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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1.14 2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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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 하....윽..."

멍한 얼굴로 제 손에 흩뿌려진 정액을 바라보다가, 익숙한 손놀림으로 옆에 놓인 티슈를 뽑아 아래를 닦았음. 이미 수북하게 쌓인 티슈를 애써 모른 척하면서 한꺼번에 집어 쓰레기통에 처박았음.

"...젠장."

어느새 정대만으로 한 발 빼는 게 이제는 일상이 되어버렸음. 정대만이 다른 남자 밑에 깔려 허덕이는 모습을 상상하다가 나중에는 남자를 자신으로 바꿔치기도 했음.

이젠 인정할 수밖에 없었음. 정대만에게 꼴리는 것뿐만 아니라, 그를 좋아하게 됐다는 것을.

이미 너무 늦었나.

애인이 생겼다고 말하던 정대만의 표정이 어땠지? 행복해 보였나? 새삼 난 왜 이런 걸 신경 쓰고 있는 거지. 정대만이 행복하지 않다고 하면. 뭘 어쩌려고?

그 사람이 선택한 사람이다. 당연히 괜찮은 사람이겠지. 나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되게.

그 생각을 끝으로 벌떡 일어났음. 쾨쾨한 냄새가 나는 휴지 무덤을 노려보다가 쓰레기봉투 안에 모조리 쑤셔 넣었음. 제 감정도 언젠가 정대만의 안에서 저렇게 버려지겠지 싶어서 씁쓸했음.

정대만은 가끔 북산고에 찾아왔음. 그를 봐서 기뻤지만 멀쩡한 척 가장하려고,

"대학생은 원래 그렇게 한가해요?"

하고 묻자, 발끈한 정대만의 얼굴이 꽤 봐줄 만했음. 정대만은 여전히 바보 같았고, 쉽게 화를 냈고, 그럼에도 다정했음.

이러고 있으니까 꼭 예전으로 돌아간 것 같네.

이 순간만큼은 그가 다른 남자의 애인도 아니고, 그냥 바보트리오 중에 한 명으로 느껴졌음.

"실은 나도 가끔은 아직 북산고 학생 같다."

정대만이 키득거리며 웃었음. 꼭 마음이 통한 것 같아서 기분이 묘했음.

오랜만에 만난 정대만이었지만, 만난다고 해서 딱히 특별한 일은 없었음. 오로지 농구뿐. 

그와 나 사이에 농구를 빼면 뭐가 남지?
아무것도 없잖아.

심장이 욱신거렸음. 정대만이 북산고에 찾아오지 않는다면 이대로 저와 정대만의 인연은 끝이라는 생각에 불안감이 엄습했음. 언제까지 정대만이 저와의 인연을 이어가고 싶을지 알 수 없는 일이었음. 애인도 있는 사람이 예전에 좋아했던 후배를 계속 찾아온다? 어떤 애인이 그걸 용납할 수 있을까. 정대만이 혹여 거짓말을 해서 애인의 화를 돋운다면, 이런 구실로라도 그를 만날 수 없게 되어버릴까 봐 두려웠음.

정대만은 여전히 누구보다 믿음직한 선배였음. 대학 안에서는 신입생이라는 이름으로 귀여움받을 정대만이 이곳에서는 선배의 모양새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 만족스러웠음. 할 수만 있다면 유급을 시켜서라도 곁에 두고 싶을 만큼. 물론 정대만은 칠색 팔색을 하겠지만. 정대만은 꼭 코치라도 된 것처럼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지도했음. 백호의 부상은 어떤지 꼼꼼히 확인했고, 태웅이와는 1on1, 중식이나 다른 녀석들은 슛폼을 봐줬음. 직접 시범을 보여준다며 3점슛을 쏘는 정대만은 지겹도록 봐왔음에도, 볼 때마다 가슴이 울렁거릴 정도로 아름다웠음.

"선배. 살아있어요?"

몸이 한 개로는 부족해 보이는 정대만에게 다가가 물을 내밀었음. 아, 땡큐. 정대만이 인사를 하며 물을 받았음. 그 짧은 순간에 닿은 손길이 떨어지는 게 못내 아쉬웠음. 정대만은 한참을 물을 꿀꺽꿀꺽 마시더니, 갑자기 아! 하고 소리쳤음.

"나 잠깐 부실 좀 갔다 올게."
"뭐 놓고 왔어요?"
"어어!"
"얼른 와요!"

