다.
"뭐 좀 알아냈어?"
"혹시 달리 약을 파는 자가 있을까 싶어, 상인들에게 확인해 봤다. 귀장에 항상 좌판을 펴는 약방은 저기 하나라더군."
적비성이 방다병 근처를 턱짓했다. 이연화의 눈이 슬쩍 가늘어졌다.
"저 사람이 심악이든 아니든, 심악과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높아. 다루는 약재들이 아무래도 수상해. 시장 의원들이 통상 쓰는 종류가 아니야."
"장이 파한 다음 저 자의 뒤를 밟아보면 그만이다. 심악을 바로 만나면 가장 좋겠지만, 설령 아니라도 다른 단서를 찾을 수 있겠지."
음. 고개를 끄덕이던 이연화의 눈이 이상해졌다. 금방 떠나리라고 생각했던 것과 달리, 방다병은 부적들을 찬찬히 훑어보다가 어떤 물건을 하나 골랐다. 상인에게 뭐라 질문까지 하는 모습이 퍽 진지했다. 이연화가 어이없게 중얼거렸다. "아니, 저걸 왜 사? 관심만 보이면 되지, 살 필요는 없는데. 이런 곳에서 파는 물건들이 저렴할 리도 없고." 적비성이 코웃음을 쳤다. 두 남자의 반응을 알 길 없이, 방다병은 빨간 비단 주머니에 든 부적을 소중히 품에 넣었다. 단지 연기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성실한 태도였다. 의심스러운 눈으로 방다병을 응시하며, 이연화가 팔짱을 낀 채 말했다.
"저 녀석, 오늘 좀 이상하지 않아? 아침부터 자꾸 정신이 딴 데 팔린 것 같단 말이지."
"난 덜 시끄러워서 차라리 낫던데."
적비성이 비웃듯이 대꾸했다. 이연화는 그 태도에 신경 쓰지 않고 고개를 갸웃했다.
"어제 약을 잘못 먹은 영향이 아직 남았나? 있다 확인해 보고, 맥이 이상하면 내력을 넣어줘야겠어."
"됐다. 내게 아무 영향도 주지 못했으니, 그리 강한 약은 아니었을 거야. 기껏해야 네게 혼자 음심이라도 느끼고 기함한 거겠지."
적비성이 이죽거리듯 꺼낸 말에, 이연화는 그만 사레가 들려 기침을 한 차례 뱉었다. 십 년 동안 꽤 뻔뻔해졌다고 자부했으나, 금원맹주가 타의 없이 툭툭 내뱉는 거친 언사에는 아직도 가끔 당황할 때가 있었다. 이연화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적비성을 흘겨보았다.
"너는 진짜...말 좀 가려서 해. 음심은 무슨 음심이야. 방다병을 모함하지 마."
"모함이라니, 그게 뭐 별일이라고. 각인한 사람과 한 침상에서 자는데 욕정하지 않는 게 이상하지."
적비성이 당당하게 말했다. 오히려 이연화나 방다병이 퍽 유난을 떤다고 핀잔을 주는 듯한 투였다. 이연화의 눈썹이 높이 올라갔다.
"그럼 뭐, 너도 그런 적이 있어?"
"당연하지 않나? 너도 마찬가지일 텐데."
"아니거든."
이연화가 반사적으로 부정하며 고개를 돌렸다. 짐짓 태연한 옆모습을 유심히 바라보던 적비성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이럴 때에는 거짓말이 능숙하지 않군." 놀리는 듯한 말에, 이연화가 상대를 가리키며 경고처럼 건넸다. 가끔씩 치미는 성욕이 자연스러운 현상이란 것쯤은 알고 있었으나, 당사자 중 하나와 그에 관한 대화를 나누고 싶지는 않았다.
"너, 그렇다고 자다가 이상하게 건드리지 마. 그럼 각인통이고 뭐고 내쫓아버릴 테니까."
"네가 다시 부주의하게 당하지 않는 한, 내가 네게 정사를 강제할 일은 없다. 네 명이 걸린 일이라면 망설이지 않을 테니, 알아서 조심해."
