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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좀 돌려서 미조구치가 시험을 보기 전 이야기.

 

 

미조구치는 극단적으로 식사량을 줄였어. 얼마나 기운이 없는지 해질녁이 되면 인간폼으론 못 버텼음.

 

 

“저 여우로 있을게요..”

 

 

옷가지가 바닥으로 꺼지고 티셔츠 사이에서 빼빼 마른 여우가 비적비적 기어나왔음. 어쩔 수 없다곤 해도 아몬 참 착잡하겠지. 얼굴은 홀쭉하지 몸통도 갈비뼈가 다 나왔지. 저런 몸으로 시험공부한다고 바닥에 책 펴놓고 주둥이로 페이지 뒤적대기 시작하면 날밤 새도 안 일어남. 나날이 피골이 상접하지 않고 배겨? 보다 못해 너무 무리하지 말라고 했어. 근데 곱기만 한 그 얼굴이 확 일그러지며 방해하지 말라는 거야. 자기는 꼭 100점을 맞아야겠다고. 처음으로 미조구치가 버럭 신경질을 부린 날이었음. 아몬은 많이 놀랐지만 더 말리진 않았음.

 

 

다음날 미조구치는 짜증내서 미안했다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사과했음. 근데 짜증만 안 부리겠다는 거고 다이어트와 공부는 계속되었지. 바닥에 납작하게 엎드려 책만 파는 여우에게 아몬은 따뜻한 곡물차를 내려주는 것 외엔 해줄 게 없어라.

 

 

요즘 매일 그렇듯이 아몬은 혼자 침실에 누웠음. 그리고 깊은 한숨을 내쉬며 잠을 청했지. 피곤하고 졸린데 생각이 많아져서 그런가 잠이 안 옴. 뭐랄까 미조구치의 보호자가 되기로 결심한 순간부터 종자처럼 파묻혀있던 삶의 그림자들이 서서히 움트는 걸 느꼈어.

 

 

미조구치는 스스로 선택하고 책임지는 것이 하루가 다르게 늘어나고 있었음. 그건 집여우에서 독립적인 인간이 된다는 뜻이었지. 미조구치는 인간으로 사는 짐을 지는 중이야. 그것도 평범한 사람들은 인생의 중요한 시기마다 하나씩 겪는 큰 이벤트를 한방에 몰아 겪으면서. 촘촘하게 거듭되는 도전을 씩씩하게 이겨내 온 미조구치지만 아무래도 이제는 힘에 부치는 것 같아.

 

 

그러나 냉정하게 미조구치를 제일 힘들게 만드는 요소는 다이어트도 아니고 공부도 아니었음. 고위험 직군임에도 불구하고 직업의식이 투철한 아몬의 강직함지. 일중독 아몬은 사실 배려심 있는 연인은 아니야. 일 열심히 하는 그 성격으로 사랑도 성실하게 하니까 연인에게 양보만 받고 살면서도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거지. 하지만 순직이라는 가능성 만큼은 참 상대방을 고통주는 요인이었음. 뭐 당연한가. 한때 아몬의 진실한 사랑이었던 쿠로사와, 그 인내심 많은 사람도 순직의 가능성은 못 견디고 떠났어. 미조구치도 똑같은 시련에 부딪힌 듯 해.

 

 

미조구치와 살면서 아몬은 굳이 순직을 언급하지 않았었음. 둘 모두에게 힘든 주제고 급한 이야기도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미조구치가 ‘반려수인’이 아닌 ‘반려’인 ‘수인’이 되기로 한 날, 그건 미룰 수 없는 주제가 되었음. 과부가 된 수인은 의탁할 데 없이 혼자 살아남아야 해. 아닌 말로 돌싱인 수인을 누가 데려가. 수인단체에서 도와준다 해도 정말 초라하고 외롭게 살 수밖에 없어. 그리고 그런 수인들은 쉽게 범죄의 표적이 되지. 수인이 인간과 혼인한다는 건 그런 미래까지 각오하겠다는 뜻이야.


모든 부부는 이르든 늦든 언젠가는 사별해. 그러니까 수인들에게 혼자 살아갈 대비는 선택이 아닌 필수임. 특히나 아몬은 직무 특성상 위험률이 더 높으니까 더더욱 필수고. 그래서 아몬은 미조구치가 혼자서도 생계를 유지할 수 있게 미리미리 준비하라고 자주 충고했어. 미조구치는 그 때마다 표정이 어두워졌음. 자립능력을 키우는 게 어려워서가 아니라, 오히려 자립능력을 갖추는 건 좋은데, 그 목적이 아몬 없는 세상을 대비하기 위함이니까.

