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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2.04 1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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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적이 감도는 차가운 침실. 등지고 누운 미조구치와 똑바로 누운 아몬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벽이 자리잡고 있었음. 먼저 설움을 토로한 미조구치도 미조구치지만 아몬도 역대급으로 당황중이었어. 아몬은 갈등상황을 잘 만들지 않는 성격이야. 만들더라도 오래 끌지 않지. 하지만 이번엔 달랐음. 자신의 잘못으로 시작되었고 아직 해결될 거라 장담할 수 없는 상황에서 또 미조구치의 인내심에 빚져 화해를 청할 수가 없었어.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유구무언이 된 아몬 불편한 잠에 들겠다.
불화는 먹구름처럼 끼었는데 아침은 화창하게 찾아왔음. 아침 일찍 깬 아몬은 무거운 몸을 억지로 일으켜 운동을 하고 미조구치의 도시락을 쌌음. 항상 싸던 콩을 큰 손으로 한 움큼 덜어내던 아몬 잠시 생각하더니 콩을 줄이고 유부와 구운채소를 추가했어. 어제 서류를 읽어봤는데 통과가 안 될 것 같진 않았음. 공무원으로서의 촉이랄까. 아직 조심해야 한다는 건 알지만 유부 몇 조각 먹는다고 큰일이 나진 않을 거야.
아침식사 중에도 냉기가 뚝뚝 흘렀음. 콩밭이었던 식단에 변화를 주면 미조구치에게 위로가 되지 않을까, 그럼 조금이라도 기분이 풀리지 않을까 내심 기대한 아몬. 그러나 미조구치는 오색찬란한 반찬들을 보고 잠시 멈칫했을 뿐 조용히 식사를 마쳤지.
미조구치를 학교까지 태워주면서도 냉전은 이어졌음. 아무리 아몬이라면 껌뻑 죽는 미조구치여도 이번 만큼은 화가 난건지 실망한 건지 쉽게 보들보들해지지 않았어. 슬슬 학교가 가까워졌음. 이렇게 미조구치를 등교시키고 나면 쭉 연락을 못할 수도 있어. 제 때 연락하고 싶어도 잠복중에 아주 작은 진동이라도 울리면, 교전중에 딴데 정신이 팔리면 큰 문제가 되니까 그냥 연락을 안 하는 게 나아. 그렇지만 긴 시간 미조구치가 혼자 속앓이를 하면 아몬도 가슴이 찢어질 것임. 아몬은 용기를 내기로 했음.
“요스케.”
학교 앞에 차를 세운 아몬 부디 비굴하게 들리지 않기를 바라면서 털어놓겠다.
“계속 양보시켜서 미안해. 하지만 요스케를 향한 진심이 결코 가볍지 않다는 것만은 믿어줘.”
내내 아몬을 외면하던 미조구치 드디어 아몬과 눈을 맞췄음. 아무 말도 안 했을 때보다는 살짝 풀어진 표정이었어. 미조구치는 진지하고 긴장된 눈빛으로 아몬을 바라봐왔음. 1초도 안 되는 짧은 순간이지만 아몬은 자기도 모르게 그 눈빛에 사로잡혔지.
“누가 온 세상을 주고 코타로 상을 데려가겠다고 하면 저는 그냥 코타로 상을 달라고 할 거예요. 코타로 상은 제 전부니까.”
“......”
“코타로 상은요?”
나도야. 요스케. 너는 내 전부야.
마음은 이미 그렇게 말했어. 하지만 그동안 미조구치를 일 다음으로 미뤘던 행동과 너무 모순되잖아. 뻔뻔하게 말을 못하겠는 거. 대답이 없는 아몬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미조구치는 시선을 피하곤 담담하게 이야기했음.
“저는 그래도 코타로 상을 제일 사랑해요. 세상이 무너진대도.. 코타로 상이 세상을 떠나도.. 우리가 사는 집이 사라지고 돈도 없고 밥을 빌어먹어야 해도 사랑해요.”
