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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2.20 0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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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걸 ㅈㅇ





 여물지않은 가을의 오후란 유독 빠르게 몰려오는 밤하늘을 위해 물러날 채비를 마친 석양이 가장 포근해지는 시간이었다. 매마른 바람은 아직 힘을 받지 못해 잔뜩 오그라든 잎사귀를 건드리거나 사람들의 정강이 사이를 간지럽히는 소소한 장난만 누리고 있었다. 한참전 울린 알람소리를 깨닫지 못하고 여전히 꿈속을 헤매는 로버트 플로이드를 구경하는것도 그들의 재미라면 재미였다. 그는 밀린 과제를 빈틈없이 끝마치느라 마천루 너머로 붉은빛이 새어나올때까지 몰두했었다. 옛적부터 잠에 취약한 자신을 잘 알고있어 잠들기전 십분마다 알람이 울릴수 있도록 설정해놨지만 소용없는 짓이었다. 휴대폰이 또 한번의 기상나팔을 불었다. 영롱하고 희망찬 소리는 로버트의 수마속을 비집고 들어가려 애썼지만 결국 실패를 반복하고 말았다. 벗을새도 없던 안경이 수평을 이루지 못하고 한껏 삐뚤어진채 그의 콧잔등에 간신이 걸쳐져있었다. 거기다 입까지 벌리고 있으니 자칫 기절한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절대로 게으른 성격은 아니었다. 오히려 부지런한 편에 속했다. 학업과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면서도 높은 성적을 유지했고 집도 깔끔히 관리했다. 한달전 근방의 물가가 급격히 오르자 덩달아 상승하게된 월세로 인해 일거리를 하나 더 늘렸더니 이제서야 그 여파가 몰려온듯 했다. 세탁기에 들어가지 못한 빨랫감들이 바구니 속을 꽉 채우다못해 흘러내렸고 전공책들과 로션같은 잡동사니들이 군데군데 드러누워 있었다. 로버트의 바닥난 체력이 기어코 집 안까지 영향을 미친거였다. 그리고 학교생활까지 그 손을 뻗을 찰나, 로버트가 눈을 떴다. 처음에는 속눈썹이 움직이기만 하는 정도였다. 가물대는 눈이 손끝에 가까스로 매달린 햇빛을 향해 몇번 깜빡이더니 헉.하고 막힌 소리와 함께 완전히 떠졌다.

 

 "제발, 제발..."

 

 로버트가 튕기듯이 일어나 안경을 고쳐쓰며 급하게 휴대폰을 찾았다. 분명 손닿을 곳에 있을텐데 수마의 구름이 걷히지 않은 머리가 엉뚱한 위치만 훑었다. 구세주처럼 알람이 울리고 나서야 쟁취한 휴대폰에 적힌 시간은 실로 절망적이었다. 차라리 오전 강의를 택할걸. 그랬다면 잠을 포기할지언정 이렇게 좌절감에 휩싸이진 않았을 터인데. 그러다 그는 곧 자신에게 쏟은 책망을 거두었다. 그런건 나중의 일이었다. 지금으로선 최선을 생각해야했다. 제멋대로 뻗친 머리를 부여잡으며 열심히 루틴을 연구하던 로버트는 별안간 벌떡 일어나 매트리스를 벗어났다. 그러고 나서 발치에 널브러진 가방과 과제물을 들고 그대로 집을 나섰다. 그 다음엔, 맹렬히 뛰었다. 아무리 주사위를 굴려도 도착지는 스피드뿐이었다. 

