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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1.31 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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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ㅈㅈㅇ
ㅇㅌㅈㅇ
강징은 연희궁으로 돌아오자마자 몸이 좋지 않다는 핑계를 대고 수발을 드는 궁인들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의 출입을 엄금했음. 우자연은 저수궁의 서비가 회임을 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크게 상심했을 강징을 위로하려고 했지만 강징이 침전의 문을 닫아걸고 만나주지 않아서 춘희전으로 돌아갔음. 연희궁의 서편 전각에서 머물고 있던 염리는 강징의 기행에 어찌할 바를 몰라했음. 결국 자정이 되기 전에 가족들이 머물고 있는 춘희전에서 유숙하겠다며 얼마 안되는 짐을 꾸려서 아릉과 함께 연희궁을 떠났음. 강징은 나한상에 앉은채 밤을 지새며 눈가가 짓무를 정도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다가 동이 틀 무렵에야 겨우 눈물을 그쳤어. 그날 이른 아침에 상궁이 소셋물이 담긴 대야를 들고 침전안으로 들어왔을때 하룻밤 사이에 박꽃같이 하얗던 얼굴이 시커멓게 죽어 있었지. 상궁은 오랜 세월 궁중에서 기거하며 궁중의 생리를 누구보다 잘알고 산전수전을 겪은 사람이었음. 그동안 지체 높은 비빈들이 황제의 총애를 얻고자 안간힘을 쓰는것과 총애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치고 황제의 사소한 언동 하나에도 일희일비하는 모습을 숱하게 봐왔음. 그녀는 연귀비가 이제 다시는 전처럼 천진난만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리란 것을 직감적으로 알았어. 배신과 모략이 난무하는 궁중에서 유일하게 연꽃처럼 고결한 성품을 가졌고 천금보다 값진 미소를 지을줄 알며 진흙탕 같은 궁중의 더러움에 물들지 않으려고 노력하던 귀비에게 무심을 일깨우고 체념이라는 감정을 심은 이 삭막한 황궁이 못견딜만큼 싫어졌음.
강징은 상궁의 도움으로 세안을 마치고 경대 앞에 앉아서 제 머리카락을 빗겨주는 궁녀의 세심한 손길을 느끼며 눈을 감았음. 지난 밤은 마치 동지처럼 밤이 길고 길어 어둠이 영영 끝나지 않을것만 같았음. 깊은 적막속에서 시름에 잠겨 눈물을 짓다가 겨우 심란한 마음을 다잡았지. 황제의 비빈이 어린 동생에게 부모의 애정을 빼앗겨 우는 아이처럼 굴어서는 안됐음. 이제는 어린 나이도 아니거니와 언제까지 울고만 있을 수는 없었으니까. 강징은 입궁한 이후로 단 한번도 일신의 영달을 꾀한적이 없고 가문의 부귀영화를 바란적이 없었어. 조부나 부친이 더 이상 관직에 있지 않았고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운몽에서 유유자적한 삶을 살아가니 그럴 필요가 없었거든. 또한 황제의 비빈이 된 이후 줄곧 군왕의 총애를 받아왔으니 쟁총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고 과분한 욕심을 내지 않아 총애를 유지하려고 고군분투하지 않았음. 그런 잔잔한 호수와 같은 마음에 처음으로 파란이 일어난 것은 태후의 명으로 황후에게 공주의 양육권을 빼앗을겼을때였음. 그 이전에는 하늘에 맹세코 단 한번도 황제를 모시는데 일말의 사심도 가진적이 없었어. 그 이후에도 암투를 벌일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고 태중의 황손을 해치려는 음모를 알고 나서 그때 처음으로 힘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거였음. 계략을 꾸며 황후나 심상재를 궁지로 몰기는 했지만 보복성이었지. 그들처럼 먼저 나서서 다른 사람을 해친적은 한번도 없었어. 강징은 천성 자체가 남을 해칠만큼 악독하지 못했고 황제가 권모술수로 쟁총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고 혐오하니 지아비에게 미움을 받고 싶지 않아 매사에 행동을 조심했음. 그런 까닭에 모든 일에 지나치게 신중하고 우유부단했고 단죄를 하는데도 심혈을 기울였어. 강징은 아직 궁중의 생리에 익숙하지 못했고 황제가 퍼붓는 애정이 과실주처럼 감미롭고 그 애정에 흠뻑 취해버려 잠시 잊고 있었을거야. 그러다가 어제의 일로 깨달았겠지. 남녀간의 사사로운 정에 얽매여서는 안된다는 것을. 궁중에서는 결코 여염의 여인처럼 여인으로서의 행복을 누리며 살수가 없다는 것을 뼈저리 깨달음.
강징은 경대에 비친 제 얼굴에 수심이 가득해보인다는 것을 알고 궁녀에게 도화분을 발라달라고 함. 그리고는 자개함을 열어 황제가 하사한 백옥 팔찌를 꺼내려다가 말고 청금석으로 만든 팔찌를 꺼내서 손목에 끼웠음. 귀걸이도 황제가 내린 하사품이 아닌 내무부에서 올린 진주 귀걸이를 하고 구름처럼 탐스러운 운환에는 모란이나 봉황 비녀가 아닌 단아한 느낌이 나는 연꽃 비녀를 꽂았어. 상궁이 폐하께서 내린 하사품을 어찌하지 않으시냐고 물으려다가 강징이 부축을 해달라고 손을 내미는 바람에 차마 그러지 못했음. 강징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상궁에게 경대에 있는 하사품을 하나도 빠짐없이 자개함에 담아서 창고에 넣으라고 명하고는 침전의 문앞으로 걸어나갔음. 하늘에 먹구름이 잔뜩 끼고 더운 바람이 불어오는 것을 보니 한바탕 비가 쏟아질것 같았어. 강징은 처마 밑에 걸어둔 풍경이 바람에 흔들려서 나는 소리가 무척 청아해서 눈을 감았다가 떴어. 잠시후에 강징은 상궁으로부터 태황태후와 황귀태비가 서비의 회임 소식을 듣고 몹시 기뻐했고 이른 새벽부터 대불당에서 황자의 탄생을 기원하는 예불을 올리고 있다는 말에 마음이 번잡해져서 헛웃음을 지었음. 내 마음을 알아주는 이 아무도 없구나. 그렇게 읊조리고는 붉게 칠한 문설주에 손을 가져다 대었음. 간밤에 비탄에 잠겨서 가련한 제 처지를 원망하기도 했지만 아무리 원망하고 눈물을 흘린들 달라지는 것은 없었음. 궁중에 들어와 비빈이 된 이상 이 궁에서 일어나는 모든 풍파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었으니. 황제의 성총을 독차지해 황손을 넷이나 가지고 존귀한 귀비의 지위에 있어도 언제 총애를 잃을지 몰라 전전긍긍해야 하거늘. 강징은 실총한 비빈이 비천한 궁녀보다 하찮을때가 있다는 것을 알았기에 이제는 더 이상 남녀간의 사사로운 정이라는 쓸데없는 감정에 집착하지 않기로 다짐했어. 강징이 의복의 매듭에 달린 수관(염주)을 만지작거리며 기나긴 한숨을 쉬었다가 상궁에게 제비꽃 정원을 감상하고 싶으니 의자를 가지고 오라고 이름.