사실 그렇거든. 미조구치는 가진 거라곤 하나도 없이 벌거벗은 몸으로 아몬에게 왔음. 아몬과 살며 내것도 많아지고 욕심도 늘었지만 다 필요없어. 아몬에 비하면 중요하지 않아. 다 잃어버린다 해도 그저 처음 사랑을 시작했던 그때로, 가진 거라곤 없이 뜨겁게 사랑할 줄만 알던 때로 돌아가는 거야. 종종 아몬이 입버릇처럼 꺼내는 순직, 그 순간이 실제로 닥쳐도 미조구치는 아몬을 사랑하는 것 만큼은 못 멈춰. 그렇다면, 언제 울릴지 모를 타이머를 기다리며 살아가야 한다면, 적어도 자신이 아몬의 유일한 최우선이었으면 좋겠어. 너무 과한 바람일까...? 내가 철부지라 이런 걸 바라는 걸까?
“학교 다녀올게요. 집에서 봐요.”
미조구치는 애써 미소짓고는 내렸음. 아몬은 잘 다녀오라는 말도 못하고 빈 조수석을 멍하니 쳐다봤음. 자신의 여우가 남기고 간 예쁜 미소, 그러나 씁쓸하고 묘하게 깊은 미소를 곱씹으면서.
미조구치는 온종일 시들했음. 돌려받은 시험지에 100점이라고 쓰여 있어도 도시락에 연둣빛 말고 다른 색깔이 보여도 감흥이 없었지. 사실, 좋았어. 미조구치는 친구들에게 시험지를 펄럭이며 자랑했고 도시락을 까먹으며 활짝 웃었어. 근데 예전처럼 그 기분이 찐하고 오래 가지 않았음. 친구들은 시들한 미조구치를 놀이에 끼워주었지만 미조구치가 전혀 집중하지 못하고 자꾸 소외되는 걸 세 번까지만 붙잡아줬음. 결국 피구공에 코를 정면으로 맞곤 덜그럭대는 몸으로 놀이에서 빠지는 미조구치.
교실엔 마루오가 혼자 책상에 쭈그리고 앉아 뭘 열심히 적고 있었음. 가서 보니까 알 수 없는 기호들이 빽빽한 수학문제를 풀고 있음. 수학엔 소질이 없어 절로 인상이 찡그려지는 미조구치.
“그거 재밌어?”
툭 던진 질문이었음. 마루오는 미조구치와 단둘이 교실에 있게 됐을 때부터 엄청 긴장하고 있었다가 말까지 걸리니까 어쩔 줄 몰라 했어.
“맨날 그거 풀잖아. 재밌어?”
“으응..”
오? 또 무시당할 줄 알았는데 대답한다! 마루오가 말하는 건 처음 봐. 미조구치 갑자기 호기심 버튼 눌려서 우울감도 잊고 마루오에게 막 질문을 던짐. 뭐가 그렇게 재밌어? 집에서도 해? 주인이랑은 뭐해? 너네 집은 주인이랑 어떤 관계야? 주인이랑 어떻게 만나게 됐어? 주인님 좋아해? 평소에 한 마디도 안하고 살다가 갑자기 질문공세를 받아서 마루오는 삼각귀도 나오고 꼬리도 나오고 난리 남. 심지어 너무 긴장해서 은회색 꼬리털 다 터짐. 근데도 대답할 건 다 하데?
“주인님은 잃어버렸어. 보호소에서 내가 수학에 재능이 있다고 학교에 보내줬어.”
“어쩌다 주인님을 잃어버렸어?”
“납치당해서.”
세상에. 미호인 여우수인들한테는 흔한 일이기는 한데 얘도 참 녹록치 않게 살았구나. 근데 얘가 그렇게 예쁜 미모는 아닌데... 조금 더 마루오의 얼굴을 구석구석 뜯어보는 여우구치.
“그럼 보호소엔 어떻게 갔어? 탈출했어?”
“경찰이 구해줘서.”
“그렇구나.”
미조구치도 그랬지. 경찰이 구해줬어. 정확히는 아몬이 구해줬지. 아아 맞아. 아몬은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이었지.... 미조구치나 마루오 같은 수인들에게 아몬은 인생이 바뀌는 한 줄기 희망의 빛임.
“나도 경찰이 구해줬어. 내 주인은 경찰이거든. 주인님이 구해줬어.”
“결혼한다는 그 주인님?”
“응. 코타로 상이야. 불법경매 단속하다가 구해줬대.”
“나는 모피공장에 끌려갔었어.”