 

 

 

 

 학교 정문 앞에서 필라델피아 시내를 횡단하는 버스를 타고 열 정거장 후에 내리면 바로 델라웨어 강이 펼쳐졌다. 하늘에 따라, 바람에 따라 시시각각 형태를 바꾸면서도 멈추는 법이 없는 물살을 따라 흐르다보면 로버트의 두번째 일터가 나왔다. 온갖 화려함이 난무하는 네온사인 속, 유약한 전구색 간판과 소박한 테이블 수가 사장의 성격을 잘 표명해주었다. 허구언날 돈방석을 입에 올리는 사람이었으나 막상 기회가 오면 절대로 엉덩이를 붙이지 않았다. 최근 엔티크가 다시 유행에 탑승하자 겉모습부터 적합한 가게는 나날이 매출이 올랐지만 그는 영업시간을 늘리지도 않았고 바빠진 바텐더들이 잡일을 떠맡길 사람도 구했다. 그게 로버트였다. 돈욕심이 없는 사장덕에 돈을 벌수 있는 수단이 생긴 것이다. 그러나 이 사실을 두고 아이러니라 여길 새가 로버트에겐 없었다. 어제의 모순이 오늘은 형평성을 갖는 세상이었기에 발맞춰 걷기에도 벅찼다.  

 

 "오렌지, 그거 하고 얼음 좀 채워줘."

 "네."

 "오렌지, 버번이랑 심플 시럽도 부탁해."

 "네."  

 

 테이블을 정리하는 로버트에게 미샤와 메이슨이 차례로 외쳤다. '오렌지'는 로버트가 태어난 곳이었는데 동그란 얼굴과 안경도 동명의 과일을 닮아 붙여진 별명이었다. 다소 억지스럽고 썩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발상은 그럴듯했다. 이제는 제법 익숙해진 호칭에 대답하며 테이블을 훑자 녹은 얼음과 쏟아진 술이 순식간에 행주를 척척하게 적셨다. 이럴때를 대비해 가져온 작은 바켓에 물기를 쥐어짜고 다시 닦는일을 두어번 반복하고나서야 로버트는 허리를 필 수 있었다. 돈을 주고 쓴물을 삼키는 행위보다 그것을 반이나 넘게 흘리는 조심성이 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진작에 술과 자신의 궁합이 그리 좋지 않다는걸 깨달은 로버트라 더더욱 그랬다. 청소한 것들이 담긴 카트를 바테이블 뒤 가장 안쪽에 있는 주방으로 끌고가자 땀에젖은 사장의 뒷모습이 보였다. 얼굴까지 올라온 불길에 맞서 후라이팬 손잡이를 잡은 그의 팔이 거칠게 움직이고 있었다. 로버트가 맞은편 싱크대에 가져온 카트를 잠시 놓아두고 냉동고부터 여는데 사장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을 건넸다.

 

 "힘들지? 칵테일 새우 좀 줘라."

 "네."

 

 격려는 하고 싶은데 재료도 급히 필요한 바람에 어긋나버린 대화였다. 습관적으로 대답을 한 로버트는 예의상 힘들지 않다고 덧붙일까 했지만 질문을 던진 사람이 신경쓰는것같아 보이지 않았고 자신의 대답도 딱히 틀린말은 아니라서 그냥 침묵을 택했다. 냉동고 맨 아랫칸을 열자 겹겹이 쌓인 둥그런 모양의 얼음판들이 보였다. 로버트는 그것들을 될수 있을만큼 가득 품에 안은채 부탁받은 새우를 사장 옆에 놓아주고 주방을 나왔다. 메이슨이 넉살좋은 웃음을 섞어가며 눈앞의 손님과 이야기하고 있었고 미샤는 바 스푼을 양손에 쥔채 각자 다른 술을 젓고 있었다. 

 

 "얼음 더 가져와야겠다."

 "네."

 

 미샤가 얼음을 채워넣는 로버트를 곁눈으로 바라본뒤 말했다. 로버트는 어쩐지 자신이 한가지 대응만 입력된 로봇과 같다고 생각했다. 동시에 얼빠진 물음을 하는 신세를 면한것 같아 뿌듯하기도 했다. 

 

 "오렌지, 버번 아직이지?"

 "네." 

 "그럼 가는김에 데킬라도."

 "네."

 "그리고 오늘 파티도."

