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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1.25 09:06
오전 7시.
길었던 밤샘 작업이 끝나고 마지막 컨테이너를 실은 차가 부두를 떠났다. 납기를 맞추기 위해 밤새 쉼없이 움직였던 탓에 몸 여기저기서 뻐근함이 올라오기 시작한다. 다소 신경질적인 손길로 작업복을 벗어 던진 브래들리는 ‘사무실’이라고 적혀진 컨테이너를 향해 저벅저벅 걸어나갔다.
“수고했어”
정산을 기다리며 창문 너머로 그의 일이 끝나가는 것을 지켜보던 선원들은 일을 마치고 들어오는 브래들리의 등을 툭툭 치며 한마디씩 거들었다. 1년 만에 돌아온 배라고 했던가..꽤나 긴 시간을 나가있던 어선이라 작업양이 상당했다. 브래들리는 누군가가 건넨 커피를 홀짝이며 장장 7시간 만에 구석의 소파에 몸을 묻었다.
따끈한 커피 덕분인지 금세 몸이 나른해져 온다. 그를 둘러싸고 있던 선원들의 얼굴에도 고단함이 겹겹이 내려앉아 있다. 다만 정산을 앞두고 있어서인지 목소리만큼은 힘이 넘친다.
선장이 사무실로 들어오자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로 쏠린다. 곧 경리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던 그는 선원들의 이름을 한 명씩 호명하며 체크를 나눠주었다. 보수가 짭짤했던걸까, 금액을 확인한 선원들의 얼굴에 금세 화색이 돌기 시작한다.
정산을 받자마자 미련없이 곧장 떠나려는 사람들과 자기가 살테니 한 잔 하고 가자며 붙잡는 인부들이 뒤섞여 좁은 공간이 금세 소란스러워졌다.
“자 여기.”
언제나처럼 사장은 체크 대신 현금이 담긴 봉투를 그에게 내밀었다. 곧 연말이니 조금 더 챙겨넣었다며 눈을 찡긋이는 그에게 브래들리는 작은 목례로 답한다. 그런 사장의 옆에서 브래들리의 몸을 위 아래로 훑으며 입맛을 다시던 선장은 부두에서 마무리 작업만 하지말고 다음엔 본격적으로 배를 타보는게 어떻겠냐며 전격 스카우트 제안을 해오기 시작했다.
“보시다시피 손이 이래서요”
몇번이고 한사코 거절했음에도 끈질기게 그를 붙잡아대는 바람에 브래들리는 결국 왼손을 들이밀었다. 곧게 뻗은 손가락들 사이 엉망으로 뭉개진 검지와 중지. 뭔가를 더 말하려던 선장은 급히 입을 다문다.
“그래 여긴 옆에 딱 붙어서 챙겨야 할 식솔도 있고. 크리스는 잘 지내지?”
분위기가 더 어색해지기 전, 서둘러 사장이 개입해 화제를 돌렸다. 넉살 좋게 웃으며 주말에 둘이 맛있는 식사라도 하라고 100달러를 더 주머니에 꽂아넣는 그에게 브래들리는 다시 한번 작게 목례했다. 셔틀을 놓치겠다며 서둘러 브래들리를 돌려보낸 사장은 여전히 못내 아쉬운 얼굴로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선장을 상대한다.
“쟤가 전에 말했던 고향 후배 걔야?”
“….그래.”
“아깝네 아까보니까 일머리도 있고 힘도 엄청 잘 쓰더만. 생긴 것도 잘생긴게 이런데 있기는 아까워.”
“………”
“알았어 알았어. 눈독 그만 들일게.
다음번 선별 작업에나 다시 좀 꽂아주던가”
사장은 대답 대신 적당히 웃어보이며 셔틀에 오르는 브래들리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2년 전 느닷없이 그를 찾아와 절박한 얼굴로 도움을 청하던 그의 얼굴이 스친다. 더 늦기 전에 나와야 한다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않던 녀석이 어느날 갑자기 아픈 혹 하나를 달고 나타나서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기 시작한게 어느덧 2년이다.