이번에는 적비성이 경고하듯 건넸다. "알았어, 알았어." 이연화는 평소처럼 대충 한 손을 내저으며 대꾸하고, 어느새 약방 좌판으로 이동한 방다병을 향해 총총 걸어갔다. 뒤통수에 빤히 박힌 시선이 따가웠다. 이연화가 어깨를 한 차례 으쓱했다. 그는 자신의 눈에 가장 빠르고 효율적인 길을 택할 뿐, 순전히 무모하게 굴고 싶어 위험을 감수하는 것이 아니었다. 많은 이들이 오해하는 부분이었으나 그리 설명해봐야 말다툼만 벌일 듯했기에, 이연화는 잰걸음으로 방다병에게 다가가 물었다.
"도련님. 이번엔 뭘 보고 계십니까?"
"아, 이 주인장이 신묘한 약들을 팔고 있다기에."
"신묘한 약들이요? 원하시면 명의의 약을 살 수 있는데, 왜 이런 데서 돈을 쓰시려는 거예요."
"명의라고 해도 세상의 약들을 모두 알지 못하는데, 어찌 그리 견문이 좁게 굴어? 그럼 주인장, 고맙소. 나중에 또 봅시다."
방다병이 남자를 향해 건넸다. 의원이 얼른 고개를 숙이며 웃었다. "아이고, 예. 감사합니다, 공자님." 방다병에게 받은 돈주머니가 그 손에 들려 있었다. 남자는 곧 좌판 뒤쪽에서 약 찌꺼기 따위를 모아 정리하던 일꾼 노인에게 돈주머니를 건넸다. "큰 돈이니 잘 넣어둬." 남자의 지시에, 노인은 허리를 꾸벅 숙이고는 작은 상자 안에 돈을 넣었다. 이연화가 짐짓 한탄하는 얼굴로 돌아보았다.
"도련님, 또 뭘 사신 거예요. 돈을 함부로 쓰지 마시라고 마님께서도-."
"됐어, 이미 끝난 일이야. 어서 가자."
방다병이 거만하게 손짓했다. 저 녀석, 이런 버릇없는 도련님 행세가 썩 어울리네. 하긴 처음 봤을 때에는 딱 그런 인상이었지. 이연화가 내심 픽 웃으며 그 뒤를 따랐다. "그래서, 도련님. 거금을 쓰며 뭘 알아내셨습니까?" 농담처럼 건네자, 방다병이 앞머리를 휙 넘기고는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그 손에는 환이 담긴 상자가 하나 들려 있었다.
"일단 저 자의 약을 샀어. 내가 부적 파는 사람과 했던 대화를 들은 탓인지, 내게 필요한 약이 있다며 추천해 주더라고. 효능을 들어보니 딱 신 공자가 썼던 약 같아서, 자세한 용법과 주의사항을 설명해 달라고 했지. 그랬더니 뭐라고 했게?"
"음. 약이 녹을 때 배꽃 냄새가 진하게 날 테니, 그걸 숨길 수 있는 술이나 음식에 타라고 했어?"
이연화가 천연덕스럽게 받자, 방다병이 고개를 끄덕했다.
"맞아. 바로 이게 피해자들이 먹었던 약이 분명해. 내가 약을 살 때 목패를 확인하더라고. 목패에 새겨진 번호를 장부에 적어두던데, 그 장부를 손에 넣으면 신 공자가 그 약을 샀다는 사실을 입증할 수 있을 거야."
"훌륭하네, 방다병."
그 어깨를 손등으로 탁 치며 건네자, 방다병이 함박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그 웃음은 오래 가지 않았다. 청년은 이내 퍽 불쾌한 얼굴로 어깨너머를 슬쩍 돌아보며 투덜거렸다.
"저 양반과 대화하는데 속이 뒤집혀 혼났어. 결국 이런 일에서 사람의 마음은 몸을 따라가게 되어 있으니, 일단 저지른 다음 생각하라는 거야. 이런 곳까지 와서 약을 살 정성이면, 그 사람도 나와 각인하는 게 행복할 거라면서 말이야. 아무리 약 파는 상인이라지만 대체 무슨 헛소리인지 모르겠다니까. 그건 정성이 아니라 비열한 편법이잖아. 사람 마음을 대체 뭘로 보는 거야?"