강징은 정원의 화단에 심은 제비꽃이 만개한것을 감상하다가 차를 한모금 마시고는 덮개를 덮어 상궁에게 건네주며 말했음. 상궁 내 몰골이 우습지 아니한가. 본궁이 참으로 어리석은 행동을 했지. 비빈으로서의 본분을 잊고 농중조(새장속의 새)인 내 처지를 망각하여 여염의 부녀처럼 낭군과 해로동혈하길 바랐으니 어찌 그리 어리석을 수가 있단 말이냐. 폐하께서 나를 진심으로 은애한다 그리 말씀하시기에 내 주제를 모르고 진실된 부부의 정을 바랐다. 쉴 새 없이 쏟아지는 밀어에 눈과 귀가 모두 멀어 남녀간의 사사로운 정 또한 한때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잊었지 뭔가. 아니 잊고 싶었는지도 모르겠구나. 동상각몽(같은 침상에서 서로 다른 꿈을 꾼다)이 이런것인줄 모르고 참으로 어리석게도 폐하의 마음이 내게 오래 머물기만을 바랐단다. 강징이 제 언행이 스스로도 어처구니가 없어서 헛웃음을 터뜨리자 상궁이 그런 강징이 안타까워 어찌할 바를 모르다 폐하께서는 진심으로 마마를 은애하십니다하고 먈을 꺼냈음. 강징이 지금은 그렇지만 시간이 지나도 과연 그럴까. 세상에 영원한 것이 있다던? 벌과 나비가 향기를 따르는것처럼 사내가 여인의 아름다움을 쫓는게 당연한 이치이지. 제왕은 무치이니 총애받는 여인이 시시각각 바뀐다고 해도 어느 누가 손가락질을 하겠느냐. 오히려 잘된 일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폐하께서 오래도록 본궁만은 총애하시어 다른 비빈들의 원성이 자자해 한시도 심신이 편한적이 없었는데 이제는 서비에게 그 질시가 향할것이니. 당분간 연희궁이 한산할테니 그동안 못다한 태교와 아이들의 양육에만 전념해야겠다. 강징이 상궁의 부축을 받고 자리에서 일어나 문앞에 시립을 하고 있는 궁녀들을 보고 한숨을 쉬었음. 다른 비빈의 폐하의 아이를 가졌다는 말에 속이 상하여 밤새 눈물 바람을 하였으니 이 사실이 다른 이들의 귀에 들어갈까 두렵구나. 강징의 말에 상궁이 고개를 숙이고는 연희궁의 궁인들의 입조심을 시킬터이니 걱정하지 마시라고 대답했음.
강징은 자녕궁으로 향하는 길에 수강궁에 들러 문안 인사를 올리려고 했지만 수강궁의 태감으로부터 두 분이 아직도 대불당에서 예불을 올리는 중이라는 말을 듣고 발길을 돌림. 강징은 밤새 잠을 한숨도 자지 못해서 몸 상태가 좋지 않았지만 자녕궁의 태후가 또 병석에 누웠다는 말에 직접 해황죽과 인삼탕을 만들었어. 자녕궁의 태후는 침상에 기대어서 염주를 손에 쥔채 불경을 읽다가 강징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한숨을 쉼. 강징은 무거운 몸이니 예를 올릴것이 없다고 말하는 태후에게 침식을 거르셨다고 들었는데 어디가 편찮으신지 여쭤보았음. 태후가 대답 대신에 상궁에게 의자를 내어주라 이르고 날이 무더우니 얼음을 띄운 산매탕을 내어와 귀비에게 가져다주라고 분부함. 강징은 병색이 짙어 초췌한 태후의 얼굴을 힐끔 쳐다보았다가 태후가 갑자기 제 손을 붙잡는 바람에 화들짝 놀람. 태후는 강징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다가 손을 뻗어 발갛게 짓무른 눈가를 매만지고는 한숨을 내쉬었음. 귀비 울었느냐. 어찌 눈물을 보인게야. 그 말에 강징이 몸이 고단하니 마음이 저절로 괴로워져서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고 심려를 끼쳐드려서 죄송하다고 둘러댔음. 태후가 언짢은 표정을 지으며 애가가 그런 말도 안되는 핑계를 믿고 넘어갈 정도로 어리숙해보이냐고 말함. 강징이 그 말에 당황하여 송구하다고 대답을 하려다가 서비가 회임을 하여 속이 상한것이냐고 묻는 말에 고개를 푹 숙임. 태후가 정곡을 찌르기도 했고 속이 상했냐는 말이 이전처럼 질책을 하려는 뜻으로 말한것이 아님을 알아서 그저 하염없이 눈물이 났음. 태후가 강징의 고개를 들게 하고 눈물이 흐르는 뺨을 다정하게 쓸어주는데 그 손길이 너무나도 따뜻해서 아무리 애를 써도 좀처럼 눈물이 그치지 않겠지. 태후가 안쓰러운듯 혹은 화가 난듯 도무지 헤아릴수 없는 복잡미묘한 표정을 짓고는 이리 심약해서야 한시도 풍파가 그치지 않는 궁중에서 어찌 너와 자식들을 지키겠느냐. 울지 말거라. 사람들 앞에서는 감정을 드러내서는 아니 된다. 속이 썩어 문드러져도 참고 또 참아야하느니라. 이리 나약한 모습을 보이면 그게 너의 약점이 되고 언젠가 사람들이 그점을 가지고 너를 헐뜯을것이다. 강징이 하염없이 울면서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를 정도로 말을 더듬었음. 강징이 한 말들을 대강 종합해보면 이런 모습을 보여서 송구하다 심려를 끼쳐서 죄송하다 마마의 가르침을 가슴에 새기겠다 그런 말들이겠지.
태후가 한숨을 쉬면서 도화꽃이 수놓인 영견으로 손수 강징의 눈물을 닦아주었음. 귀비 그거 아느냐. 언젠가는 눈물조차 마를 날이 온단다. 사람들의 시선이 두려워 눈물을 삼키고 또 삭이다보면 모든 감정들이 무감해질 날이 올것이야. 그게 궁중 비빈은 물론 규중 여인의 삶이니 너무 가혹하다 여기지 말거라. 강징이 명심하겠다고 대답을 하려는데 태후가 애틋한 표정을 짓더니 귀비라고 부르지 않고 갑자기 아가하고 부름. 강징이 어찌 그리 부르시냐고 말을 하려는데 태후가 강징의 흘러내린 머리칼을 귀뒤로 넘겨주며 너도 애가를 원망하느냐하고 물었음. 강징이 지체없이 예하고 대답을 하였는데 태후가 그 말을 듣고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별안간 웃음을 터뜨림. 태후가 다른 이와는 다르게 솔직해서 좋구나라고 말하며 책망하지 않음. 강징이 그 모습을 무척 의아하게 여겨서 신첩이 실언을 했는데 어찌 질책하지 않으시냐고 여쭈었음. 태후가 한숨을 쉬며 애가가 너를 못살게 굴었으니 네가 나를 원망하는게 당연하지 않느냐고 대수롭지 않게 여길거야. 그리고는 애틋한 손길로 뺨을 어루만지더니 황제에게 마음을 주었느냐. 하나도 남김없이 모두 주었느냐고 물었어. 강징이 그 말에 또 다시 눈물이 치솟아서 차마 말을 하지 못하고 대답 대신에 고개를 끄덕였음. 태후는 그 모습에 노여워하기는 커녕 한숨을 내쉬었어. 어리석은것 같으니라고. 네가 영특하고 총명하여 너만은 다른 여인들처럼 사사로운 정에 얽매이지 않을줄 알았더니 너도 그들과 별반 다를것이 없구나. 귀비 애가의 말을 명심하거라. 사내에게 네 마음을 다 내보여서는 아니 된다. 이 궁에서 황제에게 마음을 내보이는 것은 도박과 같단다. 네가 가진 패를 다 보여서는 아니 돼. 사내의 마음은 바람에 실린 홀씨처럼 가볍기 그지없어서 쉽게 날아가버리니 말이다. 상대가 애정에 목말라서 다른 곳을 찾아가지 않게 네 마음을 보여주되 아주 조금만 혹은 또 천천히 보여주어야 한다. 네가 조금씩 주는 애정이 너무 기꺼운 나머지 다른 생각은 하지 못하게 하여야 하느니라. 연심은 타오르는 불에 마른 장작을 던지는것 같아서 계속 더 하다 보면 활활 타올라 끝내 잿더미만 남는 법이니까. 애가의 말이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느냐. 강징이 태후마마의 말씀을 명심하겠다고 하니 태후가 한숨을 쉬면서 몸이 고단할터이니 이만 돌아가보라고 이름. 강징이 연희궁의 상궁을 불러서 태후마마께서 편찮으시다고 들어서 신첩이 직접 해황죽과 인삼탕을 만들어왔으니 신첩의 정성을 생각하여 한술이라도 젓수시라고 청했음. 태후가 지금은 입맛이 없으니 조금 있다가 먹겠다고 말을 하고는 자녕궁의 상궁에게 그릇이 담긴 쟁반을 받으라고 명함. 그리고는 강징의 얼굴을 면밀히 살피더니 눈물에 화장이 다 지워졌으니 상궁에게 분을 덧발라달라고 하려무나 그리 말했음. 강징이 웃으며 그리 하겠다고 대답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올리고는 자녕궁을 빠져나옴.