미조구치 뇌정지 옴. 모피공장이라니 그 무슨 끔찍한? 별짓 다 당하고 사는 수인들 저마다 기구한 사연 하나씩은 있다지만 모피는 어디서 들어본 적도 없는 악랄함이야. 그럼 얘는 수인들 털가죽을 벗겨내는 곳에서 구조된 거라고? 아 그래서구나. 은회색 털이 모피용으로 예쁘니까 납치당한 거였구나.
“수학문제를 풀면 죽은 수인들 생각도 안 나고 주인님 생각도 안 나.”
“주인님이 보고싶어? 좋은 주인님이셨나보다.”
“어렸을 때 잃어버려서 잘 기억 안 나. 보호소도 좋아. 이걸 잘하면 보호소에서 계속 날 돌봐줄 것 같아.”
“보호소에서 주인님 안 찾아준대?”
“공고를 냈대.”
공고를 내는 것만으론 부족해. 이런 식으로 공고를 내는 수인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건 주인을 찾아주는 시늉은 했다는 뜻이었음. 다시 말해 네 주인 못찾는다는 뜻이지. 운 좋아서 찾으면 잘된거고. 다행인지 불행인지 마루오는 보호소에서 지내는 게 괜찮은 거 같았음.
“보호소는 오래 못 있는 곳이잖아. 앞으로는 어떻게 해? 새로 입양 가?”
마루오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음. 그는 대학에 가서 확실한 전문인력이 되어 지금 있는 보호소에 고용되는 게 목표라고 했어. 미조구치 너무 놀랍겠다. 마치 수직선의 양 끝을 달리는 것처럼 미조구치와는 지향점이 정반대인 거야. 미조구치는 아몬에 의해 살고 아몬을 위해 살아. 근데 마루오는 자기 재능을 살려서 보호자 없이 다른 수인들을 보호하며 살겠대. 이렇게 살 수도 있구나, 라고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기분이 든 미조구치.
서로 교집합이라곤 없는 둘이지만 미조구치는 마루오를 처음 봤을 때부터 동질감을 느꼈어. 그건 바로 하나에 죽도록 몰입해 있다는 거.
“수학은 좋아. 올바른 접근방식을 정해 논리를 따라가기만 하면 돼.”
마루오는 수학에 대한 예찬을 쏟아내며 정말 마음이 편해 보였음. 잃어버린 주인에 대한 미련은 먼지 만큼도 없어 보였지. 넘 신기해. 주인에 대한 애정은 있는둥 마는둥이면서 (듣자하니 좋은 주인이었던 것 같은데도) 수학 따위가 뭘 좋아할 대상이나 될 수 있어...? 그리고 고작 수학을 좋아하는 걸로 저렇게 행복해지나? 하지만 진짜 그렇다면 마루오에겐 절대 고작이 아니겠지.
‘코타로 상에게 일이란 이런 걸까.’
그러고보면 인간들은 다 이렇게 살더라구. 반려 하나만 바라보고 살지 않지... 아몬에게 일이 마루오의 수학문제 같은 거라면 그렇게나 좋아하는 걸 제껴두라고 할 수는 없어.
아니 근데 위험한 일이잖아. 그럼 아몬에게도 좋지 않은 거 아닐까? 으으으.. 하지만 그 덕분에 마루오도 미조구치도 구조되어 새 삶을 살 수 있게 되었으니까 지금도 누군가는 아몬 덕에 인생이 바뀌고 있겠지? 위험해도 아몬은 보람을 느낄 거야.
연인이 아닌 것에 푹 빠져 사는 기분은 뭘까? 나라면 코타로 상 외에 뭔가에 빠질 수 있을까? 상상만 해도 너무 외로울 것 같은데 마루오는 참 좋아하네.
“이게 그렇게 좋다고..?”
미조구치는 그 좋다는 거 같이 해볼까 싶어서 마루오 옆에 앉았음. 마루오는 자기가 풀던 문제를 보여줬지.
“음..”
“별로야?”
미조구치는 정신없는 기호들의 나열이 그냥 어지럽기만 했음. 어느 게 문제고 풀이인지도 구분 못하겠어. 애초에 이걸 왜 하는지도 모르겠고. 마루오는 미적분에 대해 열띠게 설명해줬지만 미조구치는 점점 나른해지는 기분을 쫓아내느라 마루오의 설명이 조금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음. 정신이 맑았다 해도 귀에 들어왔을런지 의문이다만.
“미조구치 군, 자?”
“아, 아니. 듣고 있어. ‘미적부네’ 말이지.. 응..”
