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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조구치는 시험지를 제출하고 개운한 표정으로 교실을 나섰음. 전교생 중 두번째로 빨리 풀었고 답안도 자신있었지. 아몬이 응원한다고 싸준 도시락을 챙겨 휴게실로 가자 평소엔 만원인 휴게실이 시험기간이라 널널했음. 딱 한 명 먼저 와서 먹는 수인이 있었어. 전교 1등. 근데 맨날 혼자인 애. 전에 같은 여우수인이라고 말걸었다가 무시당했는데 딱히 나쁜 애는 아니고 낯가림이 심한 거 같았음. 그냥 아무하고도 말을 안 함. 나이가 어려서 소극적인 거 같기도 하고. 마침 둘 뿐이기도 하고 말 좀 터볼까 했는데 저쪽에서 최대한 이쪽을 안 보려고 몸을 구부려서 거의 공이 됐음. 결국 공을 빤히 바라보다가 적당히 멀어지는 미조구치. 머쓱타드..
‘으으. 또 완두콩이다.’
밥 표면을 덮은 연두의 층. 그 아래층은 병아리콩이야. 요즘 미조구치는 절밥만 먹고 사는 기분임. 먹고싶은 거 실컷 먹어본지가 언제인지ㅠㅠㅠ 이게 다 입적 때문이다.
수인과 인간의 입적은 쓸데없이 까다로운 요건들이 많았음. 그중 하나가 수인의 신체스펙임. 심지어 구청이 요구한 스펙은 여우수인 표준도 아냐. 개수인, 고양이수인 표준스펙이지. 애당초 신체조건은 왜 요구하냐고 항의했더니 구청직원도 이런 일이 한두번이 아닌지 AI처럼 답변을 쏟아냈음. 개, 고양이수인은 흔하지만 여우수인은 음지에서조차 레어하던 시절 파양금지 서약을 법제화한 게 오늘날 수인혼인법으로 조금씩 개정되어 온 거다. 열악한 환경에서 자란 수인들은 건강이 나쁘니까 결혼까지 해놓고 나중에 병원비 핑계로 이혼하지 못하게 신체스펙을 미리부터 통제한…. 어쩌고 저쩌고….
길어지는 설명에 미조구치는 설명은 됐고 서류를 찬찬히 읽어내렸음. 중대형견 스펙에 맞추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근데 신장, 체중, 허리둘레, 체질량지수, 시력, 청력, 혈압, 기타 등등 여러 항목들을 다 통과하려면 중소형견 스펙에 맞춰야 하는 거야. 말도 안 되지. 체급이 다른데 여우 죽으라는 것도 아니고. 근데 현행법상 그렇다니까 어떡하나.
일단 서류폼만 채우고 집에 돌아온 아몬은 미조구치가 뼈까지 말라야 입적 스펙에 겨우 통과할 수 있다는 사실에 입적 자체를 재고할 정도로 심각한 고민에 빠졌음. 침묵을 지키던 미조구치가 우리 결혼 못하는 거냐고 넌지시 묻자 아몬은 눈에 넣어도 안 아픈 여우의 슬픈 눈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다음날 츠지무라에게 연락했지.
“네 도움이 필요해. 요스케는 건강하게 체중을 감량해야 해.”
요컨대 정상체중처럼 튼튼하지만 기아상태나 다름없는 신체스펙을 달성할 식단표와 영양제를 설계해줘.
당연히 츠지무라는 노발대발 했음. 그게 말이 돼? 기껏 건강하게 치료해 놨더니 왜 도로 망치냐고. 하지만 자초지종을 듣고는 날 잡아서 채혈하러 오라더니 며칠 뒤 눈물의 식단표와 정기검진표를 보내왔어. 그것이 콩폭탄이 시작된 배경이라 하겠다. 아무튼 요즘 아몬은 일 때문에 과로중임에도 불구하고 입적을 위해 엄청나게 복잡하고 긴 서류절차를 밟고 있었음. 정교한 식단표로 매일매일 미조구치의 밥을 짓는 노동은 당연하고..ㅇㅇ 이러니 미조구치도 어떻게 협조를 안해… 콩에 빠져 죽으래도 뛰어들어야지. 미조구치 그나마 먹을만한 병아리콩부터 먹고 따로 골라낸 완두콩 한꺼번에 숨 참고 삼킴.
수인학교는 나이, 학년 구분 없이 한 학급에 열명 쯤 되는 반이 딱 두개 있는 작은 교육기관이었음. 미조구치는 입학하자마자 적응을 빠르게 한 케이스. 마츠모토에게 사회화 훈련을 잘 받기도 했고 타고나게 배움이 빠르기도 해서 처음엔 초보반에 배정받았다가 금방 우등반으로 진학했지. 흥미로운 게 초보반은 수인만 초보가 아니라 주인들도 초보였음. 반대로 우등반은 이미 인간생활에 익숙한 수인들이 대부분이고 주인도 수인에 대해 잘 알았음. 학교 측에서 그렇게 반을 나눈 것도 아닌데 수업일수가 차면 꼭 그렇게 반이 갈려. 수인의 사회화는 수인과 주인이 노력해야 한다는 걸 증명하는 대목이었음.