그 시각 경인궁의 황후는 안색이 좋지 않은 심상재를 보고 못마땅한듯 혀를 찼음. 도대체 무엇을 먹었길래 잠깐을 참지 못하고 계속 토악질을 하는게냐. 본궁이 금족령을 받아 허송세월하는 동안 넌 태극전에서 세상만사를 다 잊고 희희낙락한 모양이구나. 누가 보면 폐하의 성총을 독차지해서 품계가 오른줄 알겠어. 얼굴은 수척한데 다른 곳은 살이 붙은것을 보니 미련스럽게도 식욕이 도는대로 음식을 먹고 또 먹은게지. 네가 지금 그럴 처지이더냐! 폐하의 노여움을 사 상재로 강등이 되었으면 다시 복위를 할 생각을 해야지! 연귀비에 이어 서비까지 회임을 하였으니 본궁이 총애를 받을 일과 네가 복위할 일이 요원해진 것을 모르느냐. 하루라도 빨리 그 두 계집의 태중에 있는 황손들을 떨궈낼 계책을 생각해보거라! 황후의 계속되는 닥달에도 심상재가 목이 졸린 이처럼 파리한 낯빛으로 영견으로 입을 틀어막고 있었음. 그러다가 또 다시 구역질이 치미는지 인상을 찡그리더니 결국 참지 못하고 구토를 했음. 황후는 서역에서 들여온 융단이 토사물로 더러워지자 혐오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버럭 짜증을 냈음. 아주 꼴사납구나! 본궁이 너 같은것을 믿고 의지할 생각을 했다니 어리석기 짝이 없어! 너에게 계책을 기대하느니 진주에게 계책을 내놓으라고 하는게 더 빠르겠다. 심상재가 운혜가 가져온 양칫물로 입을 헹구고 병에 뱉자 황후가 그것조차 마뜩찮게 여기고 신랄하게 비난을 퍼부음. 심상재는 신첩의 몸 상태가 좋지 않아서 추태를 보였다고 진심으로 송구하다 사죄하고 방책을 생각해볼터이니 당분간 사람들 앞에서는 서비를 웃는 낯으로 대하셔야 한다고 아뢰었어. 심상재가 연귀비는 물론이고 서비에게도 하사품을 보내시고 마마께서 서비의 저수궁으로 행차하셔서 회임을 한 공을 치하해주시라고 하자 황후가 언짢은듯 얼굴을 일그러뜨림. 서비는 군기대신을 역임한 고관대작의 손녀라 출신이 존귀해 교만하기 짝이 없고 성격이 강직한데다 말을 가려하지 않아서 꼴보기가 싫어 죽겠다. 내 서비 고것이 회임한 유세를 떨것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화가 치미는구나. 황후가 서비가 회임한지 넉달이 되었는데도 여태 태기가 불안정한 것을 보면 뭔가 문제가 있는듯 하니 배가 더 부르기 전에 손을 써야겠다고 말했음. 심귀인이 표독스러운 황후의 얼굴을 힐끔거렸다가 저도 모르게 배에 손을 가져가서 얹었음. 황후가 그게 또 못마땅한듯 토사곽란을 하는것을 보니 급체를 한것 같으니 이만 물러가보라고 축객령을 내림.
강징은 연못 근처에 있는 정자에 앉아서 공주가 유모와 술래잡기를 하는것을 보고 조용히 미소 지었어. 그때 사윤이 잠투정을 하는지 유모의 품에서 계속 칭얼거리는데 아무리 달래도 울음을 그치지 않음. 강징이 유모로부터 아이를 건네받아서 품에 안고 얼렀어. 사윤은 어미의 품이 포근한지 금세 울음을 그치고 손가락을 쭙쭙 소리내어 빨았음. 그러다 졸음이 밀려오는지 가물가물거리는 눈으로 강징을 올려다보았음. 강징은 사윤이 더위라도 먹을까 저어되어 연꽃이 수놓인 단선으로 부채질을 해주며 더위를 식혀주었음. 그때 미지근한 바람이 솔솔 불어와 얼굴을 간질였고 바람을 맞으니 기분이 상쾌해져 마음속의 근심이 조금 덜어지는것처럼 느껴짐. 강징이 제 품에서 자울자울하는 사윤에게 자장가를 불러주려고 흐려질대로 흐려진 옛기억을 더듬었음. 어릴적 어머니가 불러주었을까. 누가 불러주었는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 노래를 생각이 나는대로 흥얼거렸음. 네 몽롱한 눈을 보니 누가 널 두고 떠날까. 같은 숲 속의 새가 나눠져 날아가는 기러기. 모두 악몽같아. 전설 속 신화에 꿈속에서 너를 꿈꾸는데 꿈에서 깰 수 있다고 신선이 말하는구나. 그런데 엄만 듣지 않아. 흐르는 물은 떨어진 꽃잎을 덮어 걱정에 걱정이 더하고 깊은 그리움의 쓴 맛을 맛보니 이후 기분은 더 좋지 않구나. 강징이 웃으며 노래를 부르자 사윤이 매듭에 묶인 염주가 신기한지 오동통한 손가락으로 꽉 쥐고 좀처럼 놓질 않았음. 강징이 그런 사윤을 보고 웃다가 매듭에 묶인 염주를 떼어내 사윤이 가지고 놀게 해주었음. 강징이 아이에게 정신이 팔려서 주변을 미처 살피지 못했는데 그림자가 지길래 고개를 들어보니 도대체 언제 온것인지 황제가 서 있었음.