“듣고는 있는 거야?”
상념에 빠져들려 할 때쯤, 여즉 징징대는 선장의 보챔에 그는 별 쓰잘데기 없는 소리를 한다며 잔뜩 인상을 썼다. 또 다시 술자리 얘기가 나오기 전, 그는 우렁찬 목소리로 전원해산을 외친다. 얼떨결에 내쫓기듯 사무실을 나선 선원들은 곧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항구 밖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한창 북적이던 부두가 조용해졌을 무렵, 무겁게 내려앉았던 해무는 온데간데 없이 따스한 햇살만이 구름을 제치고 내려오기 시작했다.
셔틀은 동네 초입에 그를 포함한 인부 몇을 내려놓곤 곧장 다음 행선지를 향했다. 인부들은 피곤에 절어 서로에게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기 바쁘다. 브래들리도 서둘러 그가 기다리고 있을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마을 가장 안쪽에 위치한 작은 통나무집. 가능한 한 남들의 눈에 띄고 싶지 않았던 두 사람의 의사가 철저히 반영된 선택이었다. 문을 열자 온실 마냥 후끈한 내부의 열기가 새어나온다. 그 일 이후 크리스는 유독 추위를 못견뎌했다. 허한 몸 때문인지 이곳으로 이주해 온 초반 몇개월 내내 기침과 열을 달고사는 바람에 항상 난방은 최대치를 유지하곤 했다.
자고 있는건지 안에선 아무 기척이 없다.
발소리를 죽여 살금살금 복도를 걸어 들어가면 소파 위에 한껏 웅크린채 새우잠을 자고 있는 커다란 인영이 보인다. 브래들리는 가만히 그 앞에 자리를 잡고 그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색-색-고르게 숨을 내쉬는 소리. 밤새 그를 기다리며 그림을 그린건지 발갛게 여문 손가락 끝은 물감 자국들로 가득하다. 달랑 앞치마 하나를 이불마냥 덮은 모습에 쯧. 혀를 찬 브래들리는 담요를 가져와 덮어주었다.
“웅..왔어??”
간신히 밀어올린 눈꺼풀 사이로 말간 눈동자가 눈을 맞춰온다. 더 자라는 브래들리의 말에도 크리스는 고개를 저으며 기어코 몸을 일으켰다. 졸린 눈을 부비며 부엌으로 들어가나 싶더니 곧 스토브에 불을 올리는 소리가 들린다. 브래들리는 입고 있던 점퍼를 내려놓고 식탁 의자에 앉아 멍하니 그가 움직이는 것을 지켜본다. 부엌 집기들을 다루는 솜씨가 이제 제법 익숙해보였다. 얼마 안 가 따끈한 클램차우더와 데운 빵이 그의 앞에 나란히 놓였다.
“너는 안먹어?”
“그게..배고파서 먼저 먹었어”
조금 부끄러운 듯 얼굴 위로 배시시 번지는 웃음에, 브래들리는 잘했어.라며 크리스의 머리를 헤집었다. 크리스는 꽤나 기분이 좋은지 브래들리의 맞은 편에 앉아 그가 깨끗이 그릇을 비워나가는 모습을 헤실헤실 바라본다.
“그만 봐. 얼굴 뚫리겠다”
되직한 스프에 목이 막혀 소리가 조금 크게 나왔던 것인데 크리스는 동그랗게 눈을 뜨며 화들짝 시선을 거뒀다. 농담이야 농담. 브래들리는 빠르게 크리스를 안정시킨다. 가끔씩 큰 소리를 내거나 조금 정색하기만 해도 바로 움츠러드는 모습이 안쓰럽다. 대체 언제까지 이러려나. 한때는 저도 그 원인 중 하나였기에 브래들리는 미안한 마음이 들어 쓰게 웃었다.