 "네에."

 

 일단 얼음은 어느정도 채웠으니 창고 먼저 가야겠다. 버번, 심플시럽, 데킬라, 파티...... 속으로 목록을 짚던 로버트가 아이스박스 앞에 쪼그려앉은 상태로 메이슨을 올려다보았다. 놀란 감정이 확연히 보이는 얼굴에 메이슨이 반듯한 눈매를 접어 웃었다. 덤덤하기로 철옹성인 저 표정이 일그러지는것도 꽤나 볼만한 풍경이었다.

 

  "왜?"

 "무슨 파티요?"

 "나 여자친구랑 헤어졌거든. 이별파티?"

 "아......"

 

 올거지? 벌써 답을 받아놓은 것 마냥 확신에 찬 어조였다. 거절이란 경험이 인생에 감히 발을 딛지 못하면 저런 자신감이 나올까. 로버트는 곤혹에 빠졌다. 오늘 결국 삼십분이나 늦어버린 강의실 문턱에 섰을때부터 이미 녹초를 빚은 몸이었다. 이곳에 오기전 급하게 우겨넣은 샌드위치로는 파리해진 체력을 충당하지 못했다. 당장 지금이라도 누울 수만 있다면 월급빼고 다 내어줄 의향이 있었다. 과연 남은게 있을지 모르겠지만. 다만 이런 못을 박은 듯한 초대는 처음인지라 로버트는 어떻게 제 뜻을 표할지 몰랐다. 곤란한 눈으로 망설이자 스터링이 끝난 술을 손님에게 넘겨준 미샤마저 가세해 로버트에게 수락을 채근했다. 그런 와중 띵-하는 간결하고 울림이 큰 벨소리가 상황의 마무리를 지었다. 하나의 요리가 완성됨을 알리는 신호였다. 

 

 "오는 걸로 알게 그럼."

 

 후다닥 주방으로 향하는 로버트의 등에 대고 메이슨이 기어코 판결을 내렸다. 결국 아무말도 내놓지 못해 어깨가 축 처진채로 들어서는 로버트를 보고 사장이 미안한듯 눈썹을 긁었다.

 

 "오늘 많이 바쁘지? 양파 좀 주고갈래?"






인해가 완전히 마른 뒤의 가게는 마감도 더뎠다. 입구 앞 8:00pm~2:00am이라 적힌 푯말이 무색하게 손님이 완전히 빠진 시각은 3시가 다 되었을 때였다. 그것도 오늘 부던히 로버트를 깨우려던 알람처럼 일정시간마다 한번씩 일러준 결실이었다. 취기의 입김을 들이마신 사람들은 자신이 무어라 떠드는지, 상대방이 어떤 상태인지도 알아채지 못하면서 시간이 빠르게 흘러간다고만 불평했다. 언제 불렀는지 주말 시간대에 일하는 노바와 올리비아, 제이미가 와서 기다리며 야금야금 뒷정리를 도왔다. 그럼에도 해야할 정리와 준비는 더 필요해 보였다. 진작부터 퇴근하라며 등떠밀던 사장은 마지막 테이블을 자처한 남녀의 휘청이는 뒷모습이 멀어지자마자 직원 모두를 문밖으로 쫓아냈다. 언행과 얼굴은 사나웠지만 귀가비로 쥐어준 500달러에는 값어치 이상의 배려와 고마움이 매겨져있었다. 그러나 생각보다 늦어버린 계획이 유야무야 다음을 기약하길 내심 바라던 로버트에겐 족쇄나 다름없었다. 다섯명의 택시비치고도 너무 많은 금액이었기 때문이다. 사장까지 직원들의 단합을 원하는 상황에서 발을 빼기란 누구라도 쉽지 않았다.

 

 

 

 "스물 한살? 뭐야, 메이슨 너랑 동갑아냐?"

 "응, 그러네."