망기는 아침 일찍 연희궁으로 행차했다가 강징이 수강궁에 갔다는 말에 수강궁으로 향했는데 도중에 길이 엇갈려서 만나지 못했음. 강징을 만나지 못하자 조바심과 불안이 일어서 오전 내내 정무도 보지 않고 강징을 찾아서 궁 곳곳을 헤매고 다녔음. 그러다 태감으로부터 연귀비가 후원에 있다는 말을 듣고 급하게 왔는데 익숙한 노랫소리에 이끌려서 정자까지 한달음에 달려왔음.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그토록 찾아헤맨 강징이 정자에서 아이에게 자장가를 불러주고 있었어. 강징은 굳은 얼굴로 제 품에 안긴 아이의 뺨을 간질이다가 유모에게 넘겨주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무릎을 꿇었음. 폐하를 뵈옵니다. 홍복을 누리소서. 망기는 강징이 늘 그랬듯이 환하게 웃으며 제 품에 안겨 어리광을 부릴줄 알았다가 다른 비빈들처럼 예법대로 인사를 올리는 것에 당황해서 표정이 굳어짐. 망기가 굳은 얼굴로 강징의 팔을 붙잡아 일으키고는 아징하고 이름을 부르는데 강징이 유순한 태도로 눈을 내리깔며 예 폐하 말씀하시옵소서하고 대답을 함. 망기가 전과 다른 행태에 기가 막혀서 지금 무엇을 하는 것이냐고 화를 냄. 강징이 도저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어찌 화를 내시냐고 묻는데 망기가 말문이 막혀서 말을 잇지 못하고 헛웃음을 터뜨림. 강징이 멀찍이 떨어져 있던 유모에게 공주와 황자를 데리고 연희궁으로 가서 오수에 들게 하라고 이르고는 망기의 얼굴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음. 폐하 신첩은 서비를 보러 저수궁으로 갈 생각이온데 신첩과 함께 같이 가시겠습니까. 서비의 태기가 아직 불안정하니 곁에서 탕약을 제때 드는지 몸에 다른 이상은 없는지 살펴야 할것 같다고 하다가 망기가 손목을 붙잡고 품안으로 끌어당기는 바람에 말을 다 잇지 못함. 짐이 다른 여인에게서 자식을 보게 되어 화가 난거냐고 묻는데 강징이 한숨을 쉬고는 신첩이 빈관에서 했던 말을 기억하지 못하십니까. 앞으로는 절대 투기하지 않겠다고 그렇게 말씀을 드리지 않았냐고 대답하고는 배가 눌려 답답하니 놓아달라고 청했어. 망기가 차라리 그때의 약조를 어찌 이리 쉽게 저버렸냐고 화를 내고 원망의 말들을 퍼부으라며 그대가 이리 냉담하게 구니 미칠것만 같다고 매달렸음.
강징이 어색하게 웃으며 폐하 신첩은 철부지 어린 아이가 아닙니다. 아이처럼 울며불며 떼를 쓰고 투정을 부리기에는 나이가 너무 많지요. 후궁에서 제일 높은 귀비의 지위에 있으면서 그동안 그런 모습을 보인것이 민망하고 부끄럽다며 앞으로는 세간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는 현모양처가 되고 싶으니 현숙한 여인의 행동을 본받고 그대로 따라하겠다고 말함. 망기가 강징을 품에서 놓아주고 눈을 마주치며 현숙한 여인이라니 짐이 그대에게 여인의 덕행을 바란적이 있냐고 따져물음. 강징이 여인의 당연한 도리를 지키겠다는 것인데 어찌 이리 언짢아하시냐고 말을 하다가 망기의 얼굴이 굳어진것을 보고 무릎을 굽혔음. 강징이 거기서 그치지 않고 신첩이 부언으로 폐하의 심기를 어지럽혔으니 벌을 내려주십시오 그리 말하자 망기가 어지러움을 느끼고는 정자에 놓인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음. 그러면서 그대의 마음이 풀릴때까지 기다리겠다고 자리에서 일어나라고 손짓을 했음. 망기는 매우 고단해보이니 저수궁으로 가지 말고 연희궁으로 돌아가서 쉬라고 명함. 강징이 폐하의 명을 받들겠다고 대답하고 이만 물러가보겠다고 다시 예를 올리고 급히 정자에서 내려감. 망기는 그런 강징의 뒷모습을 보며 머리가 깨어질것만 같아서 이마를 짚었음. 하룻밤 사이에 전과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 정인이 너무나도 낯설고 이제 다시는 전처럼 저에게 진심이 담긴 미소를 보여주지 않을까 덜컥 겁이 났음. 후궁의 다른 여인이 저에게 저런 태도를 보였다면 건방을 떤다고 화를 냈거나 지나친 방종을 참지 못하고 엄벌을 내렸겠지. 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닌 강징이 그러니 화가 나기는 커녕 가슴이 아파서 견딜수가 없을 정도였음. 제 잘못으로 정인에게 상처를 주었고 그로 인해 도탑던 부부 사이에 작은 균열이 생긴듯해서 가슴이 너무나 아렸음. 강징이 아닌 다른 여인에게서 자식을 볼 생각은 없었는데 질투에 눈이 멀어 헛된 행동을 하는 바람에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누구를 탓할까. 망기는 한숨을 쉬다가 연꽃이 만개한 연못을 한참동안이나 말없이 바라보았음.
강징은 연희궁으로 돌아와서 공주에게 글자를 가르치다가 공주가 제 이름은 어떻게 생겼냐고 궁금해하길래 붓에 먹을 묻혀 한지에 남린(藍潾)이라고 쓰고는 쪽 람에 맑을 린이란다. 아직 나이가 어려서 획수가 많은 글자를 읽고 쓰기에는 어려워해서 한글자 한글자 손으로 짚어가며 가르쳐주었음. 그럼 부황의 이름을 어찌 쓰냐고 궁금해하길래 부황은 천자이시니 이름이 아니라 휘라고 칭해야 한다고 가르쳐주었어. 그리고 부황의 휘를 적으려면 피휘를 해야 하니 나중에 가르쳐주겠다고 쪽 람에 잠길 잠을 쓰신다고 말로만 설명해주었음. 모친은 강징(江澄) 강 강에 맑을 징이고 사윤(谢允)은 사례할 사에 맏 윤 또는 진실로 윤을 쓴다고 했더니 그럼 아가 동생들은? 강징의 부른 배를 만지며 아직 짓지도 않은 이름을 궁금해함. 강징이 웃으면서 아직 이름을 짓지 않다고 말하고 우리 아가가 지어주련? 했더니 토끼! 강아지! 보배! 꽃! 자기가 좋아하는 동물이나 단어들을 마구잡이로 내뱉기 시작함. 강징이 공주의 이마에 입을 슬쩍 맞추고는 우리 보배 토끼가 그렇게도 좋으냐고 물었더니 공주가 고개를 세차게 끄덕임. 아린 부황께 말씀드려서 사육장에서 기르는 토끼를 데리고 올까? 토끼들이 배를 곯지 않게 때마다 당근도 주고 건초도 챙겨주겠다고 약조하면 토끼를 기르게 해주마 그렇게 말을 했더니 그 말을 듣고 신이 났는지 얼른 데리고 오자고 떼를 쓰기 시작함. 강징이 토끼를 몇마리나 데리고 올까? 하고 묻는데 잠시 고민을 하더니 손가락을 펼쳐서 세고는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무려 여섯마리나 데리고 오자고 함. 강징이 여섯이라는 숫자에 의아해져서 왜 여섯마리냐고 물었는데 공주가 부친 모친 큰 아기 작은 아기 막내 아기가 둘! 이렇게 여섯마리라고 말하며 활짝 웃었음. 강징이 연희궁의 뒤뜰에서 키우기에는 여섯마리는 너무 많다고 말을 했더니 자기가 잘돌볼수 있다고 칭얼거리기 시작함. 강징이 그 말에 꾀를 내서 앞으로 밥도 잘먹고 잠도 잘자고 투정도 안부리면 토끼를 키우게 해주겠다고 했더니 결연한 표정까지 지어보이며 앞으로 모친의 말을 잘듣겠다고 함. 강징이 터져나오는 웃음을 꾹참고 우리 아가 착하기도 하지 공주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음.