노부마치
정적이 감도는 차가운 침실. 등지고 누운 미조구치와 똑바로 누운 아몬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벽이 자리잡고 있었음. 먼저 설움을 토로한 미조구치도 미조구치지만 아몬도 역대급으로 당황중이었어. 아몬은 갈등상황을 잘 만들지 않는 성격이야. 만들더라도 오래 끌지 않지. 하지만 이번엔 달랐음. 자신의 잘못으로 시작되었고 아직 해결될 거라 장담할 수 없는 상황에서 또 미조구치의 인내심에 빚져 화해를 청할 수가 없었어.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유구무언이 된 아몬 불편한 잠에 들겠다.
불화는 먹구름처럼 끼었는데 아침은 화창하게 찾아왔음. 아침 일찍 깬 아몬은 무거운 몸을 억지로 일으켜 운동을 하고 미조구치의 도시락을 쌌음. 항상 싸던 콩을 큰 손으로 한 움큼 덜어내던 아몬 잠시 생각하더니 콩을 줄이고 유부와 구운채소를 추가했어. 어제 서류를 읽어봤는데 통과가 안 될 것 같진 않았음. 공무원으로서의 촉이랄까. 아직 조심해야 한다는 건 알지만 유부 몇 조각 먹는다고 큰일이 나진 않을 거야.
아침식사 중에도 냉기가 뚝뚝 흘렀음. 콩밭이었던 식단에 변화를 주면 미조구치에게 위로가 되지 않을까, 그럼 조금이라도 기분이 풀리지 않을까 내심 기대한 아몬. 그러나 미조구치는 오색찬란한 반찬들을 보고 잠시 멈칫했을 뿐 조용히 식사를 마쳤지.
미조구치를 학교까지 태워주면서도 냉전은 이어졌음. 아무리 아몬이라면 껌뻑 죽는 미조구치여도 이번 만큼은 화가 난건지 실망한 건지 쉽게 보들보들해지지 않았어. 슬슬 학교가 가까워졌음. 이렇게 미조구치를 등교시키고 나면 쭉 연락을 못할 수도 있어. 제 때 연락하고 싶어도 잠복중에 아주 작은 진동이라도 울리면, 교전중에 딴데 정신이 팔리면 큰 문제가 되니까 그냥 연락을 안 하는 게 나아. 그렇지만 긴 시간 미조구치가 혼자 속앓이를 하면 아몬도 가슴이 찢어질 것임. 아몬은 용기를 내기로 했음.
“요스케.”
학교 앞에 차를 세운 아몬 부디 비굴하게 들리지 않기를 바라면서 털어놓겠다.
“계속 양보시켜서 미안해. 하지만 요스케를 향한 진심이 결코 가볍지 않다는 것만은 믿어줘.”
내내 아몬을 외면하던 미조구치 드디어 아몬과 눈을 맞췄음. 아무 말도 안 했을 때보다는 살짝 풀어진 표정이었어. 미조구치는 진지하고 긴장된 눈빛으로 아몬을 바라봐왔음. 1초도 안 되는 짧은 순간이지만 아몬은 자기도 모르게 그 눈빛에 사로잡혔지.
“누가 온 세상을 주고 코타로 상을 데려가겠다고 하면 저는 그냥 코타로 상을 달라고 할 거예요. 코타로 상은 제 전부니까.”
“......”
“코타로 상은요?”
나도야. 요스케. 너는 내 전부야.
마음은 이미 그렇게 말했어. 하지만 그동안 미조구치를 일 다음으로 미뤘던 행동과 너무 모순되잖아. 뻔뻔하게 말을 못하겠는 거. 대답이 없는 아몬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미조구치는 시선을 피하곤 담담하게 이야기했음.
“저는 그래도 코타로 상을 제일 사랑해요. 세상이 무너진대도.. 코타로 상이 세상을 떠나도.. 우리가 사는 집이 사라지고 돈도 없고 밥을 빌어먹어야 해도 사랑해요.”