우등반은 대체로 주인과 수인의 결속력이 매우 좋은 편이야. 그럼에도 주인과 입적까지 가는 경우는 미조구치가 유일했음. 반려동물로 사는 수인, 동거인으로 사는 수인, 연애만 하는 수인, 후원만 받고 독립할 예정인 수인 등 함께 사는 형태가 좋은 의미로 다양한데 입적은 그 중에서도 딥하디 딥한 찐 하이레벨이란 느낌일까. 그래서 미조구치는 친구들에게 주목받았고 작은 규모여도 결혼식까지 올릴 예정이란 이야기에 상당한 부러움을 샀음.
시험을 마친 인파가 밀려들어왔음. 조용하던 휴게실이 복작거렸고 같은 반 친구인 아마미야와 시시오도 미조구치를 찾아왔지. 아마미야의 닭고기조림과 시시오의 토마토파스타를 보자 미조구치는 말 그대로 침을 질질 흘려버림. 방금 밥 먹었, 아니 콩 먹었는데 벌써 허기져. 이거 정상인가...? 보다못한 시시오가 스파게티를 포크에 말아 내밀었지만 미조구치는 아몬을 떠올리며 씁쓸하게 침을 닦아냈음.
“다이어트 중이라 괜찮아. 츄릅.. 너네는 시험 잘 봤어?”
“그냥 쳤지. 잘 봐서 뭐해.”
“성적이 높으면 인정시험(검정고시)에 응시할 수 있잖아.”
“설마 미조구치 너 대학도 가?”
수인이 대학??? 가끔 뉴스에 나오는 주인공이 제 친구가 되나 해서 시시오는 스파게티를 양볼에 부풀린 채 물었음. 대부분 수인들이 음습한 목적의 펫으로 살아가는 세상에도 지능이 유달리 발달한 수인은 있었고 고로 대학이나 연구소에 스카웃되는 아주 드문 사례가 있긴 했음. 미조구치도 굳이 따지면 영특한 편이라 시시오는 자동으로 대학을 연상한 거임.
“꼭 간다는 건 아니구 그냥 좀 더 인간 기준으로 인정받을 수 있으니까. 취업에도 도움이 된대.“
”취업까지?! 은근히 야망가라니까. 입적에 대학에 취업, 수인계 최고의 아웃풋이다.“
”아니 진짜 대학이랑 취업은 아직 몰라.“
겸손이 아니라 정말 미조구치는 대학과 취업에 욕심이 없었음. 호기심 정도는 있지만 그닥? 그럼에도 가능성은 열어두는 이유는 오래전 아몬이 당부한 게 있어서임. 혹시라도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겨 미조구치 혼자 아이를 양육해야 하는 미래가 오면 츠지무라의 도움만으론 어려울테니 홀로서기할 대비책을 갖고 있어야 한다는 거. 가정 뿐일지라도 미조구치는 그런 암울한 미래 상상하기 싫었어. 그럼에도 아몬은 가끔씩 그 이야기를 꺼내 긴장을 놓지 않게 했음.
미조구치는 자기도 모르게 어두워진 얼굴을 다시 활짝 펴곤 친구들에게 손사레쳤음.
”내가 무슨 대학이야. 대학은 쟤 같은 애가 가는 거지.“
”마루오 군 말이지?“
아마미야는 미조구치가 누구라고 가리키기도 전에 알아챘음. 공부 잘하는 거 하면 수줍음 대왕 마루오 뿐이니까. 세명 분의 시선이 마루오에게 쏟아짐. 마루오는 자신의 이름이 나온 시점에 이미 깜짝놀란 듯 했고 곧이어 은회색 삼각귀를 구겨넣으며 허둥지둥 도시락통을 챙겨 휴게실을 떠나고 말았음. 미조구치는 마루오가 사라진 문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어이- 미조구치?”
“아..”
친구들의 부름을 듣고 대화로 돌아왔음.
“무슨 얘기더라? 아 맞다. 나는 수인학교 졸업하면 코타로 상이랑 결혼하고 아이도 낳을 거야. 그게 다야.“
미조구치 결연하게 그리 선언함. 그리고 배고파서 멍해진 머리로 생각했어. 입적도 쉽지 않고, 아몬이 없는 미래도 생각하지 않으면 안되고, 혼자 하프수인을 양육할 가능성도 고려해야 하고, 지금부터 대비한다 치면 당장 공부도 잘해야 하고, 일단 오늘 시험은 잘본 것 같은데...... 아 몰라! 배고파. 그게 짜증난다구. 미조구치는 여러 갈래로 나뉘어 뻗어나가는 불투명한 미래의 가능성들을 시원하게 점칠 수 없는 자신의 둔한 머리가 너무나도 답답했음. 수조 속의 금붕어처럼 딱딱 보이면 얼마나 좋을까. 그리고 이런 고민과 동시에 은근히 외로워지는 기분이 조금, 아니 꽤나 힘들었지.
노부마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