망기강징 망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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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징은 연희궁으로 돌아오자마자 몸이 좋지 않다는 핑계를 대고 수발을 드는 궁인들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의 출입을 엄금했음. 우자연은 저수궁의 서비가 회임을 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크게 상심했을 강징을 위로하려고 했지만 강징이 침전의 문을 닫아걸고 만나주지 않아서 춘희전으로 돌아갔음. 연희궁의 서편 전각에서 머물고 있던 염리는 강징의 기행에 어찌할 바를 몰라했음. 결국 자정이 되기 전에 가족들이 머물고 있는 춘희전에서 유숙하겠다며 얼마 안되는 짐을 꾸려서 아릉과 함께 연희궁을 떠났음. 강징은 나한상에 앉은채 밤을 지새며 눈가가 짓무를 정도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다가 동이 틀 무렵에야 겨우 눈물을 그쳤어. 그날 이른 아침에 상궁이 소셋물이 담긴 대야를 들고 침전안으로 들어왔을때 하룻밤 사이에 박꽃같이 하얗던 얼굴이 시커멓게 죽어 있었지. 상궁은 오랜 세월 궁중에서 기거하며 궁중의 생리를 누구보다 잘알고 산전수전을 겪은 사람이었음. 그동안 지체 높은 비빈들이 황제의 총애를 얻고자 안간힘을 쓰는것과 총애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치고 황제의 사소한 언동 하나에도 일희일비하는 모습을 숱하게 봐왔음. 그녀는 연귀비가 이제 다시는 전처럼 천진난만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리란 것을 직감적으로 알았어. 배신과 모략이 난무하는 궁중에서 유일하게 연꽃처럼 고결한 성품을 가졌고 천금보다 값진 미소를 지을줄 알며 진흙탕 같은 궁중의 더러움에 물들지 않으려고 노력하던 귀비에게 무심을 일깨우고 체념이라는 감정을 심은 이 삭막한 황궁이 못견딜만큼 싫어졌음.
강징은 상궁의 도움으로 세안을 마치고 경대 앞에 앉아서 제 머리카락을 빗겨주는 궁녀의 세심한 손길을 느끼며 눈을 감았음. 지난 밤은 마치 동지처럼 밤이 길고 길어 어둠이 영영 끝나지 않을것만 같았음. 깊은 적막속에서 시름에 잠겨 눈물을 짓다가 겨우 심란한 마음을 다잡았지. 황제의 비빈이 어린 동생에게 부모의 애정을 빼앗겨 우는 아이처럼 굴어서는 안됐음. 이제는 어린 나이도 아니거니와 언제까지 울고만 있을 수는 없었으니까. 강징은 입궁한 이후로 단 한번도 일신의 영달을 꾀한적이 없고 가문의 부귀영화를 바란적이 없었어. 조부나 부친이 더 이상 관직에 있지 않았고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운몽에서 유유자적한 삶을 살아가니 그럴 필요가 없었거든. 또한 황제의 비빈이 된 이후 줄곧 군왕의 총애를 받아왔으니 쟁총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고 과분한 욕심을 내지 않아 총애를 유지하려고 고군분투하지 않았음. 그런 잔잔한 호수와 같은 마음에 처음으로 파란이 일어난 것은 태후의 명으로 황후에게 공주의 양육권을 빼앗을겼을때였음. 그 이전에는 하늘에 맹세코 단 한번도 황제를 모시는데 일말의 사심도 가진적이 없었어. 그 이후에도 암투를 벌일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고 태중의 황손을 해치려는 음모를 알고 나서 그때 처음으로 힘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거였음. 계략을 꾸며 황후나 심상재를 궁지로 몰기는 했지만 보복성이었지. 그들처럼 먼저 나서서 다른 사람을 해친적은 한번도 없었어. 강징은 천성 자체가 남을 해칠만큼 악독하지 못했고 황제가 권모술수로 쟁총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고 혐오하니 지아비에게 미움을 받고 싶지 않아 매사에 행동을 조심했음. 그런 까닭에 모든 일에 지나치게 신중하고 우유부단했고 단죄를 하는데도 심혈을 기울였어. 강징은 아직 궁중의 생리에 익숙하지 못했고 황제가 퍼붓는 애정이 과실주처럼 감미롭고 그 애정에 흠뻑 취해버려 잠시 잊고 있었을거야. 그러다가 어제의 일로 깨달았겠지. 남녀간의 사사로운 정에 얽매여서는 안된다는 것을. 궁중에서는 결코 여염의 여인처럼 여인으로서의 행복을 누리며 살수가 없다는 것을 뼈저리 깨달음.
강징은 경대에 비친 제 얼굴에 수심이 가득해보인다는 것을 알고 궁녀에게 도화분을 발라달라고 함. 그리고는 자개함을 열어 황제가 하사한 백옥 팔찌를 꺼내려다가 말고 청금석으로 만든 팔찌를 꺼내서 손목에 끼웠음. 귀걸이도 황제가 내린 하사품이 아닌 내무부에서 올린 진주 귀걸이를 하고 구름처럼 탐스러운 운환에는 모란이나 봉황 비녀가 아닌 단아한 느낌이 나는 연꽃 비녀를 꽂았어. 상궁이 폐하께서 내린 하사품을 어찌하지 않으시냐고 물으려다가 강징이 부축을 해달라고 손을 내미는 바람에 차마 그러지 못했음. 강징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상궁에게 경대에 있는 하사품을 하나도 빠짐없이 자개함에 담아서 창고에 넣으라고 명하고는 침전의 문앞으로 걸어나갔음. 하늘에 먹구름이 잔뜩 끼고 더운 바람이 불어오는 것을 보니 한바탕 비가 쏟아질것 같았어. 강징은 처마 밑에 걸어둔 풍경이 바람에 흔들려서 나는 소리가 무척 청아해서 눈을 감았다가 떴어. 잠시후에 강징은 상궁으로부터 태황태후와 황귀태비가 서비의 회임 소식을 듣고 몹시 기뻐했고 이른 새벽부터 대불당에서 황자의 탄생을 기원하는 예불을 올리고 있다는 말에 마음이 번잡해져서 헛웃음을 지었음. 내 마음을 알아주는 이 아무도 없구나. 그렇게 읊조리고는 붉게 칠한 문설주에 손을 가져다 대었음. 간밤에 비탄에 잠겨서 가련한 제 처지를 원망하기도 했지만 아무리 원망하고 눈물을 흘린들 달라지는 것은 없었음. 궁중에 들어와 비빈이 된 이상 이 궁에서 일어나는 모든 풍파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었으니. 황제의 성총을 독차지해 황손을 넷이나 가지고 존귀한 귀비의 지위에 있어도 언제 총애를 잃을지 몰라 전전긍긍해야 하거늘. 강징은 실총한 비빈이 비천한 궁녀보다 하찮을때가 있다는 것을 알았기에 이제는 더 이상 남녀간의 사사로운 정이라는 쓸데없는 감정에 집착하지 않기로 다짐했어. 강징이 의복의 매듭에 달린 수관(염주)을 만지작거리며 기나긴 한숨을 쉬었다가 상궁에게 제비꽃 정원을 감상하고 싶으니 의자를 가지고 오라고 이름.