 

 노바가 옆에 앉은 메이슨의 어깨를 두드리며 웃었다. 근 한달을 같이 일했는데 나이도 터놓지 않은 평일 직원들의 사이가 퍽 우스운 모양이었다. 미샤는 뻐근한 손목을 풀더니 비운지 얼마 안된 술잔을 채웠다. 자리에 있는 그 누구도 무언가 첨가된 술을 마시고 싶어하지 않아 보드카의 독한 내음이 떠나질 않았고 금방 취기를 불러왔다. 술이 약해 맥주로 입술만 적시던 로버트는 여전히 빠져나갈 순간을 재고있었다. 목소리가 점점 커져가고 산만해지는 분위기를 봐선 머지 않은 듯 싶었다.

 

 "왜 말 안했어?"

 

메이슨이 묻자 로버트가 맥주잔 표면에 맺힌 물기를 손가락으로 훑으며 고민하는 기색을 띠더니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어...안, 물어봐서?"

 

 그게 뭐야. 동시에 퍼지는 각기 다른 웃음소리와 함께 노바의 손바닥이 또다시 메이슨의 어깨를 향했다. 나름 적절한 답변이라 생각했는데 한번 더 적절한 말을 내놓았다간 메이슨 어깨에 타박상이 생길 것 같았다. 그 뒤로 한시간 가량 로버트가 한 일이라곤 때에 맞춰 고개를 끄덕이는 것과 입꼬리를 올리는게 전부였지만 자잘한 정보는 꽤 많이 모여있었다. 예를 들어 미샤와 제이미가 원래 같은 시간대에 일했다는것, 메이슨과 로버트는 다른 대학이지만 전공이 같다는것, 사장은 술을 입에도 대지 않는다는 것들이 있었고 이밖에도 노바가 메이슨을 좋아하고 있다는것, 메이슨의 이별주기는 최대 두달이라는 이야기가 있었지만 사적인 종류의 정보는 대부분 당사자가 자리를 비웠을때 나왔으므로 그닥 높은 신용을 줄 순 없었다. 테이블 위로 수많은 잡담이 쌓여 산을 이뤘다. 그럴수록 그 앞의 사람들은 목을 가누지 못하고 눈꺼풀이 무거운 중력에 한층 길어진 텀으로 눈동자를 가렸다. 김빠진 맥주를 반이나 넘게 남긴 로버트는 덕분에 수습을 도맡아야했다. 돈을 보관하고 있던 미샤가 선두로 계산하기 위해 카운터를 찾았다. 그사이 잠든 노바와 제이미를 깨우고 자리를 비운 메이슨과 올리비아를 불러오는 일이 모두 로버트의 몫이됐다. 흡연을 핑계로 떠난지 한참이나 된 두명이었다. 만약 그들이 유흥가의 어둠 속에서 열렬히 서로의 입안을 탐구하는걸 알았더라면 귀가가 조금 늦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가지 않았을 거였다. 

 

 "아, 이제 가는거야? 미안미안. 밖에 너무 오래 있었지?" 

 

 목격자는 분명 로버트였는데 눈에 띄게 당황한것도 로버트뿐이었다. 올리비아는 새침한 모습으로 그곳을 벗어났고 메이슨은 그에게 다가서며 평소처럼 웃었다. 로버트는 같이 너스레를 떠는 대신 검지를 들어 자신의 입술끝을 두드렸다. 그 행동을 잠자코 보던 메이슨이 곧 아아- 하며 나지막한 탄성을 뱉고는 소매끝으로 립스틱 자국을 지웠다. 됐어? 하고 얼굴을 들이미는 메이슨은 어딘가 개운해보였다. 잠자코 고개를 끄덕이는 도중 모든 인원이 술집 밖으로 모였다. 