"좌판에 있던 다른 약들도 사람을 낫게 만드는 건 아닐 거야. 저 자가 심악이든 아니든, 심악과의 연결고리인 건 분명해. 아까 적비성을 만났어. 밖에서 합류해 기다리다가, 귀장이 닫히면 저 의원의 뒤를 밟아보자고."
방다병이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그 얼굴이 협행을 할 때의 협객답게 생생히 반짝거렸다. 이연화가 피식 웃었다. 내가 어릴 때에도 저랬었나? 너무 오래 전이라 기억도 안 나네. 어쩐지 이 녀석은 나이가 많아지고 경험이 쌓이더라도, 늘 천진할 만큼 정의로운 구석이 있을 것 같단 말이지. 어디서 이용당하지 않게 잘 가르쳐야겠다. 내심 그렇게 다짐하면서, 이연화는 방다병과 함께 귀장 밖으로 발을 옮겼다.
귀장이 파하기까지, 세 사람은 보이지 않는 곳에 몸을 숨기고 관련자들의 동태를 살폈다. 셋 모두 일정 수준을 뛰어넘은 고수들이라, 누군가에게 기척을 들킬 걱정은 불필요했다. 기다리는 사이, 이연화는 미리 챙겨온 만두까지 방다병과 적비성에게 하나씩 나눠주었다. 출출했다며 얼른 밝은 얼굴로 만두를 받아 먹던 방다병에게, 이연화가 문득 떠올라 물었다.
"아, 방다병. 아까 대체 무슨 부적을 산 거야?"
방다병의 눈이 동그래졌다. 입에 들었던 만두를 꿀꺽 삼키고, 청년은 머쓱한 얼굴로 뺨을 긁적였다. 품을 뒤진 손에 붉은 비단 주머니가 딸려나왔다. 헛기침을 한 번 하더니, 방다병은 그것을 이연화에게 쑥 내밀었다. 이연화가 괴상한 눈으로 주머니와 방다병을 번갈아 보았다.
"뭐야, 이게 뭔데."
"그...건강을 기원하는 부적이래. 별로 안 비쌌어."
방다병이 변명하듯 덧붙이며 이연화의 손에 주머니를 쥐어주었다. 이연화가 더욱 해괴한 표정을 지었다.
"난 이제 건강한데, 왜 이런 걸 샀어? 항상 군자의 도를 얘기하더니, 어울리지 않게 미신에 돈을 낭비하고 그래."
"네가 워낙 안 건강할 짓을 많이 하잖아! 내가 너 아픈 걸 오래 보기도 했고. 그래서...그냥 샀어. 혹시 모르니까 갖고 있어."
방다병이 입을 내민 채 뚱하게 말했다. 만두를 먹던 적비성이 그 부적 주머니를 낚아챘다. "남의 물건을 왜 뺏고 그래?" 방다병이 삿대질하며 소리죽여 비난했다.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적비성은 주머니를 열어 안을 확인했다. 누런 종이에 그린 부적 하나와, 작은 향 조각 하나가 들어 있었다. 향 냄새를 맡은 적비성이 다시 주머니를 닫아 이연화에게 내밀었다.
"나쁠 건 없으니 들고 다녀라."
"흥, 괜히 생색은. 내가 그런 것도 확인 안하고 줬을까봐?"
방다병이 툴툴거렸다. 향 냄새를 확인한 이연화가 눈을 깜박였다. 이것은 심신이 매우 피로하거나 불안할 때, 즉각적인 진통과 진정 효과를 발휘하는 안신향이었다. 건강을 기원하는 부적과 썩 어울리는 조합이었다. 이연화가 방다병을 힐끗 보았다. 방다병은 초라한 생일 선물을 건네준 다음 안절부절못하는 소년처럼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잠시 고민하다, 이연화는 결국 쓴웃음을 지었다.
"알았어, 고마워."