강징은 정원의 화단에 심은 제비꽃이 만개한것을 감상하다가 차를 한모금 마시고는 덮개를 덮어 상궁에게 건네주며 말했음. 상궁 내 몰골이 우습지 아니한가. 본궁이 참으로 어리석은 행동을 했지. 비빈으로서의 본분을 잊고 농중조(새장속의 새)인 내 처지를 망각하여 여염의 부녀처럼 낭군과 해로동혈하길 바랐으니 어찌 그리 어리석을 수가 있단 말이냐. 폐하께서 나를 진심으로 은애한다 그리 말씀하시기에 내 주제를 모르고 진실된 부부의 정을 바랐다. 쉴 새 없이 쏟아지는 밀어에 눈과 귀가 모두 멀어 남녀간의 사사로운 정 또한 한때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잊었지 뭔가. 아니 잊고 싶었는지도 모르겠구나. 동상각몽(같은 침상에서 서로 다른 꿈을 꾼다)이 이런것인줄 모르고 참으로 어리석게도 폐하의 마음이 내게 오래 머물기만을 바랐단다. 강징이 제 언행이 스스로도 어처구니가 없어서 헛웃음을 터뜨리자 상궁이 그런 강징이 안타까워 어찌할 바를 모르다 폐하께서는 진심으로 마마를 은애하십니다하고 먈을 꺼냈음. 강징이 지금은 그렇지만 시간이 지나도 과연 그럴까. 세상에 영원한 것이 있다던? 벌과 나비가 향기를 따르는것처럼 사내가 여인의 아름다움을 쫓는게 당연한 이치이지. 제왕은 무치이니 총애받는 여인이 시시각각 바뀐다고 해도 어느 누가 손가락질을 하겠느냐. 오히려 잘된 일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폐하께서 오래도록 본궁만은 총애하시어 다른 비빈들의 원성이 자자해 한시도 심신이 편한적이 없었는데 이제는 서비에게 그 질시가 향할것이니. 당분간 연희궁이 한산할테니 그동안 못다한 태교와 아이들의 양육에만 전념해야겠다. 강징이 상궁의 부축을 받고 자리에서 일어나 문앞에 시립을 하고 있는 궁녀들을 보고 한숨을 쉬었음. 다른 비빈의 폐하의 아이를 가졌다는 말에 속이 상하여 밤새 눈물 바람을 하였으니 이 사실이 다른 이들의 귀에 들어갈까 두렵구나. 강징의 말에 상궁이 고개를 숙이고는 연희궁의 궁인들의 입조심을 시킬터이니 걱정하지 마시라고 대답했음.
강징은 자녕궁으로 향하는 길에 수강궁에 들러 문안 인사를 올리려고 했지만 수강궁의 태감으로부터 두 분이 아직도 대불당에서 예불을 올리는 중이라는 말을 듣고 발길을 돌림. 강징은 밤새 잠을 한숨도 자지 못해서 몸 상태가 좋지 않았지만 자녕궁의 태후가 또 병석에 누웠다는 말에 직접 해황죽과 인삼탕을 만들었어. 자녕궁의 태후는 침상에 기대어서 염주를 손에 쥔채 불경을 읽다가 강징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한숨을 쉼. 강징은 무거운 몸이니 예를 올릴것이 없다고 말하는 태후에게 침식을 거르셨다고 들었는데 어디가 편찮으신지 여쭤보았음. 태후가 대답 대신에 상궁에게 의자를 내어주라 이르고 날이 무더우니 얼음을 띄운 산매탕을 내어와 귀비에게 가져다주라고 분부함. 강징은 병색이 짙어 초췌한 태후의 얼굴을 힐끔 쳐다보았다가 태후가 갑자기 제 손을 붙잡는 바람에 화들짝 놀람. 태후는 강징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다가 손을 뻗어 발갛게 짓무른 눈가를 매만지고는 한숨을 내쉬었음. 귀비 울었느냐. 어찌 눈물을 보인게야. 그 말에 강징이 몸이 고단하니 마음이 저절로 괴로워져서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고 심려를 끼쳐드려서 죄송하다고 둘러댔음. 태후가 언짢은 표정을 지으며 애가가 그런 말도 안되는 핑계를 믿고 넘어갈 정도로 어리숙해보이냐고 말함. 강징이 그 말에 당황하여 송구하다고 대답을 하려다가 서비가 회임을 하여 속이 상한것이냐고 묻는 말에 고개를 푹 숙임. 태후가 정곡을 찌르기도 했고 속이 상했냐는 말이 이전처럼 질책을 하려는 뜻으로 말한것이 아님을 알아서 그저 하염없이 눈물이 났음. 태후가 강징의 고개를 들게 하고 눈물이 흐르는 뺨을 다정하게 쓸어주는데 그 손길이 너무나도 따뜻해서 아무리 애를 써도 좀처럼 눈물이 그치지 않겠지. 태후가 안쓰러운듯 혹은 화가 난듯 도무지 헤아릴수 없는 복잡미묘한 표정을 짓고는 이리 심약해서야 한시도 풍파가 그치지 않는 궁중에서 어찌 너와 자식들을 지키겠느냐. 울지 말거라. 사람들 앞에서는 감정을 드러내서는 아니 된다. 속이 썩어 문드러져도 참고 또 참아야하느니라. 이리 나약한 모습을 보이면 그게 너의 약점이 되고 언젠가 사람들이 그점을 가지고 너를 헐뜯을것이다. 강징이 하염없이 울면서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를 정도로 말을 더듬었음. 강징이 한 말들을 대강 종합해보면 이런 모습을 보여서 송구하다 심려를 끼쳐서 죄송하다 마마의 가르침을 가슴에 새기겠다 그런 말들이겠지.
태후가 한숨을 쉬면서 도화꽃이 수놓인 영견으로 손수 강징의 눈물을 닦아주었음. 귀비 그거 아느냐. 언젠가는 눈물조차 마를 날이 온단다. 사람들의 시선이 두려워 눈물을 삼키고 또 삭이다보면 모든 감정들이 무감해질 날이 올것이야. 그게 궁중 비빈은 물론 규중 여인의 삶이니 너무 가혹하다 여기지 말거라. 강징이 명심하겠다고 대답을 하려는데 태후가 애틋한 표정을 짓더니 귀비라고 부르지 않고 갑자기 아가하고 부름. 강징이 어찌 그리 부르시냐고 말을 하려는데 태후가 강징의 흘러내린 머리칼을 귀뒤로 넘겨주며 너도 애가를 원망하느냐하고 물었음. 강징이 지체없이 예하고 대답을 하였는데 태후가 그 말을 듣고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별안간 웃음을 터뜨림. 태후가 다른 이와는 다르게 솔직해서 좋구나라고 말하며 책망하지 않음. 강징이 그 모습을 무척 의아하게 여겨서 신첩이 실언을 했는데 어찌 질책하지 않으시냐고 여쭈었음. 태후가 한숨을 쉬며 애가가 너를 못살게 굴었으니 네가 나를 원망하는게 당연하지 않느냐고 대수롭지 않게 여길거야. 그리고는 애틋한 손길로 뺨을 어루만지더니 황제에게 마음을 주었느냐. 하나도 남김없이 모두 주었느냐고 물었어. 강징이 그 말에 또 다시 눈물이 치솟아서 차마 말을 하지 못하고 대답 대신에 고개를 끄덕였음. 태후는 그 모습에 노여워하기는 커녕 한숨을 내쉬었어. 어리석은것 같으니라고. 네가 영특하고 총명하여 너만은 다른 여인들처럼 사사로운 정에 얽매이지 않을줄 알았더니 너도 그들과 별반 다를것이 없구나. 귀비 애가의 말을 명심하거라. 사내에게 네 마음을 다 내보여서는 아니 된다. 이 궁에서 황제에게 마음을 내보이는 것은 도박과 같단다. 네가 가진 패를 다 보여서는 아니 돼. 사내의 마음은 바람에 실린 홀씨처럼 가볍기 그지없어서 쉽게 날아가버리니 말이다. 상대가 애정에 목말라서 다른 곳을 찾아가지 않게 네 마음을 보여주되 아주 조금만 혹은 또 천천히 보여주어야 한다. 네가 조금씩 주는 애정이 너무 기꺼운 나머지 다른 생각은 하지 못하게 하여야 하느니라. 연심은 타오르는 불에 마른 장작을 던지는것 같아서 계속 더 하다 보면 활활 타올라 끝내 잿더미만 남는 법이니까. 애가의 말이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느냐. 강징이 태후마마의 말씀을 명심하겠다고 하니 태후가 한숨을 쉬면서 몸이 고단할터이니 이만 돌아가보라고 이름. 강징이 연희궁의 상궁을 불러서 태후마마께서 편찮으시다고 들어서 신첩이 직접 해황죽과 인삼탕을 만들어왔으니 신첩의 정성을 생각하여 한술이라도 젓수시라고 청했음. 태후가 지금은 입맛이 없으니 조금 있다가 먹겠다고 말을 하고는 자녕궁의 상궁에게 그릇이 담긴 쟁반을 받으라고 명함. 그리고는 강징의 얼굴을 면밀히 살피더니 눈물에 화장이 다 지워졌으니 상궁에게 분을 덧발라달라고 하려무나 그리 말했음. 강징이 웃으며 그리 하겠다고 대답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올리고는 자녕궁을 빠져나옴.