 

 집이 비슷한 방향을 나누다보니 올리비아는 미샤와, 노바는 제이미와 그리고 로버트는 메이슨과 함께 택시를 타고 가게 되었다. 이동하는 차 내부에 갇히자 메이슨이 급격한 취기에 시달렸다. 입덧마냥 분마다 헛구역질을 지르는 바람에 둘은 메이슨의 집을 한블럭 남기고 쫓기듯 내려야 했다. 자꾸만 기울어지는 몸을 부축하며 로버트의 후회가 아우성쳤다. 이대로 내버려둘수도 없어 집요하게 주소를 캐묻고 도달한 주택은 그야말로 작은 성이었다. 주변에 즐비한 집들로 봐서 부촌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메이슨네 성은 그보다 더욱 견고하고, 고고해보였다. 로버트가 초인종을 누르자 조금뒤 높은 담벼락 중앙에 연결된 대문이 열렸다. 드넓게 펼쳐진 정원을 코앞에 두고 로버트는 건조한 목구멍에 침을 한번 넘겼다. 강도질을 하러 온것도 아닌데 괜히 긴장이 됐다. 자신과 동떨어진 세계를 걸으며 두리번거리지 않으려 얼마나 노력했던가. 그때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들을 향해 여유로이 걸어오는 발걸음 소리도. 누가됐든 얼른 이곳의 짐을 넘겨주고 갈 생각이었다. 

 

 "나한테 넘기렴."  

 

 말 안해도 그럴거였어요. 차마 내뱉지 못한 속내가 반항적인 면모를 선보였다. 중저음의 말투가 너무나 다정해서 괜한 자존심을 일으켰다. 로버트는 십여분간 저보다 체격이 큰 남자를 이고 오느라 선선한 새벽바람에도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 저런. 그 모습을 보고 목소리가 안타까운 기색을 표했다. 

 

 "잠깐 기다려줄래?"

 "아니, 저-"

 "잠깐이면 돼."

 

 현관 센서등은 눈이 시릴 정도로 밝았다. 시야가 완벽히 트였을땐 목소리의 주인은 이미 등을 돌린후였다. 메이슨을 옆구리에 끼고 팔 하나로 받치며 가는데도 자세가 흐트러짐이 없었다. 줄곧 웅크려있던 피로가 그제서야 난동을 부렸다. 로버트는 기다리며 자신의 집을 떠올렸다. 몇년동안이나 돌아가지 못한 느낌이었다. 지금이라도 밟고 서있는 이 정원을 벗어날까 고민하는데 다시금 인기척이 가까워졌다. 말그대로 정말 잠깐이었다.

 

 "택시라도 타고 가."

 "괜찮은...데..."

 "미안해서 그래, 응?"

 

 제일 먼저 로버트의 눈에 들어온건 따스한 빛을 품은 녹안이었다. 그다음은 메이슨과 닮은 눈매가, 다음은 부드럽게 휘어진 입술이. 로버트는 말끝이 흐려지는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넋놓아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가 굳어 움직이지 않는 로버트의 손을 끌어와 제 손바닥 위에 올려놨다. 맞닿은 손의 감촉이 빠르게 혈관을 타고 올라와서 얼굴에 열을 올렸다. 

 

 "조심히 가."

 

 그는 짤막한 배웅을 남기고 돌아섰다. 로버트가 놓아준 그대로 뻗쳐있는 손을 내려다보았다. 거기엔 지폐 뭉텅이가 올려져있었다. 역시나 택시비치고는 많은 금액이었다. 도로변에 서서 택시를 기다리고, 집에 도착해 씻고, 간신히 몸을 누일때까지 로버트는 하루 끝자락에서 본 얼굴만 떠올렸다. 데려다주길 잘했어. 아니, 술자리에 참석하길 잘했어. 아니지 아니지, 일을 그곳으로 구하길 잘했어. 온종일 후회로 가득하던 사고가 잠드려는 로버트에게 끊임없이 칭찬을 속삭였다.