정대만이 팔을 휘적휘적 흔들었음. 뭘 까먹었는지 부실로 급하게 뛰어가는 그를 지켜보면서, 같이 가겠다고 할 걸 그랬나 하고 후회했음. 그 핑계로 조금만 더 대화를 나눌 수 있다면 좋은 거고. 잠깐 고민하던 태섭이는 농구공을 내려놓고 부실로 향했음. 그리고 그곳에서 전혀 상상도 못 해본 모습의 정대만과 마주쳤음. 누군가의 라커룸에서 꺼낸 가쿠란을 얼굴에 파묻은 채 깊은숨을 들이쉬는 정대만을.

그 모습을 맞닥뜨리고 숨 쉬는 법을 잊어버린 사람처럼 굳어버린 태섭이겠지. 정대만이 있는 곳은 '송태섭' 이라는 이름 석 자가 새겨진 라커룸이었음. 라커룸은 활짝 열려있었고, 모든 물건이 좀 전에 자신이 정리해 놓은 대로 놓여있었음. 단 하나만 빼고. 

"....선배, 뭐해요?"

간신히 뱉은 말을 듣고 정대만은 그제야 제 존재를 깨달은 것처럼 보였음.

"....어?"

정대만의 손에서 툭 떨어진 무언가가 바닥을 뒹굴었음. 그건 분명 제 가쿠란이었음. 저게 왜 정대만의 손에 있지? 혼란스러워 하는 사이, 정대만은 가쿠란을 들어 올려 요란스럽게 킁킁댔음.

"..야, 이거 냄새 장난 아니다. 좀 깨끗하게 입고 다녀라. 내가 탈취제라도 사다 줘?"

정대만은 죄를 짓다 걸린 사람처럼 횡설수설했음. 너도 내가 깔끔떠는 거 알지 않냐. 가끔 이렇게 후배들 선배들 할 것 없이 옷 냄새를 점검하곤 한다. 보는 눈이 있어서 몰래 하곤 했는데 우연히 네가 본 거다. 네 반응을 봐라. 어떻게 내가 솔직히 말하겠냐. 그리고 딱히 죄지은 것도 아닌데 눈 좀 착하게 떠봐라. 눈에서 빔 나오겠다.

태섭이는 멍하니 그걸 듣고만 있겠지. 사실 그가 뭐라고 말하고 있는지 잘 들리지도 않았음. 정대만이 내 라커룸에서, 내 교복을 꺼내서, 내 냄새를 맡고 있었다고? 왜? 대체 왜 그런 짓을 했지?

"....지금 뭐 하는 거냐고 물었잖아요."
"......."
"..뭐 한 거냐고, 지금. 내 옷 들고."

재차 물었지만 정대만은 대답이 없었음. 입만 꾹 다문 채 이 상황이 눈앞에서 사라져 줬으면 하고 바라는 사람 같았음. 그의 입이 열린 건 한참이 지난 후였음. 꼭 금방에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벌게진 눈을 하고 원망 같은 말을 내뱉었음.

"....야, 그냥 모른 척 좀 해주면 어디 덧나냐?"
"정대만. 대답하라고."

하지만 태섭이도 물러날 생각따윈 없었음.

"...그래. 나 아직 너 못 잊었어. 이제 됐냐?"
"...선배, 애인도 있잖아요."
"...알아. 아는데... 내 맘대로 안 되는 걸 어떡하냐."
"......"
"..미안하다. 하루빨리 잊을 테니까 좀 봐줘라..."

결국 정대만이 먼저 고개를 돌렸음. 우는 얼굴을 감추기 위한 것 같았음.

"선배."
"......."

정대만은 다시 입을 다물었음. 고개를 떨구고 조용히 눈물만 흘리고 있는 모습이 퍽 애처로웠음.

"애인도 있는 주제에 후배 옷 냄새나 몰래 맡는 사람이랑..."
"......."

하지만 동시에 아랫도리가 묵직해지는 기분이 들었음.

"...애인도 있는 사람 생각하면서 딸치는 놈 중에 누가 더 나쁜 것 같아요?"

제 말에 드디어 정대만이 고개를 돌렸음.

"....뭐?"

정대만은 자신이 지금 무슨 말을 들었냐는 듯, 다소 멍청해 보이는 표정으로 되물었음.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된 얼굴이 우스꽝스러웠지만, 웃음은 나오지 않았음. 오히려 그 바보 같은 얼굴이 사랑스럽게 느껴졌음.

확 빼앗아 버리고 싶다.

충동적으로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음. 더는 이 사람을 상상 속에서만 안고 싶지는 않아졌으니까.





태섭대만