사실 그렇거든. 미조구치는 가진 거라곤 하나도 없이 벌거벗은 몸으로 아몬에게 왔음. 아몬과 살며 내것도 많아지고 욕심도 늘었지만 다 필요없어. 아몬에 비하면 중요하지 않아. 다 잃어버린다 해도 그저 처음 사랑을 시작했던 그때로, 가진 거라곤 없이 뜨겁게 사랑할 줄만 알던 때로 돌아가는 거야. 종종 아몬이 입버릇처럼 꺼내는 순직, 그 순간이 실제로 닥쳐도 미조구치는 아몬을 사랑하는 것 만큼은 못 멈춰. 그렇다면, 언제 울릴지 모를 타이머를 기다리며 살아가야 한다면, 적어도 자신이 아몬의 유일한 최우선이었으면 좋겠어. 너무 과한 바람일까...? 내가 철부지라 이런 걸 바라는 걸까?
“학교 다녀올게요. 집에서 봐요.”
미조구치는 애써 미소짓고는 내렸음. 아몬은 잘 다녀오라는 말도 못하고 빈 조수석을 멍하니 쳐다봤음. 자신의 여우가 남기고 간 예쁜 미소, 그러나 씁쓸하고 묘하게 깊은 미소를 곱씹으면서.
미조구치는 온종일 시들했음. 돌려받은 시험지에 100점이라고 쓰여 있어도 도시락에 연둣빛 말고 다른 색깔이 보여도 감흥이 없었지. 사실, 좋았어. 미조구치는 친구들에게 시험지를 펄럭이며 자랑했고 도시락을 까먹으며 활짝 웃었어. 근데 예전처럼 그 기분이 찐하고 오래 가지 않았음. 친구들은 시들한 미조구치를 놀이에 끼워주었지만 미조구치가 전혀 집중하지 못하고 자꾸 소외되는 걸 세 번까지만 붙잡아줬음. 결국 피구공에 코를 정면으로 맞곤 덜그럭대는 몸으로 놀이에서 빠지는 미조구치.
교실엔 마루오가 혼자 책상에 쭈그리고 앉아 뭘 열심히 적고 있었음. 가서 보니까 알 수 없는 기호들이 빽빽한 수학문제를 풀고 있음. 수학엔 소질이 없어 절로 인상이 찡그려지는 미조구치.
“그거 재밌어?”
툭 던진 질문이었음. 마루오는 미조구치와 단둘이 교실에 있게 됐을 때부터 엄청 긴장하고 있었다가 말까지 걸리니까 어쩔 줄 몰라 했어.
“맨날 그거 풀잖아. 재밌어?”
“으응..”
오? 또 무시당할 줄 알았는데 대답한다! 마루오가 말하는 건 처음 봐. 미조구치 갑자기 호기심 버튼 눌려서 우울감도 잊고 마루오에게 막 질문을 던짐. 뭐가 그렇게 재밌어? 집에서도 해? 주인이랑은 뭐해? 너네 집은 주인이랑 어떤 관계야? 주인이랑 어떻게 만나게 됐어? 주인님 좋아해? 평소에 한 마디도 안하고 살다가 갑자기 질문공세를 받아서 마루오는 삼각귀도 나오고 꼬리도 나오고 난리 남. 심지어 너무 긴장해서 은회색 꼬리털 다 터짐. 근데도 대답할 건 다 하데?
“주인님은 잃어버렸어. 보호소에서 내가 수학에 재능이 있다고 학교에 보내줬어.”
“어쩌다 주인님을 잃어버렸어?”
“납치당해서.”
세상에. 미호인 여우수인들한테는 흔한 일이기는 한데 얘도 참 녹록치 않게 살았구나. 근데 얘가 그렇게 예쁜 미모는 아닌데... 조금 더 마루오의 얼굴을 구석구석 뜯어보는 여우구치.
“그럼 보호소엔 어떻게 갔어? 탈출했어?”
“경찰이 구해줘서.”
“그렇구나.”
미조구치도 그랬지. 경찰이 구해줬어. 정확히는 아몬이 구해줬지. 아아 맞아. 아몬은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이었지.... 미조구치나 마루오 같은 수인들에게 아몬은 인생이 바뀌는 한 줄기 희망의 빛임.
“나도 경찰이 구해줬어. 내 주인은 경찰이거든. 주인님이 구해줬어.”
“결혼한다는 그 주인님?”
“응. 코타로 상이야. 불법경매 단속하다가 구해줬대.”
“나는 모피공장에 끌려갔었어.”