 

 

 

 

 로버트는 이제껏 살아오면서 취향을 따진 적이 없었다. 배고프면 눈앞의 가게에 들어갔고 부모님이 사주거나 얻어온 옷을 헤질때까지 입었다. 특별히 마음에 들어서가 아니라 특별히 마음을 쓰지 않아서였다. 무수한 선택의 기로가 미로처럼 연결되있는 삶도 똑같은 방식으로 대했다. 그 중 조금이나마 흥미를 돋우는 것이 있다면 독서정도였다. 로버트가 생각하기에도 지루하기 짝이없는 인간형이었다. 자아에 대한 고찰은 종종 했으나 연애감정은 포함하지 않았다. 일단 계기를 거쳐야 골몰하게 되는 법인데 그 계기가 없었다. 그래서 로버트는 자신이 무성애자라 섣부르게 판단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그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안일하게 버려두었던 문제가 일순간 부피를 키워 비장한 음악을 깔고 돌아온 것이다. 주말동안 그는 하루 두번 리조트의 복도와 비상구를 청소하고 집에 돌아와 잠들때까지 고심하곤 했다. 처음 본 사람의 얼굴이 왜 이토록 떠나질 않을까. 애초에 나는 남자에게 끌렸던걸까. 그렇다면 왜 하필 그남자일까. 생각의 물꼬는 대부분 이런식으로 연결됐다. 이틀은 고심의 결과를 내비치기엔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보다 더 열중해야 할 삶이 로버트에게 있었다. 

 

 '아마 그만큼 잘생긴 사람을 본 적이 없어서 놀란것 뿐일거야.'                     

 

 그래서 그는 학교 정문을 밟으며 거듭 섣부른 판단을 내렸다.

 

 



로버트가 자신의 오판을 알아차리게 되기까지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마 조금만 더 주의를 기울였다면 일터로 향하는 발걸음의 무게와 마음의 질량마저도 다름을 눈치챘을 것이다. 아마 그랬더라면, 하염없이 가벼워져 상공을 누비던 그것들이 메이슨의 한마디로 땅속 깊이 추락하는걸 느꼈을때에 충격이 덜했을지도 모른다. 

 

 "지난주에 나 데려다준게 너였다며? 아빠한테 들었어."

 "......네?"

 "너 아냐? 마르고 하얀 남자애라길래 넌 줄 알았는데."

 "아, 아니 맞아요......"

 "그치? 제이미는 어떻게 봐도 아니니까."

 

 하하. 근데 오렌지, 우리 말 놓기로 한거 아니었어? 그런적 없다. 동갑이라고만 했지. 하지만 로버트는 대강 고개나 한번 주억거리고 말았다. 아버지일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기껏 해봤자 나이터울이 크게진 형이거나 삼촌정도. 그는 스스로가 이토록 멍청하게 느껴진 적이 한번도 없었지만 왜 그렇게 느끼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그날 내내 멍한 정신이 기어코 실수를 남발하고 나서야 그는 이번엔 좀 더 오래 고민해보기로 마음먹었다. 

 

 

 

 

 매듭을 짓기 까지는 대략 3주가 걸렸는데, 여기엔 메이슨 공이 컸다. 가을이 무르익어 거리에 뒤섞인 바람은 시리고 몇개의 침엽수를 제외한 나무들은 햇빛이 충만했던 시절을 그리워하며 물들고 있었다. 성숙으로 향하는 그 계절속에서 로버트가 성장의 갈피를 찾지 못해 숨이 벅차오를때쯤 메이슨이 찾아왔다. 정확히는 메이슨의 부탁이. 

 

 " '법의 짐승화'? 들어본적 없는데."

 "대학교 도서관엔 없을거야. 근데 도움은 많이 됐어."

 

 모처럼 바쁘지않은 날이었다. 로버트와 메이슨은 창고에서 발주할 목록을 작성하며 틈틈이 사담을 나누었다. 주로 메이슨이 묻고 로버트가 대답하는 형식이었지만 어찌저찌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그러던 와중 전공과제 하나가 유사한 주제라는걸 알게되었다. 아직 손도 대지 못한 자신과 달리 완성이 머지않은 로버트를 약간 경외에 찬 눈빛으로 메이슨이 바라봤다. 빌려줄까? 그런 메이슨의 시선을 외면하지 못한 로버트가 물었다.