그 시각 경인궁의 황후는 안색이 좋지 않은 심상재를 보고 못마땅한듯 혀를 찼음. 도대체 무엇을 먹었길래 잠깐을 참지 못하고 계속 토악질을 하는게냐. 본궁이 금족령을 받아 허송세월하는 동안 넌 태극전에서 세상만사를 다 잊고 희희낙락한 모양이구나. 누가 보면 폐하의 성총을 독차지해서 품계가 오른줄 알겠어. 얼굴은 수척한데 다른 곳은 살이 붙은것을 보니 미련스럽게도 식욕이 도는대로 음식을 먹고 또 먹은게지. 네가 지금 그럴 처지이더냐! 폐하의 노여움을 사 상재로 강등이 되었으면 다시 복위를 할 생각을 해야지! 연귀비에 이어 서비까지 회임을 하였으니 본궁이 총애를 받을 일과 네가 복위할 일이 요원해진 것을 모르느냐. 하루라도 빨리 그 두 계집의 태중에 있는 황손들을 떨궈낼 계책을 생각해보거라! 황후의 계속되는 닥달에도 심상재가 목이 졸린 이처럼 파리한 낯빛으로 영견으로 입을 틀어막고 있었음. 그러다가 또 다시 구역질이 치미는지 인상을 찡그리더니 결국 참지 못하고 구토를 했음. 황후는 서역에서 들여온 융단이 토사물로 더러워지자 혐오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버럭 짜증을 냈음. 아주 꼴사납구나! 본궁이 너 같은것을 믿고 의지할 생각을 했다니 어리석기 짝이 없어! 너에게 계책을 기대하느니 진주에게 계책을 내놓으라고 하는게 더 빠르겠다. 심상재가 운혜가 가져온 양칫물로 입을 헹구고 병에 뱉자 황후가 그것조차 마뜩찮게 여기고 신랄하게 비난을 퍼부음. 심상재는 신첩의 몸 상태가 좋지 않아서 추태를 보였다고 진심으로 송구하다 사죄하고 방책을 생각해볼터이니 당분간 사람들 앞에서는 서비를 웃는 낯으로 대하셔야 한다고 아뢰었어. 심상재가 연귀비는 물론이고 서비에게도 하사품을 보내시고 마마께서 서비의 저수궁으로 행차하셔서 회임을 한 공을 치하해주시라고 하자 황후가 언짢은듯 얼굴을 일그러뜨림. 서비는 군기대신을 역임한 고관대작의 손녀라 출신이 존귀해 교만하기 짝이 없고 성격이 강직한데다 말을 가려하지 않아서 꼴보기가 싫어 죽겠다. 내 서비 고것이 회임한 유세를 떨것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화가 치미는구나. 황후가 서비가 회임한지 넉달이 되었는데도 여태 태기가 불안정한 것을 보면 뭔가 문제가 있는듯 하니 배가 더 부르기 전에 손을 써야겠다고 말했음. 심귀인이 표독스러운 황후의 얼굴을 힐끔거렸다가 저도 모르게 배에 손을 가져가서 얹었음. 황후가 그게 또 못마땅한듯 토사곽란을 하는것을 보니 급체를 한것 같으니 이만 물러가보라고 축객령을 내림.
강징은 연못 근처에 있는 정자에 앉아서 공주가 유모와 술래잡기를 하는것을 보고 조용히 미소 지었어. 그때 사윤이 잠투정을 하는지 유모의 품에서 계속 칭얼거리는데 아무리 달래도 울음을 그치지 않음. 강징이 유모로부터 아이를 건네받아서 품에 안고 얼렀어. 사윤은 어미의 품이 포근한지 금세 울음을 그치고 손가락을 쭙쭙 소리내어 빨았음. 그러다 졸음이 밀려오는지 가물가물거리는 눈으로 강징을 올려다보았음. 강징은 사윤이 더위라도 먹을까 저어되어 연꽃이 수놓인 단선으로 부채질을 해주며 더위를 식혀주었음. 그때 미지근한 바람이 솔솔 불어와 얼굴을 간질였고 바람을 맞으니 기분이 상쾌해져 마음속의 근심이 조금 덜어지는것처럼 느껴짐. 강징이 제 품에서 자울자울하는 사윤에게 자장가를 불러주려고 흐려질대로 흐려진 옛기억을 더듬었음. 어릴적 어머니가 불러주었을까. 누가 불러주었는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 노래를 생각이 나는대로 흥얼거렸음. 네 몽롱한 눈을 보니 누가 널 두고 떠날까. 같은 숲 속의 새가 나눠져 날아가는 기러기. 모두 악몽같아. 전설 속 신화에 꿈속에서 너를 꿈꾸는데 꿈에서 깰 수 있다고 신선이 말하는구나. 그런데 엄만 듣지 않아. 흐르는 물은 떨어진 꽃잎을 덮어 걱정에 걱정이 더하고 깊은 그리움의 쓴 맛을 맛보니 이후 기분은 더 좋지 않구나. 강징이 웃으며 노래를 부르자 사윤이 매듭에 묶인 염주가 신기한지 오동통한 손가락으로 꽉 쥐고 좀처럼 놓질 않았음. 강징이 그런 사윤을 보고 웃다가 매듭에 묶인 염주를 떼어내 사윤이 가지고 놀게 해주었음. 강징이 아이에게 정신이 팔려서 주변을 미처 살피지 못했는데 그림자가 지길래 고개를 들어보니 도대체 언제 온것인지 황제가 서 있었음.