 

 

현실적으로 할 수밖에 없는 충고지만 그럼에도 아몬은 미조구치가 심적 부담을 느끼는 게 가여웠음. 그래서 서장에게 사무직 전환 의사를 밝힌 적도 있었어. 그때 서장의 반응이란... 도시 하나가 증발했다는 소식이라도 들은 것처럼 충격을 받던데. 서장은 부디 다시 생각해달라고 애걸복걸 했지. 그리고 하루만에 소문이 쫙 퍼졌음. 그 베테랑 아몬이 사무직을 희망한다더라 웅성웅성. 그 와중에 임무는 계속되어 핵심 요원인 아몬은 작전에서 빠지지도 못하고 범죄자를 체포하고 있었지. 그것도 붕괴 직전의 건물에서 1분 1초를 다퉈가며. 이 위험한 임무는 아몬 덕에 무사히 완수되었는데 아닌 게 아니라 아몬이 없으면 단순히 팀 사기가 떨어지는 수준이 아니라 그냥 작전진행이 안 됨. 이러니 그 다음 작전에도 투입되고 또 투입되고... 부서이동은 온갖 핑계에 걸려 거부되고 미뤄졌음. 그 틈을 타 동료들도 제발 현장에 남아달라고 매일 바짓가랑이 붙잡는 상황이지. 사실 남들이 뭐라건 현장을 떠나면 돼. 근데 못 떠나는 이유는 망할놈의 사명감 때문이겠다.

 

 

막 미조구치의 보호자가 되었을 때를 회상해봐. 자신은 이런 일을 하는 사람이니까 감수해달라고 조건을 걸었었지. 양해를 구한 거지만 사실상 조건이었음. 미조구치는 그러겠다고 했어. 그때는 어떤 불리한 조건을 걸어도 아몬에게 입양될 수만 있으면 상관없었던 거지. 아몬도 집에 있는 동안 미조구치를 잘 돌봐주기만 하면 될 거라고 안일하게 생각했었음. 그러나 삶은 결코 평면적이지 않았어. 미조구치는 끊임없이 그리고 가파르게 성장했음. 더 사랑스러워지고 성숙해지고, 새로운 면모도 생기고 자기를 계발해갔지. 그런 변화는 신비로울 만큼 깊고 예뻐서 외곬 기질인 아몬의 인생 전체와 비교해도 찬란했음.

 

 

급성장하는 미조구치를 도우며 연인으로서 최선을 다했다는 거, 아무도 부정 못할 걸. 하지만 그렇다고 충분했다는 뜻은 아니야. 그걸 알면서도 아몬은 예나 지금이나 일 70, 미조구치 30 정도의 비중으로 책임을 다할 뿐이었음. 사명감이라는 이름의 일욕심... 정말 이기적이지. 자신은 미조구치가 알아서 희생해 줄 걸 이용할 만큼 교활해. 그리고 순직이라는 만에 하나의 가능성을 그에게 부담지울 만큼 뻔뻔하지. 하다못해 부서이동이 가능하다는 말도 안 해줬어. 말하면 못 돌이킬까봐. 그 결과 미조구치는 시험점수에 목을 메며 이러고 살아. 이래서야 학교생활이 즐겁긴 할까. 아몬은 자신이 미조구치의 족쇄처럼 느껴졌음.

 

 

한참을 뒤척이다 어느덧 깊은 새벽이 됨. 아몬은 조용히 일어나 미조구치를 보러 나갔어. 미조구치는 없는 힘 쥐어짜내 인간으로 변했었는지 무슨 필기를 잔뜩 해놨더라고. 지금은 엎어져 잠들어 있음. 양이 줄어든 곡물차를 치우고 책을 정돈하자 인기척을 느낀 미조구치가 웅얼대며 깼어.

 

 

“우웅.. 우리 지역의 도시 문제 조사 절차는....“

“요스케. 들어가서 자.”

“안 돼에.. 아직 안 되는..”

 

 

얼마나 피곤하면 목이 다 잠겼음. 아몬은 참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가슴께의 통증을 느끼며 미조구치를 부축했음.

 

 

“시험 못 봐도 돼. 너무 걱정하지 마. 요스케는 내가 책임져. 공부가 재밌고 성취감를 느끼고 싶을 때만 100점을 목표로 해.”

“......”

 

 

나름 진심으로 한 말이건만 미조구치는 그닥 와 닿지 않는지 조용했음. 사실 미조구치가 느낀 건 정확해. 책임질 거라고 말만 하지 행동은 무책임할 거거든. 날이 밝으면 아몬은 또 위험한 작전을 수행하러 갈 거고 앞으로도 그럴 거거든.

 

 

“코타로 상.. 우리 입적도 하고 행복하게 살 거죠..?”

“물론이지.”

“아이도 낳고?”

“응. 아이도 낳자.”

 

 

정말이지 표리부동 그 자체다. 아몬은 자신의 이중성에 수치심마저 느꼈지만 그런 마음은 숨긴 채 말했음. 미조구치는 반쯤 감긴 눈으로 아몬을 지그시 바라보더니 가슴에 폭 안겨왔음.

 

 

“한숨 잘게요.”

“침대에 눕혀줄게.”

 

 

미조구치는 여우가 되어 아몬에게 대롱대롱 매달렸음. 아몬은 그런 여우를 편안하게 고쳐안고 침실로 데려갔지. 종일 공부만 하다 겨우 푸근한 침대에 누운 여우는 비로소 깊이 곯아떨어졌음.

 






노부마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