 

 "정말?"

 "으응. 어차피 학교도 다르고 같은 책을 참고한 경우는 많으니깐."

 "아, 근데 오늘까지야."

 "뭐가?"

 "과제가."

 

 토요일로 넘어가는 새벽 한시였다. 로버트가 시럽개수를 세다말고 메이슨을 돌아봤다.

 

 "오늘? 토요일 말하는거야?"

 "아니, 금요일. 아, 이제 어젠가?"

 

 의아함이 경악으로 바뀌는건 순식간이었다. 로버트는 그 기색을 숨기려 부던히 노력했지만 고스란히 메이슨에게 전해졌다. 그럼에도 메이슨의 얼굴엔 여전히 기쁜 웃음이 남아있었다.

 

 "어...그럼 필요없겠네?"

 "응? 아니야,아니야. 교수님이 날 이뻐하시거든."

 "교수님이?"

 "엉. 월요일이라도 가져가면 받아주실거야." 

 

 그렇구나. 로버트는 수긍하는척 했다. 참 해맑은 아이구나, 생각도 하면서.

 

 

 

 

 로버트가 두번째로 메이슨 집의 초인종을 눌렀을땐 환한 대낮이었다. 메이슨은 월요일이 아닌 수요일날 과제를 제출했고 그를 이뻐하는 교수님은 몇마디의 잔소리만 얹은뒤 받아주었다. 그뒤 그는 로버트에게 네 덕이라 말하며 고마움의 선물로 작은 오렌지모양 키링도 잊지않았다. 그러나 책을 돌려주는 일은 자꾸 깜박했다. 멋쩍은 사과를 반복해서 듣던 로버트가 그냥 가지라고 말해도 그는 도리가 아니라며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선물은 전날 챙기는게 되는데 책은 그게 안돼."

 

 도대체 무슨 차이냐고 묻고 싶었지만 결국 로버트는 리조트로 출근하는 길에 그의 집을 들리기로 했다. 그리하여 로버트는 다시 이곳에 서게 된 것이었다. 건축물을 덮은 상아색 페인트 사이사이가 햇빛에 번쩍였다. 태양이 존재하는 시간 아래서 본 집은 더욱 위압적이었다. 대문이 열리고 정원을 가로지르며 로버트는 이유모를 긴장감에 떨었다. 

 

 "안녕."

 

 여지껏 로버트를 혼돈에 집어넣고 빼내주지 않는 장본인이었다. 그는 현관문 틈에 서서 로버트를 맞이했다. 덜컥이는 가슴을 진정시키지 못한 로버트의 목소리가 볼품없이 흔들렸다.  

 

 "안,녕하세요."

 "저번에 메이슨 데려온 애 맞지?"

 "네,네."

  "메이슨은 아직 자는데, 무슨 일이야?"

 

 로버트는 말문을 망설였다. 빌려준 책 받으러 왔다는 간단한 문장이 머릿속에서 배열을 잃고 허둥댔다. 로버트는 긴장의 근원이 이 남자를 마주칠수도 있을거란 직감에서 비롯된것임을 깨달았다. 동시에 인간의 얼굴은 만물과 마찬가지로 어둠보다 빛이 윤곽을 더 뚜렷하게 조여준다는, 새로울 것 없는 사실을 체험했다. 이순간에도 인내심있게 대답을 기다리는 남자에게 잘근대기만하던 로버트의 입술이 열렸다. 

 

 "빌려준 책, 그러니까 제가 메이슨한테 빌려준 책이요. 그걸 받으려고......"

 

 아니나다를까 형편없는 문장구조가 튀어나왔다. 로버트는 퍼부어진 창피함에 딱 죽고싶었다.

 

 "음- 일단 들어와."