망기는 아침 일찍 연희궁으로 행차했다가 강징이 수강궁에 갔다는 말에 수강궁으로 향했는데 도중에 길이 엇갈려서 만나지 못했음. 강징을 만나지 못하자 조바심과 불안이 일어서 오전 내내 정무도 보지 않고 강징을 찾아서 궁 곳곳을 헤매고 다녔음. 그러다 태감으로부터 연귀비가 후원에 있다는 말을 듣고 급하게 왔는데 익숙한 노랫소리에 이끌려서 정자까지 한달음에 달려왔음.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그토록 찾아헤맨 강징이 정자에서 아이에게 자장가를 불러주고 있었어. 강징은 굳은 얼굴로 제 품에 안긴 아이의 뺨을 간질이다가 유모에게 넘겨주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무릎을 꿇었음. 폐하를 뵈옵니다. 홍복을 누리소서. 망기는 강징이 늘 그랬듯이 환하게 웃으며 제 품에 안겨 어리광을 부릴줄 알았다가 다른 비빈들처럼 예법대로 인사를 올리는 것에 당황해서 표정이 굳어짐. 망기가 굳은 얼굴로 강징의 팔을 붙잡아 일으키고는 아징하고 이름을 부르는데 강징이 유순한 태도로 눈을 내리깔며 예 폐하 말씀하시옵소서하고 대답을 함. 망기가 전과 다른 행태에 기가 막혀서 지금 무엇을 하는 것이냐고 화를 냄. 강징이 도저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어찌 화를 내시냐고 묻는데 망기가 말문이 막혀서 말을 잇지 못하고 헛웃음을 터뜨림. 강징이 멀찍이 떨어져 있던 유모에게 공주와 황자를 데리고 연희궁으로 가서 오수에 들게 하라고 이르고는 망기의 얼굴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음. 폐하 신첩은 서비를 보러 저수궁으로 갈 생각이온데 신첩과 함께 같이 가시겠습니까. 서비의 태기가 아직 불안정하니 곁에서 탕약을 제때 드는지 몸에 다른 이상은 없는지 살펴야 할것 같다고 하다가 망기가 손목을 붙잡고 품안으로 끌어당기는 바람에 말을 다 잇지 못함. 짐이 다른 여인에게서 자식을 보게 되어 화가 난거냐고 묻는데 강징이 한숨을 쉬고는 신첩이 빈관에서 했던 말을 기억하지 못하십니까. 앞으로는 절대 투기하지 않겠다고 그렇게 말씀을 드리지 않았냐고 대답하고는 배가 눌려 답답하니 놓아달라고 청했어. 망기가 차라리 그때의 약조를 어찌 이리 쉽게 저버렸냐고 화를 내고 원망의 말들을 퍼부으라며 그대가 이리 냉담하게 구니 미칠것만 같다고 매달렸음.
강징이 어색하게 웃으며 폐하 신첩은 철부지 어린 아이가 아닙니다. 아이처럼 울며불며 떼를 쓰고 투정을 부리기에는 나이가 너무 많지요. 후궁에서 제일 높은 귀비의 지위에 있으면서 그동안 그런 모습을 보인것이 민망하고 부끄럽다며 앞으로는 세간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는 현모양처가 되고 싶으니 현숙한 여인의 행동을 본받고 그대로 따라하겠다고 말함. 망기가 강징을 품에서 놓아주고 눈을 마주치며 현숙한 여인이라니 짐이 그대에게 여인의 덕행을 바란적이 있냐고 따져물음. 강징이 여인의 당연한 도리를 지키겠다는 것인데 어찌 이리 언짢아하시냐고 말을 하다가 망기의 얼굴이 굳어진것을 보고 무릎을 굽혔음. 강징이 거기서 그치지 않고 신첩이 부언으로 폐하의 심기를 어지럽혔으니 벌을 내려주십시오 그리 말하자 망기가 어지러움을 느끼고는 정자에 놓인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음. 그러면서 그대의 마음이 풀릴때까지 기다리겠다고 자리에서 일어나라고 손짓을 했음. 망기는 매우 고단해보이니 저수궁으로 가지 말고 연희궁으로 돌아가서 쉬라고 명함. 강징이 폐하의 명을 받들겠다고 대답하고 이만 물러가보겠다고 다시 예를 올리고 급히 정자에서 내려감. 망기는 그런 강징의 뒷모습을 보며 머리가 깨어질것만 같아서 이마를 짚었음. 하룻밤 사이에 전과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 정인이 너무나도 낯설고 이제 다시는 전처럼 저에게 진심이 담긴 미소를 보여주지 않을까 덜컥 겁이 났음. 후궁의 다른 여인이 저에게 저런 태도를 보였다면 건방을 떤다고 화를 냈거나 지나친 방종을 참지 못하고 엄벌을 내렸겠지. 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닌 강징이 그러니 화가 나기는 커녕 가슴이 아파서 견딜수가 없을 정도였음. 제 잘못으로 정인에게 상처를 주었고 그로 인해 도탑던 부부 사이에 작은 균열이 생긴듯해서 가슴이 너무나 아렸음. 강징이 아닌 다른 여인에게서 자식을 볼 생각은 없었는데 질투에 눈이 멀어 헛된 행동을 하는 바람에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누구를 탓할까. 망기는 한숨을 쉬다가 연꽃이 만개한 연못을 한참동안이나 말없이 바라보았음.
강징은 연희궁으로 돌아와서 공주에게 글자를 가르치다가 공주가 제 이름은 어떻게 생겼냐고 궁금해하길래 붓에 먹을 묻혀 한지에 남린(藍潾)이라고 쓰고는 쪽 람에 맑을 린이란다. 아직 나이가 어려서 획수가 많은 글자를 읽고 쓰기에는 어려워해서 한글자 한글자 손으로 짚어가며 가르쳐주었음. 그럼 부황의 이름을 어찌 쓰냐고 궁금해하길래 부황은 천자이시니 이름이 아니라 휘라고 칭해야 한다고 가르쳐주었어. 그리고 부황의 휘를 적으려면 피휘를 해야 하니 나중에 가르쳐주겠다고 쪽 람에 잠길 잠을 쓰신다고 말로만 설명해주었음. 모친은 강징(江澄) 강 강에 맑을 징이고 사윤(谢允)은 사례할 사에 맏 윤 또는 진실로 윤을 쓴다고 했더니 그럼 아가 동생들은? 강징의 부른 배를 만지며 아직 짓지도 않은 이름을 궁금해함. 강징이 웃으면서 아직 이름을 짓지 않다고 말하고 우리 아가가 지어주련? 했더니 토끼! 강아지! 보배! 꽃! 자기가 좋아하는 동물이나 단어들을 마구잡이로 내뱉기 시작함. 강징이 공주의 이마에 입을 슬쩍 맞추고는 우리 보배 토끼가 그렇게도 좋으냐고 물었더니 공주가 고개를 세차게 끄덕임. 아린 부황께 말씀드려서 사육장에서 기르는 토끼를 데리고 올까? 토끼들이 배를 곯지 않게 때마다 당근도 주고 건초도 챙겨주겠다고 약조하면 토끼를 기르게 해주마 그렇게 말을 했더니 그 말을 듣고 신이 났는지 얼른 데리고 오자고 떼를 쓰기 시작함. 강징이 토끼를 몇마리나 데리고 올까? 하고 묻는데 잠시 고민을 하더니 손가락을 펼쳐서 세고는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무려 여섯마리나 데리고 오자고 함. 강징이 여섯이라는 숫자에 의아해져서 왜 여섯마리냐고 물었는데 공주가 부친 모친 큰 아기 작은 아기 막내 아기가 둘! 이렇게 여섯마리라고 말하며 활짝 웃었음. 강징이 연희궁의 뒤뜰에서 키우기에는 여섯마리는 너무 많다고 말을 했더니 자기가 잘돌볼수 있다고 칭얼거리기 시작함. 강징이 그 말에 꾀를 내서 앞으로 밥도 잘먹고 잠도 잘자고 투정도 안부리면 토끼를 키우게 해주겠다고 했더니 결연한 표정까지 지어보이며 앞으로 모친의 말을 잘듣겠다고 함. 강징이 터져나오는 웃음을 꾹참고 우리 아가 착하기도 하지 공주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음.
망기강징 망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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