짧게 말하고 주머니를 품에 넣자, 방다병은 조금 안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했다. 짐짓 아무렇지 않은 태도로 다시 만두를 먹으며, 이연화는 눈앞의 두 남자를 힐끗 일별했다. 최근에는 정말로 안신향 따위가 필요하지 않을 만큼 숙면하고 있었으나, 그 원인을 솔직히 꺼낼 수야 없었다. 어쩐지 희미한 낭패감에 사로잡혀, 이연화는 자기도 모르게 눈가를 살짝 만졌다. 물론 불현듯 치미는 성욕으로 곤란했던 순간도 있었지만, 사실 오늘 잠자리에서 깨어났을 때 이연화를 가장 괴롭히던 것은 그런 욕망이 아니었다.
동이 트던 시각, 이연화는 두 몸뚱이 사이에서 눈을 뜨고는 멍하게 생각했다. 이런 아침도 나쁘지 않네. 순간이었지만, 그것은 아무런 꾸밈도 없는 진심이었다. 아침 공기는 싸늘했으나, 사람 셋이 붙어 잔 침상엔 한기는커녕 뜨끈한 온기가 가득했다. 편안함과 이어진 안정감이 달콤하게 몸을 녹였다. 영웅 이상이로 살 때에도, 떠돌이 이연화로 살 때에도 그는 긴장을 완전히 늦춰본 일이 거의 없었다. 위험은 도처에 있었으며 밤에는 늘 혼자였다. 이상이로 살 때에는 적과 원수들이 너무 많았고, 이연화로 살 때에는 삶 자체가 도전이었다.
이연화가 평화로운 숨을 길게 내쉬었다. 살짝 좁기는 해도, 여생 동안 그들과 이렇게 푹 쉬고 일어날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마저 들었다. 난생 처음 느껴보는 종류의, 은근하면서도 절실한 욕구였다.
눈이 번쩍 뜨였다. 자신이 대체 무슨 생각을 떠올렸는지 한 발짝 늦게 깨닫고, 이연화는 잠이 다 달아난 기분으로 몸을 벌떡 일으켰다. 스스로에게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절로 터져 나왔다. 진저리를 치듯이 고개를 흔들며, 이연화는 이성의 목소리를 불러오고자 애썼다. 고작 이런 기분으로 깨어나고자 두 사람의 삶을 자신과 묶어버리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미쳤다고 할 만큼 비합리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그에 저항하듯, 머리 한편에서 아주 조그만 목소리가 속삭였다. 왜 그러면 안 되는데? 어차피 두 사람이 먼저 얘기한 일인걸. 정말 싫었다면, 네 성정에 이미 어디론가 최선을 다해 잠적하거나 매정한 말로 밀어냈겠지. 대체 무슨 저울질을 하는 거야? 이연화의 미간으로 깊은 골이 패였다. 그 목소리를 향해 말도 안 되는 일이라 윽박지르고 싶었으나, 숙면의 여파인지 총명한 머리가 금방 그럴듯한 이유를 자아내지 못했다. 금원맹주의 입장이라든가, 방다병의 집안 문제 같은 것들이 갑작스레 변명처럼 느껴졌다. 불행 중 다행으로, 그 순간 방다병이 뒤척이며 일어날 기미를 보인 탓에 이연화의 혼란은 잠시 멈추었다.
마지막 만두 한 입을 먹고 방다병이 자연스레 건넨 물을 받아 마시며, 이연화는 고개를 갸웃했다. 설마, 내가 아침에 잠시나마 그런 생각을 했던 것도 약의 탓은 아니겠지? 잠깐 고민해 보았으나 아무래도 회의적이었다. 자신은 어제 공자들에게 술을 따라주었을 뿐 거의 음주하지 않았다. 적비성이 영향을 받지 않았다면, 자신의 사정 역시 비슷했을 터였다. 방다병의 말간 얼굴을 힐끔 보며, 이연화는 스스로의 양심을 뒤늦게나마 질책했다. 저런 전도유망한 아이를 내 여생에 붙들어 두다니, 아무리 너라도 지나치게 뻔뻔하지 않아? 내심 코웃음을 치는데, 적비성의 손이 어깨를 툭 건드렸다.
"그놈이 움직인다."
이연화가 고개를 돌렸다. 방다병에게 약을 판 남자가, 일꾼 노인을 거느리고 귀장을 나오던 참이었다. 세 사람이 시선을 교환했다. 깊은 밤, 세 명의 고수는 어떤 소리나 기척도 없이 약 장사의 뒤를 밟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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