 

 다행히 그는 로버트의 맥락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로버트가 들어올수 있도록 문을 더 열어둔 그는 따라오라며 앞장서 걸었다. 안으로 들어선 로버트는 찬찬히 내부를 훑었다. 단조로운 인테리어였으나 구성된 가구와 제품들이 화려한 장막을 치고 있었다. 로버트는 그 점이 남자와 닮았다고 생각했다. 그는 편안한 실내복 차림이어도 수려한 품격과 위엄을 지니고있었다. 그리고 높은 콧대도. 로버트는 위층으로 향하면서 방문객이 잘 따라오는지 확인차 돌아본 남자의 옆얼굴에 마지막 감상을 덧붙였다. 이층은 아랫층과 달리 샌드컬러의 카펫이 전체적으로 깔려있었다. 소음을 방지하기 위한 카펫은 양말 너머로도 그 푹신함이 여실히 느껴졌다. 로버트보다 먼저 계단을 다 오른 남자가 복도 왼쪽의 두번째 방에 들어갔다. 메이슨은 그곳에 있었다. 

 

 "메이슨 세러신, 일어나."

 

 짐짓 엄한 목소리였지만 잠든 아들을 어르는 손짓과 눈빛에는 사랑이 그대로 묻어나왔다. 주말 오후의 달디단 잠을 방해받은 얼굴이 신경질적으로 구겨졌다. 결단코 일어나지 않겠다는 의지로 이불을 머리끝까지 올린 메이슨이 로버트의 희미한 음성에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안녕." 

 "로버트? 아아, 맞다."

 "뭘 맞다야. 얼른 일어나."

 

 남자는 좀 더 강력하게 아들을 타박했다. 괜한 눈치가 보인 로버트가 그를 만류하고 메이슨에게 말했다.

 

 "어디있는지만 알려주면 내가 찾을게."

 "으음, 거기...그, 책상위에..."

 

 꿈이 아직 흥건히 묻어나오는듯한 말투로 메이슨이 웅얼거렸다. 로버트는 침대 옆 책상에서 다른 전공책들 사이에 낀 책을 발견하고 꺼냈다. 그러고 나서 튀어나온 메이슨의 머리카락을 향해 인사했다.

 

 "다음주에 봐."

 "으응, 잘가아..."

 

 방을 나서는 로버트를 남자가 뒤따랐다. 올라왔던 계단을 다시 밟아 내려가면서 그가 사과했다.

 

 "미안, 쟤가 게을러."

 "아니에요. 어차피 책만 받으러 온거라서요."

 

 로버트는 책을 가방에 챙겨넣으며 덤덤한 투로 이야기했다. 그런데 순간 발을 헛디디고 말았다. 지퍼 채우는데 열중한 나머지 그만 발을 허공에 잘못 짚은 것이다. 순식간에 몸의 중심이 앞으로 고꾸라지는걸 느끼며 로버트가 눈을 질끈 감았다. 넘어지고 다가올 고통보다 또다시 그의 앞에서 머저리처럼 보여질 수치심이 로버트를 망연하게 만들었다. 

 

 "조심해야지, 아가."

 

 재빠르게 허리를 감싸안은 팔이 느껴지고 로버트의 등에 단단한 가슴이 부딪혔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그를 얼어붙게 만든건 목 뒤로 흐르는 숨결과 나지막한 목소리였다. 마른 체격이긴 했지만 평균키를 웃도는 로버트가 그의 품에 가볍게 들려있었다. 로버트의 심장이 한없이 곤두박질 치다가 이례적인 고동을 울렸다. 그 울림이 너무나도 짙어 감당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불시에 들이닥친 사고는 아무탈없이 면했지만 로버트의 가슴엔 흔적을 남겼다. 그동안 열심히 먼지를 털어낸 고민의 매듭이 잘린 순간, 그는 사랑과 실연을 동시에 직격타로 맞아야했다.

 

 


행맨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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