미조구치 뇌정지 옴. 모피공장이라니 그 무슨 끔찍한? 별짓 다 당하고 사는 수인들 저마다 기구한 사연 하나씩은 있다지만 모피는 어디서 들어본 적도 없는 악랄함이야. 그럼 얘는 수인들 털가죽을 벗겨내는 곳에서 구조된 거라고? 아 그래서구나. 은회색 털이 모피용으로 예쁘니까 납치당한 거였구나.
“수학문제를 풀면 죽은 수인들 생각도 안 나고 주인님 생각도 안 나.”
“주인님이 보고싶어? 좋은 주인님이셨나보다.”
“어렸을 때 잃어버려서 잘 기억 안 나. 보호소도 좋아. 이걸 잘하면 보호소에서 계속 날 돌봐줄 것 같아.”
“보호소에서 주인님 안 찾아준대?”
“공고를 냈대.”
공고를 내는 것만으론 부족해. 이런 식으로 공고를 내는 수인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건 주인을 찾아주는 시늉은 했다는 뜻이었음. 다시 말해 네 주인 못찾는다는 뜻이지. 운 좋아서 찾으면 잘된거고. 다행인지 불행인지 마루오는 보호소에서 지내는 게 괜찮은 거 같았음.
“보호소는 오래 못 있는 곳이잖아. 앞으로는 어떻게 해? 새로 입양 가?”
마루오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음. 그는 대학에 가서 확실한 전문인력이 되어 지금 있는 보호소에 고용되는 게 목표라고 했어. 미조구치 너무 놀랍겠다. 마치 수직선의 양 끝을 달리는 것처럼 미조구치와는 지향점이 정반대인 거야. 미조구치는 아몬에 의해 살고 아몬을 위해 살아. 근데 마루오는 자기 재능을 살려서 보호자 없이 다른 수인들을 보호하며 살겠대. 이렇게 살 수도 있구나, 라고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기분이 든 미조구치.
서로 교집합이라곤 없는 둘이지만 미조구치는 마루오를 처음 봤을 때부터 동질감을 느꼈어. 그건 바로 하나에 죽도록 몰입해 있다는 거.
“수학은 좋아. 올바른 접근방식을 정해 논리를 따라가기만 하면 돼.”
마루오는 수학에 대한 예찬을 쏟아내며 정말 마음이 편해 보였음. 잃어버린 주인에 대한 미련은 먼지 만큼도 없어 보였지. 넘 신기해. 주인에 대한 애정은 있는둥 마는둥이면서 (듣자하니 좋은 주인이었던 것 같은데도) 수학 따위가 뭘 좋아할 대상이나 될 수 있어...? 그리고 고작 수학을 좋아하는 걸로 저렇게 행복해지나? 하지만 진짜 그렇다면 마루오에겐 절대 고작이 아니겠지.
‘코타로 상에게 일이란 이런 걸까.’
그러고보면 인간들은 다 이렇게 살더라구. 반려 하나만 바라보고 살지 않지... 아몬에게 일이 마루오의 수학문제 같은 거라면 그렇게나 좋아하는 걸 제껴두라고 할 수는 없어.
아니 근데 위험한 일이잖아. 그럼 아몬에게도 좋지 않은 거 아닐까? 으으으.. 하지만 그 덕분에 마루오도 미조구치도 구조되어 새 삶을 살 수 있게 되었으니까 지금도 누군가는 아몬 덕에 인생이 바뀌고 있겠지? 위험해도 아몬은 보람을 느낄 거야.
연인이 아닌 것에 푹 빠져 사는 기분은 뭘까? 나라면 코타로 상 외에 뭔가에 빠질 수 있을까? 상상만 해도 너무 외로울 것 같은데 마루오는 참 좋아하네.
“이게 그렇게 좋다고..?”
미조구치는 그 좋다는 거 같이 해볼까 싶어서 마루오 옆에 앉았음. 마루오는 자기가 풀던 문제를 보여줬지.
“음..”
“별로야?”
미조구치는 정신없는 기호들의 나열이 그냥 어지럽기만 했음. 어느 게 문제고 풀이인지도 구분 못하겠어. 애초에 이걸 왜 하는지도 모르겠고. 마루오는 미적분에 대해 열띠게 설명해줬지만 미조구치는 점점 나른해지는 기분을 쫓아내느라 마루오의 설명이 조금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음. 정신이 맑았다 해도 귀에 들어왔을런지 의문이다만.
“미조구치 군, 자?”
“아, 아니. 듣고 있어. ‘미적부네’ 말이지.. 응..”
노부마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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