조금 어색해진 분위기에 부유하던 그의 시선이 거실 한복판에 놓인 그림에 꽂힌다. 설경. 집을 나서면 지겹도록 볼 수 있는 풍경이건만 크리스는 이곳에 온 이후, 눈이 내리는 풍경만을 줄창 그려내고 있었다. 집에서 혼자 머무는 시간이 많다보니 그림이라도 그리며 무료함을 죽여보라 했던 건데, 12색 색연필로 제법 그럴 듯한 그림을 뚝딱 그려내는 걸 보고 브래들리는 당장 다음날 그의 손에 캔버스와 물감을 쥐어주었다. 그 후론 아주 열심이다. 최근엔 소통을 하고 지내는 몇몇 이웃들에게 그림 의뢰를 받아오기까지 했다. 제법 그럴싸해 보이는게 제 눈에만 그런 것이 아닌 것 같다.
“밤새 그린거야?”
어제까지만해도 텅 비워져 있던 배경에 건물들이 들어서 있다. 누가 봐도 동네 빵집을 따라 그린 듯한 가게 앞 벤치에 홀로 눈을 맞으며 앉아 있는 남자는..
“이거 나야?”
크리스는 대답 대신 빙그레 웃음을 짓는다.
마치 숨은 그림 찾기라도 하듯 크리스는 언제나 그림 한구석에 작게라도 브래들리를 등장시키곤 했다. 조금 어처구니 없다는 얼굴로 그림을 살피는 브래들리가 우스웠는지 이내 푸흡.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다음 번엔 너도 그려. 나 너무 외로워 보인다”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이는 눈가엔 다시 잠기운이 어려있다. 이 곳에 정착한 후, 크리스는 부쩍 잠이 늘었다. 어떨 땐 하루의 절반 이상을 자면서 보내기도 하는데 겨울잠이라도 자는거냐 놀리고는 했지만 아마 몸이 회복되는 과정이라 그런 것 같았다. 그래도 전보다 살이 올라 점점 보기좋은 모양새를 갖춰가는게 다행이지 싶다.
“씻고 올게. 먼저 자고 있어”
“웅..”
반쯤 감긴 눈으로 굳이 기다리겠다는 말을 하지 않는 걸 보니 정말 졸려운 것 같았다.
욕실에서 나왔을 때 크리스는 침대 헤드에 몸을 기댄 채 고롱고롱 졸고 있었다. 잠이 쏟아지는 와중에도 기다려 보려했던 게 티가 나, 브래들리의 입가에도 씨익 웃음이 걸린다. 자자. 크리스의 팔을 붙잡고 곁을 파고들자 크리스는 순순히 자리에 누워 몸을 붙여온다.
“….좋아..”
“응?”
“브래들리 냄새 좋아..”
얘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고는 있는 걸까. 하필 몸까지 더 가까이 붙어와 서로의 다리가 얽혀들며 브래들리의 마음을 충동질하기 시작한다. 더 늦기 전에 지금이라도..? 그런 브래들리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크리스는 세상 모르고 잠들었다. 헐거워진 티셔츠 넥라인 사이로 비치는 쭉 뻗은 쇄골과 가슴팍. 묘한 감정을 불러 일으키는 크리스의 몸을 샅샅이 훑다보면, 신기할 정도로 울대가 도드라지지 않은 매끈한 목에 시선이 머문다. 그리고 옆에 자리한 작은 흉. 시간이 지나 많이 희미해지긴 했어도 그 날의 흔적은 여전히 크리스의 몸에 남아있다.
이런 애를 두고 잠시 무슨 생각을 했던 건가 싶어 브래들리는 고개를 흔들었다. 협탁 위의 스탠드를 끄고 나니 완전한 어둠이다. 둘만이 덩그라니 남은 적막 속에서 그는 크리스의 몸을 당겨 안았다.
뿌꾸프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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